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2 – 광주와 마곡에서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을 만나다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2 – 광주와 마곡에서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을 만나다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2 – 광주와 마곡에서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을 만나다
04/30/2020
/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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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광주 무등산의 잔설(殘雪)을 만났다. 봄물이 오른 연녹색과 황갈색 톤의 산기슭부터 정상의 눈 쌓인 정경까지, 지난 20여 년간 광주에 살며 눈에 익었던 추억을 되살려 주었다. 넉넉하게 열린 무등산의 품세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화폭에 담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 3월 11일 광주의 예술인 마을 양림동 이이남 작가의 새 작업실 창으로 든 무등산 정상이 그랬다. (도 1, 2) 광주를 찾은 것은 서울식물원 마곡문화관이 기획한 “이이남, 빛의 조우”(2019. 11. 21.~2020. 4. 19) 전시회에 대한 도록의 평문을 쓰기 위해서였다.

 이이남 작가는 우리시대 미디어 아티스트로 명성을 얻었다.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를 넘나들며, 익숙한 이미지를 새롭게 흥미를 끄는 다양한 콘텐츠로 디지털 예술세계를 펼쳐왔다. 세상, 현실, 역사, 환경 등의 문제, 종교, 인간에 대한 성찰과 고뇌를 재미있는 연출과 구성으로 버무려왔다.

 미디어아트, 디지털 민중미술, 디지털 팝아트, 포스트 모더니즘 등 여러 사조와 경향이 혼재한 이이남의 작업은 20세기 후반 비디오아트 창시자로 꼽히는 백남준을 잇는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과 아시아를 넘어 미국과 유럽의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초청하는 기획전과 개인전을 가졌고, 2016년 벨기에에서 우리 시대 비디오아트의 거장이자 전설 빌 비올라와 2인전은 이이남 예술사의 정점으로 꼽을 만하다.

 이이남의 디지털 혼성이나 이미지 변환 작업은 놀랍게도 이이남도 즐겨 다룬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변형화법과 유사하다. 예컨대 여러 시점의 봉우리나 계곡을 한 화면에 합성하는 <금강전도>의 다시점(多視點) 합성방식은 몽타주(montage)에 해당하고, <박연폭도> 처럼 폭포의 천둥소리를 담기 위해 화면을 길게 변형한 화법은 모핑(morphing)과 흡사하다. 그래서 나는 겸재 정선이 지금 활동한다면, 아마 이 시대 최고의 디지털 작가가 되리라고 말할 정도이다.

  도록 제작이 늦게 결정되어 코로나 사태 한참 때 움직이게 되었다. 그 바람에 인적이 드문, 남도에 가득한 봄기운을 만끽했다. 청매와 홍매와 목련꽃들이 한창이었고, 청보리밭이 온통 봄을 뽐내고 있었다. 광주와 담양 죽녹원 이이남의 미디어 작품전시관 ‘이이남 아트센터’를 오가며 카메라에 담았다. 담양 추월산 실루엣을 그리고, 해지는 병풍산을 담았다. (도 3, 4)

 광주의 작업실과 담양 죽녹원 가까이 작품전시관을 왕래하기 부담스러워, 명지대학교 대학원생 하휘구의 승용차를 대절해 다녀왔다. 대학원에 신입생으로 입학했으나,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안유현 씨와 석다희 씨가 동행했다. 석다희 씨는 덕성여자대학교 대학원생이다. 뜻하지 않게 반가운 김자우 박사와 이지윤 숨 대표가 이이남 작가를 만나러 왔기에, 합류해 저녁 식사를 하며 이이남의 작품세계를 토론했다.

  그리고 3월 14일 이이남의 작품들을 살피러 마곡문화관 전시실을 다시 찾았다. 이때 마곡문화관의 원모습인 배수펌프장과 주변을 둘러보며, 물이 빠져나가는 수문 위로 오래 묵은 버드나무가 자라 있어 스케치해보았다. (도 5, 6) 또 멀리 궁산과 강 건너 행주산성이 한눈에 드는 명소이다. 양천의 역사와 맞닿은 이이남의 2019년 신작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Reborn Light, Yangcheon)>을 비롯해, 다섯 점의 디지털 작품들은 전시장으로 변신한 마곡문화관에 맞춤 같았다. (도 7, 8, 9) 아래에 이이남 전시 도록에 쓴 내 글을 첨부한다. 

 

디지털 이미지의 혼성과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법

– 마곡문화관이 기획한 이이남, 빛의 조우전시를 보며

 1.

 작년 11월 중순이다. 강서구에 소재한 서울식물원 마곡문화관이라며, 정수미 학예연구사에게 전갈이 왔다. 이이남(李二男) 개인전 오픈에 참석해달라는 초대였다. 축사도 해주고, 도록의 글도 써달라는 거였다. 

 서울식물원 북쪽의 마곡문화관은 언뜻 오래된 방앗간처럼 보였다.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지은 목조건물로, 옛 배수펌프장이었다. 1925년 여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를 치른 뒤, 양천수리조합이 곡창지대인 김포 마곡평야의 물을 조절하기 위해 1927~8년에 지었단다. 마곡문화관은 국가등록문화재 제363호(문화재명 : 서울 구 양천수리조합 배수펌프장)로, 2018년 문을 연 서울식물원이 관리하고 있다. 맨 아래층 원통형 배수시설들을 보존하고 유리 바닥으로 마감해, 멋진 문화공간이 재탄생한 것이다. 

마곡문화관은 북쪽으로 궁산 기슭 겸재정선미술관과 개화산 사이에 배치되고, 강 건너에는 덕양산 행주산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빌딩 숲으로 가려졌지만, 나지막한 발산과 조금 높은 우장산이 너른 평야 남쪽으로 흐르는 형국이다. 동쪽으로는 한강 너머 북한산세가 펼쳐져 있다. 계양산이 자리 잡은 서쪽 들에는 호수공원도 조성하여, 서울식물원과 마곡문화관은 강서구의 명소로 사랑받을 법하다. 

이곳에서 우리 시대를 대표할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의 작품들이 전시되니, 색다른 기대심이 앞섰다. 이이남은 이곳 고을 수령이었던 겸재 정선의 대표작품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박연폭도> 등을 디지털로 소화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1740년 양천현령으로 부임해 1745년까지 역임했다. 수령 재임 기간에 한강을 유람하며 명소를 담은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1740~41년, 50년경, 간송미술관 소장), ≪양천 8경첩≫(1740~45년, 김충현 구장), ≪연강임술첩(連江壬戌帖)≫(1742년, 개인 소장) 등을 남기며, 개성적 회화예술의 기반을 이룩했다. 이를 기념해 양천 관아터 근처에 겸재정선미술관이 건립되었다.  

이이남 작가의 기발하고 새로운 화면을 궁금해하며 마곡문화관에 다가섰다. 흰 천에 LEE LEE NAM이라는 고딕체를 중심으로 ‘서울식물원 마곡문화관 기획전, “이이남, 빛의 조우”, 2019. 11. 21.~2020. 4. 19.’이라는 알림 배너가 걸려 있었다.

  

2. 

전시장 남쪽 문을 들어서자 왼쪽 벽면을 가득 채운 8개의 화면이 눈에 띄었다.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Reborn Light, Yangcheon)>이다. 기둥 사이 8개 화면은 가로 12미터의 폭에 높이 2.4미터로, 8개 풍경이 절묘하게 기둥과 기둥 사이 8간 벽면과 맞아 떨어진다. 화면의 반대편에서 이미지를 쏟아내는 빔프로젝터는 4대이다. 프로젝터 1대당 2개 화면을 그려낸다. 겸재 정선의 양천 8경도 화면부터 전체 동영상은 19분 37초이다. 이이남 작가가 지역 문화의 역사와 공간을 맞춤으로 준비한 초대형 가작이다.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Reborn Light, Yangcheon)>이 여기 마곡문화관의 얼굴로 이대로 보존 전시해도 명물이겠다.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Reborn Light, Yangcheon)>은 겸재 정선의 ≪양천 8경첩≫(비단에 수묵담채, 각폭 33.3 x 24.7 cm)의 여덟 장면이 화면 가득 채워지면서 시작된다. 양천현령 시절인 1740~45년 사이에 그린 화첩으로, <개화사(開花寺)> <낙건정(樂健亭)> <귀래정(歸來亭)> <소악루(小岳樓)> <소요정(逍遙亭)> <이수정(二水亭)> <선유봉(仙遊峯)> <양화진(楊花津)> 8점으로 꾸며져 있다. 서예가로 유명했던 고 일중 김충현의 소장품이었다.

방화의 개화산 중턱 북향으로 앉은 <개화사(開花寺)>는 현재 약사사이며, 고려 시대 석탑과 석불이 모셔진 고찰이다. 양천 관아의 <소악루(小岳樓)>가 세워진 궁산은 고구려와 신라의 유적지로 알려져 있다. 궁산과 마주한 행주산성의 덕양산 기슭 <낙건정(樂健亭)>과 <귀래정(歸來亭)>, 광주바위와 공암 탑산의 <소요정(逍遙亭)>, 안양천이 한강에 합류하는 언덕의 <이수정(二水亭)> 등은 조선 초기 왕자부터 중후기 문인 사대부까지 강변 문화를 즐겼던 풍류 터이자 명승지였다. 지금은 사라진 <선유봉(仙遊峯)>이나 잠두봉 아래 <양화진(楊花津)>은 양천현령이었던 겸재 정선의 통치권이 미친 곳이다.

이들 겸재 정선의 8점 그림은 소품임에도 대형 화면에 확대해 비쳐도 작품성에 손색이 없다. 이이남은 ≪양천 8경첩≫이 명작임을 재확인시켜 준다. 

