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1 – 포천 화적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1 – 포천 화적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1 – 포천 화적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 번째
03/0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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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적연(禾積淵)은 포천의 제일경으로,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96호로 지정된 곳이다.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의 상류, 화산지대가 이룬 국가지질공원 계곡에 있다. S자로 굽은 강변은 현무암 주상절리의 벼랑이 협곡을 이루어 물이 깊다. 강물에 놓인 크고 작은 화강암 덩어리 기암(奇巖)들은 오랜 세월 빠른 물살에 씻겨 미끈하고 아름다운 형상을 이룬다. 이런 풍광의 중심인 커다란 암반이 볏단을 쌓은 ‘화적(禾積)’ 같다는 것이고, 자갈과 모래사장에 어우러진 짙푸른 못이 ‘연(淵)’이다.

화적연은 지난번 소개한 포천시 영평면의 사암서원과 창옥병, 금수정을 들른 뒤 발길 닿는 명소이다. 사암 박순, 이경석, 이민구, 허목, 박세당, 박태보, 이서구, 이항로, 최익현 등 조선 시대에는 많은 명사와 문인들이 화적연에 유람와 자연 풍류를 즐겼고, 신비로운 경치를 노래했다. 또 그런 만큼 여러 화가가 그림을 남겼다. 더구나 화적연은 금수정에 이어서 금강산 여정의 길목이어서 금강산 그리기의 워밍업하기 좋은 경치였을 법하다. 화적연을 화폭에 담은 화가는 <금수정(金水亭)>을 그린 정수영과 김하종 외에도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겸재 정선, 문인화가 단릉 이윤영, 학산 윤제홍 등이다.

 

조선 후기 화가, 문인들이 즐겨 찾는 명승

나도 근래 화적연을 여러 번 방문했다. 작년만 해도 3월, 9월, 12월 세 번이나 들렀다. 자주 찾은 이유는 조선 화가들이 그린 시점에 서보기 위해서였다. 2000년 초까지는 군부대 주둔지여서 그 지점에 접근하기 불가능했다. 지금은 캠핑장이 들어설 정도로 개방되어 있지만, 물길이 깊고 배가 없어 자유로이 강 건너 왕래할 수 없는 형편이다. 올겨울 오래간만에 한강이 얼 정도여서 화적암까지 얼음판 위로 갈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작년 12월 29일 오후에 찾았다. 개울이 깊고 S자형 급류여서 강변 가장자리만 얼었다. 또 못가나 싶었다.

그런데 새벽 금수정을 함께 답사했던 티제이 킴 대표가 지피에스를 찍고 이동해보자는 제안을 해왔다. 내비게이션의 지시에 따라 5~6km를 빙 돌아 영북면 자일리 들판을 질러 언덕을 넘으니, 바로 눈앞에 있던 건너편이었다. 옛 화가들과 문인들이 즐겼던 공간에 오게 됐고, 얼추 그들의 시점에 서니 반가웠다. 커다란 암반 화적암에서 사진을 찍고 여러 점 사생했다. (도 1, 7) 작년 봄부터 열 점 넘게 스케치했는데, 처음으로 옛 화가의 눈을 따라 그려본 셈이다.

현장에서 사생하니, 옛 화가들의 부정확 표현이나 풍경 현장을 재구성하는 방식이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몸을 엎드린 채 고개를 쳐든 듯한 화적암을 실물 모양과 달리 ‘화적’의 낟가리를 쌓은 이미지로 우뚝하게 그렸다. (도 2) 그 좌우에는 겸재의 개성인 수직준법(垂直皴法)과 적묵법(積墨法)으로 처리한 벼랑이 배치되어 있는데, 실제 현장과 비교하면 벼랑은 화적암 앞뒤에 있다. (도 7, 9) 이러한 주상절리의 묘사방식은 겸재의 금강산 화법과도 연계된다.

학산 윤제홍(鶴山 尹濟弘, 1764~?)도 적묵법 묘사가 거칠기는 하지만, 겸재와 유사한 형태와 구성을 보여준다. (도 3) 학산은 심지어 화적암 꼭대기에 나무가 자란 모습으로 심하게 왜곡하기도 했다. 두 그림의 변형은 직접 현장에서 그렸다기보다 화실에 와서 풍경을 생각하며 그린 탓으로, 사람이 지닌 기억력의 한계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태호, 「實景에서 그리기와 記憶으로 그리기」-朝鮮後期 眞景山水畵의 視方式과 畵角을 중심으로, 『미술사연구』 257, 한국미술사학회, 2008. ; 이태호,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마로니에북스, 2015.) 

이처럼 과장이나 변형을 심하게 하는 정선이나 윤제홍은 물론이려니와, 사생화에 해당하는 문인화가인 단릉 이윤영이나 지우재 정수영, 화원인 유당 김하종의 그림도 눈에 든 대로 화적연 실경을 빼닮게 그리지 않았다. 우선 부감한 듯한 시점의 상상이 그러하다. 또 그림에 등장한 좌우의 벼랑은 실제 현장에서 보면, 앞서 살펴본 것처럼 중앙 큰 바위 화적암의 앞뒤인 남서쪽과 북동쪽에 위치한다. (도 7, 9)

화적연의 첫 사생화이자 비교적 실경을 비슷하게 해석한 작품은 단릉 이윤영(丹陵 李胤永, 1714~1759)의 부채그림 선면화(扇面畵)이다. (도 4) 부채 상단에는 ‘서울에서 화적연까지 백여리’(溪石名禾積 距京百餘里)라고 써놓았다. 이 선면화도 사생 그림임에도 실경과 상당히 차이 난다. 그림에는 화적암과 강변을 강물로 분리해 놓았는데, 실제로는 오른편 강변 너럭바위에 화적암이 붙어 있다. 또 부실부실하게 쓴, 단릉의 엷은 먹 선묘도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능호관 이인상(凌壺觀 李麟祥, 1710~1760)의 갈필(渴筆) 화풍을 따랐기에, 육중한 암반의 양감을 내지 못한 상태이다. 이 물기 적은 능호관식 선묘 피마준법(皮麻皴法)은 지우재도 배웠다.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은 배치 방식에서 단릉을 따랐다. 사선으로 화적암을 오른쪽에 치우쳐 놓은 점이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단릉이 근경 몇 그루 소나무를 화면 왼쪽에 둔 데 비해, 지우재는 오른쪽에 그렸다. 지우재가 화적암을 오른쪽 강변 바위에 연결해 그린 것은 실경에 근사한 편이다. (도 5, 7) 뒤쪽의 수직 벼랑을 아예 사선의 큰 바위와 나란히 왼편을 채워 놓은 구성법은 겸재를 배운 결과로 여겨진다. 바위의 모습은 지우재가 비교적 세세한 선묘로 그린 데 비해, 실제 대상과 닮기는 단릉의 그것이 훨씬 낫다. 이 대목에서도 지우재의 묘사 기량이 미숙한, 어눌한 표현력 수준이 여실히 확인된다.

