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5 – 홍성 용봉산과 월산, 이응노의 집 연못,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에서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5 – 홍성 용봉산과 월산, 이응노의 집 연못,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에서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5 – 홍성 용봉산과 월산, 이응노의 집 연못,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에서
08/0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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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김종학의 회화세계”로 대중강연을 한 데 이어, 7월에는 충남 홍성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에서 올해 들어 첫 답사강의를 했다. 기념관이 마련한 ‘미술사가 이태호 교수와 함께하는 고암인문예술기행’이었다. 고암 이응노(顧庵 李應魯, 1904~1989)는 1958년 말 프랑스에 건너가 ‘르 프레 생 제르베’에 자리잡고, 1960~70년대 ‘문자추상’, 1980년대 통일무(統一舞)나 대규모 인물 ‘군상(群像)’ 연작으로 명성을 얻은 작가이다. 고암의 생가인 ‘이응노의 집’은 2011년 복원했으며,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이응노로61-7) 월산 기슭 용봉산을 바라보는 홍천마을에 위치한다.

홍성군민을 대상으로 30명씩 제한해 7월 4일과 7월 18일 두 차례에 걸쳐 기념관에서 고암 이응노의 회화세계를 강의한 뒤에, 예산 수덕사를 거쳐 추사고택까지 고암 이응노의 행적을 찾는 답사였다. 이 코스는 3년 전 한 신문사의 창간 70주년 행사로 진행을 맡은 적이 있었다. (정유미 기자, 「명사 70인과의 동행 63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와 홍성 이응노 생가」, 경향신문, 2017.10.28.) 아침 9시부터 진행되기에, 전날 홍성에 와서 기념관이 운영하는 한옥에서 묵었다. 다음날 새벽 5시부터 행사가 시작되는 9시까지 스케치북 한 권씩을 다 채웠다.

생가가 자리 잡은 월산(月山)과 생가 마루에서 북향으로 자리 잡은 용봉산(龍鳳山)을 그렸다. 홍성 읍내를 감싼 월산은 흰 달 뜨는 ‘백월산’이라 일컬으며, 나지막한 토산이다. (도 1) 북쪽의 용봉산은 월산과 대조를 이룬 바위산으로 홍성과 덕산 일대에서 우뚝한 소금강이고, 신라말 마애불이 조성되는 등 이 일대 사람들의 종교적 중심 역할을 해왔다. (도 2, 3) 기념관 아래 연못에는 마침 연꽃이 피는 계절이어서 연꽃과 잎 향내가 가득했다. 두 번째 답사 날은 너른 백련밭과 작은 홍련 못에 연꽃들이 만발해 장관을 이루었다. 이들에 취해 연꽃이 피고 지고 연밥이 영그는 모습들을 잔뜩 양껏 그렸다. (도 4, 5, 6)

코로나 사태로 금년 상반기에는 대중강연은 물론 단체답사가 거의 취소되었는데,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이 기획한 답사가 유일했다. 아침 9시부터 신나라 학예연구사가 생가와 기획전 “고암 이응노의 문자추상 : 말과 글, 뜻과 몸짓”(2020.6.16~10.4) 전시실을 안내했다. 이응노의 집 명예관장 김학량 교수의 총괄과 황찬연 학예연구사의 기획으로 이루어진, 이응노의 작품들과 이응노를 오마쥬한 백선기, 오윤석, 연기백, 이성민, 이완 등의 문자 구성을 보여주었다. 이어 10시부터 나는 “이응노의 삶과 회화세계”를 강의했다. (도 7)

그런데 아뿔사! 7월 4일 1차 행사 때 강의를 시작하려니, 가족과 함께 온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세 명이나 앉아 있었다. 다행히 화가, 작가, 제빵사 등의 꿈을 가졌다 해서 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강의하고 답사를 마쳤다. (도 8) 진땀을 빼면서도 10살 아래 아이들과 교감하며 설명하는 게 나쁘지 않았다. 2차 행사에는 중학생 한 명만 참여했고, 역사교사가 되고 싶다는 학생이어서 1차 때보다 한결 수월했다.

예산 수덕사 아래 계곡에 자리 잡은 수덕여관은 이응노가 해방 직후 살던 곳이다. 이른바 ‘동백림사건’으로 대전교도소에서 출소한 1969년 3월 7일부터 5월 23일 빠리로 떠나기 직전까지 두 달여 이곳에 머물며 한글 <수덕여관> 간판을 썼고, 여관 바깥마당 두 곳 너럭바위 측면에 암각 문자 추상화를 새겨 남겼다. (도 9, 10) 암각 새김은 한자의 전서체 같기도 하고 상형의 띠를 두른 형식으로, 이응노의 쉼 없는 작업 열망을 보여주는 유적인 셈이다.

이 암각화는 특히 이응노가 문자추상에 대한 소견을 밝힐 때면, “우리나라의 오래된 비석처럼 그 낡은 돌의 마띠에르, 돌에 새긴 문자 등 오랜 세월에 걸쳐 풍우를 견디어온 문자는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나는 그런 세계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문자에 관한 테크닉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이응노·박인경·富山妙子, 이원혜 역, 『이응노-서울·파리·도쿄:이응노·박인경·도미야마 다에코 3인 대담집』, 삼성미술문화재단, 1994.)라고 언급해온 것과 잘 부합하는 작품이다. 자신이 직접 오래된 비석처럼 새긴 것이어서 그렇다. 이응노가 1958년 말 프랑스로 건너간 뒤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문자추상 초기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 이응노의 문자추상은 추상적 ‘구성’으로 화면을 정돈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 이응노의 문자추상화는 어렵다. 한글과 한자, 주역의 64 궤 문자 등이 뒤섞여 그 내용이나 의미가 언뜻 해득되지 않는다. 언젠가 눈 밝은 이가 번역해낼까.

고려 건축 가운데 명품으로 꼽히는 맞배지붕의 수덕사 대웅전(1308년, 국보 제49호) 옆모습은 기하학적 추상화 닮은 공간미를 뽐낸다. 사원 경내 돌아보기를 마치고,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 ~ 1856)의 예산 신암면 용궁리 생가터를 방문했다. 고암 이응노가 사모하고 그 예술세계를 존숭하던 문인이자 예술가이다. 앞서 이응노가 언급했듯이, 이응노의 오랜 비석에 대한 취향은 김정희의 금석학(金石學) 고증학과 상통하며, 문자추상 역시 개성적인 추사체와도 맞닿아 있다. 이곳 묘소 아래 기념관에서는 마침 ‘추사고택에서 만나는 김정희’전이 마련되었고, 이한철이 1856년에 그린 <김정희 초상> 원본이 전시되었다. 고택 앞에 천연두를 앓은 추사를 닮은 점백이 주황색 참나리꽃들이 화사하게 펴있길래 몇 점 그려보았다. (도 11)

나는 고암 이응노의 화화에 대해 연구나 글을 각별하게 써본 적은 없다. 원고청탁에 의존해 글을 써오던 인생이다 보니, 주문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고암의 작품 가운데 프랑스로 나가기 전인 1950년대 인물화나 산수화에 각별한 관심을 피력하곤 했다. 동시기 선배인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의 전통계승에 비해, 고암 이응노의 인물화나 산수 풍경화는 풍속화적 소재 선택과 담대한 필묵 구사로 수묵화의 모던 스타일을 선명하게 구현했기 때문이다. (이태호, 『한국미술사의 라이벌, 감성과 오성 사이』, 세창출판사, 2014. ; 이태호, 『이야기 한국미술사』, 마로니에 북스, 2019.)
고암 이응노와 첫 인연은 1988년 말 당시 서소문동의 호암미술관 전시에서 갖게 되었던 듯하다. 인간 군상 연작을 중심으로 꾸며진 전시 관련 기사에서 “한 폭엔 평화, 마음엔 평화”라는 이응노의 전화 인터뷰가 기억에 남는다. (한겨레신문, 1988.12.21) 이 회고전을 다녀온 후, 1989년 1월 초 귀국 예정을 앞두고, 영면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때 나도 광주지역 신문에 갑작스런 타계를 애도하며 추모의 짧은 글을 썼다. (이태호, 「이응노의 예술세계와 민족현실」, 전남일보, 1989.1.3.)

2011년 이응노 생가 복원과 함께 조성룡 건축가의 설계로 기념관이 지어졌다. (도 12) 그때 홍성군수를 지낸 김석환 군수의 요청으로, 유홍준 교수 등과 기념관의 전시와 운영에 대해 자문하게 되었다. 나는 첫 명예관장을 맡았고, 기념관 개관 도록에 글을 썼다. 또 고암의 1950년대 수묵화 <한강 풍경>을 기증한 일도 있다.

이후 명지대학교 대학원에서 ‘고암 이응노 예술세계’로 박사학위를 받은 동덕여자대학교 김학량 교수에게 명예관장을 물려주고, 운영위원장으로 기념관 전시나 교육, 유물 구입과 관리 등을 자문해왔다. 2017년에는 윤후영 학예연구사 요청으로, 내 도서 일부를 기증해 작은 건물 ‘효은서실(曉垠書室)’이 기념관 경내에 들어서기도 했다. 기념관 개관 도록(『이응노의 집, 이야기』, 수류산방, 2011.)에 쓴 내 글을 아래에 소개해 본다.

 

 

미래로(美來路)의 아름다운 공간

 – 홍성 ‘이응노의 집’을 개관하며

 

‘이응노의 집’은 충남 홍성의 새 명소입니다.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 소재의 생가를 복원하고,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을 개관합니다. 용봉산을 당차게 마주한 월산 기슭, 솔밭이 멋들어진 언덕 아래 소담하고 호젓한 곳입니다. 생가의 주변 산 능선을 넘는 언덕길 따라 봄 진달래가 화사하고, 기념관 앞 연못에는 연꽃과 마름이 가득 여름을 맞이합니다. 주변의 황금색 들녘과 숲길에는 가을이 만화하고, 겨울에는 눈 소복이 내리는 곳입니다. 기암이 아름다워 제 2의 금강산이라 일컬어지는 눈 덮인 용봉산은 절경입니다. 이들 모두 고암의 예술에 녹아있는 풍광입니다.

이런 경치에 걸맞은, 정말 딱 맞춤인 기념관이 들어섰다고 생각합니다. 모던하여 참신한 건물입니다. 사면체 박스형을 잇거나 독립한 건물들이 낮은 구릉 지형과 그렇게 정겹고 편안하게 어울려 있습니다. 노출 콘크리트와 목재판을 붙인 각진 외모는 다소곳하며, 내부는 바깥풍경을 적극 끌어안는 구조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축가 조성룡 선생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입니다. 최근 한강의 선유도공원, 광주의 의재미술관 등을 설계한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입니다. 자연과 현대를 조화시킨, 고암이 추구했던 이미지를 떠올리며 디자인했다고 합니다. 지자체가 마련한 최고의 기념관 건축으로 인구에 회자될 거라 확신합니다.

고암 이응노는 홍성이 낳은 세계적인 화가입니다. 지난 20세기 중후반 벌써 한국인으로 파리에 머물며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니, 한국예술의 긍지입니다. 요즈음 얘기하는 한류(韓流) 문화의 원조 격입니다. 미술인으론 처음이자 아직도 그만큼 현지에서 명성을 얻은 작가를 찾기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또 쉬지 않고 작업해온 다작(多作)은 풍류쯤으로 인식해온 전통서화에 대한 개념을 크게 바꾼 새로운 작가정신이라고 생각됩니다. 평생의 작업량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아마 한국근현대미술사에 가장 우뚝할 것입니다.

고암의 예술세계는 다채롭습니다. 유럽으로 건너가기 전, 벌써 개성적인 구성과 필치로 현대적 기운의 묵죽도(墨竹圖)를 비롯하여 산수화, 인물풍속화, 동물화, 화조화 등 모든 회화영역을 넘나들었습니다. 아마도 고암이 유럽에 가지 않았다면, 한국현대미술사가 그에 의해 구태를 벗는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리라 가정해 볼 정도입니다.

