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6 – 도봉산 《망월암》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세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6 – 도봉산 《망월암》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세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6 – 도봉산 《망월암》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세 번째
09/0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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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2020년 3월부터 강연이나 답사 같은 외부 일정이 대부분 취소되면서, 오랜만에 여유가 생겼다. 수입이 크게 줄었고 장기전에 돌입해 지루하지만, 어쩌면 내 인생에서 처음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진 셈이다. 덕분에 지난번에 소개했던 것처럼 올해에는 ‘퇴계 선생 낙향 길’ 따라 경복궁에서 안동 도산서원까지 9일 동안 걷기도 했고, ‘고구려를 그리다’(무우수갤러리, 2021. 6. 16~27)와 ‘이태호 그림(서울옥션 강남센터, 8.26~9.3)’ 두 번의 개인전을 연달아 가졌다.

코로나 초기 단계였던 작년 4, 5월에는 삼각산과 우이동 계곡에 이어 도봉산을 여러 차례 올랐다. 도봉서원과 천축사, 망월사, 오봉 등의 길을 따라 등반했다. 가끔 오른 게 1960~70년대 고등학교 대학 시절이었니, 정말 오래 간 만의 일이다. 이번에는 몇 번 완주를 시도하다, 5월에야 망월사에서 주봉까지 성공했다. 바위산 봉우리의 다양한 덩어리 형상이 빼어나고 전망 또한 일품이어서, 10여 점 넘게 스케치해 너무 뿌듯했다. 포대능선에서 본 선인봉 만장봉 자운봉이 키 재기 하며 어울린 자태가 최고였고, 그 오른편으로 전개된 산 능선들이 장관을 이루었다. (도 1)

하산해 도봉역에서 본 도봉 능선으로 지는 하얀 태양이 새롭게 인상에 남았다. 흰 바위산 봉우리들이 불쑥불쑥 솟은 서남쪽과 달리, 우이산 북한산과 능선이 연계되면서 도봉산의 동북 능선은 바위산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그 일몰 장면도 심쿵해 여러 장 스케치했었다. 옛 양주, 지금 의정부시에 속한 이쪽 풍광을 별도로 ‘원도봉산’이라 부른다. 도봉산의 원조, 혹은 가장 도봉산다운 장면이어서 그리 불릴만하다.

올해는 망월사에서 달뜨는 ‘망월(望月)’ 장면을 보려 시도했다, 망월사 보름달 보기 시간을 내내 맞추지 못하다가, 지난 음력 7월 보름 전날 비구름 사이로 떠오르는 수락산 월출을 찾아 가벼이 스케치했다. (도 2) 또 수락산 기슭에서 초가을 오후 해가 지는 도봉산 준봉들의 실루엣을 다시 그려 보았다. (도 3)

 

정수영의 발자취를 따라 망월사에 올라

도봉산 망월사에 오르고 수락산 계곡을 밟은 일은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의 《한·임강명승도권》에 등장한 <망월암>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신륵사를 필두로 2019년 5월부터 시작한, 지우재 정수영의 한강과 임진강 사생 현장을 이태 동안 틈틈이 모두 확인하는 일이 가능해 무엇보다 보람이 컸다. 현재 북한 지역에 속한 삭령(朔寜)과 토산(兔山)을 제외하고, 정수영의 여정 추적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정수영은 시흥에서 1797년 봄을 보낸 뒤, 도봉산에 올라 <망월암>을 방문했다. 이때 정수영이 시흥현령 김사희(金思羲, 1753~?)의 측근인 책방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을 터인즉, 김사희는 《한임강명승도권》의 마지막 삼성대와 낙화암을 그린 십여 년 전 정조 9넌(1785)에 토산현감을 지냈으니 정수영의 최종 여정과 무관하지 않을 성싶다. 도봉산 망월암은 양주(楊州)에 속했고, 그때 양주목사는 1797년 5월에 부임한 오정원(吳鼎源)이었다. 정수영과 관계가 드러나 있지 않지만, 대사간에 오른 문인관료였다.

<망월암> 그림은 중앙 근경 나무 한 그루가 봄 나무 같기도 하고 고사목 같기도 하고, 바위틈에 자란 앉은뱅이 노소의 소나무 세 그루에 계절감 표현이 또렷하지 않다. 뾰족뾰족 화면 가득 전개한 층층 바위들이 대충대충 그려 도봉산의 특정 봉우리의 개성적 이미지를 살려내지 못한 상태이다. 또 ‘망월암좌(望月庵左)’라고 그림 제목을 쓴 왼편 옆으로 긴 그림과 유사한 현장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화면의 짜임새도 얼기설기한 편이다. (도 4)

그런대로 정수영의 시점과 풍경 조합을 꾸려보자. 관음전, 천중선원, 심검당, 고불원, 영산전, 범종각, 칠성각, 문수굴 등이 들어선 지금의 망월사는 대부분 20세기 후반 이후 조성된 불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18세기 ‘망월암’의 가람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지 않고, 발굴이 시도된 적이 없어 명확히 규명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림의 두 기와지붕이 맞닿은 불전은 현재 벼랑에 세운 영산전(靈山殿)쯤으로 추정된다. 그림 가운데 사원의 뒷간인 듯한 단칸 초가가 소나무와 배치되어 있다.

벼랑 계단을 올라 바위 샘과 문수골, 현재의 영산전 칠성각 영역 정도가 19세기 옛 절터의 공간으로 여겨진다. 범종각에서 볼 때 정수영의 <망월암> 전체 풍경이 잡힌다. 그리고 그림의 암산 봉우리들은 영산전의 서북향 천중서원(天中禪院)과 심검당 마당에서 둘러보아야 칠성각 위로 병풍처럼 전개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도 5, 6) 멀리 본 경치와 가까이 본 풍광을 합성한 방식으로, 사실 묘사를 소홀히 한 점과 더불어 겸재 정선의 화법을 참작한 셈이다.

<망월암> 그림에서 근경 오른편 돌계단 위 불전 건물 아래에 비석을 유난하게 강조해 놓은 점이 눈길을 끈다. 위치와 형태로 미루어 1797년 윤6 월 수관거사 이충익이 비문을 짓고 쓴 천봉 대선사 태흘의 탑비로 여겨진다. 망월사 경내에 오래된 비석은 이게 유일하다. 경기도 문화재자료인 ‘망월사천봉선사탑비(望月寺天峰禪師塔碑)’에는 ‘朝鮮國 天峯 大禪師 碑銘 水觀居士 李忠翊 撰幷書篆 嘉慶二年 丁巳 閏 六月 日立’라고 밝혀놓았다. 현재 영산전 아래 문수굴 벼랑 길에 설치된 이 비는 석조승탑과 나란히 옛 모습 그대로인 듯하다. 탑과 비가 좁은 공간에 서 있는 데다, 벼랑 암벽에는 “嘉義 金順民, 嘉善 金順孝, 嘉善 李孝載, 通政 朴龍雲, 通政 金尙泰” 등 시주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도 7, 8)