유당 김하종(蕤堂 金夏鐘, 1793~?)의 <화적연도>는 <금수정도>와 마찬가지로 지우재의 구성을 따랐다. 대신에 짧게 반복한 선묘로 물살을 표현한 단원식 수파묘(水波描) 화풍이 화원 솜씨답게 생동감 난다. (도 6)

 

기우제를 지내던 큰 바위 화적암의 성혈 자국

한탄강의 최고 절경으로 꼽히는, 화적연의 중심 ‘화적’ 바위는 포천시 영북면 자일리에 위치한다. 그 건너 군부대가 철거된 뒤, 지금 관광지로 개발한 쪽의 모래사장 강변은 포천시 관인면 사정리이다. 지난 호에 살펴본 금수정, 창옥병 등과 더불어 포천시의 영평8경(영북면 자일리 禾積淵, 창수면 주원리 蒼玉屛, 창수면 오가리 金水亭, 영중면 양문리 樂歸亭, 영중면 금주리 白鷺洲, 영중면 거사리 靑鶴洞, 일동면 수입리 臥龍巖, 이동면 도평리 仙遊潭)에 해당하며, 제1경이다.

13m의 높이에 20여m 길이의 화적암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볏가리’ 바위라고 일컬어져 오기도 했다. 그런데 덩어리 형태로 보아 볏단 쌓은 낟가리로 보기에는 좀 그렇다. 첫인상은 바위의 미끈한 질감과 함께 물개를 떠올렸다. (도 7, 9) 옛 지리지나 사람들도 이 화적암을 다르게 부르기도 해왔던 것 같다. 거북이 형상의 구암(龜巖), 머리에 두 뿔을 달고 강물에서 솟으려는 자태의 신룡(神龍) 바위, 이들을 조합한 구룡(龜龍) 바위 등이다. 또 바위 질감이 젖색이어서 유석향(乳石鄕)이라 불렸던 모양이고, 석영이 출토되었던 장소여서 지어진 이름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최동원, 「조선 후기 경기 북부 경승지의 현황과 인식 변화」, 『한국학 논총』 48, 2017.)

인근 마을 농부가 화적연에서 심각한 3년 가뭄이 들자 하늘을 원망하는 탄식을 쏟아내자 강물에서 용이 하늘로 치솟았고, 비가 쏟아졌다는 전설도 전한다. 이를 계기로 풍년이 들었고, 그 이후 기우제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실제 숙종 때 이곳에서 국가행사로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 확인되기도 한다. (『숙종실록』 39권, 30년 6월 26일 갑오)

이번 기회에 강 건너편으로 화적암 큰 바위에 오르니 젖색 화강암 질감이 멀리서 본 느낌대로 미끈하고 부드러웠다. 고개를 쳐든 듯한 바위 정상에는 3~5cm가량의 둥근 성혈(性穴) 자국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거북이 형상으로 치자면, 목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3개의 성혈이 또렷했다. (도 8) 바위에 내는 성혈은 우리 민속신앙에서 유감주술(類感呪術) 행위의 주요 형식이다. 구멍 내기를 성행위와 유사하게 인식해, 다산과 풍년을 기원했던 전통적인 신앙형태의 하나이다. 성혈은 지역이나 마을에서 신성(神性)이 부여된 자연 바위는 물론이려니와 고인돌, 심지어 불탑이나 석불에도 등장한다. 화적연 큰 바위가 몸에 지닌 성혈 자국만큼 오랫동안 신령스러운 공간이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0 – 포천 금수정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아홉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0 – 포천 금수정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아홉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0 – 포천 금수정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아홉 번째
01/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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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21년 새해 첫날에 포천 영평천의 명승인 <금수정 일출>을 그렸다. (도 1) 금수정(金水亭)이 안동김씨 고택지에 세워져 ‘김씨 집안의 물가 정자’쯤으로 여겼는데, 멀리 관음산 능선으로 솟는 아침 해돋이가 장관이다. 영평천이 물안개와 더불어 누런 금색으로 물드니, ‘金水亭’이라 이를 만하다. 벌써 조선 후기 문인으로 안산의 15학사로 꼽히던 저암 신택권(樗庵 申宅權, 18세기 후반)이 일출 광경을 보았는지, 금수정을 읊은 7언시에 ‘금파(金派)’, 곧 금물결이라고 표현하였다. 

꽃 둑에 비 지나가니 푸른 풀 무성한데 芳堤過雨綠蕪平

난간 아래 금물결이 아주 맑다네. 攔下金派徹底明

다소의 긴 여정 왕래하는 나그네 多少長程來去客

내달리다 느린 행보 누구 위한 행차인가! 橫馳緩踏爲誰行

(申宅權, 「金水亭 次揚蓬萊尊巖韻」, 『국역 저암만고(樗庵漫稿)』上, 양평문화사, 2016)

 

금수정에서 새해 첫날 영평천 금색 물결을 그리고 

코로나로 전국의 새해 해돋이 명소 탐방이 막혀있던 터에, 동쪽을 향한 금수정이 떠올라 불쑥 다시 찾았다. 다섯 번째쯤 되는가보다. 이곳까지 차를 몰아준 티메카코리아의 김태진 대표 덕분에, 인적이 없는 새벽 영평천 금물과 밝아오는 강변 평야의 여명을 오롯이 즐겼다. 실제 김대표와 이 풍광을 본 날은 작년 말 12월 30일~31일 일박이일로 포천을 답사한, 31일이다. 마침 30일이 음력 11월 16일이었다. 보름 다음날인 기망(旣望) 월출(月出)을 영평천에서 만났다. 본디 보름보다 기망 달이 더 가득 찬다. 31일 아침 둥근 달이 금수정 서편 창옥병과 보장산 능선 너머로 지고 있어 냉큼 사생해보았다. (도 2) 노랬던 새벽달이 산 능선 가까이 내려오자, 해 뜨며 흰 달로 변해 겨울 추위만큼 상큼하게 졌다.

금수정은 평야 지대를 흐르는 강물 굽이의 벼랑에 세워져 있다. 본래 이곳 지명인 ‘우두연(牛頭淵)’에 따라 소머리 정자, ‘우두정’이었다고 전한다. 지난번 살펴본 창옥병에서 동으로 2km가량에 위치한다. 옛사람들은 ‘3리 떨어져 있다’라고 했다. 현 지명은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이다. (이원호 외, 「포천 금수정 일원의 입지와 공간구성에 관한 연구」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24-3, 한국전통조경학회, 2006. ; 최동원, 「조선 후기 경기 북부 경승지의 현황과 인식 변화」, 『한국학 논총』 48, 2017.) 

금수정 입구에는 안동김씨 고택의 연원이 되는 고려 후기 문온공 김구용(文溫公 金九容, 1338~1384)의 묘단(墓壇)이 가까이 있고, 금수정 마당에는 커다란 시비가 세워져 있다. 여기에는 김구용의 아버지 상락군 김묘(上洛君 金昴), 할아버지 영창군 김승택(永昌君 金承澤)의 묘단도 함께한다. 모두 근래 새로 복원해 현창한 설치들이다. 이들 위에는 ‘산신제단(山神祭壇)’이 모셔지고, 제단 언덕에서 창옥병으로 지는 기망 달을 보았다. 또 이 집안의 사위였던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 1517-1584)과 관련된 유적지여서, 김구용 시비 옆에는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는… ” 유명한 시조의 시비도 자리한다.

