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초상화도 뽀샵 처리를 했다(두 번째)

조선 시대 초상화도 뽀샵 처리를 했다(두 번째)

조선 시대 초상화도 뽀샵 처리를 했다(두 번째)
01/24/2019
/ 이태호

도2. 윤위그림,〈구택규 흉상〉, 1750년대 전반, 비단에 수묵담채, 59.1×42.2cm

조선 시대 초상화 하면 세세하고 정밀한 묘사와 피부병을 검토할 수 있을 정도의 묘사로, 그 리얼리티를 자랑한다. 그런데 조선 시대 초상화도 얼굴 피부의 약점을 지워 그린 사례가 있다. 화원 장경주와 문인화가 윤위가 각각 그린, 관복 차림의 구택규 초상 두 점이 그 사례이다. 최근 발굴된 두 점 가운데 화원의 초상화가 뽀샵 처리되어 흥미로우며, 윤위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손자여서 눈길을 끈다. 이에 대하여는 필자가 논문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이태호, 「최근 발굴된 영조시절의 문신 구택규(具宅奎) 초상화 두 점」-문인화가 윤위가 그린 흉상과 화원 장경주가 그린 반신상, 『인문과학연구논총』 36-1,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5. 봄, 210~238쪽) 두 화가가 그린 구택규 초상을 “뽀샵 처리한 화원 장경주의 <구택규 반신상>”과 “있는 그대로 그린 문인화가 윤위의 <구택규 흉상>”, 두 번으로 나누어 논문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겠다.

(2) 문인화가 윤위가 있는 그대로 그린 <구택규 흉상>

구윤옥의 화기에 밝혀진 화가 윤위(2)

앞서 소개한 <구택규 반신상>과 닮은 관복차림의 문신 흉상 한 점이 2012년 가을 프랑스에서 들여와 국내 옥션에 출품된 적이 있다. 그때는 유찰되었고, 2014년 서울역사박물관이 구입했다. 고운 비단에 59.1×42.2cm 크기의 흉상그림과 113.5×57.5cm 크기의 족자로 꾸민, 초상화를 제작했을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림에는 주인공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 초상화의 아랫단 7.9×42.2cm 족자공간에 쓰여 있는 단정한 예서체의 글에서 그 인물이 확인된다. 이 화기(畵記)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此本幼士 尹愇所摹也 尹氏嘗於造次望見先君子 歸而摸以藏之 庚辰始聞于人 謹求而粧 並前二本 而敬安之 是摹不知在何年 而盖中年以後之眞也 尹氏文士且無雅素 雖執重幣而求之 猶未得焉 其自摹而又能致精力如是 何其不偶然也 尹氏已亡 莫可叩而詳也 神采之內 發庶幾乎七分 則前後摸之者所難也 而尹氏能焉 亦何工也 豈其神思 專而發之 若有助歟 嗚乎 手澤(之)所存 猶不忍讀其書 矧玆左右瞻昻 孺子之感 爲何如也 嗟後昆寓慕之所 亦不在斯與
庚辰秒秋 子 允鈺泣血謹識

이 초상은 선비 윤위(尹愇)가 모사하였다. 윤씨는 일찍이 내 아버지를 잠깐 바라 본 뒤 돌아와서 초상을 그렸고 수장였다. 경진년(1760)에 비로소 사람들에게 얘기를 듣고 삼가 구해서 장황했고, 앞서 그린 두 초상화와 함께 모시게 되었다. 이 모사본은 어느 해에 그렸는지 모르겠으나, 대개 중년 이후의 초상이다. 윤씨는 문인선비로서 평소의 교분이 없었기에 큰 선물을 주고 구하려 해도 얻기 어려웠을 터이다. 그 스스로 모사하며 또 힘써 이같이 그렸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윤씨는 이미 세상을 뜨셨으니 물어 볼 수 없다. 안에서 뿜어 나오는 정신이 거의 칠분(70프로)에 가까웁다. 그 전후로 닮게 모사하기란 어려운 일인즉, 윤씨는 능히 이를 이루었으니, 얼마나 공교로운가. 어찌 그가 정신을 하나로 모아 드러내었는지, 마치 누군가의 조력이 있었던 것만 같다. 오호라, 손때가 남아 있을 경우 차마 그 책을 읽지 못한다고 한다. 하물며 좌우에서 우러러보는데 어린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아, 후손된 사람의 사모하는 바가 바로 이 초상화에 있지 않겠는가.

경진년(1760) 초가을(7월)에 아들 윤옥이 피눈물을 쏟으며 삼가 쓰다.

 

이 글은 병조판서를 지낸 구윤옥(具允鈺, 1720〜1792)이 ‘1760년 7월(음력) 피눈물을 쏟으며 썼다’고 한다. 구윤옥이 떠올린 ‘중년 이후의 아버지’가 구택규(具宅奎, 1693〜1754)이다. 여기서 초상화를 정말 공교롭게 그렸다고 상찬한 화가는 범재(泛齋) 윤위(尹愇, 1725〜56)이다.

윤위는 윤덕현(尹德顯, 1705〜72)의 장남이다. 윤덕현은 윤두서의 여덟째 아들로 서화 감각을 타고난 듯하다. 윤두서는 1711년 초가을 5언시와 함께 간결한 수묵필치의〈우여산수도(雨餘山水圖)〉를 어린나이의 윤덕현에게 그려준 적이 있다. 아버지의 감수성을 계승한 듯 윤위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시와 문장으로 유명했다. 거장으로 장성하리라는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고 32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상당한 시문을 모은 󰡔범재집(泛齋集)󰡕이 전한다.