정수영이 승탑을 그려 넣지 않은 채, 옥개석을 갖춘 비석만을 강조한 것은 비문을 짓고 쓴 이가 수관거사 이충익(1744~1816)인 까닭 아닌가 싶다. 이충익은 정파로 보면, 소론에 해당하며 강화학파의 핵심 일원이었다. 하곡 정제두의 양명학을 계승하여 ‘진가(眞假)’를 구별에 엄격하였으며, 유교 이념을 내세운 허위의식에 비판적이었으며, 노장(老莊)과 불교를 통섭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며 대립했을 때 집안이 몰락하자 특히 불교에 심취하였고, 승려 혜운(慧雲)과 동거하며 강화도(江華島) 마니산(摩尼山) 망경대(望京臺) 암자에서 폭포암주인(瀑布庵主人)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해서(楷書)와 초서(草書)를 잘 썼으며, 조선 후기 조선 서풍의 개성미를 뽐내는 원교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가 5촌 아저씨로 그를 따랐다. 이충익의 ‘망월사천봉선사탑비(望月寺天峰禪師塔碑)’ 글씨는 갸우뚱한 원교체 서풍을 따르면서 왕희지체 행서 맛을 살려 붓 흐름이 유려한 편이다. 이광사는 이충익이 불교에 너무 깊이 심취한다고 염려했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이충익이 비문에 ‘몸은 단정하고 귀와 입은 크고 눈은 샛별처럼 빛이 났고, 복덕지혜(福德智慧)를 다 갖추었다’라고 태흘에 대해 상찬한 것을 보면, 34세 연상인 노승 태흘과 친분도 도타웠던 듯하다. 84세에 입적한 천봉대선사(天峰大禪師) 태흘(泰屹, 1710~1793)은 명탁(名琢), 도원(道圓), 은월 우점(隱月雨霑), 풍계 해숙(楓溪海淑) 등 당대 고승의 법을 계승한 서산대사의 5세손이다. 환열(幻悅) 묘일(妙一) 낭규(朗奎) 등 제자가 10여 명에 이르며, 수백 명이 넘는 승려가 계율을 받았다고 전할 정도로 평판이 높았다. 입적 후에는 배천의 호국사, 문화의 월정사, 양주의 망월사에 각각 승탑을 세웠다. 망월사 태흘의 석조승탑은 전통적인 네모 기단에 팔각원당식으로 조선 후기에 유행한 형식이며, 입적 다음 해인 1794년 3월 1일에 조성했다. 탑신에는 “西山 五世孫 天峯堂 泰屹之塔 崇禎 紀元後 三 甲寅 暮春 一日 完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도 9)

<망월암> 화면에 강조된 비석은 1797년 윤6 월 이후 그려진 시기를 말해준다. 이충익과 관계가 있을 거라 상정하면, 정수영의 망월사 방문이 1797년 윤6 월 태흘 탑비 건립과 무관하지 않았을 법하다. 이들의 구체적인 행적이 밝혀진 게 없지만, 당대 유불 인사들의 교류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도봉산(道峰山) 망월암, 곧 지금의 망월사는 신라 선덕여왕과 8년(639) 해호(海浩)가 창건했고, 신라 말기 경순왕의 태자가 은거했다고 전하는 천년 고찰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랜 유적은 고려 문종 시절 중창한 혜거국사(慧炬國師) 승탑이 전한다. 신라 팔각원당 형식을 토대로, 고려청자가 절정을 이룬 12세기였던 만큼, 단아한 구성과 형태를 뽐낸다. 노송과 어울려 있어 스케치해두었다. (도 10) 최근 2017년 본디 영국사 터였던 도봉서원 발굴에서 혜거국사 비편이 나와, 고려 시대 도봉산의 불교 유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조선 시대에 들어 숙종 때 동계(東溪), 정조 때 영월(暎月)과 태흘(泰屹), 고종 때 완송(玩松) 등이 중창을 거듭했으며, 근대에는 만공(滿空)·한암(漢巖)·성월(惺月) 등이 주석하여 천중선원(天中禪院)을 이루었다.

 

수락산 기슭 박세당 묘역

그림 위에는 여느 장면처럼, “내가 예전에 이곳 반남 박씨의 양대 무덤을 보았다. 더할 나위 없는 명당이었다. 지사(地師) 박상의가 점찍은 장소이다. (余曾見此潘南朴氏 兩代墳山 儘名墓 朴師尙毅所占云〭)”라는 강관의 발문이 있다. 태흘 탑비에 대한 언급은 없고, 느닷없이 반남 박씨 묘역을 거론한 대목에서 강관의 글이 막상 정수영의 그림과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수영과 그림을 함께 보며 발문을 적은 게 아닌 모양이다. 또 글을 쓴 시점이 그림보다 상당히 뒤에 별도로 이루어진 것 같다.

여기서 반남 박씨 묘역에 관한 언급은 집권 노론 계열에 대립했던 정파를 떠오르게 한다. 반남 박씨 양대 무덤은 망월사 동쪽 맞은편 일출과 월출을 굽어보는 수락산 기슭 박세당과 박태보 부자의 묘역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묘역에는 박세당 묘소를 중심으로 아들 태유와 태보의 묘가 좌우로 배치된 명당이다. 양대 묘 외에 박세당의 셋째 형 박세후, 손자나 증손자부터 11세손까지 가족묘가 산재해 있다. 또 이곳은 박세당의 은둔처이자 후학을 배출한 터전이었고, 도성 문사들이 풍류 유람을 즐기던 명소로 꼽힌다. 박세당 고택은 1950년 6.25 전쟁 때 소실되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랑채를 비롯하여 조세걸이 그렸다는 유복 차림의 <박세당 초상>이 후손들에 의해 보존 관리되어왔다.

강관이 언급한 박상의(朴尙義, 1538-1621)는 조선 시대 풍수론의 전설이다. 그가 점지한 장소이니만큼 최고의 장소이다. 현재 의정부시 장암동 소재 수락산의 서쪽 기슭에서 도봉산을 끌어 앉은 형국으로, 음택과 양택을 같은 공간에 어울려낸 절묘한 터임을 실감한다. 사랑채 앞마당 4~5백년 수령의 은행나무에서 동쪽을 올려 보면, 수락산 정상이 감싼 안온한 공간이다. (도 11) 사랑채 마루나 묘역에서 전망하면, 선인봉·만장봉·자운봉의 도봉산, 우이산, 인수봉·백운대·만경대의 삼각산 능선이 장관으로 펼쳐져 있다. (도 12)

박세당은 이들 기암절벽의 도봉산과 삼각산을 ‘망산(望山)’이라 지칭했다. 또 고택 아래 시내부터 수락폭포까지 계곡은 박세당의 자연을 벗한 은둔과 풍류 터였다. 고택 앞 오른쪽 제자들과 학문을 쌓던 너럭바위와 어울린 궤산정(簣山亭) 터에 바위글씨 ‘西溪幽居’ ‘石泉洞’ ‘取勝臺’가 전한다. 청풍정(淸風亭)이 있는 ‘水落洞天’에는 현재 노량진에서 옮겨온 박태보의 노강서원이 들어서 있고, 그 안쪽에 석림사, 중턱의 수락폭포 역시 박세당의 산보 공간이었다. 석림사(石林寺)는 박세당 집안의 원당 사찰 격이며, 박세당이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던 곳을 기리기 위해 조성했다고 전한다. 이곳 계곡을 박세당은 ‘동강(東岡)’이라 불렀다.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 1629~1703)은 숙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문인관료이자 학자로 ​주자학을 비판한 견해 탓에 송시열 일파의 노론계(老論系)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고, 윤증(尹拯)을 비롯하여 박세채(朴世采), 처남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 주로 소론계와 어울렸으며 실사구시학의 선구로 꼽기도 한다. 아들 정재 박태보(定齋 朴泰輔, 1654~1689) 또한 문인관료로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 반대를 주동하였던 탓에 혹독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진도로 유배 가다 노량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곳을 기리며 노강서원(鷺江書院)이 조성되었다. 김시습, 박세당·박태보 부자, 이충익과 승려 태흘, 강관과 정수영 등 모두 당대 현실 권력에서 떨어진 인사들인 점을 눈여겨볼 때, 여기서도 정수영이 그린 《한·임강명승도권》의 정치지형을 읽을 수 있겠다.

 

지우재 정수영의 발걸음은 망월사를 거쳐 도봉산 주봉 남쪽 중턱에 있는 옥천암으로 옮겼다. 현재 천축사로 이름이 바뀌어 있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5 – 고구려를 그리다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5 – 고구려를 그리다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5 – 고구려를 그리다
08/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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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6일부터 27일까지 인사동 사거리의 무우수 갤러리에서 ‘고구려를 그리다’라는 개인전을 가졌다. 면지에 그린 수묵담채화 40점을 2부로 나누어 꾸몄다. 전시는 두 층으로 나누어진 갤러리 공간에 맞추었다.

