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석의 사진살롱 32 – ‘노트리밍테’ 만들기와 의미

박주석의 사진살롱 32 – ‘노트리밍테’ 만들기와 의미

박주석의 사진살롱 32 – ‘노트리밍테’ 만들기와 의미
02/12/2020
/ 박주석

Henri Cartier-Bresson, Allée du Prado, Marseille, 1932

이미 사진의 전설로 남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1908~2004)이 1932년에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찍은 작품입니다. 물론 인화는 1950년대 넘어서 전문 프린터(다른 사람의 사진을 전문적으로 현상, 인화를 해주는 장인)였던 피에르 가스망(Pierre Gassmann, 1913~2004)이 했습니다. 전차 길과 나란히 뻗은 인도를 찍었고, 주인공은 망토를 걸친 중년의 신사이고, 인물의 뒤쪽으로 심어져 있는 가로수가 소실점을 따라 한 곳으로 시선을 모아주며, 그 자리에 인물의 얼굴이 겹쳐 있어서 관객의 시선을 장악하는 좋은 사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진에서 눈여겨 봐야할 정작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사진 전체 화면을 두르고 있는 검은 테입니다. 

이 검은 테두리를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노트리밍테’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콩글리시입니다. 트리밍을 하지 않은 풀 프레임 사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장치입니다. 흑백 필름으로 사진을 찍고 현상과 인화를 작가들이 직접 하던 1970~90년대에 꽤나 유행하던 인화 방식이었습니다. 보통 라이카나 니콘 같은 35mm 카메라 필름에 찍힌 풀사이즈 이미지를 트리밍(Trimming) 없이 그대로 인화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위해서 만든 인위적인 테두리입니다. 인화하는 과정에서 최고의 화면을 만들기 위해 주변부의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잘라내는 일을 당연하게 여긴 1950~60년대 사진에 대한 거부 또는 전복의 의미로 많이 사용했습니다.

Henri Cartier-Bresson, Allée du Prado, Marseille, 1932,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소장.

검은 테두리를 전체 화면에 두르는 ‘노트리밍테’를 만드는 인화방식을 처음 사용한 작가가 바로 앙리 카르테에-브레송이었습니다. 그가 1930~40년대 처음 사진 작업을 할 때는 이런 테두리가 없었습니다. 본인이 직접 인화를 하던 시기였습니다.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이 소장한 1932년의 빈티지 프린트가 있는데, 위의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검은 테두리가 없습니다. 그의 사진에 ‘노트리밍테’가 둘러지기 시작한 때는 대개 1950년대부터입니다. ‘결정적 순간’이라는 사진의 미학 정립과 신뢰할 수 있는 장인과의 만남이 계기였습니다.

카르테에-브레송은 1952년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이라는 이름의 영문판 사진집을 내면서, 책의 서문에 자신의 독자적 사진미학인 ‘결정적 순간’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이 글에 따르면 ‘결정적 순간’이란 “카메라의 프레임을 통해 사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화면이 만들어내는 광경과 찍는 사람 자신이 교묘히 일치하는 순간을 느끼게 되고, 바로 그 때 찍는 사람은 그저 직관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셔터를 누르게 되는 그런 순간”이라고 합니다. 즉 프레이밍(framming)을 하고 셔터를 누르는 그 자체가 사진의 핵심적 가치이기 때문에, 현상과 인화 등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상관없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미학을 정립하는 시기에 그는 운 좋게도 자신이 찍은 사진의 현상과 인화를 믿고 맡길 수 있는 피에르 가스망을 만났습니다. 자신은 촬영만 하고 현상과 인화 같은 후 작업은 그에게 맡겼습니다. 촬영 후의 나머지 과정은 과학적인 것이므로 기술 장인에게 맡겨 있는 그대로 프린트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수행할 적임자를 찾은 것입니다. 가스망은 1950년 1월 현상과 인화를 전문으로 해주는 “픽토(PICTO)”라는 이름의 랩(Lab)을 자기 아내와 함께 파리(Paris)에서 설립했습니다. 주 고객은 카르티에-브레송을 비롯한 초기 매그넘(MAGNUM) 회원들이었습니다. 마침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이를 가능한 빨리 언론사에 배포해서 사용하도록 해야 하는 뉴스에이전시의 특성 상 현상, 인화 전문 랩이 필요했습니다. 현재도 존재하는 전문 현상소 ‘픽토’와 ‘카르티에-브레송’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진에 ‘노트리밍테’가 사용된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다시 말하면 화면에 검은 테두리가 둘러진 카르테에-브레송의 사진은 가스망이 인화한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결정적 순간’의 미학을 구현하는 핵심 과정인 ‘프레이밍’을 핵심적 가치로 삼았기에 반드시 검은 테두리 즉 촬영당시의 프레이밍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테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인화를 하면서 ‘트리밍(Trimming)’을 하거나, 인화 후 사진의 일부를 커팅(cutting)하거나 하는 클로핑(Cropping) 작업은 자기 사진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스망은 그런 카르티에-브레송의 요구를 충실하게 수행했습니다. 