윤위의 재능은 아들 남고(南皐) 윤규범(尹奎範, 1752〜1821)으로 이어졌다. 윤규범은 윤두서의 외증손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두터운 교분을 쌓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윤규범이 요청한 󰡔범재집󰡕의 서문에서, 정약용은 절친인 윤규범 못지않게 윤위의 문학세계를 높이 평가하였다. 윤위와 윤규범 부자를 서성(書聖) 왕휘지·왕헌지 부자에 빗대서 칭송했을 정도이다. 윤위가 그린 초상화의 출현으로, 윤두서 집안의 삼대에 걸쳐 배출된 문인화가는 윤두서-윤덕희-윤용 3명에서 4명으로 늘어난 셈이다.

윤위는 할아버지 윤두서가 세상을 떠난지 10년 뒤에 태어났으니 직접 그림을 배울 기회는 없었다. 허나 집안에 소장된〈윤두서 자화상〉을 비롯하여 그 유묵들 사이에서 필력을 익혔을 만하다. 윤두서의 장남 연옹(蓮翁) 윤덕희(尹德熙, 1685∼1776)는 문인화가로 유명했고, 영조 24년(1748) 장경주가 숙종 어진을 이모할 때 감동으로 참여했다. 허나 실제 윤덕희가 1735년에 모사한〈이상의(李尙毅) 초상〉 흉상을 보면, 윤두서 뿐만이 아니라 윤위의〈구택규 흉상〉에도 못 미친다. 청고(靑皐) 윤용(尹愹, 1708〜1740)의 경우는 초상화를 남긴 사례가 없다.〈윤두서 자화상〉의 탁월한 소묘력 유전인자가 그 손자 윤위에게 내려진 것 같다.

 

윤위와 장경주의 초상화법 비교

윤위가 그린 <구택규 흉상>은 50대 사대부 문관의 고고한 품위를 서늘하게 드러낸 명품이다. 구불구불 세심한 선묘의 희끗희끗해진 수염이나 붉은색 입술, 살짝 음영을 넣은 기법은 비록 장경주 본을 카피한 것이지만, <윤두서 자화상>에서도 배웠을 법하다. 약간 황갈색조의 어둑한 얼굴에 이마와 눈가 주름, 코와 안면의 건버섯 같은 피부병 묘사까지 사실감이 두드러진 감명은 더욱 그러하다. 할아버지를 계승한 윤위의 초상화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러한 윤위의〈구택규 흉상〉에 대하여 구윤옥은 화기에 인물의 ‘70프로’를 담았다고 상찬하며 ‘그 전후로 닮게 모사하기란 어려운 일’이라 언급해 놓아 흥미롭다. 역시 얼굴을 흡사하게 묘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님을 당시 화가나 주문자 모두 비슷하게 인식하였다.

윤위의〈구택규 흉상〉은 오사모에 분홍색 단령포 차림으로, 화원 장경주의 1746년 작〈구택규 반신상〉과 너무도 흡사하다. 윤위의〈구택규 흉상〉은 구윤옥이 발문에 밝힌 대로 ‘잠깐 인물을 바라 본 뒤 그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윤위의 그림을 구해서 앞선 두 초상화와 함께 모셨다’고 밝힌 점이 주목된다. 그 ‘二本’은 윤위가 참작했던 초상화로 여겨지며, 앞에서 소개한〈구택규 반신상〉외에 또 다른 장경주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화기에 조현명이 찬문을 쓴 장경주의〈구택규 반신상〉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장경주는 구택규의 초상화를 최소한 3점 이상 그린 셈이다.

윤위는 장경주의 구택규 초상화 중 그 한 본을 보고〈구택규 흉상〉을 모사했을, 제작 시기는 1750년대 전반 윤위의 나이 20대 후반쯤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두 초상화가 서로 닮았으면서도, 표현화법의 차이가 눈에 띈다. 화원 장경주의 초상화법은 훈련된 형식미의 탄탄함을 보여주며, 윤위의 초상화법은 문인화가답게 꾸밈없는 격조가 서려 있다. 이는 홍색 단령포 관복의 옷주름 표현에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탄력 있는 여러 가닥 옷주름의 장경주 본에 비하여, 윤위 본의 의습에서는 서너 가닥으로 정리하며 어깨선을 수정한 흔적이 또렷하다. 특히 의상 표현의 조심스런 붓자욱은 문인화가 윤위의 담백한 감성을 물씬 풍긴다.

문인화가 윤위와 화원 장경주, 두 화가가 구사한 초상화법의 차이는 크게 다음 두 가지로 압축해 볼 수 있겠다.

먼저 배채법(背彩法)의 유무이다. 장경주의〈구택규 반신상〉은 조선시대 화원의 배채법 활용이 뚜렷하여 분홍빛 얼굴과 관복, 그리고 검은색 관모 표현이 짙고 안정감을 준다. 이에 비하여 윤위의〈구택규 흉상〉에는 얼굴이나 관모와 관복 표현의 투명감이 감돈다. 그림을 확대해 보면 고운 비단의 뒷면에 물감층이 없어 배채법을 쓰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특히 윤위 본의 피부병변을 드러낸 담갈색조 안색도 배채법을 쓰지 않은 탓이다. 이는 장경주 본의 화사하고 밝은 연분홍 피부감과 잘 비교된다. 이러한 문인화가의 초상화에서 배채법을 쓰지 않은 표현법은 1782년 작〈강세황 자화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다음 53세와 50대 후반의 노인 구택규를 대상으로 삼은 두 초상화는 얼굴 표현에 큰 차이를 보인다. 53세 모습의 장경주 본은 천연두 흔적이나 노인의 건버섯이 보이지 않는다. 요즘 말로 뽀샵처리를 해놓았다. 약간 어두운 얼굴에 코와 눈 주변의 천연두 흔적과 왼쪽 뺨의 건버섯 표현이 뚜렷한, 윤위 본과 비교할 때 그러한 점이 잘 드러난다. 아마도 구택규가 장경주에게 얼굴의 약점을 수정하도록 요구했고, 장경주가 그 요청을 받아들인 모양이다. 윤위는〈구택규 흉상〉에서 장경주 본을 충실하게 모사하였다. 거의 화원급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구택규의 얼굴에서 확인한대로 피부병변을 드러내었다. 문인화가의 진솔한 묘사방식을 잘 보여주며, 이는 할아버지 윤두서의 사실정신과 묘사력의 탁월함을 계승한 결과일 게다.

