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4 – 퇴계 선생의 귀향길 따라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4 – 퇴계 선생의 귀향길 따라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4 – 퇴계 선생의 귀향길 따라
05/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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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안동 도산서원까지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꼬박 아흐레를 걸었다.

지난 4월 15일 오후 경복궁을 출발해, 4월 24일 저녁 안동 도산서원에 도착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마지막 귀향길 700리를 따라 걸었다.

경복궁 사정전, 동호 두모포, 봉은사, 아차산 광나루, 남양주 미음 나루, 덕소, 팔당, 운길산, 두물머리, 양평 한여울, 여주 이포보, 여주보, 관아와 청심루, 강천섬, 원주 흥원창, 충주 가흥창, 중앙탑, 관아, 단양, 죽령, 소백산, 풍기 관아, 영주 관아, 안동 도산서원.

걷는 일의 육체적인 힘듦은 스틱을 집고 진통제로 견디며, 4월의 국토 풍광을 만끽했다. 퇴계 선생님께 진정으로 감사드린다. 우리나라 땅, 국토의 봄날 자연변화가 이토록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열흘 내내 걸으며, 셔터를 눌러댔다. 하루에 500여 점씩 디카에 이미지를 담았다. 여느 답사 때보다, 몇 배를 더 찍은 것 같다.

열흘 동안 새벽과 저녁 자투리 시간도 덤으로 주어졌다. 최근 몇 년 새 일과로 정착된, 스케치에도 열중했다. 저녁 식사 후에는 그날 본 풍경을 되새겨 그렸다. 또 새벽마다 머물렀던 현장을 사생해 가니, 드로잉이 50여 점 넘게 쌓였다. 첫 그림은 출발지 광화문 앞에서 본 저녁 인왕산에 초승달이 지는 모습을 담았다. 출발 전야가 마침 음력 삼월 삼짇날인 터라, 어스름한 하늘에 노란 조각달이 처연한 풍경화를 만들어 주었다. (도 1)

내가 걸었던 길은 2019년 길 이름을 지은 도산서원이 처음 열었고, 올해에 책으로 발간되었다. (이광호 외,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푸른역사, 2021) 퇴계 이황은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을 겸직하며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다, 1569년 음력 3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발령받았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69세 때였다. 그리고 다음 해 세상을 떠났으니 마지막 귀향길인 셈이다. 물론 퇴계는 배를 타고, 말을 타고 내려갔다.

이를 기리는 올해 두 번째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는 4월 15일 퇴계가 마지막 관직을 지낸 경복궁 사정전 마당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광화문부터 두모포까지 그 일행과 첫날을 같이했다.

나는 이 퇴계 길을 연결하는 데 크게 일조한 지리학자 이기봉 박사를 따라나섰다. 이 박사는 국립중앙도서관 고문헌실에서 학예연구사로 근무하는 중이다. 평소 만남이나 답사길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여정에도 그에게 많은 걸 배우고 익혔다.

이 박사의 도시와 마을, 그 변화의 역사, 풍수, 지도학, 문명론 등은 우리시대 지리학자로 최고라는 확신을 지니게 한다. 특히 익숙한 것에 대해 새롭게 해주기에, 이기봉 박사와 만남은 늘 즐겁다. 그리고 내가 ‘대탄(大灘)’이라 하면 ‘한여울’이라고 부르라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역설할 때면 정말 존경스럽다. 물푸레여울, 배개나루, 흔바우나루, 똥뫼 등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불렀거나 지금도 부르는 땅이름을 발품 팔아 확인해온 점 탓에 더욱 그러하다.

남한강을 따라가는 충주까지 길은 나에게도 익숙한 편이다. 최근 여기 연재물에서 지우재 정수영의 사생화와 그림의 현장을 소개한 바도 있기 때문이다. (이태호, 답사스케치 3~8회, 2019) 나는 잘 아는 경치를 소개하며, 이기봉 박사에게 뒤돌아봄을 권했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공유하곤 했다.

덕소에서 팔당 강물 위로 전개되는 도성의 북산경, 양평 용문산과 추읍산의 세모꼴 형태미, 이포보의 해지는 낙조, 신륵사의 일출, 소백산의 녹음이 물드는 산 변화 등을 온몸으로 즐겼다. (도 2) 주자가 무이산에 은거하며 남긴 ‘무이산수쾌락(武夷山水快樂)’이 떠올랐다.

걸으며 다가오고 지나치는 한강-남한강도 해가 뜨고 지는 짧은 시간 못지않게 변화했다. 여울지는 봄 강의 아침, 물안개 지는 풍광은 걸음마다 바뀌는 게 신비롭기까지 했다. 남한강대교에서 강원도 원주와 충청북도 충주 사이, 그 강 풍경을 사생했다. (도 3) 이기봉 박사는 이 부론 지역의 여울을 남한강에서 눈과 귀로 살필 수 있는 가장 으뜸이라 한다.

단양에서 풍기로, 충청도서 경상도로 죽령을 넘으며, 아름다운 마을로 꼽히는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3리에서 여근곡을 발견하였다. 유명한 경주 여근곡보다 소규모지만, 형태는 더 선명했다. 마을 위 매바위골에는 남근석이 음양의 조화를 짝맞추었기에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미술로 본 한국의 에로티시즘(여성신문사, 1998) 저자로서 신발견이었다. (도 4, 5)

죽령을 넘어 경북 풍기 땅 사과밭 위로 솟은 소백산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한두 시간, 일이십 분 간격으로 뒤를 돌아보며 셔터를 눌렀다. 산 아래에서 연녹색이 황갈색조의 정상으로 번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뒤돌아볼 때마다 녹음이 스물스물 산정상으로 기어오르는 게 보이는 듯하였다. (도 6, 7)

4월 24일 해 질 무렵 안동 도산서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퇴계길을 나도 완주했다는 포만감보다, ‘괜히 걸었나’라는 생각이 먼저 스쳤다. 내내 산하의 풍경미를 최고로 즐기고 무릎과 허리의 통증을 감내하면서, 틈틈이 떠올랐던 화두이기도 했다. 걷는 열흘이 전체 인생의 노정이려니 했으니, 그 끝에 가면 ‘괜시리 살았나’ 하지 않을까 싶다.

어둑해진 도산서원 마당을 둘러보니, 죽어가는 듯하다 새잎을 늦게 내는 삼사백 살이 넘었다는 왕버들 두 그루가 눈에 들어 한그루를 그렸다. (도 8)

5월 5일부터 7일까지, 4월에 걸으면서 촬영이 미흡한 주요 장소를 차로 이동하며 보완했다. 해가 진 뒤에 도착해 사진을 못 찍은 양평 옛 관아 터로 솟은 용문산, 용문산과 추읍산이 떠오른 여주보, 섬강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원주 흥원창을 다시 들렀다. 직행하다 빠트린 곳인 원주 법흥사 터, 청풍호, 청풍 의림지, 중원 고구려비, 창동 마애불 등을 찾았다.

