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7 – 대관령 아래 강릉 능가사의 법관 스님 작업공간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7 – 대관령 아래 강릉 능가사의 법관 스님 작업공간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7 – 대관령 아래 강릉 능가사의 법관 스님 작업공간
10/07/2020
/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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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8월 말과 9월 초에 강릉시 구정면 남밭길 능가사에 다녀왔다. 평론을 써달라는 선승(禪僧) 화가 법관 스님의 요청으로 작업실과 갤러리를 찾았다. 법관 스님은 최근 단색화 내지 포스트 단색화 작가로 꼽히며, 개인전이나 단체전, 옥션이나 아트페어 전시장에서 가끔 만나던 작가이다. 아래 내 글에도 밝혔지만, 작업공간과 갤러리를 갖춘 능가사는 대관령 능선이 품어 안은, 명당으로 꼽을 만하였다. 8월 처음 방문했을 때, 그 대관령을 스케치해두었다. (도 1, 2) 9월 두 번째 방문 후에는 경포대 아래 강문 바닷가 진또배기 마을을 들렀다. 오래간만이었는데, 마을 수호신인 솟대를 나무와 쇠 등으로 엄청나게 많이 제작해 늘어놓아 그야말로 솟대공원을 조성해놓았다. 다행히도 긴 장대 끝에 오리 세 마리를 얹은 진또배기는 그런대로 원형을 갖추고 이었다.다시 그려 봐도 현대 조각 같은 그 단순미가 여전하였다. (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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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의 수행과 작품 활동을 통합한 법관의 회화예술
강릉 능가사楞伽寺에서 일구고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서울산수연구소장

 

군청색 화면은 고요하다. 짙푸른 하늘이나 깊은 바다를 연상시킨다. 연한 청색 붓질 위로 중간 톤의 색이 쌓이고, 그 위로 종횡으로 그어댄 짙퍼런 선묘 흔적이 가득하다. 가로세로로 반복한 선들은 간격이나 기울기가 일정치 않고 대여섯 줄씩의 리듬을 타 있다. 붓질이 화면 가득하면서도 정연하다. 언뜻 보면 직물류 짜임새처럼 보기 십상이나, 가까이 대하면 얼기설기한 세선(細線) 묘사에 흥과 신명이 넘친다. 간간이 찍은 붉은 색 점도 유난하다. 

이러한 최근 법관의 단색조 그림은 그야말로 ‘긋기(畵)와 칠하기(繪)’, 회화(繪畵)의 근원에 해당하는 행위이다.

 이들 법관의 작업은 불규칙하면서 자연스런 붓질과 색깔, 화면의 질감이 독특하다. 근래 몇 년 새 자주 눈에 들던, 기억에 남는 법관의 회화 스타일이다. 글쎄, 미술사조로는 동어 반복으로 화면을 채운 전면회화(全面繪畵), 곧 all over painting으로 보인다. 선묘와 점 찍기를 반복해 가득 채운, 이 퍼런색 캔버스 작품은 법관(法觀)이 2017년에 완성한 <선(禪)>이라는 작품이다. (도 4)

 이처럼 상업화랑은 물론이려니와, 개인전과 옥션, 아트페어 전시장에서도 크고 작은 법관의 <선(禪)>이라는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고, 법관이 승려라는 점이 더욱 관심을 두게 했다. 법관의 회화 형식이나 <선(禪)>의 작업과정에 대한 표현을 들어보면, 최근 부상한 단색화 작가들이 내세운 도가의 도(道), ‘무위(無爲)’나 무위자연, 불가의 ‘선(禪)’이나 ‘무상(無相)’, 혹은 무아(無我)의 경지, 구도자적 자세 등과 무관하지 않아서 그랬다. 이와 연계되는 사조로 구미의 미니멀리즘 작가들이 심플의 단순미를 강조하는 예술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탓에 법관(法觀)의 최근 7~8년 새 작품 <선(禪)>은 단색화 혹은 후기 단색화로 분류되기도 한다. 실제 2015년에는 부산국제아트페어 ‘단색화 특별전’에 초대되었고, 2018년에는 ‘후기 단색화’ 전에 초청되면서, 그 위상이 자리매김 되기도 했다. (윤진섭, 「후기 단색화 예술」, 『THE POST DANSAEKHWA DF KOREA 한국의 후기 단색화』 초대전, LEEAHN GALLERY 리안갤러리 서울, 대구, 2018.) 그런데 법관은 이 단색화나 미니멀리즘 작가들과 출발을 달리한다.

불교나 도교의 동양 사상과 연계해 현대미술이라 칭해 온 점에 비해, 작업과정을 “선(禪) 수행에서 나온다.”라고 말하듯이 법관이 선승(禪僧)이라는 점에서 차이진다. 어찌 보면 한국현대회화에서 법관의 출현은 반갑다. 우리 시대의 승려로서 자기 정체성을 표출한 화가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법관은 자신의 작업에 대해 승려로서 수행과 일상을 쏟아낸 행위라 말하곤 한다. 먼저 직접 법관의 작품 이야기를 들어보자. 

승려로서 수행, 사람으로서 일상,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생활이 모두 내 정체성을 표현하려고 했던 거 같네요. 헌데 저는 작가 내지는 화가라는 이런 의식이 거의 없습니다. 잘 하든 못하든 승려 생활 중 그림은 그 일부라고 봅니다. 마치 내가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법당에서 목탁을 치고, 참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림도 내 삶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근래 들어 부쩍 그림 그리는 작업에 몰입하며, 가장 많은 시간을 내는 편이지요. 그러니까 내게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림에 가장 최선을 다한 거 같아요.

어떤 잡념도 없이, 심지어는 스케치나 에스키스도 없으니까, 적어도 그림 그리기 이전까지는 무의 상태지요. 그림을 시작하면서 구도도 느낌도 색깔도 그렇고, 모든 것을 동시에 쏟아내게 됩니다. ‘즉심(卽心)’으로 이루어지다 보니까, 삐뚤어져도 반듯한 거 같고, 반듯해도 삐뚤어진 거 같고, 늘 살아있는 느낌으로 작업 했던 거 같네요. 그림은 많이 그리면 스스로가 터득하겠구나, 자기대로 표현하는 법을 가지고 있으면 되겠구나, 그리고 그것이 오랫동안 하다 보면 다른 사람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겠다 싶네요. (2020년 8월 25일 인터뷰, 한성희 정리)

그림은 본래 자기의 성품을 잘 드러내야 하고 그 성품은 수행을 통해 간결하고 욕심 없는 가운데 즉심에서 나와 모자람과 어리석음을 넘어 부족함이 없는 가운데서 오롯이 모든 것을 능히 담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간결하고 맑아야 하며 어린아이처럼 천진하여야 하고 고졸함이 잘 다듬어진 인품을 담은 노인네와 같아서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하여도 감동을 주어야 한다. 또한 수행을 통해 얻은 바를 드러내되 잘 정제되어야 하고 단조로운 가운데 단조롭지 아니하고 복잡하더라도 어지럽지 아니 하여야 하며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드러나야 하고 불완전한 듯하면서도 변화를 주어야 하지만 지극히 안정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안으로 품고 있어 밝고 은은함이 속으로부터 비쳐 나와 마치 잔잔한 호수를 보는 것 같아야 하며 그 바탕은 우리 일상 삶에 두어야 한다. (법관 메모에서, 2020. 8)

촘촘히 엮어진 그물망 같은 선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그려져 변화를 이끌어 내고 수많은 점들은 찍었을 때 확장하려는 힘과 막으려는 선들의 충돌에서 생기는 작은 에너지들을 만들어 시선을 좀더 오랫동안 머물 수 있도록 하면서 공간확장을 통해 무수한 여백을 만들기도 한다. 밤하늘의 별빛과 먼 도시의 불빛을 연상케 하는 정형화되지 않은 화면은 담담하면서도 무한한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선(禪) 수행으로부터 오는 긴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기도 한다. (법관 작가 노트, 『선』, 올미아트 스페이스, 2019.)

나는 그림을 그릴 때 균형적인 아름다움과 변화된 자유로움의 조화, 그리고 고졸하면서 내적으로 힘을 담아낸 부드러운 선, 여백으로 드러낸 여유로운 禪의 세계와 수행에서 얻어진 정신세계를 현대적 조형 감각으로 풀어내기 위한 작업을 하려고 노력한다. (법관의 메모에서)

 이 같은 법관의 예술과 정신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작업실을 찾았다. 무더위 말미인 8월 말과 9월 초 두 번, 강릉에 있는 능가사(楞伽寺)를 방문했다. 강릉시 구정면 제비리 남밭길 안쪽에 위치한다. 북쪽 마을 앞으로 남대천이 흐르고, 솔밭이 빙 둘러 아늑하다. 서쪽으로는 대관령 준령이 병풍처럼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작업과 수행, 예배와 일상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자연환경이 안성맞춤이라 생각 들었다.

이곳에 터전을 잡은 게 1999년이니, 벌써 20여 년 전이란다. 법관이 최선의 공간을 발견하고 사원을 조성한 것이다. 동해 고속도로가 지나고 케이티엑스 철길이 놓이며 주변이 크게 변했음에도, 솔밭 절은 무관하다. 명당 터를 만나지 않았나 싶다. 이에 걸맞게 얼마나 정성을 다해 가람을 꾸몄는지, 솔밭 마당 곳곳에는 법관의 엄격한 계율과 불심이 여실히 묻어난다.

 그리고 수행과 예배의 공간이자 회화의 창조공간인 절 이름, ‘능가사(楞伽寺)’는 승려로서 법관의 예술 의지와 아우러져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능가사는 한자 뜻 그대로는 ‘모퉁이에 있는 절’이란 의미지만, 능가경(楞伽經)에서 따온 이름이다. 능가경은 대중에게 조금 생소한 이름이지만, 석가모니가 능가산 능가성(楞伽城)에서 대혜(大慧) 보살에게 설법했다는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으로 꼽힌다. 달마와 혜가(慧可)가 심인(心印)으로 전승되었다 하여 선종 불교의 뿌리로 여기는, ‘마음’의 세계를 논리적으로 밝혀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불교에서 원효대사가 ≪능가경소(楞伽經疏)≫, ≪능가경요간(楞伽經料簡)≫, ≪능가경종요(楞伽經宗要)≫ 등을 저술했다고 전하며, 가장 즐겨 인용한 불경으로도 유명하다.

능가경은 ‘마음’을 가운데 두고 진정한 깨달음 각(覺)을 무분별(無分別)이나 무아설(無我說)에 둔다. “중생은 미혹(迷惑)으로 대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쌓아온 습기(習氣)로 말미암아 모든 현상이 ‘스스로의 마음(自心)’에 의해서 나타난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의식(意識)의 본성에 의지하여 모든 현상이 스스로의 마음이 나타낸 바임을 철저하게 깨닫는다면 집착하는 자(能取)와 집착하게 되는 대상(所取)의 대립을 떠나서 무분별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무분별을 스스로 체험하는 철저한 깨달음에 의해서만 진리의 전개를 획득할 수 있다’는 ‘성스러운 지혜’의 작용을 강조한다. (남회근, 신원봉 역,『능가경 강의』, 부키, 2014.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기영,『불전해설』, 한국불교연구원, 1978.) 