마치며

구택규 초상화 두 점을 통하여 조선후기 화원과 문인화가의 초상화법을 살펴보았다. 역시 얼굴 이미지와 화풍이 비슷하면서도 배채법(背彩法) 같은 화원 화가의 형식미와 문인화가의 담담한 사실표현에 차이를 드러낸다. 특히 피부병변의 표현 유무를 확인하게 된 점은 괄목할 만하다. 흔히 조선시대 초상화는 그 치밀한 사실화법에 놀라고, 안면의 피부병 같은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시켰다는 사실을 미덕으로 삼는다. 그런데 장경주의〈구택규 반신상〉은 주문자의 요구에 따라 수정하였음을 보여준다. 도리어 윤위의 소품〈구택규 흉상〉에 약간 어눌한 선묘와 함께 진솔한 사실미가 드러나 있어 주목된다.

이처럼 문인화가와 화원이 동시에 한 인물의 초상화를 그린 사례로는 조영복과 강세황 초상을 들 수 있겠다. <조영복(趙榮福) 초상>은 1724년 동생인 문인화가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이 그린 평상복의 좌상과 1725년 화원 진재해가 그린 관복전신상이 전한다. 약간 일그러진 표정은 조영복의 영춘(永春) 유배시절을 적절히 드러낸 이미지이다. 복장과 자세는 크게 다르지만, 얼굴 모습이 한 사람 솜씨처럼 닮은꼴이다. 구택규 초상화와 반대로 문인화가 조영석 본을 보고 화원 진재해(秦再奚, 1691〜1769)가 그린 것이다.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초상화의 경우에는, 1782년 작〈강세황 자화상〉과 이명기가 1783년에 그린〈강세황 71세 초상〉이 화법의 차이를 크게 보여준다.〈강세황 자화상〉이 얼굴묘사나 의습의 선묘에서 약간 직선적인 느낌을 주는데 비하여, 이명기의 솜씨에는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서양화식 입체화법이 선명하다. 이명기의〈강세황 71세 초상〉은 그 치밀한 묘사로 노인 관료상을 잘 살릴 반면에,〈강세황 자화상〉은 문인으로서 자신의 심상을 적절히 드러낸 편이다.

조선후기에는 윤두서에 이어 윤위, 조영석, 강세황 등 묘사기량이 출중한 문인화가들이 배출되었고, 이들의 표현영역이 화원들의 초상화까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구택규 초상화를 비롯한 이들 문인화가와 화원이 동일 인물을 그린 초상화는 조선시대 어진을 제작할 경우, 도화서 화원의 솜씨에만 의존하지 않고 문인화가를 감독격인 감동(監董)으로 발탁했던 이유를 수긍케 한다. 훈련된 화원의 꾸밈 기량과 문인화가의 진솔한 품격을 조화시키려는 적절한 의도이자 안배인 셈이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조선 시대 초상화도 뽀샵 처리를 했다(첫 번째)

조선 시대 초상화도 뽀샵 처리를 했다(첫 번째)

조선 시대 초상화도 뽀샵 처리를 했다(첫 번째)
01/08/2019
/ 이태호

도1. 장경주그림,〈구택규 반신상〉, 1746년, 비단에 수묵담채, 86.2×46.2cm, 삼성미술관 리움

조선 시대 초상화 하면 세세하고 정밀한 묘사와 피부병을 검토할 수 있을 정도의 묘사로, 그 리얼리티를 자랑한다. 그런데 조선 시대 초상화도 얼굴 피부의 약점을 지워 그린 사례가 있다. 화원 장경주와 문인화가 윤위가 각각 그린, 관복 차림의 구택규 초상 두 점이 그 사례이다. 최근 발굴된 두 점 가운데 화원의 초상화가 뽀샵 처리되어 흥미로우며, 윤위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손자여서 눈길을 끈다. 이에 대하여는 필자가 논문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이태호, 「최근 발굴된 영조시절의 문신 구택규(具宅奎) 초상화 두 점」-문인화가 윤위가 그린 흉상과 화원 장경주가 그린 반신상, 『인문과학연구논총』 36-1,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5. 봄, 210~238쪽) 두 화가가 그린 구택규 초상을 “뽀샵 처리한 화원 장경주의 <구택규 반신상>”과 “있는 그대로 그린 문인화가 윤위의 <구택규 흉상>”, 두 번으로 나누어 논문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겠다.

 

(1) 화원 장경주가 뽀샵 처리해 그린 <구택규 반신상>

구택규(具宅奎, 1693〜1754)는 영조시절에 고위직 관료로 활동했다. 숙종(肅宗) 40년(1714) 문과(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한 후 요직을 두루 거쳤다.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冬至使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 1735)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외직으로 진주목사, 동래부사, 회양부사, 영변부사(1745) 등을 역임했고, 형조참의, 도승지, 의금부사, 공조참판, 병조참판, 형조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1753)에 올랐다. 법제관련 전문관료로서 영조의 신임이 두터워 󰡔속대전(續大典)󰡕 편찬(1744〜46)을 주관했으며, 법의학서인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 중간(重刊)도 주도하였다. 또 공정한 판단력을 높이 샀던 듯 관동과 영동, 강원도 지역에서 지금의 감사격인 심리사(審理使)를 맡아 지역의 현안과 필요한 정책 대안들을 내놓았다.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자는 성오(性五), 호는 존재(存齋) 혹은 만포당(晩圃堂)이다.

