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6-남한강 흥원창, 수청탄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세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6-남한강 흥원창, 수청탄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세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6-남한강 흥원창, 수청탄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세번째
10/22/2019
/ sketch

 지난번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강변풍경 <신륵사(神勒寺)> <휴류암(鵂鶹巖)>에 이어, 이번에는 두 그림 사이에 배치한 <흥원창(興原倉)> <소청탄(小靑灘)>과 <수청탄(水靑灘)> 세 실경도를 소개한다. 세 장면은 순서대로 겹치면서 이어 그려져 있다. (도 1)
 <휴류암> 그림의 화제에 밝힌 대로, 정수영은 1796년 여름 동갑내기 윤일 이영갑(允一 李永甲, 1743~?)과 후배인 학이 임희하(學而 任希夏, 1745~?) 두 문인과 남한강 선유를 즐기던 중, ‘헌적별업(軒適別業)’이 있는 수청탄에서 헌적 여춘영(軒適 呂春永, 1734~1812)과 합류했다. 여춘영은 정수영과 금강산 여행도 함께했을 정도로 도탑게 교우한 선배로, 수청탄의 강변별장은 선대부터 내려온 것이다. 임희하는 풍천임씨로 여춘영의 부인이 임희하의 아저씨뻘 임박(任璞)의 딸이니, 두 사람은 먼 사돈 간이다. 임희하는 재간 임희성(在澗 任希聖)의 사촌인즉, 이들이 여주를 떠나 도착한 서울 근교가 삼각산 아래 우이구곡의 재간정(在澗亭)이었다. 여주 실경화들 다음이 바로 이 <재간정> 그림이다. 이영갑은 전의 이씨로, 진사시와 문과 급제 한성부좌윤 이장하(李長夏)의 손자이다.
그리고 이들 여정에 여주목사를 지낸 박황(朴鎤, 1737~?)이 참여했던 모양이다. 여춘영이 자기 문집에 여호 청심루 유람 기사를 밝혀 놓았다. (同鄭君芳遂榮 任學而希夏 李允一永甲 作黃驪之遊到淸心樓 朴使君鎤頗款恰 : 呂春永, 『軒適集』 卷三) 박황은 1789년 11월 3일 승지에서 여주목사로, 1791년 2월 17일 여주목사에서 승지로 전보되었던 관료이다. (『승정원일기』) 박황이 여주목사 시절에 선유했는지 아니면 목사를 퇴임한 5년 뒤 1796년에 합류했는지 불분명하지만, 정수영 일행의 강 풍류 여정에는 여주 관아의 도움을 크게 받았을 법하다.
 박황은 울산 박씨로 정조 1년(1777) 문과에 급제해, 지평, 대사간 장령을 지내다 1789년 현릉원 이전 천원도감(遷園都監)에 참여했다. 그 후 정조가 신임해 승지로 삼아 곁에 두었던 인물이다. (『승정원일기』, 『정조실록』, 『일성록』, 『홍재전서』) 천원도감에는 여춘영의 친형인 여만영(呂萬永, 1730~?)이 함께 통례로 참여했으니, 박황과 여춘영의 교분을 떠올릴 수 있겠다. 1788년 김홍도와 김응환, 강세황이 금강산 사생 여정 때, 9월 14일 박황은 정란과 함께 장안사를 찾아 이들과 합류하기도 했다. (강세황, 『표암유고』) 이를 종합해 보면, 정수영이 강세황 부자는 물론이려니와 김홍도와 교류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겠다.

 여강과 섬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흥원창>

 《한·임강명승도권》의 그림 순서를 따라가면, 지난번에 살핀 <신륵사>에서 그 상류로 이동해 <흥원창(興原倉)>을 들렀다. 흥원창은 신륵사에서 30여 킬로미터 상류, 여강(驪江)과 섬강(蟾江)이 만나는 남한강의 두물머리에 세운 강원도 원주의 창고이다. 흥원창 주변은 벌써 신라 후기 거돈사나 흥법사 같은 대찰이 들어섰고, 후삼국시대 후고구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치열한 경합지였다.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 강둑 길 새 지명이 인근 섬강 문막의 견훤산성과 연계해 ‘견훤로’이다. 고려시대부터는 평창 영월 정선 횡성 등 강원 중부지역에서 거둔 세곡을 모아 관리했던 조창(漕倉)으로 자리를 잡았다. 조선 후기 조창의 기능이 줄면서 원주의 창고로 남았다.
 두 강물이 만나는 두물머리 모서리에는 삼각형 바위벼랑을 드러낸 해발 245.5m 높이의 자산 자락이 강변 풍경에서 인상적으로 우뚝하고, 그 왼편 여강으로 해지는 일몰 때 노을이 아름다운 명소이다. 산 이름도 저녁노을을 빗댄 보랏빛 ‘자산(紫山)’이라 불린다. 그 정취는 해거름에 맞춰 다시 찾아와 그려보리라 생각하며, 남한강 두 물이 감싼 자산의 인상적인 암산 모습을 중심 삼아 스케치했다. (도 2)
 견훤로 181길에 흥원창 표시판이 설치되어 있고, 정수영의 현지 그림 사진이 걸려 있다. 그림은 수평구도의 강변 풍경화로 싱거운 편이다. 화면 왼편으로 강변에 주름진 바위산 봉우리와 짙은 미점준의 토산이 자산이고, 섬강 입구에 ‘원주하류(原州下流)’라는 지명이 쓰여 있다. (도 1) 그 오른편으로 낮은 산 능선 아래 일정 간격으로 울타리가 설치된 가옥들이 나란하다. 상당히 부감한 시선으로 배열한 마을 스케치이다. 오른편 제일 큰 기와집이 흥원창 관아이고, 마을은 관리들과 창고지기들의 숙소일 법하다. 조창의 기능이 사라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원주의 중요 창고였음을 알려주는 풍경화 기록물이라 할 수 있겠다. 현재는 이들 원조 마을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여서 더욱 그렇다. 

 흥원창을 떠나 다시 남한강 하류로 내려간 곳이 광주 남종의 <소청탄(小靑灘)>과 <수청탄(水靑灘)>이다. <소청탄> <수청탄> 두 그림은 한 폭으로 여겨질 정도로 경계가 모호하다. 특정한 지형의 표현보다, 정수영의 개성적인 전나무나 활엽수 표현이 두드러진 여름 숲으로 구성된 점도 유사하다. (도 1)
 이런 <수청탄> 화면 왼편 위에 강관은 “크게 보면 심계남의 <풍우귀장도>의 필의가 있다(大有 沈啓南 ‘風雨歸庄圖’ 筆意)”라 쓰며, 명나라 최고의 문인화가 심주(沈周)를 빗대었다. 어눌한 솜씨의 정수영에겐 상찬인 셈이다.
 이곳은 지금의 광주시(廣州市) 남종면(南終面) 수청리로 여주읍내서 하류로 4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조금 더 내려가면 ‘소내’라고 일컫는 우천(牛川)이고,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너른 폭의 두물머리 양수리이고 팔당에 이른다. 수청탄(水靑灘)은 ‘푸르레 여울’로 ‘큰 청탄’이라 불리며, 수청1리이다. 소청탄은 그 아래 마을 ‘작은 청탄’으로 수청2리에 해당한다, 두 마을 강변 길은 ‘굽은 목’이라는 뜻의 구항동(拘項洞)이다.

 광주 남종 남한강의 <수청탄> <소청탄>

 여춘영의 별장이 있던 <수청탄>의 수청1리 강변에는 ‘수청호’라는 배가 정박해 옛 나루터의 정취가 간직되어 있다. 팔당호가 조성되면서 강건너 마을과 교통하는 나루터를 살려놓은 배려이다. 수청호 선장에게 배를 타고 수청탄과 대탄의 풍경을 촬영하고 싶다고 하니, 처음에는 광주시에서 운영하는 배로 주민들만 이용하게 되어 있다며 완강히 거절하였다. 명함을 건네고 정수영의 실경 그림을 보여주며 거듭 부탁해보니 배를 태워주었다.
 배를 타고 강 가운데 서보니 너른 수면에 너울대는 산세에 쌓여 푸근한 형국이다. 한강,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이 그렇게 전개되어 있다. (도 3) 북쪽 양평 국수리, 대심리 방향으로는 부용산, 형제봉, 매봉산이 청계산과 용문산으로 이어진다. 남쪽 수청리에는 검천리, 귀여리, 금사리에 둘러싸인 정암산이 우뚝하다. 귀여리에는 선조 시절 문장가로 꼽히던 문신 상촌 신흠(象村 申欽, 1566~1628)의 신도비와 묘역이 있고, 그 아들로 선조의 부마였던 동회 신익성도 ‘귀여(歸歟)’라는 아호를 썼다. (이태호, 「17세기 인조시절의 새로운 회화경향」-동희 신익성의 사생론과 실경도, 초상을 중심으로, 『강좌미술사』 31, 한국미술사연구소, 2008.) 남종면과 금사리가 있는 퇴촌면 일대는 남한강 하류의 풍부한 물과 강언덕의 우거진 땔감을 기반으로 조선시대 왕실백자 도요지가 집중된 지역이다.
 마침 선장은 팁으로 강변 바위벼랑에 새겨진 글씨가 있다며, 예서체로 ‘石壇’이라 새겨진 곳까지 친절히 안내해주었다. (도 4) 석단의 의미로 볼 때, 제의(祭儀)와 관련된 공간이었던 모양이다. 옛 문헌과 현재의 기록을 뒤졌으나, 전혀 알려지지 않은 처녀지인 셈이다.