이처럼 능가경의 법통을 그리게 하는, 법관의 능가사는 여느 사찰과 다름없으면서도 조촐하다. 터의 크기에 적절하게 금강문이나 사천왕문 없이 작은 암자처럼 꾸민, 법관다운 사원 배열이 돋보인다. 대관령 능선을 향해 배치한 두 불전과 승방, 그리고 법관의 작업실과 생활공간, 전시실인 고암(古巖) 갤러리 등으로 정갈하게 꾸려진 가람(伽藍)이다.

솔밭언덕을 배경 삼으며 이단 석축을 쌓고 지은 삼칸의 대웅전과 단칸의 삼성각은 건물조차 단출하다. 3층석탑 마저 대웅전 중앙이 아니라 아래단 석축 왼편에 치우쳐 세운 점도 색다르다. 좁은 터에 마당을 살린 배려로 보인다.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 가운데 주불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한, 최근의 것이면서도, 고려말~조선초 형식을 따른 점이 눈에 띈다. 조선 후기 문화재급으로는 대웅전의 작은 석불이 방해석으로 만든 19세기 조성한 것으로 보이며, 삼성각의 산신도가 갑술년(1873년 추정)에 그려진 불화이다.

20년간 하나하나 짓고 조성하며 작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춘 모양이다. 이로써 능가사는 법당에 작가의 창작과 전시공간을 함께한 법관의 터전으로 완성되었다. 정말 축하할 일이다. 

법관의 작업 공간은 법당 마당 아래 배치되어 있다. 보통 절의 경우 보제루나 만세루가 들어서는 예배처인즉, 부처에게 예를 올리는 자리이다. 철근 구조물로 조립한 단층에 반은 수장고이고, 나머지는 차실(茶室)과 화실(畫室)로 칸을 나누어 사용하고 있었다.

먼저 들른 차실에는 차 도구들과 좋아하는 도예가들의 작품들, 그리고 법관의 최근 그림들이 가득하면서도, 안정되게 꾸며져 있었다. 100호짜리 청색 추상화 <선>이 중앙을 차지하고, 왼쪽 벽면에는 전통적인 선화 스타일의 수묵 서화 작품 족자와 붉은 색조의 다완 그림이 그러했다. 그중에서 “禪 아님이 있는가”라는 어눌한 붓글씨가 법관의 화두(話頭)인 듯해 눈길을 끌었다. (도 5)

법관은 이처럼 전통 선종화나 선배 승려 화가 중광(重光)을 멘토 삼아 먹그림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법관 회화의 뿌리인 셈이다. 법관은 강릉 능가사에 정착한 3~4년 새 선승으로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2002년 강릉에 있는 화랑 선아트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2004년 서울전으로 이어지며 대중이 사는 세상에 나온 까닭이다.

“산사에서 정진중에 필묵이 좋아 가까이 두고/문득/그리고 싶은대로 그냥 그렸습니다”(‘빈손으로 왔다 가네’ 선화전에 붙여, 우림화랑, 2004)라고 피력한 것처럼 달마며, 탑이며, 화로며, 찻잔이며, 세한이며, 난초며 어눌한 솜씨 그대로 선보였다. 또 정감이 넘치는 묵서 글씨를 몇 차례의 개인전에 곁들였다. (2018, 2012년 등) 몇 작품 먹글씨와 먹그림을 차실에 걸어두고 지내듯이, 꾸밈없는 손맛대로 표현하는 일을 지금도 즐겨 다루며 경지에 오른 것 같다. ‘재주 없어 그저 즐긴’ 자연스러운 붓길 흐름에 법관다운 개성미가 유연하다.

“내 회화는 선(禪) 수행으로부터 오는 긴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는 일이다.” 이 같은 법관의 마음이 쌓인 공간을 보자.

 차실 옆방 그림 그리는 화실은 대관령을 향해 작은 창을 낸, 선방(禪房)이었다. 고요한 정와(靜窩)처럼 느껴졌다. 현재 작업 중인 대소의 캔버스들이 벽에 기대어 정돈되어 있고, 화면 왼쪽과 아래에 수직 수평의 긴 흰 선을 남긴 검은 색조의 대작이 막 끝낸 듯하였다. 뎅그러니 놓인 작업대에는 법관이 이 작품을 완성하며 내뿜는 열기로 가득했다. 무념의 붓질 소리를 상상하고 남음 직했다. 능가경의 말씀대로 마음자리이자 집착을 벗는 작업의 결과물로 수긍되었다.

법관의 블루 작품을 바탕 판으로 삼아 만든 시계가 벽에 걸려 있어 인상적이었다. 시간 알림은 정확했다. 작업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하루에 꼬박 15시간가량, 혹은 그 이상 몰두한단다. 그 바람에 달인의 경지에 오른 듯하다. 100호의 선묘 작업이 초기에는 한 달씩 걸렸는데, 요즈음은 열흘 정도면 완성한다고 한다. 붓을 들기보다 놓기가 어렵다고 할 정도이다.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완성해야 하는 법관의 마음새로 보인다. 살면서 몸과 마음이 겪은 체험을 쏟는 그림 작업에 대하여, 법관은 ‘대단한 것 아님’을, 그러나 ‘온 마음으로 최선을 다함’을 강조한다.

화실 왼편이 수장고였다. 문을 열자마자 ‘으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흐트러진 듯 제법 정리가 잘된 창고에 법관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지난 35년 열정으로 쏟아낸 ‘마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승려가 되었지만, 1995년경 무작정 만진 유화 그림부터 법관이 천부로 타고난 화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 낡은 상자에서 꺼낸, 몇몇 처음 그린 유화들을 보며 그랬다. 서구 유럽에서 개발되어 발달한 “유화란 뭐냐”며 유화물감 칠하기를 60일가량 미친 듯이 몰입했던 결과란다.

굵은 텃치의 박고석 화풍 엇비슷한 산 그림이며, 후안 미로 그림을 연상케 하는 선조의 <노래하는 새>며, 심지어 둥근 레코드판에 그린 동물인 듯 사람 얼굴인 듯한 표현주의 화풍이나 흰색 추상화까지, 법랍 유년기 법관의 순정스럼이 고스란했다. 또 내 것이 나올 때까지 집착한 법관의 화두(話頭) 정진을 읽는 것 같았다. 언젠가 누군가 법관 회화를 망라하는 회고전을 기획할 때, 백여 점의 다채로운 초심 오롯한 소품들을 어떻게 평가할지도 흥미롭게 떠올려 봤다. 

수장고 중간에는 붉고 푸른 색조의 크고 작은 캔버스들이 첩첩해 있었다. 건물의 절반을 차지한 이 작품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그렸다고 한다. 산과 나무 풍경, 달, 달항아리, 꽃, 나비, 새 등등 반추상 혹은 순수 기하학적 추상화이다. 화면구성에는 불화나 민화의 소재나, 그가 좋아하는 분청자의 무늬 등이 화면에 등장해 있다. 전통적 회화 안료인 석채(石彩)를 쓰면서도 아크릴 물감 등 혼합해 그리기도 했다.

절 생활에서 늘 익숙한, 단청 이미지에 근사한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건축물 장식에서 적색은 주황색으로, 초록색을 대신해 푸른 색조로 자기화시켰다. 그림에 자신감이 붙어 “산사 생활 정진 중에 내 속에 있는 생각들을 화면에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2006년 ‘심상 심류’전에 붙여, 서울 윤갤러리)라고 시작해, ‘비산비수’전(서울 인사아트센터, 2007.), ‘禪으로 부터’전(서울 인사아트센터, 2009.), ‘선-2011’전(서울 인사아트센터, 2011.), ‘선-2013’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13.) 등을 통해 유명해졌다. 법관의 작품들은 여러 단체전에 초대되었고, 아트페어나 옥션에 등장하였다. 신항섭, 윤진섭, 박영택, 이병인, 윤양호, 고연수 등 유명 평론가나 작가의 글이 전시 도록에 곁들여진 것만 보아도, 그 위상변화가 짐작된다.

수장고 문 입구 쪽에는 근래의 대작들이 채곡채곡 쌓여 있었다. 이 글의 서두에 소개한, 군청색을 중심으로 선을 반복해 겹겹히 그으며 화면구성을 시도한 작품들이었다. 이들 <선(禪)> 작품은 2011년 싸인부터 보였다. 선승화가의 진면목이며, 동시에 법관의 마음이 충만한 회화는 후기 단색화로 규정짓게 했다. 그리고 법관 그림이 대중과 소통하는 인기도 얻었는데, 이렇게 많은 양이 보관되어 있어 놀랐다. 얘기를 들어보니, 김환기나 여타 화가의 그림과 유사하게 나온 것들을 오해 소지 탓에 세상에 내놓지 않은 것이라 한다. 수긍은 되었지만, 이들도 가까운 후일 어떻게 재평가될지 기대를 해본다.

또 최근의 단색조 대작들은 대웅전 아래 외쪽 벽돌 건물로 ‘문화공간 고암(古巖) 갤러리’에 진열되어 있기도 하다. 들어서니, 개인 미술관으로도 훌륭한 전시공간이었다. 붉은 화면 한 점, 검정 화면 한 점 외에는 모두 블루 색감 작품들이다.

이들 작업은 법관의 브랜드로 자리 잡게 했다. 국내에서는 2010년대 중반부터 개인전과 단체전, 아트 페어에 참여하며 적극적으로 작품들을 선보였다. 뉴욕 Able Fine Art, NY Gallery(2016년)를 비롯해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 해외에 진출하였다.

고암 갤러리 전시공간에는 법관이 좋아하는 도예가들의 작품들이 어울려 있었고, 문 오른쪽에 그늘진 목기와 조각품이 눈길을 끌었다. 조선 후기 목기로 중앙에 둥근 쇠장식 달린 수직 구성의 여닫이 장은 간결한 추상미가 돋보였다. 그 위에 놓인 테라코타 인물 흉상은 흙을 주물러 만든 얼굴 이미지의 손맛이 좋아 물으니, 법관이 조각한 거란다. 법관의 눈썰미와 손재간이 탁월함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도 6)

 법관은 재주 없음에 그저 즐겼을 뿐인데, 작가나 화가로 불리는 것이 영 짐스럽고 부담스럽다.”라고 만날 때마다 토로한다.

강렬한 불길처럼 지펴낸 지난 35년의 작업을 돌아보니, 우리시대 작가로 꼽아도 손색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구도자의 길에서 참선하다 만난 회화를 선(禪)과 동일시한 것뿐이라며 손사래 친다. 하다 보니 평생 숙제가 되었다고 한다. “시행착오 끝에 마음에 집중해 열정을 쏟았고, 온마음 들어내기에 최선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법관의 눈빛은 세차기 그지없다.

“내 생각을 담는 내 방식 찾기에 수많은 시간 할애해 최선을 다했고, 내 것 만들기 몰두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모르고 그리던 초심처럼 열정이 식지 않고, 머리 속을 비우며 천진한 마음을 익혀내는 좋은 그림이 나오고, 대중과 더불어 나누고 싶다고 피력한다.  

