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철, 도화서(圖畫署) 혁파(革罷)를 주장하다?

황철, 도화서(圖畫署) 혁파(革罷)를 주장하다?

황철, 도화서(圖畫署) 혁파(革罷)를 주장하다?
07/25/2019
/ salon
석지 채용신, , Color on silk, 33☓46.2cm, 1920, signed and sealed on the reverse, 고종황제 49세(1901년)때 제작한 어진을 모사한 그림
황철(黃鐵, 1864~1930) 선생은 우리나라 사진도입의 선구자 중 한분입니다. 집안이 원래 광산(鑛山)을 경영하고 있었고, 1882년 근대화를 추진 중이던 조선정부의 권유로 광산기계를 시찰하고 수입하기 위해 중국의 텐진(天津)을 방문했습니다. 기계 구입을 마친 황철은 근대 문물을 돌아보기 위해 베이징(北京)을 거쳐 상하이(上海)까지 방문했고, 이곳에서 머물며 사진술을 익혔습니다. 상하이를 떠나 귀국하면서 독일제 카메라와 재료 등을 구입해왔고, 1883년 지금의 종로구 삼청동 초입에 있던 대안동(大安洞) 사저의 서책 사랑을 개조하여 사진 촬영시설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황철 선생의 사진술 습득과 사진관 설립 등 사진에 관한 역정을 상세히 알 수 있는 것은 선생의 아들인 황치문(黃致文)이 1954년 아버지의 일생을 기록해서 남긴 전기(傳記)를 통해서입니다. 황철 선생의 생전 일기와 일본 망명 시절의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책으로, 선생의 호(號) ‘어문(魚文)’을 딴 『어문공전기(魚文公傳記)』입니다. 이 책은 원래 한문(漢文)이 대부분인 기록인데 선생의 손자인 황대용(黃大鎔) 씨가 국문으로 번역했습니다. 1998년 현재 관장으로 있는 윤범모 교수의 노력으로 에서 출간했습니다. 황철 선생의 가계(家系)부터 출생과 관직 그리고 사회 활동 등이 시대 별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항목이 있습니다.

“1883년 계미(癸未) 고종(高宗) 20년 20세
대안동(大安洞) 사저(私邸)의 서책사랑(書冊舍廊)을 개조하여 사진 촬영소를 설치하시다…..(중략)….이때에 공이 상소하여 ‘도화서(圖畫署)를 혁파(革罷)하고 사진(寫眞)으로 대치(代置)하소서’ 라고 아뢰니 임금께서 잠시 뒷날을 기다리라 하시다.”

이 상소의 요지는 도화서의 관리들에게 사진을 배우게 해서 손으로 그리는 초상화나 기록화 등을 카메라를 사용해 이를 대신하도록, 사진과 대치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전기의 내용에서 보듯이 바로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조선 500년 내내 이어온 정부의 직제를 하루아침에 없앨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어진(御眞)과 의궤(儀軌) 등 국가의 중요한 그림을 전담했던 조직을 없애고 사진가들로 대체하라는 상소는, 만약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혁명적인 발상이자 도전이었습니다. 도화서에 소속되어 집안 대대로 일해 온 화원(畫員)들의 밥줄을 끊어 버리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도화서(圖畵署)라는 직제는 조선 건국 시기인 태조(太祖) 1년 즉 1392년에 처음 설치되었습니다. 예조판서가 겸임하는 제조(提調) 1명과 별제(別提-종 6품) 2명, 잡직(雜職)으로 화원(畫員) 20명 정도와 서반체아직(西班遞兒職) 3명을 둔 중요한 정부 기관이었습니다. 주로 왕실과 사대부 등의 요청을 받아 작업을 하는 관청이었지만, 국가가 제도적으로 화가를 양성하고 보호하는 곳이었고 조선의 화풍을 형성하고 이어나가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 미술의 거장으로 ‘몽유도원도(夢遊桃源道)’를 그린 안견(安堅), 단원 김홍도(壇園 金弘道)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등도 바로 도화서 출신의 화원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진 도입의 선구자 중 한분으로 1883년 일본인 사진사를 초빙해서 최초의 사진관을 개업한 김용원(金鏞元, 1842~1892) 선생 또한 화원 출신이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1880년대 초 조선에 사진이 도입된 후로 점차 도화서의 규모와 역할이 축소되었고, 결국 폐지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진가들이 도화서 화원들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894년 조선정부는 예조(禮曹) 소속으로 있던 도화서를 훨씬 규모가 작은 규장각(奎章閣)에 통합했고, 1895년에는 연행사(燕行使)나 통신사(通信使) 등 외지에 파견하는 사절단을 따라가 기록하는 수행화원의 숫자를 대폭 줄이거나 없앴습니다. 또 대한제국 시절인 1900년대부터는 도화서에서 어진을 제작할 때는 사진을 밑그림으로 삼아 그렸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화원들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사진이 그림을 대신하게 되면서 의궤 같은 기록화를 그리거나 어진의 밑그림을 맡았던 전통 화원들을 양성할 필요가 없어졌고, 도화서 또한 유명무실해진 것입니다. 한국미술사 연구자들은 대개 1903년 정도 도화서가 혁파되었다고 전합니다.