그럼 ‘노트리밍테’는 어떻게 만들까요. 의외로 간단합니다. 흑백사진을 확대 인화할 때 확대기를 사용합니다. 확대기의 헤드 부분 중간에는 필름을 끼워 넣은 캐리어가 있습니다. 이 캐리어에 필름을 넣고, 위에서 콘덴서를 통해 빛을 통과시켜 렌즈를 거치게 하면, 아래 부분에 확대한 이미지가 비치고, 그 자리에 인화지를 놓고 노광을 주는 과정이 있습니다. 35mm 확대기 캐리어의 홈은 필름의 풀사이즈 크기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 캐리어 홈의 테두리를 줄로 살살 깎아내어 홈의 크기가 필름 이미지의 사이즈보다 조금 크게 만듭니다. 그러면 필름 이미지 주변부의 투명 바탕도 같이 투과가 되고, 그 부분이 검은 테두리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화한 사진은 트리밍 없이 사진가가 찍었던 프레임 전체가 온전히 나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흔히 필름 풀(Film Full) 인화라고 말하는 상태입니다.

강운구, 황골, 마을3부작 시리즈 중에서, 1974

한국사진에서 1950~70년대 공모전 위주로 활동한 작가들은 인화하는 과정에서 트리밍을 하거나, 인화 후에 사진 자체를 잘라내는 클로핑이 가장 중요한 창작의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작품의 완성은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고, 아마추어 서클의 지도 선생의 기장 중요한 역할도 트리밍이나 클로핑을 해주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유명 작가는 사무실을 차려놓고 트리밍, 클로핑을 전문적으로 해주는 사업체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걸작주의’와 ‘공모전’ 중심의 사진문화에 저항하거나 구태를 극복하고자 했던, 1970년대 중반 등장한 신세대 작가들은 카르티에-브레송의 영향으로 ‘노트리밍테’를 적극 사용했습니다. 강운구 선생의 ‘마을삼부작’ 시리즈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사진은 찍는 그 자체에서 완성하는 예술’이라는 현대사진의 한 미학을 수용한 결과였습니다.

지금의 디지털 시대에는 의미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노트리밍테’의 미학을 바탕으로 찍었던 사진은 지금 다시 인화를 해도 다시 ‘노트리밍테’를 만드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

박주석의 사진살롱 31 – 코다크롬과 필름현상

박주석의 사진살롱 31 – 코다크롬과 필름현상

박주석의 사진살롱 31 – 코다크롬과 필름현상
01/30/2020
/ 박주석

Steve McCurry, Afghan Girl, at Nasir Bagh refugee camp near Peshawar, Pakistan, 1984.

이 사진은 아마 20세기 후반 이후 세계에서 제일 많은 사람들이 본 유명한 이미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매그넘>의 회원이자 우리 시대 최고의 포토저널리스트로 명성이 자자한 스티브 맥커리(Steve McCurry)의 <아프칸 소녀>입니다. 『내셔널 지오그라피』의 표지 사진으로 실려 유명해졌습니다. 12살의 난민 소녀를 찍은 사진인데, 그간 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우수에 찬 표정이 소녀 같지가 않습니다. 특히 소녀의 녹색 눈동자가 그런 비애를 더 느끼게 합니다. 동시에 선명하게 재현한 컬러사진의 힘을 깨닫도록 만듭니다.

이 사진 역시 한국을 처음 컬러로 기록한 정남용 선생의 경우처럼 컬러슬라이드 필름인 코다크롬(kodachrome)으로 찍었습니다. 소녀의 특이한 녹색 눈동자는 코다크롬 특유의 색 재현력에 힘입어 선명하면서도 멜랑콜릭한 분위기를 자아내 사진의 주목도를 높이는 역할을 합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눈동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코닥(Kodak)사는 2009년 코다크롬의 단종을 선언하고, 2010년 7월 생산을 중단할 때, 마지막으로 생산한 한 롤의 코다크롬 필름을 스티브 맥커리에게 헌정했습니다. 스티브는 이 필름을 갖고 30컷 정도의 완성한 사진을 찍었고, 이 사진들로 전시도 여러 차례 열었습니다. 평생의 거의 모든 사진작업을 코다크롬과 함께 해준 작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일 것입니다.

스티브가 사용했던 마지막 코다크롬은 36컷용이었고, 이 필름을 카메라에 장착하고 거의 1년에 걸쳐 전 세계를 다니며 필요한 사진을 찍었다고 합니다. 한 컷, 한 컷 신중하게 찍었겠지요. 뉴욕과 인도, 터키 등 자신이 주로 활동했던 나라들을 다녔고 필요한 사진을 찍었습니다. 뉴욕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도 찍었고,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폴 사이먼(Paul Simon)의 사진도 찍었습니다. 마지막 컷은 뉴욕에서 자신의 자화상을 찍었다고 합니다. 꽤 귀여운 데가 있습니다. 실제 만나 봐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필름의 현상은 마지막까지 코다크롬 현상 시스템을 유지한 캔자스시티(Kansas City)의 현상소에서 했는데, 자신이 직접 가서 현상을 맡겼다고 합니다. 아주 근사한 장례식이었습니다. 

