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옵스쿠라와 〈이기양 초상〉 초본

카메라 옵스쿠라와 〈이기양 초상〉 초본

카메라 옵스쿠라와 〈이기양 초상〉 초본
08/28/2018
/ 이태호

이기양 초상

<이기양 초상〉초본의 새로운 발견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茯菴 李基讓(1744-1802)은 李德馨의 7대손으로, 양명학을 수용한 星湖學派로 분류되는 문인 관료이다. 星湖 李瀷(1681-1763)의 학문을 이을 차세대로 지목되기도 했고, 정조는 체재공의 후계자로 지목했을 정도로 이기양을 등용했다. 1799년 10월 進賀副使로 연경에 다녀오면서 목화를 대량으로 따는 기계 씨아차인 彔棉攪車를 들여왔고, 과학과 실용정신이 높은 문인으로도 알려졌다. 辛酉邪獄때 西敎와 관련하여 투옥되었다가 이듬해(1802) 단천 귀양지에서 세상을 떠났고, 사후 1809년에 신원되었다. 이기양은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과 각별히 돈독한 사이였다. 정약용 역시 이기양의 묘지명을 써줄 정도로 학문적으로 인간적으로 정치적으로 두터운 관계였다.

정약용이 카메라 옵스쿠라를 실험하고 「칠실관화설」을 기술하거나 카메라 옵스쿠라를 설치하고 이기양이 초상화를 그린 시기는 1780년대 중반쯤으로 추리하였다. 카메라 옵스쿠라로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은 「茯菴 李基讓 墓誌銘」의 후반부 ‘附 見閒話 條’에 실려 있다. 다시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복암이 일찍이 나의 형(丁若銓, 1758-1816) 집에서 漆室玻瓈眼(카메라 옵스큐라)을 설치하고 거기에 비친 거꾸로 된 그림자를 따라서 초상화의 초본을 그리게 하였다. 복암공은 뜰에 설치된 의자에 태양을 향해 앉아 있었다. 털끝 하나 잠깐 움직여도 모사하기 어려운데, 공은 의연하게 흙으로 빚은 사람처럼 오래토록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역시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이다.

茯菴 嘗於先仲氏家 設漆室玻瓈眼 取倒景 以起畵像之草 公於庭中設椅 向日而坐 一髮乍動 卽摹寫無路 公凝然若泥塑人 良久不小動 亦人所

‘附 見閒話 條’는 묘지명 뒤에 첨언한 여담격이다. 정약용이 이기양에 대해 기억에 남는 일화를 최근 일부터 과거로 회상해 가는 내용이 담겨 있다. 연대가 밝혀진 글의 흐름이 1799년, 1795년, 1784년경의 순서이고, 마지막은 1796년의 이야기이다. 이기양이 카메라 옵스쿠라를 이용해서 초상화를 그린 일은 1795년에서 1784년경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그 시기에 이기양은 1784년 문의현령에서 물러나 1795년 다시 진산현감으로 부임하여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이천에 칩거해서 서울을 내왕하며 지냈다. 초상화를 그린 일은 정약용이 자기 집에서 직접 「칠실관화설」을 실험한 1784-5년과 비슷하거나, 약간 뒤에 이루어졌다고 봐야할 것 같다.

〈이기양 초상〉초본은 76cm x 47.2cm 크기의 조선 닥종이에 그렸다. 이마와 코 부분에 손상이 약간 있으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그림의 오른편에 단정한 해서체의 ‘茯菴公畵像草本’ 이라고 쓰여 있다. 초본으로는 비교적 큰, 겹무늬가 있는 紋紗角의 오사모에 홍단령포 차림의 반신상에 가까운 흉상이다. 화면의 크기로 볼 때, 이 초본은 직접 카메라 옵스쿠라로 그린 것은 아닐 게다. ‘縮容鏡’이라는 중국인들의 별명처럼, 카메라 옵스쿠라로 뜬 初草本을 1.5배 내지 초본 2배로 확대하여 다시 그린 것이다. 곧 정본을 위한 밑그림 正草本인 셈이다. 이 초본을 밑그림으로 삼아 정본 초상화를 제작하는데 쓰였을 것이다. 그 정본도 출현하기를 기대해 본다.