문인관료상으로, 구택규 초상화 두 점이 최근 세상에 알려져 주목을 끌었다. 법률에 정통했던 문신의 깐깐한 이미지가 돋보이는 그림들이다. 한 점은 문인화가 윤위(尹愇, 1725〜1756)가 1750년대 전반에 구택규의 50대 후반을 그린 흉상이다. 윤위는 조선후기 거장으로 꼽히는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의 손자이다. 이 초상화는 2012년 국내 옥션에 출품되면서 처음 알려졌고, 이에 대하여는 필자가 윤두서일가 관련 새로운 회화자료로 소개한 바 있다. 다른 한 점은 당대 최고로 칭송되던 어진화가 장경주(張景周: 1710〜1775년 이후)가 53세의 구택규를 1746년에 그린 반신상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으로 2008년 초상화의 찬문(贊文)이 번역되어 소개되기도 했다.

사모관복 차림의 관료 초상화 두 점은 한 사람의 솜씨라고 생각될 정도로 유사한 편이다. 제작 시기로 미루어 보면, 윤위의 <구택규 흉상>이 장경주의 <구택규 반신상>을 참작하여 모사했으리라 추정된다. 할아버지 윤두서를 잘 공부한 듯, 문인화가 윤위의 묘사기량이 상당한 편이다. 문인화가로서 윤위에 대하여는 과문하지만, <구택규 흉상>은 윤위의 회화 기량이 <윤두서 자화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 두 작품은 장인적 작업 공정을 거치는 초상화가 더 이상 화원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며, 이는 조선후기 회화의 새 양상이기도 하다. 또 <구택규 반신상>은 어진화가(御眞畫家) 장경주의 뛰어난 묘사력을 자랑할 만한 걸작이다.

 

어진화가 장경주의 화력과 행적

장경주는 할아버지 장자욱(張子旭), 아버지 장득만(張得萬, 1684〜1764)에 이어 영조시절 어진화가로 활약했다. 삼대가 어진화가였던 화원의 명문가 인동 장씨(仁同 張氏)이고, 자는 예보(禮甫)이다. 영조 20년(1744)에 선배인 김두량(金斗樑, 1696〜1763)과 조창희(趙昌禧)를 동참화사(同參畵師)로 밀어내고 주관화사(主管畵師)로 영조의 어진을 제작했다. 이때 장경주의 핍진하는 표현력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으며, 정3품 무관직 충장위장(忠壯衛將)에 올랐다. 장경주는 영조 24년(1748)에도 숙종 어진모사의 주관화사였다. 이때는 아버지 장득만 외 정홍래(鄭弘來, 1720〜?), 김희성(金喜誠, ?〜1763년 이후), 진응회(秦應會, 1705〜?) 등이 동참화사였고, 감동(監董)으로 문인화가 조영석(趙榮祏, 1686〜1761)과 윤덕희(尹德熙, 1685〜1776)가 참여했다. 장경주가 아버지나 선배들을 제치고 이처럼 주관화사로 발탁된 연유는 초상화의 핵심인 얼굴을 꼭 닮게 그리는 묘사기량의 탁월함 때문일게다. 당대의 문인인 이규상(李奎象, 1727〜1799)은 장경주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썼다.

장경주는 도화서의 화원으로 벼슬은 지사(知事)에 이르렀다. 어용(御容)을 모사할 때면 주필(主管畵師)을 맡아 했는데, 초상화 그리는 법이 정세했기 때문이다. 영조 때의 문관 · 무관 · 종친과 벼슬이 높은 사람의 초상화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가 맨 처음 작은 유지(油紙) 조각에 얼굴을 모사해 그린 것을 모두 하나의 책으로 모아 그의 집안에 다 두었다고 한다.…

이 증언에서 관심을 끄는 또 한 대목은 유지초본의 관료흉상을 보관했다는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해동진신초상첩(海東縉紳肖像帖)》이나《명현화상첩(名賢畵像帖)》흉상들이 장경주의 초본으로 추정되기에 그러하다. 1750〜70년 경에 제작된《해동진신초상첩》에는 장경주가 그렸던 관복초상화〈이주진(李周鎭, 1692∼1749) 초상〉의 흉상초본이 합장되어 있고, 동시기나 약간 후대의《명현화상첩》에는 구택규의 아들인〈구윤명(具允明, 1711∼1797) 흉상〉 초본이 포함되어 있어 관심을 끈다. 얼굴이 갸름하게 긴 편으로 부자간에 닮은 이미지이다. 두 화첩의 초본들은 여기서 살펴보는 1746〜50년 경의 구택규 초상화들에 비해 입체감이 살짝 짙어진 편이다. 이들에 대하여는 별도의 심도 있는 탐구가 필요하겠다.

󰡔승정원일기󰡕를 훑어보면 장경주는 어진제작 후 평안도 천수첨사(天水僉使, 1745), 철산의 선사포첨사(宣沙浦僉使, 1748), 진보의 우현첨사(牛峴僉使, 1751)를 지냈다. 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까지 올랐으며, 경상도 사천현감(泗川縣監, 1757)을 역임했다. 기록에 전하는 장경주의 마지막 벼슬은 영조 51년(1775) 훈련판관(訓鍊判官)이었다. 이들 벼슬은 최고의 어진화가에 대한 대접이 소홀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장경주는 평안도 방어진지의 지휘관을 두루 맡았다. 이렇게 집중적으로 화원 출신 장경주를 주요 지역첨사로 발령낸 것은 아마도 국방과 관련하여 관방지도의 제작을 맡기려는 의도도 깔려 있는 듯하다. 특히 현존하는 병풍이나 편화의 영변·묘향산지도와 철옹성도 등과 같은 양질의 지방 군현지도는 장경주 같은 화원의 지방관 근무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장경주가 그린 초상화 사례는 장경주의 능력을 확인하기에 마땅치 않았다. 1744년에 그린 <윤증(尹拯, 1629〜1714) 초상>이 있으나 윤증 사후의 모사 그림이고, 1744〜5년에 제작한《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의 초상화들은 여러 화원이 참여했기에 장경주의 개성과 기량을 구체적으로 살피기 어려웁다. 이들에 비해 여기에 소개하는 <구택규 반신상>은 어진제작의 주관화사 실력을 한껏 드러낸 초상화로 꼽을 만하다.