여주보에서 볼 때, 강물 위로 솟은 삼각형 추읍산과 병풍을 친 듯한 용문산은 오후 실루엣의 겹겹이 여전하였다. (이태호, 답사스케치 7회, 2019) 양평대교에서 연출된 남한강 일몰, 강하에서 새벽에 본 용문산 일출도 큰 울림을 주었다. 청평 나루에서 케이블카로 비봉산 정상에 올라가 전망대에서 굽어본 청풍호는 정말 장관이었다. 물에 떠서 굽이굽이 너울대는 수변 산세와 남쪽으로 뾰족뾰족 봉우리의 유난한 월악산 경관 등은 우리 ‘내륙의 산하가 이러하지!’ 하는 감탄이 절로 토해졌다. (도 9)

 

4월 ‘퇴계 선생 귀향길 걷기’에는, 응원을 와서 한나절 같이 걸었던 무우수아카데미 이연숙 원장의 후원이 있었다. 또 이 도보여행에는 나와 자주 답사해오던 티제이 김과 홍석근 평사리출판사 대표, 최민욱 씨가 일부 구간을 빼고 동행했다. 5월 차량 이동 답사에는 이 원장과 홍 대표, 그리고 양효주 씨가 함께했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3 – 신림 자하동 《일간정(一間亭)》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두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3 – 신림 자하동 《일간정(一間亭)》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두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3 – 신림 자하동 《일간정(一間亭)》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두 번째
05/0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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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동이나 봉천동, 혹은 더 멀리 동호나 양화진 터에서 남쪽이나 남서(南西) 방향을 관망하면 관악산과 삼성산과 호암산 실루엣이 동서로 고만고만 나란하다. 왼쪽부터 관악산은 바위산 능선의 굴곡들이, 삼성산은 삼각형이, 호암산은 둥그런 호랑이의 머리 모양이 두드러진다. 작년 봄에 시흥 유적과 호암산 주변을 조망하기 위해 들렀던 봉천동 언덕 위 용주사 마당에 다시 섰다. 세 산이 나란히 놓인 모습을 좌우로 길게 그렸다. (도 1) 서울의 남악(南岳)인 관악산은 맨 왼쪽에 위치한다.

관악산은 신림동 서울대학교 정문으로 옮겨 더 가까이서 본 모습을 별도로 그렸다. (도 2) 갓 모습을 연상시킨다 하여 ‘갓뫼’ 혹은 ‘간뫼’로 불려온 관악산(冠岳山)은 해발 632.2m의 연주봉(戀主峯)을 중심으로 돌산 주름의 리듬이 돋보이며, 그 산세가 아름다워 소금강 혹은 서금강(西金剛)으로 불려왔다. 서울 남쪽의 진산(鎭山)으로 과천, 안양, 시흥, 신림, 봉천 일대의 주산이 지닌 카리스마를 적절히 내뿜는다.

《한·임강명승도권》의 그림 순서로 보면,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은 관아 뜰의 정자 <취향정(翠香亭)>에 담긴 봄 정취와 동쪽 책방 담장 너머 <검지산(黔芝山)> 전경을 그리고 나서, 관악산 기슭 자하동(紫霞洞)의 <일간정(一間亭)>을 찾았다. 시흥 관아에서 동쪽으로 검지산 너머에 있는 명소이다. 이들 석 점에는 모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림의 오른쪽 시작 부분에 “모정은 현의 동북 변 10리에 있다. (茅亭在縣東北邊十里地)” “이름은 일간정이라 불렸고, 북쪽 자하동의 최고 좋은 곳이다. (稱名一間亭者 北紫霞洞最好處也)”라고 행서체로 밝혀 놓았다. (도 3) 두 문장 글씨의 서체와 먹색이 살짝 다르다. 모정의 위치를 쓴 담묵의 문장은 화가 정수영이, 진한 농묵의 지명을 밝힌 문장은 친구인 강관이 쓴 서풍이다.

일간정의 모양은 한 칸 정자라는 이름처럼 네 기둥에 초가지붕을 얹은 소박한 정자이다. 시흥 관아 뜰의 <취향정>과 닮아 흥미롭다. 관민이 유사하게 조성한 초정(草亭)의 형식 같다. 관청의 정자다움은 취향정의 낮은 난간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일간정> 그림의 정자가 설치된 곳은 온통 각진 바위들로 가득하다. 화면 오른쪽은 바위 결을 따라 층층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가 보인다. 그 왼편으로 정자에 오르는 계단이 조성되어 있다. 정자 아래에는 작은 바위 못 정도 같다. 소나무 세 그루와 활엽수들은 봄꽃이 모두 지고, 신록이 제법 어울린 풍경이다. 화면의 왼쪽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두 채의 초가집과 세 덩어리의 계곡이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다. 화면 전체는 빈 여백이 거의 없다. 나무며 바위며 물길 표현은 정수영 특유의 담묵담채와 갈필 화법이 와글와글 구사되어 있다.

<일간정>은 관아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관악산 기슭 신림의 유명한 절경, 자하동에 있었다. 내가 관악산을 올려다보며 그린 서울대 정문이 곧 옛 자하동이다. 현장에 서보면 ‘자하(紫霞)’, 곧 붉은 노을이 아름다운 장소를 연상케 하는 시어와 거리가 멀다. 옴팡진 돌산 계곡이다. 일반적으로 자하동이 고개를 뜻하는 ‘잣’에서 연유하는 것처럼, 호암산 동서를 오가는 산길이나 신림에서 시흥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자하동에는 1960년대 후반 골프장이 들어서고, 그 위에 1970년대 후반 서울대학교가 들어섰다. 그 이전 지도에는 ‘자하동’이 꼭 등장했고, 대림천으로 흐르는 개울 주변에는 여러 가구의 적지 않은 마을이 있었다. (도 4) 실제로 의성 김씨 집성촌으로 60여 가구의 전통마을이 유지되었고, 1960~70년 사이에는 <꼬마 신랑>(1970)이나 <사자성>(1964) 같은 사극영화 촬영지였다. (『신림동』, 서울역사박물관, 2015 ; 이동헌 글·류백헌 사진, 『사람과 산』, 2020.10) “모정은 현의 동북 변 10리에 있다.”라고 했듯이, 시흥 호압사에서 자하동까지 3.5km로 한 시간 남짓의 거리이다. 미림고개, 산북터널을 지나는 이 길 따라 현재 6515번 버스가 왕래한다.

현재 자하동 마을 신목(神木)인 늙은 느티나무가 있던 곳에 서울대학교 정문이 들어서고, 마을에 모셔진 미륵불 석상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실개천 계곡이 깔끔하게 정비되어 본디 옛 모습은 완연히 잃었다.

