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증샷 시대

인증샷 시대

인증샷 시대
10/02/2019
/ 박평종

유명 관광지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구글에서 에펠탑 이미지를 검색하면 수백만 장의 사진이 나오는데 뭐 하러 또 찍는단 말인가! 게다가 촬영 포인트도 좋고 근사한 배경의 ‘수려한’ 이미지가 많아 그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되니 구태여 민폐 끼쳐가며 여행 시간을 낭비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그들을 이해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찍어 놓은 ‘멋진’ 사진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초점이 잘 맞지 않아도 상관없고, 에펠탑이 작게 나오더라도 무방하다.  그 사진을 통해 내가 에펠탑 앞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모든 사진은 그 점을 보증한다. 소위 인증샷이다.

수많은 종류의 인증샷이 있다. 투표 인증샷이나 불매운동 참여 인증샷이 있고, 체중감량 성공 인증샷도 있으며, 심지어 일부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자해 인증샷도 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결혼사진이나 졸업사진도 일종의 인증샷이다. 인증, 어떤 행위를 공적으로 입증한다는 뜻이다. 일종의 증명서라 하겠다. 따라서 인증샷은 증명서 역할을 한다. 이유와 목적을 떠나 사진은 이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리고 사진의 인증력은 롤랑 바르트의 표현을 빌자면 재현력을 능가한다. 사진의 인증력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허구로 간주될 만큼 기이한 장면을 찍은 사진에서조차도 그 확실성을 의심할 수 없다. 바르트는 자신을 촬영한 사진에 대해 언제, 어디서 촬영됐는지 기억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진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고 토로한다. 모두가 경험하는 일이다.

디지털 기술의 등장으로 사진의 시대는 저물고 후기 사진, 이른바 포스트 포토그래피의 시대에 진입했다는 주장이 있다. 아날로그 사진이 도큐먼트, 기록, 실재와 같은 개념들에 의지하고 있었다면 디지털 사진은 간단한 조작과 합성 등을 통해 시물라크룸, 가상, 허구와 같은 개념들에 의존하게 됐다는 것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인공지능과 접목한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원본 없는 가상 이미지의 생산을 더욱 탁월하게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날로그 사진의 ‘탁월함’으로 평가받아 왔던 인증 기능은 디지털 사진에서도 동일하게 발휘되고 있으며, 나아가 그 영역도 넓어지고 있다. 사진의 인증력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물론 사진 못지않게, 사진보다 뛰어나게 인증 기능이 탁월한 수단도 있다. 공항 입국장에서 활용되는 지문 인식이 그 예다. 실상 지문은 여권에 붙어 있는 사진보다 인증력이 뛰어나다. 홍체인식이나 음성인식도 그렇다. 그런데 모든 인증 수단은 완벽하지 않다. 위변조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비슷한’ 개별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인증의 어려움은 바로 이 ‘유사성’에서 온다. 여러 가지 인증 수단을 함께 사용하는 까닭은 이 유사성으로부터 오차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사실 사진은 개별자의 식별을 목적으로 한 인증, 말하자면 내가 나임을 확인하기 위한 인증 수단으로는 부적합하다. 나와 닮은 사람이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진은 내가 그 곳에 있었음을 인증하는 수단으로는 탁월하다. 사진 속의 인물이 나 자신임이 명백할 경우에만 그렇다. 그런 점에서 SNS에 범람하는 인증샷은 신원 확인이 전제로 깔려있다. 유명 맛집에 갔다 왔다는 인증샷을 보고 사진 속 인물이 바로 그 사람임을 ‘이미’ 알지 못한다면 그 사진은 인증샷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증과 식별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제 사진은 더 이상 식별의 수단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인증의 수단으로만 활용된다. 그리고 사진의 인증력은 법적 실효성도 갖지 못한다. 다만 네트워크상에서 정보의 공유나 ‘놀이’의 차원으로 ‘진화’하고 있다. 인증샷은 이제 그 정도의 의미밖에는 갖지 못한다. 하지만 그 가치는 확장성이 크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명성황후 사진의 실존과 진위 논란 2

명성황후 사진의 실존과 진위 논란 2

명성황후 사진의 실존과 진위 논란 2
07/25/2019
/ salon

먼저 4장의 사진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19세기 말 서구의 잡지나 신문 그리고 여행기 같은 책 등에 실린 사진으로 사진 설명이 “명성황후”로 나와 있는 예입니다.