  정수영의 <수청탄> 그림에서 오른편 바위언덕에 기와집이 유난히 도드라지게 보인다. 이 독립가옥 한 채가 ‘헌적별업(軒適別業)’이라 밝혔듯이 정수영의 절친인 헌적 여춘영(軒適 呂春永, 1734~1812)의 별장인 셈이다. 여기서 정수영은 평상복 차림의 여춘영 손을 끌어당겨 배에 태웠고, 다시 청심루(淸心樓)가 있는 여주로 돌아왔다.
 현재 수청1리에는 여춘영의 고조할아버지 ‘여성제(呂聖齊, 1625~1691) 묘역과 신도비’(수청리 산101-10, 광주시 문화재 기념물 제8호)가 전한다. (도 5) 여성제의 자는 희천(希天), 호는 운포(雲浦)이고, 본관은 함양이다. 당쟁이 심했던 숙종 시절 서인 소론계 문신으로 영의정에 올랐으며, 초서를 잘 쓴 서예가로도 유명했다. 마을 안길에 문화재 안내표시판이 있고, 신도비의 제명 전서는 여성제의 글씨이다. 비문은 영의정을 지내던 남구만이 지었고, 유상운(柳尙運)이 단정하게 썼다.
 수청1리 254-2에 여성제의 생가터가 있었으며, 이곳이 양자로 들어온 여춘영의 별장이었을 것이다. 수청리는 여성제의 후손들 여씨 집성촌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앞서 발견한 ‘석단’ 바위글씨는 벼랑 아래가 물에 잠겨 단정할 수 없지만, 여씨 집안과 관련이 있을 거라 짐작된다. 그런데 가옥과 밭 사이에 방치된 신도비나 묘소가 잘 말해주듯이, 현재 마을에 여씨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한다. 여운영이 이 집안의 후손이다. 

 배를 타고 수청탄과 주변 산세를 확인하며 강변 풍경을 스케치하였다. (도 6) 수청1리와 2리를 한 화면에 연결했고, 수청1리에 현재 광주시 문화재로 지정된 여성제의 묘역과 신도비를 화면에 넣었다. 또 포구의 정자나무와 여춘영의 별장을 표시했고, 선장이 알려준 석단 바위글씨까지 덧붙여 그렸다. 그려보니 정수영은 배에서 본 이들 완만한 산세의 흐름과 강변 풍경 그리기는 평범해서인지, 별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한·임강명승도권》의 실경도 글과 그림의 순서에 따르면, 정수영 일행은 여주 청심루에서 여흥을 즐기며 <여주관아>를 그렸고, 대탄(大灘) 이상사(李上舍) 집을 거쳐 삼각산 아래 재간정에 이르렀다. ‘상사’는 생원시나 진사시에 급제한 성균관 유생을 일컫는다. ‘이상사’는 문과나 관직을 포기하고 대탄에 은둔한 문인이었을 것으로, 혹여 이영갑과 인척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수청리 맞은편 양평 대심리 강변이 ‘한여울탄’ 대탄이다. 이상사의 집이 있던 대심리 대탄 강변에는 지금도 별장 마을이 여전하다. 두 개로 나뉜 대하섬이 강 가운데 떠서 주변 산세를 끌어 앉는, 아주 너른 호수 같은 풍광이 전개된다.
 정수영은 이곳 풍경을 그리지 않았으나, 수청리 동쪽 인근 마을 운심리 언덕에서 굽어보니 대탄 대하섬과 너른 수면 위로 솟은 용문산과 그 능선이 한 폭의 산수화답다. 9월 비구름이 오락가락하니 더욱 절경의 운치를 더해준다. 5월 답사 때와 마찬가지로 옆으로 긴 화면에 여러 점 사생해 두었다. (도 7) 멀리 용문산의 뾰족한 주봉이 유난하다. 용문산은 어디서 보아도 눈에 띄는 남한강의 으뜸 형상이라 할 수 있다.

 다음에는 그 용문산을 여주호 주변에서 보겠다. 정수영은 일행과 함께 남한강을 거슬러 여주에서 처음 만난 <고산서원>과 <여주관아와 청심루>를 그렸고, 수청탄과 대탄(大灘)에 내려왔다가 다시 찾은 <여주읍치> 장면을 사생했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5-여주 휴류암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두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5-여주 휴류암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두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5-여주 휴류암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두번째
10/09/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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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는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의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등장한 <신륵사(神勒寺)> 그림의 현장을 찾았다. 화가가 배를 타고 강 위에서 보았던 시점과 전경을 부감한 듯 아는 대로 그린 화법의 차이에 대해, 현장스케치를 통해 확인하였다. 이번에 소개하는 <휴류암(鵂鶹巖)> 그림 역시 유사하면서 또 다른 방식으로 그렸음을 점검해보겠다. <휴류암>은 《한·임강명승도권》의 여러 실경도들 가운데 가장 회화적으로 성공한 대표 그림으로 꼽을 만한 명작이다. (도 1) ‘휴류’는 ‘부엉이’이니, ‘휴류암’은 부엉이바위라는 뜻이다.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몇 년 전 포천지역 임진강 답사에서 연천 미수나루의 강변 부엉이바위와 그림 모양새가 흡사해 <휴류암>의 실경으로 잘못 단정했다. (이태호, 「새로 공개된 겸재 정선의 1742년작 <연강임술첩>」, 『조선후기 산수화전』-옛 그림에 담긴 봄 여름 가을 겨울, 동산방, 2011. ; 이태호, 「새로 공개된 겸재 정선의 1742년작 <연강임술첩>」-소동파 적벽부의 조선적 형상화, 『동양미술사학』 2, 동양미술사학회, 2013.) 이번 기회에 그 오류를 수정해, 여주의 마암(馬巖)이 곧 <휴류암>을 그린 현장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신륵사와 여주지역 답사에서 가장 기쁜 최대 성과이다.

이를 기념 삼아 국립중앙박물관의 2019년 기획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7.23~9.22) 전시장에서 겸재 정선의 <단발령망금강>, 진재 김윤겸의 <극락암> 등을 따라 그리며, 지우재의 <휴류암>을 방작(倣作)하였다. 각진 바위들의 모양새를 그리며 지우재의 필묵 리듬을 익혔고, 배에 딴 인물을 그리자니 실패할 것 같아 ‘내 마음을 담은’ 빈 배로 마무리했다. 화면 상단에 별도로 ‘휴류암 현 여주 마암(鵂鶹巖 現 驪州 馬巖)’이라 써넣었다. (도 2)
신륵사에서 강 건너 남서쪽으로 2km 남짓에 여주 관아터(현재 여주시청과 여주초등학교)가 있고, 그 중간쯤 강변에 말바위 마암(馬巖)이 위치한다. 이 바위언덕 정상에 관아의 옛 남문인 영월루(迎月樓)를 이전해 세워놓았다. 강변 제일 높은 곳이어서 누각의 이름을 따라 ‘달맞이가 아름다운’ ‘영월 근린공원’이 조성되고, 바로 옆에 붙어서 너른 여호(驪湖) 강 위로 여주대교가 지난다.
배를 타고 강에서 올려보거나 여주대교에서 굽어보면, 마암 주변의 강변 바위들 모양새가 정수영이 그린 《한·임강명승도권》의 여주 남한강 그림에서 <휴류암> 분위기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1972년 여름 대홍수 때 무너져 사라졌을 강변의 일부 벼랑과 바위들을 상상해볼 때, 더욱 그러하다. (도 3)

<휴류암>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비스듬하게 내려 구성한 사선 구도이다. 오른쪽 바위 군락을 유난스레 과장해서 표현했다. 뾰족뾰족한 수정 덩어리가 부채살처럼 뻗은 모습이 인상적이고, 그 왼쪽 언덕 능선으로는 여백을 살린 편이다. 그 아래 벼랑 부분에 행서체 글을 써넣었고, 좌우 바위벼랑 사이 옴팍한 강변 공간에 선유 장면을 담았다. 좌우의 바위들에서 사람 같은 이미지들이 간간이 눈에 띄고, 그림 제목과 닮은 부엉이 형태는 없다. <휴류암> 그림의 왼쪽 하늘 부분에는 다른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월루 강관이 “땅은 명승이다. 부엉이는 불길한 새에 해당하는데 지우재는 어찌 이 이름을 썼는가.” 월루가 묻는다. (地以名勝 鵂鶹 禽鳥之惡者 之又齋奚取於斯 月樓問)라고 토를 달았다.
중간 먹의 점선묘에 담묵담채를 가해 입체감을 살린 <휴류암>의 바위형상들 표현에는 어눌하면서도 그림을 즐긴 정수영 화풍의 개성이 물씬하다. 정수영은 마암에 대한 정보는 없었던 듯하고, 그 시절 함께 불리던 ‘휴류암’ 이름은 강관의 지적대로 부엉이가 혐오의 새이어서 후대에 사용하지 않았을까.
이곳 마암 바위벼랑 아래 구멍에는 여흥 민씨 시조의 탄생 설화가 전한다. 말바위 ‘馬巖’이라는 이름은 누런색 황마(黃馬)와 검은색 여마(驪馬)가 출현했다는 전설에 따라 지어졌다. 여주의 옛 지명인 황려(黃驪)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절벽에는 1870년인 ‘경오시월(庚午十月)’ 여주목사 ‘이인응(李寅應)’의 ‘마암(馬巖)’이란 행서체 바위글씨가 남아 있다. (도 4) <휴류암> 그림에 이런 내용을 전혀 밝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정수영은 마암에 대한 정보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 아닌가 싶다.

산수에 사는 인간을 표현하는 합성방식

나는 정수영의 <휴류암>을 따라 모사했고, 배에서 <마암 전경>을 옆으로 긴 화면에 보이는 대로 고정 시점으로 사생해 보았다. (도 2, 5) 정수영의 묘사력이 떨어지는 편이어서 실경과 그림의 비교가 좀 그렇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정수영은 자의적으로 대상을 재해석하고 변형해 표현했다. 강에서 본 수평 시점의 구도이면서, 배가 그려진 옴팍한 강변 모래톱은 상당히 부감시(俯瞰視)로 처리한 듯하다. 또 바위들 구성은 배에서 살짝 올려본 앙시(仰視)로 포착한 방식이어서 눈길을 끈다.
이 같은 다시점(多視點) 합성법은 정수영다운 과장의 필묵법과 더불어 개성적 실경 해석을 드러낸다. 동시에 조선 후기 문인들이 즐긴 소요와 유람의 자연 친화의식과 그 관점을 담은, 당시 화가들의 보편적인 시선이라 할 수 있겠다. 화면에 화가의 위치나 자신의 행위를 그려 넣으며 다시점을 구성하는 일은 산수와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을 그리는 주요 방식이다.