나는 무엇을 특별히 그리려 하지 않는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것들 어차피 정답도 없다 지금껏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 정의할 수 없는 무엇을 선과 점으로 찍고 긋고 겹치면서, 경계와 질서가 허물어진 자유로운 균형으로 모두의 마음속에 따뜻하고 평화로운 선의 세계가 전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법관의 메모에서)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6 – 우이9곡 재간정(在澗亭)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여섯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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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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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동쪽의 우이동계곡은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오른쪽부터 차례로)의 삼각산 형상을 뚜렷하게 관망할 최고의 장소로 꼽을 만하다. 화산(華山)이라는 별칭을 수긍케 한다. 예전에도 자주 이를 스케치해왔지만, 올 초부터 틈나는 대로 꾸준히 우이동(牛耳洞)을 찾았다. 그만큼 인수봉과 삼각산, 우이봉과 도봉산을 계속 그렸다. 여기에는 최근 장마에 젖은 흰 바위 인수봉을 강조한, <여름 장마에 우뚝한 삼각산> 그림을 소개한다. (도 1)

그리고 삼각산 만경대 중턱 도선사 아래 계곡으로는 조선 후기 이계 홍량호(耳溪 洪良浩, 1724~1802)가 은둔처로 삼으며 유명해진 우이9곡이 전개된다. 아호인 ‘이계(耳溪)’도 소귀 모양의 ‘우이(牛耳)’ 바위가 있는 ‘우이봉’에서 따온 것이다. 9곡의 시작이자 계곡 상류인 제1곡은 도선사 밑 만경폭(萬景瀑)이다.

만경대 중턱이어서 만경폭 위에 올라서면 수락산과 불암산 주변의 경치 구경이 좋다. ‘만개의 풍경’을 보는 듯하다. 폭포 암벽에는 “미륵폭동유(彌勒瀑同游)/조현명(趙顯命) 이주진(李周鎭)/병인중하(丙寅仲夏)”와 “추제(追題)/이은(李溵)/정유맹동(丁酉孟冬)”이라는 동일 서풍의 예서체 글씨가 두 곳에 나뉘어 새겨져 있다. 1746년 5월 이주진(1692~1749)이 소론의 좌장격인 좌의정 조현명(1690∼1752)과 여름을 즐겼던 모양이다.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1777년 10월 이주진의 아들 이은(李溵, 1722~1781)이 찾아와 병인년 일을 기념해 동일 서체로 새겨 놓았다. 이곳은 본래 덕수 이씨인 이주진-이은 부자의 소유였던 모양이다.

제1곡 만경폭(萬景瀑)부터 9곡 재간정(在澗亭)까지 우이계곡을 따라 내려오며 확인되는 명승지로 5곡 세묵지(洗墨池)과 8곡 명옥탄(鳴玉灘), 손상이 덜한 세 경치를 우선 스케치해 두었다. (도 2, 3, 4) 만경폭은 정비공사로 물길과 벼랑 아래 바위들이 원형을 잃은 편이지만, 세 문사의 이름이 새겨진 폭포 벼랑은 당차다. 현재 음식점에 가려 있으나, 세묵지는 먹을 씻는 장소로 시서화를 즐긴 풍류 터이다. 안쪽 너럭바위 계류에 들어서면 ‘옥경대(玉鏡臺)’라 일컬어질 정도로 물살과 풍치가 빼어나 여름 탁족 피서지로 꼽을 만하다. 명옥탄은 계곡의 크고 작은 바위들과 어울려 이름대로 물소리가 아름다운 곳이며, 좌우 노송과 어울린 풍치도 일품이다. 

강북구는 최근 우이9곡 복원을 시작했으며, 더불어 도선사 입구에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도 5) 덕수 이씨 집안의 터가 풍산(豊山) 홍씨 홍양호 집안에 양도된 경위를 포함하여, 조선 후기 문인 관료이자 실학자인 이계 홍량호의 별업(別業)이라는 장소였던 덕택에, 인물사와 문학사는 물론이려니와 조경구성 관점의 학술연구가 진행되었다. (이종묵, 「홍양호와 홍경모의 글로 남은 우이구곡의 기억」, 『인문과학연구』 16, 2011. : 정우진·노재현·이희영, 「북한산 이계구곡의 위치비정과 집경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5-3, 2017.) 이를 바탕으로 복원이 시도된 것 같고, 워낙 유흥지로 자리를 잡은 터라 쉽지 않은 듯하나 지금도 계곡 일부는 정비 중이다.

계곡 맨 아래 9곡 재간정 정자가 있던 곳에는 산악박물관을 짓다 중단한 콘크리트 건물이 방치돼 있으며, 현재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우이동 재간정, 정수영이 남한강 여정을 마치고 들른 첫 명소

지난 5회부터 8회까지 살펴보았던, 지우재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 남한강 유람 스케치를 마치고 들른 첫 여름명소가 바로 재간정이다. 이번 글과 그림은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여섯 번째에 해당한다.

2019년 8월부터 12월까지 조선 후기 문인화가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의 《한·임강명승도권》에서 남한강 여주지역 여정을 따라 실경그림의 현장을 5회에 걸쳐 찾아보았다. 첫 번째 여주 신륵사와 동대, 두 번째 휴류암(馬巖), 세 번째 흥원창과 수청탄 소청탄, 네 번째 고산서원, 다섯 번째 두멍암(笠巖)과 여주읍내 등이다. 1796년 여름에 그린 이들 실경화에 이어 정수영은 임진강을 따라 영평 포천 삭령 토산의 절경을 찾았고, 북한산과 도봉산 관악산 등지의 명찰과 명승을 담으며 《한·임강명승도권》를 완성했다. 그 여정 순서는 1796년 여름 우이계곡 재간정, 가을 영평 백운담과 사암서원, 금수정, 포천 화적연, 이듬해 1797년 봄 금천, 도봉산 망월암, 여름 도봉산 옥천암, 삭령 우화정, 토산 삼성대 낙화담 등이다.

금년에는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 가운데 남한강 이후 사생한 여정 찾기를 모두 마무리하려 계획했었다. 연초부터 우이계곡과 재간정이 있었을 법한 터에서 올해의 답사를 시작했는데, 마침 3월 이후 코로나 사태로 생각하지 않게 많은 시간을 얻었다. 시작 부분인 한강 변을 걸었고, 우이동 북한산, 포천, 도봉산, 관악산 자락 호암산 등 뒷부분의 행적을 두루 찾았다. 두루마리의 마지막인 삭령과 토산 북한지역의 유적을 제외하고는 《한·임강명승도권》의 전체 경치를 다 확인한 셈이다.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의 전반부인 한강 사생에 이어 후반부는 재간정(在澗亭)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 <재간정> 그림이 여름 경치이고, 다음 임진강 영평천 명승 그림들이 가을 풍치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지우재 정수영은 남한강 여정을 <여주읍치> 다음에 그린 <재간정>에서 마친 셈이다. 광나루에서 하선해 북한산 우이동 계곡으로 들어섰을 법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정수영이 현장 사생 능력이 부족한 탓에 그림으로 실경 위치를 확정하기 힘들지만, <재간정> 그림에서 원경 먹 선묘의 간소한 산 모양이 우이동에서 보이는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의 삼각산을 닮은 듯하다. 실경을 담은 포인트에서 파노라마 사진으로 잡아보니 그 위치도 얼추 맞아떨어진다. (도 6, 7)

중층의 재간정 뒤켠 주변의 바위들은 정수영 특유의 과장된 표현이다. 여름 소나무와 벽오동, 그리고 잡목들이 어울려 있다. 화면 오른쪽 위에 친구인 강관이 쓴 글이 보인다. “재간 임공은 우리 무리 가운데 최고 존앙을 받는다. 예전에는 이 같은 정자가 없었으니 편치 않고 개탄스럽다. 강관이 쓰다.(在澗 任公 吾儕中最尊仰 而曾無此亭 寧不慨歎 亻寬書)”라고 적었다.

‘재간 임공’이란 임희성(在澗 任希聖, 1712-1783)을 이른다. 임희성은 제발을 쓴 강관의 아버지 표암 강세황과 사돈 간이자 절친한 소북계 문사였다. 이에 강관은 서씨가나 홍씨가의 별서이자 재간정 풍경을 그림으로 대하니, 같은 아호를 쓰면서도 정자 없이 지내던 스승격인 임희성을 떠올리며 발문을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싶다. 정수영이 재간정을 들른 것은 ‘최고 존앙을 받는’ 스승의 흔적을 만나기 위함으로 여겨진다. 임희성이 세상을 떠난 10여 년 만에 그의 옛터를 찾은 셈이다. 

재간정(在澗亭)은 만경대 도선사에서 흘러내린 우이계곡 물과 우이령 고개 따라 인수봉에서 흘러내린 인수천 물길이 만나는 사이 공간, ‘재간(在澗)’에 세운 정자이다. 인수천은 연미천이라 부르기도 한 것 같다. 우이9곡의 맨 아래 남쪽 공간으로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 삼각산 세 봉우리, 그 오른편 우이령고개를 넘는 영봉, 소귀 형태 바위 우이암이 정상에 또렷힌 우이봉, 그 뒤로 오봉과 선인봉 능선의 도봉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다. (도 7, 8) 이 재간정이 들어섰던 장소를 정수영 그림을 토대로 추정해 고지도 방식으로 부감해 그려 보았다. (도 9) 

정자가 있던 이곳 주변은 두 물길이 만나며 너른 백사장이 어울려 있어 도성 문인 권세가의 사랑을 받았던 듯하다. 덕수 이씨가나 풍산 홍씨가, 임희성 외에 달성 서씨 세도 집안도 별장을 마련하였다.

홍양호나 홍경모의 우이9곡에 대한 글에는 본디 재간 서명균(在澗 徐命均, 1680~1745)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풍류터로 삼았다고 한다. (洪良浩 ,『耳溪集』卷13,「牛耳洞九曲記」; 洪敬謨, 『冠巖全書』 16冊 「耳溪九曲記」, ‘在澗亭’) 서명균은 영조 초기에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던 문사이고, 이 집안은 3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한 당대의 명문 세도가로 손꼽혔다. 서명균의 아버지 서종태(徐宗泰, 1652~1719)는 숙종 시절에, 아들인 서지수(徐志修, 1714~1768)는 영조 시절에 영의정을 역임했다. 홍양호의 손자 관암 홍경모(冠巖 洪敬謨, 1774~1851)는 「우이구곡기(耳溪九曲記)」에서 재간정을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여기서 수십 마장을 가면 양 기슭이 훤히 열리고, 물이 맑고 모래가 희다. 정자가 바위에 걸쳐 물을 누르고 있어, 재간정이라 이른다. 곧 3대에 걸쳐 재상을 지낸 서공(재간 서명균)의 옛 별서이다. 꽃과 나무가 늘어서니 소쇄한 게 깊고 그윽하다. 물이 여기서 꺾여 동쪽 드넓은 벌판으로 흘러간다. 이곳이 구곡의 마지막이다. 만경동에서 재간정까지 5리에 지나지 않지만, 기암과 층층 폭포가 걸음마다 출현하며 크게 오른다. 모두 함께 이름짓기를 구곡이라 하였다,