아래층에는 고구려 산수화를 따라 그린 그림들을 중심으로, 고분들이 있는 고구려 땅 풍경화를 배열했다. 고구려 산수화의 첫 그림이라 할 덕흥리벽화고분 앞간 천정 수렵도의 배경으로 등장한 <산악도>와 평양의 서쪽 진남포 무학산 아래 조선된 덕흥리벽화고분의 풍경 스케치를 나란히 걸었다. (도 1, 2) 한 열을 지어 늘어선 산악 능선과 듬성한 나무들의 고졸한 맛이 물씬한 장면이다. 대우산 아래 나란한 무용총과 각저총의 경치는 무용총 수렵도의 주름진 산악 표현과 잘 비교되었다. 여기에 2019년 10월 고구려 답사 때 스케치 한 호태왕릉과 압록강, 백두산 풍경 스케치도 곁들였다. 진파리1호분의 북벽 소나무와 강서대묘의 동서 천정 받침 산수도, 강서중묘의 청룡 백호 주작과 호남리사신총의 현무 등 사신도와 상상의 도상들, 연꽃이나 인동꽃 장식문양 같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따라 그린 그림들이다. 산수표현은 1978년 석사학위 논문 주제여서 감회가 별스럽다.

위층에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따라 그린 연화문, 사신도, 해와 달, 구름무늬, 괴면, 봉황, 물고기 등을 배열해놓았다. 공간 가득 엷은 붉은 색조와 갈색, 청녹색 등의 색채감이 화사하며, 그림 소재에 따라 고구려벽화의 설화적 신비감을 살리려 했다. 현무나 연꽃 그림 아래 수면이나 몇몇 산수도의 하늘을 보라색으로 처리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진파리1, 4호분의 연화나 인동초 문양이 동시기 백제와 너무 닮아 무녕왕릉(526/529년)의 전돌 연화무늬를 그려 비교해보았다. (도 3, 4) 고구려 고분벽화의 장식 무늬들은 고려, 조선 시대 회화 도자공예 불화나 민화 등에 이르기까지 전해진 한국미술사의 큰 원류이자 전통의 뿌리인 셈이다. 이를 알 수 있는 고려 산수, 조선 후기 청화백자의 봉황문이나 목어 등을 모사한 그림도 곁들였다.

이번 전시에는 블록체인 스타트업 벤처 기업으로, 명지대 미술사학과 졸업생인 신수철 군이 다니는 ‘커먼 컴퓨터’에서 고구려가 매력적이라며 NFT로 작업을 시도해 보자는 제안이 들어와 수용했다. 강서대묘의 동서 천정 받침 산수화 <강바람 일고>(도 5)와 <하늘 바람 내리고>, 진파리1호분 북벽 현무도 좌우 <소나무 1, 2>(도 6), 각저총 천정의 <해와 달>(도 7), 호남리사신총 북벽 <현무도>(도 8) 등 고구려사람들의 자연관이나 문화사적 의미를 두고 선정했다. 전시 기간에 이들 4점에 ‘큐알 코드’를 설치했다.

 

월간 『민화 잡지 김송희 기자가 전시 소감을 묻기에 이렇게 답했다.

“이번 개인전은 지난 3년간 그린 고구려 그림을 모은 것이기도 하고, 15년 작업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고대 설화와 자연이 조화를 이룬 고구려고분벽화야 말로 한국화의 뿌리이자, K-art를 재창조할 원동력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벽화의 조형미는 세계적인 현대예술과 당당하게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관람객분들의 반응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김송희, 「고구려의 기세氣勢를 되살리다」, 월간 『민화』, 2021. 7.)

전시실에 비치한 방명록에는 “고구려 재발견, 고구려는 민족의 미래”(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 “고구려가 살아나다”(화가 김봉준) “아득하지만, 우리 피 속에 흐르는 신묘한 고구려의 기운을 불러내 준 전시”(시인 나해철) “인문정신과 고졸미가 화폭 가득”(화가 이종구) “(필치에) 호흡이 느껴집니다”(화가 이경희) “판타스틱”(연세대 교수 김진영, 러시아문학) 등이라고 써놓은 글들이 눈길을 끌었다.

뉴시스 박현주 기자가 「미술사가 이태호, 세번째 개인전…’고구려를 그리다’로 전시소개를 이끌어주었다. (NEWSIS, 2021. 6. 2.) 대한경제 이경택 기자의 「수묵·석채로 되살려낸 고구려 정신」은 내 인생에 가장 너른 면적의 지면을 할애받은 것이었다. (e대한경제, 2021. 6. 3.) 조선일보의 「조용헌 살롱」 “미술사학자 이태호의 글과 그림”(「조용헌 살롱」 1302호, 조선일보, 2021. 6. 21.)에서는 글 잘 쓰는 화가 김환기, 천경자, 김병종 등에 이어, 나를 글쟁이가 그림도 그리는 새 ‘쌍권총’으로 소개해주었다. ‘고구려의 원색적이고 야생적 신기를 자기식으로 표현했다’라는 조용헌 선생의 짧은 작품 평 덕분에, ‘고구려 기를 받으러 왔다’라며 전시실에 오래 머물고 가는 이들을 여럿 만났다.

 

팜프렛에 실은 내 글 고구려 화가의 기세(氣勢)를 배우며를 아래에 소개한다.

1.

나는 석사 논문으로 ‘한국의 고대 산수화’에 대해 썼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산과 나무 그림을 살피며 미술사 공부를 시작했다. 이번 ‘고구려를 그리다’ 전시를 위해 산과 나무를 따라 그리다 보니, 내 미술사연구 첫 논문을 다시 열어보기 같다. 인물풍속의 배경이거나 장식으로 산수표현이 등장하던 6~7세기 동아시아 미술사에서 고구려가 가장 산수화다운 회화 형식을 완성했다. (「한국의 고대 산수화-고구려 고분벽화를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1978) 덕흥리벽화고분이나 무용총 수렵도의 산악과 수목 표현에서 발전한, 진파리1호분 현무도 좌우의 두 그루 소나무 그림이나 강서대묘의 동서 천정 받침에 각각 등장하는 산수도가 대표적인 예이다.

 

고구려 수도권의 답사가 불가능하던 시절을 거쳐, 논문을 쓴 지 20년 만에 고구려 유적을 실견하는 행운이 왔다. 1998년 8월 금강산 답사길에 덕흥리벽화고분, 강서대묘와 중묘 세 고분을 처음 관람했다. (이태호, 『조선미술사 기행1』-금강산, 천년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다른 세상, 1999) 2006년 5월에는 안악3호분 덕흥리벽화고분 수산리벽화고분 진파리1호와 4호분 호남리사신총 강서대묘와 중묘 등 평양지역의 고구려 고분벽화 8곳에 대한 남북공동 조사팀에 합류했다. (이태호, 「평양지역 8기의 고구려 벽화고분―벽화의 내용과 화풍」, 『남북 공동 고구려 벽화고분 보존실태조사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남북역사학자협의회, 2006) 이때 촬영이 가능한 대로 디지털카메라에 담아 두었다.

 

2.

그로부터 15년 뒤인 2020년 9월 중순 고구려 벽화 사진을 모아 책을 출간했다. (이태호,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평양지역 고구려 고분벽화의 디테일, 덕주, 2020) 작년 9월 내가 찍은 벽화 자료들을 살피니, 새삼 그때 실제로 대한 감명이 밀려왔다. 스케치북을 펼쳐 눈길 닿는 대로 그리기 시작했다. 책 출간에 맞춰 고구려 벽화를 방작(倣作)한 전시가 가능할까 싶어서, 책 편집이 진행되는 기간에 그리기 쉬운 문양이나 도상들을 먼저 시도해 보았다. 물론 매일 해오던 대로 붓펜으로 그린 수묵 드로잉이었다. 전시는 여건이 되지 못해 미루었다. 대신에 정년 이후 일기처럼 산과 꽃 등을 스케치해 오던 일과에서, 2020년 코로나 기간, 실견한 8곳 고분 외에 화집을 통해 간간이 고구려를 드로잉 하며 지냈다.