8경이 조용히 움직인다. 한강 물결을 따라 돗단배나 조각배가 움직이고, 강변 길목에는 나귀 타고 가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는 맞은편 <겸재 정선 고흐를 만나다>의 오른쪽 화면 <설평기려>에서 이동해온 겸재 정선이다. 흰 도포 차림의 문사가 소악루에 출현하며 봄 매화와 진달래를 즐긴다. 연한 녹음 풍경에 안개가 아스라이 깔린다. 이수정으로는 큰 호랑나비가 날아 움직인다. 봄 경치에 빗방울 떨어지며 여름으로 변하고, 소요정으로 호랑나비와 나비 떼가 이동하며 가을 단풍이 물든다. 늦가을 눈이 내리며 겨울로 진입한다. 폭설의 겨울밤 별이 뜨고 이수정에 북두칠성이 반짝인다. 선유봉과 소악루의 눈 쌓인 설경에 유난히 별이 빛난다. 나귀 탄 인물이 여기저기 지나다니며, 겨울밤이 지나 일출의 아침을 맞는다. 이렇게 양천 8경의 4계절이 소리 없이 지나간다. 

조선 시대 자연 풍경을 담은 산수화 양천 8경의 원화 이미지가 사라지고, 제2막으로 전환된다. 깜깜한 어둠에서 물결이 솟고 가라앉으며, 도시가 출현하거나, 그물망이 융기하고 침잠한다. 거대한 파고는 서해로 빠져나가는 한강 물결을 연상시킨다. 검정 바탕에 흰 빛살들이 엉키고 분산한다. 하얀 점들이 뒤섞이며 구름 안개나 연기처럼 일었다 사라진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고 거꾸로 다시 끌어올리고, 들이친다. 좌우에서 빛이 쏟아지면서 가는 선들의 이미지가 흐르고, 대칭형으로 마무리된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겪은 후 건설한 배수펌프장과 일제강점기를 겪은 한국 근대사를 배경 삼아 작업한 결과이다.

작품 후반부에 깔린 연주 음악은 잔무늬 빛살의 움직임을 따라 빠르고 느리게 격정과 서정이 반복한다. 다이나믹한 소리와 빠른 템포는 북과 가야금연주를 중심으로 신비감을 준다. 음악의 제목은 따로 없다. 이 작품에 맞춤으로 장쾌하게 창작한 국악팀은 월드 뮤직그룹 ‘공명’이다. 20분가량을 다 관람하고 나니, 멍해졌다. 이번 신작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Reborn Light, Yangcheon)>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마치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장엄한 연주 같았다. 더불어 화면의 작은 움직임들의 디테일은 숨은 그림처럼 읽는 흥미를 더해주었다.

작품 관람이 끝날 무렵, 전시기획자 정수미 학예연구사가 거든다. “이이남 작가의 장점인가 봐요. 관람자들이 너무 좋아하고 재밌어하고 신기해해요.” 이어 신작 영상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Reborn Light, Yangcheon)>은 세 번이나 내용을 수정 교체했다고 한다. 최종 결과를 보니, 개막식 때 스쳐 등장했던 엄숙하고 장중한 범종 소리와 기와지붕, 백남준의 비디오 영상, 마곡문화관이나 양천 8경의 이미지가 완연히 제거되어 있다. 개막날 영상의 뒷부분을 정제한 것이다. 전반부 양천 8경의 구상 그림과 후반부 격동기 역사를 추상 이미지로, 명확히 대비시켜 놓았다. 

최근 이이남은 빛의 움직이는 이미지에 꽂힌 듯하다. 이번 마곡문화관 전시 바로 직전 광주 은암미술관(2019. 11. 4~12. 3.)에서 선보인 <다시 태어나는 빛(Reborn Light, beam projector 7대, 11분 6초)>이 그 사례이다. 물소리 새소리로 시작한 이 작품은 사람들 군상, 문자들, 나비, 구름, 파도 등 구상 이미지들이 뒤섞이며 국악기 연주와 어울렸는데, 이번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Reborn Light, Yangcheon)>은 구상에서 갈라 후반부를 완연한 추상적 동영상으로 마무리하였다. 앞으로 빛과 추상무늬의 전개를 통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원본 없는 미증유 이미지에 대한 이이남의 창작 의지를 감지케 한다.

  

3. 

 이번 개인전의 중심작품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Reborn Light, Yangcheon)>은 겸재 정선이 18세기 중엽에 그린 양천지역의 옛 풍경과 20세기 전반 마곡문화관의 전신 배수펌프장이 겪은 우리 근대사를 연계한 영상물이다.

이 신작과 함께 전시공간에 설치된 5점 구작이 눈길을 끈다. 특히 과거 양천 마곡지역과 관련하여 양천현령을 지낸 겸재 정선에 대한 오마주를 담은, 이이남의 구상계열 대표작들이라 할 수 있겠다. 전시실 구조에 맞춘 다섯 작품의 배치와 구성은 완벽했다. 이이남은 전시를 제안받고 전시공간에 처음 들어서자마자, 순간 작품의 배치구상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전시기획자와 전시장소, 그리고 작가와 만남이 최고의 연출과 예술성을 콜라보했다.

전시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2017년 작 <박연폭포>(75인치 LED TV 4개, 6분 39초)를 만난다. 북벽 지붕에서 바닥까지 길게 폭포가 시원스레 쏟아지게 설치했다. 본디 겸재 정선은 폭포의 실경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기보다 우렁차게 쏟아지는 폭포의 굉음을 담기 위해 상하로 긴 화폭을 선택했을 터이다. 눈에 보이는 풍경 묘사보다 폭포 길이를 두 배가량 변형해, 소리의 리얼리티를 실감나게 표현한 점이 그렇다. 이이남은 4대의 TV를 세워 연결하고, 원화의 중간 부분을 반복해 폭포 소리를 동영상으로 더욱 강조했다. 배경에 저녁노을을 드리우기도 했다. 작품의 위치가 정북으로 개성 송악산과 박연폭포 쪽을 향한 점도 남다르다.

전시장 입구 오른편, 아래위 층이 오픈된 전시실은 옛 배수처리 시설 관리 공간이었다. 1층 <겸재 정선 고흐를 만나다>(55인치 LED TV 3개, 6분 20초)는 2014년 작이다. 18세기 중엽 겸재 정선이 19세기 말 유럽의 반고흐를 만나러 가는 대장정이 3대의 티브이에 담겨 있다. 오른쪽부터 겸재 정선의 <설평기려(雪坪騎驢)> 그림, 남프랑스 아를의 누런 가을 평원, 오베르 시절 반 고흐의 마지막 방과 붕대를 감은 자화상 화면이 배치되어 있다.

<설평기려(雪坪騎驢)>는 ≪경교명승첩≫(간송미술관 소장)에 포함된 그림으로, 마곡문화관과 인연이 각별하다. 발산과 우장산을 배경으로 삼은 흰 눈밭이 바로 마곡 들판이다. 화면 오른쪽 아래 눈길에 나귀를 탄 인물은 조선 문인화가 겸재 정선에 해당한다. 이같이 조선과 유럽 회화, 동서문화의 만남을 설정한 이이남의 작품으로는 2008년의 <모네와 소치와의 대화>(2-charnel video, 11분 3초), 2009년의 <겸재 정선과 세잔>(LED TV. 1대, 4분 20초) 등이 떠오른다.

2층에는 이이남의 대표작 2009년의 <인왕제색도-사계>(55인치 LED TV 1개, 4분 35초)를 중앙에 배치하고, 오른쪽 남쪽 벽에 두 작품을 설치해 놓았다. 두 영상물은 2010년의 <그곳에 가고 싶다>(beam projector 1개, 7분 23초)와 2017년의 <신 단발령망금강>(beam projector 1개, 6분)이다. <인왕제색도-사계>와 <그곳에 가고 싶다>는 겸재 정선이 75세 때 그린 1751년의 <인왕제색도>(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를 바탕 그림으로 디지털화한 작품이다. 수묵화 <인왕제색도>는 한국미술사의 최고로 손꼽히는 걸작이다.

 2009년의 <인왕제색도-사계>는 이이남식 디지털 구성과 변환의 전형으로 꼽히는, 대표작이다. 화면에는 매화와 진달래의 봄이 깔리고, 소나무 솔잎에 짙푸른 녹음이 들며 여름 폭포가 바위 계곡을 타고 내린다. 여객기 한 대가 인왕산 주봉 뒤로 숨을 때,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장맛비를 쏟아낸다. 이어 비가 그치고 가을 단풍에 물든 저녁노을이 진다. 아름다운 석양에 인왕산 기슭 기와집에 불이 켜진다. 겸재 정선이 살던 집이다.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며 눈이 내린다. 겨울 인왕산 능선 오른쪽 멀리 도시가 잠시 등장하고, 눈이 계속 쌓이다가 수묵화로 환원된다. 수묵화인 원화와 대조적으로, 사계의 변화와 노을 표현에 키치의 분위기가 물씬한, 인상적인 작품이다.

2010년의 <그곳에 가고 싶다>는 앞의 <인왕제색도-사계>와 달리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새롭게 해석해 변형한 영상이다. 한양도성의 서쪽, 둥글고 당차게 잘생긴 인왕산을 이상향으로 설정하였다. 그곳에는 마네, 쇠라, 뒤샹, 르네 마그리트 등의 유럽 작가의 작품 이미지와 도포 차림의 조선 선비, 소나무, 버드나무, 해오라기, 한국의 현대 유명인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

2017년의 <신 단발령망금강>은 더욱 다채롭다. 같은 제목으로 2009년의 <신 단발령망금강>(LED TV, 1대, 5분 30초)를 보완해 개작했다. 겸재 정선의 <단발령망금강> 원작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에서 좀 더 가벼운 필치의 간송미술관 소장품으로 바뀌었고, 런닝타임을 30초 늘렸다.