 

영변에서 그린 <구택규 반신상>의 화풍 (1)

<구택규 반신상>은 86.2×46.2cm 크기의 고운 비단에 수묵담채로 그린 초상화이다. 오사모를 쓰고 분홍빛 관복에 학정금대를 착용한 2품직 관료상이다. 약간 오른쪽을 향한 자세를 비롯하여 18세기 중엽 영조 시절 초상화법의 격조가 여실하다. 검은 오사모의 치밀한 실짜임 무늬 묘사, 깨끗한 안면의 분홍빛, 얼굴 주름에 따른 옅은 음영, 촘촘한 세선의 눈썹과 수염 묘사 등 그야말로 선선한 감각의 사대부상 그대로이다. 음영진 두 눈의 안구 서클과 잔주름, 그 안의 평면적인 눈동자는 정면을 응시하고, 희게 변하는 수염으로 살짝 가려진 붉은 입술에는 고집스런 근엄함이 넘친다. 영조가 여러 지방의 심리사로 구택규를 선택했던 이유를 짐작케 하는 표정이다. 코 밑과 입술 아래와 턱 밑의 수염은 철선묘로 표현할 만큼 직모인데 비해, 좌우 수염은 곱슬곱슬하다.

소매 안의 두 손을 배에 모으고 공수자세를 취한 상반신 초상화이다. 푸른색 띠에 금색 버클이 붉은색 학머리 무늬와 조화된 학정금대(鶴頂金帶)는 오사모와 함께 분홍빛 관복에 엑센트가 되어 초상화의 단순하기 쉬운 화면구성을 조화롭게 한다. 양 팔과 소매의 리듬감 있는 옷 주름 표현이 깔끔하다. 17세기 초상화에 구사된 두 세 가닥의 형식적인 단순 표현에서 여러 가닥의 옷 주름을 실감나게 묘사하려는 변화가 눈에 띈다. 조선시대 화원의 배채법(背彩法)의 활용으로, 분홍빛 감도는 깨끗한 얼굴과 관복, 그리고 검은색 관모 표현이 안정감을 준다.

화면의 오른편 상단에 ‘晩圃堂五十四歲眞’이라는 제목이 단정한 행서체로 쓰여 있다. 그 아래에 같은 서체의 ‘時丙寅仲秋 天水僉使 張敬周寫 于寧邊淸風閣’이라는 작은 글씨가 보인다. “병인(丙寅, 1746) 가을 8월에 천수첨사(天水僉使) 장경주(張敬周)가 영변(寧邊) 청풍각(淸風閣)에서 그리다.”라는 내용이다. 이는 화원 출신들이 지방관으로 근무하면서 현직 수행 외에도 지역 내 고관들의 요구에 따라 초상화를 그렸던 관행의 기록인 셈이다. 초상화를 그렸을 당시 화면에 ‘장경주’라는 화가 이름을 밝힌 점은 화원출신 현직관료에 대한 구택규의 각별한 배려라고 생각된다. 두 사람이 영변에서 만난 행적을 뒤지니 다음과 같다.

장경주는 1744년 말 영조 어진을 제작한 직후 충장위장을 지내다, 영조 21년(1745) 7월 무관직 종3품 천수첨절제사로 발령을 받는다. 평안도 북부에서 청천강을 끼고 묘향산과 약산의 철옹성을 이룬, 영변부에 딸린 군사요충지이다. 천수(天水)는 묘향산 북쪽에 인접해 있다. 영조 22년(1746) 3월 첨사 근무평가에서 하위의 ‘居二’를 받아 화를 당할 뻔했으나 모면한 일도 있었다. 그해 8월 장경주가 영변부사인 구택규의 요청에 따라 영변관아의 청풍각에서 <구택규 반신상>을 그리게 되었다. 혹여 곤장 같은 체벌을 면하는데 구택규의 도움이 있어, 초상화는 그 보답의 하나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또한 1745년경 평안도관찰사 이종성(李宗城, 1692∼1759)도 장경주에게 초상화를 그려받은 일이 있었다. 소론계인 이종성이 영조 21년(1745)부터 이듬해 윤 3월 18일 까지 평안감사를 역임했으니, 장경주는 그 사이에 흉상을 그렸을 법하다. 이 역시 장경주의 처벌에 대한 무마에 결정적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영조 24년(1748) 숙종 어진의 모사에 주관화사로 발탁될 때까지, 장경주는 천수첨사로 근무했다.

구택규는 영조 21년(1745) 우승지를 지내며 관동심리사와 영동심리사를 역임했다. 같은 해 7월 24일 형조참의에서 영변부사로 발령을 받았고, 8월 15일 하직하고 임지로 떠났다. 영조 22년(1746) 4월 11일 󰡔속대전󰡕의 교정 당상으로 임명받으며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는 정3품 영변부사 시절의 <구택규 반신상> 관복에 2품직에 해당되는 학정금대(鶴頂金帶)를 그려 넣게 된 근거이다. 구택규는 영조 22년(1746) 말 지의금부도사(知義禁府都事)에 임명되어 한양에 입성했고, 그 다음해 2월에 병조참판에 올랐다.

 

초상화에 쓴 조현명의 두 찬문

초상화의 오사모 위로는 두 꼭지의 활달한 행서체 시문이 배치되어 있다. 한 사람이 짓고 쓴 두 찬문(贊文)은 다음과 같다.

 

淵然而深 깊은 못처럼 심원하게
若有所思 사색하는 듯한 모습이 있는데
少日迷方之悔耶 젊은 날에 방황한 후회 때문인가?
欣然而樂 기분 좋게 기뻐하며
若有所得 깨우친 바가 있는 듯한데
老而讀書之效邪 늙어서 독서한 효과 때문인가?
燕坐池亭 못가 정자에 편안히 앉아있으니
春花滿園 봄꽃이 정원에 가득하다.
畵中故人 그림 속의 옛 친구와
相對無言 말없이 마주보고 있다.
無言之言 말없는 속에서 말을 나눔은
以心相宣 마음이 서로 통해서이다.
桑楡之功 노년의 공부는
請與子而周旋 그대와 더불어 함께하리라.

