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정의 문학사의 한 컷3 : 박완서

신수정의 문학사의 한 컷3 : 박완서

신수정의 문학사의 한 컷3 : 박완서
06/26/2019
/ 신수정

지대가 높아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혁명가들을 해방시키고 숙부를 사형시킨 형무소도 곧장 바라다보였다. 천지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마치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살짝 긋는 것처럼 소름이 확 끼쳤다. 그건 천지에 사람 없음에 대한 공포감이었고 세상에 나서 처음 느껴보는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 독립문까지 환히 보이는 한길에도 골목길에도 집집마다에도 아무도 없었다. 연기가 오르는 집이 어쩌면 한 집도 없단 말인가. 형무소에 인공기라도 꽂혀 있다면 오히려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이 큰 도시에 우리만 남아 있다. 이 거대한 공허를 보는 것도 나 혼자뿐이고 앞으로 닥칠 미지의 사태를 보는 것도 우리뿐이라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차라리 우리도 감쪽같이 소멸할 방법이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휙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휙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이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 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웅진, 2012, pp. 282-283)

소설가 박완서는 한국전쟁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전쟁은 그녀에게서 오빠를 빼앗아간다. 오빠는 해방 직후 좌익 성향을 보인 바 있으나 이내 회의를 느끼고 사상적 방황을 하던 중 6.25의 발발과 함께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9.28 때 도망쳐 집으로 돌아온 후 피해망상증과 공포로 정신이 망가진 상태에서 국군 장교의 총기 오발 사고로 오랜 시간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다. 이 오빠에 대한 애도와 분노는 박완서의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주제라고 할 만하다. 오빠의 죽음은 그녀의 등단작 『나목』(1970)에서도 중요한 배경을 형성하고 있으며, 후일 『목마른 계절』(1978)이라는 이름의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등단 이후의 첫 연재인 『한발기』(1971)에서도 생생한 고통의 근원으로 작용하고 있다. 초기 단편이라고 할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나 「부처님 근처」, 그리고 「카메라와 워커」 같은 작품들 역시 전쟁의 참혹함을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박완서의 가족사를 염두에 두지 않을 경우 그 내밀한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완서의 소설 쓰기는 6.25 전쟁에 연루된 자신의 가족사를 증언하고자 하는 강한 소명의식의 발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로 그린 자화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를 결국 작가 박완서의 탄생기로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소설들은 작가 스스로도 소설이나 수필 속에서 한두 번씩 우려먹지 않은 경험이 없다며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이번에는 있는 재료만 가지고 거기에 맞춰 집을 짓듯이 기억을 꾸미거나 다듬는 짓을 최대한으로 억제한 글쓰기를 해보았다”고 서문에 쓰고 있듯이 다른 여타의 소설들보다 구체적이고 농밀하게 전시 박완서 가족의 사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전쟁이 벌어진 1950년, 박완서는 열아홉 살에서 스물 살이 되었고 새롭게 편제된 학제에 맞춰 5월에 졸업을 하고 6월에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한다. 인민군이 삼팔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시도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그녀의 가족들은 별다른 동요 없이 일요일 오후의 한가로움을 만끽한다. 다음 날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입학 후 몇 번 듣지도 못한 강의를 듣기 위해 등교하고, 서울 주변 고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오빠는 새벽 같이 학교로 출근한다. 이 불안한 평화가 깨진 것은 하루가 지나서다. 미아리고개로 뻗은 돈암동 전찻길로 달구지에 가재도구를 실은 피난민들이 꾸역꾸역 넘어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순간, 박완서의 가족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는다. 문제는 해방 직후 한때 좌익 계열과 어울렸던 경험이 없지 않은 오빠다. 그는 고양에서 서울로 오는 길에 죄수복을 입은 채 환희에 들떠 있던 옛 동지와 그의 동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과 함께 귀가하게 된다. 그녀의 집에서는 그들을 환영하는 잔치상이 차려지지 않을 수 없고 이 순간 그녀의 가족들의 정체는 결정된다.