自此行數十弓 兩岸明豁 水淸沙白 有亭跨石壓流 名曰 在澗亭 卽三世相國徐公舊墅 花木分列 蕭灑幽靚 水於是折而東 浩浩然放于大野 是爲九曲之終也 盖自萬景之洞 至于在澗 廑爲五里 而奇巖層瀑 間步錯出 擧其大者 合而名之爲九曲 (洪敬謨, 『冠巖全書』 16冊 「耳溪九曲記」, ‘在澗亭’) 

이처럼 아름다운 풍광에 네모지붕의 한 정자가 20세기 전반경까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재간정으로 추정되는 사진으로 소개된 적이 있다. (도 10) (정우진·노재현·이희영, 「북한산 이계구곡의 위치 비정과 집경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5-3, 2017.) 옛 모습과 지금을 비교하면, 격세지감도 들고 난개발이 한심하기도 하다. 현재 이 공간에는 버스와 지하철 종점이 들어섰고, 도시화된 마을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앞에 언급했던 것처럼 상당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정도이다. 조선 후기 임씨나 서씨 집안, 이씨나 홍씨 집안과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 큰 세도가들이 이곳에 살러 올까?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5 – 홍성 용봉산과 월산, 이응노의 집 연못,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에서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5 – 홍성 용봉산과 월산, 이응노의 집 연못,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에서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5 – 홍성 용봉산과 월산, 이응노의 집 연못,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에서
08/05/2020
/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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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김종학의 회화세계”로 대중강연을 한 데 이어, 7월에는 충남 홍성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에서 올해 들어 첫 답사강의를 했다. 기념관이 마련한 ‘미술사가 이태호 교수와 함께하는 고암인문예술기행’이었다. 고암 이응노(顧庵 李應魯, 1904~1989)는 1958년 말 프랑스에 건너가 ‘르 프레 생 제르베’에 자리잡고, 1960~70년대 ‘문자추상’, 1980년대 통일무(統一舞)나 대규모 인물 ‘군상(群像)’ 연작으로 명성을 얻은 작가이다. 고암의 생가인 ‘이응노의 집’은 2011년 복원했으며,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이응노로61-7) 월산 기슭 용봉산을 바라보는 홍천마을에 위치한다.

홍성군민을 대상으로 30명씩 제한해 7월 4일과 7월 18일 두 차례에 걸쳐 기념관에서 고암 이응노의 회화세계를 강의한 뒤에, 예산 수덕사를 거쳐 추사고택까지 고암 이응노의 행적을 찾는 답사였다. 이 코스는 3년 전 한 신문사의 창간 70주년 행사로 진행을 맡은 적이 있었다. (정유미 기자, 「명사 70인과의 동행 63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와 홍성 이응노 생가」, 경향신문, 2017.10.28.) 아침 9시부터 진행되기에, 전날 홍성에 와서 기념관이 운영하는 한옥에서 묵었다. 다음날 새벽 5시부터 행사가 시작되는 9시까지 스케치북 한 권씩을 다 채웠다.

생가가 자리 잡은 월산(月山)과 생가 마루에서 북향으로 자리 잡은 용봉산(龍鳳山)을 그렸다. 홍성 읍내를 감싼 월산은 흰 달 뜨는 ‘백월산’이라 일컬으며, 나지막한 토산이다. (도 1) 북쪽의 용봉산은 월산과 대조를 이룬 바위산으로 홍성과 덕산 일대에서 우뚝한 소금강이고, 신라말 마애불이 조성되는 등 이 일대 사람들의 종교적 중심 역할을 해왔다. (도 2, 3) 기념관 아래 연못에는 마침 연꽃이 피는 계절이어서 연꽃과 잎 향내가 가득했다. 두 번째 답사 날은 너른 백련밭과 작은 홍련 못에 연꽃들이 만발해 장관을 이루었다. 이들에 취해 연꽃이 피고 지고 연밥이 영그는 모습들을 잔뜩 양껏 그렸다. (도 4, 5, 6)

코로나 사태로 금년 상반기에는 대중강연은 물론 단체답사가 거의 취소되었는데,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이 기획한 답사가 유일했다. 아침 9시부터 신나라 학예연구사가 생가와 기획전 “고암 이응노의 문자추상 : 말과 글, 뜻과 몸짓”(2020.6.16~10.4) 전시실을 안내했다. 이응노의 집 명예관장 김학량 교수의 총괄과 황찬연 학예연구사의 기획으로 이루어진, 이응노의 작품들과 이응노를 오마쥬한 백선기, 오윤석, 연기백, 이성민, 이완 등의 문자 구성을 보여주었다. 이어 10시부터 나는 “이응노의 삶과 회화세계”를 강의했다. (도 7)

그런데 아뿔사! 7월 4일 1차 행사 때 강의를 시작하려니, 가족과 함께 온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세 명이나 앉아 있었다. 다행히 화가, 작가, 제빵사 등의 꿈을 가졌다 해서 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강의하고 답사를 마쳤다. (도 8) 진땀을 빼면서도 10살 아래 아이들과 교감하며 설명하는 게 나쁘지 않았다. 2차 행사에는 중학생 한 명만 참여했고, 역사교사가 되고 싶다는 학생이어서 1차 때보다 한결 수월했다.

예산 수덕사 아래 계곡에 자리 잡은 수덕여관은 이응노가 해방 직후 살던 곳이다. 이른바 ‘동백림사건’으로 대전교도소에서 출소한 1969년 3월 7일부터 5월 23일 빠리로 떠나기 직전까지 두 달여 이곳에 머물며 한글 <수덕여관> 간판을 썼고, 여관 바깥마당 두 곳 너럭바위 측면에 암각 문자 추상화를 새겨 남겼다. (도 9, 10) 암각 새김은 한자의 전서체 같기도 하고 상형의 띠를 두른 형식으로, 이응노의 쉼 없는 작업 열망을 보여주는 유적인 셈이다.

이 암각화는 특히 이응노가 문자추상에 대한 소견을 밝힐 때면, “우리나라의 오래된 비석처럼 그 낡은 돌의 마띠에르, 돌에 새긴 문자 등 오랜 세월에 걸쳐 풍우를 견디어온 문자는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나는 그런 세계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문자에 관한 테크닉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이응노·박인경·富山妙子, 이원혜 역, 『이응노-서울·파리·도쿄:이응노·박인경·도미야마 다에코 3인 대담집』, 삼성미술문화재단, 1994.)라고 언급해온 것과 잘 부합하는 작품이다. 자신이 직접 오래된 비석처럼 새긴 것이어서 그렇다. 이응노가 1958년 말 프랑스로 건너간 뒤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문자추상 초기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 이응노의 문자추상은 추상적 ‘구성’으로 화면을 정돈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 이응노의 문자추상화는 어렵다. 한글과 한자, 주역의 64 궤 문자 등이 뒤섞여 그 내용이나 의미가 언뜻 해득되지 않는다. 언젠가 눈 밝은 이가 번역해낼까.

고려 건축 가운데 명품으로 꼽히는 맞배지붕의 수덕사 대웅전(1308년, 국보 제49호) 옆모습은 기하학적 추상화 닮은 공간미를 뽐낸다. 사원 경내 돌아보기를 마치고,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 ~ 1856)의 예산 신암면 용궁리 생가터를 방문했다. 고암 이응노가 사모하고 그 예술세계를 존숭하던 문인이자 예술가이다. 앞서 이응노가 언급했듯이, 이응노의 오랜 비석에 대한 취향은 김정희의 금석학(金石學) 고증학과 상통하며, 문자추상 역시 개성적인 추사체와도 맞닿아 있다. 이곳 묘소 아래 기념관에서는 마침 ‘추사고택에서 만나는 김정희’전이 마련되었고, 이한철이 1856년에 그린 <김정희 초상> 원본이 전시되었다. 고택 앞에 천연두를 앓은 추사를 닮은 점백이 주황색 참나리꽃들이 화사하게 펴있길래 몇 점 그려보았다. (도 11)

나는 고암 이응노의 화화에 대해 연구나 글을 각별하게 써본 적은 없다. 원고청탁에 의존해 글을 써오던 인생이다 보니, 주문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고암의 작품 가운데 프랑스로 나가기 전인 1950년대 인물화나 산수화에 각별한 관심을 피력하곤 했다. 동시기 선배인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의 전통계승에 비해, 고암 이응노의 인물화나 산수 풍경화는 풍속화적 소재 선택과 담대한 필묵 구사로 수묵화의 모던 스타일을 선명하게 구현했기 때문이다. (이태호, 『한국미술사의 라이벌, 감성과 오성 사이』, 세창출판사, 2014. ; 이태호, 『이야기 한국미술사』, 마로니에 북스, 2019.)
고암 이응노와 첫 인연은 1988년 말 당시 서소문동의 호암미술관 전시에서 갖게 되었던 듯하다. 인간 군상 연작을 중심으로 꾸며진 전시 관련 기사에서 “한 폭엔 평화, 마음엔 평화”라는 이응노의 전화 인터뷰가 기억에 남는다. (한겨레신문, 1988.12.21) 이 회고전을 다녀온 후, 1989년 1월 초 귀국 예정을 앞두고, 영면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때 나도 광주지역 신문에 갑작스런 타계를 애도하며 추모의 짧은 글을 썼다. (이태호, 「이응노의 예술세계와 민족현실」, 전남일보, 1989.1.3.)

2011년 이응노 생가 복원과 함께 조성룡 건축가의 설계로 기념관이 지어졌다. (도 12) 그때 홍성군수를 지낸 김석환 군수의 요청으로, 유홍준 교수 등과 기념관의 전시와 운영에 대해 자문하게 되었다. 나는 첫 명예관장을 맡았고, 기념관 개관 도록에 글을 썼다. 또 고암의 1950년대 수묵화 <한강 풍경>을 기증한 일도 있다.

이후 명지대학교 대학원에서 ‘고암 이응노 예술세계’로 박사학위를 받은 동덕여자대학교 김학량 교수에게 명예관장을 물려주고, 운영위원장으로 기념관 전시나 교육, 유물 구입과 관리 등을 자문해왔다. 2017년에는 윤후영 학예연구사 요청으로, 내 도서 일부를 기증해 작은 건물 ‘효은서실(曉垠書室)’이 기념관 경내에 들어서기도 했다. 기념관 개관 도록(『이응노의 집, 이야기』, 수류산방, 2011.)에 쓴 내 글을 아래에 소개해 본다.

 

 

미래로(美來路)의 아름다운 공간

 – 홍성 ‘이응노의 집’을 개관하며

 

‘이응노의 집’은 충남 홍성의 새 명소입니다.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 소재의 생가를 복원하고,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을 개관합니다. 용봉산을 당차게 마주한 월산 기슭, 솔밭이 멋들어진 언덕 아래 소담하고 호젓한 곳입니다. 생가의 주변 산 능선을 넘는 언덕길 따라 봄 진달래가 화사하고, 기념관 앞 연못에는 연꽃과 마름이 가득 여름을 맞이합니다. 주변의 황금색 들녘과 숲길에는 가을이 만화하고, 겨울에는 눈 소복이 내리는 곳입니다. 기암이 아름다워 제 2의 금강산이라 일컬어지는 눈 덮인 용봉산은 절경입니다. 이들 모두 고암의 예술에 녹아있는 풍광입니다.