금강산과 단발령이 벌어진다. 그 사이로 구름이 끼고 노을이 지며, 케이블카가 움직인다. 서울 풍경에 대규모 도시공사가 벌어진다. 멀리 비행기가 날아들고, 공사판에는 서울과 세계도시의 유명빌딩이 공존해 있다. 피사 사탑, 파리 에펠탑,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미국의 백악관, 상해 포동의 건물들이 보인다. 분단의 상징으로 6.25 전쟁 기념과 관련한 워싱턴의 조형물과 인천의 맥아더 동상도 등장한다. 맥아더는 단발령을 바라보고, 이순신 동상이 왼쪽 아래서 출현하고, 에펠탑 뒤 로댕의 유명 조각작품 <생각하는 사람>도 등장한다. 단발령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간 케이블카는 야경에 빠른 속도로 되돌아오며, 거대도시는 아스라이 사라진다. 단발령 고갯길에는 사람들이 불 밝히고 올라갔다가 사라지고, 케이블카에서 내린 사람들은 금강산 대신 거대도시를 바라볼 때, 다시 구름이 깔리면서 끝난다.

  

4.

이처럼 이이남은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를 넘나들며 분방하게 아이디어를 분출해왔다. 익숙한 이미지를 다르게 보게 하고, 새롭게 흥미를 유발케 하는 재능이 출중한 것 같다. 앞으로도 콘텐츠가 다양해지고, 예술적 깊이와 더불어 재미도 함께 넘칠 법하다. 지금까지 세상, 현실, 역사, 환경 등의 문제, 종교, 인간에 대한 성찰과 고뇌를 적절히 버무려왔기 때문이다.

이이남의 작업에는 미디어아트, 디지털 민중미술, 디지털 팝아트, 포스트 모더니즘 등 여러 사조와 경향이 혼재해 있다. 또 「미디어 아트의 시뮬라크르에 대한 메타포리즘 해석학」이라는 자기 작품에 관해 서술한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실제와 가상’(simulacre)을 넘나들며 ‘은유’(matapho)를 끌어내려 한다. 이 주제는 그리스 철학에서 기원을 찾고, 복제기술 시대에 걸맞아 주목을 받았다. 이이남은 20세기 후반 비디오아트 창시자로 꼽히는 백남준을 잇는 작가로, 미디어아트의 선도로 평가된다.

이이남은 “명작에 기운생동한 숨결을 불어넣어 관객에게 기대와 흥미를 자극하고 싶다”라고 얘기해왔다. 내가 이이남을 반기며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보다 겸재 정선의 대표작을 즐겨 활용해 작업해온 점에 있다.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박연폭도> 삼대 걸작을 비롯해, ≪경교명승첩≫의 <장안연월>과 <설평기려>, <단발령망금강전도> 그리고 이번 신작의 ≪양천 8경첩≫까지 망라되었다. 디지털 시대 문화 현상의 하나인 토종이 미래 문화의 씨이자 전통이 미래라는 뉴트로(newtro) 취향과도 잘 부합한다. 20세기 한국문화예술사에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밀접하게 관련한 대목이기도 하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로 한국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이다. 현실보다 더 나은 신선경(神仙景)을 꿈꾸며, 금강산과 한양을 중심으로 자신이 살던 조선 강산을 대상으로 진경산수화법을 완성했다. 겸재 정선이 이룬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형식미는 실경 사생보다 현장에서 받은 감명에 따라 변형해 그린 데 있다. 실경 현장의 기억과 직관으로 합성하거나 과장해 담은 것이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작품은 보이는 대상의 사실적인 ‘눈’ 그림이라기보다 대상의 느낌을 강조한 ‘마음’ 그림, 곧 심화(心畫)라 일컬을 만하다. 

이이남의 이미지 변환 방식은 놀랍게도 겸재 정선의 다시점(多視點) 합성이나 변형화법과 상통한다. <금강전도> 같은 여러 시점의 봉우리를 한 화면에 합성하는 방식은 몽타주(montage)에 해당하고, <박연폭도> 처럼 폭포의 천둥소리를 담기 위해 화면을 길게 변형한 화법은 모핑(morphing)과 흡사하다. 그래서 나는 진경산수화를 강의할 때마다 겸재 정선이 지금 다시 태어나 활동한다면, 아마 이 시대 최고의 디지털 작가가 되리라고 말한다. 또 한국이 세계 반도체나 스마트폰 시장, IT 강국으로 성장하고, 디지털 문화가 발달한 것은 바로 겸재 정선의 DNA 계승과 무관하지 않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겸재 정선의 생각을 이은 이이남이 출현하고, 세계미술계의 K-아티스트로 주목받는 것도 어쩌면 예정됐던 수순 아닌가 싶다. 또 동서고현(東西古現)을 망라해 디지털로 혼성한 이이남의 기량은 서양문화예술을 중심으로 교육되고 가치관이 정착된, 그러면서도 전통형식의 재창조를 끊임없이 추구해온 한국 근현대사회와 문화의 처지를 적절히 웅변하기도 한다. 케이팝이나 극영화 한류의 성향도 유사한 편이다. 

문화지형의 빠른 변화와 함께 지역 간, 세대 간, 사람 사이의 의식과 미감의 차이도 금세 벌어졌다. 나는 조선 시대 회화가 주된 전공인 데다, 스마트폰도 사용하지 않고 새로운 변화 환경에도 적응하지 못한 편이다. 인류가 신석기 시대로 되돌아가면 어떨까 꿈꿔도 본다. 어쨌든 동시대 미술을 대할 때 어색하고 취향도 크게 다르지만, 다행히 이이남의 작업에 겸재 정선의 명작들이 활용되어 있기에 나도 이처럼 디지털 아트(Digital Art) 내지 미디어 아트(Media Art)에 대해 눈을 돌려보게 되었다.

 나는 벌써 2011년 EBS 방송에서 ‘이야기 한국미술사’ 20강을 진행하며, 이이남 작품을 선정했다. 부제로 구석기 시대 ‘주먹도끼부터 디지털 아트까지’라고 달았고, 마지막 강의 “현대 문명과 사회, 그리고 미술”에서 이이남 작품으로 마감했다. 민주화운동과 민중미술의 후세대이자 현대 문명과 자연환경, 생태문제 등을 포괄하며 작업해온 결과, 이이남이 ‘지금’을 함께하는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우리 시대를 드러낸 작가라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다시 정리해 2019년 2월 같은 이름의 책으로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 나는 이이남의 작품 경향을 아래와 같이 썼다.

 이이남은 2000년대 중반부터 고전 회화나 세계 명화를 이용해 텔레비전 매체에 이른바 ‘움직이는 미술(Moving Art)’ 작품을 제작했다. 2009년도 작품 <신-금강전도>는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가 봄·여름·가을·겨울로 변화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 작업이다. 처음에는 새 소리가 들리는 평화로운 봄 풍경으로 시작하지만, 이내 계절이 바뀌면서 금강산 곳곳에 고층건물들이 들어선다. 겨울이 되면 조용하고 아름다운 금강산이 온통 개발의 그림자로 뒤덮이게 된다. 헬기와 비행기가 지나가고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화면과 함께 공사장 소음 같은 사운드가 메아리친다. 문명의 폭력으로 금강산을 망쳐 놓은 인간의 오류를 간파했다. 이후 이이남은 옛 그림과 현실, 동서양의 교류 등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던 주제에서 생태문제로 관심사를 옮겼다. 잃어버린 자연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시도였다. 이이남은 현재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왕성하게 작업 활동을 이어나가며 인기작가로 부상했다.

  

이이남을 처음 만난 지 벌써 30년이 흘렀다. 1990년 일 학기, 내 한국미술사 강의 수강생으로, 이름이 독특해 기억에 남은 조선대학교 조소과 학생이었다. 나는 1980년대 말 대학 민주화를 이룬, 조선대학교 미대 학생회의 요청에 따라 출강했다. 마침 1990년은 광주민중항쟁 1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때 내가 재직했던 전남대학교는 물론이고 조선대학교 한국미술사 수강생들에게 미술과 학생들이 모두 참여하는 항쟁기념전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냐며 독려했고, 양 대학 교정에서 멋진 전시가 꾸며졌다.

그리고 나는 2003년 1학기부터 광주를 떠나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로 옮겼다. 2008년 겨울쯤 ‘겸재와 세잔’ 강의를 들었던, 박사과정 전시기획자들과 함께 ‘유명해진’ 이이남이 내 연구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때 겸재 정선의 <장안연월(長安烟月)> 수묵화와 폴 세잔의 <생뜨 빅뚜와르산> 유화를 선택한, 이이남의 디지털 작품 <겸재 정선과 세잔>(2009년, LED TV, 1대, 4분 20초)이 탄생했다. <장안연월> 수묵화에 비가 쏟아지며 <생뜨 빅뚜와르산> 유채화로 변하다가 눈이 내리자 원래 수묵화로 되돌아가는 화면의 변화를 보면서, 디지털 작업에 대한 몇 가지 아이디어가 불쑥 내게 떠올랐었다. 10여 년을 묵혔다가, 이번 기회에 나는 공동 작품과 2인전을 제안하였다. 이이남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올해 말쯤 성사될 듯싶다.

마곡문화관을 인연으로 이이남을 다시 만나고 살펴보니, 그동안 활동이 세계적인 대가 반열에 올랐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중국과 아시아를 넘어 미국과 유럽의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초청하는 기획전과 개인전을 가지며 인정을 받았다. 2016년 벨기에에서 우리 시대 비디오아트의 거장이자 전설로 추앙받는, 빌 비올라와 가진 2인전은 이이남 예술사의 정점일 법하다.