좌우 어느 한 쪽도 선택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의 가족에게 자의로 어느 한 편을 선택한 자의 운명을 선사한 것은 전쟁의 아이러니라고 할 만하다. 9.28 수복과 더불어 그녀의 가족은 빨갱이로 낙인찍힌다. 이른바 부역 혐의가 제기된 것이다. 빨갱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기준이 ‘피난’의 유무, 즉 한강을 건넜느냐 건너지 못했느냐에 달려 있던 당대의 현실을 상기할 때, 피난을 가지 못한 그녀의 가족이 빨갱이 가족으로 취급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로 보인다. 박완서는 이 시간을 ‘벌레의 시간’으로 명명한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박완서에게 아버지나 다를 바 없던 숙부 역시 빨갱이 혐의로 총살되고, 오빠는 느닷없이 의용군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녀의 가족은 서울 시민들에게 발급된 ‘시민증’조차 제때 발급받지 못한 채 그것을 발급받기 위해 수많은 문책과 조사에 시달린다.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p. 268)는 문장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시간은 그녀에게 ‘인간’의 시간이 아니다.

소설의 말미, 북진하던 국군이 다시 후퇴하기 시작한다. 다시 한 번, ‘피난’의 시간이 온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오빠가 문제다. 의용군으로 끌려간 오빠가 혹시라도 도망을 쳐 올까봐 그녀의 가족은 이번에도 피난을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엄마가 그녀 혼자라도 피난을 보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기적처럼 오빠가 돌아온다. 그러나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오빠는 공포와 피해망상으로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다. 이 오빠를 데리고 피난을 가기 위해서는 또 그놈의 ‘시민증’이 필요하다. 오빠는 ‘도민증’을 받기 위해 자신의 전 직장인 고양고등학교로 돌아가나 하필 그곳에 주둔해 있던 국군 장교의 오발로 다리에 총상을 입게 된다. 이제 그녀의 가족은 다시 피난을 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피난’을 가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빨갱이의 증거가 될 수 있는지를 이미 경험한 바 있는 그녀의 가족은 한강을 건너는 대신, 돈암동 집에서 나와 그녀 가족들의 첫 집이 있던 현저동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소위 박완서의 가족은 1.4 후퇴를 그렇게 맞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인용문은 현저동 지인의 집으로 가짜피난을 가게 된 그녀가 서울 시민들이 모두 소개되어버린 독립문 네거리를 내려다보는 장면이다. 고양에서부터 무악재를 넘을 때까지 다리에 총상을 입은 오빠를 손수레에 싣고 온 그녀가 마지막으로 안간힘을 다해 당도한 현저동에는 막 피난을 떠난 지인이 먹다 남긴 밥상이 있고 잡곡 한 움큼과 밀가루 반 자루가 남아 있다. 그녀는 그것이면 족하다고 안도한다. 현저동의 다른 빈집들에는 또 다른 곡식들이 숨겨져 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조금의 가책도 없이 그 집들을 털어 먹고 살 결심을 한다. 그리고 서울 시내를 내려다본다. ‘천지에 인기척이라곤 없’다. 그 순간 그녀에게 ‘이 큰 도시에 우리만 남아 있다’는 공포가 엄습한다. 그 공포는 ‘차라리 우리도 감쪽같이 소멸할 방법이 있다면 그러고 싶“을 정도로 강력하다.

이 대목의 핵심은 이 소멸에의 갈망 다음에 이어지는 극적인 ‘사고의 전환’이다. 공포와 소멸에의 욕망으로 터져버릴 것 같던 그녀의 내면은 ‘찰나적으로’ 이 ‘거대한 공허’를 자신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만약 자신이 혼자 이 모든 걸 지켜보게 되었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 역시 있을 것이라는 데 사고가 미치게 된 것이다. 박완서는 이 증언에의 책무야말로 그간의 고약한 우연과 벌레의 시간에 대한 ‘정당한 복수’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에 다름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간에 대한 증언이 공포를 몰아내는 힘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증언자로서의 소명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생존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두려움의 역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글을 쓰리라는 예감만으로도 고약한 벌레의 시간을 하늘의 소명을 받은 자가 감내해야할 시련으로 돌변시켜버리는 박완서의 고백이 이를 증명한다. 이 대목은 아름답고 결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글쓰기에 대한 신탁은 결국 고통스러운 현실의 반대급부임을. 언젠가 글을 쓰리라는 예감에 전율하는 박완서의 고백은, 그래서 글의 힘을 확인하는 주술임과 동시에 한국전쟁의 참상에 대한 그 어떤 진술보다 아프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거장 ‘박완서’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신수정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신수정의 문학사의 한 컷2 : 강을 건넌다는 것 – 여성의 욕망의 출발점: 전경린의 「강변마을」