다음으로 다른 4장의 사진을 소개합니다. 같은 시기 서구의 매체들에 실린 것으로 사진 설명이 굳이 번역하자면 “조선의 궁녀” 또는 “조선의 여인” 정도로 소개되어 있는 경우입니다.

위 사진들을 보면 일부는 사진 그 자체로 인쇄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사진을 보고 목판을 만들어 찍어놓은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원고로 쓰인 원래의 사진은 전부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같은 사진이 실린 문헌은 대략 1895년부터 1905년 정도 10여 년간 영국, 프랑스, 독일, 호주, 미국 등에서 발간되어 있습니다. 현재 이 사진을 실은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 책과 잡지만도 25종 정도가 넘습니다.

그 중 가장 앞선 것은 독일에서 발행한 『카톨릭 전교회지』 1895년 9월호입니다. 실제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한 목판으로 인쇄해서 게재했는데, 사진 설명은 “조선 여인”이었습니다. 1895년 호주에서 발행된 영국 외교관 가드너의 저서 『조선』에도 같은 사진을 게재 했는데 이 책의 사진 설명도 “궁복을 입고 있는 조선 여인” 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 프랑스 언론인이자 북경 특파원을 지냈던 드 라게리(Villetard de Laguerie)가 1898년에 출판한 『조선 – 독립, 러시아 또는 일본』이란 책에는 “조선의 여왕”으로, 1904년 프랑스 신문 『르 투르 뒤 몽드 (Le Tour du Monde)』에 실린 기행문에는 “시해된 대한제국 황후”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같은 사진이 여러 나라에서 출판된 다양한 매체에 실려 있고, 더 나아가 사진의 설명도 제각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생각한대로 서양사람 누군가가 명성황후를 알현하고 찍은 사진이라면, 다시 말해 사진의 생산자가 분명하다면, 이런 혼란은 없었을 것이고 명성황후 사진의 실존여부와 진위여부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혼란은 1890~1900년대 당시 우리나라 관련 사진의 생산과 유통 경로가 원인입니다.

당시 신문에 실린 사진관 광고 두 개를 소개합니다. 먼저 1904년 8월 25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기쿠타신(菊田眞)사진관>의 광고입니다.

만세 불변색의 사진을 소본으로부터 6척 이상의 대본까지 최 염가로 촬영함, 풍속, 경색, 기생들의 사진을 염가로 판매함

다음은 1905년 3월 13일, 3월 20일자 부산에서 발행했던 『조선일보』에 실린 <토비(土肥)사진관> 광고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아는 조선일보와는 다른 신문입니다.

土肥사진관 부산 幸町 2정목 전화 108번, 불변색 사진 급 한국풍속사진, 土肥耕美園 불변색 사진 병 한국풍속사진 각종 판매

1880년대부터 일본인 사진사들은 서울을 비롯하여 인천, 부산 등에 진출해서 일본 거류민과 조선인을 상대로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제의 한반도 지배권이 강화되자 대거 진출하는 러시를 이루었습니다. 이들은 초상사진 찍어주는 일이 본업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을 방문하는 서양과 일본의 여행자들에게 한국의 풍속과 생활상 등을 보여주는 사진을 찍어 판매하는 일을 겸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 사진관들과 아주 극소수의 한국인 사진관이 우리나라의 이미지를 서양 세계에 공급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서양의 여행자들 중에는 사진술을 익혀 직접 사진을 찍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진기술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카메라 부피도 엄청 크고 무거웠으며, 유리원판의 무게와 가격 또한 여행자가 사용하기에는 버거웠습니다. 전문적인 사진가가 아니면 사진 찍는 일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Illustrated London News』 같은 화보 신문이 파견한 사진기자 또는 『Underwood & Underwood』 같은 사진 공급 전문회사의 사진가 정도가 직접 사진을 찍었습니다. 서양의 일반 외교관이나 여행자가 사진을 찍어 한국을 서양에 소개했다는 학설은 그래서 어불성설입니다. 사진술의 역사를 모르고 말하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이국적인 취향과 세상의 모든 현상을 수집하기 원했던 당시 서양의 소위 교양인들은 여행을 하면서 현지에서 그 나라나 지역의 풍속과 풍광을 찍은 사진을 구매했습니다. 우리가 여행을 가서 사진엽서를 사서 모으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렇게 구입한 사진을 갖고 가서 여행기나 화보잡지에 게재했던 것입니다. 이런 시장이 형성되자 사진관들은 여행자들이 쉽게 만날 수 없거나 사진촬영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대상, 희귀한 풍속, 한국의 생활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 등을 찍고, 이를 다량으로 인화해서 팔았던 것입니다. 물론 광고도 냈습니다. 이처럼 사진관에서 상업적인 목적 하에 제작한 사진들이 대량으로 유통되어 서구사회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정형화시키는 데 한 몫 했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우리나라에 관한 다양한 서양의 저작들 수백 종에 똑같은 사진이 반복해서 실린 이유입니다.