丁卯三月日, 獨坐漪漪亭. 晩圃公送示影本, 要贊語, 故戲書之如此云. 歸鹿山人.
정묘(丁卯: 1747) 3월 어느 날에 혼자 의의정(漪漪亭)에 앉아 있었다. 만포공이 자신의 초상화를 나에게 보내주면서 찬어(贊語)를 요구하므로 장난삼아 이처럼 쓴다. 귀록산인.(歸鹿山人)

 

怵然有斂退之色 조심스러운 듯 겸손한 기색이 있으니
屢閱乎風波者耶 여러 차례 세상의 풍파를 겪은 사람이 아니겠 는가?
俛焉有進修之意 열심히 노력하며 덕을 쌓고 공부하려는 의지가 있으니
欲復之桑楡者耶 인생의 노년을 극복하려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行廉而愼 행동은 청렴하면서도 신중하고
才周而通 재주는 두루두루 통하였으니,
言德之弘也 언행과 덕행이 넓기 때문이다.
拔之衆棄之地 척박한 지역에서 발탁되어
躋之仰月之崇 모두가 우러러보는 높은 자리에 올랐다.
何以報之 무엇으로써 보답을 할까?
宜爾讀書乎主命亭中 주명정에서 독서를 함이 알맞다.
鹿翁又贊 녹옹이 또 찬문을 짓다.

 

초상화를 그린 다음해 1747년 3월에 찬문을 짓고 쓴 ‘귀록산인’과 ‘녹옹’은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의 아호이다. 조현명은 영의정까지 오른 소론계열로 영조의 탕평책을 지지하여 노소탕평을 주도했던 유명한 문신이다. 1747년 3월이면 조현명은 영돈녕부사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앉아 이 글을 쓴 장소, 곧 잔물결이 이는 못을 갖춘 ‘의의정(漪漪亭)’이라는 정자는 조현명의 정원에 있었던 모양이다.

정제두(鄭齊斗, 1649〜1736)의 문인으로 알려진, 같은 소론계열 구택규와 교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는 조현명이 쓴 앞의 찬문 내용이 적절히 말해준다. 앞 글은 4언시풍으로, 초상화 그림 못지않게 ‘깊은 연못처럼 깊게 사색하는 모습’의 구택규 인상이 적절히 묘사되어 있다. 이 부분은 조현명의 문집 󰡔귀록집󰡕에 실려 있다. 뒷글은 7언시를 앞세운 찬문으로 구택규의 조심스런 겸손과 풍파를 겪은 인생을 드러낸 글이다. 동시에 청렴과 덕행으로 고관에 오른 품위를 찬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외에도 구택규 초상화에 대한 또 다른 이의 찬문이 전한다. 소론계 문인으로 박세채(朴世采)의 외손자 이광덕(李匡德, 1690〜1748)이 쓴 ‘구참판택규화상찬’이 그것이다. 구택규가 참판에 오른 1747년경에 40년의 세월 변화를 회상하며 구택규의 포용력과 날카로운 눈을 상찬한 글이다. 이 찬문의 구택규 초상화도 장경주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계속)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주명덕이 찍은 뒤태의 초상사진과 조선후기 풍속화

주명덕이 찍은 뒤태의 초상사진과 조선후기 풍속화

주명덕이 찍은 뒤태의 초상사진과 조선후기 풍속화
11/12/2018
/ 이태호

주명덕, 법정스님, 1976

주명덕은 우리시대 사진 예술계의 원로이다. 또한 자타가 공인하듯이, 주명덕의 사진 작업 자체를 그대로 20세기 후반의 한국사진사로 여겨도 좋을 만큼의 내로라하는 거장이다. ‘기록성과 사실성’을 사진작업의 정점으로 삼아 한국의 리얼리즘 사진을 발전시켰고, 민족사진으로서 한국적인 영상을 재창조한 대표 작가로 손꼽을 만하기 때문이다. 

주명덕의 인물초상사진은 주로 한국적인 것에 천착했던 시절에 찍은 만큼, 한국인의 얼굴을 찾으려한 노력과도 맞닿아 있다. 소탈하거나 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유명 인물들 초상에서 당대의 시대적 이미지가 읽혀지는 반면, 작고 작가의 경우에는 추억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초상사진의 기능과 역할을 새삼 수긍케 한다. 또 친분을 쌓으면서 개개인의 성격을 정확히 표출한 초상에서 주명덕의 개성적인 예술성을 엿볼 수 있다. 대상마다의 의미를 부여하는 배경이나 소품 에피소드의 설정, 그리고 자세와 표정잡기가 그러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무수히 카메라에 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주명덕은 항시 “인간을 찾기 어렵다”고 되뇌인다. 그래서인지 그는 초상사진들을 자신의 예술작품으로 선뜻 내놓기를 꺼리는 듯하다. 이는 까탈스러운 주명덕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대상 인물에 대한 존경심이나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우정이 형성되지 않으면 쉽게 동화되지 않는 이유도 있을 터이다.