이런 경치에 걸맞은, 정말 딱 맞춤인 기념관이 들어섰다고 생각합니다. 모던하여 참신한 건물입니다. 사면체 박스형을 잇거나 독립한 건물들이 낮은 구릉 지형과 그렇게 정겹고 편안하게 어울려 있습니다. 노출 콘크리트와 목재판을 붙인 각진 외모는 다소곳하며, 내부는 바깥풍경을 적극 끌어안는 구조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축가 조성룡 선생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입니다. 최근 한강의 선유도공원, 광주의 의재미술관 등을 설계한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입니다. 자연과 현대를 조화시킨, 고암이 추구했던 이미지를 떠올리며 디자인했다고 합니다. 지자체가 마련한 최고의 기념관 건축으로 인구에 회자될 거라 확신합니다.

고암 이응노는 홍성이 낳은 세계적인 화가입니다. 지난 20세기 중후반 벌써 한국인으로 파리에 머물며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니, 한국예술의 긍지입니다. 요즈음 얘기하는 한류(韓流) 문화의 원조 격입니다. 미술인으론 처음이자 아직도 그만큼 현지에서 명성을 얻은 작가를 찾기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또 쉬지 않고 작업해온 다작(多作)은 풍류쯤으로 인식해온 전통서화에 대한 개념을 크게 바꾼 새로운 작가정신이라고 생각됩니다. 평생의 작업량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아마 한국근현대미술사에 가장 우뚝할 것입니다.

고암의 예술세계는 다채롭습니다. 유럽으로 건너가기 전, 벌써 개성적인 구성과 필치로 현대적 기운의 묵죽도(墨竹圖)를 비롯하여 산수화, 인물풍속화, 동물화, 화조화 등 모든 회화영역을 넘나들었습니다. 아마도 고암이 유럽에 가지 않았다면, 한국현대미술사가 그에 의해 구태를 벗는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리라 가정해 볼 정도입니다.

프랑스에 정착한 이후, 고암은 유럽을 무대로 30여 년간 활동했습니다. 화실을 개방하여 유럽인들에게 수묵화를 가르쳤고, 한국의 전통적인 예술정신과 형식을 고수했습니다. 특히 한국인이 왜 불어를 배우냐며 작업에만 매진했다는 일화로 유명합니다. 이 같은 의식 아래, ‘율동과 기백의 한국 민족성’을 토대로 당대 서구의 회화사조를 소화하고 자기화했습니다. 1960~70년대에는 유럽의 추상주의와 만나 수묵추상화를 전개하거나 한자나 한글 꼴을 구성한 문자추상은 독자적 경지를 이룬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리고 군무(群舞)를 이은 1980년대의 인간 군상시리즈 작업은 조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감화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고암은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강점기, 전쟁, 분단, 독재정권으로 점철된 한국근현대사의 아픔과 갈등을 겪으며 고스란히 예술에 전념한 작가입니다. 1960년대 군사정권 시절에는 독일에서 활동한 음악가 윤이상 선생과 함께 동백림사건을 겪었고, 1970년대 백건우 · 윤정희 부부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습니다.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의 희생입니다.

고향 홍성이 고암을 이렇게 맞이합니다. 조국을 떠난 유목민적 예술가이고, 한 때 이른바 좌익사범으로 몰렸던 고암을 바르게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2007년에 건립된 대전의 이응노미술관에 이어 정말 반가운 일입니다. 최영, 성삼문, 홍가신, 김좌진, 한용운 등 홍성이 낳은 충의(忠義)의 선현들에 이어 홍성의 예술가를 새로이 현창하게 되어 더욱 그러합니다.

이응노의 집에 마련된 기념관은 미망인 박인경 여사, 고암의 손자 이종진 선생과 손녀 이경인 여사의 소장 유품과 작품들의 기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또 고암을 사랑하는 분들의 기증작품이 이어져 전시실을 알차게 만들게 되었습니다. 청관재의 박경임 여사, 가나아트센터 이호재 대표, 공화랑 공상구 대표, 노화랑 노승진 대표, 동산방화랑 박우홍 대표, 학고재 우찬규 대표, 현대화랑 도형태 대표 등이 기증에 적극 참여하셨습니다. 홍성에 소재한 청운대학교 이상열 총장, 홍성 출신 기업인 대륭건설 이환근 회장,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 개관준비 자문위원장 유홍준 교수 등이 좋은 작품을 건네주셨습니다. 우리 사회 기증문화의 진정한 모범을 보여주는 기념관 건립이라고 자부합니다.

홍성군도 기념관 건립 건축공사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기념관에 필요한 고암의 작품을 구입하여 보완하고, 윤후영 학예연구사를 채용하였습니다. 김석환 현 홍성군수의 열린 가슴과 담당 공무원들의 열정 덕택에 명실공히 공공미술관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공감하여 기념관의 운영방안과 전시 자문에 적극 참여한 홍익대학교 안상수 교수, 서울대학교 김민수 교수, 동덕여자대학교 김학량 교수, 김호석 화백 등의 노고가 곁들여져 있습니다. 이러저러한 미덕이 쌓여 이응노의 집이 완성된 것입니다.

기념관에 선보이는 유품들은 이응노의 삶과 예술의 체취를 진하게 전해줍니다. 젊은 시절 준수한 용모부터 노경의 해맑은 표정까지 고암의 인생이 묻어나는 옛 사진들이 특히 그러합니다. 도인의 품위를 전해주는 노인의 얼굴에는 고암 그림이 곧 고암 그 사람이고, 고암이 곧 고암 그림임을 잔잔하게 드러냅니다.

작품전시공간은 고암 이응노의 예술세계와 그 흐름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먼저 고암의 스승인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의 묵죽도를 포함하여 고암의 초기 대나무와 사군자 등 수학 시절 작품들이 선보입니다. 이어 분방한 필치로 변형시킨 묵죽도(墨竹圖)를 비롯하여 산수화, 동물화, 화조화, 풍속인물화 등 개성적인 수묵화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유럽에서 뿌리내린 신경향의 수묵추상화나 문자추상, 그리고 군상시리즈 등 고암의 걸작들이 함께합니다.

이응노의 집은 기념전시관으로서 역할과 더불어 고암을 기리며 고암을 쫒아 전통수묵화의 현대화를 시도하는 의미 있는 교육공간으로 거듭나도록 노력하렵니다. 교양강좌나 대중예술교육은 물론이려니와, 어린이 청소년 미술교육과 청년작가의 발굴에 앞장설 것입니다. 나아가 고암과 홍성을 전 국민에게 알리고 세계화할 기획전도 꾸며볼 예정입니다. 최근 우리 미술계의 중심이 서양화, 현대미술, 외국작가에 기우는 성향에 따라 전통수묵화가 너무도 소외되어 안타까운 게 현실입니다. 우리 전통회화의 부흥이 이응노의 집을 거점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너른 홍성 평야에 용봉산이 듬직하게 놓은 풍경 아래, 이응노의 집은 평이하면서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기념관 건축물이 격조 있게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고암이 태어난 정기를 호흡하며, 삶과 예술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터입니다. 여기에 고암의 집안사람들과 고암을 사랑하는 이들의 품위가 함께 녹아있어 더욱 빛이 납니다.

이응노의 집은 홍성이 크게 자랑할 만한 기념관입니다. 또 홍성군이 추구하는 ‘미래로(美來路)’ 에 정말 안성맞춤인 터전입니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미래를 여는 길’이라는 의미의 미래로(美來路)는 고암이 평생 추구한 예술이념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2011.11. 이태호李泰浩(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 명예관장,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4 – 부산 해운대 김종학 작업실과 부산시립미술관 김종학 회고전을 찾아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4 – 부산 해운대 김종학 작업실과 부산시립미술관 김종학 회고전을 찾아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4 – 부산 해운대 김종학 작업실과 부산시립미술관 김종학 회고전을 찾아
07/0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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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4일 부산에 다녀왔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김종학전(3월 6일~6월 21일)과 연계해 강의가 있었다. 80대 중반으로, 꽃 그림과 설악산 그림으로 유명한 원로 작가이다. 전시를 맡은 박진희 학예연구사와 새로 부임한 기혜경 관장의 강권으로 도록에 김종학 회화세계에 대해 글을 쓴 탓이다. 201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마련한 김종학 회고전 전시 도록에 작가론을 실은 게, 또 그 계기였다. (이태호, 「봄에는 봄을 그린다」, 『김종학 KIM CHONG HAK PETROSPECTIVE』, 국립현대미술관, 2011.) 이 논고의 부제였던 「김종학이 인사동과 설악동과 어울려낸 우리 색의 현란」을 제목으로 옛글 일부를 재활용하며 다듬고, 해운대 시대를 추가하여 부산시립미술관 김종학전 도록의 평문을 지난 1월 완성해 넘겼다. 코로나 사태가 이렇게 진행하리라 예상치 못하고 조금 일찍 원고를 넘겼다.

올해 들어 첫 대중강연인 데다, 거리 두기에 따라 제한한 청중들은 띄엄띄엄 배치된 터라 강의실 분위기가 좀 생소했다. 주제는 “설악과 인사동서 이룬 김종학의 회화예술, 새 미적 흥분으로 해운대 시대 열어”였다. (도 1) 내 강연요지는 도록의 글대로 ‘인사동에서 전통미에 취하다’ / ‘설악의 사계절, 가슴에 품다’ / ‘현란한 민족색, 생태 예술이 되다’ / ‘해운대에서, 미적 흥분 식지 않고‘로 진행했다. 특히 한국의 전통 색채미와 김종학의 회화세계와 연관성을 강조했고, 5년여 해운대에서 작업한 새로운 걸작에 대한 변화를 찾아보는 것이었다. 내 말을 마친 뒤, 청중들의 진지한 질문으로 이어져 강의실 열기는 끝날 때까지 대단했다.

질문 가운데 “김종학이 가장 많이 그린, 그리고 가장 인기 높은 ’꽃‘ 그림이 표징하는 게 무엇이냐?”가 인상에 남았다. 질문자는 부산화랑협회 기획이사이자 ‘갤러리 포름’을 운영하는 김경선 대표였다. 그 자리에서 답하기가 조금 궁색했다. “꽃들이 모두 작가 김종학의 분신 아니겠냐”고 답하고 정리했다. 강연을 마친 후 서울역에서 동행했던, 미술시장 연구자 서진수 강남대학교 교수와 인사차 김종학 작업실을 방문했다. 뵙자마자 김종학 브랜드인 ‘꽃의 표징’에 대한 질문을 올렸더니, 단박에 “그냥 그렸지, 뭐!”라고 하신다. 예상했던 대로다. 김종학 회화에 대한 화두(話頭)로 남겨둔다.