이렇게 명망도 얻고 세계에 자랑할 작가가 되었는데, “왜 서울에서 작업하지 않느냐”라고 이이남에게 물었다. 또 “뉴욕에 가서 작업하며 활동할 생각은 없는지”도 재차 물었다. 단박에 고개를 저으며, 고향 광주와 담양이 편하고 좋단다. 작업과 활동에도 별 불편함을 못 느낀다고 답한다. 요즘 말대로 글로벌-로컬리즘, 곧 그로컬리즘(grocalism)을 실천하는 작가의 면모도 커 보였다. 광주 양림동에 새로 완성한, 멋진 작업공간을 둘러보며 그랬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1 – 다섯 번째 금강산 탐승, 해금강 일출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1 – 다섯 번째 금강산 탐승, 해금강 일출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1 – 다섯 번째 금강산 탐승, 해금강 일출
04/0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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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을 다시 찾아 해금강 일출을 그리고

나는 작년 2019년 2월 설날 연휴 끝에 금강산에 갈 기회가 생겼다. 2월 12일~13일 ‘남북선언 이행을 위한 2019년 새해맞이 연대 모임’ 금강산 행사에 참여했다. 일박이일 짧은 여정이었지만, 다섯 번째 여정이다.

흰 바위산의 아름다운 수정봉과 멀리 노을에 물든 채하봉(彩霞峰) 등 온정리 호텔 주변은 여전하였다. 도착하자마자 스케치북 양면에 펼쳐 담았다. (도 1, 2) 다음날 오전에 찾은 집선봉 설경과 솔밭 아래 복원된 신계사도 마찬가지였다. (도 3) 그런데 이전의 답사 때는 엄두도 못했던 해금강 일출을 보았다. 날씨마저 청명해 장관이었다. ‘남북선언 이행을 위한 2019년 새해맞이 연대 모임’ 금강산 행사의 절정이었다. 그동안 늘 감동해오던 동해의 일출과 다름이 없었다. 암벽에 걸쳐 떠오르는 태양을 연속 찍었다. (도 4, 5)

이 행사를 다녀오며, 금강산을 다시 와 그릴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다. 일 년을 기다렸으나, 지난해 2월 말 베트남 북미회담이 깨진 이후 금강산 가기가 짙은 안개에 가려 있는 듯하다. 그래서 해금강문(海金剛門) 일출을 사생했던 스케치북을 다시 꺼냈다. 남으로 고성 쪽을 향해 설경 산세와 더불어 담은 아침 바다 그림도 있었다. 이들 일출 그림은 채색하지 않은 채 두었다. 스케치를 펼쳐 놓고 한해 전의 붉은 태양과 물빛을 넣자니, 그때 감흥이 일지 않기에 더 손대지 않고 그대로 선보인다. (도 6, 7)

 

화원 김하종의 <옹천> 일출 그림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큰 줄기를 이루는 금강산과 관동8경을 담은 작품에 동해의 일출이 곧잘 그려졌다. 겸재나 단원의 양양 낙산사, 망양정, 문암 등에서 본 일출 장면 그림이 떠오른다. 동해의 일출 분위기를 적절히 담은 작가와 작품으로는, 유당 김하종(蕤堂 金夏鍾;1793-?)의 <옹천> 일출 그림이 떠오른다.

푸르스름한 바탕색에다 붉은 담채를 살짝 가미해 맑게 열리는 여명의 분위기를 깔고, 수평선 위 떠오른 붉은 태양을 강조한 점이 돋보이는 가작이다. (도 8) 통천 옹천의 어두운 바위 언덕에 자란 소나무들과 벼랑 아래 파도치는 모습의 붓 맛과 담채가 가볍다. 암벽 길목에서 두 문인이 떠오르는 해를 감상하는 모습도 실감 난다. 왼편에 치우쳐 옹천을 배치한 구성은 겸재나 단원 등 선배 화가를 고스란히 답습한 화면을 보여준다. 금강산화첩 《풍악권(楓岳卷)》(개인 소장)에 포함된 한점이다.

이 화첩은 1991년 소더비 경매에 등장했다가 국내로 반입되어, 1999년 내가 객원 큐레이터로 참여했던 일민미술관 ‘몽유금강’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되었다. 《풍악권(楓岳卷)》은 조선 말기 개화파 외교관으로 이름난 귤산 이유원(橘山 李裕元;1814-1888)이 1865년에 금강산을 유람한 후 기행문 「풍악유기(楓岳遊記)」와 묶은 서화첩이다.

이유원은 고종 즉위년(1864) 좌의정에 재직하다가, 흥선대원군과 대립하는 바람에 수원유수로 좌천된 직후 1865년에 금강산 여행을 떠났다. 만년에 정치적으로 울적하면서도, 한편 홀가분한 마음으로 8월 18일(음력) 집을 나서 9월 6일 서울로 돌아왔다. 이유원 자신이 기행문에서 밝혔듯이 ‘산은 깨끗함을 생각케 하며, 물은 움직임을 생각케 하며, 돌은 곧음을 생각케 한다’는 선비의 풍류정신을 펼친 것이다. 이유원의 여정에 김하종이 동행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하종이 자신을 위해 금강산 명승도를 제작해 주었다’고 서문에서 밝혀 놓았다.

다섯 권의《풍악권》은 「풍악유기」를 비롯한 이유원의 기행시문이 한 권이고, <헐성루도(歇惺樓圖)> <명연도(鳴淵圖)> <묘길상도(妙吉祥圖)> <만물초도(萬物草圖)> 등 58점의 명승도와 그 명승을 설명하는 기행시문이 나머지 4권으로 꾸며져 있다. 이같이 금강산 소재의 문학과 서화가 조화롭게 만나는 이유원과 김하종의 《풍악권(楓岳卷)》 서화첩을 통해 19세기 진경산수화의 격조가 유지되었다.

 

네 번의 금강산 여정을 다시 들춰 보며

다섯 번째 금강산 답사인 해금강 일출을 다녀와 뒤돌아보니, 금강산을 처음 밟은 지 벌써 이십 년이 훌쩍 흘렀다. 나는 전남대학교 재직 시절 뱃길이 열리기 두 달 전, 1998년 8월 말~9월 초 학고재 화랑의 후원으로 제주의 강요배 화백과 북경과 평양을 거쳐 처음 금강산을 다녀왔다. 내 인생의 첫 해외여행이었고, 북한지역을 밟았으니 10일간 일정이 온통 흥분으로 채워졌다.

평양에서 고구려 벽화고분, 고구려와 조선의 유적지, 박물관과 미술관 등을 살핀 뒤, 금강산 답사 첫날은 평양에서 새벽에 출발해 원산을 찍고 오후에 구룡폭을 다녀왔다. 다음 날은 온정령 고개를 넘어 내금강 장안사 울소 삼불암 백화암 표훈사 만폭동 금강대 대소향로봉 보덕암 진주담 분설담 사자암 묘길상 코스와 정양사 오르기, 만물상을 탐승하는 강행군이었고, 삼일째는 해금강과 삼일포를 돌아보았다. 정양사에 팍팍하게 오른 답사는 남쪽 미술인으로는 처음이었다.

여행한 직후 정리한 조선 시대 금강산 그림에 대한 글은 답사 때 찍은 사진과 더불어 학고재출판사가 발간한 금강산 책에 실었다. 별도의 답사기는 게재할 곳을 찾지 못하다가 반년이 지난 뒤 미술잡지에 다섯 번에 걸쳐 연재하였다.

 

두 번째는 1999년 1월 동해에서 배를 타고 금강산 설경을 2박 3일 살폈다. 외금강 만물상과 옥류동 구룡폭 코스의 설경을 감상했다. 이때 옥류동 다리 앞에서 넘어져 발목을 접지르는 바람에 3일째 해금강의 겨울 풍경을 보지 못했다. 배에 머물며 장전항에서 보이는 설경을 스케치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아마도 그때 스케치가 지금 나에게 그림 그리는 일을 자극했는지도 모르겠다.

1999년 상반기에는 일민미술관과 동아일보가 마련한 ‘몽유금강-그림으로 보는 금강산 300년 전’(1999.7.7.~8.29)에 객원 큐레이터로 참여해 조선 시대와 근대미술사의 금강산 그림과 관련한 기획을 맡았다. 또 15명의 전시 참여 현대 작가들에게 금강산을 강의하고 안내하면서 4월의 봄 금강산을 만끽했다. 이 세 번째 탐방 역시 유람선을 탄 여정이었고, 만물상과 구룡폭 코스로 제한되었다. 새로운 금강산 그림과 자료들을 상당히 많은 양을 발굴하였고, 전시 도록에 ‘금강산의 문화와 예술 300년’을 정리해 실었다. 전시 기간에는 주요 출품작을 선정해 동아일보에 10회에 걸쳐 연재했다. 또 전시작품에서 소정 변관식의 명작 <옥류천도>에 대해 문제 제기가 있었고, 지상 논쟁이 벌어졌다.

 

세 번의 여행을 기반 삼아 ‘금강산·천년의 문화유산을 찾아서’라는 부제로 금강산에 관한 책을 냈다. 답사기 「금강산 미술기행-옛 화가들의 발자취를 따라」와 「금강산 불교유적, 그 천년의 역사 1, 2, 3」 세 꼭지에, 논문 「한국산수화의 모태, 금강산과 금강산 그림」을 합해 묶은 것이다.

이후 금강산 여행에 동행했던 강요배와 송필용 같은 작가의 금강산 그림 개인전 도록에 평론 글을 쓰기도 했다. 1999년과 2000년에 각각 마련한 두 작가를 통해 금강산 개방이 가져온 새 회화형식의 창출을 실감하게 했다. 강요배는 서구 인상주의 수용 이후 금강산 풍경을 통해 한국적 화풍을 창출했다고 여겨지며, 송필용은 조선 분청자의 박지문 기법을 활용해 설경을 중심으로 금강산을 재해석해냈다.