고종 황제가 사진 찍는 일을 좋아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일본인 사진사, 지운영과 같은 조선인 사진사, 서양에서 온 퍼시벌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 1855~1916) 같은 사람 등 카메라를 든 누구도 가리지 않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고종의 어사진(御寫眞)은 다양한 형태와 복식으로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후로 정식으로 어진(御眞)을 제작하고 봉안할 때도 사진을 보고 그렸습니다. 고종과 순종을 많이 그린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나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48년~1941)의 어진도 전부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입니다. 채용신의 유명한 초상화 ‘매천 황현 상(梅泉 黃玹 像)’도 해강 김규진의 <천연당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을 그대로 모사(模寫)한 그림입니다.

왼쪽은 채용신의 그림, 오른쪽은 김규진의 사진

도화서의 운명과 관계없이,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어문공전기(魚文公傳記)』에 나오는 기록의 신빙성 여부입니다. 만일 황철 선생이 실제로 도화서 혁파에 관한 상소문을 올렸다면, 조선왕조실록의 『고종실록(高宗實錄)』 편이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어딘가에는 관련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에 관한 기록은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와 ‘경상남도관찰사(慶尙南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는 내용이 전부입니다. 그렇다고 당시 황철 선생은 고종을 독대할 위치에 있지 않아서 구두로 아뢰었다고 보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도화서 혁파’가 평소 선생의 주장이었는지, 실제 그런 상소를 올렸는지. 아니면 올리려고 시도했는지 확증하기가 어렵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

백련(白蓮) 지운영(池雲英) 외전 2

백련(白蓮) 지운영(池雲英) 외전 2

백련(白蓮) 지운영(池雲英) 외전 2
07/2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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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영, <장송낙일>, 1917년, 비단에 수묵담채, 134.2 × 38.5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지운영 선생이 환갑을 맞아 관악산 삼막사(三幕寺)에 백련암을 짓고 은거에 들어간 때가 1912년이었습니다. 경술국치를 겪고 일단 세상을 등졌습니다. 이때부터 그림에 천착해서 많은 서화 작품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장송낙일도(長松落日圖)>입니다. 말을 탄 채 해질 무렵 우거진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한 선비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격동의 시대를 살고 칩거에 들어간 자신의 운명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입니다.

지운영 선생은 시인으로서도 대단한 작가셨지만 화가로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셨습니다. 물론 당시의 지식인들 대부분은 시(시), 서(서), 화(화)에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인(中人) 출신으로 중앙 정부의 고위 관직에도 올랐고, 사진술을 도입했으며 고종(高宗)의 어진(御眞)을 찍었을 뿐만 아니라, 시(詩), 서(書), 화(畵) 전반에도 일가를 이루어 문화유산을 남긴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로 무술(武術)에도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육교시사의 동인으로 세상을 공부하고 인맥을 쌓은 지운영 선생은 박영효를 정사로 하는 수신사 일행에 포함되어 일본을 다녀왔고, 고베에서 사진술을 습득하고 귀국해서 촬영국을 개설했습니다. 또 관직에 기용되어 탄탄대로를 달렸습니다. 당시 임금의 어진을 찍었을 정도이니 거의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음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1883년에는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주사(主事)로 임명되어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며, 1884년에는 아문 산하의 전선사부장(典選司付掌)을 지냈습니다.

승정원일기, 1884년(고종 21년) 3월 29일자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통리군국사무아문의 말로 아뢰기를, 전 주사 지운영(池運永)을 본 아문의 주사로 차하하여 전선사 부장으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셨다.” 전선사란 고종 17년인 1880년에 설치한 ‘재지(才智)와 기예(技藝)를 가진 인재등용과 각 관사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일을 관장하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한 부서’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의 인생을 크게 바꿔놓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혁명 실패 후 일본으로 피신했던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하라는 명을 받은 일입니다. 1886년 밀명을 수행하는 ‘특차도해포적사(特差渡海浦敵使)’로 임명되어 암살의 임무를 띠고 다시 일본에 건너갔습니다. 이 해 3월 도쿄에 도착한 선생은 마루키(丸木利陽) 등과 같은 일본인 사진사들과 교류를 가졌습니다. 같은 사진사였기에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그들의 일정한 도움을 받아 암살을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암살 시도는 실패에 그쳤고, 요코하마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인 조선에 송환되었습니다.

지운영 선생이 암살 자객으로 임명된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먼저 평소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가 많이 있어 김옥균의 용모를 잘 알고 있어 대상을 특정하기 용이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 선생은 체격이 건장했고 어릴 적부터 택견을 수련해서 호신술을 비롯한 무술에도 일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황철, 지운영 합작, <산수도>, 1932, 비단에 채색, 250.0×84.0cm, 일본 사노시향토박물관(佐野市郷土博物館) 소장

자객으로 적합한 조건입니다. 또 사진을 하는 사진사여서 카메라 같은 장비와 약품을 구하러 간다고 목적을 위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김옥균은 일본 정부의 보호 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자객으로서는 신분의 위장이 필요했습니다.