달맞이 언덕에서 만난 달들

김종학 화백을 해운대로 모신 것은 조현화랑(대표 조현)이다. 30여 년 경력으로 국내외 최고의 작가들을 유치해 기획전을 마련해온, 부산은 물론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굴지의 화랑이다. 내가 해운대 달맞이길 언덕, 조현화랑이 마련해준 김종학 작업실을 처음 방문한 때는 작년 12월 19일이었다. 3층 작업실은 남쪽 창으로 드는 겨울 햇볕이 따뜻했고, 해운대와 부산 앞바다가 한눈에 드는 달맞이 언덕 최고의 공간이었다. 솔밭 넘어 오후 해거름의 실루엣 해변풍경이 좋아, 지난번에 이어 다시 한번 스케치해두었다. (도 2) 이곳에서 보는 부산 바다 해넘이도 장관이다. 이번에는 여름 해가 길어지는 바람에 보지 못했지만, 작년 겨울 일몰을 찍고 그렸다. (도 3, 4)

달맞이 언덕에서 달뜨는 장면을 관람한 것은 원고를 마무리하던 2020년 1윌 8일이었다. 유진화랑 진정호 대표의 안내로 달맞이길 명소라는 ‘비비비당’에 들렀다. 까페에 들어서자 해변경치와 더불어 요즘 가장 주목받는 도예가 권대섭 작가의 백자대호와 달항아리가 눈에 들어 반가웠다. 조선백자의 아름다움과 전통형식을 재창조한, 2014년에 만든 대작들이다. (도 5) 유리창 밖으로 움직이며 변하는 달과 높이 45cm가량의 유백색 항아리가 실내에서 한 쌍으로 그렇게 어울렸다. 또 누가 보든지 말든지 항시 그 자리에 떠 있는, 달맞이길의 명품 둥근 달인 셈이다. 확인해보니 까페가 작가의 사돈댁이란다. 딸 권연아 씨는 나도 인사동 골동가게나 고미술전에서 가끔 만나 잘 아는 사이였고, 고미술에 눈이 밝기로 정평이 나 있다.

까페 창밖으로는 장산 끝자락이 바다에 내려앉아 있었다. 마침 떠오른 둥그스레한 달이 눈에 들었다. 음력을 확인해보니 보름 전날이었다. 보름달보다 해지기 전에 조금 일찍 뜨는, 파란 하늘의 흰 달이었다. (도 6) 달맞이길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해운대 앞바다 아침 해도 그렸다. (도 7) 장산 끝자락 청사포를 산책하다, 구름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 장관을 오랜만에 본 것 같다.

해운대 시대 생동하는 김종학의 대작들

이번 ‘김종학전’은 부산시립미술관이 한국현대미술작가를 조명하는 세 번째 전시이다. 회고전 수준으로 작가가 60여 년 활동한 전시기 작품세계와 아카이브로 채워져 있었다. 2011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보다 낫다는 평으로 이어졌다. 전시장 마지막인 제5부 ‘기운생동으로’에 최근 2019~2020년의 해운대 시대 대작들이 펼쳐져 있었다. 모두 캔버스에 아크릴맄 물감 그림이다.

작업실에서 보았던 꽃그림 <Pandemonium>(10x6m)은 십 미터 길이여서 바닥으로 늘어뜨려 진열했을 정도이다. 그 좌우에도 2020년 설경그림 <겨울>(200x780cm)과 2019년 작으로 녹색 주조의 여름 <풍경>(260x800cm), 두 점을 배치했다. (도 8) 뒤편에는 2020년 신작으로 <바다>(300x800cm)를 걸었다. (도 9) 수평선에 불을 켠 배들이 늘어선, 해운대의 밤바다를 연상시킨다. 김종학의 화려한 색채와 복잡한 구성과 달리, 이같이 간결한 단색조도 곧잘 해오신 작품 경향이다. 설악산 시절을 계승한 이들 대작에는 노대가의 의욕이 넘쳐 난다.

2020년의 신작 <폭포>(162x114cm)가 이번 회고전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가운데 세찬 폭포 물줄기 앞 가느다란 잔가지에 앉은 새 한 마리를 담은 그림이다. (도 10) 폭포는 세번 가량의 붓질로 마무리한 후에 캔버스를 뒤집어, 흰 물감 덩어리진 부분이 아래에 놓이게 세웠다. 아래로 포말이 형성된 것처럼 설정한 셈이다. 폭포 앞 상단에는 무섭게 직하하는 물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표정한 새 한 마리가 배치되어 있다. 솔부엉이나 황조롱이 같은 어린 매를 닮은 듯하다. 순간에 떠오른 감정을 쏟아낸, 김종학 초기의 추상표현주의 풍의 붓 맛을 살리며, 구상 이미지를 매칭한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강의 시간에 새는 화가로 평생을 산 김종학 자신일 거라고 얘기하니 수강생들이 모두 웃으며 공감했다. 이들 모두 내가 도록의 글을 쓰고 난 뒤 마무리하신 작품이어서, 간소하나마 여기에 소개해보았다.

다음은 김종학전 도록의 내 논고이다. (이태호, 「김종학이 인사동과 설악동과 어우려낸 우리색의 현란」, 『김종학』-한국현대미술작가 조명 lll, 부산시립미술관, 2020.3.) 

 

 

김종학金宗學이 인사동仁寺洞과 설악동雪岳洞과 어우려낸 우리 색의 현란絢爛

이태호李泰浩 (서울산수연구소장/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김종학金宗學(1937~ )은 현재 우리 화단에서 설악산 풍경과 꽃그림으로 유명해진 작가이다. 이 시대의 대표 화가로 꼽을 정도로 예술세계를 단단히 일구고 미술사적 위치를 확고히 다진 원로이다. 지난 50여 년간 그려낸 드로잉, 판화, 수채화, 수묵화, 유화 등으로 소화한 다채로운 소재의 작품들을 보면, 그 예술세계가 그리 녹록하지 않다. 먼저 한국의 피카소라 일컬어지기에 손색없이 작업량이 엄청나다. 적어도 현재까진 한국미술사를 통틀어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로 기억될 법하다.

청년기엔 추상표현주의를 탐닉하며 서양미술과 시대사조를 따르기도 했다. 동시에 전통미에 일찍 눈을 떴고, 설악동에 정착한 이후 설악을 중심으로 우리의 자연과 교접交接했다. 이런 가운데 김종학은 설악산의 자연과 인사동의 고미술을 자신의 성정性情으로 버무려 민족 고유색의 현란함을 펼쳐 놓았다. 김종학의 회화세계는 그처럼 한국의 자연과 전통미가 만든 셈이다. 이를 대하노라면 새삼 자연이든 문화유산이든, 우리 것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다시 돌아보게 할 정도이다. 

인사동에서 전통미에 취하다

김종학의 회화예술은 미술계의 평가대로 조선의 전통미에 기반을 둔다. 고미술 수집은 경제력과 자신의 기호대로 목물류와 자수나 보자기 같은 생활 민속품에 집중되었다. 아래와 같이 수집의 변을 풀어놓은 적이 있다.

설악산에서 가끔 서울에 나올 때면 나의 유일한 소일거리가 골동상을 둘러보는 시간이다. 비싼 것 싼 것 가리지 않고, 내 마음에 드는 것을 멋대로 사다가 집에 그냥 쌓아 놓는다. 목기도 있고 민속품도 있고 도자기도 있고 잡동사니도 있다. 가짜를 사기도 하지만 간간이 현대적인 것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 우리 목기의 매력은 무엇보다 그 비례감에 있다 하겠다. … 목기 수집이 내 작업에 준 영향이라면 조형적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는 점이다. … 보자기의 색감과 비례감이 보여주는 현대감각에 감격했다. 몬드리안보다 훨씬 이전에 그렇게 기하학적이고 그렇게 창조적인 물건을 우리 조상들이 만들었음에 감탄했던 것이다. … 반면 우리 것은 자기 재주대로, 그저 멋대로, 바느질이 가는 대로, 마음가는 대로 만든 것이다. … 멋대로 놓아서 오히려 현대적인 것이 되고 만 것이 내 마음에 든다. … 골동만 사려고 골동가게를 출입하는 것은 아니다. 가게 주인과도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내 취향이다. 지식인하고 대화하는 것보다 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가 훨씬 마음 편하다. …

김종학의 고미술품 수집은 약관 20대 후반부터 고 홍성하洪性夏(1898~1978) 선생에게 배웠다고 한다. 초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조선시대 회화 컬렉션으로 유명했던 수집가이다. 안목을 키우는데 최고의 교사를 만난 셈이다. 우리의 옛 문화유산에 남다른 심취와 이해는 강원대학교 교수 시절 한국미술사를 강의할 수준이었다.

목기류에 대하여는 벌써 30-40대에 상당한 걸작들을 골라내는 실력이었다. 1987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소장품들이 특별전으로 꾸며질 정도였다. 지금도 별도의 ‘김종학실’이 마련되어 있다. 간결하고 세련미 넘치는 사방탁자, 서안, 문갑, 연상 등 선비문인의 사랑방 꾸밈가구들이 특히 조선 목공예의 예술미를 한껏 자랑한다. 개다리소반과 찬탁, 의걸이장이나 약장 같은 생활가구도 나무무늬와 비례감이 시원한 눈맛의 명품들이다.

현대적인 심플한 덩치의 목물이나 석물류부터 촘촘한 무늬와 화사한 색상의 자수나 보자기, 의상, 배겟니 등 여성 생활품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모았다. 그 가운데 염직 공예품류는 민화들과 함께 김종학의 현란한 꽃그림을 발전시키는데 영감을 주었다. 분방한 변형미와 화려한 색채미가 그러하였다. 조선 후기 문인석이나 돌부처 같은 석물류들, 그리고 목동자 조각상 등은 김종학의 인물화와 무관하지 않다. 다양한 남녀노소의 얼굴그림을 보면, 1980년대 민주화의 파고 속 한국인이 지녔던 무표정을 떠오르게 한다. 재혼할 때는, 소장하던 조선후기 민불형民佛形 돌부처 닮은 부인을 맞이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고서화 수집품도 김종학의 안목을 여실히 보여준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의 〈산해숭심山海崇深〉이나 〈죽로지실竹爐之室〉이라는 현판과 서첩을 모았다. 조선시대 최고의 붓 맛을 지닌, 개성이 강한 추사체를 지고의 스승으로 삼는다. 미수 허목眉叟 許穆(1595~1682),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1705~1777) 등 개성미가 뚜렷한 글씨들의 수집품도 눈길을 끈다.

조선시대 그림 수집도 상당하다. 능호관 이인상凌壺觀 李麟祥(1710~1760)의 〈묵란도墨蘭圖〉는 간일한 문인화격을,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1745~1806?)의 〈파도와 물새〉나 북산 김수철北山 金秀哲(19세기)의 〈묵국도墨菊圖〉등은 풀어진 수묵의 농담이 작은 화면과 어울려 맛깔스럽다. 조선시대 수묵화의 선미禪味를 한껏 담은, 농익은 명작들을 모았다. 추사나 우암의 서예작품은 빠른 붓 길과 기세가 넘치며, 반면에 수묵화 수집품은 섬세하고 아련한 그림이다. 이들을 따라 김종학은 겸재 정선謙齋 鄭敾(1676~1759)의 진경산수화법을 익혀 수묵 스케치를 즐겼고, 조선 문인이 추구한 맛도 자기화시키려 애썼다. 설악산의 폭포나 겨울 그림에 조선 수묵화풍의 구성미와 필묵筆墨 감각이 잘 살아 있다.