정자 아래 벼랑에 양사언이 썼다는 해서체 바위글씨 ‘금수정(金水亭)’(도 3)이 전한다. 양사언의 ‘경도(瓊島)’(도 4)와 <증금옹시(贈琴翁詩)>(도 5) 초서체 바위글씨도 강물 바위에 있다. 한국서예사에서 가장 초서(草書)를 잘 쓴 솜씨답게 그 흘림이 유려하다. 금수정 아래 강변 암벽에는 누구의 서체인지 개성이 뚜렷하지 않은 ‘무릉(武陵)’이라는 행서체 바위글씨도 확인된다. 무릉 바위에서 영평천과 들, 그리고 북쪽으로 금수정의 병풍 격인 불무산이 어울린 무릉도원 풍경을 옛 산수화의 편파구도(偏頗構圖) 방식으로 그려보았다. (도 6) 

금수정은 지난 호에 살펴보았던 <사암서원>의 사암 박순(思庵 朴淳, 1523~1589)이 강변로를 따라 즐겨 찾던 곳이기도 하다. 영평 8경 중 으뜸으로 꼽히며, 조선 시대 경기 북부지역 최고 풍류 공간으로 사랑을 받았다. 특히 금강산을 여행할 때, 철원·금화로 진입하는 길목이자 쉬어가는 장소로 유명했다. 양사언, 박순, 이덕형, 이민구, 신흠, 박세당, 김창협, 정약용 등 유명 문인 묵객들이 찾아 금수정 시문을 남겼다. 당시 한양에서 이틀 정도의 걸리는 가까운 명승지로, 지금은 서울 북부지역에서 차로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근거리이다.

 

정수영의 <금수정> 그림

지우재 정수영은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 1797년 가을 <백운담(白雲潭)>과 <사암서원(思庵書院)>(지난 호에 소개)에 이어 남쪽 영평천 굽이, 바위 언덕의 <금수정>을 그렸다. 어리숙하고 가벼운, 갈필 수묵 선묘와 연한 담채의 정수영다운 개성적 남종산수화풍 그림이다. 화면 왼편 강 건너 벼랑언덕에 ‘창옥병(蒼玉屛)’이라 썼고, 아래 바위에 술그릇이라는 뜻의 ‘준암(罇巖)’이라 써넣었다. (도 7) ‘금수정’ 제목 왼편에는 강관이 아래의 제발을 남겼다. 

“금수정은 예전에 듣기로 평평하게 흐르는 곳에 점지했다는데, 지금 보니 암벽 위에 있다. 그린 자의 오류가 아니라면, 필시 이 모습이 명백할 게다. (金水亭曾聞占地平衍 今却在巖壁上 若非畵者之誤 必是此說之爽)”

현장을 가보지 못한 강관이 말로만 들었던 얘기도 맞다. 금수정에서 관망하는 영평천 주변의 평야가 상당히 넓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수영은 금수정 동쪽 강 건너에서 그렸기에 벼랑 위의 금수정이 되었다. 정수영이 금수정을 바라본 위치에 서니, 벼랑언덕이 좌우로 상당히 퍼져 길다. (도 8) 정수영은 이 바위 언덕을 좁혀 표현한 것이다. 금수정이 선 벼랑을 전통 산수화 방식으로 변화시켰으며, 높은 느낌이 들도록 과장했다.

강 왼편 언덕에 ‘창옥병’이라 지명을 써넣은 것은 큰 오류이다. 앞서 산신제단에서 내가 그린 <창옥병으로 기망 달 지고>(도 2)처럼, 창옥병은 금수정 북서쪽에 위치하니 정수영이 금수정을 그린 장소에서는 그림처럼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도 정수영의 부정확한 묘사력이 확인된다. 경쾌한 미점(米點)의 후경 산세는 종현산(해발 584m) 줄기인 셈이다.

그림의 왼편 아래 바위에 써넣은 ‘준암(罇巖)’이 눈에 띈다.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아닐까 싶어 이곳을 답사할 때마다 유심히 살피곤 했었다. 이번에 강이 꽁꽁 얼어 강 가운데의 바위들을 모두 조사할 수 있었는데, 결국 ‘준암(罇巖)’이라는 글씨는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옥 같은 섬이라는 뜻의 ‘경도(瓊島)’ 바위를 지칭한 것으로, 정수영이 붙인 듯하다. (도 9)

양사언의 초서 ‘경도(瓊島)’ 바위 위에 오르니, 글씨 왼편으로 술그릇 같은 오목 공간이 존재한다. (도 4) 술 담을 공간에는 얼음이 꽉 얼어 있었다. ‘준암(罇巖)’임을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경도는 지난 호에 소개한 <사암서원> 아래 백운계 개울 가운데 ‘와준(窪尊)’의 술통 바위와 마찬가지로 조선 문인들이 자연에서 술을 어떻게 즐겼는지, 그 풍류 문화를 상상하게 해준다. 

정수영의 <금수정>과 유사한 19세기 화원 김하종(金夏鍾, 1793~?)의 <금수정> 작품도 흥미롭다. (도 10) 김하종은 김홍도의 선배로 교분이 도타웠던 김응환의 셋째 아들이고, 김홍도 화풍을 따른 사실적인 금강산 사생화로 유명하다. 그런데 김하종은 금수정을 정수영식으로 포착했다. 김하종의 <금수정>은 정수영 그림보다 회화적인 짜임새나 묘사 기량이 낫지만, 정수영의 구도를 참작한 점이 눈길을 끈다. 두 화가 사이에 60년 넘게 시대가 흘렀으면서도, 조선 사회가 크게 변하지 않은 양상을 읽게 해주기에 그렇다.

이 <금수정>은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1865년 가을 금강산을 여행하고 쓴 ‘풍악유기(楓嶽遊記)’와 기행 시문에 김하종이 58점의 금강산 명승도를 첨가해 4권으로 꾸민, 《풍악권》의 도입부에 포함된 그림이다. 이유원은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고, 조선 말 제물포조약에 참여해 외교관으로 활약한 문신이자 개화파 인사이다. 《풍악권》은 19세기에 유행한 금강산 시화첩으로 손꼽히며, 내가 1999년 일민미술관의 금강산도 기획전에 객원 큐레이터로 참여해 발굴한 것이다. (이태호, 「일만이천봉에 서린 꿈 – 금강산의 문화와 예술 300년」, 『몽유금강 – 그림으로 보는 금강산 300년』, 일민미술관, 1999.) 

정수영은 <금수정>에서 북쪽으로 발길을 옮겨 포천 명승 <화적연(禾積淵)>을 그렸다. 물론 김하종도 따라 그렸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9 – 포천 사암서원과 창옥병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여덟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9 – 포천 사암서원과 창옥병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여덟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9 – 포천 사암서원과 창옥병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여덟 번째
12/16/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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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재 정수영은 <백운담(白雲潭)> 가을 그림에 연이어 바로 그 언덕의 ‘사암서원’과 오른편의 ‘창옥병입구’를 그렸다. (《漢·臨江名勝圖卷》,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사암서원과 창옥병>은 화면 왼편에 ‘사암서원(思庵書院)’을 마을과 함께 사선 구도로 배치하고, 그 오른편에 ‘창옥병초입(蒼玉屛初入)’이라 쓰고 주변 지형보다 높게 강조한 바위벼랑을 그려 넣었다. (도 1) 오른쪽 아래 버드나무와 연결된 왼쪽 창옥병의 배열 상태와 서원 위로 펼쳐진 산세를 볼 때, 이 현장은 강 건너에서 확인된다. (도 2)

창옥병은 또 1917년 조선총독부가 측량한 포천 지도에 영평천이 기역 자로 꺾이는 북쪽으로 정수영 그림의 창옥병초입이라 쓴 위치에 표시되어 있다. (최동원, 「조선 후기 경기 북부 경승지의 현황과 인식 변화-영평 8경을 중심으로」, 『한국학논총』 48, 2017.) 정수영이 그렸을 법한 이 위치에서, 나도 서원과 창옥병 전경을 답사할 때마다 사생하곤 했다.