이처럼 사진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언어 소통의 문제가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앞서 예시한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뿐만 아니라 다른 사진들도 매매되는 과정에서 의도적인 왜곡 또는 어쩔 수 없는 오해가 생긴 경우일 것입니다. 일본인 사진사들이나 한국 사진사들이 영어나 불어를 잘 할 리가 없었고, 통역이 있었을 텐데 당연히 왜곡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진의 인물이 ‘황후’도 되었다가 ‘궁녀’도 되었다가 하는 것입니다. 서양 여행자들 또한 자기가 구입한 사진의 주인공을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소개했었을 것입니다.

최근 ‘명성황후’의 사진일 것이라고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는 이 사진 역시도 『The Illustrated London News』라는 영국의 그래픽매거진 1894년 7월 28일자에 “ATTENDANT ON THE KING OF COREA” 즉 “조선 왕실의 궁녀”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럼 ‘명성황후’의 사진을 실존 할까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측의 근거의 종합입니다.

“ * 명성황후는 일본의 치밀한 음모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었으나, 그 이전부터 생명의 위험을 받고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왕비로 위장한 시녀가 대신 죽음으로써 살해될 번했던 위기를 모면했으며, 그 후 평상시에도 항상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여의사로 명성황후를 자주 진료했던 언더우드여사는 측근이나 시녀들이 과민할 정도로 왕비를 보호했다고 했으며, 궁중 의사였던 알렌도 황후를 직접 진료한 적이 있는데, 전의들이 진맥한 것처럼, 발로 가리고 팔만 내밀어, 그것도 팔목 한 치 정도만 노출되었으며, 혀도 발 틈으로 관찰할 수 있다고 했다. * 이로 보면 명성황후의 모습은 측근이나 아주 가까운 관계가 아니면 대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초상화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측의 근거는 “특히 명성황후 사후에도 고종이나 조선 황실에서 황후의 사진을 구하기 위해 현상금까지 걸고 찾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실존과 진위 여부의 판단은 여러 분의 몫입니다.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 박주석

명성황후 사진의 실존과 진위 논란 1

명성황후 사진의 실존과 진위 논란 1

명성황후 사진의 실존과 진위 논란 1
07/25/2019
/ salon

일제 치하에 있던 1935년, 『조선일보』의 1월 1일자 신년호에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사진 두 장이 간단한 설명과 함께 실렸습니다. 60년 전 설날을 지내는 풍습을 다룬 특집 기사 중 하나였습니다. 두 장 모두 ‘명성황후’의 모습인지 여부로 지난 몇 십년간 숱하게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진들입니다. 당시 신문의 기사를 요즘 말로 번안해서 그대로 옮겨봅니다.

「규중에 숨은 고운 각시들」
이것은 큰 머리에 큰 옷을 입은 육십년 전의 부인네 입니다. 지금 누군가 아가씨한테 보라면 저렇게 차리고 어찌 견디느냐고 할지는 모르지만 옛날의 부인네는 이 머리 이 옷으로 일평생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또 그중에는 이 머리 이 옷도 못 차리게 되어 일평생을 한탄으로 지낸 이도 없지 않습니다. 저고리는 젖가슴도 못 가리도록 짧지만 치마만은 두발을 푹 싸도록 지르르 끌리는 것이 꼴사납기도 하나 알지 못하게 옛 맛이 납니다. 이것은 남끝동 자지고름의 저고리와 스란치마를 입은 육십년 전 젊으신 아낙네의 옷맵시외다. 머리 뒤를 보십시오. 방망이만한 석류잠이 달려 있지 않습니까? (육십년 전에 박힌 사진)