조정에서는 암살 실패의 책임을 물어 선생을 약산(藥山)으로 유명한 평안도 영변(寧邊)으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화가로서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1886년 영변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한 후부터였다고 전해집니다. 1889년까지 거의 3년에 가까운 유배 생활은 선생의 인생에서 큰 전환기였습니다. 당시의 조정에 대한 충성과 헌신으로 일관한 관료 생활의 결과가 결국 유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유배에서 풀린 선생은 자신의 이름을 운영(運英)에서 운영(雲英)으로 바꿨고, 설봉(雪峰)으로 사용하던 호 또한 백련(白蓮)으로 바꿨습니다. 유배가 삶의 큰 전환점이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이후 선생은 그림을 그리며 은둔형의 처사(處士)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때 선생을 화가로 이끈 분이 같은 사진도입의 선구자였던 황철(黃鐵, 1864~1930) 선생이었습니다. 두 분은 사진과 회화를 넘나들며 교류한 동지였습니다. 두 분의 관계는 합작 작품인 <산수도(山水圖)>를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선생은 1895년, 1904년 두 차례 중국을 여행하며 항저우(杭州), 쑤저우(蘇州)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화풍을 만들어 갔습니다.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지운영의 화풍에 대해, “옛 그림들로 임모(臨模)하여 기량을 길렀으며, 특히 산수 인물을 잘 그렸다. 화풍은 대체로 중국풍이 짙은 북종 원체적(北宗, 院體的)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독창적인 화풍은 형성하지 못하였으나, 인물과 산수를 적절히 배치하는 구성력은 뛰어났다. 대표작으로 후적벽부도(後赤壁賦圖), 남극노인수성도(南極老人壽星圖), 동파선생입극도(東坡先生笠屐圖) 등이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김영윤(金永胤)은 한국회화인명사서에서 “글씨는 해서, 행서에 능했으며, 구성궁체(九成宮體)를 많이 따랐다. 그림은 남종 문인화(南宗文人畵) 풍의 산수, 인물을 잘하여 필치가 창고아윤(蒼古雅潤)하고 색조가 청고숙탈(淸高肅脫)하여 옛사람의 화풍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1921년 서화협회 정회원으로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에 출품했으며, 1922년에 개최된 제1회조선미술전람회에 ‘산인탁족도’(山人濯足圖)를 출품해 입선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한국화단의 중심인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관직과 사진을 등지고 보낸 선생의 말년이었습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

설봉 지운영 외전(外傳) 1

설봉 지운영 외전(外傳) 1

설봉 지운영 외전(外傳) 1
07/2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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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영, 산림초옥도(山林草屋圖), 1880년대, 비단에 먹,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夙視永綃上, 微芒生川嶽. 急捉斧劈毫, 揮灑神有學. 孤松弄澗漪, 荒竹鳴風雹. 此境蒼而寒, 居人拙且樸. 苔紋上几席, 茅宇擁芳葯. 山深不設門, 烟景何杳邈.點綴多空幻, 恥從古家學. 若具卞和眼, 誰無荊山樸.

平安古城旅次楢林先生大雅法鑒, 朝鮮遊客池運永詩書畵,

위 글은 우리나라 사진도입의 선구자인 설봉 지운영(雪峰 池雲英, 1852~1935) 선생의 그림 산림초옥도(山林草屋圖)에 써넣은 시(詩) 전문입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의 근대서화 관련 전시를 하면서 이 작품을 걸었습니다. 다음 글은 위의 시를 박물관이 번역, 소개한 것입니다.

“흰 비단 위에 아스라이 냇물과 산악 생긴 것 일찍부터 보고는, 급히 붓을 잡아 부벽준(斧劈皴)으로 그려내니, 시원하게 휘두르니 깨달음이 있네. 외로운 소나무는 계곡 물결 희롱하고, 거친 대나무는 바람과 우박에 울리네. 이곳은 푸르고 차가우니, 여기사는 사람은 성품이 졸박하네. 바위 이끼 위에 안석 펼쳤고, 띠 집에는 향초가 둘러쌌네. 산이 깊어 문을 만들지 않았으니, 안개 낀 경치 어찌 그리 아득한가. 공환(空幻)이 여럿 점철되어, 옛날부터의 가학(家學)에 부끄럽구나. 만약 변화(卞和)의 안목을 가졌다면, 누가 형산박(荊山璞)이 없겠는가.”

“헤이안(平安) 고성에 있는 여관에서, 유림(楢林) 선생의 부탁으로 드리니 감상하길 바라오. 조선의 유객 지운영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다.”

그림 좌측 상단의 끝부분에는 “池運永印(지운영인)”과 “香秋公南(향추공남)”이라고 새긴 낙관 두 개가 찍혀있습니다. “지운영 자신의 글과 그림이며, 향추관(香秋館)에 기거하는 사람의 합장”이라는 뜻입니다. 선생이 일본 교토(京都)의 향추관(香秋館)에 머무를 때 유림 선생이라고 칭한 일본인에게 그려준 글과 그림입니다. 선생은 자신의 글을 모은 책 두 권을 냈는데, 이 문집(文集)의 이름도 『香秋館集(향추관집)』 이었습니다.