서원의 배경 산 능선은 종현산과 개미산, 강 건너 보장산쯤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수영이 풍경을 정확히 그리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터라 단언하기 어렵다. 지난 11월에 보장산의 남쪽 강기슭 거대하게 병풍을 친듯한 창옥병(蒼玉屛)을 정면에서 보고, 30~40미터 높이의 그 웅장한 바위벼랑의 맛을 살려 스케치해 보았다. (도 3) 1931년에 뚫었다는 옥병굴이 동서를 오가는 길이었고, 강을 건너는 옛 다리에 지금은 새 다리가 놓여 철원으로 고속화도로가 조성되었다.

그림의 사암서원은 민가 방식의 대문에 크고 작은 팔작지붕 네 채로 구성되었다. 홍살문을 전면에 세우고, 숭현각을 중심으로 꾸민 1980년의 복원 모습과 다른 편이다. (도 4) 강당인 전교당을 중심으로 기숙 공간 동재와 서재, 도서관 격인 광명실, 장판각, 사당 등 명현을 기리며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사설 교육기관으로서 갖추는 원래의 서원 구성과도 어그러지게 그려 넣은 터라, 정수영의 부정확한 묘사력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이 서원은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영평천변에 있다. 본디 옥병서원이라는 이름처럼 옛 지명은 ‘옥병리’라 부르기도 했으며, 개울이 굽이치며 여울지고 바위벼랑이 어울려 있는 아름다운 풍광 ‘백운계’에 자리를 잡은 서원이다. 지난번에 소개한 바와 같이 정수영이 옥병서원을 ‘사암서원’으로 표기한 것이 각별하다. 선조 시절 사암 박순(思庵 朴淳, 1523~1589)에 대한 존숭을 더욱 강조하고 기리기 위함일 터이다.

 

옥병서원을 사암서원으로 표기하다

사암 박순(思菴 朴淳, 1523~1589)은 조선 중기의 문인 관료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충주(忠州)이고, 자는 화숙(和叔)이다. 호는 사암(思菴) 외에도 청하자(靑霞子)라 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아버지는 한성부좌윤을 지낸 육봉 박우(六峰 朴祐, 1476~1547)이고, 기묘사화의 명현(名賢)으로 꼽히는 문장가 눌재 박상((訥齋 朴祥, 1474~1530)이 큰아버지이다. 박순의 집안은 호서지역에서 광주(光州)·나주(羅州) 등으로 처향(妻鄕)을 따라 호남에 터를 잡았다. 박순은 나주에서 태어났고,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광주에서 자랐다고 한다.

박순은 31세(1553년)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응교, 한산군수, 좌승지, 이조참의, 대사헌,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우의정 시절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1579년)까지 올랐으며, 서인의 영수로 지목되고 붕당정치에 휘말리자 벼슬을 버렸다. 한강 용호(龍湖)에 은거했다가, 64세(1586년) 이후 영평(永平)의 백운계(白雲溪)에 집을 짓고 술과 시로 세월을 풍류하다 67세로 죽었다.

호남의 거유 고봉 기대승과 교유했으며, 이율곡과 논쟁은 서인 계열이면서 또 다른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개성유수(開城留守)였던 아버지를 따라 그곳에서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1489~1546)에게 수학했던 점에서 그 차이를 찾는다.

또 조선의 ‘두보(杜甫)’라 일컬어질 정도로 당시(唐詩) 시풍을 선호했다. 송시(宋詩)를 따르던 성리학적 엄정한 분위기에서 감성적인 당풍을 유행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박순은 “문장은 반고·사마천·한유·유종원 등과 더불어 이백·두보를 근본으로 하고, 『소학』·『심경』·『근사록』을 학문의 근원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했다. 박순의 문집인 『사암집(思菴集)』의 70% 이상이 시로 채워졌으며, 창옥병과 백운계는 사암 박순 시문학의 원천이었을 법하다.

박순(朴淳)이 말년 여생을 포천 영평천 명승에서 지내고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묘를 썼다. 우암 송시열이 비명(碑銘)을 지은 신도비(神道碑)는 한참 후에 세웠다. (도 5) 개국 548년 기유(己酉, 1909) 5월에 세운 것으로, 전서는 박순의 10대 외후손(外後孫)인 이승회(李承會)가 쓰고 비명은 11대 외후손인 이최수(李㝡秀)가 썼다.

이 신도비명에는 ‘영평 백운산 시내와 못이 아름다워, 사암 공이 이내 거처를 마련했다. 속세에서 벗어나 세상일을 거론하지 않고 매일 시골 사람들이나 들 노인과 더불어 한가로이 세월을 보냈다. … 흥취가 일면, 소요하거나 금강산을 비롯해 여러 산을 유람하였다.’라며 박순이 이곳에서 즐긴 안빈락도(安貧樂道)의 말년 삶을 밝혀 놓았다. 여기서 표기한 ‘백운산’은 백운계와 연계해 서원의 산언덕을 지칭하는 듯한데, 현재 이곳 지명으로 쓰이지 않는다.

청렴하고도 강직하였던 박순의 덕망을 현창하고 깊은 학문을 기리며, 그 후예들이 1649년(인조 27)에 서원을 마련했다. 후에 이의건과 김수항을 추가로 배향하였고, 숙종 39년(1713)에 ‘옥병서원(玉屛書院)’으로 사액(賜額)되었다. 동은 이의건(峒隱 李義健, 1533~1621)은 세종의 다섯째인 광평대군의 5대손으로, 도연명에 비유되던 문사였다. 이에 비해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 1629~1689)은 숙종 이후 서인-노론 세력이 권력의 주축을 이루게 한 고관이었다. 정치색이 또렷해진 셈이다.

옥병서원은 조선말 철폐되었다가 1980년에 다시 세웠으며, 포천시 향토 유적 제26호이다. 복원할 때 ‘옥병서원’ 현판은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1921~2006) 선생이 예서체로 단정하게 썼다. (도 6) 일중은 우리 시대를 풍미한 서예가로, 문곡 김수항의 후손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수영은 <사암서원과 창옥병> 그림에 ‘사암서원’이라 표기해 눈길을 끈다. 옥병서원으로 사액되면서 서인 당색으로 정착된 사실이 남인계인 정수영으로서는 불편했을 거라 예상되기 때문이다.

서원에서 굽어보면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 영평천(永平川)과 주변 일대 들과 산세가 장쾌하게 한눈에 든다. 북쪽으로 보장산과 창옥병 벼랑, 동쪽으로 불무산, 관음산, 관모봉 등이 둘러 있고, 외북천과 포천천이 갈라지는 들녘 풍광이 그러하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2km 남짓 거리에 금수정(金水亭)이 자리 잡고 있다. (도 7) 창수면 오가리 강가 언덕에 세운 금수정은 조선 후기 여러 화가가 찾아 그렸고, 정수영도 들러 사생했던 영평 8경으로 꼽힌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8 – 포천 사암서원 앞내 백운계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일곱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8 – 포천 사암서원 앞내 백운계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일곱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8 – 포천 사암서원 앞내 백운계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일곱 번째
12/0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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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생 여정을 따라, 일곱 번째이다. 지난 ‘답사와 스케치 여정 16’인 우이 9곡 ‘재간정(在澗亭)’에 이어 영평·포천 임진강 한탄강 유역의 명승 창옥병의 사암서원(옥병서원), 금수정, 화적연을 찾아가겠다. 이들은 유수정, 와룡암, 낙귀정, 백로주, 선유담 등과 함께 조선시대부터 ‘영평8경’으로 칭송되던 절경 고적으로 손꼽힌다.