한편 <휴류암> 그림 시점에서, 근래 이전해 복원한 영월루가 보이지 않아, 자리를 옮겨 <마암과 영월루>를 다시 사생했다. (도 6) 여주 관아의 정문으로 강변에 있었던 것임에도, 현재 언덕에 복원한 일도 좋아 보인다. 본래 있던 자리 못지않게 그야말로 최고의 ‘영월(迎月)’, 곧 ‘달맞이’ 공간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한·임강명승도권》의 <휴류암> 그림에는 정수영의 서풍으로 화면의 시작인 오른쪽 위에 ‘휴류암(鵂鶹巖)’ 제목을 쓰고, 선유장면 위로 그림에 대한 발문(跋文)을 적었다. 목선의 오른쪽과 위로 나누어 쓴 글은 여행 시기, 뱃놀이, 동행자 등 《한·임강명승도권》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사방관을 쓴 사람이 여헌적(呂軒適)이다. 관만 쓰고 나를 강 머리에서 환송하기에 손을 잡아채 배를 태웠다. 사공을 불러 출발을 재촉하였다.
이 바위를 지날 때 문득 줄 소리와 피리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곳으로 배를 대니 한 늙은 어부가 강가에 좌정해 낚시를 드리운 채, 손으로 해금을 타며 입으로 풀잎피리를 불고 있었다. 말을 뜨고 술을 보내니 배에 동승하게 되었다. 대탄(大灘) 이상사(李上舍)의 집으로 향했다.
이 여행은 (丙辰, 1796년) 여름이었다. 동갑내기 벗 이윤일(李允一)과 임학이(任學而)가 참여했다. 거슬러 가다 청심루(淸心樓)에서 노닐던 때이다.
冠者卽呂軒適也 只着冠送余江頭 携手上船 喚篙師催發.
過此岩時 忽聞有絃管聲 尋聲來泊 一漁翁坐磯垂釣 手彈嵇琴 口吹葉笛 接語饋酒 遂與之同舟 向大灘李上舍家.
此行 丙辰夏. 與同庚友李允一任學而 溯流於往遊淸心樓時也.

이 글로 보면 1796년 여름 정수영은 동갑내기 윤일 이영갑(允一 李永甲, 1743~?)과 학이 임희하(學而 任希夏, 1745~?) 두 문인 친구들과 함께 남한강을 선유했다. 《한·임강명승도권》의 그림 순서를 따라가면, 지난번에 살핀 <신륵사> 이후 상류인 <흥원창(興原倉)>을 들렀다가 다시 남한강 하류로 내려갔다. <소청탄(小靑灘)>과 <수청탄(水靑灘)>을 거쳐 다시 청심루(淸心樓)가 있는 여주로 돌아왔다. 수청탄 ‘헌적별업(軒適別業)’에서 만난 일상복차림의 헌적 여춘영(軒適 呂春永, 1734~1812)을 끌어당겨 배에 태웠고, 여주 마암에서 해금을 연주하며 풀잎피리를 부는 어부를 발견하고 선유에 합류시켰다. 계획 없이 뱃놀이를 그렇게 즐긴 모양이다.

여기 발문에 거론된 인물들이 모두 배에 등장한다. 미숙한 대로 찬찬히 그리며, 인물의 성격을 실감이 나게 살려내었다.
한가운데 뱃전에 걸터앉아 입에 풀잎피리를 불며 두 손으로 해금을 연주하는, 맨상투의 어부 모습이 선계(仙界)의 귀인다운 풍모이다. 그 왼편으로 유일하게 사랑채 복장으로 사방관(四方冠)을 쓴 여춘영이 연주자를 향해 좌정해 있고, 오른편으로 갓을 쓰고 대좌한 이가 정수영일 법하다. 세 사람보다 10년 전후 연상인 여춘영을 약간 강조한 점이 눈에 띄며, 그 앞에 주병과 술잔이 놓여 있어 좌장의 위상을 보인다. 정수영 자신도 다른 인물들에 비해 약간 진한 먹 선으로 크게 그린 편이다. 이들 좌우에 각각 갓을 쓴 두 사람은 임희하와 이영갑인 듯, 위계적으로 조금 작고 흐릿하게 그려져 있다. 긴 장대를 밀며 배에 앉은 사람들을 등지고 강 물결만을 물끄러미 굽어보는, 뱃머리의 옥색 바지저고리 차림 뱃사공의 표정도 또한 선인답다. (도 7)
이들은 그림 상태로 모두 대탄(大灘) 이상사(李上舍)의 집으로 향했다. 양근(楊根) 대탄(大灘)에서 다시 여주 청심루로 돌아온 모양이다. 《한·임강명승도권》에는 <휴류암> 그림 뒤로, 지난 호에 살펴본 <신륵사 동대 동적석>와 <신륵사 동대>, 또 <여주읍치> 장면을 연달아 다시 그려 놓았다.

다음 호에는 <휴류암>을 그리기 전에, <흥원창>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광주 <수청탄>과 <소청탄>에 들르는 장면을 소개하기로 한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스케치4 : 여주 신륵사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첫번째

이태호의 답사스케치4 : 여주 신륵사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첫번째

이태호의 답사스케치4 : 여주 신륵사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첫번째
08/02/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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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16일 35년 만에 여주 신륵사를 탐방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가 준비한 2019년 기획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7.23~9.22) 전시의 한 코너로, ‘옛 화가들이 실경을 어떻게 그렸나’하는 화가의 시선에 관한 영상물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기획전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한국의 비경이자 명소 30여 곳을 그린 작품 360여 점으로 꾸며졌다. 촬영장소로 겸재 정선이나 진재 김윤겸의 한양 진경산수보다 지우재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등장한 강변 신륵사(神勒寺) 그림의 현장을 선택한 것이다. 영상 코너 제목은 “배에서 바라본 신륵사 – 다시 그린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의 현장”이다. 신륵사 그림을 선정한 이유는 정수영이 특별히 신륵사 전경과 암반벼랑인 신륵사 동대(東臺)를 여러 차례 사생했고, 그림을 그린 위치와 시점 찾기가 쉽기 때문이다. 화가가 보았던 시점과 그 정경을 그려낸 시점의 차이는 사진 촬영과 직접 스케치를 통해 확인된다.

 

《한·임강명승도권》의 신륵사 전경과 동대 그림

조선 후기 문인화가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은 백리척(百里尺)으로 조선지도를 그린 실학자 농포자 정상기(農圃子 鄭尙驥, 1678-1752)의 증손자로, 할아버지 정항령(鄭恒齡, 1710~1770)과 함께 지도제작에도 참여한 문인화가이다. 정수영은 두 권의 기행서화첩을 남겼다. 한 권은 1797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1799년에 그린 《해산첩(海山帖)》이고, 또 한 권은 1797년 여름 남한강과 임진강을 선유(船遊)하고 제작한 《한·임강명승도권》이다. 《해산첩》은 한면한면이 동일 크기의 화첩인 데 비해, 《한·임강명승도권》은 두 강을 여행하며 만난 그때그때 실경을 넓게 혹은 좁게 사생한 횡축(橫軸)의 긴 두루마리이다.
26개의 화면을 담은 16m가량의 《한·임강명승도권》은 조선 시대 회화사에서 새롭고 독특한 사생화 방식을 보여준다. 나는 이 두루마리 그림을 포함해 정수영에 대하여 35년 전에 논문으로 낸 적이 있었고, 그때 처음 여주 신륵사를 답사했다. (이태호, 「지우재 정수영의 회화」-그의 在世年代와 作品槪觀, 󰡔미술자료󰡕 34, 국립중앙박물관, 1984.)
논문 발표 때는 정수영의 회화세계를 개괄하느라 신륵사 외에 모든 그림의 현장을 확인하지 않았다. 근래 겸재 정선의 1742년 작 《연강임술첩》(개인소장)의 삭녕 우화정(羽化亭)과 연천의 웅연(熊淵) 나루 그림 현장을 찾는 과정에서, 사암서원(思庵書院)이나 금수정(金水亭) 등 정수영이 그린 포천지역 임진강 현장을 새로이 답사하였다. 여기서 나는 연천 미수나루의 강변 바위벼랑이 부엉이바위라 불리고 모양새가 《한·임강명승도권》의 <휴류암>과 바위 모습이 흡사해 <휴류암>의 현장으로 선뜻 다시 생각하기도 했다. (이태호, 「새로 공개된 겸재 정선의 1742년작 <연강임술첩>」, 『조선후기 산수화전』-옛 그림에 담긴 봄 여름 가을 겨울, 동산방, 2011. ; 이태호, 「새로 공개된 겸재 정선의 1742년작 <연강임술첩>」-소동파 적벽부의 조선적 형상화, 『동양미술사학』 2, 동양미술사학회, 2013.) 이런저런 오류도 수정할 겸 <신륵사>로 시작한 김에 앞으로 몇 번에 걸쳐 《한·임강명승도권》에 그려진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가 보겠다.

《한·임강명승도권》의 <신륵사> 그림에는 정수영이 그림 제목을 써넣었듯이 ‘신륵사(神勒寺)’ 전경과, 그 오른쪽으로 절 모퉁 ‘사우(寺隅)’에 해당하는 신륵사 동대(東臺)가 등장한다.

1. 정수영, 한임강명승도권의 신륵사와 다시 그린 동대 부분, 1797년경, 종이에 수묵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리고 강관(姜亻寬)이 “옛사람의 시에 ‘평생 잊지 못할 최고 승경, 신륵사 앞 호수이네’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인가(古人詩曰, ‘平生最難忘 神勒寺前湖’ 其此之謂乎)”라고 그림 아래에 덧붙였다. 강관은 표암 강세황의 아들로 정수영과 교우했으며, 이 도권의 장면마다 제발문 글을 쓴 문인이다.
<신륵사> 전경도 오른편으로 동대 벼랑만을 비스듬히 별도로 또 그렸다. 이 <신륵동대(神勒東臺)>에는 “절 모퉁이 모습이 앞면과 닮지 않아 고쳐 다시 그린다(寺隅景似不如前面 改更寫之)”라고 써넣었다. 정수영은 신륵사 그림에 이어 여강과 섬강이 만나는 원주 <흥원창(興元倉)>, 광주 남종의 <소청탄(小淸灘)>과 정수영과 철친인 여춘영(呂春永)의 ‘헌적별업(軒適別業)’이 있는 <수청탄(水淸灘)>을 연이어 그렸고, 여주의 <휴류암(鵂鶹巖)>으로 돌아온 뒤 <신륵동대 동적석(神勒東臺東積石)>과 <신륵동대(神勒東臺)>를 다시 화폭에 담았다. <고산서원(孤山書院)> <여주읍내(驪州邑內)>로 시작한 여강 사생을 <여주읍치(驪州邑治)>에서 마무리했다. 신륵사를 제외한 여주의 이들 실경도에 대하여는 다음번에 자세히 다루겠다.