지운영 선생은 한국사진 도입의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미사 김용원(薇史 金鏞元, 1842~1896) 선생, 황철(黃鐵, 1864~1930) 선생 등과 더불어 서울에 사진관을 개업하고 사진술을 조선에 전파했습니다. 이분들 중에서도 사진사 지운영 선생은 1884년 당시 국가의 상징인 고종의 초상사진인 어사진(御寫眞)을 촬영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시인(詩人)으로서 또는 화가(畫家)로서의 선생의 업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선생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인 강위(姜瑋, 1820~1884)의 문하에서 시문을 수학했고, 1880년경 중국에 건너가 그림 공부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1870년대 말부터는 역관(譯官)과 의관(醫官) 등 기술직 중인(中人)들이 지운영 선생의 시 스승이었던 강위를 맹주(盟主)로 하여 맺은 ‘육교시사(六橋詩社)’의 동인으로 활약했습니다. ‘육교시사’라는 이름은 청계천 하류로부터 여섯 번째 다리인 광교(廣敎) 부근에 모여 사는 시인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입니다. 광교(廣敎)는 현재 수표교(水標橋)의 과거 별칭입니다. 강위를 비롯한 김경수(金景遂, 1818~?), 김석준(金奭準, 1831~1915) 등 중인 출신의 중견 지식인들이 젊은이들과 만나 시를 지으며 개화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거나, 중국 일본 등을 다녀온 동인들이 경험한 외국의 다양한 선진문물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교환하는 모임이었다고 합니다. 선생의 나이 겨우 20대 초반의 일입니다.

지운영 선생의 스승이자 ‘육교시사’의 맹주였던 강위 선생은 1873년 ‘사은겸동지정사(謝恩兼冬至正使)’였던 정건조(鄭健朝, 1823~1882)를 수행해 연행(燕行)을 다녀왔으며, 1874년에는 서장관(書狀官) 이건창을 수행해서 청나라에 다녀왔던 인재였습니다. 뛰어난 시문 실력이 있었음에도 과거 시험을 포기한 뒤 당시 이단으로 몰려 은거하던 민노행(閔魯行, 1777~?)의 문하에서 4년간 수학했고, 민노행이 사망하자 그의 유촉(遺囑)에 따라 제주도에 귀양 가있던 추사 김정희를 찾아가 5년 남짓 시, 서, 화를 사사했던 분이였습니다. 훗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창간했던 업적도 남겼습니다.

지운영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강위의 초상

한편 ‘육교시사’의 동인들 중에는 역관 출신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청나라와 서양문물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었고, 국제적 동향에도 밝아 개화활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선생이 사진과 같은 당시 첨단의 서양문물 도입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이 동호회에서 공부한 영향이라고 봅니다. 선생은 ‘육교시사’에서 시를 공부하고 창작하며 시인으로서 역량을 키웠습니다. 그래서인지 선생은 여러 문집과 그림의 발문으로 다양한 한시(漢詩)를 남겼습니다. 당시 조선 최고의 시, 서, 화 전승 인맥의 일원이었으니 그 실력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선생의 지은 문집 『향추관집(香秋館集) 第二(제2)』에 실린 시를 한편 소개합니다. 사진술을 처음 접하고 그 감동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향추관집 제2편, 시의 지면

贈寫眞師平村德兵衛氏
森羅萬象寫如何捉影傳光巧法多奇絶君家明月鏡照人皆作百東坡

“사진사 헤이무라 도쿠베이(平村德兵衛)에게 드림
무성하게 늘어선 삼라만상(森羅萬像)을 어찌하여 촬영하나
그림을 포착하고 빛을 전하는 교법(巧法)도 많아라
기이하다 그대 집의 명월경(明月鏡)이여!
사람에게 비추자 뭇 동파(東坡)를 만드네”

사람의 얼굴을 명월경(明月鏡) 즉 카메라로 촬영하자 마치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蘇東坡)의 시처럼 훌륭한 사진을 만들어 낸다는 내용입니다. 사진을 빛과 그림자를 포착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또 이를 잘 이용하면 시(詩)처럼 창조적인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선생의 사진철학이 담겼습니다.

참고로 헤이무라 도쿠베이(平村德兵衛)는 1870년부터 고베(新戶)의 하나구마치(花隈町)에서 사진관을 운영한 일본의 유명한 사진사였습니다. 지운영 선생에게 사진술을 전수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사진을 가르치는 스승’이란 뜻의 ‘사진사(寫眞師)’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입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

사진과 누드 그리고 관음증

사진과 누드 그리고 관음증

사진과 누드 그리고 관음증
07/25/2019
/ salon

정운봉, 누드걸작100선집 표지, 1995

# 장면 1. 일제식민지 시기인 1927년 지금은 딴 나라인 북한의 함경북도 길주군에 있던 동해공립보통학교에서 학교의 존폐문제까지 거론된 사진에 관련된 엽기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6학년 학생이던 허길순(許吉順, 19세)이란 여학생이 동옥산(董玉山, 18세)이란 남자에게서 염서(艶書,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받았는데, 학생의 집에서 성씨인 동(董)이란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다니던 학교의 수석 훈도(일제 당시 초등학교 교사를 지칭) 한모(韓某)에게 편지를 보이고 글자를 물었습니다. 한모 교사는 이를 빌미로 학교가 파한 후 이 여학생을 숙직실로 불렀습니다. 한편으로는 다른 여학생 3명도 불러 “부산(釜山) 어느 곳에서 스타일이 좋은 아이를 뽑아 가지고 당선된 자에게는 상품을 준다”고 속여 각기 다섯 장씩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특히 허길순에게는 편지로 봐서 남자와 교제한 사실이 있으니 조사해야 한다며 웃통을 벗기고 사진을 찍으려 했습니다. 명분은 “성교(性交)가 있으면 유방(乳房) 빛깔이 변하는 법이니” 사진으로 찍어 과거를 판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생이 반항하자 자해를 시도했습니다.