정문 로타리에서 서쪽을 보면, 돌산의 암반을 왕창 떨어낸 벼랑언덕이 보인다. (도 5) 그 아래 관악산 입구 공원을 조성했고, 한 칸짜리 정자를 세웠다. 학교 공사에 사용했던 모양으로 암벽은 상당히 많은 양을 떼어낸 듯하다. 또 공원 입구에 인공폭포를 조성하고 ‘폭포 쉼터’라 표시판을 달았다. (도 6) 돌산의 화강암 암반과 폭포가 있던 공원의 원형을 상상하면, 정수영의 <일간정> 그림과 잘 맞아떨어져 흥미롭다. 암벽 벼랑 위에 있던 ‘일간정’만 초가지붕을 기와로 바꾸어 아래로 내려 옮긴 셈이다.

 

문인화가 신위와 인연이 있던 곳, 자하동

<일간정> 그림에서 강관이 밝힌 자하동과 그 동천(洞天)의 ‘일간정’은 19세기 시흥현 지도에 꼭 표기되어 있다. 그런 만큼 조선 후기에 여러 문인의 관악산 유람기나 시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일간정은 조선 후기 최석정, 체제공, 서영보, 강준흠, 임득명 등의 문집에 기행 시문으로 전한다. 자하동은 조선 후기 문인 관료이자 시인, 묵죽도를 잘 그린 서화가 삼절(三絶)로 꼽히는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5 )와 밀접하다.

이들 가운데 신위와 절친인 죽석관 서영보(竹石館 徐榮輔, 1759~1816)의 「유자하동기(遊紫霞洞記)」가 <일간정> 그림의 이미지와 흡사하다. (徐榮輔, 『竹石館遺集』 第三冊) 이 유기(遊記)는 1786년 신위의 초청으로 서영보가 자하동을 찾아 쓴 글이다.

 

“관악산(冠岳山)과 검지산(黔芝山) 사이에 수석(水石)의 경치가 빼어난 곳이 있으니 바로 신림(新林)이고, 신림에서 가장 그윽하면서도 더욱 경치가 좋은 곳이 자하동(紫霞洞)이다. 두 산에서부터 흘러오는 물이 모여서 신림동에서 호리병 주둥이로 나오듯이 흘러나와, 강태사(姜太師)의 서원 앞에서 굴절하여 남쪽으로 흘러든다. 물길을 따라 점차 동쪽으로 몇 리를 가면 작은 봉우리가 수풀 위로 보일락 말락 하는데, 이것이 국사봉(國士峯)이다. 그 아래로 수목이 울창하고 인가가 은은히 보인다. 아름드리 늙은 느티나무 세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에 이로당(二老堂)의 옛터가 있다. 이곳이 신씨(申氏)의 자하동 별업(別業)이다.

개울을 따라 점차 올라가면 갑자기 두 바위가 개울을 끼고 마치 문처럼 마주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여기서부터 바위가 더 커지는데 개울은 양쪽 벼랑에 이르기까지 바닥이 모두 바위로 되어 있다. 물가에 늘어선 바위가 어떤 것은 용마루처럼 비스듬히 서 있고 어떤 것은 평상처럼 펑퍼짐한데, 색깔은 모두 갈아 놓은 듯 반들반들하여, 바둑을 둘 수 있고 시를 쓰기에도 좋다. 조금 평평하고 널찍한 꼭대기에 작은 정자가 있는데, 개울 동북쪽 굽이진 곳에 있어서 서남쪽으로 막 흘러나오는 개울물을 굽어보게 되어 있다. 연주대(戀主臺)에서 정자 동쪽에 이르기까지 물길이 넓게 퍼지고 모여서 감돌다가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져 작은 폭포가 된다. 그 곁에 ‘제일계산(第一溪山)’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개울물이 정자 발치를 돌아 굽이굽이 흐르면서 층층으로 소리 내며 부딪쳐 떨어진다. …중략… 내가 처음에 자하동 주인과 약속하여 관악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려고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기록이 여기에 그친다.” (정동화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7)

 

여기서 신림은 지금의 신림동이다. 강태사는 고려 강감찬(姜邯贊)을 말하며, 서원은 서견, 이원익 등의 위패를 함께 모셨던 충현서원(忠賢書院)이다.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고, 그 터는 지금 광명시 소하동에 있다. 신씨(申氏)의 자하동 별업(別業) 이로당(二老堂)은 신위의 고조할아버지인 신여석(申汝晳)과 신여철(申汝哲) 형제가 세웠던 것으로 전한다. 이는 숙종 시절의 문신 존와 최석정(存窩 崔錫鼎, 1646~1715)이 쓴 「이로당기」에 자세하다. 이로당(二老堂)은 서너 칸이었고, 화재로 사라진 이후 신여석의 차남 만오당 신확(晩梧堂 申瓁, 1652~1698)이 이곳에 작은 모정(茅亭)을 지었다. 또 바위에 큰 글씨 ‘제일계산(第一溪山)’을 새겼다고 한다. (崔錫鼎, 『明谷集』) 이 모정이 ‘일간정’ 아닐까 싶은즉, 돌산이 파괴되며 사라진 듯하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전사한 신립(申砬)의 후손이다. 신위가 어린 시절부터 이곳 종가와 인연을 맺고 지냈기에 ‘자하(紫霞)’라는 아호를 쓰게 되었다.

평산 신씨로 자가 한수(漢叟)인 신위는 자하(紫霞) 외에 경수당(警修堂)이라는 아호도 썼다. 정조 23년(1799) 춘당대 문과에 급제하고, 곡산부사 춘천부사 강화유수 이조참판 병조참판 도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순조 12년(1812) 진주 겸 주청사(陳奏兼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을 다녀왔으며, 옹방강(翁方綱) 학파와 교유하며 청나라의 문물과 학예를 접했다.

신위는 서영보, 신대우 등과 어울린 소론계열이었으면서도 노론계의 김조순이나 김정희, 남인계의 정약용과 정학연 부자 등과 만났고, 초의선사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추사 김정희와 어울리며 정치적 부침도 있었고, 지방관을 통해 현실을 통감하며 관직에 대한 환멸로 은둔을 반복하기도 했다. 이를 토대로 하면서 적서차별이나 여성에 대한 인습을 벗어나려는 노력과 더불어, 조선 시나 무악 등에 관해 취미를 보인 신위의 시문학은 조선 말기에 큰 영향을 미쳐 문학사의 위상도 높다.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자하시집(紫霞詩集)』)

신위의 서화는 두 아들 신명준과 신명연, 그리고 추사일파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특히 가벼운 수묵 필치의 대나무 그림은 이정(李霆), 유덕장(柳德章)과 더불어 신위를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등극케 했고, 남종문인화풍의 산수도를 즐겨 그렸다.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동기창체(董其昌體)를 기반으로 유려하고 탄력 있는 행서체를 즐겨 썼다. (『자하 신위 탄생 250주년 기념 서화전, 자주빛 노을에 물들다』, 국립중앙박물관, 2019) 신위가 70세에 쓴 고법 공부에 대한 서론(書論)을 소개한다. (도 7)

 