 

시대 말의 지성이자 성직자 이색과 나옹의 신륵사

촬영을 떠나기 전에 정수영을 비롯한 조선 후기 화기들의 사생 방식에 따라 준비물을 챙겼다. 우선 동산방화랑에 주문해 닥종이로 50×300센티미터짜리 옆으로 긴 두루마리 횡권(橫卷)을 제작했다. 또 야외용으로 썼을 법한 작은 벼루와 연적, 먹물 담는 묵호와 먹, 붓과 유탄을 준비했고, 이동용 먹통을 갤러리 문우와 민예사랑에서 구했다. 누런 신주로 만든 동제(銅製) 먹통은 수묵 서화가 발달한 한·중·일이 비슷한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 옛 선비들의 간소한 여정과 기록 의지를 읽게 해준다. 조선 후기 것이 한 뼘 정도 크기로 단순하고 세련된 형태미를 보여준다. 먹물 솜을 넣는 육면체 공간이 긴 손잡이와 어우러져 그렇다. 손잡이 부분에는 가느다란 붓이나 유탄, 혹은 젓가락을 넣어두는 공간을 마련하기도 해, 야외용으로 쓰임새를 높인 점도 여간 재치 넘친다.

첫날 5윌 15일에는 신륵사 경내를 돌아보고, 이튼날 16일에는 정수영이 했던 대로 신륵사 정경 그리기 과정을 촬영하기로 일정을 잡았다. 전시실의 영상을 맡은 문동수 학예관과 이재호 학예사, 그리고 이번 학기 조선시대회화사를 수강하는 대학원생 강인영과 백은선이 함께했다. 박물관의 두 사람은 한국회화사 분야에서 손꼽히는 연구자이고, 대학원생 두 사람은 마침 학부에서 한국화전공자여서 안성맞춤이었다.
15일 오후 5시쯤 여주에 도착해 먼저 숙소에 짐을 풀었다. 촬영팀이 잡은 호텔(SunValley Hotel)이 신륵사 남쪽 강언덕에 위치해, 11층 방 베란다에서 신륵사 경내와 동대 암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베란다는 조선 후기 진경 화가들의 부감 시점을 확인시켜주는 자리였다. 그리고 여강(驪江)의 동서로 펼쳐진 경치를 조망하니, “아! 이 위치가 절을 세우기에 최고다”고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신륵사는 낮낮한 산자락 강변의 유난히 아름다운 벼랑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2. 신륵사 전경과 황포돗배 나루, 2019년 5월, 사진 이태호
늦은 오후 햇살이 좋아 사진을 찍고 그 전경을 가볍게 스케치한 뒤, 해거름 강을 건너 신륵사 경내를 둘러보았다.

신륵사(神勒寺)는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봉황의 꼬리’ 봉미산(鳳尾山) 기슭 강가에 위치한다. 산사(山寺)가 발달한 우리나라의 사원 구조를 따르면서도 강변에 조성한 독특한 가람으로 꼽힌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의 창건설이 전하는 천년고찰이다. 현재 동대 암반에 세워진 3층석탑(경기도문화재자료 제133호)이 신라식 석탑을 계승한 고려 형식으로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불적이다. 또 유적으로는 고려 말 꽃무늬 벽돌이 포함된 다층전탑(多層塼塔, 보물 제226호), 고려 말기의 대표적 승탑 양식인 나옹의 승탑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8호), 승탑 앞 비천(飛天)과 용이 부조된 석등(보물 제231호), 1379년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제존자석비(普濟尊者石碑, 보물 제229호), 이색의 부친 이곡(李穀)이 제작에 관여한 대장경의 보관건물 중층 대장각을 세웠다는 기념물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 세종의 영릉 원찰(願刹)로 지정되며 세운 것으로 여겨지는 조선 초기 대리석재의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 신륵사는 500여 승군을 조직했던 호국 사찰로 꼽힌다. 경내에 보전된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180호),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보물 제1791호)을 모신 극락보전(경기도유형문화재 제128호), 구룡루(九龍樓) 등은 현종 이후 조선 후기 복원된 절집이다.
조사당에 삼화상진영(三和尙眞影,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67호)으로 모신 지공, 나옹, 무학은 고려 말에 큰 법맥을 형성했던 거승들로 꼽힌다. 정치적으로 지공선사의 제자인 나옹은 태조의 조선건국을 도운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신륵사의 명성은 나옹의 입적과 다비 장소, 그리고 나옹의 신통력에서 비롯되었다. 미륵(彌勒)의 의미로 여겨지는 ‘신륵’은 고려 말 나옹(懶翁)과 용마(龍馬)와 관련한 전설에서 찾기도 한다. 나옹선사의 다비를 치룬 곳이라는 동대 벼랑에는 ‘東臺, 李敦夏’라는 해서체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돈하(1824~?)가 1874년(고종 11) 여주목사에 부임해 쓴 것이다. 현재 나옹의 아호를 따른 강월헌(江月軒)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6모지붕의 정자인 데다, 정수영의 그림에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점으로 보아 20세기 들어 세운 듯하다.
동대 암반의 벼랑에 서면,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라는 나옹의 선시(禪詩)를 떠오르게 한다. 여기에 보물 제229호 나옹 혜근(惠勤)의 승탑 비문을 쓴, 종교와 문학적 도반 격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이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곳이어서 더불어 빛을 발했다. 이색은 조선의 새 정권에 참여하지 않으며, “백설이 자자 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반가 온 매화는 어느 곳에 픠엿는고, 석양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흰 눈이 잦아진 골짜기에 구름이 험하구나,  반겨 줄 매화는 어느 곳에 피어 있는가, 날이 저물어 가는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라며 고려 말 혼돈의 시대상을 읊었다. 이러한 회구가(懷舊歌)를 남기면서도, 이색은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의 스승이기도 했다. 당시 정계에서 소외된, 남인·북인 계열이던 지우재 정수영이 친구들과 신륵사를 찾고 동대 벼랑을 반복해 그린 것도 바로 고려 말의 지성 목은 이색과 성직자 나옹 혜근을 기리기 위함 같다.

 

배를 타고 정수영의 시선을 만나다

이튿날 16일 호텔 방에서 새벽 눈을 뜨자마자 일출을 기대했으나 구름 잔뜩 껴 흐렸다. 오전에는 황포돗배를 타고 여주교 근처 여주 관아의 문을 이전 복원한 영월루(迎月樓) 아래 마암(馬巖)부터 신륵사 동쪽 강변까지 돌아보았다. 삼백여 년 전 정수영의 사생 포인트를 찾고, 신륵사 그림과 실경을 비교해가며 배에서 스케치하였다. 이때는 나에게 익숙한 대로 유럽산 면지에 수묵 붓펜을 사용했다. 선상에서는 정수영의 시점을 찾기 위해 고려의 삼층석탑과 다층전탑이 서 있는 바위벼랑 동대만을 여러 점 그렸다. 강에서 보이는 대로 잡으면서도 정수영의 신륵사나 신륵동대 그림처럼 동시에 두 탑과 비를 그려 넣기도 했다.
신륵사 전경과 동대의 실제 풍경은 정수영의 그림과 크게 달랐다. 정수영의 <신륵사>도 그림만을 보면, 배를 타고 선유하며 강에서 포착한 낮은 시점의 구도로 보인다. 그래서 정수영이 수평시점으로 그렸을 거라 착각하기 쉽게 한다. 우선 선상에서는 신륵사처럼 경내불전들이 보이지 않는다. 역시 절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잡은 부감시점(俯瞰視點)을 적용한 셈이다. 더욱이 전탑과 석탑 두기의 탑과 비석이 세워진 동대는 수정을 거듭해 표현하였다. 정수영은 보이는 대로 수평시점을 유지하기보다 잘 아는 유적이나 건물들을 담기 위해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전통적인 부감시점을 적용했던 셈이다.
선상에서 정수영 그림 <신륵동대(神勒東臺)>나 <신륵동대 동적석(神勒東臺東積石)>의 바위벼랑을 따라 그리며 내가 정수영의 미숙함과 오류를 지적하자, 황포돗배의 선장께서 거들었다. 정수영의 <신륵동대 동적석> 그림이 어려서부터 늘 보며 눈에 익은 모습과 비슷한 점도 있다고 한다. 정수영의 적석 그림에서 수평으로 겹 쌓인 암반 가운데 솟은 바위를 가리키며, 1972년 여름 대홍수 때 사라졌다는 것이다. 황포돗배 선장의 대홍수 얘기를 들으니, 신륵사 강 건너 여주공원의 영월루 북벽 아래 마암을 다시 떠올렸다. 말바위 마암이 《한·임강명승도권》 가운데 <휴류암> 그림의 실경 현장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번 정수영의 여주 실경도들과 엮어 소개하겠다.