신수정의 문학사의 한 컷2 : 강을 건넌다는 것 – 여성의 욕망의 출발점: 전경린의 「강변마을」

신수정의 문학사의 한 컷2 : 강을 건넌다는 것 – 여성의 욕망의 출발점: 전경린의 「강변마을」
03/31/2019
/ 신수정

“조심해야 해.”

외삼촌이 모두에게 주의를 주었다. 외삼촌은 나를 안고 그의 친구들은 오빠를 목말 태우고 걸어 들어갔다. 강물이 가슴까지 올라왔을 때 두려움이 몰려왔다. 외삼촌은 꽉 끌어안은 나를 뒤로 돌려 목말을 태웠다. 그곳에서 보는 강물은 끝없이 길고 막막하게 넓고 물결은 무겁고 흐름은 빨랐다. 물결이 어깨까지 올라왔을 때 외삼촌의 몸이 균형을 잃는 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외삼촌이 나를 목에서 내려 등에 태우고 수영을 시작했다. 나는 외삼촌의 목을 두 팔로 고리처럼 걸어 안았다. 외삼촌은 온몸을 힘차게 저었지만 아래로 마구 떠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머리 밑에 한기가 들며 등줄기를 따라 진저리가 지나갔다. 외삼촌은 아래로 흘러가며 헤엄을 쳐 강을 비스듬히 잘라 건넜다. 강을 건너 다른 편 강변에 앉았을 때 오빠도 나도 침묵에 빠졌다. 공포에 질린 것인지 감동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몸 안에 강물이 가득 밀려들어온 것만 같았고 뭔가 중요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같이 허전하기도 했다.

다시 도강을 할 때는 몸을 미는 크고 높고 살찐 물살도 편안했다. 물살은 수없이 많은 부드러운 몸뚱이들처럼 나를 포옹하고 팔을 풀고 흘러내려갔다. 외삼촌은 팔로 내 엉덩이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내 허벅지의 부드러운 살을 안고 있었다. 강물은 외삼촌의 허리까지 닿았다가 가슴까지 닿았다. 나는 두 팔로 외삼촌의 목을 꼭 안았다. 외삼촌의 가슴에서 산이 땀 흘릴 때 날 것 같은 냄새가 났다. 외삼촌의 왼손이 허벅지를 지나 천천히 가운데로 다가왔다. 점점 더 가운데로……나는 얼굴을 들고 외삼촌의 눈을 바라보았다. 외삼촌은 표정의 변화 없이 내 눈을 마주 보았다. 짙은 눈썹 아래 흑보랏빛 동공이 물처럼 흔들렸다. 처음으로 동공이 액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공 속에 여름 아침의 이슬이 고여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계속 외삼촌의 동공을 들여다보았다. 팬티 아래까지 다가온 외삼촌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그리고 나를 뒤로 돌려 등에 올렸다. 나는 몸을 펴고 엎드렸다. 우리는 물결을 따라 흘러내려가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지만 두 팔은 고리처럼 외삼촌의 목에 걸려 있었다. (전경린, 「강변마을」, 『천사는 여기 머문다』, 문학동네, 2014, 83~84쪽.)

전경린의 단편「강변마을」의 화자인 열한 살 소녀 ‘나’는 여름방학을 맞아 시끄럽고 번잡한 집을 떠나 생전 처음 들어보는 ‘사촌 외갓집’으로 가게 된다. 당연히 ‘사촌 외갓집’이라는 조어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사실, 이 집은 소도시 시골에서 ‘수완가’라는 평을 듣고 있던 아버지가 엄마 몰래 만나온 내연녀의 가족이 살고 있는 곳이다. 그곳을 ‘외갓집’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부 갈등과 남편의 여자 문제로 늘 얼굴을 찌푸리고 히스테리를 부리던 ‘엄마’가 “화와 슬픔을 동시에 억누르며 의지가 깃든 초연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아이들을 ‘그 여자네 집’으로 보내 자신의 위세를 환기시키고자 할 때, 그 집은 아이들에 의해 ‘사촌 외갓집’으로 불리게 된다.

