신낙균은 우리 민족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는 일제식민지 시대에 우리 근대화의 선각자로 한평생을 살다 가셨다. 선생은 1927년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일본의 동경사진전문학교에서 사진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시고 졸업하셨으며, 귀국하신 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적 사진교육 기관인 YMCA의 사진과 교수로 부임하여 근대 사진교육의 기초를 마련하셨다. 또한 사진 공교육을 위해 <사진학 개설>이라는 우리 최초의 사진학 저서를 출간하시어 사진의 학문적 체계를 정립하시기도 하였다.
신낙균을 구심점으로 하여 전개된 경성사진사협회의 활동은 예술사진운동으로 확산된다. 협회 결성의 동기는 친목도모와 권익 옹호에서 출발했지만 이 협회 회원인 영업사진사들은 구태의연한 사진관 사진의 틀에서 벗어나 사진의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찾아나가기 위한 연구에 주력했다. 한국 사진의 역사 속에서 1920-30년대의 예술사진운동은 초상사진 위주의 정형화된 사진 형식에서 탈피하여 사진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나가려 했던 최초의 본격적인 사진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신낙균의 역할은 매우 컸었다.
신낙균은 1934년 당시 선진 학문 분야였던 사진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사진 전문가로서 동아일보의 초빙에 의해 사진과장(오늘날의 사진부장)으로 입사하시어 포토저널리즘 분야의 이력을 시작하셨다. 당시의 사진기자들은 대부분 제판기술자들이 겸하고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동아일보의 신낙균 선생 초빙은 우리나라 신문사진의 질적 향상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로 평가되며, 한국인 전문가를 영입하여 민족정신에 투철한 수준 높은 언론을 지향하는 동아일보의 의지가 잘 엿보이는 일이라 하겠다.
한편 동아일보의 사진과장으로 재직하시면서 1936년에는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사진을 신문에 게재하면서 일장기를 말소하는 소위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을 주도하시어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과 민족정기를 수호하려는 기자 정신을 발휘하셨다. 이 일로 일본경찰에 연행되어 33일간의 모진 고문을 당하신 선생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결국 동아일보를 떠나고 언론계에서 영구히 추방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동아일보 또한 정간을 당하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 사진학계의 입장에서 보면 신낙균은 오늘의 사진학 혹은 사진교육의 뿌리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저술에서부터 사진학의 전개와 연구의 방향이 섰으며, 그에 의해 시작된 YMCA 사진과의 교육과정은 후일 <경성사진학강습원>으로 이어지고 오늘에 이른다. 신낙균의 동료 겸 제자로 사진 교육의 분야에서 같이 일했고 그의 지도로 사진교육자의 길로 들어서 강습원에서 대를 이어 교육을 담당한 박필호가 후일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의 전신이 되는 서라벌초급대학 사진과의 초창기 교육을 이끌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낙균의 교육 철학과 저술이 오늘의 한국사진에 미친 영향은 매우 지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작가 관련 도판 및 작품>

1936년 8월 26일자 2판 1면 1930년대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지면

신낙균, 무희 최승희, 젤라틴실버프린트, 146-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