점심 이후 화가의 시선, 곧 정수영이 신륵사 도를 그렸던 시점과 걸맞은 위치에서 유탄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수묵담채화 과정을 촬영하기로 했다. 이재호 학예사가 미리 답사해서 회화사전공자답게, 눈썰매 있게 정수영의 신륵사도 가스 잠근 사한 장소를 물색해놓았다. 신륵사 남쪽 강 언덕 포구였다. 선상에서 확인했듯이, 신륵사 침상 당 항 하고 리를 둔 정수영의 부감 시 위치로 적합한 곳이었다.
정수영의 <신륵사도> 시점에 근사치로 유탄 밑그림을 그려보니 상당하게 부감시가 응용되었음을 재확인하였다. 정수영이 사찰경내 여러 건물을 수평으로 배치했지만, 앞 건물들 지붕 위로 주 법당인 극락보전을 상당히 솟게 그렸다. 건물들의 입면도가 제각각이고, 중층인데 단층으로 그려진 구룡루는 맨 오른쪽에 보인다. 절의 오른편 바위 언덕 두 탑과 비가 서 있는 동대는 사선으로 그려, 사원보다 올려놓았다. 수평시점으로 본 것처럼 배치해 어색하다. 그래서인지 정수영은 동대만을 신륵사도 왼편에 또 그렸다. “절 모퉁이 모습이 앞면과 닮지 않아 고쳐서 다시 그린다(寺隅景似不如前面 改更寫之)”라고 잘못돼 수정해서 다시 그린다고 써넣었다. 여기서는 선상에서 시점을 동쪽으로 옮겨 보이지 않는 탑비(塔碑)를 생략하고 두 탑만 그려 넣었으나 실경현장과 쏙 빼닮지 않은 것은 여전하다.
정수영은 원주 쪽 흥원창과 광주 쪽 수청탄을 다녀오고 <휴류암>을 그린 뒤 <신륵동대(神勒東臺)>나 <신륵동대 동적석(神勒東臺東積石)>을 그려 동대 정경이나 동대적석을 클로즈업해 또다시 그려보기도 했다. 세 번째 그린 <신륵동대>에는 비석이 3기로 2기가 추가되어 있고, 3층석탑은 5층석탑으로 잘못 그려져 있다. 배를 타고 본대로가 아니라 자신이 돌아본 신륵사와 동대를 기억된 정보로 표현한 듯하다
이처럼 정수영의 <신륵사>는 훈련되지 않은 다시점(多視點)을 그대로 드러낸 그림이다. 근경 강변의 수목 위로 중경에 수목을 배치했고, 사원을 감싼 봉미산 능선마저 담았다. 강기슭 언덕길 모습은 새의 눈으로 본시 선처럼 아예 부감시점으로 잡은 것이다. 이처럼 경내건물과 탑비들이 모두 한눈에 들어오는 시점은 내가 묵었던 호텔 11층 전망과도 유사할 정도였다. 5~6층 정도에서 보이는 풍경이 가장 적절하다 싶었다.
겸재 정선을 비롯해 조선 후기화가들이 그랬듯이, 현장 사생을 즐겼던 정수영도 대부분 부감시점을 썼음을 확인한 것이다. 어찌 보면 부감시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새로이 사생현장의 시점을 적용해, 정수영식 다시점을 구축한 셈이다. 다만 보이는 대로 대상풍경을 정확히 그려낼 정수영의 기량 부족이 아쉽긴 하다. 정확한 묘사는 단원 김홍도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난생처음 조선 닥종이에 수묵담채화를 그려본 셈이다. 밑그림 유탄사용도 마찬가지였다. 근래 다시 붓을 잡으며 습관처럼 밑그림 없이 붓펜 소묘나 먹그림, 수채화를 자유로이 시도해왔기 때문이다. 마음먹은 대로 표현되지 않고 쉽지 않았다. 역시 재료에 대한 이해와 숙련이 필요하다 싶었다. 결국, 면지에 수채화 하듯이 수묵과 담채를 조절하며 어색한 대로 마무리해 보았다.

3. 이태호, 신륵사여름맞이, 종이에 수묵담채, 49.5×153.5cm, 2019. 5.
그런데 한 달쯤 뒤에 이재호 학예사가 연락했다. 편집하는 과정을 살펴보니 아무래도 붓펜으로 그리는 모습이 어색하다는 것이다. 7월 2일 이전 촬영 팀과 배를 타고 붓펜으로 스케치했던 <신륵사 동대 적석도>를 유탄으로 밑그림 그리기 과정을 다시 재연했다. 또 강 건너편 나루에서 <신륵사전경도>를 다시 그렸다. 이번에는 유탄 사생 위에 수묵으로만 완성해보았다. 유탄으로 비교적 상세히 사생해 보니 종이 부푸러기가 일어 전통 닥종이를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덕분에 동산방에서 제작한 두루마리를 세 점으로 채우게 되었다.
7월 촬영에는 화봉옥션 큐레이터를 했던 양선미 씨가 참여해 작업과정을 촬영해주었다. 또 마침 이번 전시를 도운다는,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으로 석사논문을 쓴 한상윤 씨가 이재호 학예사를 거들었다. 멋진 영상물을 제작한 연출감독 피디는 김성화 선생이고, 촬영감독은 유용덕 선생이었다. 두 감독은 다큐멘터리 제작에서 국내 최고의 베테랑 팀다웠다. 제작에 심혈을 다한 두 감독의 열정만큼이나, 3분짜리 영상물은 산수화 전시장의 꽃 같다.

전시회 공개 다음 날인 7월 24일 나는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금강산수-옛 그림과 함께 아름다운 금강산 돌아보기”를 강연했다. 조선 시대부터 근현대 화가들의 금강산 그림의 예술성과 변모, 그리고 금강산의 절경들을 보여주었다. 그림과 실경 현장을 비교하기 위해 그동안 묵혀 놓았던 사진들을 찾고 보완해 양껏 편집하느라 강연시간을 10분이나 초과하였다. 금강산을 5번 다녀오면서 직접 찍은 것들이고, 올해 2월 해금강 일출 광경은 처음 선보였다. 이때 스케치는 내년 초쯤에 소개할 예정이다.
실경산수화가 그랬는지, 금강산이 불러들였는지 대강당에는 바닥에 앉고 서고 청중들로 넘쳤다. 금강산과 금강산 그림 걸작에 매료된 일천 사백여 명 청중의 눈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자료집 나눠주며 숫자를 센 직원이 슬쩍 박물관 강연역사에 새 기록이라 한다. 내 40년 미술사 강의 수강생 숫자로도 신기록이다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 3 : 전남 화순 운주사 석불 · 석탑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 3 : 전남 화순 운주사 석불 · 석탑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 3 : 전남 화순 운주사 석불 · 석탑
07/1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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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태호, 천태산과 운주사 와불, 2019.6. 면지에 수묵, 64x24cm

‘구름이 머무는 절’ 운주사(雲住寺)는 전남 화순군 대초리와 용강리에 걸친 사원이다. 신라 말 도선(道詵) 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오는, 운주사 경내에는 우리 불교미술사에 유래를 찾기 어려운 많은 석불과 석탑이 군집을 이루었다. 영구산(靈龜山)이라 불리는 낮은 야산의 좌우 계곡에는 100여 분의 돌부처와 30여 기의 돌탑이 흩어져 있다. 암질이 거친 응회암지대로, 벼랑과 암반의 돌로 조성한 고려 시대 불교유적이다. 대부분 손을 소매나 법의 안으로 넣고 옷 주름을 몇 가닥 선묘로 음각하거나 단순화시킨 상호(相好)의 석불 이미지는 그야말로 토속적인 조형미를 물씬 풍긴다. 전통식 석탑구조를 벗어난 추상적인 석탑들은 석불들과 더불어 현대조각을 연상케 한다.

천불천탑이라 불리 울 정도로 많은 석탑과 석불 유적에는 여러 설화가 전해 경이로움을 더한다. 산정상에 누운 좌상과 입상의 와불, 경내 가운데의 두 부처가 등을 대고 좌정한 석조불감, 7층이나 9층의 높다란 석탑 등 미완성인 듯한 형상미와 어수선한 사원 구성이 그러하다. 왜침을 막는 호국의 수호신이거나 미완의 도량인 점에 대한 상징성이 재해석되기도 하였다. 특히 황석영의 『장길산』, 송기숙의 『녹두장군』 같은 대하 역사소설에서는 민중혁명의 시대적 좌절에 따른 미래의 희망으로, 운주사를 미륵사상에 대비시키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1980~1990넌대 운주사는 미술사 유적으로 관심보다 시소설이나 영화의 무대로 인기를 얻었다.

 

운주사의 석탑과 석불 : 최선의 조형물로 조화를 이룬 도량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해 7세기 전반 부여 정림사지와 익산 미륵사지, 경주 황룡사, 금동미륵반가상 시기를 거쳐, 8세기 중엽 석굴암이나 불국사의 조성을 통해 민족적 이상미를 구축했다. 신라에 이어 고려는 불교의 나라였다. 고려의 불교문화는 시기 변화와 유형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통일신라 말 8세기 후반~9세기 이후 이상미의 퇴락형식은 고려 초 10세기의 석탑과 승탑, 불상 조각으로 이어졌다. 9~10세기 호족의 성장을 기반으로 삼아 지방별 유파나 개성적 표현이 두드러졌고, 신비로운 조성배경과 과정에 기복(祈福)을 강조한 토속적인 형식이 부상했다. 또 고려는 승과(僧科)를 통한 승려의 배출이나 8만대장경의 조성 등 불교학이 융성했다. 후기에는 섬세한 채색의 불화가 발달하였고, 원의 간섭기에 그 영향을 받아 불상과 불탑의 조형이 화려한 성향을 띄기도 한다.

이 같은 한국불교미술사 흐름에서 운주사 석불 석탑의 위상이나 편년을 설정하기란 쉽지 않으나, 고려 전기(前期) 지역 형식과 토속적 이미지의 등장에 비중을 두고 싶다. 아무래도 운주사 석불 석탑은 후기의 화려함이나 장식적 성향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석조 불상과 석탑의 모양새는 크게 보면 그나마 비교적 전통성을 유지한 경우와 전통성에서 크게 벗어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불상에서는 크고 작은 돌부처를 암벽에 세우거나 앉힌 불상군이 이채로우며 와불과 석조 불감의 불상 그리고 마애불 등 각기 독립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예배상 유형이 그런대로 격조를 갖춘 편이다. 탑에서는 백제계나 신라계 그리고 전형적인 고려 탑의 면모를 갖춘 방형 옥개석의 전통식과 원반형이나 원구형의 옥개석을 쌓아 놓은 특이한 유형으로 구분된다. 불상이나 탑의 생김새 차이가 제작 시기의 일정한 경과를 의미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단순한 배열상의 문제일 수도 있어 지금으로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이처럼 신비에 싸인 운주사 불적의 베일을 벗기기 위해서는 제작 시기나 제작 기간은 물론이거니와 다탑봉에 천불천탑을 조성하려 했던 세력과 그들의 불교 사상적 성향 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어쨌든 운주사의 석불과 석탑을 보며 확실한 것은 거친 석질로는 이보다 더 조각 솜씨가 발휘될 수 없는 최선의 조형물로 조화를 이룬 도량이라는 점이다.