조선朝鮮의 아름다움을 사랑한 김종학의 눈은 고미술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미 1970-80년대에 이중섭李仲燮(1916~1956)의 대표작 〈빨간 소〉, 〈까마귀〉, 닭그림 〈부부〉 등을 수집한 적이 있었다. 우리 근현대미술에서 이중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김종학의 예술적 성향과 함께한다. 예술성과 미적 형상을 채는 눈썰미는 누구도 쉽게 따르기 힘들 게다. 숱하게 골동가게를 뒤지고 다닌 발품이 큰 역할을 했겠지만, 아름다움을 고르는 직관력이 타고나지 않았나 싶다. 그 특별한 안목은 ‘김종학’의 꾸밈없는 심성과 기질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김종학의 컬렉션은 이처럼 폭이 넓고 다채롭다. 고미술을 사랑하는 취향과 놀라운 수집벽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한때는 목기류나 민예품을 살 욕심에 전력을 다해 작업에 매진할 정도였다고 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조선시대 목기류는 김종학의 안목을 높였다. 자수나 민예품들은 김종학 회화의 색감과 모티브를 제공해주었다. 석불이나 목동자, 문인석에 새겨진 얼굴형의 김종학표 인물화도 빼놓을 수 없다.

김종학은 우리의 옛 문화에 동화되면서 그 전통형식을 토대로 작품세계의 개성미를 연출했고, 현대화해내었다. 김종학은 자기 회화를 “서양현대미술을 공부한 것에 전통미를 ‘컨닝구’해 ‘비빔밥’을 만든 거지”라고 즐겨 말한다.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알고 창조한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나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모범적인 실천사례로 꼽을 수 있겠다.

설악의 사계절, 가슴에 품다

1979년 여름, 속초의 설악산 입구 개울가 너른 솔밭에 작업할 터를 잡았다. 42세 때, 친형의 도움으로 설악산과 인연을 맺었다. 설악산은 북쪽의 금강산과 쌍벽을 이룬, 암봉岩峯과 계곡이 아름다운 영동嶺東의 명산이다. 금강산의 미모 탓에 그 뒷켠으로 밀려 있지만, 실제로는 금강산보다 봉우리가 높고 계곡이 우람하다. 금강산의 아기자기함에 비해 원시성과 야성미를 간직한 곳이다. 설악산과 더불어 김종학의 회화예술이 이룩된 사실을 염두에 두면, 설악과 김종학의 만남은 필연인 것 같다. 명승名勝이 명인名人을 끌어당긴 걸까.

줄기차게 끊임없이 그려온 김종학의 설악산 풍경 그림들은 자연물의 형태를 담았기에 구상회화具象繪畵에 속한다. 그렇다고 대상을 앞에 놓고 사생하는, ‘눈으로 그리는 그림’은 아니다. 생각하는 형상들을 기억에서 끄집어내는, 동양화론으로 치자면 옛 문인들의 ‘마음 그림’ 사의화寫意畵 쯤 되겠다.

김종학은 대상을 단순히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실내에서의 캔버스 작업은 스케치에 의존하지 않고 머리에 기억된 형상을 체화體化해내는 일이다. 옛 문인화론에서 ‘가슴 속의 대나무를 그린다’는 소동파蘇東坡의 ‘흉중성죽胸中成竹’에 해당된다. 또 캔버스에 기억된 형상을 펼칠 때는 빠른 직감에 의존한다. 팽팽한 긴장 상태에서 벼락같이 즉흥을 쏟는다. 몸으로 그린 그림이랄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화면에 연출한 대상들은 꽃이면 꽃, 나무면 나무, 산이면 산 등 형형색색의 특징을 적절히 드러낸다. 구상화이면서도 단순화한 형태감에는 추상성이 담겨 있다. 그렇다고 추상회화의 화법처럼 주관에 따라 재구성하는 의도는 드러내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감성의 흐름을 따른다.

김종학은 마음, 곧 머리에서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구상하여 그려왔다. 서양의 표현주의 예술론이나 동양의 서화론書畫論과 근사한 편이다. 또 그의 화면은 얼핏 무질서한 것 같으면서 전면을 꽉 채우든지, 여백 부분이 생기든지, 사선으로 배치하든지 나름대로 질서를 보인다. 비워지거나 채워지면 될 뿐 꾸밈새가 의도적이지 않다. 화폭의 공간구성부터 즉흥적 직관에 의지한 탓이다.

그렇다고 김종학이 스케치를 소홀히 한 것도 아니다. 늘 설악의 주변 자연을 머리에 담는데 그치지 않고 부지런히 사생하며 눈에 익혀 왔다. “스케치를 다시 캔버스에 옮기면 그림이 째째해져, 스케치는 스케치로 그쳐야지…”라며 꺼내놓는 연필, 수채나 수묵의 사생화들이 상당하다. ‘과연 김종학 회화의 예술적 포스가 여기에서 나오는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붓끝에서 분출되는 과감한 생략과 변화의 분방한 형상성을 수긍케 해주기 때문이다. 이들 스케치만으로도 김종학을 재평가하게 될 것 같다. 

화면구성과 형상미와 더불어 김종학 회화는 필치나 색감에 그 개성미가 뚜렷하다. 유화보다 빠르게 건조하는 수성 아크릴 물감Acrylic color을 선호한다. 붓질은 속도감나고 대담하다. 눈으로 익힌 대상을 가슴에 삭힌 대로 ‘벼락’ 같이 그린 형상들이 꿈틀댄다. 자연히 감정의 기복을 따라 즉흥적 필세筆勢와 어울린 색채감각 또한 급한 편이다. 물감과 물감, 물감과 기름이나 물을 섞을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물감 튜브를 직접 짜 캔버스에 바르기도 한다. 원색조의 화면이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붓과 색은 그렇게 격정의 몸짓으로 미적 흥분을 내지르게 하였다. 질료감의 니글거리는 움직임을 보면 육감적이다. 김종학의 화면에는 가슴으로 그린 색상의 리듬감이 생생하다.

 

현란한 민족색, 생태 예술이 되다 

김종학은 분명 우리시대의 빼어난 채색화가이다. 구상계열의 채색화가로 치자면 김환기 · 이대원 · 천경자에 이어, 김종학이 자기 독창성을 가장 선명히 부각시켰다. 현란한 색감과 색채배합에 김종학 회화예술의 개성미가 넘친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 갈색 등 짙고 안정된 원색조의 색채 활용은 물론이려니와, 특히 여름 그림에서 초록색을 바탕으로 삼은 빨간색의 보색대비가 눈길을 끈다. 이런 색채의 배열과 대비는 한국회화사에서 눈에 익은 전통색감과 유사하다. 웅혼한 고구려 고분벽화부터 섬려한 고려 불화, 조선시대 불화와 단청장식, 조선 후기 궁중화나 민화, 김종학 컬렉션에 포함된 자수나 섬유류의 민속공예에 이르기까지 1600년 이상 지속해온 민족적 색채감각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화려한 색채 정서를 즐긴 한韓 민족의 후예라 할 수 있다. 최근 김종학 채색화의 대중적 인기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어필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런 민족 고유의 색채정서를 현대에 재창조하고 발현發現해 놓았다는 점만으로도, 김종학의 회화가 우리시대에 남긴 커다란 업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김종학의 예술을 가능케 한 대상은 무엇보다 설악의 자연풍광이다. 산과 강과 바다, 그 대지에 자랐다 스러지는 숲과 꽃과 풀섶, 여기에 공생하는 나비와 새와 풀벌레, 이들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김종학을 김종학답게 만들었다. ‘설악은 봄 할미꽃 피는 광경을 보고 자살까지 생각했던 마음을 고쳐먹었다’라고 했듯이, 설악은 김종학의 인생에 대한 절망감과 모더니즘에 대한 회의를 한꺼번에 해소해 주었다.

설악산의 사계 순환은 분명 김종학에게 치유의 공간이 되었으니, 설악의 자연을 일군 김종학의 회화는 생태生態 예술이라 할 만하다. 생운生韻이 넘치는 순수 자연인, 김종학의 붓질과 색감이 내뿜는 에너지는 자연미自然美의 근사치이다. 그것만으로도 생태적 회화예술의 조건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생각된다. 김종학이 재창조한 민족색의 현란絢爛은 요즈음의 친환경 의식과 어울린 셈이다. 이는 인간의 원초적 자연성을 잃은 채 오염된 환경의 현대 대중들에게 김종학의 회화가 주는 메시지의 하나일 법하다. 김종학 회화가 인기 있는 이유도 그런 점에 있지 않을까. 아무튼 김종학의 설악풍경은 우리나라의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연이 예술을 창조하는데 얼마나 큰 진원震源인지를 알려준다.

‘색채의 폭풍과도 같은 미적 흥분’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김종학의 화면은 숨이 막힌다. … 자연 및 우주의 거대한 울림은 뜨거운 에너지로 화면에 폭발한다. 화면에 다가가면서 숨막히는 이유는 너무나도 생경한 자연 또는 우주의 기운에 부딪히기 때문이다.”라고 상찬하는 평론가도 있다. 이경성과 오광수에 이어 전람회 때마다 최석태, 유준상, 유재길, 윤우학, 김복기, 고동연, 김애령, 그리고 김종학을 녹취하며 작가론을 가장 많이 쓴 김형국 등의 평론들이 자자하다. 이들 모두 김종학이 한국현대화단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실감케 한다.

크고 작은 전람회를 통해 김종학은 그처럼 호의적 평가를 받았다. 원화랑, 선화랑, 박여숙화랑, 예화랑, 갤러리 현대, 가나아트센터 등에서의 개인전은 성황을 이루면서 늘 주목을 받아 왔다. 특히 2004년의 갤러리 현대와 2006년의 가나아트센터 개인전은 대작을 중심으로 김종학 예술의 피크를 보여주었다. 그런 만큼 좋은 작품이 쏟아졌고, 한때 투자가치 일순위로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또 분명한 점은 김종학이 우리시대를 대표할 거장巨匠으로서, 인간적 예술적 풍격風格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현대의 문명인들에게 그의 회화예술이 ‘김종학’의 속내처럼 자연과 인간의 생래적生來的 진면목을 일깨워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하듯이 김종학의 작품세계는 미래의 현대인들까지 허브로 그 가치가 계속 빛날 거라 확신해본다. 이런 양상은 2011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회고전으로 김종학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운대에서, ‘미적 흥분식지 않고 

설악산인雪嶽山人 김종학이 최근 부산으로 터를 옮겼다. 해운대인海雲臺人이 되었다. 한반도의 가장 서북쪽 항구도시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이 가장 남동쪽 부산 바닷가로 내려왔으니, 끝에서 끝으로 대각선 이동이 이루어졌다. 2015년부터 조현화랑이 내주었다는 작업실은 해운대와 광안리 바다를 굽어보는 달맞이길 언덕에 지은, 창 너른 공간이다.

2019년 말 12월 19일 작업실에 들어서니, 펼쳐진 대작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천진한 기운과 현란을 내뿜고 있었다. 반가웠다. 2011년 설악동 작업실 방문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기염을 토하고 계셨다. 80세를 훌쩍 넘어섰지만, 아직도 온몸의 격정으로 ‘미적 흥분’이 식지 않으신 듯하였다. 벽면과 바닥에 캔버스를 펼쳐 놓고 화면을 길게 쓰는 작업도 그러려니와, 소품들을 비롯해 쓰고 남은 물감을 짓이겨 그린 면 가방이나 티셔쓰가 화실 구석 한켠에 수북한 것을 보고는 질렸다. 붓그림 작업 틈 시간에는 닥종이로 학이며 오리며 입체조각들을 주무르고 계셨다. 그야말로 손을 쉬지 않는 모양이다. “여긴 공기가 따뜻해서 좋네! 요즘 꽃이나 오브제들이 더 크게 보이구!” 두 마디 외에 만남 내내 침묵으로 여전하셨다.