프랑스에 정착한 이후, 고암은 유럽을 무대로 30여 년간 활동했습니다. 화실을 개방하여 유럽인들에게 수묵화를 가르쳤고, 한국의 전통적인 예술정신과 형식을 고수했습니다. 특히 한국인이 왜 불어를 배우냐며 작업에만 매진했다는 일화로 유명합니다. 이 같은 의식 아래, ‘율동과 기백의 한국 민족성’을 토대로 당대 서구의 회화사조를 소화하고 자기화했습니다. 1960~70년대에는 유럽의 추상주의와 만나 수묵추상화를 전개하거나 한자나 한글 꼴을 구성한 문자추상은 독자적 경지를 이룬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리고 군무(群舞)를 이은 1980년대의 인간 군상시리즈 작업은 조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감화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고암은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강점기, 전쟁, 분단, 독재정권으로 점철된 한국근현대사의 아픔과 갈등을 겪으며 고스란히 예술에 전념한 작가입니다. 1960년대 군사정권 시절에는 독일에서 활동한 음악가 윤이상 선생과 함께 동백림사건을 겪었고, 1970년대 백건우 · 윤정희 부부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습니다.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의 희생입니다.

고향 홍성이 고암을 이렇게 맞이합니다. 조국을 떠난 유목민적 예술가이고, 한 때 이른바 좌익사범으로 몰렸던 고암을 바르게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2007년에 건립된 대전의 이응노미술관에 이어 정말 반가운 일입니다. 최영, 성삼문, 홍가신, 김좌진, 한용운 등 홍성이 낳은 충의(忠義)의 선현들에 이어 홍성의 예술가를 새로이 현창하게 되어 더욱 그러합니다.

이응노의 집에 마련된 기념관은 미망인 박인경 여사, 고암의 손자 이종진 선생과 손녀 이경인 여사의 소장 유품과 작품들의 기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또 고암을 사랑하는 분들의 기증작품이 이어져 전시실을 알차게 만들게 되었습니다. 청관재의 박경임 여사, 가나아트센터 이호재 대표, 공화랑 공상구 대표, 노화랑 노승진 대표, 동산방화랑 박우홍 대표, 학고재 우찬규 대표, 현대화랑 도형태 대표 등이 기증에 적극 참여하셨습니다. 홍성에 소재한 청운대학교 이상열 총장, 홍성 출신 기업인 대륭건설 이환근 회장,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 개관준비 자문위원장 유홍준 교수 등이 좋은 작품을 건네주셨습니다. 우리 사회 기증문화의 진정한 모범을 보여주는 기념관 건립이라고 자부합니다.

홍성군도 기념관 건립 건축공사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기념관에 필요한 고암의 작품을 구입하여 보완하고, 윤후영 학예연구사를 채용하였습니다. 김석환 현 홍성군수의 열린 가슴과 담당 공무원들의 열정 덕택에 명실공히 공공미술관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공감하여 기념관의 운영방안과 전시 자문에 적극 참여한 홍익대학교 안상수 교수, 서울대학교 김민수 교수, 동덕여자대학교 김학량 교수, 김호석 화백 등의 노고가 곁들여져 있습니다. 이러저러한 미덕이 쌓여 이응노의 집이 완성된 것입니다.

기념관에 선보이는 유품들은 이응노의 삶과 예술의 체취를 진하게 전해줍니다. 젊은 시절 준수한 용모부터 노경의 해맑은 표정까지 고암의 인생이 묻어나는 옛 사진들이 특히 그러합니다. 도인의 품위를 전해주는 노인의 얼굴에는 고암 그림이 곧 고암 그 사람이고, 고암이 곧 고암 그림임을 잔잔하게 드러냅니다.

작품전시공간은 고암 이응노의 예술세계와 그 흐름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먼저 고암의 스승인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의 묵죽도를 포함하여 고암의 초기 대나무와 사군자 등 수학 시절 작품들이 선보입니다. 이어 분방한 필치로 변형시킨 묵죽도(墨竹圖)를 비롯하여 산수화, 동물화, 화조화, 풍속인물화 등 개성적인 수묵화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유럽에서 뿌리내린 신경향의 수묵추상화나 문자추상, 그리고 군상시리즈 등 고암의 걸작들이 함께합니다.

이응노의 집은 기념전시관으로서 역할과 더불어 고암을 기리며 고암을 쫒아 전통수묵화의 현대화를 시도하는 의미 있는 교육공간으로 거듭나도록 노력하렵니다. 교양강좌나 대중예술교육은 물론이려니와, 어린이 청소년 미술교육과 청년작가의 발굴에 앞장설 것입니다. 나아가 고암과 홍성을 전 국민에게 알리고 세계화할 기획전도 꾸며볼 예정입니다. 최근 우리 미술계의 중심이 서양화, 현대미술, 외국작가에 기우는 성향에 따라 전통수묵화가 너무도 소외되어 안타까운 게 현실입니다. 우리 전통회화의 부흥이 이응노의 집을 거점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너른 홍성 평야에 용봉산이 듬직하게 놓은 풍경 아래, 이응노의 집은 평이하면서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기념관 건축물이 격조 있게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고암이 태어난 정기를 호흡하며, 삶과 예술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터입니다. 여기에 고암의 집안사람들과 고암을 사랑하는 이들의 품위가 함께 녹아있어 더욱 빛이 납니다.

이응노의 집은 홍성이 크게 자랑할 만한 기념관입니다. 또 홍성군이 추구하는 ‘미래로(美來路)’ 에 정말 안성맞춤인 터전입니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미래를 여는 길’이라는 의미의 미래로(美來路)는 고암이 평생 추구한 예술이념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2011.11. 이태호李泰浩(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 명예관장,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4 – 부산 해운대 김종학 작업실과 부산시립미술관 김종학 회고전을 찾아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4 – 부산 해운대 김종학 작업실과 부산시립미술관 김종학 회고전을 찾아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4 – 부산 해운대 김종학 작업실과 부산시립미술관 김종학 회고전을 찾아
07/0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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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4일 부산에 다녀왔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김종학전(3월 6일~6월 21일)과 연계해 강의가 있었다. 80대 중반으로, 꽃 그림과 설악산 그림으로 유명한 원로 작가이다. 전시를 맡은 박진희 학예연구사와 새로 부임한 기혜경 관장의 강권으로 도록에 김종학 회화세계에 대해 글을 쓴 탓이다. 201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마련한 김종학 회고전 전시 도록에 작가론을 실은 게, 또 그 계기였다. (이태호, 「봄에는 봄을 그린다」, 『김종학 KIM CHONG HAK PETROSPECTIVE』, 국립현대미술관, 2011.) 이 논고의 부제였던 「김종학이 인사동과 설악동과 어울려낸 우리 색의 현란」을 제목으로 옛글 일부를 재활용하며 다듬고, 해운대 시대를 추가하여 부산시립미술관 김종학전 도록의 평문을 지난 1월 완성해 넘겼다. 코로나 사태가 이렇게 진행하리라 예상치 못하고 조금 일찍 원고를 넘겼다.

올해 들어 첫 대중강연인 데다, 거리 두기에 따라 제한한 청중들은 띄엄띄엄 배치된 터라 강의실 분위기가 좀 생소했다. 주제는 “설악과 인사동서 이룬 김종학의 회화예술, 새 미적 흥분으로 해운대 시대 열어”였다. (도 1) 내 강연요지는 도록의 글대로 ‘인사동에서 전통미에 취하다’ / ‘설악의 사계절, 가슴에 품다’ / ‘현란한 민족색, 생태 예술이 되다’ / ‘해운대에서, 미적 흥분 식지 않고‘로 진행했다. 특히 한국의 전통 색채미와 김종학의 회화세계와 연관성을 강조했고, 5년여 해운대에서 작업한 새로운 걸작에 대한 변화를 찾아보는 것이었다. 내 말을 마친 뒤, 청중들의 진지한 질문으로 이어져 강의실 열기는 끝날 때까지 대단했다.

질문 가운데 “김종학이 가장 많이 그린, 그리고 가장 인기 높은 ’꽃‘ 그림이 표징하는 게 무엇이냐?”가 인상에 남았다. 질문자는 부산화랑협회 기획이사이자 ‘갤러리 포름’을 운영하는 김경선 대표였다. 그 자리에서 답하기가 조금 궁색했다. “꽃들이 모두 작가 김종학의 분신 아니겠냐”고 답하고 정리했다. 강연을 마친 후 서울역에서 동행했던, 미술시장 연구자 서진수 강남대학교 교수와 인사차 김종학 작업실을 방문했다. 뵙자마자 김종학 브랜드인 ‘꽃의 표징’에 대한 질문을 올렸더니, 단박에 “그냥 그렸지, 뭐!”라고 하신다. 예상했던 대로다. 김종학 회화에 대한 화두(話頭)로 남겨둔다.

달맞이 언덕에서 만난 달들

김종학 화백을 해운대로 모신 것은 조현화랑(대표 조현)이다. 30여 년 경력으로 국내외 최고의 작가들을 유치해 기획전을 마련해온, 부산은 물론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굴지의 화랑이다. 내가 해운대 달맞이길 언덕, 조현화랑이 마련해준 김종학 작업실을 처음 방문한 때는 작년 12월 19일이었다. 3층 작업실은 남쪽 창으로 드는 겨울 햇볕이 따뜻했고, 해운대와 부산 앞바다가 한눈에 드는 달맞이 언덕 최고의 공간이었다. 솔밭 넘어 오후 해거름의 실루엣 해변풍경이 좋아, 지난번에 이어 다시 한번 스케치해두었다. (도 2) 이곳에서 보는 부산 바다 해넘이도 장관이다. 이번에는 여름 해가 길어지는 바람에 보지 못했지만, 작년 겨울 일몰을 찍고 그렸다. (도 3, 4)

달맞이 언덕에서 달뜨는 장면을 관람한 것은 원고를 마무리하던 2020년 1윌 8일이었다. 유진화랑 진정호 대표의 안내로 달맞이길 명소라는 ‘비비비당’에 들렀다. 까페에 들어서자 해변경치와 더불어 요즘 가장 주목받는 도예가 권대섭 작가의 백자대호와 달항아리가 눈에 들어 반가웠다. 조선백자의 아름다움과 전통형식을 재창조한, 2014년에 만든 대작들이다. (도 5) 유리창 밖으로 움직이며 변하는 달과 높이 45cm가량의 유백색 항아리가 실내에서 한 쌍으로 그렇게 어울렸다. 또 누가 보든지 말든지 항시 그 자리에 떠 있는, 달맞이길의 명품 둥근 달인 셈이다. 확인해보니 까페가 작가의 사돈댁이란다. 딸 권연아 씨는 나도 인사동 골동가게나 고미술전에서 가끔 만나 잘 아는 사이였고, 고미술에 눈이 밝기로 정평이 나 있다.

까페 창밖으로는 장산 끝자락이 바다에 내려앉아 있었다. 마침 떠오른 둥그스레한 달이 눈에 들었다. 음력을 확인해보니 보름 전날이었다. 보름달보다 해지기 전에 조금 일찍 뜨는, 파란 하늘의 흰 달이었다. (도 6) 달맞이길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해운대 앞바다 아침 해도 그렸다. (도 7) 장산 끝자락 청사포를 산책하다, 구름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 장관을 오랜만에 본 것 같다.

해운대 시대 생동하는 김종학의 대작들

이번 ‘김종학전’은 부산시립미술관이 한국현대미술작가를 조명하는 세 번째 전시이다. 회고전 수준으로 작가가 60여 년 활동한 전시기 작품세계와 아카이브로 채워져 있었다. 2011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보다 낫다는 평으로 이어졌다. 전시장 마지막인 제5부 ‘기운생동으로’에 최근 2019~2020년의 해운대 시대 대작들이 펼쳐져 있었다. 모두 캔버스에 아크릴맄 물감 그림이다.

작업실에서 보았던 꽃그림 <Pandemonium>(10x6m)은 십 미터 길이여서 바닥으로 늘어뜨려 진열했을 정도이다. 그 좌우에도 2020년 설경그림 <겨울>(200x780cm)과 2019년 작으로 녹색 주조의 여름 <풍경>(260x800cm), 두 점을 배치했다. (도 8) 뒤편에는 2020년 신작으로 <바다>(300x800cm)를 걸었다. (도 9) 수평선에 불을 켠 배들이 늘어선, 해운대의 밤바다를 연상시킨다. 김종학의 화려한 색채와 복잡한 구성과 달리, 이같이 간결한 단색조도 곧잘 해오신 작품 경향이다. 설악산 시절을 계승한 이들 대작에는 노대가의 의욕이 넘쳐 난다.