이 사건은 8월 31일자 『조선일보』에 「여자학생의 나체상을 촬영」이란 제목의 기사로 실렸고, 부제는 “여학생 소행을 조사한다고 웃통 벗겨 사진 박히고 자해 – 길주동해공보(吉州東海公普)의 駭擧(해거)”였습니다.

동아일보 1983.01.21자 범인 이동식의 모습

# 장면 2. 1982년 서울 금천구의 시흥동에 위치한 호암산에서 이발소의 ‘면도사’로 일하던 24세의 여성이 독극물로 살해당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의 수사 결과 범인은 이 여성의 애인이었던 이동식(李東植, 당시 42세)이라는 아마추어 사진작가 겸 한 아파트의 보일러실 관리책임자로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범인 이동식이 다니던 단골 이발소에서 손님과 면도사로 만나서 내연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당시 ‘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으로 ‘작가증’을 들고 다니던 범인은 애인 김씨에게 “누드모델로 출세하게 해주겠다”고 유혹해서 사진을 찍으러 산속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누드 촬영을 위해 옷을 벗으면 감기가 들기 쉬우니 미리 감기약을 먹으라”고 하며 미리 준비해간 독약을 감기약으로 속여 먹였습니다. 약을 먹인 뒤 여자 모델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찍고, 또 옷을 벗겨 몸부림치는 나체의 모습까지 사진을 21장이나 찍었습니다. 공모전에 출품하고 입상하기 위해 자극적인 장면이 필요한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1983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사탄의 곡예(曲藝) 벌인 아마 사진작가」 라는 제목으로 실렸고, “누드모델 되면 돈 많이 번다고 유혹” 이라는 부제가 달렸습니다. 참고로 범인인 사진작가 이동식은 1984년 대법원서 사형 판결이 확정되었고, 1986년 서울구치소(지금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 장면 3. 1987년 11월 19일 오후 태국의 역사유적 도시 ‘아유타야(Ayuthaya)’의 14, 15세기에 지어진 왕궁과 불교 사원 앞에 한 무리의 한국인들이 나타났습니다. 소위 출사 촬영을 위해 한국에서 온 예총 산하 ‘한국사진작가협회’ 소속 회원들과 관광객 15명이었습니다. 남자가 13명, 여자가 2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들 일행의 인솔자는 당시 협회의 이사장으로 있던 사진작가 문선호(文善鎬, 1923~1998)였습니다. 이들은 태국 현지에서 섭외한 16세의 태국 소녀를 전라의 몸으로 포즈를 취하게 하고 공개적인 누두촬영 행사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면서 이를 지켜본 현지인들이 불교와 왕실 역사의 신성함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태국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현지 경찰이 출동했고, 이들은 전원 ‘아유타야경찰서’로 연행되었습니다. 조사 후 관광객이 태국의 법을 잘 몰라서 벌인 일로 정리되고, 훈방조치 되었습니다. 태국 정부가 현지 한국대사관에 항의를 했고,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1987년 11월 25일자 『동아일보』에 「한국사진작가, 태(泰) 옛 왕궁 앞서 누드촬영」 이라는 제목으로 실렸고, 부제는 “태국인(泰國人)들 한국에 항의 움직임”이었습니다.

최근 유투버(이게 직업명으로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로 활동하는 양예원 씨의 고발로 알려진 사진스튜디오의 ‘비공개촬영회’의 누드촬영과 성추행 그리고 사진 유출 사건이 있었습니다. “피팅 모델인 줄 알고 사진 촬영에 참여하게 됐는데 갈아입으라고 준 옷은 포르노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속옷이었고 남성 20명이 보는 앞에서 그걸 입고 선정적인 포즈를 강요받았다는 겁니다. 그때 찍은 사진들이 인터넷상에 버젓이 돌고 있다, 나를 구해 달라. 이런 호소”였다고 한 매체가 정리했습니다. 심지어 사건의 진행자인 해당 스튜디오의 실장이 자살함으로써 더 극적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과거 유사 사건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거의 100년 동안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우리 앞에 나타나서 사진 전문가로서 일하는 나 같은 사람의 기를 죽이고, 사진을 찍고 만드는 행위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내막이야 어찌 되었던 이 모든 사건은 사진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관음증’의 산물입니다. 전체가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도 도처에서 ‘예술’이라는 미명 하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신의학자들은 관음증(觀淫症, Voyeurism)을 “일정하게 옷을 벗고 있거나, 성행위 중인 사람을 몰래 관찰하는 행동이나 환상, 성적욕구와 관련하여 반복적으로 강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질환”으로 정의합니다. 일종의 성도착증(Paraphilia)입니다. 물론 ‘예술과 외설’의 경계가 지극히 모호하기 때문에 판단이 쉽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진행되는 야외와 스튜디오의 ‘단체 누드촬영회’는 ‘관음증’의 집단적 표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과거에는 주로 야외에서, 요즘은 실내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정운봉, 나와 경 표지, 1983

고 정운봉(故 鄭雲鳳, 1920~2017) 씨가 1983년에 펴낸 누드사진집 『나(裸)와 경(景)』은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의 공식인가를 받은 국내 1호 누드사진집이라고 합니다. 예술로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 생전에 자랑하던 일이었습니다. 사진의 역사를 명멸한 많은 작가들이 누드를 주제로 작업했습니다. 누드를 통해 나름의 독자적 미학을 구축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누드사진을 하나의 장르로 삼고, 누드사진 촬영대회와 공모전을 개최하고, 야외에서 집단촬영을 하고 더 나아가 해외까지 원정 촬영을 하는 행태는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정운봉 씨는 이런 현상을 이끈 대표적인 사진작가였습니다. 그가 주관하는 야외 누드촬영 출사에는 참가비가 꽤 비싼데도 보통 버스 2대 정도를 동원할 정도로 사진한다는 사람들이 몰렸다고 합니다. 모델 2~3명 섭외하고 참가자를 모집해서 산으로 들로 출사를 다녔는데, 나중에는 꽤 수익성이 좋은 사업이 되었다고 합니다.