정수영은 1796년 여름 남한강 코스를 마치고 북한산 동편 자락 우이동 계곡 재간정을 들렀다.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가을 단풍을 따라 영평의 사암서원과 금수정을 방문했고, 이어 한탄강 상류 화적연으로 이동했다. 포천지역 정수영 일행의 한탄강 이동 경로를 우리 옛 그림지도 방식으로 그려보았다. (도 1) 임진강 줄기인 포천을 포함하여 연천과 철원의 한탄강 유역에는 주상절리의 바위벼랑과 기암, 계곡, 폭포 등이 어우러진 중부권의 명승지이다.

 

영평천변 백운계(白雲溪) 그리다

정수영이 도착해 그린 장소는 <백운담(白雲潭)>이다. (도 2) 그림의 시작 부분에 “사암서원 전천 백운담(思庵書院前川白雲潭)”이라 밝혀 놓았다. 사암서원은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영평천변에 위치하고, 옥병동 혹은 백운계라 지칭된다. 선조 시절 영의정에 오른 사암 박순(思庵 朴淳, 1523~1589)이 은둔처로 삼았던 것을 기리기 위해 효종 9년(1658)에 창건되었다. 숙종 24년(1698)에 서인계 이의건(李義健)과 김수항(金壽恒)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숙종 39년(1713)에 ‘옥병서원(玉屛書院)’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정수영이 이곳을 들른 것은 두보(杜甫)에 비견되는 선배 문인으로 박순을 존숭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백운담> 다음에 <사암서원과 창옥병>을 그렸고, 당시 옥병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음에도 굳이 그림에 ‘사암서원’으로 썼다. 그 이유는 이 서원이 서인(西人)을 주축으로 운영되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당색(黨色)을 떠올리면 추가로 배향한 서인계 인사들은 남인계인 정수영과는 반대파인 셈이니, 서원보다 아래 물가 풍경을 먼저 들렀을 가능성도 없지 않겠다.

하여튼 정수영이 서원을 참배하기 전에 그 앞내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찾은 점은 진정 진경산수화가답다. ‘백운담(白雲潭)’ ‘토운상(吐雲床)’ 글씨의 바위 오른편으로 물가의 바위벼랑은 사선으로 흐르는 절리를 묘사했고, 그 능선 따라 자란 소나무들 사이사이 단풍 물든 나무들로 가을을 엷게 표현했다. 강변에서 본 시점대로 수평구도이고, 정수영 특유의 가벼운 담먹담채와 붓질 감각으로 《한·임강명승도권》에서 비교적 실경에 근사한 진경산수화이다. (도 3) 정수영의 그림과 지금의 현장이 거의 변하지 않고 비슷한 편이기도 하다.

작은 차이이지만 ‘구름을 토해내는 상’이라는 위아래로 써진 ‘토운상(吐雲床)’ 바위글씨는 좌우로 써넣었고, ‘백운담’은 현지에서 ‘백운계(白雲溪)’로 확인된다. (도 4, 5) 천변 이름도 흰 구름 이는 ‘백운계곡’이라 일컬어진다.

정수영의 <백운담> 장면을 나도 따라 그려보았다. (도 6) 그리고 백운담과 토운상이 새겨진 너럭바위를 별도로 사생하였다. (도 7) 가을 분위기를 맞추어 10월 이곳을 다시 찾아 사진을 찍고 그린 것이다.

 

사암 박순을 기리는 바위글씨들

 ‘백운계(白雲溪)’와 ‘토운상(吐雲床)’ 외에 주변 바위에는 여러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산금대(散襟臺)’ ‘수경대(水鏡臺)’ ‘장천(障閳)’ ‘청학대(靑鶴臺)’ ‘백학대(白鶴臺)’ ‘청령담(淸泠潭)’ 등이 벼랑에 보인다. 행서체의 바위글씨들은 격조 있는 서체를 보여준다. 개울 가운데 너럭바위 사이에는 술통 공간과 더불어 ‘와준(窪尊)’을 새겨놓은 바위도 있다. (도 8, 9) 그야말로 조선 문인들의 술과 시서(詩書)가 자연과 어울린 풍류 터로 최고 낭만 공간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여기에 김수증, 김창협 등 유명 문인들이 방문하고 명시들을 남겼다. 

이들 모두 선조 20년(1586) 가을에 찾아든 “사암 박순이 지은 11곳을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가 썼고, 선조 22년(1588) 신이(辛夷)라는 각수(刻手)가 새겼다”라고 확인된다. (朴淳, 『思菴集』, ‘二養亭記’) 특히 박순이 “기세는 백운 선인을 제압할 만하다”라고 칭찬한, 당시 명필로 꼽히던 한석봉의 활달한 행서체는 산금대 벼랑의 ‘송균절조 수월정신(松筠節操 水月精神)’에서 빛난다. “소나무와 대나무처럼 절조 있고, 물과 달처럼 맑은 정신”이라는 뜻으로, 선조임금이 직접 박순을 지칭한 글귀이다. (朴淳, 『思菴集』) 이들 외에도 ‘옥병동(玉屛洞)’, ‘이양정(二養亭)’ 등의 글씨가 있다고 하나 모두 확인하지 못했다. (홍순석, 「포천군 옥병동의 암각문에 대하여」, 『향토사연구』 6, 1994.) ‘옥병동(玉屛洞)’과 더불어 여기 지명으로 불리는 ‘백운계(白雲溪)’는 기존 연구에 보이지 않고, 이번에 처음 찾은 바위글씨인 셈이다. 

수경대(水鏡臺)에는 ‘우 사암선생 시 김수증 서(右 思菴先生詩 金壽增書)’라고 밝힌 예서체 7언시 “곡조시시문일개(谷鳥時時聞一箇) 광상적적산군서(匡床寂寂散群書) 매련백학대전수(每憐白鶴臺前水) 재출산문변대어(纔出山門便帶淤)”가 새겨져 있다.

이 예서체로 쓴 바위글씨 7언시는 “시시때때로 골짜기의 새소리 듣고, 비뚤어진 책상 적적한데 책들만 흩어 있네. 백학대 앞내 늘 가련하구나, 겨우 산문을 나서면 흙탕물 되리니.”라는 박순의 ‘제이양정벽(題二養亭壁)’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朴淳, 『思菴集』) 세속을 경험한 은둔자의 영혼을 담은 이 7언시를 후학인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 1624~1701)쓴 것이다.

이양(二養)은 ‘덕과 몸을 기른다’는 뜻으로 송나라 정이천(程伊川, 1033~1107)을 따른 것으로, 박순이 그 터에 지은 정자 이름이라 한다. 김수증은 김상헌의 손자이자 옥병서원에 추가로 모신 김수항의 친형으로, 당쟁이 심화했던 시기 화천 북한강 상류에 곡운9곡을 경영하며 은둔자의 삶을 살았던 숙종 시절 서인 계열 문사이다.