2020년의 신작 <폭포>(162x114cm)가 이번 회고전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가운데 세찬 폭포 물줄기 앞 가느다란 잔가지에 앉은 새 한 마리를 담은 그림이다. (도 10) 폭포는 세번 가량의 붓질로 마무리한 후에 캔버스를 뒤집어, 흰 물감 덩어리진 부분이 아래에 놓이게 세웠다. 아래로 포말이 형성된 것처럼 설정한 셈이다. 폭포 앞 상단에는 무섭게 직하하는 물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표정한 새 한 마리가 배치되어 있다. 솔부엉이나 황조롱이 같은 어린 매를 닮은 듯하다. 순간에 떠오른 감정을 쏟아낸, 김종학 초기의 추상표현주의 풍의 붓 맛을 살리며, 구상 이미지를 매칭한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강의 시간에 새는 화가로 평생을 산 김종학 자신일 거라고 얘기하니 수강생들이 모두 웃으며 공감했다. 이들 모두 내가 도록의 글을 쓰고 난 뒤 마무리하신 작품이어서, 간소하나마 여기에 소개해보았다.

다음은 김종학전 도록의 내 논고이다. (이태호, 「김종학이 인사동과 설악동과 어우려낸 우리색의 현란」, 『김종학』-한국현대미술작가 조명 lll, 부산시립미술관, 2020.3.) 

 

 

김종학金宗學이 인사동仁寺洞과 설악동雪岳洞과 어우려낸 우리 색의 현란絢爛

이태호李泰浩 (서울산수연구소장/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김종학金宗學(1937~ )은 현재 우리 화단에서 설악산 풍경과 꽃그림으로 유명해진 작가이다. 이 시대의 대표 화가로 꼽을 정도로 예술세계를 단단히 일구고 미술사적 위치를 확고히 다진 원로이다. 지난 50여 년간 그려낸 드로잉, 판화, 수채화, 수묵화, 유화 등으로 소화한 다채로운 소재의 작품들을 보면, 그 예술세계가 그리 녹록하지 않다. 먼저 한국의 피카소라 일컬어지기에 손색없이 작업량이 엄청나다. 적어도 현재까진 한국미술사를 통틀어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로 기억될 법하다.

청년기엔 추상표현주의를 탐닉하며 서양미술과 시대사조를 따르기도 했다. 동시에 전통미에 일찍 눈을 떴고, 설악동에 정착한 이후 설악을 중심으로 우리의 자연과 교접交接했다. 이런 가운데 김종학은 설악산의 자연과 인사동의 고미술을 자신의 성정性情으로 버무려 민족 고유색의 현란함을 펼쳐 놓았다. 김종학의 회화세계는 그처럼 한국의 자연과 전통미가 만든 셈이다. 이를 대하노라면 새삼 자연이든 문화유산이든, 우리 것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다시 돌아보게 할 정도이다. 

인사동에서 전통미에 취하다

김종학의 회화예술은 미술계의 평가대로 조선의 전통미에 기반을 둔다. 고미술 수집은 경제력과 자신의 기호대로 목물류와 자수나 보자기 같은 생활 민속품에 집중되었다. 아래와 같이 수집의 변을 풀어놓은 적이 있다.

설악산에서 가끔 서울에 나올 때면 나의 유일한 소일거리가 골동상을 둘러보는 시간이다. 비싼 것 싼 것 가리지 않고, 내 마음에 드는 것을 멋대로 사다가 집에 그냥 쌓아 놓는다. 목기도 있고 민속품도 있고 도자기도 있고 잡동사니도 있다. 가짜를 사기도 하지만 간간이 현대적인 것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 우리 목기의 매력은 무엇보다 그 비례감에 있다 하겠다. … 목기 수집이 내 작업에 준 영향이라면 조형적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는 점이다. … 보자기의 색감과 비례감이 보여주는 현대감각에 감격했다. 몬드리안보다 훨씬 이전에 그렇게 기하학적이고 그렇게 창조적인 물건을 우리 조상들이 만들었음에 감탄했던 것이다. … 반면 우리 것은 자기 재주대로, 그저 멋대로, 바느질이 가는 대로, 마음가는 대로 만든 것이다. … 멋대로 놓아서 오히려 현대적인 것이 되고 만 것이 내 마음에 든다. … 골동만 사려고 골동가게를 출입하는 것은 아니다. 가게 주인과도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내 취향이다. 지식인하고 대화하는 것보다 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가 훨씬 마음 편하다. …

김종학의 고미술품 수집은 약관 20대 후반부터 고 홍성하洪性夏(1898~1978) 선생에게 배웠다고 한다. 초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조선시대 회화 컬렉션으로 유명했던 수집가이다. 안목을 키우는데 최고의 교사를 만난 셈이다. 우리의 옛 문화유산에 남다른 심취와 이해는 강원대학교 교수 시절 한국미술사를 강의할 수준이었다.

목기류에 대하여는 벌써 30-40대에 상당한 걸작들을 골라내는 실력이었다. 1987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소장품들이 특별전으로 꾸며질 정도였다. 지금도 별도의 ‘김종학실’이 마련되어 있다. 간결하고 세련미 넘치는 사방탁자, 서안, 문갑, 연상 등 선비문인의 사랑방 꾸밈가구들이 특히 조선 목공예의 예술미를 한껏 자랑한다. 개다리소반과 찬탁, 의걸이장이나 약장 같은 생활가구도 나무무늬와 비례감이 시원한 눈맛의 명품들이다.

현대적인 심플한 덩치의 목물이나 석물류부터 촘촘한 무늬와 화사한 색상의 자수나 보자기, 의상, 배겟니 등 여성 생활품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모았다. 그 가운데 염직 공예품류는 민화들과 함께 김종학의 현란한 꽃그림을 발전시키는데 영감을 주었다. 분방한 변형미와 화려한 색채미가 그러하였다. 조선 후기 문인석이나 돌부처 같은 석물류들, 그리고 목동자 조각상 등은 김종학의 인물화와 무관하지 않다. 다양한 남녀노소의 얼굴그림을 보면, 1980년대 민주화의 파고 속 한국인이 지녔던 무표정을 떠오르게 한다. 재혼할 때는, 소장하던 조선후기 민불형民佛形 돌부처 닮은 부인을 맞이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고서화 수집품도 김종학의 안목을 여실히 보여준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의 〈산해숭심山海崇深〉이나 〈죽로지실竹爐之室〉이라는 현판과 서첩을 모았다. 조선시대 최고의 붓 맛을 지닌, 개성이 강한 추사체를 지고의 스승으로 삼는다. 미수 허목眉叟 許穆(1595~1682),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1705~1777) 등 개성미가 뚜렷한 글씨들의 수집품도 눈길을 끈다.

조선시대 그림 수집도 상당하다. 능호관 이인상凌壺觀 李麟祥(1710~1760)의 〈묵란도墨蘭圖〉는 간일한 문인화격을,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1745~1806?)의 〈파도와 물새〉나 북산 김수철北山 金秀哲(19세기)의 〈묵국도墨菊圖〉등은 풀어진 수묵의 농담이 작은 화면과 어울려 맛깔스럽다. 조선시대 수묵화의 선미禪味를 한껏 담은, 농익은 명작들을 모았다. 추사나 우암의 서예작품은 빠른 붓 길과 기세가 넘치며, 반면에 수묵화 수집품은 섬세하고 아련한 그림이다. 이들을 따라 김종학은 겸재 정선謙齋 鄭敾(1676~1759)의 진경산수화법을 익혀 수묵 스케치를 즐겼고, 조선 문인이 추구한 맛도 자기화시키려 애썼다. 설악산의 폭포나 겨울 그림에 조선 수묵화풍의 구성미와 필묵筆墨 감각이 잘 살아 있다.

조선朝鮮의 아름다움을 사랑한 김종학의 눈은 고미술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미 1970-80년대에 이중섭李仲燮(1916~1956)의 대표작 〈빨간 소〉, 〈까마귀〉, 닭그림 〈부부〉 등을 수집한 적이 있었다. 우리 근현대미술에서 이중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김종학의 예술적 성향과 함께한다. 예술성과 미적 형상을 채는 눈썰미는 누구도 쉽게 따르기 힘들 게다. 숱하게 골동가게를 뒤지고 다닌 발품이 큰 역할을 했겠지만, 아름다움을 고르는 직관력이 타고나지 않았나 싶다. 그 특별한 안목은 ‘김종학’의 꾸밈없는 심성과 기질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김종학의 컬렉션은 이처럼 폭이 넓고 다채롭다. 고미술을 사랑하는 취향과 놀라운 수집벽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한때는 목기류나 민예품을 살 욕심에 전력을 다해 작업에 매진할 정도였다고 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조선시대 목기류는 김종학의 안목을 높였다. 자수나 민예품들은 김종학 회화의 색감과 모티브를 제공해주었다. 석불이나 목동자, 문인석에 새겨진 얼굴형의 김종학표 인물화도 빼놓을 수 없다.

김종학은 우리의 옛 문화에 동화되면서 그 전통형식을 토대로 작품세계의 개성미를 연출했고, 현대화해내었다. 김종학은 자기 회화를 “서양현대미술을 공부한 것에 전통미를 ‘컨닝구’해 ‘비빔밥’을 만든 거지”라고 즐겨 말한다.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알고 창조한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나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모범적인 실천사례로 꼽을 수 있겠다.

설악의 사계절, 가슴에 품다

1979년 여름, 속초의 설악산 입구 개울가 너른 솔밭에 작업할 터를 잡았다. 42세 때, 친형의 도움으로 설악산과 인연을 맺었다. 설악산은 북쪽의 금강산과 쌍벽을 이룬, 암봉岩峯과 계곡이 아름다운 영동嶺東의 명산이다. 금강산의 미모 탓에 그 뒷켠으로 밀려 있지만, 실제로는 금강산보다 봉우리가 높고 계곡이 우람하다. 금강산의 아기자기함에 비해 원시성과 야성미를 간직한 곳이다. 설악산과 더불어 김종학의 회화예술이 이룩된 사실을 염두에 두면, 설악과 김종학의 만남은 필연인 것 같다. 명승名勝이 명인名人을 끌어당긴 걸까.

줄기차게 끊임없이 그려온 김종학의 설악산 풍경 그림들은 자연물의 형태를 담았기에 구상회화具象繪畵에 속한다. 그렇다고 대상을 앞에 놓고 사생하는, ‘눈으로 그리는 그림’은 아니다. 생각하는 형상들을 기억에서 끄집어내는, 동양화론으로 치자면 옛 문인들의 ‘마음 그림’ 사의화寫意畵 쯤 되겠다.

김종학은 대상을 단순히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실내에서의 캔버스 작업은 스케치에 의존하지 않고 머리에 기억된 형상을 체화體化해내는 일이다. 옛 문인화론에서 ‘가슴 속의 대나무를 그린다’는 소동파蘇東坡의 ‘흉중성죽胸中成竹’에 해당된다. 또 캔버스에 기억된 형상을 펼칠 때는 빠른 직감에 의존한다. 팽팽한 긴장 상태에서 벼락같이 즉흥을 쏟는다. 몸으로 그린 그림이랄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화면에 연출한 대상들은 꽃이면 꽃, 나무면 나무, 산이면 산 등 형형색색의 특징을 적절히 드러낸다. 구상화이면서도 단순화한 형태감에는 추상성이 담겨 있다. 그렇다고 추상회화의 화법처럼 주관에 따라 재구성하는 의도는 드러내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감성의 흐름을 따른다.

김종학은 마음, 곧 머리에서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구상하여 그려왔다. 서양의 표현주의 예술론이나 동양의 서화론書畫論과 근사한 편이다. 또 그의 화면은 얼핏 무질서한 것 같으면서 전면을 꽉 채우든지, 여백 부분이 생기든지, 사선으로 배치하든지 나름대로 질서를 보인다. 비워지거나 채워지면 될 뿐 꾸밈새가 의도적이지 않다. 화폭의 공간구성부터 즉흥적 직관에 의지한 탓이다.