2011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이후 근 10년 동안 작업과 국내외 활동을 훑어보니, 종횡무진이다. 꽃, 나무, 풀, 새, 나비, 벌레들이 가득한 작품들은 격정의 몸짓이 쏟아낸, 다채로운 형태와 색채가 세찬 파장으로 넘실댄다.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대지의 향연답다. 마치 불교의 화엄華嚴 세계를 연상시킨다.

‘대상이 크게 보인다’니, 그만큼 자연과의 교감이 자연스러워지며 회화적 밀도가 높아진 듯하다. 같은 시기의 설경을 비롯한 단일 색조의 산이나 바다 풍경화들은 옛 유교 문인들의 격조, 곧 마음을 쏟은 남종산수南宗山水의 사의寫意에 더욱 근사해졌다. 화사한 꽃그림과 대조를 이루며, 양쪽을 넘나드는 호흡도 활기차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작업을 쌓을지, 혹은 어떤 변화로 새로운 신화를 창출할지, 작업실을 둘러보며 나로서는 김종학이 가늠되지 않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요즈음 십 미터가 넘는 캔버스를 채우고 삼백 호나 오백 호 대작들을 불쑥불쑥 소화해내는 붓질 동세를 보면, 그야말로 노익장이라 할 만하다. 요즘 말로 딱! ‘슈퍼 에이지’인 셈이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3 – 오월 무등산을 그리다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3 – 오월 무등산을 그리다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3 – 오월 무등산을 그리다
06/01/2020
/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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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균의 <하늘과 땅 사이 5>를 통해 광주민중항쟁 40주년을 돌아보고

금년은 광주민중항쟁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광주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광주항쟁을 기념하는 크고 작은 전시행사가 줄줄이 열렸다. 그중에서 광주광역시 동구 장동에 위치한 ‘예술공간 집’에서 5월 7일부터 24일까지 열린 전시, “강연균의 <하늘과 땅 사이 5>”가 여느 기획전보다 가장 눈길을 끌었다. 리플렛에 짧은 글을 써준 인연으로, 이 전시를 보러 5월 6일 광주를 내려갔다. 지난번 이이남 작가 탐방 이후 한 달 만에 다시 찾았다.

초여름 신록의 무등산을 여러 점 그렸다. 마침 광주를 방문한 5월 6일은 음력 4월 14일이었다. 망월동에서 무등산 서석대와 입석대 능선 사이로 저녁 무렵 뜨는, 보름달 근사치의 둥근달 그림 <무등산에 달 뜨고>를 맨 먼저 그렸다. (도 1) 그야말로 달을 바라보기 좋은 동네, 망월동(望月洞)이라는 지명과 위치를 실감하였다. (도 2)

강연균의 오월 그림들

강연균 화백은 남도의 땅과 사람들의 생동하는 현실감을 담아온 수채화가로 유명하로다. (이태호, 「남도의 빛, 그 땅의 사람들」, 󰡔강연균󰡕, 삼성출판사, 1993.) 동시에 1980년 오월 광주민중항쟁 직후 첫 오월그림을 그린 작가로 꼽힌다. 당시를 형상화한 대표작 <하늘과 땅 사이 1>(1980-81, 과슈, 194x259cm)는 금남로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만행으로 처참히 죽어갔던 광주시민을 상징한 작품이다. 현장을 목격하고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하늘과 땅 사이’ 그같이 벌어진 시대적 절망감을 굵은 먹선과 과슈로 200호의 대작에 담았다. (도 3)

때 강연균 화실은 학살과 항쟁의 중심인 금남로에 있었다. 현장을 본 직후 얼마간 붓을 들어 사실적으로 그리려 시도했다. 시민군이나 열사들의 주검을 모델링하기도 했으나, 사실 묘사로는 그 5월 현장의 엄청난 충격을 소화할 수 없었다. 체험 당시의 울렁거림이 너무 컸기에 차분히 사실성을 구현하기 쉽지 않았을 터이다. 굵고 검은 선묘와 강렬한 표정의 인물들 묘사로, 피카소의 <게르니카>(1934)처럼 입체파 화풍으로 재구성했다. 광주의 ‘게르니카’라고 불릴 정도이다.

이 작품 이후 강연균 화백은 1984년에 발가벗은 시신들 위로 분노의 남자와 슬픈 남녀들을 설정한 과슈 그림 <하늘과 땅 사이 2>를 완성했다. 1990년에는 해골 위 누드 여인이 정면으로 앉아 있고, 그 뒤로 신격화된 인간을 배치한 <하늘과 땅 사이 3>을 수채화로 그렸다. 1995년의 <하늘과 땅 사이 4>는 별격으로, 망월묘역과 길가에 1200장의 만장을 세운 설치미술이었다. 첫 회 광주비엔날레의 안티비엔날레로 조직한 ‘광주통일미술제’에서 강연균이 기획한 야외작업이었다. 망월묘지 4㎞의 가을 코스모스길에 설치한 장승과 솟대, 상여 그리고 1200여 만장이 휘날린 미술제의 최대 이벤트였다. 만장에는 200여 인사들이 5월의 뜻을 기리는 글과 그림으로 동참하였다.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 『광주통일미술제』 전시도록, 1995.) 강연균 화백은 한국민예총 4, 5대 공동의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이들과 달리 이번 전시에 선보인 <하늘과 땅 사이 5>는 작년 말에 40년을 삭힌, 1980년 5월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 내 목탄화로 작업한 7점이다. 이들은 드로잉 솜씨가 탁월한, 손맛이 유별난 화가임을 다시 실감케 한다. 전시 리플렛에 쓴 짧은 내 글이 강연균 화백의 작품들과 함께 『전라도닷컴』이라는 잡지에 두 쪽으로 실려 있어 소개한다. (도 4-1, 4-2)

40년 전 광주에 내려와 23년 살아

5월 6일 케이티엑스를 타고 송정역에 내리자마자 망월동으로 향했다. 광주 민예총 의장을 지낸 수묵화가 허달용이 픽업해주어 오월 영령들이 모셔진 국립518민주묘소를 먼저 들렀다. 묘소 근처에 처처히 핀 노란 꽃과 하얀 꽃씨들의 <망월동 민들레> 그렸다. (도 5) 그리고 제1 묘역 언덕에서 달이 뜨는 무등산과 해가 지는 담양 병풍산을 스케치북에 담아 보기도 했다.

5월 13~14일 광주에 또 다녀왔다. 40주년을 맞아서 당시 기록물들 전시와 기념전들을 관람하기 위해 일주일 만에 광주를 찾았고, 일박 이일로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14일 새벽 금남로와 옛 도청 앞 분수대가 있는 민주광장을 들렀다. 마침 떠오르는 일출을 만났다. 광장에서 볼 때, 여름 해는 무등산 왼편인 북동쪽 향로봉 쪽에서 하얗게 떠올랐다. <광주 민주광장 분수대의 일출과 무등산>을 스케치했다. (도 6)

돌아보니, 내가 광주에 살러 온 것도 40년 전이었고, 23년을 살았다. 나는 1980년 7월 1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로 발령을 받고 광주에 내려왔다. 오월항쟁 한 달이 지난 그 현장의 처절한 모습과 매캐한 냄새, 충격에 놀란 사람들을 만났었다. 이를 새삼 확인한 것은 광화문 광장에 있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의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특별전’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2020. 5. 13~10. 31) 전시실에서였다. 누렇게 바랜 전남매일신문(현 광주일보의 전신) 1980년 6월 2일 1면이 단박에 눈에 들었다. (도 7) 항쟁이 진압된 후 처음 재발간된 신문이다. “광주사태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흰 고딕 글씨의 검은 띠와 “한국 민주정부로 신속 진전 희망”한다는 미국 카터 대통령의 발언, 그리고 아직도 미해결의 광주 문제 주역인 “전두환 중정부장서리 사퇴” “비상대책위원장 임명 계기”라는 등의 기사들이 지면을 채웠다.

이들 기사 위로 ‘아아, 광주여’라는 타이틀 아래,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로 시작하는 시가 보인다. 광주의 참상을 처음 알린 유명한 오월시이다. 신문이 나오기 전 편집본도 함께 소개되었는데,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 십자가여’라는 타이틀에서 뒷부분이 빠졌고, 시는 빨간펜으로 난도질당해 반으로 줄어 발행되었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2020.) 

시의 제목은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이다. 제1절 “아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죽음과 죽음 사이에/피 눈물을 흘리는/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우리들의 아들은/어디에서 죽어서 어디에 파묻혔나/우리들의 귀여운 딸은/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하느님도 새떼들도/떠나가 버린 광주여/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아 아, 통곡뿐인 남도의/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를 보면, 역시 그 학살의 분노와 통한이 가득한 시인의 심장박동을 엿보게 한다. 한편 앞에 소개한 강연균 화백의 1980~81년 작 <하늘과 땅 사이 1>와 유사한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

김준태의 시 위에는 흐릿한 흑백사진 무등산 전경이 화면을 채웠다. 천왕봉 능선 아래 중봉이 전면에 등장하고 왼쪽 구석에 조선대학교 흰 건물이 보이는 점으로 보아, 양림동이나 양동에서 찍은 듯하다. 40년 전 금남로와 충장로에 고층빌딩이나 아파트가 거의 보이지 않고, 무등산 전면을 훤히 드러낸 경치가 새롭게 다가왔다. 이 사진을 보며, <40년 전 무등산>을 그렸다. (도 8)

국립공원 무등산은 광주를 품은 웅대하고 커담한 토산이면서, 후덕한 덕산의 이미지이다. 해발 1,187 미터의 정상 천왕봉 근처에는 화산암으로 원기둥의 주상절리의 바위들이 석책을 두른 듯 솟아 절경을 이룬다. 그 ‘입석대’와 ‘서석대’는 옛 문인들의 유람 명승지로 사랑을 받았고, 많은 명시를 남겼다. (김대현, 󰡔무등산 한시선󰡕,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7. ; 박준규, 󰡔무등산과 고전문학󰡕, 국학자료원, 2018.)

왼쪽 능선은 마치 코끼리의 얼굴과 코의 옆 모습처럼 보인다. 원효사에서 보면 천왕봉에서 북산으로 흐르는 능선이 가장 뚜렷하다. 그래서 무등산이 ‘보현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보현’은 지혜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함께 석가모니를 보좌하는 수행의 보현보살(普賢菩薩)에서 따온 것이다. 문수보살은 사자, 보현보살은 코끼리와 연관된다. 참고로 남도의 주산, 지리산(智異山)은 ‘지혜의 산’으로 문수보살의 산 이름인 셈이다. 40년 전 1980년 7월부터 2003년 월까지 23년을 살면서 대했던 <무등산을 추억하며>, 광화문에서 신록의 무등산을 다시 그리면서 이런 내력을 써넣었다. (도 9)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