 

4~7세기에 집중해 그려진 고구려 고분벽화는 정말 황홀하다. 고분의 캄캄한 내부에 불빛이 들때, 선명한 무덤주인의 생전 생활 장면과 장식들이 그러했다. 붉은색과 초록색, 분홍색, 노랑색, 갈색 등이 흰색이나 먹선, 색채가 아름답고, 여러 신분의 사람들과 갖가지 동물, 신선과 용봉 같은 상상의 세계, 해와 달과 별의 하늘 세계, 연꽃이며 인동초 꽃이며 구름 등의 상서로운 문양들은 활기차다. 특히 후기 사신도나 장식무늬의 이미지들은 세련되고 정치한 회화성을 뽐낸다. 실제로 지구 전체 세계미술사에서 4~7세기에 고구려 만큼 그림다운, 수준 높은 회화 유산을 남긴 지역이나 나라를 찾기 쉽지 않다.

 

이러한 벽화를 따라 그리며 고구려를 다시 맛보았다. 덕분에 고구려의 색채와 선묘를 신바람나게 익혔다. 그릴수록 벽화들이 표현주의로, 추상주의로 다가왔다. 구름무늬나 장식화들은 천오백년 전의 고구려 고분벽화가 곧바로 현대미술로도 손색없지 싶었다. 고구려의 회화가 우리 민족예술 형식의 근원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너무나 현대적인 이미지여서 자랑스러웠다.

무엇보다 고구려 화가의 기세를 배우게 돼 좋았다. 무덤 현장에서 눈에 들었던 채색의 화려함 과 더불어, 탄력 넘치는 선묘가 가장 흥겨웠다. 후기 사신도 벽화의 경우는 웅혼한 형상에 섬세한 디테일을 조화시킨 기량이 일품인즉, 내 솜씨로는 턱없이 부족함으로 다가왔다. 호남리사신총의 현무, 진파리1호분의 주작, 강서중묘의 청룡과 백호를 그려보니 그러했다.

 

대신에 고구려 후기 벽화의 유려하고 우아한 감수성이 백제 미의식과 연관을 재확인하였다. 나는 일찍부터 고구려 후기 사신도 배치나 연화문 같은 도상이 백제의 영향이었음을 주장했었다. (이태호, 「삼국시대 후기 고구려와 백제의 사신도 벽화―회벽화와 석벽화의 표현 방식을 중심으로」, 고구려연구회 편, 『고구려 벽화의 세계』, 고구려연구 16집, 학연문화사, 2003 ; 「고구려 진파리1.4호분의 벽화와 삼국시대 후기 산수표현」, 『고구려 고분벽화』, 한국미술사연구소 출판부, 2012. ) 공주 송산리6호분 사신도나 무녕왕릉(623년/626년) 출토 금관 장식과 무덤 내벽을 쌓은 벽돌문양에 그 연원이 있음을 진파리1, 4호분 벽화 문양을 그려보며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3.

40여 점으로 꾸민 이번 ‘고구려를 그리다’ 전시는 2부로 구성된다.

 

1부는 앞서 거론한 고구려 고분벽화 따라 그리기이다. 그림 내용은 크게 산과 나무그림의 산수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四神圖)와 괴수나 상상의 수호 신상, 삼족오의 해와 두꺼비의 달, 연꽃과 인동초꽃 무늬, 구름무늬 등이다. 이들 벽화는 무덤 내부를 장식한 그림이지만, 도상이나 문양은 당시 고구려인들이 생각하던 사후 영생과 관련된 상징물이다. 살아생전의 부귀나 화복, 장수 등 상서로운 길상(吉祥) 도안들이고, 악귀를 막아달라는 벽사(僻邪)의 수호신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 이후 생활 장식 그림인, 이른바 민화(民畵)가 이를 잘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2부는 고구려 정서를 계승한 도상과 고구려 땅 스케치이다.

2006년 평양지역 조사 때 디카와 눈에 담아온, 고구려인이 살았던 산하의 풍경화들을 곁들였다. 덕흥리벽화고분과 무학산경, 동명왕릉 솔밭의 노송과 산풍경, 강서대묘 앞의 두 버드나무 등이다. 여기에 2019년 10월 무우수아카데미에서 고구려 고분벽화 강좌 때, 중국 길림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며 사생한 백두산과 고구려 유적 풍경화를 포함한다. 무용총과 각저총에서 본 대우산 정경, 호태왕릉, 왕릉에서 굽어본 압록강 등이다. 이번 개인전은 지난 3년간의 고구려 그림을 모은 것이고, 15년의 작업 결과라 볼 수 있겠다.

 

또 벽화를 따라 그리기 시작한 이후 고구려의 영혼이 깃든 고려나 조선 시대 작품을 만나면, 그려댔다. 그중에서 사찰에 모셔졌던 나무 물고기 목어(木魚) 조각, 조선 후기 청화백자 항아리의 봉황 그림, 고려 법천사지 지광국사 탑비의 산악도 음각 새김 등 몇 점을 전시에 포함했다. 여기에 인왕산과 북악산 설경도 고구려 산수화풍으로 골격을 표현해 보았다.

 

 

4.

이들을 드로잉 하며 전시를 꾸며볼까 생각할 즈음, 미술사 공부하며 눈에 익은 ‘우리 종이의 수묵채색화’나 50년 전 대학 시절 사용해봤던 ‘유화 그림’을 떠올려도 보았다. 둘 다 엄두가 나지 않아 시도하지 못했다. 프로 화가가 되기 쉽지 않은 모양이다.

최근 6~7년 동안 습관을 들여온 대로, 내 손에 편한 순면지를 썼다. 안료는 고구려 벽화와 유사한 수묵과 석채(石彩)를 선택했다. 서양 종이에 우리 전통 물감이 선명하고 명랑하게 나름 어울리는 것 같다.

 

이번 전시는 작년 9월에 출간한 『고구려의 황홀』 재판을 계기로 기획되었다.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덕주출판사 대표이자 무우수아카데미 원장이신 이연숙 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다시 감사드린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4 – 퇴계 선생의 귀향길 따라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4 – 퇴계 선생의 귀향길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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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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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안동 도산서원까지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꼬박 아흐레를 걸었다.

지난 4월 15일 오후 경복궁을 출발해, 4월 24일 저녁 안동 도산서원에 도착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마지막 귀향길 700리를 따라 걸었다.

경복궁 사정전, 동호 두모포, 봉은사, 아차산 광나루, 남양주 미음 나루, 덕소, 팔당, 운길산, 두물머리, 양평 한여울, 여주 이포보, 여주보, 관아와 청심루, 강천섬, 원주 흥원창, 충주 가흥창, 중앙탑, 관아, 단양, 죽령, 소백산, 풍기 관아, 영주 관아, 안동 도산서원.

걷는 일의 육체적인 힘듦은 스틱을 집고 진통제로 견디며, 4월의 국토 풍광을 만끽했다. 퇴계 선생님께 진정으로 감사드린다. 우리나라 땅, 국토의 봄날 자연변화가 이토록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열흘 내내 걸으며, 셔터를 눌러댔다. 하루에 500여 점씩 디카에 이미지를 담았다. 여느 답사 때보다, 몇 배를 더 찍은 것 같다.

열흘 동안 새벽과 저녁 자투리 시간도 덤으로 주어졌다. 최근 몇 년 새 일과로 정착된, 스케치에도 열중했다. 저녁 식사 후에는 그날 본 풍경을 되새겨 그렸다. 또 새벽마다 머물렀던 현장을 사생해 가니, 드로잉이 50여 점 넘게 쌓였다. 첫 그림은 출발지 광화문 앞에서 본 저녁 인왕산에 초승달이 지는 모습을 담았다. 출발 전야가 마침 음력 삼월 삼짇날인 터라, 어스름한 하늘에 노란 조각달이 처연한 풍경화를 만들어 주었다. (도 1)

내가 걸었던 길은 2019년 길 이름을 지은 도산서원이 처음 열었고, 올해에 책으로 발간되었다. (이광호 외,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푸른역사, 2021) 퇴계 이황은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을 겸직하며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다, 1569년 음력 3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발령받았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69세 때였다. 그리고 다음 해 세상을 떠났으니 마지막 귀향길인 셈이다. 물론 퇴계는 배를 타고, 말을 타고 내려갔다.