헌데 모델들이 무척 추울 텐데 왜 겨울에도 산에서 들에서 강가에서 옷을 벗겨 촬영할까요? 요즘은 왜 실내로 들어갔을까요?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 박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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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사진의 실존과 진위 논란 2

명성황후 사진의 실존과 진위 논란 2

명성황후 사진의 실존과 진위 논란 2
07/25/2019
/ salon

먼저 4장의 사진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19세기 말 서구의 잡지나 신문 그리고 여행기 같은 책 등에 실린 사진으로 사진 설명이 “명성황후”로 나와 있는 예입니다.

다음으로 다른 4장의 사진을 소개합니다. 같은 시기 서구의 매체들에 실린 것으로 사진 설명이 굳이 번역하자면 “조선의 궁녀” 또는 “조선의 여인” 정도로 소개되어 있는 경우입니다.

위 사진들을 보면 일부는 사진 그 자체로 인쇄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사진을 보고 목판을 만들어 찍어놓은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원고로 쓰인 원래의 사진은 전부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같은 사진이 실린 문헌은 대략 1895년부터 1905년 정도 10여 년간 영국, 프랑스, 독일, 호주, 미국 등에서 발간되어 있습니다. 현재 이 사진을 실은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 책과 잡지만도 25종 정도가 넘습니다.

그 중 가장 앞선 것은 독일에서 발행한 『카톨릭 전교회지』 1895년 9월호입니다. 실제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한 목판으로 인쇄해서 게재했는데, 사진 설명은 “조선 여인”이었습니다. 1895년 호주에서 발행된 영국 외교관 가드너의 저서 『조선』에도 같은 사진을 게재 했는데 이 책의 사진 설명도 “궁복을 입고 있는 조선 여인” 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 프랑스 언론인이자 북경 특파원을 지냈던 드 라게리(Villetard de Laguerie)가 1898년에 출판한 『조선 – 독립, 러시아 또는 일본』이란 책에는 “조선의 여왕”으로, 1904년 프랑스 신문 『르 투르 뒤 몽드 (Le Tour du Monde)』에 실린 기행문에는 “시해된 대한제국 황후”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같은 사진이 여러 나라에서 출판된 다양한 매체에 실려 있고, 더 나아가 사진의 설명도 제각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생각한대로 서양사람 누군가가 명성황후를 알현하고 찍은 사진이라면, 다시 말해 사진의 생산자가 분명하다면, 이런 혼란은 없었을 것이고 명성황후 사진의 실존여부와 진위여부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혼란은 1890~1900년대 당시 우리나라 관련 사진의 생산과 유통 경로가 원인입니다.

당시 신문에 실린 사진관 광고 두 개를 소개합니다. 먼저 1904년 8월 25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기쿠타신(菊田眞)사진관>의 광고입니다.

만세 불변색의 사진을 소본으로부터 6척 이상의 대본까지 최 염가로 촬영함, 풍속, 경색, 기생들의 사진을 염가로 판매함

다음은 1905년 3월 13일, 3월 20일자 부산에서 발행했던 『조선일보』에 실린 <토비(土肥)사진관> 광고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아는 조선일보와는 다른 신문입니다.

土肥사진관 부산 幸町 2정목 전화 108번, 불변색 사진 급 한국풍속사진, 土肥耕美園 불변색 사진 병 한국풍속사진 각종 판매

1880년대부터 일본인 사진사들은 서울을 비롯하여 인천, 부산 등에 진출해서 일본 거류민과 조선인을 상대로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제의 한반도 지배권이 강화되자 대거 진출하는 러시를 이루었습니다. 이들은 초상사진 찍어주는 일이 본업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을 방문하는 서양과 일본의 여행자들에게 한국의 풍속과 생활상 등을 보여주는 사진을 찍어 판매하는 일을 겸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 사진관들과 아주 극소수의 한국인 사진관이 우리나라의 이미지를 서양 세계에 공급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서양의 여행자들 중에는 사진술을 익혀 직접 사진을 찍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진기술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카메라 부피도 엄청 크고 무거웠으며, 유리원판의 무게와 가격 또한 여행자가 사용하기에는 버거웠습니다. 전문적인 사진가가 아니면 사진 찍는 일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Illustrated London News』 같은 화보 신문이 파견한 사진기자 또는 『Underwood & Underwood』 같은 사진 공급 전문회사의 사진가 정도가 직접 사진을 찍었습니다. 서양의 일반 외교관이나 여행자가 사진을 찍어 한국을 서양에 소개했다는 학설은 그래서 어불성설입니다. 사진술의 역사를 모르고 말하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이국적인 취향과 세상의 모든 현상을 수집하기 원했던 당시 서양의 소위 교양인들은 여행을 하면서 현지에서 그 나라나 지역의 풍속과 풍광을 찍은 사진을 구매했습니다. 우리가 여행을 가서 사진엽서를 사서 모으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렇게 구입한 사진을 갖고 가서 여행기나 화보잡지에 게재했던 것입니다. 이런 시장이 형성되자 사진관들은 여행자들이 쉽게 만날 수 없거나 사진촬영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대상, 희귀한 풍속, 한국의 생활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 등을 찍고, 이를 다량으로 인화해서 팔았던 것입니다. 물론 광고도 냈습니다. 이처럼 사진관에서 상업적인 목적 하에 제작한 사진들이 대량으로 유통되어 서구사회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정형화시키는 데 한 몫 했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우리나라에 관한 다양한 서양의 저작들 수백 종에 똑같은 사진이 반복해서 실린 이유입니다.