2003년 전남대학교에서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로 상경한 뒤, 2004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그리운 금강산전’ 기획에 참여해 ‘근대 금강산 그림’과 관련한 논문을 전시 도록에 실으며 1999년 일민미술관 기획전 때의 글을 보완할 수 있었다. 또 고려시대 금강산의 불교를 발표할 기회가 주어져 불교와 관련한 금강산을 다시 정리하게 되었다. 역시 금강산의 불교는 고려문화의 터전이라 할만하며, 첫 답사기의 불교 유적에 대한 대목은 이 논문으로 대체했다.

 

2008년 6월에는 명지대학교박물관 답사 프로그램으로 여름 내금강과 외금강, 해금강을 다시 찾았다.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박사과정 학생을 중심으로 30여 명이 참여했다. 네 번째 금강산 답사였다. 배로 다니던 여행에서 버스로 이동하는 관광이어서 경비도 시간도 크게 줄었고, 탐승 시간을 비교적 충분히 가질 수 있어 좋았다. 앞서 3번의 여정에서 가지 못했던 구룡폭 능선 넘어 구정봉에 오른 게 새 보람이었다. 정상에서 상팔담과 주변의 외금강 바위산 속살이 큰 감명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슬라이드 필름으로 찍어 왔던 데서 벗어나, 처음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했다는 점도 내 답사 인생의 큰 변화였다. 덕분에 금강산 코스 따라 만나는 정경과 부분들을 일천 커트 남짓에 샅샅이 담아 왔다.

우리가 금강산 답사를 다녀온 2주 뒤 금강산이 닫혔다. 개방 10년이 채 못되어 다시 막힌 것이다. 간간이 글을 쓰거나 강연하는 일을 제외하곤 금강산을 잊고 지내다 10년이 또 지난 2017년 8월 명지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겸재와 단원의 발자취 따라’ 찾아 강원지역을 찾았다. 답사지 표지에 총석정을 그려 넣고, 표제로 ‘총석정을 못가는 관동8경 답사’라고 썼다.

 

같은 해 2017년 11월 강원일보,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강원대학교 통일강원연구원 공동주최로 강원대학교 글로벌경영관에서 가진 『금강산 관광사업과 남북교류의 새로운 모색』이라는 ‘2017 평화 통일 국제학술 심포지엄’ 때, 나는 “그림으로 본 금강산”을 주제로 발표하였다. 금강산 예술에 대해 예전에 썼던 글을 다듬으면서, 조선시대 유람문화에서 20세기 이후 근대관광으로 변한 양상을 재검토할 기회였다.

종합토론 시간에는 지난 금강산 관광사업을 뒤돌아보며 과연 금강산이 열릴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워낙 핵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때인지라, 심포지엄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도 없지 않았다. 심지어 가까운 시일에 금강산이 열리면 손가락을 뜨거운 장에 지지겠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을 정도였다.

 

2018년 들어서 급격하게 남북관계가 열리고, 정년 퇴임을 한 2년째여선지 한가해진 터에, 11월부터 다시 금강산 자료들을 들춰 보았다. 1998년부터 2008년까지 네 번에 걸쳐 찍은 슬라이드 필름과 디지털 사진을 정리하며 내금강 계곡 바위에 새긴 이름이나 시 글씨를 재검토했더니, 미술사나 문화사에서 익숙한 여러 문인이나 화가들이 여럿 확인되어 반가웠다. 그리고 사진들을 뒤지면서 자연히 지난 답사 여정의 감흥이 돋아 스케치에 몰두하기도 했다. 2017년 7월 ‘서울산수’ 책 출간과 서울 스케치 개인전에 이어 ‘금강산수’가 가능할 만큼, 2018년 11월과 12월 두어 달 동안 100여 점이나 그렸다. 이 스케치들은 당시 찍은 사진과 더불어 금강산의 유적과 명승 소개에 적절한 참고 도판으로 삼아도 될 성싶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0 – 정월 보름달 뜨고 지고, 서촌에서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0 – 정월 보름달 뜨고 지고, 서촌에서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0 – 정월 보름달 뜨고 지고, 서촌에서
02/18/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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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시끄럽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2월 8일 저녁에 경자년 쥐해 정월 대보름 달이 떴다. 다음날 새벽녘에 졌다. 나도 여느 때처럼 보름달 따라 서촌을 어슬렁거렸다. 작년 정월 대보름달은 청풍계 쪽에서 봤고, 추석 보름달은 인왕산 범바위에 올라 사진을 찍고 스케치했다. 올해는 갑자기 몰아친 한파 다음날인 데다가 미세먼지 뉴스에, 도봉산 망월사를 오랜만에 가려다 산 오르기는 포기했다.

  효자동 큰길 3층 까페에서 큰 유리창 너머로 북악산인 백악 월출을 담았다. 오른쪽 능선 부아암과 용눈이바위 사이로 둥근 원에 꽉 찬 만월로 떠오른 모습을 스케치했다. (도 1) 그림에 둥근 달을 크게 그리면서, 아기 업은 모습이라는 부아암(負兒岩)을 강조해 그렸다.
  겸재 정선은 이 남근 바위 형태를 유난히 과장해 표현하곤 하였다. 1740~50년대 <백악> 전경을 그릴 때나 장동8경의 <독락정>을 그릴 때 그러했고, <부아암>을 독립해 담기도 했다. (도 2, 3) 그만큼 부아암은 한양 도성의 강렬한 에너지 덩어리인 셈이다. 이게 남사스러웠는지 비둘기 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과장해서 대상의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풍경화의 사실감 표현을 정선에게 배웠다. 내 그림은 정선이 변형시킨 것에 비하면 훨씬 덜한 편이다. 역시 나는 대가의 풍모에 따라가지 못한 결과 아닐까.

  언제부터인지 보름날이나 이튼날 16일인 기망(旣望)에는 저녁 달뜨기 월출(月出)보다 새벽달 지는 월몰(月沒)의 처연한 광경이 맘에 다가와 자주 그렸다. 늙은 징조? 암튼 올해도 효자동 길 건물 옥상을 찾아 인왕산 남쪽 곡성으로 지는 새벽달을 그렸다. 화면의 왼쪽부터 얼굴바위, 모자바위 모암(帽岩), 범바위와 희게 드러난 도성으로 둥근 달이 넘어갔다. 찬바람에 못이겨 빠르게 이 광경을 스케치하며, 공간상 얼굴바위 앞에 둥근 달을 배치해 보았다. (도 4) 이곳 인왕산 남쪽 자락은 도성 안팍을 조망하는 최고의 전망대로, 조선 문인과 묵객들이 즐겨 찾던 장소이다. 오르내리며 해골바위 선바위 국사당 등을 만나게 되고, 인왕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이 들어서 좋은 기도처가 많은 곳으로 꼽힌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푸근해서 남쪽의 꽃소식도 일찍 들려온다. 늙은 노매(老梅) 가지에 몇 송이 벙그러진 청매 꽃을 그리고 보름달을 앵겨 보았다. (도 5) 광주에 살면서 자주 찾았던 담양 지실마을 매화를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9-중국 길림에서 서파西坡로 오른 백두산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9-중국 길림에서 서파西坡로 오른 백두산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9-중국 길림에서 서파西坡로 오른 백두산
01/30/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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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5일 아침 서쪽 코스로 백두산에 올랐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진한 청록의 천지 물색이 한 눈에 들어왔다. 황홀했다. 우리 민족의 표상이자 영산답게 품위졌다. 선명하게 드러난, 천지를 빙 두른 백두산 연봉의 오르내리는 능선을 스케치북에 담았다. (도 1) 나도 그동안 눈에 익은 유명 사진작가의 백두산 사진 작품처럼 찍을 수 있게 백두산이 열린 것이다. (도 2)
송강하진(松江河鎭)에서 일박하고, 다음날인 10월 5일 이른 아침 백두산 아래는 비가 온 뒷날 늦가을의 정취와 겨울 분위기가 뒤섞인 듯한 날씨였다. 서파 입구에서 통과 절차를 치르고 천지 아래까지 셔틀버스로 이동할 때, 산언덕의 흰 서리에 진눈깨비도 흩날려 열린 백두산을 보지 못하나 하는 염려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도 3) 천지 아래 주차장에 도착하니 구름이 거의 걷히는 중이었다.
버스에서 하차하자마자 흩어지는 구름을 따라 천삼백사십 계단을 단박에 올랐다. 숨을 고르고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드로잉을 시도하였다. (도 4) 스케치북 한 권을 다 채웠다. 현지사람에게 물어보니 왼쪽 벼랑은 백운봉, 오른쪽 봉우리는 천문봉이란다. 백운봉을 사생하고 나서, 천문봉 너머가 이천칠백오십 미터의 장군봉인 것 같아 스케치북 펼친 양면에 담았다. 처음에는 천지와 봉우리들을 한 화면에 담지 못했다. 세 번째 스케치에 천지와 그 둘레를 감싼 봉우리들을 담을 수 있었다. 귀국해 연희동 연구실에 와서 천지의 깊고 청명한 청록색의 어울림을 추억해 바르고, 도장을 찍어 완성했다. (도 1)
이렇게 백두산의 첫 만남을 성공적으로 가졌다. 사진을 찍고 스케치하고 나서, 조선 시대 백두산 그림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하산해 통화(通化)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옛 백두산 그림에 대해 강의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유일한 백두산 그림 능호관 이인상<장백산도>

조선 시대 백두산 그림은 영조 시절을 대표하는 문인화가 능호관 이인상(凌壺觀 李麟祥; 1710∼1760)의 1750년경 작 <장백산도(長白山圖)>(개인소장)가 전하는 정도이다. (도 5) 옛 지도나 함경도지역 명승도 병풍에 등장하는 것 외에 백두산을 단독주제로 그린 유일한 사례 아닌가 싶다.
나는 <장백산도(長白山圖)>를 15년 전 학고재 갤러리에서 가진 ‘조선 후기 회화의 기와 세’라는 기획전에 소개한 적이 있다. (이태호 엮음, 『조선 후기 회화의 氣와 勢』, 학고재, 2005)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1)의 1750년경 파워풀한 진경 작품 <박연폭도(朴淵瀑圖)>(개인소장)를 ‘세(勢)’의 대표작으로, 이와 쌍벽으로 능호관 이인상의 <장백산도>를 ‘기(氣)’의 에너지가 응축된 대표작으로 삼아 꾸민 조선 후기 회화전시였다. <박연폭도>가 짙은 농묵으로 폭포 실경을 길게 과장해 격정적 감정을 맘껏 쏟아냈다면, <장백산도>는 자기감정을 직접 드러내기보다 절제하면서 감각적으로 그려낸 명작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도록 앞머리 ‘전시를 기획하며’에 이인상의 <장백산도>를 아래처럼 기술했다.