‘남끝동 자지고름’이라든지 ‘스란치마’ 같은 전통 한복의 용어들이 낯설기는 합니다. 복식사전에 따르면 ‘스란치마’란 스란단을 단 긴 치마로서 입으면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폭이 넓고 길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이나 양반가에서 예복으로 입었다고 합니다. ‘자지고름’은 일제시기에 지금 쓰는 ‘자주고름’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60년 전 그러니까 1895년경에 찍힌 것으로 위의 사진은 부인네의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젊은 아낙네의 모습이라고 소개합니다. 무척 불편해 보이지만 누구나 입을 수 없던 왕실이나 반가의 규방 아가씨들이 평생 입고 지낸 복식으로 자못 옛 맛이 난다는 설명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서는 방망이만한 머리의 장식이 너무 커서 무척 불편해 보이고, 살기 참 어려웠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촌평도 있습니다.

기사가 실린 때가 1935년이니 지금보다는 사진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개연성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두 장의 사진을 ‘명성황후’라거나 당시의 표현으로 ‘민비’라고 칭하지도 않았고, 단순히 구한말 ‘규중의 고운 각시들’의 사진이라는 정도로 서술했습니다. 일반 여성은 아니고 지체 높거나 부유한 집안에서 보호를 받는 여성들 정도로 알고 기사를 썼고, 그것도 인물 자체에 대한 내용이 아니고 과거의 옷 입는 풍습을 설명하기 위한 자료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시는 두 장 사진에 찍힌 인물을 ‘명성황후’라고 알고 있거나 주장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와서 이 두 장의 사진을 두고 ‘명성황후’의 모습이라는 진위논란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원래 두 장의 사진이 후보였는데, 최근 들어서는 한 장의 사진이 추가되었습니다. 논란의 인물사진 세 장을 소개합니다. 모두 ‘명성황후’의 모습 후보로 그 동안 학계나 언론 등에 거론된 사진입니다

‘남끝동 자지고름’이라든지 ‘스란치마’ 같은 전통 한복의 용어들이 낯설기는 합니다. 복식사전에 따르면 ‘스란치마’란 스란단을 단 긴 치마로서 입으면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폭이 넓고 길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이나 양반가에서 예복으로 입었다고 합니다. ‘자지고름’은 일제시기에 지금 쓰는 ‘자주고름’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60년 전 그러니까 1895년경에 찍힌 것으로 위의 사진은 부인네의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젊은 아낙네의 모습이라고 소개합니다. 무척 불편해 보이지만 누구나 입을 수 없던 왕실이나 반가의 규방 아가씨들이 평생 입고 지낸 복식으로 자못 옛 맛이 난다는 설명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서는 방망이만한 머리의 장식이 너무 커서 무척 불편해 보이고, 살기 참 어려웠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촌평도 있습니다.

기사가 실린 때가 1935년이니 지금보다는 사진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개연성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두 장의 사진을 ‘명성황후’라거나 당시의 표현으로 ‘민비’라고 칭하지도 않았고, 단순히 구한말 ‘규중의 고운 각시들’의 사진이라는 정도로 서술했습니다. 일반 여성은 아니고 지체 높거나 부유한 집안에서 보호를 받는 여성들 정도로 알고 기사를 썼고, 그것도 인물 자체에 대한 내용이 아니고 과거의 옷 입는 풍습을 설명하기 위한 자료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시는 두 장 사진에 찍힌 인물을 ‘명성황후’라고 알고 있거나 주장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와서 이 두 장의 사진을 두고 ‘명성황후’의 모습이라는 진위논란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원래 두 장의 사진이 후보였는데, 최근 들어서는 한 장의 사진이 추가되었습니다. 논란의 인물사진 세 장을 소개합니다. 모두 ‘명성황후’의 모습 후보로 그 동안 학계나 언론 등에 거론된 사진입니다

사진1

사진2

사진3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가장 오랫동안 회자된 이미지는 <사진1>입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 박사가 1904년 감옥에서 집필했고, 1910년 미국에서 출판한 『독립정신』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미국에서 출판해서 인지 당시로는 드물게 자료 사진을 많이 실었습니다. 여기에 <사진1>이 ‘명성황후’라는 캡션을 달아 소개되었고, 1970년대까지는 ‘명성황후’의 이미지로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립니다. 그래서인지 이 사진의 빈티지프린트를 소장한 <한미사진미술관>도 “명성황후 추정 사진”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1975년 <사진2>가 발견됩니다. 프랑스에서 1898년 발간된 라게리(Villetard De Laguerie)의 책 『La Coree Independante, Russe ou Japonaise』에 실린 여러 삽화 중에 있는 이 사진의 캡션이 ‘한국의 황후(La Reine De Coree)’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 책이 소개되자 많은 국사학자들이 이 사진이 바로 ‘명성황후’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1977년부터는 국정 한국사교과서에 실리는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은퇴하신 이태진 교수가 대표적인 분입니다. 하지만 진위 여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생겼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90년대에 들어와 교과서에서 삭제당하는 비운을 맞기도 했습니다.