그렇다고 김종학이 스케치를 소홀히 한 것도 아니다. 늘 설악의 주변 자연을 머리에 담는데 그치지 않고 부지런히 사생하며 눈에 익혀 왔다. “스케치를 다시 캔버스에 옮기면 그림이 째째해져, 스케치는 스케치로 그쳐야지…”라며 꺼내놓는 연필, 수채나 수묵의 사생화들이 상당하다. ‘과연 김종학 회화의 예술적 포스가 여기에서 나오는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붓끝에서 분출되는 과감한 생략과 변화의 분방한 형상성을 수긍케 해주기 때문이다. 이들 스케치만으로도 김종학을 재평가하게 될 것 같다. 

화면구성과 형상미와 더불어 김종학 회화는 필치나 색감에 그 개성미가 뚜렷하다. 유화보다 빠르게 건조하는 수성 아크릴 물감Acrylic color을 선호한다. 붓질은 속도감나고 대담하다. 눈으로 익힌 대상을 가슴에 삭힌 대로 ‘벼락’ 같이 그린 형상들이 꿈틀댄다. 자연히 감정의 기복을 따라 즉흥적 필세筆勢와 어울린 색채감각 또한 급한 편이다. 물감과 물감, 물감과 기름이나 물을 섞을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물감 튜브를 직접 짜 캔버스에 바르기도 한다. 원색조의 화면이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붓과 색은 그렇게 격정의 몸짓으로 미적 흥분을 내지르게 하였다. 질료감의 니글거리는 움직임을 보면 육감적이다. 김종학의 화면에는 가슴으로 그린 색상의 리듬감이 생생하다.

 

현란한 민족색, 생태 예술이 되다 

김종학은 분명 우리시대의 빼어난 채색화가이다. 구상계열의 채색화가로 치자면 김환기 · 이대원 · 천경자에 이어, 김종학이 자기 독창성을 가장 선명히 부각시켰다. 현란한 색감과 색채배합에 김종학 회화예술의 개성미가 넘친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 갈색 등 짙고 안정된 원색조의 색채 활용은 물론이려니와, 특히 여름 그림에서 초록색을 바탕으로 삼은 빨간색의 보색대비가 눈길을 끈다. 이런 색채의 배열과 대비는 한국회화사에서 눈에 익은 전통색감과 유사하다. 웅혼한 고구려 고분벽화부터 섬려한 고려 불화, 조선시대 불화와 단청장식, 조선 후기 궁중화나 민화, 김종학 컬렉션에 포함된 자수나 섬유류의 민속공예에 이르기까지 1600년 이상 지속해온 민족적 색채감각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화려한 색채 정서를 즐긴 한韓 민족의 후예라 할 수 있다. 최근 김종학 채색화의 대중적 인기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어필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런 민족 고유의 색채정서를 현대에 재창조하고 발현發現해 놓았다는 점만으로도, 김종학의 회화가 우리시대에 남긴 커다란 업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김종학의 예술을 가능케 한 대상은 무엇보다 설악의 자연풍광이다. 산과 강과 바다, 그 대지에 자랐다 스러지는 숲과 꽃과 풀섶, 여기에 공생하는 나비와 새와 풀벌레, 이들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김종학을 김종학답게 만들었다. ‘설악은 봄 할미꽃 피는 광경을 보고 자살까지 생각했던 마음을 고쳐먹었다’라고 했듯이, 설악은 김종학의 인생에 대한 절망감과 모더니즘에 대한 회의를 한꺼번에 해소해 주었다.

설악산의 사계 순환은 분명 김종학에게 치유의 공간이 되었으니, 설악의 자연을 일군 김종학의 회화는 생태生態 예술이라 할 만하다. 생운生韻이 넘치는 순수 자연인, 김종학의 붓질과 색감이 내뿜는 에너지는 자연미自然美의 근사치이다. 그것만으로도 생태적 회화예술의 조건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생각된다. 김종학이 재창조한 민족색의 현란絢爛은 요즈음의 친환경 의식과 어울린 셈이다. 이는 인간의 원초적 자연성을 잃은 채 오염된 환경의 현대 대중들에게 김종학의 회화가 주는 메시지의 하나일 법하다. 김종학 회화가 인기 있는 이유도 그런 점에 있지 않을까. 아무튼 김종학의 설악풍경은 우리나라의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연이 예술을 창조하는데 얼마나 큰 진원震源인지를 알려준다.

‘색채의 폭풍과도 같은 미적 흥분’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김종학의 화면은 숨이 막힌다. … 자연 및 우주의 거대한 울림은 뜨거운 에너지로 화면에 폭발한다. 화면에 다가가면서 숨막히는 이유는 너무나도 생경한 자연 또는 우주의 기운에 부딪히기 때문이다.”라고 상찬하는 평론가도 있다. 이경성과 오광수에 이어 전람회 때마다 최석태, 유준상, 유재길, 윤우학, 김복기, 고동연, 김애령, 그리고 김종학을 녹취하며 작가론을 가장 많이 쓴 김형국 등의 평론들이 자자하다. 이들 모두 김종학이 한국현대화단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실감케 한다.

크고 작은 전람회를 통해 김종학은 그처럼 호의적 평가를 받았다. 원화랑, 선화랑, 박여숙화랑, 예화랑, 갤러리 현대, 가나아트센터 등에서의 개인전은 성황을 이루면서 늘 주목을 받아 왔다. 특히 2004년의 갤러리 현대와 2006년의 가나아트센터 개인전은 대작을 중심으로 김종학 예술의 피크를 보여주었다. 그런 만큼 좋은 작품이 쏟아졌고, 한때 투자가치 일순위로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또 분명한 점은 김종학이 우리시대를 대표할 거장巨匠으로서, 인간적 예술적 풍격風格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현대의 문명인들에게 그의 회화예술이 ‘김종학’의 속내처럼 자연과 인간의 생래적生來的 진면목을 일깨워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하듯이 김종학의 작품세계는 미래의 현대인들까지 허브로 그 가치가 계속 빛날 거라 확신해본다. 이런 양상은 2011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회고전으로 김종학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운대에서, ‘미적 흥분식지 않고 

설악산인雪嶽山人 김종학이 최근 부산으로 터를 옮겼다. 해운대인海雲臺人이 되었다. 한반도의 가장 서북쪽 항구도시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이 가장 남동쪽 부산 바닷가로 내려왔으니, 끝에서 끝으로 대각선 이동이 이루어졌다. 2015년부터 조현화랑이 내주었다는 작업실은 해운대와 광안리 바다를 굽어보는 달맞이길 언덕에 지은, 창 너른 공간이다.

2019년 말 12월 19일 작업실에 들어서니, 펼쳐진 대작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천진한 기운과 현란을 내뿜고 있었다. 반가웠다. 2011년 설악동 작업실 방문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기염을 토하고 계셨다. 80세를 훌쩍 넘어섰지만, 아직도 온몸의 격정으로 ‘미적 흥분’이 식지 않으신 듯하였다. 벽면과 바닥에 캔버스를 펼쳐 놓고 화면을 길게 쓰는 작업도 그러려니와, 소품들을 비롯해 쓰고 남은 물감을 짓이겨 그린 면 가방이나 티셔쓰가 화실 구석 한켠에 수북한 것을 보고는 질렸다. 붓그림 작업 틈 시간에는 닥종이로 학이며 오리며 입체조각들을 주무르고 계셨다. 그야말로 손을 쉬지 않는 모양이다. “여긴 공기가 따뜻해서 좋네! 요즘 꽃이나 오브제들이 더 크게 보이구!” 두 마디 외에 만남 내내 침묵으로 여전하셨다.

2011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이후 근 10년 동안 작업과 국내외 활동을 훑어보니, 종횡무진이다. 꽃, 나무, 풀, 새, 나비, 벌레들이 가득한 작품들은 격정의 몸짓이 쏟아낸, 다채로운 형태와 색채가 세찬 파장으로 넘실댄다.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대지의 향연답다. 마치 불교의 화엄華嚴 세계를 연상시킨다.

‘대상이 크게 보인다’니, 그만큼 자연과의 교감이 자연스러워지며 회화적 밀도가 높아진 듯하다. 같은 시기의 설경을 비롯한 단일 색조의 산이나 바다 풍경화들은 옛 유교 문인들의 격조, 곧 마음을 쏟은 남종산수南宗山水의 사의寫意에 더욱 근사해졌다. 화사한 꽃그림과 대조를 이루며, 양쪽을 넘나드는 호흡도 활기차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작업을 쌓을지, 혹은 어떤 변화로 새로운 신화를 창출할지, 작업실을 둘러보며 나로서는 김종학이 가늠되지 않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요즈음 십 미터가 넘는 캔버스를 채우고 삼백 호나 오백 호 대작들을 불쑥불쑥 소화해내는 붓질 동세를 보면, 그야말로 노익장이라 할 만하다. 요즘 말로 딱! ‘슈퍼 에이지’인 셈이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3 – 오월 무등산을 그리다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3 – 오월 무등산을 그리다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3 – 오월 무등산을 그리다
06/01/2020
/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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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균의 <하늘과 땅 사이 5>를 통해 광주민중항쟁 40주년을 돌아보고

금년은 광주민중항쟁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광주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광주항쟁을 기념하는 크고 작은 전시행사가 줄줄이 열렸다. 그중에서 광주광역시 동구 장동에 위치한 ‘예술공간 집’에서 5월 7일부터 24일까지 열린 전시, “강연균의 <하늘과 땅 사이 5>”가 여느 기획전보다 가장 눈길을 끌었다. 리플렛에 짧은 글을 써준 인연으로, 이 전시를 보러 5월 6일 광주를 내려갔다. 지난번 이이남 작가 탐방 이후 한 달 만에 다시 찾았다.

초여름 신록의 무등산을 여러 점 그렸다. 마침 광주를 방문한 5월 6일은 음력 4월 14일이었다. 망월동에서 무등산 서석대와 입석대 능선 사이로 저녁 무렵 뜨는, 보름달 근사치의 둥근달 그림 <무등산에 달 뜨고>를 맨 먼저 그렸다. (도 1) 그야말로 달을 바라보기 좋은 동네, 망월동(望月洞)이라는 지명과 위치를 실감하였다. (도 2)

강연균의 오월 그림들

강연균 화백은 남도의 땅과 사람들의 생동하는 현실감을 담아온 수채화가로 유명하로다. (이태호, 「남도의 빛, 그 땅의 사람들」, 󰡔강연균󰡕, 삼성출판사, 1993.) 동시에 1980년 오월 광주민중항쟁 직후 첫 오월그림을 그린 작가로 꼽힌다. 당시를 형상화한 대표작 <하늘과 땅 사이 1>(1980-81, 과슈, 194x259cm)는 금남로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만행으로 처참히 죽어갔던 광주시민을 상징한 작품이다. 현장을 목격하고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하늘과 땅 사이’ 그같이 벌어진 시대적 절망감을 굵은 먹선과 과슈로 200호의 대작에 담았다. (도 3)

때 강연균 화실은 학살과 항쟁의 중심인 금남로에 있었다. 현장을 본 직후 얼마간 붓을 들어 사실적으로 그리려 시도했다. 시민군이나 열사들의 주검을 모델링하기도 했으나, 사실 묘사로는 그 5월 현장의 엄청난 충격을 소화할 수 없었다. 체험 당시의 울렁거림이 너무 컸기에 차분히 사실성을 구현하기 쉽지 않았을 터이다. 굵고 검은 선묘와 강렬한 표정의 인물들 묘사로, 피카소의 <게르니카>(1934)처럼 입체파 화풍으로 재구성했다. 광주의 ‘게르니카’라고 불릴 정도이다.