이처럼 사진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언어 소통의 문제가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앞서 예시한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뿐만 아니라 다른 사진들도 매매되는 과정에서 의도적인 왜곡 또는 어쩔 수 없는 오해가 생긴 경우일 것입니다. 일본인 사진사들이나 한국 사진사들이 영어나 불어를 잘 할 리가 없었고, 통역이 있었을 텐데 당연히 왜곡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진의 인물이 ‘황후’도 되었다가 ‘궁녀’도 되었다가 하는 것입니다. 서양 여행자들 또한 자기가 구입한 사진의 주인공을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소개했었을 것입니다.

최근 ‘명성황후’의 사진일 것이라고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는 이 사진 역시도 『The Illustrated London News』라는 영국의 그래픽매거진 1894년 7월 28일자에 “ATTENDANT ON THE KING OF COREA” 즉 “조선 왕실의 궁녀”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럼 ‘명성황후’의 사진을 실존 할까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측의 근거의 종합입니다.

“ * 명성황후는 일본의 치밀한 음모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었으나, 그 이전부터 생명의 위험을 받고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왕비로 위장한 시녀가 대신 죽음으로써 살해될 번했던 위기를 모면했으며, 그 후 평상시에도 항상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여의사로 명성황후를 자주 진료했던 언더우드여사는 측근이나 시녀들이 과민할 정도로 왕비를 보호했다고 했으며, 궁중 의사였던 알렌도 황후를 직접 진료한 적이 있는데, 전의들이 진맥한 것처럼, 발로 가리고 팔만 내밀어, 그것도 팔목 한 치 정도만 노출되었으며, 혀도 발 틈으로 관찰할 수 있다고 했다. * 이로 보면 명성황후의 모습은 측근이나 아주 가까운 관계가 아니면 대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초상화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측의 근거는 “특히 명성황후 사후에도 고종이나 조선 황실에서 황후의 사진을 구하기 위해 현상금까지 걸고 찾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실존과 진위 여부의 판단은 여러 분의 몫입니다.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 박주석

명성황후 사진의 실존과 진위 논란 1

명성황후 사진의 실존과 진위 논란 1

명성황후 사진의 실존과 진위 논란 1
07/25/2019
/ salon

일제 치하에 있던 1935년, 『조선일보』의 1월 1일자 신년호에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사진 두 장이 간단한 설명과 함께 실렸습니다. 60년 전 설날을 지내는 풍습을 다룬 특집 기사 중 하나였습니다. 두 장 모두 ‘명성황후’의 모습인지 여부로 지난 몇 십년간 숱하게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진들입니다. 당시 신문의 기사를 요즘 말로 번안해서 그대로 옮겨봅니다.

「규중에 숨은 고운 각시들」
이것은 큰 머리에 큰 옷을 입은 육십년 전의 부인네 입니다. 지금 누군가 아가씨한테 보라면 저렇게 차리고 어찌 견디느냐고 할지는 모르지만 옛날의 부인네는 이 머리 이 옷으로 일평생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또 그중에는 이 머리 이 옷도 못 차리게 되어 일평생을 한탄으로 지낸 이도 없지 않습니다. 저고리는 젖가슴도 못 가리도록 짧지만 치마만은 두발을 푹 싸도록 지르르 끌리는 것이 꼴사납기도 하나 알지 못하게 옛 맛이 납니다. 이것은 남끝동 자지고름의 저고리와 스란치마를 입은 육십년 전 젊으신 아낙네의 옷맵시외다. 머리 뒤를 보십시오. 방망이만한 석류잠이 달려 있지 않습니까? (육십년 전에 박힌 사진)

‘남끝동 자지고름’이라든지 ‘스란치마’ 같은 전통 한복의 용어들이 낯설기는 합니다. 복식사전에 따르면 ‘스란치마’란 스란단을 단 긴 치마로서 입으면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폭이 넓고 길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이나 양반가에서 예복으로 입었다고 합니다. ‘자지고름’은 일제시기에 지금 쓰는 ‘자주고름’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60년 전 그러니까 1895년경에 찍힌 것으로 위의 사진은 부인네의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젊은 아낙네의 모습이라고 소개합니다. 무척 불편해 보이지만 누구나 입을 수 없던 왕실이나 반가의 규방 아가씨들이 평생 입고 지낸 복식으로 자못 옛 맛이 난다는 설명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서는 방망이만한 머리의 장식이 너무 커서 무척 불편해 보이고, 살기 참 어려웠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촌평도 있습니다.