이상 두 장의 사진이 ‘명성황후’의 모습이라고 확정되지 못하자 최근에는 <사진3>이 맞는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대개 2006년 무렵부터였습니다. 빈티지프린트가 제가 잘 아는 영국의 ‘한국역사사진’ 컬렉터인 테리 버넷(Terry Bennett)의 소장품에 있습니다. 테리는 이 사진의 인물이 원본 사진을 배열한 앨범에 고종황제 및 순종, 대원군 등과 같은 위상으로 구성되어 있고, 인물의 배경 화면이 다른 사진과 같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진 또한 다른 기록에는 ‘조선 왕실의 시녀’로 설명되어 있다는 치명적 결함이 있습니다.

왜 이런 혼란이 지속되는 것일까요? ‘명성황후’는 실제 사진을 찍었을까요? 그렇다면 사진은 실존하는 것일까요? 이런 의문을 해결하려면 동서양의 각종 관련 기록들을 전수조사하고, 당시 사진의 유통 경로를 파악해야 합니다. 다음 살롱에서 의문을 좀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두 번째 여성사진사 이홍경

우리나라 두 번째 여성사진사 이홍경

우리나라 두 번째 여성사진사 이홍경
07/25/2019
/ salon

여인의 초상-경성사진관-1920년 추정

1919년에서 1921년 사이에 당시 종로 인사동에 있던 <경성사진관>에서 찍은 여성의 초상사진입니다. 현재 <한미사진미술관>의 소장품이고, 1998년 <한국사진사연구소>가 <예술의전당 미술관>에서 주최한 ‘한국사진역사전’에서 처음 소개한 사진입니다. 한복을 차려입고 웃는 모습으로 포즈를 취한 젊은 조선여성의 사진으로, 대지에 인화한 사진을 붙였고 이래 부분에는 사진관 이름과 사진사 이름이 박혀 있습니다. 우측에는 인사동 <경성사진관>이란 이름이 영어와 한자로 있고, 전화번호가 479번이라고 찍혀 있습니다. 좌측에는 전각의 형태로 채상묵(蔡尙黙)이라 적혀있고, 그의 검증을 통과했다는 뜻의 심사제(審査濟)란 단어가 적혀 있습니다. 여성사진사 이홍경(李弘敬)의 작품입니다.

신분이나 출신 성분에 상관없이 일정한 경제력을 갖추면 사진을 찍어 자신의 초상을 누구나 갖게 된 것은 대략 1910년대부터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는 대부부의 계층은 남성이었고, 암묵적인 사회적인 규제로 해서 여성들의 사진관 출입은 불가능했습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당시의 사회통념은 남성사진사가 사진을 찍는 내밀한 곳에서 여성이 사진기 앞에 서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여성들은 스스로 자율적인 결정에 의해 주체적으로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구한말이나 일제 초기 여성을 찍은 사진의 대부분이 궁녀이거나 기생이었습니다. 사진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인 모델로 위치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이홍경이 사진사로 활동했던 시기에도 새아씨나 규수들은 남성들을 기피하고 여자사진사들 앞에서만 사진 찍기를 원하던 내외법이 잔존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이홍경은 여성으로 사진사라는 근대적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고, 여성들에게 사진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여성이 여성과 남성을 가리지 않고 사진기 앞에 세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에 도전했습니다. 이홍경의 등장 이후 여러 여성 사진사들이 근대교육을 통해 등장했습니다. <황성기독청년회학교(YMCA)>에 교육 과정에 설치한 ‘사진과’나 그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경성사진학강습원> 또는 여러 기관이 야간으로 설치한 속성 사진학교 등을 통해 남성들과 함께 여성들도 사진교육을 받고 ‘사진사’로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1921년 『동아일보』의 광고 그리고 1927년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는 1919년과 1921년에 지금의 종로 일대인 북촌에 한 사진사가 두 군데의 사진관을 설립해 운영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한국인으로 두 번째 여성사진사였던 이홍경(李弘敬)이었습니다. <YMCA> 사진과에서 사진술을 익힌 이홍경은 1919년 남편인 채상묵(蔡相黙)과 함께 북촌의 인사동에 <경성(京城)사진관>을 설립했고, <근화여학교>에서 사진 강의도 했던 선구적인 근대의 지식인이었습니다.