이를 기리는 올해 두 번째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는 4월 15일 퇴계가 마지막 관직을 지낸 경복궁 사정전 마당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광화문부터 두모포까지 그 일행과 첫날을 같이했다.

나는 이 퇴계 길을 연결하는 데 크게 일조한 지리학자 이기봉 박사를 따라나섰다. 이 박사는 국립중앙도서관 고문헌실에서 학예연구사로 근무하는 중이다. 평소 만남이나 답사길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여정에도 그에게 많은 걸 배우고 익혔다.

이 박사의 도시와 마을, 그 변화의 역사, 풍수, 지도학, 문명론 등은 우리시대 지리학자로 최고라는 확신을 지니게 한다. 특히 익숙한 것에 대해 새롭게 해주기에, 이기봉 박사와 만남은 늘 즐겁다. 그리고 내가 ‘대탄(大灘)’이라 하면 ‘한여울’이라고 부르라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역설할 때면 정말 존경스럽다. 물푸레여울, 배개나루, 흔바우나루, 똥뫼 등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불렀거나 지금도 부르는 땅이름을 발품 팔아 확인해온 점 탓에 더욱 그러하다.

남한강을 따라가는 충주까지 길은 나에게도 익숙한 편이다. 최근 여기 연재물에서 지우재 정수영의 사생화와 그림의 현장을 소개한 바도 있기 때문이다. (이태호, 답사스케치 3~8회, 2019) 나는 잘 아는 경치를 소개하며, 이기봉 박사에게 뒤돌아봄을 권했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공유하곤 했다.

덕소에서 팔당 강물 위로 전개되는 도성의 북산경, 양평 용문산과 추읍산의 세모꼴 형태미, 이포보의 해지는 낙조, 신륵사의 일출, 소백산의 녹음이 물드는 산 변화 등을 온몸으로 즐겼다. (도 2) 주자가 무이산에 은거하며 남긴 ‘무이산수쾌락(武夷山水快樂)’이 떠올랐다.

걸으며 다가오고 지나치는 한강-남한강도 해가 뜨고 지는 짧은 시간 못지않게 변화했다. 여울지는 봄 강의 아침, 물안개 지는 풍광은 걸음마다 바뀌는 게 신비롭기까지 했다. 남한강대교에서 강원도 원주와 충청북도 충주 사이, 그 강 풍경을 사생했다. (도 3) 이기봉 박사는 이 부론 지역의 여울을 남한강에서 눈과 귀로 살필 수 있는 가장 으뜸이라 한다.

단양에서 풍기로, 충청도서 경상도로 죽령을 넘으며, 아름다운 마을로 꼽히는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3리에서 여근곡을 발견하였다. 유명한 경주 여근곡보다 소규모지만, 형태는 더 선명했다. 마을 위 매바위골에는 남근석이 음양의 조화를 짝맞추었기에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미술로 본 한국의 에로티시즘(여성신문사, 1998) 저자로서 신발견이었다. (도 4, 5)

죽령을 넘어 경북 풍기 땅 사과밭 위로 솟은 소백산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한두 시간, 일이십 분 간격으로 뒤를 돌아보며 셔터를 눌렀다. 산 아래에서 연녹색이 황갈색조의 정상으로 번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뒤돌아볼 때마다 녹음이 스물스물 산정상으로 기어오르는 게 보이는 듯하였다. (도 6, 7)

4월 24일 해 질 무렵 안동 도산서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퇴계길을 나도 완주했다는 포만감보다, ‘괜히 걸었나’라는 생각이 먼저 스쳤다. 내내 산하의 풍경미를 최고로 즐기고 무릎과 허리의 통증을 감내하면서, 틈틈이 떠올랐던 화두이기도 했다. 걷는 열흘이 전체 인생의 노정이려니 했으니, 그 끝에 가면 ‘괜시리 살았나’ 하지 않을까 싶다.

어둑해진 도산서원 마당을 둘러보니, 죽어가는 듯하다 새잎을 늦게 내는 삼사백 살이 넘었다는 왕버들 두 그루가 눈에 들어 한그루를 그렸다. (도 8)

5월 5일부터 7일까지, 4월에 걸으면서 촬영이 미흡한 주요 장소를 차로 이동하며 보완했다. 해가 진 뒤에 도착해 사진을 못 찍은 양평 옛 관아 터로 솟은 용문산, 용문산과 추읍산이 떠오른 여주보, 섬강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원주 흥원창을 다시 들렀다. 직행하다 빠트린 곳인 원주 법흥사 터, 청풍호, 청풍 의림지, 중원 고구려비, 창동 마애불 등을 찾았다.

여주보에서 볼 때, 강물 위로 솟은 삼각형 추읍산과 병풍을 친 듯한 용문산은 오후 실루엣의 겹겹이 여전하였다. (이태호, 답사스케치 7회, 2019) 양평대교에서 연출된 남한강 일몰, 강하에서 새벽에 본 용문산 일출도 큰 울림을 주었다. 청평 나루에서 케이블카로 비봉산 정상에 올라가 전망대에서 굽어본 청풍호는 정말 장관이었다. 물에 떠서 굽이굽이 너울대는 수변 산세와 남쪽으로 뾰족뾰족 봉우리의 유난한 월악산 경관 등은 우리 ‘내륙의 산하가 이러하지!’ 하는 감탄이 절로 토해졌다. (도 9)

 

4월 ‘퇴계 선생 귀향길 걷기’에는, 응원을 와서 한나절 같이 걸었던 무우수아카데미 이연숙 원장의 후원이 있었다. 또 이 도보여행에는 나와 자주 답사해오던 티제이 김과 홍석근 평사리출판사 대표, 최민욱 씨가 일부 구간을 빼고 동행했다. 5월 차량 이동 답사에는 이 원장과 홍 대표, 그리고 양효주 씨가 함께했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3 – 신림 자하동 《일간정(一間亭)》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두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3 – 신림 자하동 《일간정(一間亭)》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두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3 – 신림 자하동 《일간정(一間亭)》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두 번째
05/0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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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동이나 봉천동, 혹은 더 멀리 동호나 양화진 터에서 남쪽이나 남서(南西) 방향을 관망하면 관악산과 삼성산과 호암산 실루엣이 동서로 고만고만 나란하다. 왼쪽부터 관악산은 바위산 능선의 굴곡들이, 삼성산은 삼각형이, 호암산은 둥그런 호랑이의 머리 모양이 두드러진다. 작년 봄에 시흥 유적과 호암산 주변을 조망하기 위해 들렀던 봉천동 언덕 위 용주사 마당에 다시 섰다. 세 산이 나란히 놓인 모습을 좌우로 길게 그렸다. (도 1) 서울의 남악(南岳)인 관악산은 맨 왼쪽에 위치한다.

관악산은 신림동 서울대학교 정문으로 옮겨 더 가까이서 본 모습을 별도로 그렸다. (도 2) 갓 모습을 연상시킨다 하여 ‘갓뫼’ 혹은 ‘간뫼’로 불려온 관악산(冠岳山)은 해발 632.2m의 연주봉(戀主峯)을 중심으로 돌산 주름의 리듬이 돋보이며, 그 산세가 아름다워 소금강 혹은 서금강(西金剛)으로 불려왔다. 서울 남쪽의 진산(鎭山)으로 과천, 안양, 시흥, 신림, 봉천 일대의 주산이 지닌 카리스마를 적절히 내뿜는다.

《한·임강명승도권》의 그림 순서로 보면,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은 관아 뜰의 정자 <취향정(翠香亭)>에 담긴 봄 정취와 동쪽 책방 담장 너머 <검지산(黔芝山)> 전경을 그리고 나서, 관악산 기슭 자하동(紫霞洞)의 <일간정(一間亭)>을 찾았다. 시흥 관아에서 동쪽으로 검지산 너머에 있는 명소이다. 이들 석 점에는 모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림의 오른쪽 시작 부분에 “모정은 현의 동북 변 10리에 있다. (茅亭在縣東北邊十里地)” “이름은 일간정이라 불렸고, 북쪽 자하동의 최고 좋은 곳이다. (稱名一間亭者 北紫霞洞最好處也)”라고 행서체로 밝혀 놓았다. (도 3) 두 문장 글씨의 서체와 먹색이 살짝 다르다. 모정의 위치를 쓴 담묵의 문장은 화가 정수영이, 진한 농묵의 지명을 밝힌 문장은 친구인 강관이 쓴 서풍이다.