 조선후기 문인화의 으뜸이면서 조선 선비의 인간미가 오롯한 그림을 찾자면, 나는 이 <장백산도(필자는 이 글에서 ‘백두산도’라고 썼음)>를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흔히 문자향ㆍ서권기의 대표작으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거론하지만, 단연코 능호관의 <장백산도>가 세파에 물들지 않고 담백한 조선의 선비상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장백산도>의 간일하고 담담한 붓과 먹맛에 비하면, 일정한 톤의 마른 갈필로 그린 <세한도>는 세련된 기교와 맵시가 튀는 그림이다.
두 사람의 서화 전반에도 그 대조가 잘 드러나 있다. 추사의 서화는 천부적 재능을 문기(文氣)로 포장하려 의도했다는 느낌을 준다. 반면에 능호관은 어찌 보면 문기 이전,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으려는 순수한 자연미를 추구했던 듯하다. 이런 성향의 차이는 추사가 문자로 가공한 예서체를 선호한 점과 능호관이 예서 이전의 상형문자인 전서체를 즐겼던 사실과도 맞아 떨어져 흥미롭다. 어쨌든 <장백산도>는 “<세한도>의 몇 배를 더 주어도 바꾸지 않겠다”는 소장자의 자랑을 한껏 수긍케 하는 그림이다.

<장백산도>에는 오른편 잡목 숲과 초정(草亭)이 배치되고, 그 왼편으로 언덕 너머 천지연을 사이에 둔 산봉우리가 펼쳐져 있다. 얼기설기한 필치여서 백두산의 위용은 소홀하지만, 백두산 정상의 너른 천지를 옆으로 긴 화면에 담아 여백의 맛이 일품인 그림이다. 더불어 조선 시대의 유일한 백두산 실경화인 점만으로도 그림의 가치를 더한다. (이태호 엮음, 『조선 후기 회화의 氣와 勢』, 학고재, 2005) 

이 <장백산도> 그림의 왼편에는 김상숙의 요구에 응해 그렸다는 이인상의 글 제발(題跋)이 딸려 있다. 배와 김상숙(坯窩 金相肅,1717~1792)은 문신으로 바른 천성의 도인이자 서예가로 명성이 높았고, 두 사람은 당대 수준 높은 격조의 문인으로 꼽힌다. 꾸밈없이 자유로이 쓴 이인상의 행서체 서풍도 별격이다. 

가을비 내릴 때 계윤(김상숙의 字)을 찾아갔다. 종이를 내놓으니 그림을 그렸다. ‘사람으로 하여금 곽충서의 종이연 고사를 떠오르게 한다’고 계윤이 웃으며 “원령(이인상의 字)이 너무 나태해 장백산을 그렸네”라고 말했다. 붓을 놓으며 함께 웃었다. (秋雨中 訪季潤甫 出紙索畵 令人郭忠恕紙鳶想 季潤因笑曰 元靈懶甚 作長白山 爲之放筆一笑)

 글에 언급된 곽충서(郭忠恕)는 중국 북송 때 문인화가이다. 곽충서가 대갓집의 초청으로 그림 부탁을 받자 ‘화면 좌우 끝에 종이연과 연 날리는 아이를 그려놓고 연실 한 줄을 길게 잇자 텅 빈 화면에 주문자가 실망했다’라는 고사를 인용한 글이다. 그만큼 심심한 그림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이인상이 구상한 휑한 공간의 산수 그림을 보며, 김상숙은 ‘장백산이 됐군’이라고 했던 모양이다. “붓을 놓으며 함께 웃었다”라는 발문의 말미대로, 이인상의 담박한 품성이 그대로 밴 그림이다.
이인상은 영조 시절 문인의 예술적 격조를 실어낸 문인화가이다. 이인상은 이 <장백산도>처럼 소략한 구성미, 가볍고 부드러운 먹 선묘에 듬성하게 강조한 먹 점을 즐겨 구사했고, 때론 맑고 연한 담채나 수묵의 번짐을 펼쳤다. 이를 이인상은 마음 그림 ‘심회(心繪)’라 했다. <장백산도>는 얼핏 먼 산 경치와 아래 빈 수면을 보면, 김상숙의 한마디 했던 것처럼 백두산을 연상시킨다. 근경 중앙의 솟은 봉우리도 2,750미터의 백두산 제일 봉일 듯싶다. 그런데 그 오른쪽으로 소나무, 언덕의 정자와 잡목숲은 백두산경과 거리가 멀다. 문인화가 이인상이 속세를 벗고 은둔을 그리워하던 마음자리에 따라 추가해 넣은 소재들인 셈이다. (도 5)
2005년에 ‘조선 후기 회화의 기와 세’ 전시를 기획할 때, 나는 <장백산도>를 언급하며 혹여 이인상이 백두산을 다녀오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했을 정도였다. 이들 관련 문헌을 뒤지기도 해보았으나, 하여튼 이인상도 김상숙도 백두산을 다녀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김상숙이 이 그림을 ‘장백산’이라며, ‘길게(長) 여백(白)’이라는 의미와 오버랩하여 백두산을 연상한 점이 흥미롭다. ‘장백산’을 거론한 것은 그만큼 당대 조선 사회에 백두산이 지닌 위상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백두산에 대한 문인들의 관심 증대는 홍세태(洪世泰)의 <백두산기(白頭山記)>를 비롯해 박종(朴琮)의 <백두산유록(白頭山遊錄)>, 서명응(徐命膺)의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 등에 잘 드러난다. 한편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 발달에서 현지 사생보다 추억해서 그리거나, 다녀온 이의 경치 설명을 듣고 그린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18세기 백두산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더불어 이인상의 <장백산도>를 조선의 백두산 그림 명작으로 손꼽을 만하겠다.

 

윤두서가 조선전도에 백두산답게 그려 

조선 후기 백두산에 관한 인식의 확산은 숙종38년(1712)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한 백두산 국경선 설정도 한몫하였을 터이다. 이는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 직후 가장 빠른 시기인 1712~1715년경에 제작된 조선전도로,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의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해남 녹우당)에 여실하게 드러난다. 이전 지도들보다 설산의 ‘白頭山’을 강조하고, 가장 백두산답게 표현한 점이 그러하다. 그만큼 윤두서가 백두산에 관심이 컷음을 시사하며, 백두산 형세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수집한 결과라 하겠다. 나는 이 지도에 대해 아래처럼 평가한 적이 있다. 

윤두서의 <동국여지지도>는 15~17세기 화원들의 조선지도를 정리해 를 완성했고, 18~19세기 지도 그림의 형식에 영향을 미쳤다. 또 중국과 일본에서 당시 최신의 지도를 복제해 새로운 정보를 제공했다. 정척과 양성지의 ‘동국지도’ 유형으로 손꼽히는 1557년경의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와 외곽선이나 표현형식이 유사하다. <조선방역지도> 형식의 조선전도를 기본으로 삼은 윤두서의 <동국여지지도>는 화가의 지도답게 해변을 따라 넓게 붓질한 바다의 푸른색 담채, 연녹색 산맥표현과 붉은색 도로, 도별로 구분한 지명의 설채 방식 등 섬세한 수묵 선묘와 은은히 어울린 파스텔톤 담채가 아름다운 지도이다. 윤두서가 실학자적 태도로 섬지방까지 세세하게 고증해 적은 지명이 눈에 띈다. 윤두서의 지도에서 돋보이는 것은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산맥의 표현방식이다. 16세기 중엽의 <조선방역지도>보다 한층 성숙된 묘사기량을 보여준다.

<조선방역지도>에서는 백두대간으로 흐르는 산맥의 표현이 가는 선묘에 먹점을 가한 일정한 형태를 갖춘 데 비해, 윤두서의 산맥은 먹선 위에 굵기와 농담의 변화를 준 청녹색으로 표현한 점이 다르다. 산맥의 흐름은 태백산맥과 높은 산의 부분을 굵고 진하게 채색하여 백두대간의 입체감을 살려내었다. 특히 백두산을 회화적으로 묘사한 점이 이 지도의 백미이다. 천지와 주변 봉우리에 흰 눈이 쌓인 설경이 사실감 난다. 화가가 그린 지도답다.

백두산에는 위쪽으로 하늘을 우러르는 사자 ‘仰天獅’의 바위형상을 그려 넣었다. 지명과 더불어 백두산 그림으로 표현한 첫 사례가 아닌가 싶다. 지금 장군봉으로 불리는 암봉일 법하다. 이와 유사한 형상은 1682년경 ≪동여비고≫(개인소장, 보물 제1595호) 지도첩의 함경도 백두산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장한 장수의 뒷모습을 닮은 큰 바위 봉우리가 설산 사이에 뚜렷하다. 이후에도 백두산은 천지를 둘러싼 설산 봉우리들로 표현될 뿐, ‘앙천사’나 인물형상의 봉우리 표현은 많지 않다. (이태호, 「조선 후기 문인화가 공재 윤두서의 지도-<東國輿地之圖>와 <日本與圖>, 그리고 중국지도 <天下大摠一覽之圖>」, 『한국고지도연구』10-2(통권20호), 한국고지도연구학회, 2018. 12.)