남편을 앞세워 인사동에서 <경성사진관>을 운영하던 이홍경은 1921년 인사동 바로 옆 동네인 관철동에 여성고객 위주의 <조선부인(朝鮮婦人)사진관>을 열어 사업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개업광고를 소개합니다.

개업광고

신문화를 건설하며 새 사업을 이루려는 우리 사회에 오직 그 요소인 예술적 관념이 결핍하옴은 우리의 항상 감탄하는 바인 줄로 생각하와 본인이 이에 다년 연구하온 결과 금춘(今春)을 기하여 좌기 장소에 초상과 사진업을 개(開)하옵고 삼천이백 촉(燭)의 전기를 응용하와 정선(精鮮)한 기술로써 요구하시는 대로 수응하겠삽기에 광고하오니 사해(四海) 신사숙녀 제위는 ‘여자 사업계’에 첫 걸음임을 널리 애고찬동(愛顧讚同)하시어 일차 시험하여 주심을 업대여 바라나이다.

경성부 관철동 75번지 조선부인사진관 주 이홍경

‘여자 사업계’의 첫 걸음이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말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관철동에 있던 이홍경의 <조선부인사진관>은 여성 고객 중심으로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여성만 받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광고에서 보듯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던, 다른 남성사진사들과 본격적인 경쟁을 했던 사진관이었습니다. 충무로나 을지로 지역에 주로 있던 일본인 사진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위적 시도였습니다.

1927년 5월 18일자 『조선일보』는 「조선여성이 가진 여러 직업」이라는 시리즈 기사에서 이홍경의 직업 철학과 여성사진사로서의 장점 등을 소개했고, 사진사는 여성에게 적절한 직업이라는 이홍경의 말을 직접 게재했습니다.

“이것은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것이니, 제일 두뇌가 영민하여 배경을 잘 보며 성품이 꼼꼼하여 수정을 잘 하여야 할 것이다. 어느 점에서 보던지 사진사는 남자보다도 여자에게 적당한 직업 이라 할 수 있으며 더욱이 아직도 내외가 심한 구가정의 새 아씨나 규수들의 촬영은 반드시 여자 사진사를 요구할 것이 옳시다.”

이홍경과 <조선부인사진관>은 한국의 여성이 근대적 직업인으로서 막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의 대표적인 상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첫 번째 여성사진사는 <천연당사진관> 주인이었던 해강 김규진의 부인 향원당(香園堂) 김진애(金眞愛)였습니다. 해강이 여성 고객을 맞이하기 위해 자기 부인에게 촬영술을 가르쳐서 사진사로 데뷔시켰던 것입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

비운의 주인공 『카메라예술』의 발행인 천재성(天再成)

비운의 주인공 『카메라예술』의 발행인 천재성(天再成)

비운의 주인공 『카메라예술』의 발행인 천재성(天再成)
07/2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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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예술 창간호 1967년 10월호