일간정의 모양은 한 칸 정자라는 이름처럼 네 기둥에 초가지붕을 얹은 소박한 정자이다. 시흥 관아 뜰의 <취향정>과 닮아 흥미롭다. 관민이 유사하게 조성한 초정(草亭)의 형식 같다. 관청의 정자다움은 취향정의 낮은 난간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일간정> 그림의 정자가 설치된 곳은 온통 각진 바위들로 가득하다. 화면 오른쪽은 바위 결을 따라 층층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가 보인다. 그 왼편으로 정자에 오르는 계단이 조성되어 있다. 정자 아래에는 작은 바위 못 정도 같다. 소나무 세 그루와 활엽수들은 봄꽃이 모두 지고, 신록이 제법 어울린 풍경이다. 화면의 왼쪽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두 채의 초가집과 세 덩어리의 계곡이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다. 화면 전체는 빈 여백이 거의 없다. 나무며 바위며 물길 표현은 정수영 특유의 담묵담채와 갈필 화법이 와글와글 구사되어 있다.

<일간정>은 관아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관악산 기슭 신림의 유명한 절경, 자하동에 있었다. 내가 관악산을 올려다보며 그린 서울대 정문이 곧 옛 자하동이다. 현장에 서보면 ‘자하(紫霞)’, 곧 붉은 노을이 아름다운 장소를 연상케 하는 시어와 거리가 멀다. 옴팡진 돌산 계곡이다. 일반적으로 자하동이 고개를 뜻하는 ‘잣’에서 연유하는 것처럼, 호암산 동서를 오가는 산길이나 신림에서 시흥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자하동에는 1960년대 후반 골프장이 들어서고, 그 위에 1970년대 후반 서울대학교가 들어섰다. 그 이전 지도에는 ‘자하동’이 꼭 등장했고, 대림천으로 흐르는 개울 주변에는 여러 가구의 적지 않은 마을이 있었다. (도 4) 실제로 의성 김씨 집성촌으로 60여 가구의 전통마을이 유지되었고, 1960~70년 사이에는 <꼬마 신랑>(1970)이나 <사자성>(1964) 같은 사극영화 촬영지였다. (『신림동』, 서울역사박물관, 2015 ; 이동헌 글·류백헌 사진, 『사람과 산』, 2020.10) “모정은 현의 동북 변 10리에 있다.”라고 했듯이, 시흥 호압사에서 자하동까지 3.5km로 한 시간 남짓의 거리이다. 미림고개, 산북터널을 지나는 이 길 따라 현재 6515번 버스가 왕래한다.

현재 자하동 마을 신목(神木)인 늙은 느티나무가 있던 곳에 서울대학교 정문이 들어서고, 마을에 모셔진 미륵불 석상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실개천 계곡이 깔끔하게 정비되어 본디 옛 모습은 완연히 잃었다.

정문 로타리에서 서쪽을 보면, 돌산의 암반을 왕창 떨어낸 벼랑언덕이 보인다. (도 5) 그 아래 관악산 입구 공원을 조성했고, 한 칸짜리 정자를 세웠다. 학교 공사에 사용했던 모양으로 암벽은 상당히 많은 양을 떼어낸 듯하다. 또 공원 입구에 인공폭포를 조성하고 ‘폭포 쉼터’라 표시판을 달았다. (도 6) 돌산의 화강암 암반과 폭포가 있던 공원의 원형을 상상하면, 정수영의 <일간정> 그림과 잘 맞아떨어져 흥미롭다. 암벽 벼랑 위에 있던 ‘일간정’만 초가지붕을 기와로 바꾸어 아래로 내려 옮긴 셈이다.

 

문인화가 신위와 인연이 있던 곳, 자하동

<일간정> 그림에서 강관이 밝힌 자하동과 그 동천(洞天)의 ‘일간정’은 19세기 시흥현 지도에 꼭 표기되어 있다. 그런 만큼 조선 후기에 여러 문인의 관악산 유람기나 시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일간정은 조선 후기 최석정, 체제공, 서영보, 강준흠, 임득명 등의 문집에 기행 시문으로 전한다. 자하동은 조선 후기 문인 관료이자 시인, 묵죽도를 잘 그린 서화가 삼절(三絶)로 꼽히는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5 )와 밀접하다.

이들 가운데 신위와 절친인 죽석관 서영보(竹石館 徐榮輔, 1759~1816)의 「유자하동기(遊紫霞洞記)」가 <일간정> 그림의 이미지와 흡사하다. (徐榮輔, 『竹石館遺集』 第三冊) 이 유기(遊記)는 1786년 신위의 초청으로 서영보가 자하동을 찾아 쓴 글이다.

 

“관악산(冠岳山)과 검지산(黔芝山) 사이에 수석(水石)의 경치가 빼어난 곳이 있으니 바로 신림(新林)이고, 신림에서 가장 그윽하면서도 더욱 경치가 좋은 곳이 자하동(紫霞洞)이다. 두 산에서부터 흘러오는 물이 모여서 신림동에서 호리병 주둥이로 나오듯이 흘러나와, 강태사(姜太師)의 서원 앞에서 굴절하여 남쪽으로 흘러든다. 물길을 따라 점차 동쪽으로 몇 리를 가면 작은 봉우리가 수풀 위로 보일락 말락 하는데, 이것이 국사봉(國士峯)이다. 그 아래로 수목이 울창하고 인가가 은은히 보인다. 아름드리 늙은 느티나무 세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에 이로당(二老堂)의 옛터가 있다. 이곳이 신씨(申氏)의 자하동 별업(別業)이다.

개울을 따라 점차 올라가면 갑자기 두 바위가 개울을 끼고 마치 문처럼 마주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여기서부터 바위가 더 커지는데 개울은 양쪽 벼랑에 이르기까지 바닥이 모두 바위로 되어 있다. 물가에 늘어선 바위가 어떤 것은 용마루처럼 비스듬히 서 있고 어떤 것은 평상처럼 펑퍼짐한데, 색깔은 모두 갈아 놓은 듯 반들반들하여, 바둑을 둘 수 있고 시를 쓰기에도 좋다. 조금 평평하고 널찍한 꼭대기에 작은 정자가 있는데, 개울 동북쪽 굽이진 곳에 있어서 서남쪽으로 막 흘러나오는 개울물을 굽어보게 되어 있다. 연주대(戀主臺)에서 정자 동쪽에 이르기까지 물길이 넓게 퍼지고 모여서 감돌다가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져 작은 폭포가 된다. 그 곁에 ‘제일계산(第一溪山)’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개울물이 정자 발치를 돌아 굽이굽이 흐르면서 층층으로 소리 내며 부딪쳐 떨어진다. …중략… 내가 처음에 자하동 주인과 약속하여 관악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려고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기록이 여기에 그친다.” (정동화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7)

 

여기서 신림은 지금의 신림동이다. 강태사는 고려 강감찬(姜邯贊)을 말하며, 서원은 서견, 이원익 등의 위패를 함께 모셨던 충현서원(忠賢書院)이다.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고, 그 터는 지금 광명시 소하동에 있다. 신씨(申氏)의 자하동 별업(別業) 이로당(二老堂)은 신위의 고조할아버지인 신여석(申汝晳)과 신여철(申汝哲) 형제가 세웠던 것으로 전한다. 이는 숙종 시절의 문신 존와 최석정(存窩 崔錫鼎, 1646~1715)이 쓴 「이로당기」에 자세하다. 이로당(二老堂)은 서너 칸이었고, 화재로 사라진 이후 신여석의 차남 만오당 신확(晩梧堂 申瓁, 1652~1698)이 이곳에 작은 모정(茅亭)을 지었다. 또 바위에 큰 글씨 ‘제일계산(第一溪山)’을 새겼다고 한다. (崔錫鼎, 『明谷集』) 이 모정이 ‘일간정’ 아닐까 싶은즉, 돌산이 파괴되며 사라진 듯하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전사한 신립(申砬)의 후손이다. 신위가 어린 시절부터 이곳 종가와 인연을 맺고 지냈기에 ‘자하(紫霞)’라는 아호를 쓰게 되었다.