폴 사이먼(Paul Simon)을 찍은 이유는 그가 발표한 노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폴의 인기곡 중에는 <Kodachrome>이란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1973년에 발표했고, 발매 당시 ‘빌보드차트’에서 1위를 기록한 대중적인 히트곡입니다. 노래 제목 자체가 ‘코다크롬’이니 스티브가 마지막 필름으로 꼭 찍어야만 했던 가수였습니다. 노래 가사 중 한 부분을 번역문과 같이 소개합니다. 

“Kodachrome / They give us those nice bright colors / They give us the greens of summers / Makes you think all the world’s a sunny day / I got a Nikon camera / I love to take a photograph / So mama don’t take my Kodachrome away”

“코다크롬 / 밝고 나이스한 색을 보여주네 / 여름의 푸름을 보여주네 / 온 세상이 화창한 것만 같아 / 나는 니콘 카메라를 갖고 있어 / 사진 찍기를 무척 좋아해 / 그러니 엄마, 내 코다크롬을 빼앗지 마세요.”

디지털 사진이 없던 아날로그 이미지 시대에, 코다크롬의 컬러가 보여준 세상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코다크롬의 색(color)과 톤(tone)의 재현력과 컬러발란스(color balance)가 뛰어 났습니다. 1935년도에 필름의 역사에서 처음 개발하고 발매한 컬러슬라이드 필름인데도 말입니다.

코다크롬은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사진 기술력의 예기치 못한 발전”의 결과라는 평을 받습니다. 기술이란 원래 단계적으로 점점 발전해가는 것이 정상인데, 코다크롬은 정말 예외적으로 사진 재현력의 최고 수준을 컬러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성취했습니다. 코다크롬의 발매 다음 해인 1936년 독일의 아그파(Agfa)사가 아그파컬러-누(Agfacolor-Neu)라는 컬러슬라이드 필름을 내놓았고, 코닥 역시도 1942년에 코다컬러(Kodacolor)라는 컬러네거티브 필름을, 1946년에는 엑타크롬(Ektachrome)이란 이름의 또 다른 컬러슬라이드 필름을 출시했습니다. 참고로 코닥은 트랜스퍼런시(Transparency) 즉 컬러슬라이드 필름 이름에는 ‘—chrome’을, 네거티브 필름에는 ‘—color’를 붙였습니다. 그 이후 많은 일본 업체들도 줄줄이 컬러슬라이더, 컬러네거티브를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필름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그 어떤 필름도 코다크롬의 품질과 명성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필름에서 컬러를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 때문입니다. 코다크롬은 색의 감법(減法) 원리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컬러 필름입니다. 이전의 컬러사진은 가법(加法)의 원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획기적이었고, 그 이후 모든 컬러사진은 코다크롬과 같은 감법(減法) 원리로 만들고, 크로모제닉(Chromogenic) 현상 방식으로 상을 재현합니다. 은(Silver)의 감광성으로 형성한 이미지에 색 형성제(color former)인 염료(Dye) 즉 컬러커플러(Color Coupler)를 입혀 색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 컬러커플러를 현상하는 과정 중 외부에서 공급하는 방식 즉 ‘외형발색방식’이 있고, 처음부터 필름이나 인화지의 유제 자체에 내장하는 방식 즉 ‘내형발색방식’이 있습니다. 코다크롬은 ‘K-14’로 불리는 외형발색의 현상방식을 사용했고, 그 외의 모든 컬러사진은 ‘E-6’라 불리는 내형발색의 방식을 썼습니다. 따라서 이미지의 재현력을 결정하는 원래 유제의 은 분포 밀도가 코다크롬이 다른 시스템에 비해 월등히 높을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화질이 뛰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는 현상의 과정이 그만큼 까다롭고 정교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시설과 공정 또한 굉장히 복잡하기 때문에 비용 또한 많이 듭니다. 필름의 현상 비용도 비쌀 수밖에 없었겠지요. 따라서 코닥은 일정한 시장의 규모를 갖추지 않은 나라에는 코다크롬 전용 현상소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코다크롬이 크게 보급되지 않은 이유입니다. 현상 시설이 없으니 코다크롬으로 사진을 찍으면 필름 현상을 일본이나 미국 등 시설이 있는 곳에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화질이나 색감은 떨어지지만 값이 싸고 국내에서 현상을 맡기기 쉬운 ‘엑타크롬’이나 ‘후지크롬’ 같은 내형발색 방식의 컬러슬라이드 필름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사족입니다만, 우리나라에서도 코다크롬 현상이 가능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1988년 서울올림픽 때입니다. 올림픽 대회 취재를 위해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진가들과 사진기자들이 들어왔고, 이들이 주로 코다크롬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영향력 있는 서방 언론인들에게 현상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올림픽이 끝나고 얼마 있지 않다가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시장이 없어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서였다고 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당시 우리나라 사진기자들이나 독자들, 사진가들과 관객들의 안목이 외형발색 방식의 코다크롬과 내형발색 방식의 엑타크롬, 후지크롬 등의 화질 차이를 구별할 정도로 섬세하고 세련되지 못했었다는 사실의 방증입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