이 외갓집으로 가는 과정은 멀고도 험하다. ‘나’는 장시간 멀미를 할 것 같은 버스를 타고 또 뙤약볕 아래 오 리를 더 걸어 들어가 마침내 외갓집이 있는 ‘강변마을’에 당도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그 모든 고생을 상쇄하고도 남을 무언가가 있다. “선생님도, 엄마도 아버지도 할머니도 동생도, 어느 누구도” 베풀어주지 못한 사랑과 자애로 소녀를 환대하는 ‘외할머니’가 있었던 것이다. 외할머니는 자신과 처음으로 길게 눈을 맞추어주고 낯선 화장실에 불편해하는 ‘나’의 뒤를 닦아주기까지 한다. 소녀는 그곳에서 비로소 이제까지 자기의 몸을 마구 찔러대던 ‘가시’가 모두 뽑혀나가는 듯한 안도감을 맛본다. 모든 것이 크고 둥글고 퉁퉁한 외할머니의 세계. 그러나 이 둥근 부드러움의 세계에도 ‘금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외할머니는 다른 모든 것에 관대하지만 ‘강’에 들어가는 것만은 끝끝내 허락하지 않는다. 외할머니에 따르면 강은 일순간 몸집을 키워 땅콩밭과 수박밭, 그리고 포도밭을 삼켜버리고 마을 전체를 휩쓸어버리는 못된 ‘용’과 같은 존재다. 때로 이 용은 낯선 아이를 집어삼키기까지 한다. 외할머니가 소녀에게 절대 강으로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강한 금지는 더욱 강력한 욕망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한 번도 ‘강’을 보지 못한 시골 소녀는 강에 가기를 욕망한다. 자신의 욕망을 허락해 달라고 애원하다 못해 울기까지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외삼촌’이 등장한 것이다. 군에서 휴가를 나온 외삼촌은 소녀를 강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등에 업고 강을 건넌다. 그런데 위의 지문에서도 나타나듯 소녀와 외삼촌의 ‘도강’은 지독한 에로스의 향유와 구별되지 않는다. 소녀는 강을 건너기 위해 외삼촌의 목을 꽉 걸어 안고, 등에 올라탄 채, 급류에 몸을 맡긴다. 하나가 된 그들의 몸은 물결을 따라 아래로 떠내려갔다가 다시 솟구쳐 되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건너편 강변에서 ‘다시 도강을 할 때’ 나와 외삼촌의 행위는 더욱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외삼촌의 손은 점점 소녀의 중심을 향하고 나는 외삼촌의 눈을 바라본다. 외삼촌도 나를 마주 본다. 나에게 외삼촌의 “짙은 눈썹 아래 흑보랏빛 동공이 물처럼 흔들리는” 순간이 포착된다. 소녀는 그 동공 속에 “여름 아침의 이슬”이 고여 있을 것만 같다고 느낀다. 그 순간 외삼촌은 나의 중심을 향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뒤로 돌려 등에 업는다. 나는 “정신을 잃을 것”같은 혼미함 속에서도 외삼촌의 목을 잡고 있던 팔을 풀지 않는다.