포천지역 명승인 이곳을 ‘옥병서원’의 연원 따라 ‘창옥병(蒼玉屛)’으로 보는 견해가 최근 새로이 나오기도 했다. (노재현·박주성·최종회, 「창옥병의 위치비정 및 사암 박순의 정원유적 연구」,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4-4, 2016.) 그런데 다음에 살펴볼 정수영의 <사암서원과 창옥병> 그림을 보면, 현재의 이름대로 백운계 북쪽 개울 건너에 보장산 기슭 따라 형성된 높다란 벼랑을 지칭한다고 생각된다. (도 8)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7 – 대관령 아래 강릉 능가사의 법관 스님 작업공간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7 – 대관령 아래 강릉 능가사의 법관 스님 작업공간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7 – 대관령 아래 강릉 능가사의 법관 스님 작업공간
10/0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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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8월 말과 9월 초에 강릉시 구정면 남밭길 능가사에 다녀왔다. 평론을 써달라는 선승(禪僧) 화가 법관 스님의 요청으로 작업실과 갤러리를 찾았다. 법관 스님은 최근 단색화 내지 포스트 단색화 작가로 꼽히며, 개인전이나 단체전, 옥션이나 아트페어 전시장에서 가끔 만나던 작가이다. 아래 내 글에도 밝혔지만, 작업공간과 갤러리를 갖춘 능가사는 대관령 능선이 품어 안은, 명당으로 꼽을 만하였다. 8월 처음 방문했을 때, 그 대관령을 스케치해두었다. (도 1, 2) 9월 두 번째 방문 후에는 경포대 아래 강문 바닷가 진또배기 마을을 들렀다. 오래간만이었는데, 마을 수호신인 솟대를 나무와 쇠 등으로 엄청나게 많이 제작해 늘어놓아 그야말로 솟대공원을 조성해놓았다. 다행히도 긴 장대 끝에 오리 세 마리를 얹은 진또배기는 그런대로 원형을 갖추고 이었다.다시 그려 봐도 현대 조각 같은 그 단순미가 여전하였다. (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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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의 수행과 작품 활동을 통합한 법관의 회화예술
강릉 능가사楞伽寺에서 일구고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서울산수연구소장

 

군청색 화면은 고요하다. 짙푸른 하늘이나 깊은 바다를 연상시킨다. 연한 청색 붓질 위로 중간 톤의 색이 쌓이고, 그 위로 종횡으로 그어댄 짙퍼런 선묘 흔적이 가득하다. 가로세로로 반복한 선들은 간격이나 기울기가 일정치 않고 대여섯 줄씩의 리듬을 타 있다. 붓질이 화면 가득하면서도 정연하다. 언뜻 보면 직물류 짜임새처럼 보기 십상이나, 가까이 대하면 얼기설기한 세선(細線) 묘사에 흥과 신명이 넘친다. 간간이 찍은 붉은 색 점도 유난하다. 

이러한 최근 법관의 단색조 그림은 그야말로 ‘긋기(畵)와 칠하기(繪)’, 회화(繪畵)의 근원에 해당하는 행위이다.

 이들 법관의 작업은 불규칙하면서 자연스런 붓질과 색깔, 화면의 질감이 독특하다. 근래 몇 년 새 자주 눈에 들던, 기억에 남는 법관의 회화 스타일이다. 글쎄, 미술사조로는 동어 반복으로 화면을 채운 전면회화(全面繪畵), 곧 all over painting으로 보인다. 선묘와 점 찍기를 반복해 가득 채운, 이 퍼런색 캔버스 작품은 법관(法觀)이 2017년에 완성한 <선(禪)>이라는 작품이다. (도 4)

 이처럼 상업화랑은 물론이려니와, 개인전과 옥션, 아트페어 전시장에서도 크고 작은 법관의 <선(禪)>이라는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고, 법관이 승려라는 점이 더욱 관심을 두게 했다. 법관의 회화 형식이나 <선(禪)>의 작업과정에 대한 표현을 들어보면, 최근 부상한 단색화 작가들이 내세운 도가의 도(道), ‘무위(無爲)’나 무위자연, 불가의 ‘선(禪)’이나 ‘무상(無相)’, 혹은 무아(無我)의 경지, 구도자적 자세 등과 무관하지 않아서 그랬다. 이와 연계되는 사조로 구미의 미니멀리즘 작가들이 심플의 단순미를 강조하는 예술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탓에 법관(法觀)의 최근 7~8년 새 작품 <선(禪)>은 단색화 혹은 후기 단색화로 분류되기도 한다. 실제 2015년에는 부산국제아트페어 ‘단색화 특별전’에 초대되었고, 2018년에는 ‘후기 단색화’ 전에 초청되면서, 그 위상이 자리매김 되기도 했다. (윤진섭, 「후기 단색화 예술」, 『THE POST DANSAEKHWA DF KOREA 한국의 후기 단색화』 초대전, LEEAHN GALLERY 리안갤러리 서울, 대구, 2018.) 그런데 법관은 이 단색화나 미니멀리즘 작가들과 출발을 달리한다.

불교나 도교의 동양 사상과 연계해 현대미술이라 칭해 온 점에 비해, 작업과정을 “선(禪) 수행에서 나온다.”라고 말하듯이 법관이 선승(禪僧)이라는 점에서 차이진다. 어찌 보면 한국현대회화에서 법관의 출현은 반갑다. 우리 시대의 승려로서 자기 정체성을 표출한 화가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법관은 자신의 작업에 대해 승려로서 수행과 일상을 쏟아낸 행위라 말하곤 한다. 먼저 직접 법관의 작품 이야기를 들어보자. 

승려로서 수행, 사람으로서 일상,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생활이 모두 내 정체성을 표현하려고 했던 거 같네요. 헌데 저는 작가 내지는 화가라는 이런 의식이 거의 없습니다. 잘 하든 못하든 승려 생활 중 그림은 그 일부라고 봅니다. 마치 내가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법당에서 목탁을 치고, 참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림도 내 삶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근래 들어 부쩍 그림 그리는 작업에 몰입하며, 가장 많은 시간을 내는 편이지요. 그러니까 내게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림에 가장 최선을 다한 거 같아요.

어떤 잡념도 없이, 심지어는 스케치나 에스키스도 없으니까, 적어도 그림 그리기 이전까지는 무의 상태지요. 그림을 시작하면서 구도도 느낌도 색깔도 그렇고, 모든 것을 동시에 쏟아내게 됩니다. ‘즉심(卽心)’으로 이루어지다 보니까, 삐뚤어져도 반듯한 거 같고, 반듯해도 삐뚤어진 거 같고, 늘 살아있는 느낌으로 작업 했던 거 같네요. 그림은 많이 그리면 스스로가 터득하겠구나, 자기대로 표현하는 법을 가지고 있으면 되겠구나, 그리고 그것이 오랫동안 하다 보면 다른 사람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겠다 싶네요. (2020년 8월 25일 인터뷰, 한성희 정리)

그림은 본래 자기의 성품을 잘 드러내야 하고 그 성품은 수행을 통해 간결하고 욕심 없는 가운데 즉심에서 나와 모자람과 어리석음을 넘어 부족함이 없는 가운데서 오롯이 모든 것을 능히 담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간결하고 맑아야 하며 어린아이처럼 천진하여야 하고 고졸함이 잘 다듬어진 인품을 담은 노인네와 같아서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하여도 감동을 주어야 한다. 또한 수행을 통해 얻은 바를 드러내되 잘 정제되어야 하고 단조로운 가운데 단조롭지 아니하고 복잡하더라도 어지럽지 아니 하여야 하며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드러나야 하고 불완전한 듯하면서도 변화를 주어야 하지만 지극히 안정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안으로 품고 있어 밝고 은은함이 속으로부터 비쳐 나와 마치 잔잔한 호수를 보는 것 같아야 하며 그 바탕은 우리 일상 삶에 두어야 한다. (법관 메모에서, 2020. 8)

촘촘히 엮어진 그물망 같은 선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그려져 변화를 이끌어 내고 수많은 점들은 찍었을 때 확장하려는 힘과 막으려는 선들의 충돌에서 생기는 작은 에너지들을 만들어 시선을 좀더 오랫동안 머물 수 있도록 하면서 공간확장을 통해 무수한 여백을 만들기도 한다. 밤하늘의 별빛과 먼 도시의 불빛을 연상케 하는 정형화되지 않은 화면은 담담하면서도 무한한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선(禪) 수행으로부터 오는 긴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기도 한다. (법관 작가 노트, 『선』, 올미아트 스페이스, 2019.)