주명덕이 찍어 온 초상작품의 진수는 성철스님의 인물사진들에 있을 것이다. 성철스님(1912~1993)은 우리 시대 불교계의 큰 성직자이다. 주명덕 스스로도 큰 스님의 생존 모습을 기록한 프로젝트를 대단히 영광스러워 한다. “그동안 물 흐르고 꽃 피는 봄이나, 천둥치고 폭우 쏟아지는 여름이나, 울긋불긋 온 산이 단풍진 가을이나, 살을 에이고 눈 쌓인 얼음길의 겨울이나, 궂은 날, 좋은 날을 가리지 아니하고, 천리 길을 멀다 않고 해인사와 백련암을 오르내리며 큰 스님의 모습”(원택,「책을 엮고 나서」『포영집』) 을 촬영한 것이다. 근 3년여 해인사의 풍광이나 문화유산과 함께 칼라와 흑백사진으로 찍은 성철스님상은 대형사진집인『포영집(泡影集)』(장경각, 1988)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 

초상사진의 진정한 가치와 역할은 역시 정좌한 정면상에서 찾을 수 있다. 마치 전통초상화를 닮은 컬러나 흑백 작품들에는 성직자의 위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주명덕은 큰 스님의 성직생활은 물론, 일상들을 빼놓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마루턱에 걸터앉아 명상에 잠긴 표정이나, 사원의 뒤안길을 소요하는 뒷모습도 포착했다. 근엄한 큰 스님의 외모보다 오히려 인간다운 자태에 성직자의 진면목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걸작이 되지 않나 싶다. 특히 뒷모습의 포착은 주명덕 초상사진의 또 다른 일품이다. 

뒷모습의 초상사진은 성철스님보다 10년 앞서 찍은 송광사의 <법정스님>(1976)에서도 시도 되었다. 밀짚모자 차림에 빈손으로 불일암 오솔길을 오르던 시절 법정 스님의 뒷모습을 담은 것이다. 그야말로『무소유』(범우사, 1976)의 검약한 형상미가 물씬 풍긴다.  

 주명덕, 서양화가 김종학, 1966

10여년 전에 촬영 한 <화가 김종학>(1996)도 뒷모습의 초상사진이다. 설악산의 작업실을 마련하고 “자연을 마음대로 그린다”는 김종학은 찬란하고 환상적인 색채의 ‘꽃바다’로 최근 인기를 얻은 작가이다. 주명덕은 그 화려함보다 김종학의 뒤태에 마음이 끌린 듯하다. 설악산을 산책하다 마른 풀꽃들을 손에 쥐고 귀가하는 뒷모습은 김종학의 어떤 점을 드러내고자 했을까. 그 마른 풀꽃의 그림들도 남기고 있는데, 혹여 김종학이 애장했던 조선 목기의 간결한 감각은 아닐지.  

이처럼 뒷모습의 인간을 포착한 작품으로는 조선후기의 풍속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대표작으로 윤두서의 손자인 윤용이 봄꼴을 베러 나선 아낙네의 뒷모습을 그린 <협롱채춘(挾籠採春)>(간송미술관 소장)이 떠오른다. 인간의 뒷모습을 초상의 소재로 삼았다는 자체부터 상식 밖의 일이다. 그런데 뒷모습을 본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상상케 한다. 그 중에서 인간이 자신을 반추하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주명덕의 뒷모습 초상사진들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겠다. 이같이 그림에 사람의 뒤태를 담는 구성방식은 또한 이태리의 르네상스 회화에서 그 연유를 찾는다. 중세의 절대 신으로부터 인간을 회복하는 위대한 시대의 형식미이다.  

 

*이태호, 「긴 호흡의 상념들, 깊은 침묵이 흐른다-따스한 감성으로 기록한 주명덕의 초상사진」 ( 『주명덕』, 대림미술관, 2008.)에서

카메라 옵스쿠라와 〈이기양 초상〉 초본

카메라 옵스쿠라와 〈이기양 초상〉 초본

카메라 옵스쿠라와 〈이기양 초상〉 초본
08/28/2018
/ 이태호

이기양 초상

<이기양 초상〉초본의 새로운 발견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茯菴 李基讓(1744-1802)은 李德馨의 7대손으로, 양명학을 수용한 星湖學派로 분류되는 문인 관료이다. 星湖 李瀷(1681-1763)의 학문을 이을 차세대로 지목되기도 했고, 정조는 체재공의 후계자로 지목했을 정도로 이기양을 등용했다. 1799년 10월 進賀副使로 연경에 다녀오면서 목화를 대량으로 따는 기계 씨아차인 彔棉攪車를 들여왔고, 과학과 실용정신이 높은 문인으로도 알려졌다. 辛酉邪獄때 西敎와 관련하여 투옥되었다가 이듬해(1802) 단천 귀양지에서 세상을 떠났고, 사후 1809년에 신원되었다. 이기양은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과 각별히 돈독한 사이였다. 정약용 역시 이기양의 묘지명을 써줄 정도로 학문적으로 인간적으로 정치적으로 두터운 관계였다.

정약용이 카메라 옵스쿠라를 실험하고 「칠실관화설」을 기술하거나 카메라 옵스쿠라를 설치하고 이기양이 초상화를 그린 시기는 1780년대 중반쯤으로 추리하였다. 카메라 옵스쿠라로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은 「茯菴 李基讓 墓誌銘」의 후반부 ‘附 見閒話 條’에 실려 있다. 다시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복암이 일찍이 나의 형(丁若銓, 1758-1816) 집에서 漆室玻瓈眼(카메라 옵스큐라)을 설치하고 거기에 비친 거꾸로 된 그림자를 따라서 초상화의 초본을 그리게 하였다. 복암공은 뜰에 설치된 의자에 태양을 향해 앉아 있었다. 털끝 하나 잠깐 움직여도 모사하기 어려운데, 공은 의연하게 흙으로 빚은 사람처럼 오래토록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역시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이다.

茯菴 嘗於先仲氏家 設漆室玻瓈眼 取倒景 以起畵像之草 公於庭中設椅 向日而坐 一髮乍動 卽摹寫無路 公凝然若泥塑人 良久不小動 亦人所

‘附 見閒話 條’는 묘지명 뒤에 첨언한 여담격이다. 정약용이 이기양에 대해 기억에 남는 일화를 최근 일부터 과거로 회상해 가는 내용이 담겨 있다. 연대가 밝혀진 글의 흐름이 1799년, 1795년, 1784년경의 순서이고, 마지막은 1796년의 이야기이다. 이기양이 카메라 옵스쿠라를 이용해서 초상화를 그린 일은 1795년에서 1784년경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그 시기에 이기양은 1784년 문의현령에서 물러나 1795년 다시 진산현감으로 부임하여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이천에 칩거해서 서울을 내왕하며 지냈다. 초상화를 그린 일은 정약용이 자기 집에서 직접 「칠실관화설」을 실험한 1784-5년과 비슷하거나, 약간 뒤에 이루어졌다고 봐야할 것 같다.

