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10/31/2018
/ 신수정

문학비평가 김화영 선생에 따르면,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고 불리는 시간대가 존재한다. 해가 설핏 기울기 시작하고 땅거미가 내리면 저만큼 보이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 미묘한 순간이 발생하는데 바로 그 순간이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이 시간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다. 낮이라고 하기엔 밝음의 강도가 약하고 밤이라고 하기엔 어렴풋하게나마 사물의 형체가 구별된다. 밝음에서 어둠으로 옮아가는 전이의 시간이라고 할까. 개와 늑대, 빛과 어둠, 이편과 저편, 현실과 꿈,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시간이 바로 이 시간대다.

이 불분명한 경계는 때로 익숙한 세계를 갑자기 낯설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언캐니(uncanny)’의 섬뜩함이 바로 그것이다. 개라고 생각했던 것이 개가 아니라 늑대일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 순간 존재를 강타하는 어떤 전율, 그것은 때로 존재의 안전을 위협하는 불안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결코 맛볼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의 기제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은 문학과도 무관하지 않다. 문학은 개와 늑대를 구별하거나 개와 늑대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심연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개와 늑대를 구별할 수 없는 모호한 시간, 불분명한 경계, 그로부터 파생하는 낯선 감각의 편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어두워진다는 것      –    나희덕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그루가 쓰러지고
나무 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나희덕 시인은 5시 44분에서 5시 45분으로 이어지는 시간에 대해 노래한다. 슬픈 집 한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온기를 거두어가는 시간, 이 시간은 반복되는 일상의 시간에서 보자면 아무 것도 아닌 보잘 것 없는 순간에 불과하지만 ‘비로소’ 자신의 아픔을 감지하기 시작한 시인의 시간에서 보자면 결코 무의미한 순간이 아니다. 이 순간의 시간 속에서 시인은 ‘기억이 멈추고 어둠이 더 깊어지지 않는’ 어떤 절대의 순간을 지각한다. 어두워짐과 더불어 우리는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쓰다듬는 시간으로 회귀한다. 존재의 내면에서 일렁이는 미묘한 변화의 조짐, 순간적인 섬광, 시선, 숨결, 냄새, 소리, 촉감 등은 이 순간 우리에게 다가온다. 따라서 그 ‘저녁’은 아플 수도 있다. 혼자서, 오래. 그러나 그 어둠, 그 시간에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존재에게 ‘비로소’ 자신이 되는 시간은 없을 수도 있다. 문학이 아직 이 지상에서 여전히 의미 있는 무엇일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오후 ‘5시 44분에서 5시 45분 사이’의 시간, 그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은 문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 신수정 : 서울대 국문과에서 현대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소설과 비평을 가르치고 있다. 평론집 <푸줏간에 걸린 고기>를 상자하고 <1990년대 문학이란 무엇인가>, <한국현대소설이 걸어온 길> 등의 공동작업에 참여하였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08/14/2018
/ 신수정

남자 아이를 키운다는 일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현저히 떨어지는 주의력 탓에, 좀 자라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남자 아이 특유의 성격 탓에 잠시 아득해지기 일쑤다. 친구 관계만 해도 그렇다.

몇 년 전 어느 주말, 우리 모자는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막 중학교에 들어간 아들은 중학생이 된다는 것과 엄마와 대화하지 않는 것이 동의어라도 된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밥알만 씹어대고 있었다. 갑자기 벨소리가 나고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우찬이였다. 우찬은 외국에서 막 돌아와 상암동의 초등학교에서 6학년을 보내게 된 아들에게 유일하게 말을 걸어오고 새로운 친구들을 소개시켜준 아이였다. 아들은 우찬이 있어 비로소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온 동네를 쏘다니는 맛을 익히게 되었다. 우찬이 아니었다면, 아들의 유년은 황폐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둘은 헤어지게 되었다. 우찬이가 송도 신도시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아들은 몹시 실망했다. 우찬도 그랬던 모양이다. 주말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모처럼 신촌 할아버지 댁을 방문한 우찬은 혼자 조용히 빠져나와 시내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상암동으로 왔다. 상암동행 버스를 보자마자 그냥 타버린 것이다. 부모에게 이야기하면 가지 못하게 할까봐 몰래 빠져나오는 방법을 선택한 우찬은 심지어 할아버지 슬리퍼를 신고 있기 까지 했다. 신발을 갈아 신을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인천공항 옆 송도에서 신촌 할아버지댁을 지나 상암 디지털 단지로 건너온 그날의 우찬의 행로는 13세 소년의 세계의 끝으로 가는 여행이라고 할 만하다. 소년은 글로벌 국제도시를 표방하고 있는 송도에서 자신의 근원인 올드타운을 지나 첨단 디지털 도시로 왔다. 이 여정에는 한 세기 이상의 풍경들이 뒤섞여 있는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상기시키는 무언가가 포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이란 감독 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가운데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작품이 있다. 이란 북부 도시에 살고 있는 한 소년이 우연히 자신의 가방에 넣어온 짝꿍의 공책을 되돌려주기 위해 친구의 집을 찾아가기 위해 애쓰는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다. 고개를 넘고 물을 건너 멀리 떨어진 친구의 집을 찾아 헤매던 소년은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진다. 아무런 사건도 어떤 해석도 없건만, 우리는 이 소년의 뒤로 깔리던 이란의 하늘과 땅, 그리고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세계의 변방 이란에서의 삶에 대해 어떤 암시를 받을 수 있었다.

우찬의 여로도 그와 같지 않을까. 오로지 친구가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낯선 땅을 건너온 우찬의 여행은 이란 소년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물론 우찬의 여행은 급속한 현대화의 여파로 기형화된 서울을 밑그림으로 한다는 점에서 오랜 전통과 과거의 공간을 대면하는 이란 소년의 그것과 구별되기는 하지만 이들의 여행이 기본적으로 소년들의 현재 시간 속에 그들이 속한 공간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도 없지 않아 보인다.

어른들이 오랜 삶의 터전을 부수고 파헤치며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동안에도 소년들은 태어나고 자란다. 소년들의 사랑과 싸움과 더불어 도시도 성장한다. 국제도시니 디지털도시니 그 이름이 무엇이 되었든 소년들의 도시가 그들의 집, 그들의 친구들이 살고 있는 집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집, 소년들의 집이 우리들의 도시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기가 그리 어려운 일일까. 과거의 흔적을 싹 지워버리고 재건축, 재개발의 꿈에 부풀어있는 서울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도대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문득 아득해진다.

* 신수정 : 서울대 국문과에서 현대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소설과 비평을 가르치고 있다. 평론집 <푸줏간에 걸린 고기>를 상자하고 <1990년대 문학이란 무엇인가>, <한국현대소설이 걸어온 길> 등의 공동작업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