근대사회는 본질적으로 각자가 맡은 바 사회의 제 영역에 걸친 다양한 직업들로 이루어지고, 각 직업은 그에 따른 가치와 윤리가 있습니다. 그 가치와 윤리는 상호 보완적일 수도 있고, 상호 충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급박한 화재의 현장에 있을 때 소방관은 불을 끄고 인명을 구조하는 역할을 사명감을 갖고 성실히 수행함이 그 직업의 윤리이고, 현장의 사진기자는 불을 끄는 일을 돕지는 않지만 열심히 취재하고 사실을 신속하게 전달해 독자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 직업윤리입니다. 현장의 사진기자에게 왜 인명 구하는 일을 우선하지 않았느냐고 비난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실익보다 명분을 쫓다보면 망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 버는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사업가의 냉철함은 그 자체로 미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업가는 법적 테두리 내에서 돈을 벌고 성공하는 것이 그 직업의 가치이고 윤리적입니다.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재화를 늘려 자신의 부를 일구지만 그 과정에서 고용을 창출하고 세금을 내고 하면서 사회를 이롭게 합니다. 1968년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진 사진전문 잡지 『카메라예술』의 편집인이었던 천재성(天再成)이라는 분은 이름처럼 사업에는 천재성(天才性)이 있었으나, 사업가로서의 직업윤리 의식은 부족했었나 봅니다. 잘나가던 사업가가 돈이 안 되는 문화적인 일에 뛰어들었다가 망해버렸습니다.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사실 앞서 소개한 <대한사진문화사> 발행의 『사진예술』은 1966년 당시 DP&E 업계의 화제 인물이었던 천재성(千再成)이란 분을 꼬드겨 1956년도에 발행했던 『사진문화』를 다시 발간하려고 했던 조명원의 작품이었습니다. 천재성은 1950년대 말 충무로에 <미야사(美也社)>라는 DP&E 점을 운영했고, 사업이 번창해서 서울 시내 전역에 29개의 체인점을 내고 운영했던 화제의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사진계의 상황을 잘 아시는 여러 원로들의 증언과 천재성의 회고를 종합해 보았습니다. 창간 당시 『사진예술』은 대외적으로 변종관이 회장, 조명원이 사장, 천재성이 부사장으로 되어있었습니다. 변종관은 광고를 줄 수 있는 큰 사업가여서 회장으로 모셨고, 조명원은 실제 잡지를 만들던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창간 과정과 계속 발행의 비용을 전적으로 대고 실질적으로 경영한 분은 바로 천재성이었습니다.

천재성이란 분은 전쟁으로 부산에서 피난 시절을 보낼 때 카메라 상점에서 사진 관련 상거래를 익혔고, 전후 서울로 환도한 후 디피점을 내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1950년대 말에는 사진 붐을 타고 ‘디피점’을 만들어 하루에 1만장의 사진을 제작해 내는 이 분야의 신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충무로에 본점을 두고, 서울 시내 삼선교, 숭인동, 문화동, 성동역 앞, 비원 앞, 용산중학교 입구, 뚝섬 버스종점 앞, 혜화동, 원남동, 삼각지 등 버스 정류장이나 전차 정류장 부근까지 목 좋은 곳에 수많은 체인점을 열었다고 합니다. <미야사> 체인을 운영하면서 광고에도 열중했는데, 극장 광고와 텔레비전 광고까지도 했었습니다. 천재성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미야사>는 한 달에 십만 원 정도의 광고비를 지출했다고 합니다. 조명원 선생은 이 금액 정도만 투자하면 잡지를 발행할 수 있고, 그 자체로 광고효과는 훨씬 클 것이라고 설득했다고 합니다.

천재성을 성공으로 이끈 DP&E점이란 보통 ‘디피점’이라고 불렀는데, 사진에 관한 종합서비스 업종이었습니다. ‘디피점’이란 영어로 ‘Development, Printing & Enlargement’ 의 앞 글자를 딴 약자로서, 말 그대로 필름 현상, 인화, 확대 서비스를 해주는 가게를 말합니다. 1980년대 컬러 사진이 대세가 되어 40~50분 만에 현상과 인화를 다해주는 QS(Quick Service) 가게가 나와서 유행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사진관은 디피점을 겸했습니다. 대부분 흑백을 쓰던 시절의 유산입니다. 손님이 촬영한 필름을 맡기면 현상을 해주고, 현상한 필름을 밀착 인화를 해서 보여주고, 그 중 잘나온 사진을 인화해서 사진을 넘겨주는 일을 해주는 업종이었습니다. 카메라가 귀하던 시절, 필름을 팔 때 카메라까지 같이 대여해주기도 했습니다. 새 필름을 장착한 카메라를 빌려서 졸업식이나 소풍을 가서 사진을 찍고, 카메라 채로 ‘디피점’에 갖다 주면 3~4일 후 사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중학교 시절 디피점에서 빌린 카메라로 기념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잡지는 창간 후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칩니다. 조명원과 천재성이 생각하는 잡지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고, 잡지의 발간 비용 또한 엄청나게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진예술』을 3호까지 발행한 후 천재성은 조명원 선생을 해고하고, 본인이 편집인이 되어 잡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잡지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디피점은 잘 했을지 모르나 잡지는 전혀 다른 영역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나왔을 리가 없었고, 월간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통합 호 형식으로 겨우 몇 달 간격으로 두 번 더 발행했습니다. 당시 잡지에 관한 법령에는 월간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무단으로 발간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폐간된다는 규정이 있었고, 복간을 신청해도 기존의 제호는 다시 쓸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한 번, 두 번 정도면 봐주는데 휴간 신청도 없이 3~4회 내지 못한 『사진예술』은 자동 폐간되었습니다. 잡지 전문가가 없었던 탓입니다.