강을 건넌다는 행위, 즉 도강을 이토록 섹슈얼하게 묘사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전경린은 열 살 소녀가 외삼촌의 등에 업혀 강을 건너는 행위를 두 사람의 몸이 하나가 되어 급류에 몸을 맡기는 장면으로 치환하고 있다. 비록 이때의 외삼촌이 진짜 외삼촌이 아니라 아버지의 애인의 동생이라는 기묘한 관계의 산물로 설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급류를 가로질러 강의 저편으로 소녀를 인도하는 사람이 외삼촌이라는 사실은 위반의 상상력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여기에는 에로티시즘이 요구하는 거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금지된 행위, 즉 도강에 대한 욕망, 죽음에 대한 공포, 근친상간의 금기에 대한 위반. 게다가 소녀는 강을 건너 도달한 저편 강변에서 느닷없는 ‘침묵’에 휩싸이기까지 한다. 이 침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에로스의 충족 이후 주체를 엄습하는 ‘허전한 슬픔’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강을 건너는 행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타나토스를 동반하는 에로스와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굳이 우리의 옛 노래 <공무도하가>를 들지 않더라도 ‘도강’은 언제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욕망의 추구를 상기시킨다. ‘그 강을 건너지 말라’는 아내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백수광부’는 기어이 강을 건너고야 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남편을 잃은 아내는 비통하게 절규한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라파엘전파의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오필리어>(1852)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햄릿의 연인 오필리어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가 자신의 연인이었음을 알게 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이 허구의 이야기는 수세기에 걸쳐 많은 화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녀를 그린 그림만 해도 수십 종에 이른다. 아마도 이 여성이 구현하는 비극성이 화가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제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밀레이의 그림은 단지 비극성의 재현에만 치중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이 없지 않다. 밀레이는 오필리어를 단순한 희생양으로만 그리지 않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점에서 밀레이의 오필리어 역시 운명의 시련을 감당하지 못한 비극의 대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밀레이는 죽어가는 오필리어에게 황홀한 관능을 선사한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오필리어는 묘한 흥분과 희열을 상기시키는 미소를 띠고 있다. 그녀의 죽음은 에로스의 향유와 구분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이 그림에서 죽음을 무릅쓰는 에로티시즘의 극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90년대 새롭게 등장한 전경린은 이제까지 이런 종류의 관능의 대표주자로 분류되어온 편이다. 전경린의 소설이 대변하고 있는 낭만적 사랑의 추구는 대부분 ‘도강’의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여성 인물의 자발적 열정에 기대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때로는 불 켜진 아파트 단지를 등지고 여행가방을 든 채 염소를 끌며 자신만의 숲을 향해 떠나는 한 여자의 ‘일탈 욕망’(「염소를 모는 여자」)으로 대변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의무만 남은 가족관계와 무한히 반복되는 노동에 지쳐 자신을 다른 곳으로 데려다줄 버스정거장에 덩그러니 서 있기도 하는 여자의 ‘무기력한 우울’(「밤의 정거장」)로 나타나기도 하는 이 열정은 언제나 죽음의 공포를 동반하는 관능을 추구해왔다. 「강변마을」의 소녀 역시 마찬가지다. 외할머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강에 가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이 소녀를 열정의 주체라고 하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소녀는 성인이 되어서도 강에 가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때로 그것이 사회적 지탄이나 친숙한 것으로부터의 추방을 가져오더라도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자 할 것이다. 방학이 끝나고 ‘강변마을’에서 집으로 귀환한 소녀가 엄마의 처벌과 금지에도 굴하지 않고 이듬해 다시 ‘강변마을’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은 그러한 사실에 대한 추인이라고 할 만하다. 그녀의 삶에 불어 닥친 ‘저주의 몫’은 이제 어느 누구도 풀어줄 수 없다. 소녀는 단 한 번의 ‘도강’으로 어느새 “땅의 밋밋한 바닥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86쪽)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강변마을」은 이 열정의 매혹만큼이나 그것의 폭력적인 힘을 역설하는 데 많은 힘을 쏟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한때 ‘도강’의 전율을 선사했던 그 강이 얼마나 변화무쌍한 변덕의 주재자인지를 거듭 강조한다. 외삼촌과 함께했던 ‘강’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해 그가 귀대한 이후 외할머니와 함께 다시 강을 찾게 된 소녀는 그 강의 어디에서도 자신이 알고 있던 강의 본래 모습을 확인하지 못한다. 외할머니와 함께 찾은 강은 외삼촌에게 매달려 몸을 떨던 그 강이 아니다. 환희와 공포가 공존했던 관능의 강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곧이어 태풍과 함께 사흘 동안 ‘폭우’가 몰아쳐온다. 폭우는 안식과 포용의 땅이었던 ‘강변마을’을 악취와 파리떼가 난무하는 ‘오물의 땅’으로 만들어버린다. 최고의 에로티시즘을 선사했던 강은 어느 순간 최악의 악취와 오물을 퍼붓는 괴물로 돌변한다. 「강변마을」은 이 대목에서 조금의 연민도 발휘하지 않는다. 오로지 잔인한 현실원칙을 지팡이 삼아 폭우와 함께 ‘강변마을’에 찾아온 열정의 대가를 재현하는 데 치중할 뿐이다. 아마 이 재현의 최고 정점은 ‘사촌 외갓집’이라는 요령부득의 언어를 파기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녀는 마침내 ‘사촌 외갓집’이 무엇을 지칭하는 말인 지 그 말의 현실적 의미를 깨닫게 된다. 소녀가 ‘사촌 외갓집’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엄마가 등짝을 내리치며 다시는 그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훈육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처벌을 통해 소녀는 그 말이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94쪽) 말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알게 된다.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아끼지 않던 ‘외할머니’는 어떤 혈연으로도 이어지지 않은 ‘타인’에 불과하며 그 ‘외할머니’의 딸인 ‘단발머리 소녀’는 아버지와 통정하여 이복동생을 세상에 내보낸 더러운 ‘내연녀’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강변마을」의 소녀는 이 참혹한 비밀을 깨우치며 어른으로의 ‘입사’에 성공한다. 어른으로 가는 ‘도강’의 과정은 ‘죽음’과 ‘처벌’을 동반한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언제나 죽음에의 공포와 처벌에의 환멸 사이에 거처한다. 여성의 경우, 이 거처는 더욱 삭막하게 진실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강을 건넌다는 것, 무엇보다도 여성이 강을 건넌다는 것은 항상 그로 인한 죽음과 처벌의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강변마을」은 이 사실을 참혹하게 환기시킨다. 강을 건너는 순간, 그녀는 이 세계 어디에서도 안락을 구하기 어려운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을 건너고자 하는 많은 소녀들이 여전히 강변마을을 기웃거린다. 어쩌면 바로 그 순간 지워지고 부인되었던 여성의 욕망이라는 모호한 대상이 실재하기 시작하는 것인 지도 모르겠다. 그것만으로도, 강을 건넌다는 것, 그것은 여전히 여성들을 매혹시키는 기제가 아닐 수 없다. 여성의 욕망은 그렇게 출발한다.