나는 그림을 그릴 때 균형적인 아름다움과 변화된 자유로움의 조화, 그리고 고졸하면서 내적으로 힘을 담아낸 부드러운 선, 여백으로 드러낸 여유로운 禪의 세계와 수행에서 얻어진 정신세계를 현대적 조형 감각으로 풀어내기 위한 작업을 하려고 노력한다. (법관의 메모에서)

 이 같은 법관의 예술과 정신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작업실을 찾았다. 무더위 말미인 8월 말과 9월 초 두 번, 강릉에 있는 능가사(楞伽寺)를 방문했다. 강릉시 구정면 제비리 남밭길 안쪽에 위치한다. 북쪽 마을 앞으로 남대천이 흐르고, 솔밭이 빙 둘러 아늑하다. 서쪽으로는 대관령 준령이 병풍처럼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작업과 수행, 예배와 일상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자연환경이 안성맞춤이라 생각 들었다.

이곳에 터전을 잡은 게 1999년이니, 벌써 20여 년 전이란다. 법관이 최선의 공간을 발견하고 사원을 조성한 것이다. 동해 고속도로가 지나고 케이티엑스 철길이 놓이며 주변이 크게 변했음에도, 솔밭 절은 무관하다. 명당 터를 만나지 않았나 싶다. 이에 걸맞게 얼마나 정성을 다해 가람을 꾸몄는지, 솔밭 마당 곳곳에는 법관의 엄격한 계율과 불심이 여실히 묻어난다.

 그리고 수행과 예배의 공간이자 회화의 창조공간인 절 이름, ‘능가사(楞伽寺)’는 승려로서 법관의 예술 의지와 아우러져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능가사는 한자 뜻 그대로는 ‘모퉁이에 있는 절’이란 의미지만, 능가경(楞伽經)에서 따온 이름이다. 능가경은 대중에게 조금 생소한 이름이지만, 석가모니가 능가산 능가성(楞伽城)에서 대혜(大慧) 보살에게 설법했다는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으로 꼽힌다. 달마와 혜가(慧可)가 심인(心印)으로 전승되었다 하여 선종 불교의 뿌리로 여기는, ‘마음’의 세계를 논리적으로 밝혀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불교에서 원효대사가 ≪능가경소(楞伽經疏)≫, ≪능가경요간(楞伽經料簡)≫, ≪능가경종요(楞伽經宗要)≫ 등을 저술했다고 전하며, 가장 즐겨 인용한 불경으로도 유명하다.

능가경은 ‘마음’을 가운데 두고 진정한 깨달음 각(覺)을 무분별(無分別)이나 무아설(無我說)에 둔다. “중생은 미혹(迷惑)으로 대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쌓아온 습기(習氣)로 말미암아 모든 현상이 ‘스스로의 마음(自心)’에 의해서 나타난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의식(意識)의 본성에 의지하여 모든 현상이 스스로의 마음이 나타낸 바임을 철저하게 깨닫는다면 집착하는 자(能取)와 집착하게 되는 대상(所取)의 대립을 떠나서 무분별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무분별을 스스로 체험하는 철저한 깨달음에 의해서만 진리의 전개를 획득할 수 있다’는 ‘성스러운 지혜’의 작용을 강조한다. (남회근, 신원봉 역,『능가경 강의』, 부키, 2014.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기영,『불전해설』, 한국불교연구원, 1978.) 

이처럼 능가경의 법통을 그리게 하는, 법관의 능가사는 여느 사찰과 다름없으면서도 조촐하다. 터의 크기에 적절하게 금강문이나 사천왕문 없이 작은 암자처럼 꾸민, 법관다운 사원 배열이 돋보인다. 대관령 능선을 향해 배치한 두 불전과 승방, 그리고 법관의 작업실과 생활공간, 전시실인 고암(古巖) 갤러리 등으로 정갈하게 꾸려진 가람(伽藍)이다.

솔밭언덕을 배경 삼으며 이단 석축을 쌓고 지은 삼칸의 대웅전과 단칸의 삼성각은 건물조차 단출하다. 3층석탑 마저 대웅전 중앙이 아니라 아래단 석축 왼편에 치우쳐 세운 점도 색다르다. 좁은 터에 마당을 살린 배려로 보인다.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 가운데 주불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한, 최근의 것이면서도, 고려말~조선초 형식을 따른 점이 눈에 띈다. 조선 후기 문화재급으로는 대웅전의 작은 석불이 방해석으로 만든 19세기 조성한 것으로 보이며, 삼성각의 산신도가 갑술년(1873년 추정)에 그려진 불화이다.

20년간 하나하나 짓고 조성하며 작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춘 모양이다. 이로써 능가사는 법당에 작가의 창작과 전시공간을 함께한 법관의 터전으로 완성되었다. 정말 축하할 일이다. 

법관의 작업 공간은 법당 마당 아래 배치되어 있다. 보통 절의 경우 보제루나 만세루가 들어서는 예배처인즉, 부처에게 예를 올리는 자리이다. 철근 구조물로 조립한 단층에 반은 수장고이고, 나머지는 차실(茶室)과 화실(畫室)로 칸을 나누어 사용하고 있었다.

먼저 들른 차실에는 차 도구들과 좋아하는 도예가들의 작품들, 그리고 법관의 최근 그림들이 가득하면서도, 안정되게 꾸며져 있었다. 100호짜리 청색 추상화 <선>이 중앙을 차지하고, 왼쪽 벽면에는 전통적인 선화 스타일의 수묵 서화 작품 족자와 붉은 색조의 다완 그림이 그러했다. 그중에서 “禪 아님이 있는가”라는 어눌한 붓글씨가 법관의 화두(話頭)인 듯해 눈길을 끌었다. (도 5)

법관은 이처럼 전통 선종화나 선배 승려 화가 중광(重光)을 멘토 삼아 먹그림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법관 회화의 뿌리인 셈이다. 법관은 강릉 능가사에 정착한 3~4년 새 선승으로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2002년 강릉에 있는 화랑 선아트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2004년 서울전으로 이어지며 대중이 사는 세상에 나온 까닭이다.

“산사에서 정진중에 필묵이 좋아 가까이 두고/문득/그리고 싶은대로 그냥 그렸습니다”(‘빈손으로 왔다 가네’ 선화전에 붙여, 우림화랑, 2004)라고 피력한 것처럼 달마며, 탑이며, 화로며, 찻잔이며, 세한이며, 난초며 어눌한 솜씨 그대로 선보였다. 또 정감이 넘치는 묵서 글씨를 몇 차례의 개인전에 곁들였다. (2018, 2012년 등) 몇 작품 먹글씨와 먹그림을 차실에 걸어두고 지내듯이, 꾸밈없는 손맛대로 표현하는 일을 지금도 즐겨 다루며 경지에 오른 것 같다. ‘재주 없어 그저 즐긴’ 자연스러운 붓길 흐름에 법관다운 개성미가 유연하다.

“내 회화는 선(禪) 수행으로부터 오는 긴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는 일이다.” 이 같은 법관의 마음이 쌓인 공간을 보자.