이 작품 이후 강연균 화백은 1984년에 발가벗은 시신들 위로 분노의 남자와 슬픈 남녀들을 설정한 과슈 그림 <하늘과 땅 사이 2>를 완성했다. 1990년에는 해골 위 누드 여인이 정면으로 앉아 있고, 그 뒤로 신격화된 인간을 배치한 <하늘과 땅 사이 3>을 수채화로 그렸다. 1995년의 <하늘과 땅 사이 4>는 별격으로, 망월묘역과 길가에 1200장의 만장을 세운 설치미술이었다. 첫 회 광주비엔날레의 안티비엔날레로 조직한 ‘광주통일미술제’에서 강연균이 기획한 야외작업이었다. 망월묘지 4㎞의 가을 코스모스길에 설치한 장승과 솟대, 상여 그리고 1200여 만장이 휘날린 미술제의 최대 이벤트였다. 만장에는 200여 인사들이 5월의 뜻을 기리는 글과 그림으로 동참하였다.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 『광주통일미술제』 전시도록, 1995.) 강연균 화백은 한국민예총 4, 5대 공동의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이들과 달리 이번 전시에 선보인 <하늘과 땅 사이 5>는 작년 말에 40년을 삭힌, 1980년 5월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 내 목탄화로 작업한 7점이다. 이들은 드로잉 솜씨가 탁월한, 손맛이 유별난 화가임을 다시 실감케 한다. 전시 리플렛에 쓴 짧은 내 글이 강연균 화백의 작품들과 함께 『전라도닷컴』이라는 잡지에 두 쪽으로 실려 있어 소개한다. (도 4-1, 4-2)

40년 전 광주에 내려와 23년 살아

5월 6일 케이티엑스를 타고 송정역에 내리자마자 망월동으로 향했다. 광주 민예총 의장을 지낸 수묵화가 허달용이 픽업해주어 오월 영령들이 모셔진 국립518민주묘소를 먼저 들렀다. 묘소 근처에 처처히 핀 노란 꽃과 하얀 꽃씨들의 <망월동 민들레> 그렸다. (도 5) 그리고 제1 묘역 언덕에서 달이 뜨는 무등산과 해가 지는 담양 병풍산을 스케치북에 담아 보기도 했다.

5월 13~14일 광주에 또 다녀왔다. 40주년을 맞아서 당시 기록물들 전시와 기념전들을 관람하기 위해 일주일 만에 광주를 찾았고, 일박 이일로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14일 새벽 금남로와 옛 도청 앞 분수대가 있는 민주광장을 들렀다. 마침 떠오르는 일출을 만났다. 광장에서 볼 때, 여름 해는 무등산 왼편인 북동쪽 향로봉 쪽에서 하얗게 떠올랐다. <광주 민주광장 분수대의 일출과 무등산>을 스케치했다. (도 6)

돌아보니, 내가 광주에 살러 온 것도 40년 전이었고, 23년을 살았다. 나는 1980년 7월 1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로 발령을 받고 광주에 내려왔다. 오월항쟁 한 달이 지난 그 현장의 처절한 모습과 매캐한 냄새, 충격에 놀란 사람들을 만났었다. 이를 새삼 확인한 것은 광화문 광장에 있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의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특별전’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2020. 5. 13~10. 31) 전시실에서였다. 누렇게 바랜 전남매일신문(현 광주일보의 전신) 1980년 6월 2일 1면이 단박에 눈에 들었다. (도 7) 항쟁이 진압된 후 처음 재발간된 신문이다. “광주사태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흰 고딕 글씨의 검은 띠와 “한국 민주정부로 신속 진전 희망”한다는 미국 카터 대통령의 발언, 그리고 아직도 미해결의 광주 문제 주역인 “전두환 중정부장서리 사퇴” “비상대책위원장 임명 계기”라는 등의 기사들이 지면을 채웠다.

이들 기사 위로 ‘아아, 광주여’라는 타이틀 아래,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로 시작하는 시가 보인다. 광주의 참상을 처음 알린 유명한 오월시이다. 신문이 나오기 전 편집본도 함께 소개되었는데,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 십자가여’라는 타이틀에서 뒷부분이 빠졌고, 시는 빨간펜으로 난도질당해 반으로 줄어 발행되었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2020.) 

시의 제목은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이다. 제1절 “아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죽음과 죽음 사이에/피 눈물을 흘리는/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우리들의 아들은/어디에서 죽어서 어디에 파묻혔나/우리들의 귀여운 딸은/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하느님도 새떼들도/떠나가 버린 광주여/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아 아, 통곡뿐인 남도의/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를 보면, 역시 그 학살의 분노와 통한이 가득한 시인의 심장박동을 엿보게 한다. 한편 앞에 소개한 강연균 화백의 1980~81년 작 <하늘과 땅 사이 1>와 유사한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

김준태의 시 위에는 흐릿한 흑백사진 무등산 전경이 화면을 채웠다. 천왕봉 능선 아래 중봉이 전면에 등장하고 왼쪽 구석에 조선대학교 흰 건물이 보이는 점으로 보아, 양림동이나 양동에서 찍은 듯하다. 40년 전 금남로와 충장로에 고층빌딩이나 아파트가 거의 보이지 않고, 무등산 전면을 훤히 드러낸 경치가 새롭게 다가왔다. 이 사진을 보며, <40년 전 무등산>을 그렸다. (도 8)

국립공원 무등산은 광주를 품은 웅대하고 커담한 토산이면서, 후덕한 덕산의 이미지이다. 해발 1,187 미터의 정상 천왕봉 근처에는 화산암으로 원기둥의 주상절리의 바위들이 석책을 두른 듯 솟아 절경을 이룬다. 그 ‘입석대’와 ‘서석대’는 옛 문인들의 유람 명승지로 사랑을 받았고, 많은 명시를 남겼다. (김대현, 󰡔무등산 한시선󰡕,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7. ; 박준규, 󰡔무등산과 고전문학󰡕, 국학자료원, 2018.)

왼쪽 능선은 마치 코끼리의 얼굴과 코의 옆 모습처럼 보인다. 원효사에서 보면 천왕봉에서 북산으로 흐르는 능선이 가장 뚜렷하다. 그래서 무등산이 ‘보현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보현’은 지혜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함께 석가모니를 보좌하는 수행의 보현보살(普賢菩薩)에서 따온 것이다. 문수보살은 사자, 보현보살은 코끼리와 연관된다. 참고로 남도의 주산, 지리산(智異山)은 ‘지혜의 산’으로 문수보살의 산 이름인 셈이다. 40년 전 1980년 7월부터 2003년 월까지 23년을 살면서 대했던 <무등산을 추억하며>, 광화문에서 신록의 무등산을 다시 그리면서 이런 내력을 써넣었다. (도 9)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2 – 광주와 마곡에서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을 만나다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2 – 광주와 마곡에서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을 만나다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2 – 광주와 마곡에서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을 만나다
04/30/2020
/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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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광주 무등산의 잔설(殘雪)을 만났다. 봄물이 오른 연녹색과 황갈색 톤의 산기슭부터 정상의 눈 쌓인 정경까지, 지난 20여 년간 광주에 살며 눈에 익었던 추억을 되살려 주었다. 넉넉하게 열린 무등산의 품세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화폭에 담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 3월 11일 광주의 예술인 마을 양림동 이이남 작가의 새 작업실 창으로 든 무등산 정상이 그랬다. (도 1, 2) 광주를 찾은 것은 서울식물원 마곡문화관이 기획한 “이이남, 빛의 조우”(2019. 11. 21.~2020. 4. 19) 전시회에 대한 도록의 평문을 쓰기 위해서였다.

 이이남 작가는 우리시대 미디어 아티스트로 명성을 얻었다.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를 넘나들며, 익숙한 이미지를 새롭게 흥미를 끄는 다양한 콘텐츠로 디지털 예술세계를 펼쳐왔다. 세상, 현실, 역사, 환경 등의 문제, 종교, 인간에 대한 성찰과 고뇌를 재미있는 연출과 구성으로 버무려왔다.

 미디어아트, 디지털 민중미술, 디지털 팝아트, 포스트 모더니즘 등 여러 사조와 경향이 혼재한 이이남의 작업은 20세기 후반 비디오아트 창시자로 꼽히는 백남준을 잇는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과 아시아를 넘어 미국과 유럽의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초청하는 기획전과 개인전을 가졌고, 2016년 벨기에에서 우리 시대 비디오아트의 거장이자 전설 빌 비올라와 2인전은 이이남 예술사의 정점으로 꼽을 만하다.

 이이남의 디지털 혼성이나 이미지 변환 작업은 놀랍게도 이이남도 즐겨 다룬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변형화법과 유사하다. 예컨대 여러 시점의 봉우리나 계곡을 한 화면에 합성하는 <금강전도>의 다시점(多視點) 합성방식은 몽타주(montage)에 해당하고, <박연폭도> 처럼 폭포의 천둥소리를 담기 위해 화면을 길게 변형한 화법은 모핑(morphing)과 흡사하다. 그래서 나는 겸재 정선이 지금 활동한다면, 아마 이 시대 최고의 디지털 작가가 되리라고 말할 정도이다.

  도록 제작이 늦게 결정되어 코로나 사태 한참 때 움직이게 되었다. 그 바람에 인적이 드문, 남도에 가득한 봄기운을 만끽했다. 청매와 홍매와 목련꽃들이 한창이었고, 청보리밭이 온통 봄을 뽐내고 있었다. 광주와 담양 죽녹원 이이남의 미디어 작품전시관 ‘이이남 아트센터’를 오가며 카메라에 담았다. 담양 추월산 실루엣을 그리고, 해지는 병풍산을 담았다. (도 3, 4)

 광주의 작업실과 담양 죽녹원 가까이 작품전시관을 왕래하기 부담스러워, 명지대학교 대학원생 하휘구의 승용차를 대절해 다녀왔다. 대학원에 신입생으로 입학했으나,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안유현 씨와 석다희 씨가 동행했다. 석다희 씨는 덕성여자대학교 대학원생이다. 뜻하지 않게 반가운 김자우 박사와 이지윤 숨 대표가 이이남 작가를 만나러 왔기에, 합류해 저녁 식사를 하며 이이남의 작품세계를 토론했다.

  그리고 3월 14일 이이남의 작품들을 살피러 마곡문화관 전시실을 다시 찾았다. 이때 마곡문화관의 원모습인 배수펌프장과 주변을 둘러보며, 물이 빠져나가는 수문 위로 오래 묵은 버드나무가 자라 있어 스케치해보았다. (도 5, 6) 또 멀리 궁산과 강 건너 행주산성이 한눈에 드는 명소이다. 양천의 역사와 맞닿은 이이남의 2019년 신작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Reborn Light, Yangcheon)>을 비롯해, 다섯 점의 디지털 작품들은 전시장으로 변신한 마곡문화관에 맞춤 같았다. (도 7, 8, 9) 아래에 이이남 전시 도록에 쓴 내 글을 첨부한다. 

 

디지털 이미지의 혼성과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법

– 마곡문화관이 기획한 이이남, 빛의 조우전시를 보며

 1.

 작년 11월 중순이다. 강서구에 소재한 서울식물원 마곡문화관이라며, 정수미 학예연구사에게 전갈이 왔다. 이이남(李二男) 개인전 오픈에 참석해달라는 초대였다. 축사도 해주고, 도록의 글도 써달라는 거였다. 

 서울식물원 북쪽의 마곡문화관은 언뜻 오래된 방앗간처럼 보였다.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지은 목조건물로, 옛 배수펌프장이었다. 1925년 여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를 치른 뒤, 양천수리조합이 곡창지대인 김포 마곡평야의 물을 조절하기 위해 1927~8년에 지었단다. 마곡문화관은 국가등록문화재 제363호(문화재명 : 서울 구 양천수리조합 배수펌프장)로, 2018년 문을 연 서울식물원이 관리하고 있다. 맨 아래층 원통형 배수시설들을 보존하고 유리 바닥으로 마감해, 멋진 문화공간이 재탄생한 것이다. 

마곡문화관은 북쪽으로 궁산 기슭 겸재정선미술관과 개화산 사이에 배치되고, 강 건너에는 덕양산 행주산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빌딩 숲으로 가려졌지만, 나지막한 발산과 조금 높은 우장산이 너른 평야 남쪽으로 흐르는 형국이다. 동쪽으로는 한강 너머 북한산세가 펼쳐져 있다. 계양산이 자리 잡은 서쪽 들에는 호수공원도 조성하여, 서울식물원과 마곡문화관은 강서구의 명소로 사랑받을 법하다. 