평산 신씨로 자가 한수(漢叟)인 신위는 자하(紫霞) 외에 경수당(警修堂)이라는 아호도 썼다. 정조 23년(1799) 춘당대 문과에 급제하고, 곡산부사 춘천부사 강화유수 이조참판 병조참판 도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순조 12년(1812) 진주 겸 주청사(陳奏兼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을 다녀왔으며, 옹방강(翁方綱) 학파와 교유하며 청나라의 문물과 학예를 접했다.

신위는 서영보, 신대우 등과 어울린 소론계열이었으면서도 노론계의 김조순이나 김정희, 남인계의 정약용과 정학연 부자 등과 만났고, 초의선사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추사 김정희와 어울리며 정치적 부침도 있었고, 지방관을 통해 현실을 통감하며 관직에 대한 환멸로 은둔을 반복하기도 했다. 이를 토대로 하면서 적서차별이나 여성에 대한 인습을 벗어나려는 노력과 더불어, 조선 시나 무악 등에 관해 취미를 보인 신위의 시문학은 조선 말기에 큰 영향을 미쳐 문학사의 위상도 높다.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자하시집(紫霞詩集)』)

신위의 서화는 두 아들 신명준과 신명연, 그리고 추사일파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특히 가벼운 수묵 필치의 대나무 그림은 이정(李霆), 유덕장(柳德章)과 더불어 신위를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등극케 했고, 남종문인화풍의 산수도를 즐겨 그렸다.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동기창체(董其昌體)를 기반으로 유려하고 탄력 있는 행서체를 즐겨 썼다. (『자하 신위 탄생 250주년 기념 서화전, 자주빛 노을에 물들다』, 국립중앙박물관, 2019) 신위가 70세에 쓴 고법 공부에 대한 서론(書論)을 소개한다. (도 7)

 

“옛것을 임모하는 법도는 다만 그 정신을 얻고 닮음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크게 발전한다. 나도 일찍이 그리 노력해왔는데, 재주가 미치지 못했기에 부끄럽다. 자하 일흔 노인이 써서 알린다.” (臨古之法 但得其意 不求其似 斯爲上乘 余嘗從事於斯 而才有不逮 是可媿耳 紫霞七十叟 書因識)

 

현재 신림동 계곡 자하동과 함께 신위와 관련한 유적은 사라졌다. 그 대신에 자하 신위의 기념 공간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근처로 옮겨지고, 작은 연못가에 아담한 기림비와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도 8)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2 – 시흥 검지산(호암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한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2 – 시흥 검지산(호암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한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2 – 시흥 검지산(호암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한 번째
03/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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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은 1796년 여름 남한강 선유(船遊)를 마치고 우이동 계곡 <재간정>을 찾았다. 그리고 가을 포천 영평지역 창옥병 근처 <백운담> <사암서원> <금수정>을 거쳐 <화적연>에서 그해 여정을 마쳤다. (앞의 ‘답사와 스케치 여정’ 연재 참조) 《한임강명승도권》의 순서에 따르면, 정수영은 이듬해 1797년 봄 시흥현(始興縣)을 방문했다. 지금 금천구 시흥동이다. 나는 2019년~2020년에 지우재 여정을 따라 답사하면서, 작년 봄에 이곳을 둘러보았다.

시흥동 중심인 옛 관아 터에 서니, 동쪽으로 호암산(虎巖山)이 병풍처럼 두르고 서쪽으로 안양천과 주변의 들녘이 전개된다. 안양천은 북쪽으로 선유도에서 한강과 합류한다. 해발 393m의 호암산은 동편의 해발 632.2m 관악산과 480m 삼성산에 이은 줄기답게 바위산 경치를 뽐낸다. 단순한 암산의 형태가 스케치북을 펼치게 한다. 산 아래 근경에는 지금의 도시 풍광을 생략하고 옛터를 지켜온 노거수 은행나무 세 그루를 배치해 그렸다. (도 1, 2)

근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빼곡하게 들어서 산 중턱까지 시야를 가린다. 하지만 그 아래 은행나무를 포함해 동네 곳곳의 느티나무 향나무 등 노거수들이나 고려 석탑 등이 시흥의 역사를 말해준다. 8백 살 이상 나이 든 은행나무들은 건물들 틈과 길가에서 옹색한 대로 생명을 유지해 있다. 조선 시대에는 기와집 건물의 관청, 초가 마을, 그리고 노거수들이 호암산과 어울려 장관을 이루었을 법하다.

올해 3월 초 다시 찾아보니 이들 가운데 관아 터의 표시석이 놓이고 가장 큰 은행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세 그루 중 제일 키가 크기도 하려니와, 중앙의 죽은 것 같은 덩치의 고목에도 물기운이 오르는 듯 푸릇한 잔가지와 새잎이 자라 있었다. 그 봄 색이 뭉클해 스케치했다. (도 3, 4) 알림판에는 1968년 보호수 지정 당시 수령이 830년이고, 14m 높이에 나무 밑 둘레가 8.6m이란다. 주소는 시흥동 386-35번지이다.

호암산의 다른 이름은 검지산(黔之山)이다. 시흥의 이전 이름은 금천현(衿川縣)이었다. 북쪽의 한양과 양천 동작 노량, 동쪽의 과천, 남서쪽의 안양 수원 인천 등으로 열린 교통의 요지였다. 한때는 과천과 병합해 금과현, 혹은 양천과 병합해 금양현이 되기도 했다.

금천이 시흥으로 바뀐 것은 종6품 현감을 종5품 현령으로 승급하면서부터이다. 정조 19년(1795) 윤2 월 1일에 시행되었다. (『日省錄』) 이때 현감 홍경후(洪景厚)가 현령으로 승급되었다. 특히 정조는 화성으로 이장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 참배를 위해 행행(幸行)이 잦았다. 그 가운데 정조 19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의 행사가 가장 성대했다. 고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회갑을 맞은 해이고 이를 위해 대규모 연회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한양과 화성, 백 리의 중간 길목인 시흥현에는 임금의 행차를 위해 도로가 확장되고 이동하는 가운데 머무는 행궁이 조성되었다. 그만큼 시흥이 중요한 거점으로 격상되었고, 종5품 현령 배치는 정조의 능행(陵行)에 따른 배려였던 셈이다.

1795년 윤2월 을묘년 큰 행사를 담은 《화성능행도 8폭 병풍》도 제작되었다. 이 가운데 <환어행렬도>가 바로 화성행사들을 마치고 궁궐로 돌아오며 시흥 행궁(行宮)에 들르는 행렬도이다. 지금의 시흥동 금하로를 따라 행차하는, 길다란 이동장면을 ‘乙’ 자형으로 부감해 포착했다. 여기에 혜경궁홍씨의 가마, 관료들과 호위 군사 등 행사 참여자들과 길가 주막이나 엿장수 아이 등 구경꾼의 움직임을 디테일하게 살려낸, 스팩타클한 걸작 중의 걸작 궁중 기록화이다. 김득신, 장한종, 이인문 등 당대 손꼽히는 일급 화원들이 참여해 그렸다. (도 5)

 

시흥 관아에 머물며 그린 <취향정><검지산>

정수영은 《한임강명승도권》에 3점의 시흥 풍경을 담았다. <취향정>과 <검지산> 2점은 시흥현 관아에서 머물며 그린 것이다. 또 <일간정(一間亭)>은 관아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관악산 기슭의 유명한 명소 자하동(紫霞洞)에 있었다. 한 지역을 연달아 그린 탓인지 세 점은 아랫부분이 중첩되어 있다.