 차실 옆방 그림 그리는 화실은 대관령을 향해 작은 창을 낸, 선방(禪房)이었다. 고요한 정와(靜窩)처럼 느껴졌다. 현재 작업 중인 대소의 캔버스들이 벽에 기대어 정돈되어 있고, 화면 왼쪽과 아래에 수직 수평의 긴 흰 선을 남긴 검은 색조의 대작이 막 끝낸 듯하였다. 뎅그러니 놓인 작업대에는 법관이 이 작품을 완성하며 내뿜는 열기로 가득했다. 무념의 붓질 소리를 상상하고 남음 직했다. 능가경의 말씀대로 마음자리이자 집착을 벗는 작업의 결과물로 수긍되었다.

법관의 블루 작품을 바탕 판으로 삼아 만든 시계가 벽에 걸려 있어 인상적이었다. 시간 알림은 정확했다. 작업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하루에 꼬박 15시간가량, 혹은 그 이상 몰두한단다. 그 바람에 달인의 경지에 오른 듯하다. 100호의 선묘 작업이 초기에는 한 달씩 걸렸는데, 요즈음은 열흘 정도면 완성한다고 한다. 붓을 들기보다 놓기가 어렵다고 할 정도이다.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완성해야 하는 법관의 마음새로 보인다. 살면서 몸과 마음이 겪은 체험을 쏟는 그림 작업에 대하여, 법관은 ‘대단한 것 아님’을, 그러나 ‘온 마음으로 최선을 다함’을 강조한다.

화실 왼편이 수장고였다. 문을 열자마자 ‘으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흐트러진 듯 제법 정리가 잘된 창고에 법관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지난 35년 열정으로 쏟아낸 ‘마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승려가 되었지만, 1995년경 무작정 만진 유화 그림부터 법관이 천부로 타고난 화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 낡은 상자에서 꺼낸, 몇몇 처음 그린 유화들을 보며 그랬다. 서구 유럽에서 개발되어 발달한 “유화란 뭐냐”며 유화물감 칠하기를 60일가량 미친 듯이 몰입했던 결과란다.

굵은 텃치의 박고석 화풍 엇비슷한 산 그림이며, 후안 미로 그림을 연상케 하는 선조의 <노래하는 새>며, 심지어 둥근 레코드판에 그린 동물인 듯 사람 얼굴인 듯한 표현주의 화풍이나 흰색 추상화까지, 법랍 유년기 법관의 순정스럼이 고스란했다. 또 내 것이 나올 때까지 집착한 법관의 화두(話頭) 정진을 읽는 것 같았다. 언젠가 누군가 법관 회화를 망라하는 회고전을 기획할 때, 백여 점의 다채로운 초심 오롯한 소품들을 어떻게 평가할지도 흥미롭게 떠올려 봤다. 

수장고 중간에는 붉고 푸른 색조의 크고 작은 캔버스들이 첩첩해 있었다. 건물의 절반을 차지한 이 작품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그렸다고 한다. 산과 나무 풍경, 달, 달항아리, 꽃, 나비, 새 등등 반추상 혹은 순수 기하학적 추상화이다. 화면구성에는 불화나 민화의 소재나, 그가 좋아하는 분청자의 무늬 등이 화면에 등장해 있다. 전통적 회화 안료인 석채(石彩)를 쓰면서도 아크릴 물감 등 혼합해 그리기도 했다.

절 생활에서 늘 익숙한, 단청 이미지에 근사한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건축물 장식에서 적색은 주황색으로, 초록색을 대신해 푸른 색조로 자기화시켰다. 그림에 자신감이 붙어 “산사 생활 정진 중에 내 속에 있는 생각들을 화면에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2006년 ‘심상 심류’전에 붙여, 서울 윤갤러리)라고 시작해, ‘비산비수’전(서울 인사아트센터, 2007.), ‘禪으로 부터’전(서울 인사아트센터, 2009.), ‘선-2011’전(서울 인사아트센터, 2011.), ‘선-2013’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13.) 등을 통해 유명해졌다. 법관의 작품들은 여러 단체전에 초대되었고, 아트페어나 옥션에 등장하였다. 신항섭, 윤진섭, 박영택, 이병인, 윤양호, 고연수 등 유명 평론가나 작가의 글이 전시 도록에 곁들여진 것만 보아도, 그 위상변화가 짐작된다.

수장고 문 입구 쪽에는 근래의 대작들이 채곡채곡 쌓여 있었다. 이 글의 서두에 소개한, 군청색을 중심으로 선을 반복해 겹겹히 그으며 화면구성을 시도한 작품들이었다. 이들 <선(禪)> 작품은 2011년 싸인부터 보였다. 선승화가의 진면목이며, 동시에 법관의 마음이 충만한 회화는 후기 단색화로 규정짓게 했다. 그리고 법관 그림이 대중과 소통하는 인기도 얻었는데, 이렇게 많은 양이 보관되어 있어 놀랐다. 얘기를 들어보니, 김환기나 여타 화가의 그림과 유사하게 나온 것들을 오해 소지 탓에 세상에 내놓지 않은 것이라 한다. 수긍은 되었지만, 이들도 가까운 후일 어떻게 재평가될지 기대를 해본다.

또 최근의 단색조 대작들은 대웅전 아래 외쪽 벽돌 건물로 ‘문화공간 고암(古巖) 갤러리’에 진열되어 있기도 하다. 들어서니, 개인 미술관으로도 훌륭한 전시공간이었다. 붉은 화면 한 점, 검정 화면 한 점 외에는 모두 블루 색감 작품들이다.

이들 작업은 법관의 브랜드로 자리 잡게 했다. 국내에서는 2010년대 중반부터 개인전과 단체전, 아트 페어에 참여하며 적극적으로 작품들을 선보였다. 뉴욕 Able Fine Art, NY Gallery(2016년)를 비롯해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 해외에 진출하였다.

고암 갤러리 전시공간에는 법관이 좋아하는 도예가들의 작품들이 어울려 있었고, 문 오른쪽에 그늘진 목기와 조각품이 눈길을 끌었다. 조선 후기 목기로 중앙에 둥근 쇠장식 달린 수직 구성의 여닫이 장은 간결한 추상미가 돋보였다. 그 위에 놓인 테라코타 인물 흉상은 흙을 주물러 만든 얼굴 이미지의 손맛이 좋아 물으니, 법관이 조각한 거란다. 법관의 눈썰미와 손재간이 탁월함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도 6)

 법관은 재주 없음에 그저 즐겼을 뿐인데, 작가나 화가로 불리는 것이 영 짐스럽고 부담스럽다.”라고 만날 때마다 토로한다.

강렬한 불길처럼 지펴낸 지난 35년의 작업을 돌아보니, 우리시대 작가로 꼽아도 손색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구도자의 길에서 참선하다 만난 회화를 선(禪)과 동일시한 것뿐이라며 손사래 친다. 하다 보니 평생 숙제가 되었다고 한다. “시행착오 끝에 마음에 집중해 열정을 쏟았고, 온마음 들어내기에 최선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법관의 눈빛은 세차기 그지없다.

“내 생각을 담는 내 방식 찾기에 수많은 시간 할애해 최선을 다했고, 내 것 만들기 몰두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모르고 그리던 초심처럼 열정이 식지 않고, 머리 속을 비우며 천진한 마음을 익혀내는 좋은 그림이 나오고, 대중과 더불어 나누고 싶다고 피력한다.  

나는 무엇을 특별히 그리려 하지 않는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것들 어차피 정답도 없다 지금껏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 정의할 수 없는 무엇을 선과 점으로 찍고 긋고 겹치면서, 경계와 질서가 허물어진 자유로운 균형으로 모두의 마음속에 따뜻하고 평화로운 선의 세계가 전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법관의 메모에서)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