이곳에서 우리 시대를 대표할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의 작품들이 전시되니, 색다른 기대심이 앞섰다. 이이남은 이곳 고을 수령이었던 겸재 정선의 대표작품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박연폭도> 등을 디지털로 소화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1740년 양천현령으로 부임해 1745년까지 역임했다. 수령 재임 기간에 한강을 유람하며 명소를 담은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1740~41년, 50년경, 간송미술관 소장), ≪양천 8경첩≫(1740~45년, 김충현 구장), ≪연강임술첩(連江壬戌帖)≫(1742년, 개인 소장) 등을 남기며, 개성적 회화예술의 기반을 이룩했다. 이를 기념해 양천 관아터 근처에 겸재정선미술관이 건립되었다.  

이이남 작가의 기발하고 새로운 화면을 궁금해하며 마곡문화관에 다가섰다. 흰 천에 LEE LEE NAM이라는 고딕체를 중심으로 ‘서울식물원 마곡문화관 기획전, “이이남, 빛의 조우”, 2019. 11. 21.~2020. 4. 19.’이라는 알림 배너가 걸려 있었다.

  

2. 

전시장 남쪽 문을 들어서자 왼쪽 벽면을 가득 채운 8개의 화면이 눈에 띄었다.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Reborn Light, Yangcheon)>이다. 기둥 사이 8개 화면은 가로 12미터의 폭에 높이 2.4미터로, 8개 풍경이 절묘하게 기둥과 기둥 사이 8간 벽면과 맞아 떨어진다. 화면의 반대편에서 이미지를 쏟아내는 빔프로젝터는 4대이다. 프로젝터 1대당 2개 화면을 그려낸다. 겸재 정선의 양천 8경도 화면부터 전체 동영상은 19분 37초이다. 이이남 작가가 지역 문화의 역사와 공간을 맞춤으로 준비한 초대형 가작이다.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Reborn Light, Yangcheon)>이 여기 마곡문화관의 얼굴로 이대로 보존 전시해도 명물이겠다.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Reborn Light, Yangcheon)>은 겸재 정선의 ≪양천 8경첩≫(비단에 수묵담채, 각폭 33.3 x 24.7 cm)의 여덟 장면이 화면 가득 채워지면서 시작된다. 양천현령 시절인 1740~45년 사이에 그린 화첩으로, <개화사(開花寺)> <낙건정(樂健亭)> <귀래정(歸來亭)> <소악루(小岳樓)> <소요정(逍遙亭)> <이수정(二水亭)> <선유봉(仙遊峯)> <양화진(楊花津)> 8점으로 꾸며져 있다. 서예가로 유명했던 고 일중 김충현의 소장품이었다.

방화의 개화산 중턱 북향으로 앉은 <개화사(開花寺)>는 현재 약사사이며, 고려 시대 석탑과 석불이 모셔진 고찰이다. 양천 관아의 <소악루(小岳樓)>가 세워진 궁산은 고구려와 신라의 유적지로 알려져 있다. 궁산과 마주한 행주산성의 덕양산 기슭 <낙건정(樂健亭)>과 <귀래정(歸來亭)>, 광주바위와 공암 탑산의 <소요정(逍遙亭)>, 안양천이 한강에 합류하는 언덕의 <이수정(二水亭)> 등은 조선 초기 왕자부터 중후기 문인 사대부까지 강변 문화를 즐겼던 풍류 터이자 명승지였다. 지금은 사라진 <선유봉(仙遊峯)>이나 잠두봉 아래 <양화진(楊花津)>은 양천현령이었던 겸재 정선의 통치권이 미친 곳이다.

이들 겸재 정선의 8점 그림은 소품임에도 대형 화면에 확대해 비쳐도 작품성에 손색이 없다. 이이남은 ≪양천 8경첩≫이 명작임을 재확인시켜 준다. 

8경이 조용히 움직인다. 한강 물결을 따라 돗단배나 조각배가 움직이고, 강변 길목에는 나귀 타고 가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는 맞은편 <겸재 정선 고흐를 만나다>의 오른쪽 화면 <설평기려>에서 이동해온 겸재 정선이다. 흰 도포 차림의 문사가 소악루에 출현하며 봄 매화와 진달래를 즐긴다. 연한 녹음 풍경에 안개가 아스라이 깔린다. 이수정으로는 큰 호랑나비가 날아 움직인다. 봄 경치에 빗방울 떨어지며 여름으로 변하고, 소요정으로 호랑나비와 나비 떼가 이동하며 가을 단풍이 물든다. 늦가을 눈이 내리며 겨울로 진입한다. 폭설의 겨울밤 별이 뜨고 이수정에 북두칠성이 반짝인다. 선유봉과 소악루의 눈 쌓인 설경에 유난히 별이 빛난다. 나귀 탄 인물이 여기저기 지나다니며, 겨울밤이 지나 일출의 아침을 맞는다. 이렇게 양천 8경의 4계절이 소리 없이 지나간다. 

조선 시대 자연 풍경을 담은 산수화 양천 8경의 원화 이미지가 사라지고, 제2막으로 전환된다. 깜깜한 어둠에서 물결이 솟고 가라앉으며, 도시가 출현하거나, 그물망이 융기하고 침잠한다. 거대한 파고는 서해로 빠져나가는 한강 물결을 연상시킨다. 검정 바탕에 흰 빛살들이 엉키고 분산한다. 하얀 점들이 뒤섞이며 구름 안개나 연기처럼 일었다 사라진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고 거꾸로 다시 끌어올리고, 들이친다. 좌우에서 빛이 쏟아지면서 가는 선들의 이미지가 흐르고, 대칭형으로 마무리된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겪은 후 건설한 배수펌프장과 일제강점기를 겪은 한국 근대사를 배경 삼아 작업한 결과이다.

작품 후반부에 깔린 연주 음악은 잔무늬 빛살의 움직임을 따라 빠르고 느리게 격정과 서정이 반복한다. 다이나믹한 소리와 빠른 템포는 북과 가야금연주를 중심으로 신비감을 준다. 음악의 제목은 따로 없다. 이 작품에 맞춤으로 장쾌하게 창작한 국악팀은 월드 뮤직그룹 ‘공명’이다. 20분가량을 다 관람하고 나니, 멍해졌다. 이번 신작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Reborn Light, Yangcheon)>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마치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장엄한 연주 같았다. 더불어 화면의 작은 움직임들의 디테일은 숨은 그림처럼 읽는 흥미를 더해주었다.

작품 관람이 끝날 무렵, 전시기획자 정수미 학예연구사가 거든다. “이이남 작가의 장점인가 봐요. 관람자들이 너무 좋아하고 재밌어하고 신기해해요.” 이어 신작 영상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Reborn Light, Yangcheon)>은 세 번이나 내용을 수정 교체했다고 한다. 최종 결과를 보니, 개막식 때 스쳐 등장했던 엄숙하고 장중한 범종 소리와 기와지붕, 백남준의 비디오 영상, 마곡문화관이나 양천 8경의 이미지가 완연히 제거되어 있다. 개막날 영상의 뒷부분을 정제한 것이다. 전반부 양천 8경의 구상 그림과 후반부 격동기 역사를 추상 이미지로, 명확히 대비시켜 놓았다. 

최근 이이남은 빛의 움직이는 이미지에 꽂힌 듯하다. 이번 마곡문화관 전시 바로 직전 광주 은암미술관(2019. 11. 4~12. 3.)에서 선보인 <다시 태어나는 빛(Reborn Light, beam projector 7대, 11분 6초)>이 그 사례이다. 물소리 새소리로 시작한 이 작품은 사람들 군상, 문자들, 나비, 구름, 파도 등 구상 이미지들이 뒤섞이며 국악기 연주와 어울렸는데, 이번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Reborn Light, Yangcheon)>은 구상에서 갈라 후반부를 완연한 추상적 동영상으로 마무리하였다. 앞으로 빛과 추상무늬의 전개를 통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원본 없는 미증유 이미지에 대한 이이남의 창작 의지를 감지케 한다.

  

3. 

 이번 개인전의 중심작품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Reborn Light, Yangcheon)>은 겸재 정선이 18세기 중엽에 그린 양천지역의 옛 풍경과 20세기 전반 마곡문화관의 전신 배수펌프장이 겪은 우리 근대사를 연계한 영상물이다.

이 신작과 함께 전시공간에 설치된 5점 구작이 눈길을 끈다. 특히 과거 양천 마곡지역과 관련하여 양천현령을 지낸 겸재 정선에 대한 오마주를 담은, 이이남의 구상계열 대표작들이라 할 수 있겠다. 전시실 구조에 맞춘 다섯 작품의 배치와 구성은 완벽했다. 이이남은 전시를 제안받고 전시공간에 처음 들어서자마자, 순간 작품의 배치구상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전시기획자와 전시장소, 그리고 작가와 만남이 최고의 연출과 예술성을 콜라보했다.

전시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2017년 작 <박연폭포>(75인치 LED TV 4개, 6분 39초)를 만난다. 북벽 지붕에서 바닥까지 길게 폭포가 시원스레 쏟아지게 설치했다. 본디 겸재 정선은 폭포의 실경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기보다 우렁차게 쏟아지는 폭포의 굉음을 담기 위해 상하로 긴 화폭을 선택했을 터이다. 눈에 보이는 풍경 묘사보다 폭포 길이를 두 배가량 변형해, 소리의 리얼리티를 실감나게 표현한 점이 그렇다. 이이남은 4대의 TV를 세워 연결하고, 원화의 중간 부분을 반복해 폭포 소리를 동영상으로 더욱 강조했다. 배경에 저녁노을을 드리우기도 했다. 작품의 위치가 정북으로 개성 송악산과 박연폭포 쪽을 향한 점도 남다르다.

전시장 입구 오른편, 아래위 층이 오픈된 전시실은 옛 배수처리 시설 관리 공간이었다. 1층 <겸재 정선 고흐를 만나다>(55인치 LED TV 3개, 6분 20초)는 2014년 작이다. 18세기 중엽 겸재 정선이 19세기 말 유럽의 반고흐를 만나러 가는 대장정이 3대의 티브이에 담겨 있다. 오른쪽부터 겸재 정선의 <설평기려(雪坪騎驢)> 그림, 남프랑스 아를의 누런 가을 평원, 오베르 시절 반 고흐의 마지막 방과 붕대를 감은 자화상 화면이 배치되어 있다.

<설평기려(雪坪騎驢)>는 ≪경교명승첩≫(간송미술관 소장)에 포함된 그림으로, 마곡문화관과 인연이 각별하다. 발산과 우장산을 배경으로 삼은 흰 눈밭이 바로 마곡 들판이다. 화면 오른쪽 아래 눈길에 나귀를 탄 인물은 조선 문인화가 겸재 정선에 해당한다. 이같이 조선과 유럽 회화, 동서문화의 만남을 설정한 이이남의 작품으로는 2008년의 <모네와 소치와의 대화>(2-charnel video, 11분 3초), 2009년의 <겸재 정선과 세잔>(LED TV. 1대, 4분 20초) 등이 떠오른다.

2층에는 이이남의 대표작 2009년의 <인왕제색도-사계>(55인치 LED TV 1개, 4분 35초)를 중앙에 배치하고, 오른쪽 남쪽 벽에 두 작품을 설치해 놓았다. 두 영상물은 2010년의 <그곳에 가고 싶다>(beam projector 1개, 7분 23초)와 2017년의 <신 단발령망금강>(beam projector 1개, 6분)이다. <인왕제색도-사계>와 <그곳에 가고 싶다>는 겸재 정선이 75세 때 그린 1751년의 <인왕제색도>(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를 바탕 그림으로 디지털화한 작품이다. 수묵화 <인왕제색도>는 한국미술사의 최고로 손꼽히는 걸작이다.

 2009년의 <인왕제색도-사계>는 이이남식 디지털 구성과 변환의 전형으로 꼽히는, 대표작이다. 화면에는 매화와 진달래의 봄이 깔리고, 소나무 솔잎에 짙푸른 녹음이 들며 여름 폭포가 바위 계곡을 타고 내린다. 여객기 한 대가 인왕산 주봉 뒤로 숨을 때,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장맛비를 쏟아낸다. 이어 비가 그치고 가을 단풍에 물든 저녁노을이 진다. 아름다운 석양에 인왕산 기슭 기와집에 불이 켜진다. 겸재 정선이 살던 집이다.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며 눈이 내린다. 겨울 인왕산 능선 오른쪽 멀리 도시가 잠시 등장하고, 눈이 계속 쌓이다가 수묵화로 환원된다. 수묵화인 원화와 대조적으로, 사계의 변화와 노을 표현에 키치의 분위기가 물씬한, 인상적인 작품이다.