천년을 유지해온, 삶과 신앙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다시 나기를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사진학 프로젝트 2차 세미나 및 워크숍이 2019년 6월 21일 (금) ~ 22일 (토) 1박 2일 전남 화순군 운주사에서 가졌다. 6월 21일 오후에는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와 천불천탑 사진문화관 공동세미나 “한국의 사진은 불교를 어떻게 표상하는가”라는 주제로 운주사 입구에 지은 천불천탑 사진문화관 강당에서 열렸다. 사진작가이자 문화관 명예관장인 오상조의 「사진으로 만나는 운주사」,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연구원 최연아의 「한국의 사진은 불교를 어떻게 재현, 표상하는가」 발표에 앞서 한, 내 발표는 「고려 시대 불교미술의 흐름과 운주사 석불·석탑」이었다.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천불천탑 사진문화관, 『한국의 사진은 불교를 어떻게 표상하는가』, 2019. 6.) 발표문은 그동안 썼던 다섯 편의 일부를 수정 보완해 짠 것이었다. (이태호, 『이야기 한국미술사』, ‘제7강 고려·조선 시대 불교미술’, 마로니에 북스, 2019. ; 이태호, 「한국 마애불의 유형과 변모」, 󰡔불교문화연구󰡕 7, 남도불교문화연구회, 2000. ; 이태호·천득염·황호균, 󰡔운주사󰡕, 대원사, 1994. ; 이태호·황호균, 「운주사 불상조각의 형식적 특징과 편년고찰」, 󰡔운주사종합학술보고󰡕, 전남대학교박물관·화순군, 1991. ; 이태호, 「한 유럽인 예술가의 전생 찾기」, 요헨 힐트만, 이경재·위상복·김경민 역, 『미륵』, 학고 재, 1997.) 앞서 소개한 글의 일부는 발표문의 운주사 석불과 석탑에 관련한 내용이다. 이 글을 정리하며 다시 운주사의 과거와 현재를 떠올리며, 발표문의 마무리를 아래와 같이 피력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허름한 요사채만이 지키고 있던 운주사 일대의 석탑과 석불 주변은 논과 밭이었다. 능주 또는 남평에서 운주사로 가는 비포장도로는 논길과 산길로 사람들의 손길에 훼손되지 않은 신비감과 자연미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때를 증언하는 사진으로 독일인 힐트만Jochen Hiltman 교수의 관점과 작업이 주목할 만하다. (Jochen Hiltman, Miruk-Die heiligen Steine Koreas, Kunst Reisen, 1987.) 단순하고 추상적 석탑과 석불이 지닌 현대적 조형물 같다는 감명에서 접근한 점이 그러하고, 특히 힐트만 교수의 1980년대 운주사 사진작품들이 1909~40년대 논밭에 늘어선 석탑과 석불의 유리건판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황과 연장 선상에 놓여 있어 눈길을 끈다. (『화순 운주사』-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위한 옛 사진 모음, 화순군, 2016.) 이 반세기 시차의 사진 자료들은 천불천탑 운주사가 천년을 그렇게 논밭과 함께 해왔음을 시사한다. 나는 힐트만 교수의 『미륵』 번역서를 발간할 때, 아래와 같이 생각했다.

“힐트만 교수가 10년 전에 직접 촬영한 사진작품들은 역사성과 본래 지녔을 원초성을 지녔고 빼어난 영상미의 예술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천불동의 석탑과 석불의 조형미와 함께 그것이 지닌 과거와 현실 속의 관계들을 하나하나 풀어내었다. 석탑과 석불의 관련성을 드러내고, 그것들이 산, 바위, 개울, 나무 등 자연과 어울린 풍광을 잡아내었다. 또 논밭과 이랑, 길 등 불적들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의 흔적이 서로 혼연일체가 되어 조화로운 친연성을 면밀하게 포착하였다. 이러한 힐트만 교수의 사진작품들에는 그의 표현대로 “땅에서 자라난 것 같은 농부의 심성을 닮은 미륵석불과 하늘로 오르려는 석탑의 형상미”를 하나의 통일체로 간주한 예술적 감수성과 예술론이 흠뻑 배어 있다.” (이태호, 「한 유럽인 예술가의 전생 찾기」, 요헨 힐트만, 이경재·위상복·김경민 역, 『미륵』, 학고재, 1997.)

운주사의 석불과 석탑, 그리고 사원 내외는 삶을 위한 생산의 터전과 신앙, 종교적 조형물이 자연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사람들의 생활 속에 살아 있는 예배공간이었다. 그런데 이 감명 깊던 유적이 1990년대 이후 거대한 일주문과 불전이 들어서고, 계곡 마당에 잔디가 깔리고, 현대의 모각(模刻) 불상이나 석조물들이 들어서는 등 말끔하고 새롭게 단장되면서 그 맛을 확 잃었다.

운주사를 돌아 나오며, 경내 땅을 1980년대 논밭으로 되돌려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운주사가 천년을 유지해온, 인간의 삶과 신앙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다시 날 수는 없을까. 천년의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 일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지름길 아닐까.

 

천태산과 석탑을 그려

워크샵 이튼날 6월 22일 이른 아침 운주사를 찾았다.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의 연구원 박평종, 정하경, 최연아, 이혜린, 김소혜 선생이 함께했다. 운주사길에는 붉은 양귀비꽃과 붉고 흰 접시꽃이 지천으로 만개하였다. 경내의 명당터라는 곳을 들러 와불 정상에 오르다 여름 아침 풀섭에서 일찍 핀 주황색 참나리꽃을 만나 반가웠다. 참나리꽃은 세 송이가 나란히 피었고, 그 아래 강아지풀들이 어울려 있었다.

두 석탑 아래 십여 분의 석불 가족이 배열된 벼랑을 지나 와불을 찾으니, 북쪽 산능선 너머로 멀리 세모꼴 천태산 봉우리가 우뚝하다. 와불과 새벽 조우가 이루어진 듯했다. 풍수도참설의 원조격인 신라 말 도선이 천태산에서 천불천탑을 몰고 와서 낮과 밤에 걸쳐 사원을 조성하다가 새벽닭이 우는 바람에 마지막 와불을 세우지 못했다는 설화가 전하는 곳이다. 와불과 천태산 전경을 대충 스케치했다. (도 1) 그리고 벼랑의 석불과 9층, 7층석탑, 불두 등 반가운 이미지를 찾아 그렸다. 

2. 이태호, 운주사 9층석탑, 2019.6. 면지에 수묵, 64x24cm

또 항아리 모양 원구형 4층석탑, 호떡탑이라 애칭되는 원반을 쌓은 연화탑, 석조불감 동쪽에 세운 7층석탑, 그리고 운주사 경내의 9층석탑을 그려 보았다. 암반을 다듬고 세운 9층석탑은 운주사 경내 입구를 지키는 배의 큰 돗대에 해당하는 가장 높은 조형물이다. (도 2) 전통형식이면서 탑신마다 네잎 꽃무늬를 음각한 점이 독창적이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운주사 석탑들이 지닌 심플한 현대적 조형미의 감명을 다시 실감했다. 옛 사진에 7층이었으나 현재는 4층만 남은 원구형 석탑은 더욱 현대적 추상미에 근사하다. 이와 함께 세부를 생략한 석불두(石佛頭)를 그려 보니 부랑쿠시의 추상조각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루마니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는 민속예술의 영향을 받은, 현대 추상조각의 원류로 꼽힌다. 루마니아는 국민의 작가로 브랑쿠시의 생일인 2월 19일을 국경일로 지정했을 정도이다. “신처럼 창작하고, 왕처럼 명령하며, 노예처럼 작업하라.”라는 명구를 남겼다. 나는 2017년 뉴욕 모마나 구겐하임 뮤지엄을 처음 방문했을 때, 브랑쿠지의 1910~20년대 <Sleeping Muse>나 <Endlees Column>, <Bird in Space>(1923) 등을 관람하면서, 어쩜 운주사의 돌부처와 석탑을 이렇게 세련되게 다듬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특히 <Sleeping Muse>는 눈코입이 간략한 석불두 이미지와, <Endlees Column>은 항아리 모양 석탑 쌓기와 유사하다.

이태호의 답사스케치2 : 프랑스 인상주의 답사 – 노르망디와 일드프랑스

이태호의 답사스케치2 : 프랑스 인상주의 답사 – 노르망디와 일드프랑스

이태호의 답사스케치2 : 프랑스 인상주의 답사 – 노르망디와 일드프랑스
06/11/2019
/ sketch

지난 4월 8일부터 15일까지 프랑스 빠리에 다녀왔다. 모네나 반 고흐 등 인상주의 화가의 주요 유적과 현장을 답사했다. 출발지 아파트 앞 서울의 흰 목련 꽃부터 시작해 알프스산 몽블랑 설경까지 스케치북 7권에 60여 점을 담아왔다.

4월 8일 오후 2시쯤 인천공항에서 알리딸리아(AL ITALIA) 비행기를 타고 서쪽으로 해를 따라 이동하며, 창밖으로 열 시간가량 계속되는 낮 풍경을 즐겼다. 울란바토르 근처를 지나며 중앙아시아의 설경, 굽이치는 강과 어울린 초원이 아스라이 펼쳐졌고, 그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으며 스케치해 두었다. 해지는 지중해와 일몰에 물드는 이태리 반도를 부감으로 감상하며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 내렸다. 로마공항을 거쳐 한밤중 빠리에 도착했다. 민박집에 여장을 풀고 다음 날부터 강행군이었다. 

모네가 즐겨 그린 노르망디 해변과 루앙성당

4월 9일 첫날은 모네가 즐겨 찾아 그렸던 노르망디 해안(Côtes Normandes) 바위벼랑과 에트라타(Étratat) 마을, 옹프뢰르(Honfleur) 항구, 노르망디의 중심도시인 루앙(Rouen)과 루앙 대성당을 답사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추구한 일광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였다. 봄 햇살이 만들어내는 프랑스 북서부 지역 경치의 변화를 몸으로 체득하였다.