 

* 신수정 : 서울대 국문과에서 현대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소설과 비평을 가르치고 있다. 평론집 <푸줏간에 걸린 고기>를 상자하고 <1990년대 문학이란 무엇인가>, <한국현대소설이 걸어온 길> 등의 공동작업에 참여하였다.

 

신수정의 문학사의 한 컷1 : 부네에게 – 서러운 성장, 흐느끼는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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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2018
/ 신수정

오정희의 단편 「유년의 뜰」에 등장하는 부네, 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네의 자살이 좀더 사실에 부합할 듯하다. 인용문에서 보듯 그녀는 ‘보이지 않는’ 인물에 가깝다. 소설의 어린 화자 ‘나’는 그녀가 갇혀 있는 방 안쪽을 볼 수 없다. ‘나’는 다만 안쪽에서 ‘어른대는 그림자’를 얼핏 본 것 같을 뿐이다. 그렇다고 부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아아아아아, 약한 탄식 같기도 하고 소리죽인 신음 같기도 한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화자에겐 ‘환청’과 구별되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정말 소리를 냈는지 아닌지 확정짓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요컨대 그녀는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다. 시종일관 ‘아른대는 그림자’이거나 ‘환청’에 가까운 그 무엇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녀는 누구인가? 일찍이 무수히 많은 여성주의 비평이 그녀에게 주목한 바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람이 나 객지로 도망쳤다가 외눈박이 늙은 목수 애비에 의해 벌건 대낮에 읍내 차부에서부터 끌려와 머리를 깎인 채 별채에 유폐된 부네는 홀몸이 아니라거나, 몹쓸 병에 걸렸다거나, 혹은 미쳐버렸다는 등의 풍문으로만 존재하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들’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이 유폐된 여자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여자들을 가시적인 존재로 소환하고자 하는 노력은 여성주의 비평의 오랜 염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자리에서 부네를 가부장주의의 폭력에 희생된 억압받는 타자의 대명사로 부르고 싶지 않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부네와 폭력을 따로 떼놓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비라는 이름으로 딸의 사랑을 가로막고 그녀의 머리를 깎고 발가벗긴 채 가두는 저 야만의 시간은 법과 제도의 명목으로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조금도 사라지지 않은 채 대물림되고 있는 형편이기도 하다. 사정이 그러할진대, 여성주의 비평은 유폐된 부네의 육체를 통해 그녀를 그러한 상황에 처하도록 만든 ‘적들’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유발하고 해방의 그날을 꿈꾸도록 만들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장면은 부네에 관해서라면 어떠한 ‘이야기’도 온전하고 완전하게 말해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쇠불알통’ 같은 자물쇠가 그녀의 신체를 구속한 이후, 부네는 때로 ‘부정(不淨)’의 체현물이자 ‘부정(不定)’의 미스테리로 이야기되어 왔다. 그녀는 더렵혀진 순수이자 타락한 천사임과 동시에 끊임없이 마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 다름 아니다. 이 ‘온전하고 완전하지 않은 정체성’은 그녀의 애비인 늙은 외눈박이 목수의 무자비한 폭력적 행위를 규탄하고 그녀의 무고함과 결백을 주장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처럼 부네와 그 아비는 읍에서부터 집까지 개처럼 끌려오고 끌고오는 과정에서 양쪽 모두 조금의 분노도 일말의 씨근거림도 없이 시종 ‘묵극’으로 일관한다. 부네는 왜 아비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심지어 욕도 하지 않았는가? 아비는 어찌하여 딸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정당화하는 어떤 언사도 사용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하였는가?