2010년의 <그곳에 가고 싶다>는 앞의 <인왕제색도-사계>와 달리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새롭게 해석해 변형한 영상이다. 한양도성의 서쪽, 둥글고 당차게 잘생긴 인왕산을 이상향으로 설정하였다. 그곳에는 마네, 쇠라, 뒤샹, 르네 마그리트 등의 유럽 작가의 작품 이미지와 도포 차림의 조선 선비, 소나무, 버드나무, 해오라기, 한국의 현대 유명인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

2017년의 <신 단발령망금강>은 더욱 다채롭다. 같은 제목으로 2009년의 <신 단발령망금강>(LED TV, 1대, 5분 30초)를 보완해 개작했다. 겸재 정선의 <단발령망금강> 원작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에서 좀 더 가벼운 필치의 간송미술관 소장품으로 바뀌었고, 런닝타임을 30초 늘렸다.

금강산과 단발령이 벌어진다. 그 사이로 구름이 끼고 노을이 지며, 케이블카가 움직인다. 서울 풍경에 대규모 도시공사가 벌어진다. 멀리 비행기가 날아들고, 공사판에는 서울과 세계도시의 유명빌딩이 공존해 있다. 피사 사탑, 파리 에펠탑,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미국의 백악관, 상해 포동의 건물들이 보인다. 분단의 상징으로 6.25 전쟁 기념과 관련한 워싱턴의 조형물과 인천의 맥아더 동상도 등장한다. 맥아더는 단발령을 바라보고, 이순신 동상이 왼쪽 아래서 출현하고, 에펠탑 뒤 로댕의 유명 조각작품 <생각하는 사람>도 등장한다. 단발령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간 케이블카는 야경에 빠른 속도로 되돌아오며, 거대도시는 아스라이 사라진다. 단발령 고갯길에는 사람들이 불 밝히고 올라갔다가 사라지고, 케이블카에서 내린 사람들은 금강산 대신 거대도시를 바라볼 때, 다시 구름이 깔리면서 끝난다.

  

4.

이처럼 이이남은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를 넘나들며 분방하게 아이디어를 분출해왔다. 익숙한 이미지를 다르게 보게 하고, 새롭게 흥미를 유발케 하는 재능이 출중한 것 같다. 앞으로도 콘텐츠가 다양해지고, 예술적 깊이와 더불어 재미도 함께 넘칠 법하다. 지금까지 세상, 현실, 역사, 환경 등의 문제, 종교, 인간에 대한 성찰과 고뇌를 적절히 버무려왔기 때문이다.

이이남의 작업에는 미디어아트, 디지털 민중미술, 디지털 팝아트, 포스트 모더니즘 등 여러 사조와 경향이 혼재해 있다. 또 「미디어 아트의 시뮬라크르에 대한 메타포리즘 해석학」이라는 자기 작품에 관해 서술한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실제와 가상’(simulacre)을 넘나들며 ‘은유’(matapho)를 끌어내려 한다. 이 주제는 그리스 철학에서 기원을 찾고, 복제기술 시대에 걸맞아 주목을 받았다. 이이남은 20세기 후반 비디오아트 창시자로 꼽히는 백남준을 잇는 작가로, 미디어아트의 선도로 평가된다.

이이남은 “명작에 기운생동한 숨결을 불어넣어 관객에게 기대와 흥미를 자극하고 싶다”라고 얘기해왔다. 내가 이이남을 반기며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보다 겸재 정선의 대표작을 즐겨 활용해 작업해온 점에 있다.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박연폭도> 삼대 걸작을 비롯해, ≪경교명승첩≫의 <장안연월>과 <설평기려>, <단발령망금강전도> 그리고 이번 신작의 ≪양천 8경첩≫까지 망라되었다. 디지털 시대 문화 현상의 하나인 토종이 미래 문화의 씨이자 전통이 미래라는 뉴트로(newtro) 취향과도 잘 부합한다. 20세기 한국문화예술사에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밀접하게 관련한 대목이기도 하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로 한국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이다. 현실보다 더 나은 신선경(神仙景)을 꿈꾸며, 금강산과 한양을 중심으로 자신이 살던 조선 강산을 대상으로 진경산수화법을 완성했다. 겸재 정선이 이룬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형식미는 실경 사생보다 현장에서 받은 감명에 따라 변형해 그린 데 있다. 실경 현장의 기억과 직관으로 합성하거나 과장해 담은 것이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작품은 보이는 대상의 사실적인 ‘눈’ 그림이라기보다 대상의 느낌을 강조한 ‘마음’ 그림, 곧 심화(心畫)라 일컬을 만하다. 

이이남의 이미지 변환 방식은 놀랍게도 겸재 정선의 다시점(多視點) 합성이나 변형화법과 상통한다. <금강전도> 같은 여러 시점의 봉우리를 한 화면에 합성하는 방식은 몽타주(montage)에 해당하고, <박연폭도> 처럼 폭포의 천둥소리를 담기 위해 화면을 길게 변형한 화법은 모핑(morphing)과 흡사하다. 그래서 나는 진경산수화를 강의할 때마다 겸재 정선이 지금 다시 태어나 활동한다면, 아마 이 시대 최고의 디지털 작가가 되리라고 말한다. 또 한국이 세계 반도체나 스마트폰 시장, IT 강국으로 성장하고, 디지털 문화가 발달한 것은 바로 겸재 정선의 DNA 계승과 무관하지 않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겸재 정선의 생각을 이은 이이남이 출현하고, 세계미술계의 K-아티스트로 주목받는 것도 어쩌면 예정됐던 수순 아닌가 싶다. 또 동서고현(東西古現)을 망라해 디지털로 혼성한 이이남의 기량은 서양문화예술을 중심으로 교육되고 가치관이 정착된, 그러면서도 전통형식의 재창조를 끊임없이 추구해온 한국 근현대사회와 문화의 처지를 적절히 웅변하기도 한다. 케이팝이나 극영화 한류의 성향도 유사한 편이다. 

문화지형의 빠른 변화와 함께 지역 간, 세대 간, 사람 사이의 의식과 미감의 차이도 금세 벌어졌다. 나는 조선 시대 회화가 주된 전공인 데다, 스마트폰도 사용하지 않고 새로운 변화 환경에도 적응하지 못한 편이다. 인류가 신석기 시대로 되돌아가면 어떨까 꿈꿔도 본다. 어쨌든 동시대 미술을 대할 때 어색하고 취향도 크게 다르지만, 다행히 이이남의 작업에 겸재 정선의 명작들이 활용되어 있기에 나도 이처럼 디지털 아트(Digital Art) 내지 미디어 아트(Media Art)에 대해 눈을 돌려보게 되었다.

 나는 벌써 2011년 EBS 방송에서 ‘이야기 한국미술사’ 20강을 진행하며, 이이남 작품을 선정했다. 부제로 구석기 시대 ‘주먹도끼부터 디지털 아트까지’라고 달았고, 마지막 강의 “현대 문명과 사회, 그리고 미술”에서 이이남 작품으로 마감했다. 민주화운동과 민중미술의 후세대이자 현대 문명과 자연환경, 생태문제 등을 포괄하며 작업해온 결과, 이이남이 ‘지금’을 함께하는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우리 시대를 드러낸 작가라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다시 정리해 2019년 2월 같은 이름의 책으로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 나는 이이남의 작품 경향을 아래와 같이 썼다.

 이이남은 2000년대 중반부터 고전 회화나 세계 명화를 이용해 텔레비전 매체에 이른바 ‘움직이는 미술(Moving Art)’ 작품을 제작했다. 2009년도 작품 <신-금강전도>는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가 봄·여름·가을·겨울로 변화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 작업이다. 처음에는 새 소리가 들리는 평화로운 봄 풍경으로 시작하지만, 이내 계절이 바뀌면서 금강산 곳곳에 고층건물들이 들어선다. 겨울이 되면 조용하고 아름다운 금강산이 온통 개발의 그림자로 뒤덮이게 된다. 헬기와 비행기가 지나가고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화면과 함께 공사장 소음 같은 사운드가 메아리친다. 문명의 폭력으로 금강산을 망쳐 놓은 인간의 오류를 간파했다. 이후 이이남은 옛 그림과 현실, 동서양의 교류 등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던 주제에서 생태문제로 관심사를 옮겼다. 잃어버린 자연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시도였다. 이이남은 현재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왕성하게 작업 활동을 이어나가며 인기작가로 부상했다.

  

이이남을 처음 만난 지 벌써 30년이 흘렀다. 1990년 일 학기, 내 한국미술사 강의 수강생으로, 이름이 독특해 기억에 남은 조선대학교 조소과 학생이었다. 나는 1980년대 말 대학 민주화를 이룬, 조선대학교 미대 학생회의 요청에 따라 출강했다. 마침 1990년은 광주민중항쟁 1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때 내가 재직했던 전남대학교는 물론이고 조선대학교 한국미술사 수강생들에게 미술과 학생들이 모두 참여하는 항쟁기념전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냐며 독려했고, 양 대학 교정에서 멋진 전시가 꾸며졌다.

그리고 나는 2003년 1학기부터 광주를 떠나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로 옮겼다. 2008년 겨울쯤 ‘겸재와 세잔’ 강의를 들었던, 박사과정 전시기획자들과 함께 ‘유명해진’ 이이남이 내 연구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때 겸재 정선의 <장안연월(長安烟月)> 수묵화와 폴 세잔의 <생뜨 빅뚜와르산> 유화를 선택한, 이이남의 디지털 작품 <겸재 정선과 세잔>(2009년, LED TV, 1대, 4분 20초)이 탄생했다. <장안연월> 수묵화에 비가 쏟아지며 <생뜨 빅뚜와르산> 유채화로 변하다가 눈이 내리자 원래 수묵화로 되돌아가는 화면의 변화를 보면서, 디지털 작업에 대한 몇 가지 아이디어가 불쑥 내게 떠올랐었다. 10여 년을 묵혔다가, 이번 기회에 나는 공동 작품과 2인전을 제안하였다. 이이남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올해 말쯤 성사될 듯싶다.

마곡문화관을 인연으로 이이남을 다시 만나고 살펴보니, 그동안 활동이 세계적인 대가 반열에 올랐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중국과 아시아를 넘어 미국과 유럽의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초청하는 기획전과 개인전을 가지며 인정을 받았다. 2016년 벨기에에서 우리 시대 비디오아트의 거장이자 전설로 추앙받는, 빌 비올라와 가진 2인전은 이이남 예술사의 정점일 법하다.

이렇게 명망도 얻고 세계에 자랑할 작가가 되었는데, “왜 서울에서 작업하지 않느냐”라고 이이남에게 물었다. 또 “뉴욕에 가서 작업하며 활동할 생각은 없는지”도 재차 물었다. 단박에 고개를 저으며, 고향 광주와 담양이 편하고 좋단다. 작업과 활동에도 별 불편함을 못 느낀다고 답한다. 요즘 말대로 글로벌-로컬리즘, 곧 그로컬리즘(grocalism)을 실천하는 작가의 면모도 커 보였다. 광주 양림동에 새로 완성한, 멋진 작업공간을 둘러보며 그랬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1 – 다섯 번째 금강산 탐승, 해금강 일출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1 – 다섯 번째 금강산 탐승, 해금강 일출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1 – 다섯 번째 금강산 탐승, 해금강 일출
04/01/2020
/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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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을 다시 찾아 해금강 일출을 그리고

나는 작년 2019년 2월 설날 연휴 끝에 금강산에 갈 기회가 생겼다. 2월 12일~13일 ‘남북선언 이행을 위한 2019년 새해맞이 연대 모임’ 금강산 행사에 참여했다. 일박이일 짧은 여정이었지만, 다섯 번째 여정이다.