잡지를 계속 내려던 천재성은 『사진예술』의 제호는 다시 쓰지 못하게 되자 잡지의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잡지가 『카메라예술』이었습니다. 이 잡지의 첫 호 판권 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 『카메라예술』 제1호/발행일 : 1967년 10월 1일/등록번호: 라 933/발행인: 변종관/편집인 : 천재성/발행소 : 대한사진문화사,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1가 55/정가 : 200원”

1967년 10월 1일 발행, 등록번호 ‘라-933호’였습니다. 당시 문교부(오늘날의 문화부와 교육부를 합친 정부부처)가 등록을 받던 기관이었습니다. 참고로 『사진예술』의 등록번호는‘라-775’이었습니다. 창간호 표지는 훗날 한국 광고사진의 개척자이자 전설로 얼마 전 작고한 김한용(金漢鏞, 1924~2016)선생이 찍은 염소 사진으로 장식했습니다. 『카메라예술』은 통권 제1호로 다시 창간했으나, 겉으로는 제호만 변경되었지 어디에도 잡지를 새로 발행한 흔적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예술』과 『카메라예술』을 합쳐 1968년 12월 호인 통권 30호, 실제로는 17권을 끝으로 종간하고 말았습니다.

카메라예술 창간호 1967년 10월호

1968년부터 『카메라예술』의 편집장을 맡아 천재성을 대신해 잡지를 제작한 분은 임범택(林範澤, 1938~ )선생이었습니다. 작고하신 한국사진의 거두 임응식(林應植, 1912~2001) 선생의 장남으로 더 유명하신 분입니다. 고 최인진 선생과의 인터뷰에서 말한 이분의 증언에 따르면 잡지 한 권 발행 할 때마다 <미야사> 분점이 하나씩 없어졌다고 합니다.

“변종관이 발행인이었으나 조명원이 다 했다. 변종관은 돈을 대지는 않고 천재성이 돈을 댔는데, 이름만 대외적으로 명분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고 계약을 했다. 처음에는 충무로 2가 기쁜소리사 앞 <미야사> 본사 2층에서 창간을 했는데, 나중에는 자꾸 자금이 딸리니까 서울 시내에 <미야사> 분점이 20여개가 넘게 있었는데, 잡지 한 권을 발행할 때마다 분점 하나씩을 팔아야 했다. 1년 남짓 하는 동안에 지점이 14개가 없어졌다. 1960년대는 한참 사진 붐이 일어나고 있을 때니까 디피점이 잘되어 <미야사> 분점이 많았는데, 이런 저런 일들로 천재성이 잡지에 손을 대 결국 망한 것이다.”

전문적이지도 않았고 본업과 어울리지도 않았던 일에 뛰어든 대가가 무척 컸습니다. 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법입니다. 훗날 천재성은 역시 고 최인진 선생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잡지는 내 의도대로 운영하는데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3백만 원이 투자 된 가운데, 조그만 디피점에서 무슨 돈이 있었겠어요, 『카메라예술』 5호, 통권으로 12호까지는 그런대로 있는 돈 가지고 끌고 나갔으나 그 후부터는 점포 하나씩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어느 때는 분점이 두 개가 없어진 적도 있었다. 분점 하나에 보증금이 보통 20만원, 25만원, 싸구려는 15만원도 있었다. 가게를 파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급해서 보증금을 빼오는 것이었다. 용산중학교 앞에 있던 점포가 잘 되었는데 그것을 제일 마지막에 처분했다. 하나 하나 문 닫으면 그 돈은 인쇄소에 집어넣고, 잡지 한 호 나오면 <미야사> 분점이 처분되는 것과 정비례되었다. 나는 잡지를 발행하는 것이 <미야사>를 살리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 처음부터 끝까지 했으나 잡지도 망하고 <미야사>도 문을 닫고 말았다.”

마지막 호의 표지 이미지는 종교적이어서 종말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조명원, 변종관, 천재성 이들의 인연은 이렇게 비극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발행한 잡지는 1960년대 후반 한국사진의 작가와 작품, 사진이 처했던 사회문화적 상황을 적실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