“옛것을 임모하는 법도는 다만 그 정신을 얻고 닮음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크게 발전한다. 나도 일찍이 그리 노력해왔는데, 재주가 미치지 못했기에 부끄럽다. 자하 일흔 노인이 써서 알린다.” (臨古之法 但得其意 不求其似 斯爲上乘 余嘗從事於斯 而才有不逮 是可媿耳 紫霞七十叟 書因識)

 

현재 신림동 계곡 자하동과 함께 신위와 관련한 유적은 사라졌다. 그 대신에 자하 신위의 기념 공간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근처로 옮겨지고, 작은 연못가에 아담한 기림비와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도 8)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2 – 시흥 검지산(호암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한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2 – 시흥 검지산(호암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한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2 – 시흥 검지산(호암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한 번째
03/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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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은 1796년 여름 남한강 선유(船遊)를 마치고 우이동 계곡 <재간정>을 찾았다. 그리고 가을 포천 영평지역 창옥병 근처 <백운담> <사암서원> <금수정>을 거쳐 <화적연>에서 그해 여정을 마쳤다. (앞의 ‘답사와 스케치 여정’ 연재 참조) 《한임강명승도권》의 순서에 따르면, 정수영은 이듬해 1797년 봄 시흥현(始興縣)을 방문했다. 지금 금천구 시흥동이다. 나는 2019년~2020년에 지우재 여정을 따라 답사하면서, 작년 봄에 이곳을 둘러보았다.

시흥동 중심인 옛 관아 터에 서니, 동쪽으로 호암산(虎巖山)이 병풍처럼 두르고 서쪽으로 안양천과 주변의 들녘이 전개된다. 안양천은 북쪽으로 선유도에서 한강과 합류한다. 해발 393m의 호암산은 동편의 해발 632.2m 관악산과 480m 삼성산에 이은 줄기답게 바위산 경치를 뽐낸다. 단순한 암산의 형태가 스케치북을 펼치게 한다. 산 아래 근경에는 지금의 도시 풍광을 생략하고 옛터를 지켜온 노거수 은행나무 세 그루를 배치해 그렸다. (도 1, 2)

근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빼곡하게 들어서 산 중턱까지 시야를 가린다. 하지만 그 아래 은행나무를 포함해 동네 곳곳의 느티나무 향나무 등 노거수들이나 고려 석탑 등이 시흥의 역사를 말해준다. 8백 살 이상 나이 든 은행나무들은 건물들 틈과 길가에서 옹색한 대로 생명을 유지해 있다. 조선 시대에는 기와집 건물의 관청, 초가 마을, 그리고 노거수들이 호암산과 어울려 장관을 이루었을 법하다.

올해 3월 초 다시 찾아보니 이들 가운데 관아 터의 표시석이 놓이고 가장 큰 은행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세 그루 중 제일 키가 크기도 하려니와, 중앙의 죽은 것 같은 덩치의 고목에도 물기운이 오르는 듯 푸릇한 잔가지와 새잎이 자라 있었다. 그 봄 색이 뭉클해 스케치했다. (도 3, 4) 알림판에는 1968년 보호수 지정 당시 수령이 830년이고, 14m 높이에 나무 밑 둘레가 8.6m이란다. 주소는 시흥동 386-35번지이다.

호암산의 다른 이름은 검지산(黔之山)이다. 시흥의 이전 이름은 금천현(衿川縣)이었다. 북쪽의 한양과 양천 동작 노량, 동쪽의 과천, 남서쪽의 안양 수원 인천 등으로 열린 교통의 요지였다. 한때는 과천과 병합해 금과현, 혹은 양천과 병합해 금양현이 되기도 했다.

금천이 시흥으로 바뀐 것은 종6품 현감을 종5품 현령으로 승급하면서부터이다. 정조 19년(1795) 윤2 월 1일에 시행되었다. (『日省錄』) 이때 현감 홍경후(洪景厚)가 현령으로 승급되었다. 특히 정조는 화성으로 이장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 참배를 위해 행행(幸行)이 잦았다. 그 가운데 정조 19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의 행사가 가장 성대했다. 고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회갑을 맞은 해이고 이를 위해 대규모 연회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한양과 화성, 백 리의 중간 길목인 시흥현에는 임금의 행차를 위해 도로가 확장되고 이동하는 가운데 머무는 행궁이 조성되었다. 그만큼 시흥이 중요한 거점으로 격상되었고, 종5품 현령 배치는 정조의 능행(陵行)에 따른 배려였던 셈이다.

1795년 윤2월 을묘년 큰 행사를 담은 《화성능행도 8폭 병풍》도 제작되었다. 이 가운데 <환어행렬도>가 바로 화성행사들을 마치고 궁궐로 돌아오며 시흥 행궁(行宮)에 들르는 행렬도이다. 지금의 시흥동 금하로를 따라 행차하는, 길다란 이동장면을 ‘乙’ 자형으로 부감해 포착했다. 여기에 혜경궁홍씨의 가마, 관료들과 호위 군사 등 행사 참여자들과 길가 주막이나 엿장수 아이 등 구경꾼의 움직임을 디테일하게 살려낸, 스팩타클한 걸작 중의 걸작 궁중 기록화이다. 김득신, 장한종, 이인문 등 당대 손꼽히는 일급 화원들이 참여해 그렸다. (도 5)

 

시흥 관아에 머물며 그린 <취향정><검지산>

정수영은 《한임강명승도권》에 3점의 시흥 풍경을 담았다. <취향정>과 <검지산> 2점은 시흥현 관아에서 머물며 그린 것이다. 또 <일간정(一間亭)>은 관아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관악산 기슭의 유명한 명소 자하동(紫霞洞)에 있었다. 한 지역을 연달아 그린 탓인지 세 점은 아랫부분이 중첩되어 있다.

시흥의 첫 그림 <취향정(翠香亭)>은 관아의 뜰에 있던 정자 같다. 그림의 오른쪽 위에 “금천 관아의 동쪽 취향정(衿川衙東 翠香亭)”이라고 밝혀 놓았다. (도 6) 이로 미루어볼 때, 정수영의 이곳 방문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여기서 ‘금천’이라 쓴 것은 ‘시흥’으로 지명이 바뀐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은 탓이다. 한편으로는 ‘옥병서원’을 ‘사암서원’이라 표기했던 것처럼, 개명하기 이전 지명을 고수한 점은 재야 문인 정수영의 정치적 경향성일 법하다. 호암산보다 검지산이라는 지명을 쓴 것도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푸른 향기를 즐기는 정자 <취향정>은 초가지붕에 단칸으로 소박하지만, 조선 시대 관청에 조성하던 연못의 일반화된 형태이다. 두 곳 방형 못에 각각 섬을 만들고. 섬에는 소나무를 주요 수종으로 삼아 대여섯 그루씩 심었다. 화면의 오른쪽 목책 다리가 놓이고 초정(草亭)이 시설된 석축 섬에는 소나무가 6그루 보이고, 왼쪽 섬에는 소나무 5그루와 키 큰 활엽수 고목 한그루가 서 있다. 연못가에는 분홍 복사꽃들이 만발해 봄 정취 가득하다. 담 밖 언덕의 봄 나무들과 더불어 정수영의 미숙한 듯, 가벼운 담묵담채 화풍을 잘 보여준다.