프랑스의 서쪽, 세느강의 하구인 노르망디 해안은 에트라타 마을과 해변이 어울려 절경을 이루었다. 세 곳으로 뻗어난 끝부분이 크고 작은 코끼리 코 모양이어서 아빠코끼리 바위, 엄마코끼리 바위, 아기코끼리 바위로 불린단다. (도 1) 해안에서 파노라마로 찍어보니 엄마코끼리 바위와 아기코끼리 바위(오른쪽)가 한 화면에 들어오고, 우연치 않게 한가운데 검은새 한 마리가 잡혔다. (도 2)

해안에 절벽을 이룬 바위벼랑은 모네가 즐겨 그린 곳이다. 해안을 따라 옆줄무늬 흰 벼랑풍경은 화폭에 옮긴 대로 적절한 구도가 잡히고 그림이 되는 것 같았다. 흰 벼랑은 미묘한 변화의 바다 물색과 하루 햇살에 물드니, 인상주의 화가들의 눈을 현혹할 만하다고 수긍되었다. 잠깐 머물렀지만, 서해의 일몰 풍경은 모네나 그 당시 화가들이 선호했던 대로 장관을 이룰 거라 상상만 해보았다.

처음 대하는 풍광의 아름다움에 나도 신바람이 일었다. 흥에 겨워 바위 절벽을 여러 점 스케치하였다. 모네를 따라 큰 코끼리바위를 카메라에 담으며 살피니, 가장 북쪽의 아기코끼리 바위 언덕 초원에 지은 돌집 성당 한 채와 작은 소나무가 눈에 띄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바닷바람을 견디며 굳건히 버틴 성당과 휜 소나무를 여러 장 그려 보았다. (도 3)

 

붉은 색ROUGE’검은 색NOIR’

둘째와 셋째 날은 빠리 시내 답사로 일정을 잡았다. 루브르박물관을 둘러보고, 오르세미술관과 오랑주리미술관에서 모네나 세잔, 반 고흐 등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을 살폈다. 언제 봐도 인상주의 작품들은 요동치는 붓질 감각과 색감, 그리고 대담한 화면운영 등 신선하고 매혹적이다. 오랑주리의 원형 공간에 진열한, 모네의 수련 연작을 함께 관람한 최인영이 회화과 출신답게 벅찬 눈물로 감격했다. 그 유명한 루브르박물관과 뽕피두센터를 들렀고, 기메박물관과 몽쏘공원의 세르누치박물관에서 프랑스 소장 동양미술품을 감상하였다. 기메박물관 한국실에서 갸우뚱한 철화무늬 분청자 작은 항아리를 반가운 마음에 스케치했다. 세르누치박물관에서는 2017년 이응노 회고전(LEE UNGNO, L’HOMME DES FOULES)을 갖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오르세미술관의 기획전 ‘검은 색(NOIR)’이 끌렸다. 모네, 세잔느, 마티스, 피카소 등 18~20세기 흑인을 모델로 삼은 미술 작품부터 아프리카 원주민 조형방식에서 영향을 받은 프리미티즘, 흑인 예술까지,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 지배 이후 프랑스 근현대문화사를 새롭게 다가가게 해주었다. 얼핏 흑인미술의 부상과 새로운 재평가를 예견해보았다.

또 그랑 빨레의 러시아 ‘10월혁명’(1917년) 관련 기획전 ‘붉은 색(ROUGE)’도 인상 깊었다. ‘루즈’의 시원이랄 수 있는 프랑스혁명(1789년)과 그 연장이랄 지금의 노란조끼 시위와 관련해서 그랬다. 주말에는 시내 주요 거점은 물론, 심지어 그랑 빨레와 건너편 쁘띠 빨레 궁전 미술관마저 장갑차가 배치되어 있었다.

 시간이 넉넉지 않고 시내 관광도 여의치 않아, 겨우 미라보다리 외양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다리 너머로 에펠탑과 자유의 여신상이 가까이 보인다. (도 4) 미라보다리를 밟으며, 마리로랑생을 사랑했던 초현실주의 시인 기욤 아뽈리네르(Guiaume Apollinaire, 1880~1918)의 시 ‘미라보다리(LE PONT MIRABEAU)’를 유명한 샹송 가수 이베트 지로(Yvette Giraud)의 노래로 다운받아서, 다리 아래로 강물과 함께 흐르는 사랑과 이별을 들었다. 대학 시절 간혹 노래를 부를 자리에서 웅얼대던 추억도 떠올렸다.

빠리에서 하루 저녁은 리도 쑈를 관람했고, 또 하루 저녁에는 세느강에서 배를 타고 디너 크루즈를 즐겼다. 특히 에펠탑과 자유의 여신상에 떨어지는 조명과 빛의 변화가 반달의 봄밤과 어울려 장관을 이루었다. (도 5)

몽마르뜨 성당 언덕에서 빠리 전경을 굽어보았다. 오래된 도시 빠리는 여전히 여기저기 공사 중이었다. 2001년, 2016년 여름에도 발길 닿는 대로 도로나 건축물들이 공사 중이었는데, 세 번째 방문인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노틀담 대성당도 첨탑과 주변에 지지대 가설물이 설치되어 보수공사 중이었다. 2016년에 내부를 자세히 살폈기에 외관만 보고 지나쳤다. 일행들은 성당 정면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성당을 둘러 보고 난 3일 뒤, 귀국하자마자 안타까운 화재 소식을 접했다.

 

일드프랑스의 봄 경치

나흘째 날에는 프랑스 북부지역 일드프랑스의 봄을 만끽했다. 한국의 봄 날씨와 비슷했다. ‘프랑스의 섬’이라는 뜻의 일드프랑스(Île-de-France)는 빠리를 중심으로 세느 강, 우아즈 강, 엔 강, 마른 강이 빙 둘러 있는 지형이 섬 같다 해서 부쳐진 지명이라고 한다. 끊임없이 펼쳐진 지평선 아래 낮은 구릉지 노란 유채밭과 낮게 자란 초록 밀밭, 그리고 가지런히 정비만을 해놓은 황토 흙밭이 흰 꽃 연두 잎 수목들과 어울려 장관이었다.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 <구름하늘 아래 밀밭> <오베르 근교 밀밭> 등 옆으로 긴 화면의 풍경화가 공감되는, 풍요의 땅다웠다. (도 6) 고속도로에서 봄비도 만났고, 봄비 지난 뒤 해질녘 구름 햇살의 장쾌한 풍경을 만나기도 했다. (도 7) 그리고 마을 골목과 강변에는 봄꽃들이 가득했다. 서울의 꽃과 빼닮은 노란 민들레와 반 고흐가 즐겨 그렸던 보라색 아이리스꽃을 스케치북에 담아 보았다. (도 8, 9)

세 번째 방문한 오베르와 지베르니는 여전했다. 오베르 쉬르 우와즈(Auvers-sur-Oise)에는 반 고흐의 마지막 생활공간과 무덤, 그림 장소를 따라 발자취를 잘 정비하고 구성해놓았다. 한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아, 반 고흐의 인기를 실감했다. 상대적으로 폴 세잔느나 꼬로, 이곳 출신 의사 가셰나 화가 도비니(Carles François Daubigny, 1817~1878)에 대해 소홀한 듯해 아쉬웠다. 도비니는 마을을 다녀간 유명화가에 밀려 있으나, 생가와 아뜨리에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물의 화가’라는 별명처럼 우와즈 강 풍경을 즐겨 그렸고, 아뜨리에를 관람하니 벽면의 닭이나 꽃그림 장식에는 동양적 취향이 역력했다. 도비니는 한국에 좀 생소하지만, 도비니의 풍경화가 몇 년 전 케이옥션에 나오기도 했다. 그리 비싼 값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도비니미술관에서는 꼬로(Camille Coro, 1796~1875) 기획전을 관람했다. 꼬로는 19세기 인상주의 이전 풍경화가로, 오베르의 마을 골목풍경을 여러 점 남겼던 화가이다. 전시장의 풍경화들은 어두운 숲에 드러나는 밝은 하늘 색감을 통해 인상주의의 여명을 살폈다. 무엇보다 19세기 오베르성을 개조해, 영상으로 인상주의의 형성과 변모,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을 소개하는 전시공간들이 좋았다. 

지베르니(Giverny)는일드프랑스와 이어진 노르망디에 속하며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작업실과 정원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모네가 조성한 연못에는 붉은색 수련잎들이 듬성듬성 물에 떠오랐다. 주변에는 튜립, 철쭉, 수선화, 양귀비, 아이리스, 히야신스 등이 화려한 봄 색깔을 뽐내고 있었다. (도 10) 이들은 서울 시내 거리 장식 봄꽃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만국 공통의 꽃 문화, 곧 꽃 제국주의를 실감케 했다. 모네의 수련 그림을 따라 그리면서, 봄 연못의 풍경과 각종 꽃을 사생하였다. (도 11) 가히 환상적이라 할, 잽싼 모네의 붓질 감각을 익혔다. 꽃 정원을 굽어보는 2층 건물 아뜨리에 벽면에는 온통 일본 에도시대 우끼오에 판화들이 가득 차 있었다. 연못 정원의 꾸밈과 마찬가지로 모네의 일본 선호를 엿보게 해주었다.

지베르니미술관에서 마련한 ‘모네와 오뷔르땡(Monet-Auburtin, Une Rencontre Artistique)’ 두 작가의 비교 전시가 눈길을 끌었다. 특히 오르세미술관 소장 작품을 포함해 노르망디 해안 풍경화들을 실견하게 되어 반가웠다. 오베르땡(Jean Francis Auburtin, 1866~1930)은 모네보다 한 세대 아래로 우리에겐 좀 생소한 화가이다. 빠리의 에꼴 드 보자르 출신 상징주의 화가로 신화적 소제를 즐겨 그렸으며, 인상주의 화풍을 평면적으로 재해석했다. 모네 그림에 비할 때, 좀 딱딱해 보였다. 