시흥의 첫 그림 <취향정(翠香亭)>은 관아의 뜰에 있던 정자 같다. 그림의 오른쪽 위에 “금천 관아의 동쪽 취향정(衿川衙東 翠香亭)”이라고 밝혀 놓았다. (도 6) 이로 미루어볼 때, 정수영의 이곳 방문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여기서 ‘금천’이라 쓴 것은 ‘시흥’으로 지명이 바뀐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은 탓이다. 한편으로는 ‘옥병서원’을 ‘사암서원’이라 표기했던 것처럼, 개명하기 이전 지명을 고수한 점은 재야 문인 정수영의 정치적 경향성일 법하다. 호암산보다 검지산이라는 지명을 쓴 것도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푸른 향기를 즐기는 정자 <취향정>은 초가지붕에 단칸으로 소박하지만, 조선 시대 관청에 조성하던 연못의 일반화된 형태이다. 두 곳 방형 못에 각각 섬을 만들고. 섬에는 소나무를 주요 수종으로 삼아 대여섯 그루씩 심었다. 화면의 오른쪽 목책 다리가 놓이고 초정(草亭)이 시설된 석축 섬에는 소나무가 6그루 보이고, 왼쪽 섬에는 소나무 5그루와 키 큰 활엽수 고목 한그루가 서 있다. 연못가에는 분홍 복사꽃들이 만발해 봄 정취 가득하다. 담 밖 언덕의 봄 나무들과 더불어 정수영의 미숙한 듯, 가벼운 담묵담채 화풍을 잘 보여준다.

관아의 동쪽 짚 이엉을 얹은 수평 담장은 다음의 <검지산(黔芝山)> 그림으로도 이어진다. 정수영은 관아 동쪽 연못 그림의 중단을 지나는 담장과 같은 형태의 담을 근경에 횡대로 깔고, 그 너머로 본 검지산 전경을 포착했다. 담 너머 언덕이 살짝 보이는 점도 동일 장소임을 알게 해준다. 기다란 담장 중간쯤에는 작은 문이 나 있다. 그리고 화면 오른쪽 위에 “책방 동쪽 담장 밖(冊房東墻外)”이라고 제목을 써넣었다. (도 7) 책방의 동쪽 담장이 관아의 동쪽 끝이니 동헌(東軒)에 연계된 공간이었을 법하다.

여기서 ‘책방(冊房)’이 주목된다. 고을 수령이 되면 근무처에 친구나 친척, 지인을 책객(冊客)으로 곁에 두고 일할 수 있었다. 책방은 이방, 형방, 호방 등 6방 향리의 명칭에 맞추어 부친 이름으로 제7방인 셈이다. 시서(詩書)를 나누는 문인 취향의 명칭이지만, 책방이 수령 통치에서 상당한 정치적 위치를 점유했던 모양이다. 책방은 고을을 다니며 여러 현황이나 정보를 파악해 수령에게 알렸고, 이 과정에서 때론 권력을 행사하며 탐관오리의 역할마저 했다. ‘현감은 빈 털털이로 파직될 가능성이 있지만, 책방을 수행해 가난을 벗어나지 않은 자가 없었다’라고 전해질 정도이다. (尹愭, 『無名子集』)

정수영이 시흥현령의 책방과 지인이던지, 혹시 그 자신이 책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임강명승도권》의 일정상 영평과 도봉산이 동일 라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평에서 시흥을 들렀다가 다시 영평 길목인 도봉산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또 검지산과 일간정 그림의 활엽수에는 봄 정취나 색감이 사라진 상태여서, 정수영이 여름까지 시흥 관아에 머물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때 시흥현령은 김사희(金思羲, 1753~?)였다. 정조 19년(1795) 윤2월 17일 발령을 받았다. 정조시절 최대규모의 화성 행행이 끝난 다음 날이었다. 현령으로 승격한 직후 첫 발령자였던, 김사희는 영조 49년(1773) 진사시험에 급제한 뒤 주로 지방관으로 관직생활을 했으며,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시흥현령 시절 임금과 잦은 대면으로, 정조 21년(1797)에는 수원판관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日省錄』) 다른 교우관계나 행적으로 알려진 게 드물고, 또 정수영과 인연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한임강명승도권》과 관련해 정수영이 마지막 토산을 찾았는데, 김사희는 그 십여 년 전 정조 9넌(1785)에 토산현감을 지냈다.

그림의 상단 왼쪽에는 “한양과 가깝게 질러 통하는 지름길(抵京捷路)”라고 적었다. 현재는 신림동으로 넘어가는 도로에 산북터널이 뚫려 있다. 또 《한임강명승도권》의 다른 장면에도 자주 썼듯이, 강관이 “검지산 한 줄기, 관악 명산과 닮지 않았다. 이 그림은 음식을 잔뜩 늘어놓은 듯하다. (黔芝一支終不若冠岳名山 此圖或近於飣餖)”라고 제발(題跋)을 썼다. 이를 강관의 필적으로 확인함과 함께, 그동안 관악산으로 알려져 온 이 그림을 최근 신진 연구자가 <검지산>으로 밝혔다. (한상윤, 「선유와 유산으로 본 정수영의 한임강유람도권 고찰」, 『미술자료』 96, 국립중앙박물관, 2019.)

검지산(黔芝山)은 검은 영지가 많이 자란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며, 금천(衿川)도 이 검지(黔芝) 혹은 금지(黔芝)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옛 기록이나 고지도에는 ‘검지산’도 있지만, 산 정상의 호랑이 바위로 인해 지어진 ‘호암산(虎巖山)’을 같이 썼다. 특히 호암산 호랑이가 노려보는 바람에 한양도성 건설에 지장을 받자, 호암산 꼬리 부분을 누르기 위해 호압사(虎壓寺)를 세웠다는 무학대사 설이나 태종 시절 창건설화와 관련을 볼 때 그렇다.

<검지산(黔芝山)>은 지우재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귄》 실경화 가운데 여주 <휴류암> 그림과 함께 회화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진경산수화로 꼽을 만하다. 실경과 닮게 그리는 데는 다른 그림들이나 마찬가지로 부족하지만, 나무나 담장 묘사에서 미숙함이 도드라지지 않으니 그런 것 같다. 강관이 ‘다 먹지 못할 음식물을 잔뜩 늘어놓은 듯한(此圖或近於飣餖)’ 산세 표현이라고 꼬집었으나, 근경 수평 담장 위로 네모 형태를 동어반복으로 3~7층씩 횡렬로 쌓은 검지산 암산 경치의 단순한 구성이 파격이면서 돋보인다. 토산에 비스듬히 사선으로 석치(石齒)가 박힌 암산을 정수영답게 변형 리듬으로 재해석한 개성미라 하겠다. (도 2, 8, 9)

옆으로 긴 산 풍경 설정을 보면, 토산 주름 위로 드러난 바위들도 나름대로 그 주름을 따라 강약의 리듬감이 유연한 편이다. 한양을 넘어가는 북쪽 지름길에는 바위들과 봄 색의 나무들이 어우러지게 변화를 주었다. 그림에서 호암산 왼쪽에는 호랑이 바위와 호압사, 흔들바위가 위치한다. 산 능선의 오른쪽으로 구분한 뾰족한 봉우리들은 불영암이 있는 호암산성인 셈이다. 신라 후기 성곽으로 추정되며, 한우물 석구지(石狗池)와 석구로 여겨지는 동물상이 남아 있다. 호압사에서 불영암(佛影庵)에 이르는 능선은 안양천 구름산으로 지는 저녁놀을 최고로 감상할 수 있는 명소이다.

<검지산(黔芝山)> 화면 중앙의 산기슭에 보이는 관청 건물은 행궁이겠고, 홍살문과 노거수가 있는 오른쪽 단독건물은 성황단 정도로 여겨진다. 이렇게 관아 최고의 산 풍경이 전개되는 요지에 거처가 있었으니, 고을 정치경제의 알짜배기인 책관(冊官)의 권한과 위상을 새롭게 그려보게 한다.

정수영은 시흥의 두 곳을 그린 뒤, 현(縣) 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십 리가량 떨어진 자하동(紫霞洞)의 <일간정(一間亭)>을 찾았다. 관악산 아래 지금 서울대학교가 들어선 곳에 있었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