〈이기양 초상〉초본은 76cm x 47.2cm 크기의 조선 닥종이에 그렸다. 이마와 코 부분에 손상이 약간 있으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그림의 오른편에 단정한 해서체의 ‘茯菴公畵像草本’ 이라고 쓰여 있다. 초본으로는 비교적 큰, 겹무늬가 있는 紋紗角의 오사모에 홍단령포 차림의 반신상에 가까운 흉상이다. 화면의 크기로 볼 때, 이 초본은 직접 카메라 옵스쿠라로 그린 것은 아닐 게다. ‘縮容鏡’이라는 중국인들의 별명처럼, 카메라 옵스쿠라로 뜬 初草本을 1.5배 내지 초본 2배로 확대하여 다시 그린 것이다. 곧 정본을 위한 밑그림 正草本인 셈이다. 이 초본을 밑그림으로 삼아 정본 초상화를 제작하는데 쓰였을 것이다. 그 정본도 출현하기를 기대해 본다.

또한〈이기양 초상〉초본에 착용한 紋紗角의 오사모 형식과 홍단령포는 당상관의 지위이다. 앞서 정약용이 증언한 초상초본의 제작시기 1784년-1795년 사이와 맞지 않는다. 이기양이 正三品에 오른 것은 정조 19년(1795) 春塘臺 庭試 乙科에 급제하고 홍문관 부수찬(종6품)이나 의금부 검상(정5품) 등을 거친 뒤, 정조 21년(1797) 8월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된 때이다.

그러니까 현재 〈이기양 초상〉초본의 복장은 1797년 이후의 관료 모습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카메라 옵스쿠라로 그린 初草本은 사방관이나 탕건을 쓰고 그렸을 것이다. 이 初草本으로 正草本을 그린 것은 당상관에 승급한 1797년 이후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머리에 쓴 오사모가 약간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이마의 망건과 사모의 사이가 평행되게 띠를 두른 것처럼 그린 점이 어색하다. 또 상당히 흰수염이 자랐는데, 얼굴의 피부색은 잡티도 없이 홍안으로 50대를 넘지 않을 듯하다.

〈이기양 초상〉초본은 背彩가 잘 되어, 홍조 띤 얼굴에 단아한 관복이 잘 어울려 있다. 근엄하고 당찬 얼굴 모습은 정약용이 묘지명에 설명해 놓은 이기양의 풍모와도 흡사하다. 

공은 타고나기를 체격이 크고 호걸다운 용모가 특출했다. 이마가 둥글고 솟았으며 눈썹과 눈 사이가 훤하게 트였다. 넓은 코와 입과 뺨은 모두 雄峻하고 豊滿하였다. 키는 八尺이나 되고 흰 피부감이 기운차 있었다. 구렛나루와 턱수염은 듬성하였다.

公天姿 魁偉傑特 額宇圓隆 眉目豁然 以廣鼻口輔頰 皆雄豊滿 身長八尺 白晳軒昻 鬚髥只數莖 

〈이기양 초상〉초본을 살펴보면, 간결한 의습선에는 명암을 넣지 않고 사모의 무늬도 거친 편이다. 대신에 안면의 세부묘사는 정치하다. 언뜻 일반적인 초상 초본과 크게 다르지 않아, 과연 카메라 옵스쿠라로 그린 초본과 관련이 있을까 생각될 정도이다. 그런데 얼굴에서 눈썹이 희미하고 살진 안면의 굴곡과 분홍빛 피부감의 섬세한 표현은, 당시 보통의 초본과 격을 달리한다. 조리개에 짙은 濃墨의 점을 찍고 밝아졌다가 외곽으로 점점 어두워지는 수정체의 표현은 이명기의 화법과 근사하다.

눈동자 표현을 포함하여 <이기양 초상>초본과 비교할 만한 대상으로는 이명기의 <趙恒鎭(1738-1803) 肖像>(삼성미술관 리움)과 그 초본이 떠오른다. 사모를 쓴 반신상으로 초본과 정본의 마마를 앓은 얼굴 묘법이 꼭 닮아 있어, 이명기의 표현력을 잘 보여준다. 초본은 사모에 평상복 도포차림으로 그렸고, 정본은 그 위에 흑단령포를 입혔다. 운학문 흉배는 單鶴이고, 관대는 흑각이며 오사모는 민무늬의 單紗角이다. 五品직 이하의 복장으로 사간원 정원(1783년), 지평(1800년), 교리 등을 역임하고, 당상에 오르지 못한 때문인 듯하다.

조항진 초본과 이기양 초본은 눈동자와 입술 표현에서 유사함이 느껴지지만, 의상의 표현방식은 조금 다르다. 조항진 초본은 옷주름에 음영을 가했고, 흑연 연필 밑그림 위에 먹선으로 수정해가며 그렸다. 또한 이기양 초본에 쓴 ‘茯菴公畵像草本’ 해서체 글씨는 이명기의 채제공 65세와 72세상 초본에 쓴 제목의 필세와 무관하지 않은 듯싶다. 이기양 초본의 서체가 좀 더 각진 붓맛을 지녔지만, ‘公’이나 ‘草’字가 얼핏 이명기의 서풍과 유사하다는 느낌도 든다. 

–  李泰浩, 「18세기 초상화풍의 변모와 카메라 옵스쿠라」- 새로 발견한〈이기양 초상〉 초본과 이명기의 초상화 초본을 중심으로, 「다시 보는 우리 초상화의 세계」, 국 립문화재연구소, 2007.11.

 

* 이태호 :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 서울산수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