흰 바위산의 아름다운 수정봉과 멀리 노을에 물든 채하봉(彩霞峰) 등 온정리 호텔 주변은 여전하였다. 도착하자마자 스케치북 양면에 펼쳐 담았다. (도 1, 2) 다음날 오전에 찾은 집선봉 설경과 솔밭 아래 복원된 신계사도 마찬가지였다. (도 3) 그런데 이전의 답사 때는 엄두도 못했던 해금강 일출을 보았다. 날씨마저 청명해 장관이었다. ‘남북선언 이행을 위한 2019년 새해맞이 연대 모임’ 금강산 행사의 절정이었다. 그동안 늘 감동해오던 동해의 일출과 다름이 없었다. 암벽에 걸쳐 떠오르는 태양을 연속 찍었다. (도 4, 5)

이 행사를 다녀오며, 금강산을 다시 와 그릴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다. 일 년을 기다렸으나, 지난해 2월 말 베트남 북미회담이 깨진 이후 금강산 가기가 짙은 안개에 가려 있는 듯하다. 그래서 해금강문(海金剛門) 일출을 사생했던 스케치북을 다시 꺼냈다. 남으로 고성 쪽을 향해 설경 산세와 더불어 담은 아침 바다 그림도 있었다. 이들 일출 그림은 채색하지 않은 채 두었다. 스케치를 펼쳐 놓고 한해 전의 붉은 태양과 물빛을 넣자니, 그때 감흥이 일지 않기에 더 손대지 않고 그대로 선보인다. (도 6, 7)

 

화원 김하종의 <옹천> 일출 그림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큰 줄기를 이루는 금강산과 관동8경을 담은 작품에 동해의 일출이 곧잘 그려졌다. 겸재나 단원의 양양 낙산사, 망양정, 문암 등에서 본 일출 장면 그림이 떠오른다. 동해의 일출 분위기를 적절히 담은 작가와 작품으로는, 유당 김하종(蕤堂 金夏鍾;1793-?)의 <옹천> 일출 그림이 떠오른다.

푸르스름한 바탕색에다 붉은 담채를 살짝 가미해 맑게 열리는 여명의 분위기를 깔고, 수평선 위 떠오른 붉은 태양을 강조한 점이 돋보이는 가작이다. (도 8) 통천 옹천의 어두운 바위 언덕에 자란 소나무들과 벼랑 아래 파도치는 모습의 붓 맛과 담채가 가볍다. 암벽 길목에서 두 문인이 떠오르는 해를 감상하는 모습도 실감 난다. 왼편에 치우쳐 옹천을 배치한 구성은 겸재나 단원 등 선배 화가를 고스란히 답습한 화면을 보여준다. 금강산화첩 《풍악권(楓岳卷)》(개인 소장)에 포함된 한점이다.

이 화첩은 1991년 소더비 경매에 등장했다가 국내로 반입되어, 1999년 내가 객원 큐레이터로 참여했던 일민미술관 ‘몽유금강’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되었다. 《풍악권(楓岳卷)》은 조선 말기 개화파 외교관으로 이름난 귤산 이유원(橘山 李裕元;1814-1888)이 1865년에 금강산을 유람한 후 기행문 「풍악유기(楓岳遊記)」와 묶은 서화첩이다.

이유원은 고종 즉위년(1864) 좌의정에 재직하다가, 흥선대원군과 대립하는 바람에 수원유수로 좌천된 직후 1865년에 금강산 여행을 떠났다. 만년에 정치적으로 울적하면서도, 한편 홀가분한 마음으로 8월 18일(음력) 집을 나서 9월 6일 서울로 돌아왔다. 이유원 자신이 기행문에서 밝혔듯이 ‘산은 깨끗함을 생각케 하며, 물은 움직임을 생각케 하며, 돌은 곧음을 생각케 한다’는 선비의 풍류정신을 펼친 것이다. 이유원의 여정에 김하종이 동행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하종이 자신을 위해 금강산 명승도를 제작해 주었다’고 서문에서 밝혀 놓았다.

다섯 권의《풍악권》은 「풍악유기」를 비롯한 이유원의 기행시문이 한 권이고, <헐성루도(歇惺樓圖)> <명연도(鳴淵圖)> <묘길상도(妙吉祥圖)> <만물초도(萬物草圖)> 등 58점의 명승도와 그 명승을 설명하는 기행시문이 나머지 4권으로 꾸며져 있다. 이같이 금강산 소재의 문학과 서화가 조화롭게 만나는 이유원과 김하종의 《풍악권(楓岳卷)》 서화첩을 통해 19세기 진경산수화의 격조가 유지되었다.

 

네 번의 금강산 여정을 다시 들춰 보며

다섯 번째 금강산 답사인 해금강 일출을 다녀와 뒤돌아보니, 금강산을 처음 밟은 지 벌써 이십 년이 훌쩍 흘렀다. 나는 전남대학교 재직 시절 뱃길이 열리기 두 달 전, 1998년 8월 말~9월 초 학고재 화랑의 후원으로 제주의 강요배 화백과 북경과 평양을 거쳐 처음 금강산을 다녀왔다. 내 인생의 첫 해외여행이었고, 북한지역을 밟았으니 10일간 일정이 온통 흥분으로 채워졌다.

평양에서 고구려 벽화고분, 고구려와 조선의 유적지, 박물관과 미술관 등을 살핀 뒤, 금강산 답사 첫날은 평양에서 새벽에 출발해 원산을 찍고 오후에 구룡폭을 다녀왔다. 다음 날은 온정령 고개를 넘어 내금강 장안사 울소 삼불암 백화암 표훈사 만폭동 금강대 대소향로봉 보덕암 진주담 분설담 사자암 묘길상 코스와 정양사 오르기, 만물상을 탐승하는 강행군이었고, 삼일째는 해금강과 삼일포를 돌아보았다. 정양사에 팍팍하게 오른 답사는 남쪽 미술인으로는 처음이었다.

여행한 직후 정리한 조선 시대 금강산 그림에 대한 글은 답사 때 찍은 사진과 더불어 학고재출판사가 발간한 금강산 책에 실었다. 별도의 답사기는 게재할 곳을 찾지 못하다가 반년이 지난 뒤 미술잡지에 다섯 번에 걸쳐 연재하였다.

 

두 번째는 1999년 1월 동해에서 배를 타고 금강산 설경을 2박 3일 살폈다. 외금강 만물상과 옥류동 구룡폭 코스의 설경을 감상했다. 이때 옥류동 다리 앞에서 넘어져 발목을 접지르는 바람에 3일째 해금강의 겨울 풍경을 보지 못했다. 배에 머물며 장전항에서 보이는 설경을 스케치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아마도 그때 스케치가 지금 나에게 그림 그리는 일을 자극했는지도 모르겠다.

1999년 상반기에는 일민미술관과 동아일보가 마련한 ‘몽유금강-그림으로 보는 금강산 300년 전’(1999.7.7.~8.29)에 객원 큐레이터로 참여해 조선 시대와 근대미술사의 금강산 그림과 관련한 기획을 맡았다. 또 15명의 전시 참여 현대 작가들에게 금강산을 강의하고 안내하면서 4월의 봄 금강산을 만끽했다. 이 세 번째 탐방 역시 유람선을 탄 여정이었고, 만물상과 구룡폭 코스로 제한되었다. 새로운 금강산 그림과 자료들을 상당히 많은 양을 발굴하였고, 전시 도록에 ‘금강산의 문화와 예술 300년’을 정리해 실었다. 전시 기간에는 주요 출품작을 선정해 동아일보에 10회에 걸쳐 연재했다. 또 전시작품에서 소정 변관식의 명작 <옥류천도>에 대해 문제 제기가 있었고, 지상 논쟁이 벌어졌다.

 

세 번의 여행을 기반 삼아 ‘금강산·천년의 문화유산을 찾아서’라는 부제로 금강산에 관한 책을 냈다. 답사기 「금강산 미술기행-옛 화가들의 발자취를 따라」와 「금강산 불교유적, 그 천년의 역사 1, 2, 3」 세 꼭지에, 논문 「한국산수화의 모태, 금강산과 금강산 그림」을 합해 묶은 것이다.

이후 금강산 여행에 동행했던 강요배와 송필용 같은 작가의 금강산 그림 개인전 도록에 평론 글을 쓰기도 했다. 1999년과 2000년에 각각 마련한 두 작가를 통해 금강산 개방이 가져온 새 회화형식의 창출을 실감하게 했다. 강요배는 서구 인상주의 수용 이후 금강산 풍경을 통해 한국적 화풍을 창출했다고 여겨지며, 송필용은 조선 분청자의 박지문 기법을 활용해 설경을 중심으로 금강산을 재해석해냈다.

2003년 전남대학교에서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로 상경한 뒤, 2004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그리운 금강산전’ 기획에 참여해 ‘근대 금강산 그림’과 관련한 논문을 전시 도록에 실으며 1999년 일민미술관 기획전 때의 글을 보완할 수 있었다. 또 고려시대 금강산의 불교를 발표할 기회가 주어져 불교와 관련한 금강산을 다시 정리하게 되었다. 역시 금강산의 불교는 고려문화의 터전이라 할만하며, 첫 답사기의 불교 유적에 대한 대목은 이 논문으로 대체했다.

 

2008년 6월에는 명지대학교박물관 답사 프로그램으로 여름 내금강과 외금강, 해금강을 다시 찾았다.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박사과정 학생을 중심으로 30여 명이 참여했다. 네 번째 금강산 답사였다. 배로 다니던 여행에서 버스로 이동하는 관광이어서 경비도 시간도 크게 줄었고, 탐승 시간을 비교적 충분히 가질 수 있어 좋았다. 앞서 3번의 여정에서 가지 못했던 구룡폭 능선 넘어 구정봉에 오른 게 새 보람이었다. 정상에서 상팔담과 주변의 외금강 바위산 속살이 큰 감명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슬라이드 필름으로 찍어 왔던 데서 벗어나, 처음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했다는 점도 내 답사 인생의 큰 변화였다. 덕분에 금강산 코스 따라 만나는 정경과 부분들을 일천 커트 남짓에 샅샅이 담아 왔다.

우리가 금강산 답사를 다녀온 2주 뒤 금강산이 닫혔다. 개방 10년이 채 못되어 다시 막힌 것이다. 간간이 글을 쓰거나 강연하는 일을 제외하곤 금강산을 잊고 지내다 10년이 또 지난 2017년 8월 명지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겸재와 단원의 발자취 따라’ 찾아 강원지역을 찾았다. 답사지 표지에 총석정을 그려 넣고, 표제로 ‘총석정을 못가는 관동8경 답사’라고 썼다.

 

같은 해 2017년 11월 강원일보,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강원대학교 통일강원연구원 공동주최로 강원대학교 글로벌경영관에서 가진 『금강산 관광사업과 남북교류의 새로운 모색』이라는 ‘2017 평화 통일 국제학술 심포지엄’ 때, 나는 “그림으로 본 금강산”을 주제로 발표하였다. 금강산 예술에 대해 예전에 썼던 글을 다듬으면서, 조선시대 유람문화에서 20세기 이후 근대관광으로 변한 양상을 재검토할 기회였다.

종합토론 시간에는 지난 금강산 관광사업을 뒤돌아보며 과연 금강산이 열릴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워낙 핵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때인지라, 심포지엄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도 없지 않았다. 심지어 가까운 시일에 금강산이 열리면 손가락을 뜨거운 장에 지지겠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을 정도였다.

 

2018년 들어서 급격하게 남북관계가 열리고, 정년 퇴임을 한 2년째여선지 한가해진 터에, 11월부터 다시 금강산 자료들을 들춰 보았다. 1998년부터 2008년까지 네 번에 걸쳐 찍은 슬라이드 필름과 디지털 사진을 정리하며 내금강 계곡 바위에 새긴 이름이나 시 글씨를 재검토했더니, 미술사나 문화사에서 익숙한 여러 문인이나 화가들이 여럿 확인되어 반가웠다. 그리고 사진들을 뒤지면서 자연히 지난 답사 여정의 감흥이 돋아 스케치에 몰두하기도 했다. 2017년 7월 ‘서울산수’ 책 출간과 서울 스케치 개인전에 이어 ‘금강산수’가 가능할 만큼, 2018년 11월과 12월 두어 달 동안 100여 점이나 그렸다. 이 스케치들은 당시 찍은 사진과 더불어 금강산의 유적과 명승 소개에 적절한 참고 도판으로 삼아도 될 성싶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