관아의 동쪽 짚 이엉을 얹은 수평 담장은 다음의 <검지산(黔芝山)> 그림으로도 이어진다. 정수영은 관아 동쪽 연못 그림의 중단을 지나는 담장과 같은 형태의 담을 근경에 횡대로 깔고, 그 너머로 본 검지산 전경을 포착했다. 담 너머 언덕이 살짝 보이는 점도 동일 장소임을 알게 해준다. 기다란 담장 중간쯤에는 작은 문이 나 있다. 그리고 화면 오른쪽 위에 “책방 동쪽 담장 밖(冊房東墻外)”이라고 제목을 써넣었다. (도 7) 책방의 동쪽 담장이 관아의 동쪽 끝이니 동헌(東軒)에 연계된 공간이었을 법하다.

여기서 ‘책방(冊房)’이 주목된다. 고을 수령이 되면 근무처에 친구나 친척, 지인을 책객(冊客)으로 곁에 두고 일할 수 있었다. 책방은 이방, 형방, 호방 등 6방 향리의 명칭에 맞추어 부친 이름으로 제7방인 셈이다. 시서(詩書)를 나누는 문인 취향의 명칭이지만, 책방이 수령 통치에서 상당한 정치적 위치를 점유했던 모양이다. 책방은 고을을 다니며 여러 현황이나 정보를 파악해 수령에게 알렸고, 이 과정에서 때론 권력을 행사하며 탐관오리의 역할마저 했다. ‘현감은 빈 털털이로 파직될 가능성이 있지만, 책방을 수행해 가난을 벗어나지 않은 자가 없었다’라고 전해질 정도이다. (尹愭, 『無名子集』)

정수영이 시흥현령의 책방과 지인이던지, 혹시 그 자신이 책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임강명승도권》의 일정상 영평과 도봉산이 동일 라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평에서 시흥을 들렀다가 다시 영평 길목인 도봉산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또 검지산과 일간정 그림의 활엽수에는 봄 정취나 색감이 사라진 상태여서, 정수영이 여름까지 시흥 관아에 머물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때 시흥현령은 김사희(金思羲, 1753~?)였다. 정조 19년(1795) 윤2월 17일 발령을 받았다. 정조시절 최대규모의 화성 행행이 끝난 다음 날이었다. 현령으로 승격한 직후 첫 발령자였던, 김사희는 영조 49년(1773) 진사시험에 급제한 뒤 주로 지방관으로 관직생활을 했으며,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시흥현령 시절 임금과 잦은 대면으로, 정조 21년(1797)에는 수원판관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日省錄』) 다른 교우관계나 행적으로 알려진 게 드물고, 또 정수영과 인연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한임강명승도권》과 관련해 정수영이 마지막 토산을 찾았는데, 김사희는 그 십여 년 전 정조 9넌(1785)에 토산현감을 지냈다.

그림의 상단 왼쪽에는 “한양과 가깝게 질러 통하는 지름길(抵京捷路)”라고 적었다. 현재는 신림동으로 넘어가는 도로에 산북터널이 뚫려 있다. 또 《한임강명승도권》의 다른 장면에도 자주 썼듯이, 강관이 “검지산 한 줄기, 관악 명산과 닮지 않았다. 이 그림은 음식을 잔뜩 늘어놓은 듯하다. (黔芝一支終不若冠岳名山 此圖或近於飣餖)”라고 제발(題跋)을 썼다. 이를 강관의 필적으로 확인함과 함께, 그동안 관악산으로 알려져 온 이 그림을 최근 신진 연구자가 <검지산>으로 밝혔다. (한상윤, 「선유와 유산으로 본 정수영의 한임강유람도권 고찰」, 『미술자료』 96, 국립중앙박물관, 2019.)

검지산(黔芝山)은 검은 영지가 많이 자란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며, 금천(衿川)도 이 검지(黔芝) 혹은 금지(黔芝)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옛 기록이나 고지도에는 ‘검지산’도 있지만, 산 정상의 호랑이 바위로 인해 지어진 ‘호암산(虎巖山)’을 같이 썼다. 특히 호암산 호랑이가 노려보는 바람에 한양도성 건설에 지장을 받자, 호암산 꼬리 부분을 누르기 위해 호압사(虎壓寺)를 세웠다는 무학대사 설이나 태종 시절 창건설화와 관련을 볼 때 그렇다.

<검지산(黔芝山)>은 지우재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귄》 실경화 가운데 여주 <휴류암> 그림과 함께 회화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진경산수화로 꼽을 만하다. 실경과 닮게 그리는 데는 다른 그림들이나 마찬가지로 부족하지만, 나무나 담장 묘사에서 미숙함이 도드라지지 않으니 그런 것 같다. 강관이 ‘다 먹지 못할 음식물을 잔뜩 늘어놓은 듯한(此圖或近於飣餖)’ 산세 표현이라고 꼬집었으나, 근경 수평 담장 위로 네모 형태를 동어반복으로 3~7층씩 횡렬로 쌓은 검지산 암산 경치의 단순한 구성이 파격이면서 돋보인다. 토산에 비스듬히 사선으로 석치(石齒)가 박힌 암산을 정수영답게 변형 리듬으로 재해석한 개성미라 하겠다. (도 2, 8, 9)

옆으로 긴 산 풍경 설정을 보면, 토산 주름 위로 드러난 바위들도 나름대로 그 주름을 따라 강약의 리듬감이 유연한 편이다. 한양을 넘어가는 북쪽 지름길에는 바위들과 봄 색의 나무들이 어우러지게 변화를 주었다. 그림에서 호암산 왼쪽에는 호랑이 바위와 호압사, 흔들바위가 위치한다. 산 능선의 오른쪽으로 구분한 뾰족한 봉우리들은 불영암이 있는 호암산성인 셈이다. 신라 후기 성곽으로 추정되며, 한우물 석구지(石狗池)와 석구로 여겨지는 동물상이 남아 있다. 호압사에서 불영암(佛影庵)에 이르는 능선은 안양천 구름산으로 지는 저녁놀을 최고로 감상할 수 있는 명소이다.

<검지산(黔芝山)> 화면 중앙의 산기슭에 보이는 관청 건물은 행궁이겠고, 홍살문과 노거수가 있는 오른쪽 단독건물은 성황단 정도로 여겨진다. 이렇게 관아 최고의 산 풍경이 전개되는 요지에 거처가 있었으니, 고을 정치경제의 알짜배기인 책관(冊官)의 권한과 위상을 새롭게 그려보게 한다.