 현재 해남윤씨 종가인 녹우당에는 윤두서가 그린 이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와 <일본여도(日本與圖)>(이상 보물 제481호)가 전한다. 또 윤두서는 ‘중국여도(中國輿圖)’도 그렸다고 행장에 밝혀져 있다. 나는 근래 중국과 조선을 담은 <천하대총일람지도(天下大摠一覽之圖)>(국립중앙도서관 소장)가 <동국여지지도>보다 먼저 제작한 윤두서의 ‘중국여도’로 추정해본 적이 있다. (이태호, 「천하지도는 윤두서가 그렸다」, 『계간 고지도』 3, TMECCA KOREA, 2015. 봄.)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윤두서는 실재감 넘치는 정면 두상 <자화상>을 남긴 문인화가로 유명하고, 풍속화와 더불어 조선 후기 사실적 묘사의 회화방식을 이끈 거장이다. 자화상을 그리듯 치밀하게 묘사한, 윤두서의 지도들은 후배인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조선 후기 문인들의 국토 인식을 적절히 대변한다. 당시 집권층에 해당하는 서인 노론계열 정선이 조선 땅을 회화예술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재야 남인계열 윤두서가 지도에 관심을 쏟아 대조를 이루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회화사에서 신사조의 문을 열었던 것처럼, 윤두서의 <동국여지지도>는 조선 후기 지도의 신표현 형식을 이끈 조선전도라 생각된다. 신경준, 정상기, 김정호 등 조선 후기 지도제작의 영향을 미쳤다. 

이번 백두산 여정은 무우수아카데미(원장 이연숙)에서 진행한 ‘고구려 고분벽화’ 강좌에 포함된 것이었다. 10월 한 달 동안, 고구려와 고분벽화 개요/인물풍속도/사신도/산수화/남쪽의 고분벽화 등 주제별 5강으로 진행했다. 과정 중 연휴를 끼고 2019년 10월 3일부터 6일까지 3박 4일, 길림 집안 지역 고구려유적을 답사한 뒤 백두산에 올랐다. 24명이 함께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 장군총, 국내성, 산성하 고분군, 무용총과 각저총, 집안박물관 등을 둘러 보았다. 나는 2007년 여름에 이어 두 번째 여정인데, 유적지가 예전보다 정비되어 새로이 현장 사진을 찍었다. (도 7, 10) 옛 고구려 땅과 고구려 사람들을 기리며, <길림 대우산 아래 고구려 무용총과 각저총>(도 8) <호태왕릉에서 굽어본 압록강과 북녘 산세>(도 9) 등 40여 점을 스케치했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8-두멍암과 여주읍내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다섯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8-두멍암과 여주읍내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다섯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8-두멍암과 여주읍내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다섯 번째
01/01/2020
/ sketch

* 썸네일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보다 큰 이미지를 슬라이드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다섯 번째 정수영의 여주 그림은 <두멍암과 여주읍내>, 그리고 수청탄과 대탄을 들러 다시 찾은 <여주읍치> 장면이다.

여주 입구 보통리의 고산서원을 보고, 정수영은 여주 관내로 향해 가던 중 양화촌을 지나 소양천과 여강 양갈레 물길이 만나는 여울에 도착했다. 여기서 ‘두멍암(巖)’을 배치하고, 그 왼편으로 ‘여주읍내(驪州邑內)’ ‘내아(內衙)’ ‘외아(外衙)’ ‘청심루(淸心樓)’ 지명을 밝힌 <두멍암과 여주읍내>를 화폭에 담았다. (도 1) 시작 부분인 두멍암 암벽을 따라 세로로 “양화촌을 지나 모질과 애질, 두 여울 양탄에 도착했다. 배를 올리기가 극히 어려웠다. 사람들이 두멍암이라 부른다. (過楊花村 到毛作愛作兩灘 上船極難 俗名두멍巖)”라고 써넣었다. 바위 이름을 ‘두멍’이라 한글로 쓴 점이 유별나다. ‘두멍’은 ‘물두멍’ 항아리나 방화용 철제 ‘드무’ 같은 큰 그릇을 뜻한다.

각진 짙은 먹선묘와 태점으로 묘사한 두멍암은 강변에 별도 풍경처럼 배치되어 있다. 그 왼편으로 두멍암과 여주읍 사이에는 소양천 위로 먼 산세가 파란 실루엣으로 보인다. 여주읍내 풍경에는 역시 팔작지붕 청심루가 가장 돋보인다. 그 오른쪽으로 외아인 객사가 위축되고, 내아인 동헌은 가운데 출입공간을 둔 대칭형이다. 관아의 여러 기와집 건물들이 초가 마을과 수평으로 어울린 정경이 담겨 있다. 농담 변화의 수묵 붓질로 강변 언덕과 모래사장의 흰 길을 드러낸 표현이 인상적이다. 강에는 크고 작은 배 세 척이 돗을 내린 채 물결 따라 움직이는 듯 설정했다.

양탄(兩灘)은 읍내를 끼고 남으로 흐르는 샛강 소양천이 여강과 만나는 곳이다. 이곳에 형성된 섬의 이름이 양섬이다. 현재 양섬에는 야구장을 비롯해 양섬지구공원이 조성되고, 여주북로인 세종대교가 지난다. 양섬 서쪽으로는 세종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이 위치한다. 소양천 입구 여강 강변에는 여주향토유적 제21호이고 여주8경으로 꼽히는 입암층암(笠巖層巖)이 있다. (도 2) 우리말로 갓바위이다.

층암 가운데 반듯한 바위에는 신륵사 건너편 ‘마암(馬巖)’과 마찬가지로 1870년 가을 10월에 여주목사였던 ‘이인응(李寅應)’이 쓴 ‘입암(笠巖)’이라는 해서체 글씨를 새겼다. 여기에 ‘이인응’보다 작은 크기로 영릉참봉을 지낸 ‘이복영(李福永)’과 두 형제, 지역 유지 ‘민영목(閔泳穆)’ 등의 바위글씨도 보인다. 단정한 해서체로 신분에 따라 글씨 크기를 달리하고, 글씨 새김 각자(刻字) 작업을 진행한 ‘간역(看役)’ ‘정해조(鄭海朝)’ ‘권복규(權復圭)’ 이름도 함께 등장한다. (도 3)

위치로 볼 때, 양탄의 물가 이 바위가 정수영이 그린 두멍암이다. 근 100년 사이에 두멍암이 갓바위로 바뀐 것 같다. 여기에서 북쪽으로는 추읍산과 용문산 능선이 겹쳐서 강 위로 떠 있고, 동남쪽을 향하면 정수영이 이어 그린 청심루(淸心樓)와 관아가 있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 4) 관아 자리에는 여주초등학교와 여주시청이 들어서 있다. 나도 정수영을 따라 소나무들과 어울린 입암과 강변 여주 시내 풍경을 화폭에 담아 보았다. (도 5)

이 <두멍암과 여주읍내> 그림 상단에 강세황의 아들 월루 강관은 “실제 경치 진경(眞境)이 아름다운 곳은 그림과 같다 하고 그림의 경치 화경(畵境)이 아름다운 것을 핍진하다고 말한다. 나는 여주 읍내를 보지 않았으나 그림으로 진경 헤아리는 법을 삼는다. 월루가 적는다. (眞境之善者曰如畵 畵境之善者曰逼眞 吾未見驪邑 常以畵而揣眞 月樓讚)”라며 정수영 그림을 상찬하는 듯한 화평을 써넣었다. 그러나 그림과 실경을 비교하면, 지나친 찬사에 불과하다. 정수영의 <두멍암과 여주읍내(驪州邑內)> 그림은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의 다른 실경화와 마찬가지로 두멍암의 형태도 닮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주읍내 묘사도 실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수영은 두멍암을 빼고 근거리서 본 <여주읍치(驪州邑治)>를 더 그렸다. (도 6) 이 화면은 <두멍암과 여주읍내> 뒤에 신륵사, 동대, 흥원창, 수청탄, 소청탄, 휴류암, 동대 적석, 신륵사 동대 그림에 이어 첨가한 것으로, 여주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림의 시작 부분에 ‘여주읍치(驪州邑治)’라 쓰고, 강변 언덕 위에 여주의 명소 청심루를 중심으로 읍치의 관아 건물들을 배열해 놓았다. 마을 초가들과 고목들이 어울린 관아 경치를 부감시로 풍경을 포착하며 정수영답게 수평구도로 펼쳤다. 정수영 특유의 미숙한 필치가 두드러진, 인적없는 여름 풍광이다. 음영진 갈필 터치로 모래톱으로 가는 길을 드러낸 언덕 아래, 강에는 돗을 내린 배 세척이 보인다.

정수영이 쓴 제목에 이어 강관은 “옛사람이 경강 마포에 살며 쓴 시에 ‘무수한 장사 배들이 앞뒤로 출발하니, 내일 아침이면 모두 여주에 도착하네.’라고 했다. 정박한 세척의 배도 분명 어제저녁 마포에서 출발해왔을 게다. (古人居京江麻浦 有詩曰 無數商舡前後發 明朝俱是到驪州 停泊三船 昨夕必自麻浦發來)”라며 포구의 정황을 부가해 놓았다.

그림의 중심 건물은 담장을 두른 객사의 팔작지붕 누각 청심루(淸心樓)이다. 이 오른쪽으로 옥색하게 그린 객사와 동헌이 보인다. 여주 관아가 사라지기 이전 옛 사진을 보면, 청심루는 그리 높지 않은 중층 누각이다. (도 7) 지금 청심루 표시석 앞에 서면, 여호를 굽어보며 강 건너 오른편 신륵사에서 왼편 용문산까지 북산 경치가 장쾌하다. (도 8) 여호와 산세의 장관은 입암이나 이포보에서 펼쳐진다. (도 9)

청심루는 이같이 강산이 어울려 일출과 일몰, 월출, 사계를 모두 즐길 공간이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을 비롯해 조선의 많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명소이다. 중국 악양루나 황학루가 부럽지 않은, 남한강 최고의 정자로 손꼽힌다.