이번에 처음으로 지베르니와 멀지 않은 보쉬 센느의 고암 이응노 작업실을 방문했다. 미리 연락하지 않고 주소로 네비게이션에 의존해 찾는 바람에, 고암의 미망인 박인경 선생님과 아들 이융세 선생님께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두 분 다 화가로 활동 중이다. 마침 내가 홍성의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 설립부터 명예관장과 운영위원장을 지내며 박인경 선생님과 안면을 텄기에 일행과 사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도 12) 세느강을 굽어보는 언덕에 잡은 터가 최고였다. 한옥지붕 너머로 전개된 세느강 풍경을 스케치해보았다. (도 13)

 

유럽 학예문화의 진수를 보며

이번 프랑스 답사는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한 유수일, 이군무, 티제이 김, 윤영주, 김수미, 최인영 여섯 명과 다녀왔다. 이들은 2016년에 입학한 동기로 결속력이 좋은 팀을 이루었다. 만학도인 유수일과 이군무 두 사람은 한국도자사로 석사논문을 쓰고,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나는 이들의 졸업여행을 겸한 프랑스 여행에 초청을 받아 동참했던 셈이다. 이에 대한 답례로 여섯 명에게 그림 한 점씩 그려주었다.

뉴요커인 티제이 김이 동기모임을 이끌어온 것처럼, 이번 여정도 그가 주도했다. 저녁 리도 쑈의 관람이나 세느강에서 선상 저녁 식사, 쌩 뚜앙 플리마켓 돌아보기 등은 티제이 김의 기획이었다. 티제이는 쌩 뚜앙 어느 갤러리에 걸린 피카소의 판화인쇄 인물 드로잉 소품들을 답사기념으로 일행들에게 선물했다. 마침 빠리에서 티제이 김의 전문분야인 고서를 중심으로 아트페어가 대규모로 열려, 우리 답사는 이 행사의 참여를 겸한 것이었다.

 4월 12~14일 그랑 빨레(GRAND PALAIS)에서 열린 고서와 미술품들(LIVRES RARES & OBJETS D’ART)은 유리 천정의 대형 중정에 부스 별로 진열되었다. (도 14) 티제이 덕분에 오픈 첫날 브이아이피 행사를 참여하였다. 한국의 참여 부스는 없었고, 티제이가 세계 고서와 고지도계 마당발로 일당백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위고나 보들레르 등의 초간본이나 15~19세기 유럽에서 제작된 고지도를 보며, 켜켜이 쌓인 유럽의 학문과 예술을 새삼 살피게 되었다. 유럽 외에도 다양한 지역의 문화가 소개되었다. 한 고서 부스에서 하바나 항구와 전경을 담은 <쿠바 섬 풍경화>가 눈길을 끌었다. 1856년 유럽 작가의 석판화로 그림의 아래 들에 소 두 마리로 써레질하는 장면을 보니,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겨리소의 <쟁기질>이 떠올라 그랬다. 소의 목 부분에 설치된 멍애도 비슷해 농업문화의 유사함을 실감했다. 겨리소는 오른쪽에 마라소라 하여 능숙한 놈을 배치해 미숙한 놈과 짝을 이루게 한다. 쿠바의 소 부리기도 이와 유사해 보인다. 마침 부스의 주인이 티제이와 잘 아는 처지여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도 15, 16)

또 이 부스에서 중국의 풍속화첩을 발견했다. 부유층이나 관료의 이동하는 가마, 악대, 칼춤이나 격투, 관아의 형벌 등이 담긴, 19세기 말~20세기 초 마카오나 홍콩 등지에서 판매되었던 화첩이다. (도 17) 화첩의 풍속도들은 먹과 채색으로 그리면서도 서양화 입체화법이 뚜렷한 편으로, 마치 구한말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첩을 연상케 해 흥미로웠다. 이 중국 풍속화첩은 중국 종이가 아닌 서양의 얇은 반불투명지에 그린 것이고 꾸밈새는 거칠지만, 서양식 앨범 형태여서 새롭게 다가왔다.

중국과 일본 서적과 그림들이 여기저기 상당히 많은 부스에 출품되었다. 17~19세기 유럽의 중국과 일본문화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었으며, 특히 인상주의에 영향을 끼친 에도시대 이후의 우끼오에(浮世繪) 다색판화 작품들이 많아 놀랐다. 상대적으로 한국유물은 전혀 보이지 않아 조금은 섭섭했다.

 

귀국 길의 알프스 설경

4월 14일 오후 귀국 길에 올랐다. 샤를 드골 공항을 출발해 로마로 가는 비행기에서 굽어보는 하얀 설산경이 오후 햇살을 받아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몽블랑과 알프스산맥이 그렇게 전개되었다. (도 18) 사진을 찍고 빠르게 스케치했다. 로마에서 인천공항으로 귀국하는 항로에서는 비행기를 타자마자 유럽의 구름 아래로 지는 일몰을 감상했고, 중국의 서해안인 황해로 해가 반바퀴 돌아서 뜨는 일출 때까지는 밤을 끼고 이동했다. 15일 아침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태호의 답사스케치1-지리산의 봄 풍광과 꽃향기

이태호의 답사스케치1-지리산의 봄 풍광과 꽃향기

이태호의 답사스케치1-지리산의 봄 풍광과 꽃향기
05/28/2019
/ sketch

나는 정년을 코앞에 둔 2015년부터 스케치를 병행하며 답사를 시도해 왔다. 그 시작은 조선 시대 한양 진경산수화의 작품과 그 현장을 찾아 월간지에 연재한 “서울이 아름답다”(월간미술, 2015. 5~2017. 3.)였다. 12회 연재를 묶어 『서울산수』(월간미술사. 2017.)를 발간했고, 연재하며 그린 사생화를 모아 생애 첫 개인전(노화랑, 2017. 7.)을 갖기도 했다. 그 뒤로, 2년 동안 쌓인 스케치북이 100권이 넘는다.
새해부터는 한 달에 20권가량씩 소화하는 것 같다. 이제 스케치가 일상으로 자리를 잡아 가는 모양이다. 이를 본 박주석(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교수께서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홈페이지에 소개하자고 제안해 왔다. 여건이 닿는 대로, 혹은 특정 지역 답사나 여행에서 찍은 사진이나 그림을 틈틈이 소개해보겠다.

지난 3월 21일부터 23일까지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학생들과 지리산 답사를 다녀왔다. 3월 21일에는 국립전주박물관을 들러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경기전과 어진박물관을 거쳐 남원 만복사지를 둘러보았다. 마침 21일이 보름달 뜨는 날이어서 저녁 식사 후 광한루원 완월정(玩月亭)에서 멋진 보름달 구경을 기대했는데, 아침부터 짙은 비구름이 가시지 않았다. 이틀의 숙소는 구례 화엄사 입구였다. 22일에는 화엄사, 운조루, 연곡사, 쌍계사를 답사했고, 23일에는 남원지역 운봉 서천리 마을 돌장승, 황산대첩비, 실상사를 둘러보고 상경했다.
오랜만에 찾은 지리산의 풍경과 꽃들과 달 등을 스케치하며 봄을 만끽했다. 그동안 습관으로 찍어왔던 문화재를 뷰파인더에 담지 않으니 전체 여정이 가벼웠던 대신, 스케치가 즐겁긴 해도 큰 일감이었다.

3월 21일 답사 마무리에 남원의 서쪽 주생면 딸기농원에서 떨어지는 노을을 보며 저녁을 먹었다. 지리산 자락을 배경으로 섬진강에 합류하는 요천강 안개와 미세먼지 속의 지는 해를 답사 첫 풍경 스케치로 담아 보았다.

3월 22일에 그린 화엄사 각황전 오른편을 지키는 고목 홍매는 만개하였고, 흑매라 불릴 정도로 검붉은 꽃잎 색이 여전하였다.
운조루 주변에는 매화와 산수유 꽃들이 지는 때에 안채의 흰 목련이 꽃봉우리를 내밀며 자태를 뽐내고 있어 옛 안채 주인을 연상하며 그렸다. 또 운조루에서 맞은편 오봉산을 보니, 섬진강 주변 보리밭의 연녹색 들이 봄날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파노라마로 그 정경을 담고, 옆으로 긴 화면에 사생하였다.
오후에는 섬진강 따라 구례 연곡사와 하동 쌍계사를 둘러보는 일정이었고, 연곡사 경내의 신라 말 3층석탑을 그렸다. 지금처럼 연곡사가 복원되기 이전에는 피아골을 배경으로 홀로 흰 자태를 단아하게 뽐내었었다.
밤에 다시 화엄사로 향했다. 어제 못 본 음력 2월의 보름달 대신, 22일이 음력 열여섯 날인 기망(旣望)이니 그 둥근 달을 보러 8시경 희망자를 모아 화엄사 마당에 섰다. 근데 해발 일천미터 가량의 산 능선 너머로 달이 여간 떠오르지 않았다. 봄추위에 떨며 기다리는 동안 오랜만에 9시 범종 치는 소리를 감상했고, 각황전과 대웅전 사이의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찾았다. 밤 10시가 돼서야 강황전 맞은편 동산으로 달이 떠올랐으나, 맑았던 하늘에 옅은 구름이 몰려 완연한 월출을 감상하진 못했다. 각황전에 서니 신라의 거대한 석등 위로 달이 떠올랐다. 오른 달과 화엄사 경내 풍경을 낮은 조명 아래서나마 사진을 찍고 스케치했다.

3월 23일 새벽 숙소 문을 여니 어제 밤 화엄사에서 본 달이 구례 읍내 쪽으로 지고 있었다. 편하게 새벽 하늘을 보며 사진을 찍고 스케치했다.
실상사 람천 다리를 건너려니 동쪽 멀리 천황봉 자락이 위세로왔다. 이 풍광을 화면에 담았고, 개천 건너 1725년에 조성한 석장승과 느티나무 고목을 함께 담아 보았다. 지리산 북쪽 그늘이라선지 매화가 한편 지면서 한창이었다. 경내를 돌아 홍척국사비와 승탑으로 이동하니, 청매 꽃향기가 진동해왔다. 올해 마지막 매화 그림이려니 하며 답사 끝 그림으로 청매도를 그려보았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