정수영은 시흥의 두 곳을 그린 뒤, 현(縣) 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십 리가량 떨어진 자하동(紫霞洞)의 <일간정(一間亭)>을 찾았다. 관악산 아래 지금 서울대학교가 들어선 곳에 있었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1 – 포천 화적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1 – 포천 화적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1 – 포천 화적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 번째
03/0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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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적연(禾積淵)은 포천의 제일경으로,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96호로 지정된 곳이다.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의 상류, 화산지대가 이룬 국가지질공원 계곡에 있다. S자로 굽은 강변은 현무암 주상절리의 벼랑이 협곡을 이루어 물이 깊다. 강물에 놓인 크고 작은 화강암 덩어리 기암(奇巖)들은 오랜 세월 빠른 물살에 씻겨 미끈하고 아름다운 형상을 이룬다. 이런 풍광의 중심인 커다란 암반이 볏단을 쌓은 ‘화적(禾積)’ 같다는 것이고, 자갈과 모래사장에 어우러진 짙푸른 못이 ‘연(淵)’이다.

화적연은 지난번 소개한 포천시 영평면의 사암서원과 창옥병, 금수정을 들른 뒤 발길 닿는 명소이다. 사암 박순, 이경석, 이민구, 허목, 박세당, 박태보, 이서구, 이항로, 최익현 등 조선 시대에는 많은 명사와 문인들이 화적연에 유람와 자연 풍류를 즐겼고, 신비로운 경치를 노래했다. 또 그런 만큼 여러 화가가 그림을 남겼다. 더구나 화적연은 금수정에 이어서 금강산 여정의 길목이어서 금강산 그리기의 워밍업하기 좋은 경치였을 법하다. 화적연을 화폭에 담은 화가는 <금수정(金水亭)>을 그린 정수영과 김하종 외에도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겸재 정선, 문인화가 단릉 이윤영, 학산 윤제홍 등이다.

 

조선 후기 화가, 문인들이 즐겨 찾는 명승

나도 근래 화적연을 여러 번 방문했다. 작년만 해도 3월, 9월, 12월 세 번이나 들렀다. 자주 찾은 이유는 조선 화가들이 그린 시점에 서보기 위해서였다. 2000년 초까지는 군부대 주둔지여서 그 지점에 접근하기 불가능했다. 지금은 캠핑장이 들어설 정도로 개방되어 있지만, 물길이 깊고 배가 없어 자유로이 강 건너 왕래할 수 없는 형편이다. 올겨울 오래간만에 한강이 얼 정도여서 화적암까지 얼음판 위로 갈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작년 12월 29일 오후에 찾았다. 개울이 깊고 S자형 급류여서 강변 가장자리만 얼었다. 또 못가나 싶었다.

그런데 새벽 금수정을 함께 답사했던 티제이 킴 대표가 지피에스를 찍고 이동해보자는 제안을 해왔다. 내비게이션의 지시에 따라 5~6km를 빙 돌아 영북면 자일리 들판을 질러 언덕을 넘으니, 바로 눈앞에 있던 건너편이었다. 옛 화가들과 문인들이 즐겼던 공간에 오게 됐고, 얼추 그들의 시점에 서니 반가웠다. 커다란 암반 화적암에서 사진을 찍고 여러 점 사생했다. (도 1, 7) 작년 봄부터 열 점 넘게 스케치했는데, 처음으로 옛 화가의 눈을 따라 그려본 셈이다.

현장에서 사생하니, 옛 화가들의 부정확 표현이나 풍경 현장을 재구성하는 방식이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몸을 엎드린 채 고개를 쳐든 듯한 화적암을 실물 모양과 달리 ‘화적’의 낟가리를 쌓은 이미지로 우뚝하게 그렸다. (도 2) 그 좌우에는 겸재의 개성인 수직준법(垂直皴法)과 적묵법(積墨法)으로 처리한 벼랑이 배치되어 있는데, 실제 현장과 비교하면 벼랑은 화적암 앞뒤에 있다. (도 7, 9) 이러한 주상절리의 묘사방식은 겸재의 금강산 화법과도 연계된다.

학산 윤제홍(鶴山 尹濟弘, 1764~?)도 적묵법 묘사가 거칠기는 하지만, 겸재와 유사한 형태와 구성을 보여준다. (도 3) 학산은 심지어 화적암 꼭대기에 나무가 자란 모습으로 심하게 왜곡하기도 했다. 두 그림의 변형은 직접 현장에서 그렸다기보다 화실에 와서 풍경을 생각하며 그린 탓으로, 사람이 지닌 기억력의 한계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태호, 「實景에서 그리기와 記憶으로 그리기」-朝鮮後期 眞景山水畵의 視方式과 畵角을 중심으로, 『미술사연구』 257, 한국미술사학회, 2008. ; 이태호,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마로니에북스, 2015.) 

이처럼 과장이나 변형을 심하게 하는 정선이나 윤제홍은 물론이려니와, 사생화에 해당하는 문인화가인 단릉 이윤영이나 지우재 정수영, 화원인 유당 김하종의 그림도 눈에 든 대로 화적연 실경을 빼닮게 그리지 않았다. 우선 부감한 듯한 시점의 상상이 그러하다. 또 그림에 등장한 좌우의 벼랑은 실제 현장에서 보면, 앞서 살펴본 것처럼 중앙 큰 바위 화적암의 앞뒤인 남서쪽과 북동쪽에 위치한다. (도 7, 9)

화적연의 첫 사생화이자 비교적 실경을 비슷하게 해석한 작품은 단릉 이윤영(丹陵 李胤永, 1714~1759)의 부채그림 선면화(扇面畵)이다. (도 4) 부채 상단에는 ‘서울에서 화적연까지 백여리’(溪石名禾積 距京百餘里)라고 써놓았다. 이 선면화도 사생 그림임에도 실경과 상당히 차이 난다. 그림에는 화적암과 강변을 강물로 분리해 놓았는데, 실제로는 오른편 강변 너럭바위에 화적암이 붙어 있다. 또 부실부실하게 쓴, 단릉의 엷은 먹 선묘도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능호관 이인상(凌壺觀 李麟祥, 1710~1760)의 갈필(渴筆) 화풍을 따랐기에, 육중한 암반의 양감을 내지 못한 상태이다. 이 물기 적은 능호관식 선묘 피마준법(皮麻皴法)은 지우재도 배웠다.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은 배치 방식에서 단릉을 따랐다. 사선으로 화적암을 오른쪽에 치우쳐 놓은 점이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단릉이 근경 몇 그루 소나무를 화면 왼쪽에 둔 데 비해, 지우재는 오른쪽에 그렸다. 지우재가 화적암을 오른쪽 강변 바위에 연결해 그린 것은 실경에 근사한 편이다. (도 5, 7) 뒤쪽의 수직 벼랑을 아예 사선의 큰 바위와 나란히 왼편을 채워 놓은 구성법은 겸재를 배운 결과로 여겨진다. 바위의 모습은 지우재가 비교적 세세한 선묘로 그린 데 비해, 실제 대상과 닮기는 단릉의 그것이 훨씬 낫다. 이 대목에서도 지우재의 묘사 기량이 미숙한, 어눌한 표현력 수준이 여실히 확인된다.