또한〈이기양 초상〉초본에 착용한 紋紗角의 오사모 형식과 홍단령포는 당상관의 지위이다. 앞서 정약용이 증언한 초상초본의 제작시기 1784년-1795년 사이와 맞지 않는다. 이기양이 正三品에 오른 것은 정조 19년(1795) 春塘臺 庭試 乙科에 급제하고 홍문관 부수찬(종6품)이나 의금부 검상(정5품) 등을 거친 뒤, 정조 21년(1797) 8월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된 때이다.

그러니까 현재 〈이기양 초상〉초본의 복장은 1797년 이후의 관료 모습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카메라 옵스쿠라로 그린 初草本은 사방관이나 탕건을 쓰고 그렸을 것이다. 이 初草本으로 正草本을 그린 것은 당상관에 승급한 1797년 이후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머리에 쓴 오사모가 약간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이마의 망건과 사모의 사이가 평행되게 띠를 두른 것처럼 그린 점이 어색하다. 또 상당히 흰수염이 자랐는데, 얼굴의 피부색은 잡티도 없이 홍안으로 50대를 넘지 않을 듯하다.

〈이기양 초상〉초본은 背彩가 잘 되어, 홍조 띤 얼굴에 단아한 관복이 잘 어울려 있다. 근엄하고 당찬 얼굴 모습은 정약용이 묘지명에 설명해 놓은 이기양의 풍모와도 흡사하다. 

공은 타고나기를 체격이 크고 호걸다운 용모가 특출했다. 이마가 둥글고 솟았으며 눈썹과 눈 사이가 훤하게 트였다. 넓은 코와 입과 뺨은 모두 雄峻하고 豊滿하였다. 키는 八尺이나 되고 흰 피부감이 기운차 있었다. 구렛나루와 턱수염은 듬성하였다.

公天姿 魁偉傑特 額宇圓隆 眉目豁然 以廣鼻口輔頰 皆雄豊滿 身長八尺 白晳軒昻 鬚髥只數莖 

〈이기양 초상〉초본을 살펴보면, 간결한 의습선에는 명암을 넣지 않고 사모의 무늬도 거친 편이다. 대신에 안면의 세부묘사는 정치하다. 언뜻 일반적인 초상 초본과 크게 다르지 않아, 과연 카메라 옵스쿠라로 그린 초본과 관련이 있을까 생각될 정도이다. 그런데 얼굴에서 눈썹이 희미하고 살진 안면의 굴곡과 분홍빛 피부감의 섬세한 표현은, 당시 보통의 초본과 격을 달리한다. 조리개에 짙은 濃墨의 점을 찍고 밝아졌다가 외곽으로 점점 어두워지는 수정체의 표현은 이명기의 화법과 근사하다.

눈동자 표현을 포함하여 <이기양 초상>초본과 비교할 만한 대상으로는 이명기의 <趙恒鎭(1738-1803) 肖像>(삼성미술관 리움)과 그 초본이 떠오른다. 사모를 쓴 반신상으로 초본과 정본의 마마를 앓은 얼굴 묘법이 꼭 닮아 있어, 이명기의 표현력을 잘 보여준다. 초본은 사모에 평상복 도포차림으로 그렸고, 정본은 그 위에 흑단령포를 입혔다. 운학문 흉배는 單鶴이고, 관대는 흑각이며 오사모는 민무늬의 單紗角이다. 五品직 이하의 복장으로 사간원 정원(1783년), 지평(1800년), 교리 등을 역임하고, 당상에 오르지 못한 때문인 듯하다.

조항진 초본과 이기양 초본은 눈동자와 입술 표현에서 유사함이 느껴지지만, 의상의 표현방식은 조금 다르다. 조항진 초본은 옷주름에 음영을 가했고, 흑연 연필 밑그림 위에 먹선으로 수정해가며 그렸다. 또한 이기양 초본에 쓴 ‘茯菴公畵像草本’ 해서체 글씨는 이명기의 채제공 65세와 72세상 초본에 쓴 제목의 필세와 무관하지 않은 듯싶다. 이기양 초본의 서체가 좀 더 각진 붓맛을 지녔지만, ‘公’이나 ‘草’字가 얼핏 이명기의 서풍과 유사하다는 느낌도 든다. 