이색은 이런 여호 풍광을 “천지는 끝이 없고 인생은 유한하네, 광대한 뜻 있으나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여강(驪江)의 한 구비를 이룬 산은 그림 같고, 반은 단청 반은 시이네. (天地無涯生有涯 浩然歸志欲何之. 驪江一曲山如畵 半似丹靑半似詩.)”라며 ‘반은 시이고 반은 그림’ 같다고 표현했다. (李穡, 『牧隱集』, 驪江迷懷) 또 이포(梨浦)에 살았던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1478~1543), 이 여주를 즐기며 청심루 풍경을 “겹겹이 안개 물살이 가까이 푸르게 넘실대고, 두 강 사이 우뚝 솟은 봉우리가 멀리 파랗게 보이네(拍砌煙波臨綠漲 際川嵐岫望靑堆)”라고 읊었다. (金安國, 『慕齋集』)

 

* 지금까지 5회에 걸쳐 고산서원, 두멍암(입암)과 여주읍내, 신륵사, 흥원창, 수청탄과 소청탄, 휴류암(마암), 신륵사 동대, 여주읍치 등 정수영이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남한강 물길 따라 그린 여주지역 여정을 살펴보았다. 여기에 이어진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 후반부, 곧 북한산 임진강 금천 관악 삭령 등지의 명소 그림에 대하여는 시차를 두고 소개하겠다. 6년 전인 2013~4년에 그 후반부 장소인 임진강과 연천지역을 답사한 적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사진만 찍었기에 다시 찾아 스케치를 병행하기 위함이다. 또 한강의 시작 부분도 재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기도 하다. 정수영이 이곳을 찾았던, 봄꽃 피는 4~5월쯤을 되지 않을까 싶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7-고산서원, 여주관아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네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7-고산서원, 여주관아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네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7-고산서원, 여주관아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네번째
12/18/2019
/ sketch

 

 지난번에 언급했듯이 대탄에서 본 용문산 능선은 뾰족한 삼각형 주봉으로 유난하다. 용문산(1157.1m)은 어디서 보아도 눈에 띄는 남한강의 으뜸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이 경관은 남한강을 따라 여주까지 이어진다. 지금 여주보에서 그 실루엣의 위용이 가장 기세 넘친다. 그 아래로 펼쳐진 추읍산(583m) 산세도 원경 용문산 능선과 평행을 이룬 게 장관이다. (도 1, 2) 석양이 열린 풍광을 최고로 연출한다.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 이번에 소개하는 강변 풍경화는 여주 여행의 첫 장면인 <고산서원(孤山書院)>이다. (도 3) 맨 처음 소개한 <신륵사(神勒寺)>, 두 번째 <휴류암(鵂鶹巖)>, 세 번째 <흥원창(興原倉)>과 <소청탄(小靑灘)> <수청탄(水靑灘)>에 이어 네 번째이다.
정수영이 ‘이릉(二陵)’ ‘우미천(牛尾川)’ ‘양주구계(楊州龜溪)’ ‘용당우(龍堂偶)’ 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능선이 길게 이어진 풍경의 ‘미호(渼湖)’ 등을 거쳐 남한강을 거슬러 여주에 왔다. 우미천 강가의 배는 돗을 올리지 않은 채 출발하는 듯한데 정수영 한 사람만 보인다. 미호에서여주 고산서원으로 연계되는 사이의 배에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이동하며 친구들을 태워가며 선유를 즐긴 모양이다. 다시 보니 지난번 <휴류암도>에 다섯 명이 탄 배는 돗이 없어 먼 거리 이동용이 아닌 목선으로, 여주 관아에서 별도로 빌린 듯하다. 

정수영 일행이 여주에 처음 도착해서 찾은 곳은 대신면 보통리에 있던 고산서원이다. 명승보다 존경할만한 인물을 찾는 여정이었음을 보여주는 행적이다.
고산서원은 금사면에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1478~1543)을 봉안한 기천서원(沂川書院)과 함께 여주의 양대 서원이다. 김안국은 중종 때 신진사림파 문인이면서, 조광조의 급진적 주장에 동조하지 않아 부침이 크지 않아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금사면 이포리에 범사정(泛槎亭)을 마련하고 여주의 아름다운 경치 곳곳을 유람하며 많은 시문을 남겼다. (여주박물관 학술총서 03, 『驪州牧古蹟幷錄成冊』, 여주시·여주박물관, 2019.) 또 여주에는 세종의 영릉(영릉)과 효종의 영릉이 조성되었고, 1785년(정조 9) 9월 5일에 세운 서쪽 효종의 녕릉(寧陵)을 향해 설립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의 사당 대로사(大老祠)가 설립되었다. 정수영 일행이 이 ‘대로사’에는 무관심했는데, 역시 서인-노론계와 반대파 인사들의 정파적인 행위로 여겨진다.
고산서원은 숙종 12년(1686) 고려 말 석탄 이존오(石灘 李存吾, 1341~1371)와 조선 중기의 문신 조한영(曺漢英)의 덕행을 추모하며 세워졌으며, 1708년(숙종 34) 고산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여주 고산(孤山)을 아호로 쓰던 이존오는 공민왕 시절의 젊은 관료로 신돈 세력에 분개하며 저항한 문인으로 꼽힌다. 장사에 유배되기도 했고, 이른 나이 정계를 떠나 공주 석탄(石灘), 여주 고산에 은둔하다가 31세에 세상을 하직했다. (『석탄집(石灘集)』;『여주목읍지』 인물편, 영조 36년 1760) 대원군의 서원철폐령(1871)으로 철폐되었다. 

정수영의 여주 <고산서원(孤山書院)> 그림은 “고산 이존오 서원이네(孤山 李公存吾 書院 云)”라는 제목을 시작한다. (도 3) 그림에 인적이 없으나, 그 오른쪽 <미호(渼湖)> 그림 끝자락에 왼쪽으로 이동하는 돗배가 두 화면을 연계시켜 주는 듯하다. 화면 오른편에 강변 가까이 홍살문과 서원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당찬 기와집 본원과 좌우 동, 서재를 중심으로 사당이 배치된 전형적인 서원구조이다. 이런 모습 아래에 강관은 “이존오는 장사에 유배되었다. 지금은 무장이다. 이처럼 좋은 서원 건물은 비슷한 것도 없을 게다. (李謫長沙 今之茂長 似無如此好院宇)”라고 화면 아래에 써넣었다.

서원 주변에는 듬성듬성 여름 수목들이 자라고, 홍살문 오른쪽 강변에 초가집들이 정겨운 마을에 어울려 있다. 서원 왼편으로도 작은 마을이 들어서 있다. 마을의 낮은 산 능선 위로 주변보다 진한 먹색으로 표현된 ‘추읍산(趨揖山)’이 크게 과장돼 우뚝하고, 그 왼편으로 용문산이 상당한 근거리에 등장해 있다. 이런 산세에 대해 정수영은 “갈산(현재 양평군 양근리에 있다.)을 지나치며 역주해 남하하면, 아름다운 경치 가까이 즐기기엔 감당되지 않는다. 보통리에 이르면, 장중한 형세가 시작된다. (自葛山看過 則歷走南下 不堪愛翫 至甫通 始有典重之勢)”에 이어 “용문산의 아름다운 경치 손에 잡힐 법하다. (龍門秀色 亦可攬結)”라는 행서 제발을 써넣었다.

<고산서원> 그림과 현재 풍경은 크게 다르다. 먼저 강관이 자랑삼았던 고산서원은 조선말 철폐된 이후 터만 뎅그러니 보통리 마을의 서북쪽 구릉에 방치되어 전한다. (도 4) 낡은 대로 설치된 표지판으로 보아 발굴한 뒤 복원할 예정이었던 모양인데, 표시판은 글자를 읽기 어려울 정도로 변색해 마을 쓰레기더미에 있다. 서원의 하마비(下馬碑)는 같은 마을의 김영구 가옥(중요민속문화재 제 126호)에 옮겨져 있다. (도 5)
고산은 그리 높지 않은 구릉이고, 서원 터 아래는 소규모의 마을 논이 이어진다. (도 6, 7) 지금의 실경은 정수영의 그림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여강 북쪽 강변에 둑을 쌓았기에 물길과 지세가 약간 달라졌겠는데, 그래도 현재의 지형상 그림처럼 서원이 강가에 붙어 있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마을 논 아래 둑 도로 사이 샛강이 잘 말해준다. 정수영이 서원을 강에 붙어 있던 것으로 착각한 게 아닌가 싶다. 이는 신륵사 동대 풍경을 여러 차례 반복해 그리면서 도리어 삼층석탑을 오층으로, 한 비석을 여러 기로 그렸던 오류와 유사하다.
또 서원 아래에서 추읍산이나 용문산경이 눈에 들지 않는다. 마을 논 건너 멀리 떨어져야 산 정상이 살짝 보일락말락 할 정도이다. 추읍산과 용문산 풍경을 그림처럼 볼 위치는 열린 공간이어야 가능한즉, 정수영은 고산서원에 진입하기 전에 여강 입구인 이포에서 뒤돌아본 이미지를 합성한 셈이다. 이런 점은 정수영이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의 실경화를 그림에 현장 스케치와 더불어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법처럼 현장을 다녀온 이후 기억을 되살려 그렸음을 알려준다.

(이태호, 「實景에서 그리기와 記憶으로 그리기」-朝鮮後期 眞景山水畵의 視方式과 畵角을 중심으로, 『미술사연구』 257, 한국미술사학회, 2008.3.)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