기사가 실린 때가 1935년이니 지금보다는 사진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개연성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두 장의 사진을 ‘명성황후’라거나 당시의 표현으로 ‘민비’라고 칭하지도 않았고, 단순히 구한말 ‘규중의 고운 각시들’의 사진이라는 정도로 서술했습니다. 일반 여성은 아니고 지체 높거나 부유한 집안에서 보호를 받는 여성들 정도로 알고 기사를 썼고, 그것도 인물 자체에 대한 내용이 아니고 과거의 옷 입는 풍습을 설명하기 위한 자료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시는 두 장 사진에 찍힌 인물을 ‘명성황후’라고 알고 있거나 주장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와서 이 두 장의 사진을 두고 ‘명성황후’의 모습이라는 진위논란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원래 두 장의 사진이 후보였는데, 최근 들어서는 한 장의 사진이 추가되었습니다. 논란의 인물사진 세 장을 소개합니다. 모두 ‘명성황후’의 모습 후보로 그 동안 학계나 언론 등에 거론된 사진입니다

‘남끝동 자지고름’이라든지 ‘스란치마’ 같은 전통 한복의 용어들이 낯설기는 합니다. 복식사전에 따르면 ‘스란치마’란 스란단을 단 긴 치마로서 입으면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폭이 넓고 길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이나 양반가에서 예복으로 입었다고 합니다. ‘자지고름’은 일제시기에 지금 쓰는 ‘자주고름’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60년 전 그러니까 1895년경에 찍힌 것으로 위의 사진은 부인네의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젊은 아낙네의 모습이라고 소개합니다. 무척 불편해 보이지만 누구나 입을 수 없던 왕실이나 반가의 규방 아가씨들이 평생 입고 지낸 복식으로 자못 옛 맛이 난다는 설명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서는 방망이만한 머리의 장식이 너무 커서 무척 불편해 보이고, 살기 참 어려웠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촌평도 있습니다.

기사가 실린 때가 1935년이니 지금보다는 사진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개연성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두 장의 사진을 ‘명성황후’라거나 당시의 표현으로 ‘민비’라고 칭하지도 않았고, 단순히 구한말 ‘규중의 고운 각시들’의 사진이라는 정도로 서술했습니다. 일반 여성은 아니고 지체 높거나 부유한 집안에서 보호를 받는 여성들 정도로 알고 기사를 썼고, 그것도 인물 자체에 대한 내용이 아니고 과거의 옷 입는 풍습을 설명하기 위한 자료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시는 두 장 사진에 찍힌 인물을 ‘명성황후’라고 알고 있거나 주장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와서 이 두 장의 사진을 두고 ‘명성황후’의 모습이라는 진위논란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원래 두 장의 사진이 후보였는데, 최근 들어서는 한 장의 사진이 추가되었습니다. 논란의 인물사진 세 장을 소개합니다. 모두 ‘명성황후’의 모습 후보로 그 동안 학계나 언론 등에 거론된 사진입니다

사진1

사진2

사진3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가장 오랫동안 회자된 이미지는 <사진1>입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 박사가 1904년 감옥에서 집필했고, 1910년 미국에서 출판한 『독립정신』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미국에서 출판해서 인지 당시로는 드물게 자료 사진을 많이 실었습니다. 여기에 <사진1>이 ‘명성황후’라는 캡션을 달아 소개되었고, 1970년대까지는 ‘명성황후’의 이미지로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립니다. 그래서인지 이 사진의 빈티지프린트를 소장한 <한미사진미술관>도 “명성황후 추정 사진”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1975년 <사진2>가 발견됩니다. 프랑스에서 1898년 발간된 라게리(Villetard De Laguerie)의 책 『La Coree Independante, Russe ou Japonaise』에 실린 여러 삽화 중에 있는 이 사진의 캡션이 ‘한국의 황후(La Reine De Coree)’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 책이 소개되자 많은 국사학자들이 이 사진이 바로 ‘명성황후’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1977년부터는 국정 한국사교과서에 실리는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은퇴하신 이태진 교수가 대표적인 분입니다. 하지만 진위 여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생겼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90년대에 들어와 교과서에서 삭제당하는 비운을 맞기도 했습니다.

이상 두 장의 사진이 ‘명성황후’의 모습이라고 확정되지 못하자 최근에는 <사진3>이 맞는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대개 2006년 무렵부터였습니다. 빈티지프린트가 제가 잘 아는 영국의 ‘한국역사사진’ 컬렉터인 테리 버넷(Terry Bennett)의 소장품에 있습니다. 테리는 이 사진의 인물이 원본 사진을 배열한 앨범에 고종황제 및 순종, 대원군 등과 같은 위상으로 구성되어 있고, 인물의 배경 화면이 다른 사진과 같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진 또한 다른 기록에는 ‘조선 왕실의 시녀’로 설명되어 있다는 치명적 결함이 있습니다.

왜 이런 혼란이 지속되는 것일까요? ‘명성황후’는 실제 사진을 찍었을까요? 그렇다면 사진은 실존하는 것일까요? 이런 의문을 해결하려면 동서양의 각종 관련 기록들을 전수조사하고, 당시 사진의 유통 경로를 파악해야 합니다. 다음 살롱에서 의문을 좀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