–  李泰浩, 「18세기 초상화풍의 변모와 카메라 옵스쿠라」- 새로 발견한〈이기양 초상〉 초본과 이명기의 초상화 초본을 중심으로, 「다시 보는 우리 초상화의 세계」, 국 립문화재연구소, 2007.11.

 

* 이태호 :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 서울산수연구소장

누가 창작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누가 창작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누가 창작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07/31/2018
/ 박평종

창작자의 개념이 모호해지고 있다. 수많은 저작권 분쟁 사례들이 그 점을 입증한다. 그에 따라 창작자를 ‘법적으로’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저작권을 어디까지 보호할 것인지도 골칫거리다. 특히 인공지능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는 시대가 오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이른바 ‘생각하는 기계(Thingking machine)’가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면 그를 창작자로 인정해야 할 것인가?

현행 저작권법은 저작권자를 독창성의 원천으로서의 창작자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 범위를 ‘인간 저자’만으로 한정한다. 예컨대 2011년 사진작가 데이비드 슬레이터가 인도네시아에서 멸종 위기종 원숭이 사진을 찍다가 카메라를 빼앗겨 발생한 사건을 보자. 사진작가의 카메라를 빼앗아 달아난 원숭이는 여러 장의 셀카를 찍었는데, 사진작가는 자신이 찍은 사진과 원숭이가 찍은 사진을 섞어 작품집으로 출간했다. 슬레이터는 2014년 원숭이가 찍은 사진을 무단으로 게재한 위키피디아에 사진 삭제를 요구했고, 이에 저작권 소송이 진행됐다. 법정은 비록 원숭이는 저작자가 될 수 없지만 사진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25%를 멸종 위기종 원숭이 보호에 사용하라고 판결했다. 여기서 관건은 인간만이 저자일 수 있으며 동물이나 로봇은 저작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는 것이다.
본래 저자(author), 창작자(originator) 개념은 저자가 저작물의 소유자임을 법적으로 보호하려는 소유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저자가 자신이 생산한 저작물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가지려면 타인의 그것과 명확히 구분되는 독창성(originality)이 있어야 했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저작권 분쟁에서 결정적 기준이 되는 요소가 그것이다. 그런데 법적으로 보호받는 창작자들의 작품이 그 ‘독창성’이라는 것을 진정 갖고 있는가?
알고리듬과 머신러닝을 활용하여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인공지능 ‘창작기계’는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 인간 예술가들보다 훨씬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독창성의 차원에서 기계는 인간을 능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무엇이 ‘없었던 작품’인지 쉽게 가려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의 ‘창작기계’, 예컨대 넥스트 렘브란트와 같은 인공지능은 화가의 화법을 머신러닝 학습으로 분석하여 그와 유사한 그림을 그리는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관건은 이 기계들을 ‘어떻게’ 프로그램 할 것인가에 있다. 만약 프로그래머가 전혀 새로운 알고리듬을 적용하여 규칙에서 벗어난 작품을 산출하도록 프로그램 한다면 사태는 달라질 수 있다. 그렇게 생산된 ‘작품’의 저자는 누가 될 것인가? 이미 예술가와 프로그래머의 적극적인 협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들은 그에 따른 작품의 공동저자다. 컴퓨터가 저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힘입어 카메라의 성능은 나날이 고도화되고 있어 이제 ‘누구라도’ 물리적 품질이 뛰어난 사진을 생산할 수 있다. 심지어 원숭이도 셀카를 찍고, 카메라를 도둑맞은 사진작가는 원숭이가 ‘대충’ 찍은 그 사진을 모아 작품집으로 출간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보다 고도의 복합적인 사고가 가능한 기계가 카메라를 잡는다면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인간 사진가의 작품보다 훨씬 ‘창의적인’ 사진을 그가 생산해 낼 날이 멀지 않았다. 이미 인공위성이나 드론, CCTV 카메라는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인간을 따돌린 지 오래다. 창의성의 척도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재고할 때가 됐다. 그리고 인간만이 저자일 수 있다는 뿌리 깊은 통념에 대해서도 반성해 보아야 한다. 하나의 저작물이 진정 가치 있다면 누가 생산하느냐는 부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