유당 김하종(蕤堂 金夏鐘, 1793~?)의 <화적연도>는 <금수정도>와 마찬가지로 지우재의 구성을 따랐다. 대신에 짧게 반복한 선묘로 물살을 표현한 단원식 수파묘(水波描) 화풍이 화원 솜씨답게 생동감 난다. (도 6)

 

기우제를 지내던 큰 바위 화적암의 성혈 자국

한탄강의 최고 절경으로 꼽히는, 화적연의 중심 ‘화적’ 바위는 포천시 영북면 자일리에 위치한다. 그 건너 군부대가 철거된 뒤, 지금 관광지로 개발한 쪽의 모래사장 강변은 포천시 관인면 사정리이다. 지난 호에 살펴본 금수정, 창옥병 등과 더불어 포천시의 영평8경(영북면 자일리 禾積淵, 창수면 주원리 蒼玉屛, 창수면 오가리 金水亭, 영중면 양문리 樂歸亭, 영중면 금주리 白鷺洲, 영중면 거사리 靑鶴洞, 일동면 수입리 臥龍巖, 이동면 도평리 仙遊潭)에 해당하며, 제1경이다.

13m의 높이에 20여m 길이의 화적암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볏가리’ 바위라고 일컬어져 오기도 했다. 그런데 덩어리 형태로 보아 볏단 쌓은 낟가리로 보기에는 좀 그렇다. 첫인상은 바위의 미끈한 질감과 함께 물개를 떠올렸다. (도 7, 9) 옛 지리지나 사람들도 이 화적암을 다르게 부르기도 해왔던 것 같다. 거북이 형상의 구암(龜巖), 머리에 두 뿔을 달고 강물에서 솟으려는 자태의 신룡(神龍) 바위, 이들을 조합한 구룡(龜龍) 바위 등이다. 또 바위 질감이 젖색이어서 유석향(乳石鄕)이라 불렸던 모양이고, 석영이 출토되었던 장소여서 지어진 이름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최동원, 「조선 후기 경기 북부 경승지의 현황과 인식 변화」, 『한국학 논총』 48, 2017.)

인근 마을 농부가 화적연에서 심각한 3년 가뭄이 들자 하늘을 원망하는 탄식을 쏟아내자 강물에서 용이 하늘로 치솟았고, 비가 쏟아졌다는 전설도 전한다. 이를 계기로 풍년이 들었고, 그 이후 기우제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실제 숙종 때 이곳에서 국가행사로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 확인되기도 한다. (『숙종실록』 39권, 30년 6월 26일 갑오)

이번 기회에 강 건너편으로 화적암 큰 바위에 오르니 젖색 화강암 질감이 멀리서 본 느낌대로 미끈하고 부드러웠다. 고개를 쳐든 듯한 바위 정상에는 3~5cm가량의 둥근 성혈(性穴) 자국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거북이 형상으로 치자면, 목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3개의 성혈이 또렷했다. (도 8) 바위에 내는 성혈은 우리 민속신앙에서 유감주술(類感呪術) 행위의 주요 형식이다. 구멍 내기를 성행위와 유사하게 인식해, 다산과 풍년을 기원했던 전통적인 신앙형태의 하나이다. 성혈은 지역이나 마을에서 신성(神性)이 부여된 자연 바위는 물론이려니와 고인돌, 심지어 불탑이나 석불에도 등장한다. 화적연 큰 바위가 몸에 지닌 성혈 자국만큼 오랫동안 신령스러운 공간이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0 – 포천 금수정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아홉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0 – 포천 금수정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아홉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0 – 포천 금수정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아홉 번째
01/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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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21년 새해 첫날에 포천 영평천의 명승인 <금수정 일출>을 그렸다. (도 1) 금수정(金水亭)이 안동김씨 고택지에 세워져 ‘김씨 집안의 물가 정자’쯤으로 여겼는데, 멀리 관음산 능선으로 솟는 아침 해돋이가 장관이다. 영평천이 물안개와 더불어 누런 금색으로 물드니, ‘金水亭’이라 이를 만하다. 벌써 조선 후기 문인으로 안산의 15학사로 꼽히던 저암 신택권(樗庵 申宅權, 18세기 후반)이 일출 광경을 보았는지, 금수정을 읊은 7언시에 ‘금파(金派)’, 곧 금물결이라고 표현하였다. 

꽃 둑에 비 지나가니 푸른 풀 무성한데 芳堤過雨綠蕪平

난간 아래 금물결이 아주 맑다네. 攔下金派徹底明

다소의 긴 여정 왕래하는 나그네 多少長程來去客

내달리다 느린 행보 누구 위한 행차인가! 橫馳緩踏爲誰行

(申宅權, 「金水亭 次揚蓬萊尊巖韻」, 『국역 저암만고(樗庵漫稿)』上, 양평문화사, 2016)

 

금수정에서 새해 첫날 영평천 금색 물결을 그리고 

코로나로 전국의 새해 해돋이 명소 탐방이 막혀있던 터에, 동쪽을 향한 금수정이 떠올라 불쑥 다시 찾았다. 다섯 번째쯤 되는가보다. 이곳까지 차를 몰아준 티메카코리아의 김태진 대표 덕분에, 인적이 없는 새벽 영평천 금물과 밝아오는 강변 평야의 여명을 오롯이 즐겼다. 실제 김대표와 이 풍광을 본 날은 작년 말 12월 30일~31일 일박이일로 포천을 답사한, 31일이다. 마침 30일이 음력 11월 16일이었다. 보름 다음날인 기망(旣望) 월출(月出)을 영평천에서 만났다. 본디 보름보다 기망 달이 더 가득 찬다. 31일 아침 둥근 달이 금수정 서편 창옥병과 보장산 능선 너머로 지고 있어 냉큼 사생해보았다. (도 2) 노랬던 새벽달이 산 능선 가까이 내려오자, 해 뜨며 흰 달로 변해 겨울 추위만큼 상큼하게 졌다.

금수정은 평야 지대를 흐르는 강물 굽이의 벼랑에 세워져 있다. 본래 이곳 지명인 ‘우두연(牛頭淵)’에 따라 소머리 정자, ‘우두정’이었다고 전한다. 지난번 살펴본 창옥병에서 동으로 2km가량에 위치한다. 옛사람들은 ‘3리 떨어져 있다’라고 했다. 현 지명은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이다. (이원호 외, 「포천 금수정 일원의 입지와 공간구성에 관한 연구」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24-3, 한국전통조경학회, 2006. ; 최동원, 「조선 후기 경기 북부 경승지의 현황과 인식 변화」, 『한국학 논총』 48, 2017.) 

금수정 입구에는 안동김씨 고택의 연원이 되는 고려 후기 문온공 김구용(文溫公 金九容, 1338~1384)의 묘단(墓壇)이 가까이 있고, 금수정 마당에는 커다란 시비가 세워져 있다. 여기에는 김구용의 아버지 상락군 김묘(上洛君 金昴), 할아버지 영창군 김승택(永昌君 金承澤)의 묘단도 함께한다. 모두 근래 새로 복원해 현창한 설치들이다. 이들 위에는 ‘산신제단(山神祭壇)’이 모셔지고, 제단 언덕에서 창옥병으로 지는 기망 달을 보았다. 또 이 집안의 사위였던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 1517-1584)과 관련된 유적지여서, 김구용 시비 옆에는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는… ” 유명한 시조의 시비도 자리한다.

정자 아래 벼랑에 양사언이 썼다는 해서체 바위글씨 ‘금수정(金水亭)’(도 3)이 전한다. 양사언의 ‘경도(瓊島)’(도 4)와 <증금옹시(贈琴翁詩)>(도 5) 초서체 바위글씨도 강물 바위에 있다. 한국서예사에서 가장 초서(草書)를 잘 쓴 솜씨답게 그 흘림이 유려하다. 금수정 아래 강변 암벽에는 누구의 서체인지 개성이 뚜렷하지 않은 ‘무릉(武陵)’이라는 행서체 바위글씨도 확인된다. 무릉 바위에서 영평천과 들, 그리고 북쪽으로 금수정의 병풍 격인 불무산이 어울린 무릉도원 풍경을 옛 산수화의 편파구도(偏頗構圖) 방식으로 그려보았다. (도 6) 

금수정은 지난 호에 살펴보았던 <사암서원>의 사암 박순(思庵 朴淳, 1523~1589)이 강변로를 따라 즐겨 찾던 곳이기도 하다. 영평 8경 중 으뜸으로 꼽히며, 조선 시대 경기 북부지역 최고 풍류 공간으로 사랑을 받았다. 특히 금강산을 여행할 때, 철원·금화로 진입하는 길목이자 쉬어가는 장소로 유명했다. 양사언, 박순, 이덕형, 이민구, 신흠, 박세당, 김창협, 정약용 등 유명 문인 묵객들이 찾아 금수정 시문을 남겼다. 당시 한양에서 이틀 정도의 걸리는 가까운 명승지로, 지금은 서울 북부지역에서 차로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근거리이다.

 

정수영의 <금수정> 그림

지우재 정수영은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 1797년 가을 <백운담(白雲潭)>과 <사암서원(思庵書院)>(지난 호에 소개)에 이어 남쪽 영평천 굽이, 바위 언덕의 <금수정>을 그렸다. 어리숙하고 가벼운, 갈필 수묵 선묘와 연한 담채의 정수영다운 개성적 남종산수화풍 그림이다. 화면 왼편 강 건너 벼랑언덕에 ‘창옥병(蒼玉屛)’이라 썼고, 아래 바위에 술그릇이라는 뜻의 ‘준암(罇巖)’이라 써넣었다. (도 7) ‘금수정’ 제목 왼편에는 강관이 아래의 제발을 남겼다. 

“금수정은 예전에 듣기로 평평하게 흐르는 곳에 점지했다는데, 지금 보니 암벽 위에 있다. 그린 자의 오류가 아니라면, 필시 이 모습이 명백할 게다. (金水亭曾聞占地平衍 今却在巖壁上 若非畵者之誤 必是此說之爽)”

현장을 가보지 못한 강관이 말로만 들었던 얘기도 맞다. 금수정에서 관망하는 영평천 주변의 평야가 상당히 넓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수영은 금수정 동쪽 강 건너에서 그렸기에 벼랑 위의 금수정이 되었다. 정수영이 금수정을 바라본 위치에 서니, 벼랑언덕이 좌우로 상당히 퍼져 길다. (도 8) 정수영은 이 바위 언덕을 좁혀 표현한 것이다. 금수정이 선 벼랑을 전통 산수화 방식으로 변화시켰으며, 높은 느낌이 들도록 과장했다.

강 왼편 언덕에 ‘창옥병’이라 지명을 써넣은 것은 큰 오류이다. 앞서 산신제단에서 내가 그린 <창옥병으로 기망 달 지고>(도 2)처럼, 창옥병은 금수정 북서쪽에 위치하니 정수영이 금수정을 그린 장소에서는 그림처럼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도 정수영의 부정확한 묘사력이 확인된다. 경쾌한 미점(米點)의 후경 산세는 종현산(해발 584m) 줄기인 셈이다.

그림의 왼편 아래 바위에 써넣은 ‘준암(罇巖)’이 눈에 띈다.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아닐까 싶어 이곳을 답사할 때마다 유심히 살피곤 했었다. 이번에 강이 꽁꽁 얼어 강 가운데의 바위들을 모두 조사할 수 있었는데, 결국 ‘준암(罇巖)’이라는 글씨는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옥 같은 섬이라는 뜻의 ‘경도(瓊島)’ 바위를 지칭한 것으로, 정수영이 붙인 듯하다. (도 9)

양사언의 초서 ‘경도(瓊島)’ 바위 위에 오르니, 글씨 왼편으로 술그릇 같은 오목 공간이 존재한다. (도 4) 술 담을 공간에는 얼음이 꽉 얼어 있었다. ‘준암(罇巖)’임을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경도는 지난 호에 소개한 <사암서원> 아래 백운계 개울 가운데 ‘와준(窪尊)’의 술통 바위와 마찬가지로 조선 문인들이 자연에서 술을 어떻게 즐겼는지, 그 풍류 문화를 상상하게 해준다. 

정수영의 <금수정>과 유사한 19세기 화원 김하종(金夏鍾, 1793~?)의 <금수정> 작품도 흥미롭다. (도 10) 김하종은 김홍도의 선배로 교분이 도타웠던 김응환의 셋째 아들이고, 김홍도 화풍을 따른 사실적인 금강산 사생화로 유명하다. 그런데 김하종은 금수정을 정수영식으로 포착했다. 김하종의 <금수정>은 정수영 그림보다 회화적인 짜임새나 묘사 기량이 낫지만, 정수영의 구도를 참작한 점이 눈길을 끈다. 두 화가 사이에 60년 넘게 시대가 흘렀으면서도, 조선 사회가 크게 변하지 않은 양상을 읽게 해주기에 그렇다.

이 <금수정>은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1865년 가을 금강산을 여행하고 쓴 ‘풍악유기(楓嶽遊記)’와 기행 시문에 김하종이 58점의 금강산 명승도를 첨가해 4권으로 꾸민, 《풍악권》의 도입부에 포함된 그림이다. 이유원은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고, 조선 말 제물포조약에 참여해 외교관으로 활약한 문신이자 개화파 인사이다. 《풍악권》은 19세기에 유행한 금강산 시화첩으로 손꼽히며, 내가 1999년 일민미술관의 금강산도 기획전에 객원 큐레이터로 참여해 발굴한 것이다. (이태호, 「일만이천봉에 서린 꿈 – 금강산의 문화와 예술 300년」, 『몽유금강 – 그림으로 보는 금강산 300년』, 일민미술관, 1999.) 

정수영은 <금수정>에서 북쪽으로 발길을 옮겨 포천 명승 <화적연(禾積淵)>을 그렸다. 물론 김하종도 따라 그렸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