이 의문들은 부네, 라는 이름을 예사롭게 들리지 않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부네는 어쩌면 ‘말’로 포착할 수 없는 어떤 존재, 어떤 ‘이야기’로도 모자라고 어떤 ‘의식’으로도 다 담아낼 수 없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라깡이라면 상징적 언어 질서의 저편에 있는 실재를 가리키는 ‘대상 a’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수도 있는 이 존재는 방 안쪽에 유폐됨으로써 우리의 시선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대상이 됨과 동시에 그 도달 불능을 통해 자신의 존재, 즉 ‘있음’을 현시하는 불가해한 그 무엇이 되고 있는 것도 같다.

따라서 이 존재의 ‘그림자’와 ‘환청’을 온몸으로 대면한 화자 ‘나’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선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아직 십대에 접어들기 전, 미친 듯 단 것을 탐하기만 하던 ‘뚱보’ 여자 아이가 자신의 ‘불룩 튀어나온 배’와 ‘작고 주름진 가랑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이 장면은 「유년의 뜰」 전체를 통 털어 경이로운 대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한 번도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한 부네의 실재와 대면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육체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불룩 튀어나온 배’와 ‘작고 주름진 가랑이’에 대한 발견. 자신이 ‘배’와 ‘가랑이’로 구성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 이 발견과 인식은 여자 아이를 ‘까닭 없이 흐느끼게’ 만든다.

돌이켜보면, 인용문은 이런 종류의 ‘존재론적 흐느낌’을 ‘서러움’이라는 정서로 설명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화자는 짧은 가을 해가 부네의 방문에 잦아드는 걸 보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서러움이 가슴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부네가 죽기 직전 질렀을 지도 모르는 탄식과 신음 같은 ‘노랫 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내 몸 가득 서러움과 같은 욕정이 차올라 해면처럼 부드러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말하자면, 부네의 없는 듯 있음, 있는 듯 없음 앞에서 ‘불룩 튀어나온 배’와 ‘작고 주름진 가랑이’를 지니고 있는 여자 아이는 마침내 자신이 부네와 다르지 않음을, 부네가 자신과 같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유년의 뜰」이 재현하고 있는 여자 아이의 성장이란 이와 같은 정서의 대물림, 그 감각에의 현존, 그 감성적 유대와 무관하지 않다고 믿는다. 그것은 “떠돌던 고추잠자리가 잠깐 물에 스치듯 꽁지를 담갔다 뺀 순간”에 불과할 런지도 모른다. 사실이 그렇다면,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을 수도 있다. 「유년의 뜰」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다만 “햇빛이 사위었다는 것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을 통과한 여자 아이는 이제 이전의 그 아이가 아니다. ‘나’는 ‘부네’의 실재와 대면한 뒤 어느새 자신의 몸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그 서러운 상징에 대하여 눈뜨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아이를 ‘그녀’라고 불러 마땅할 것이다. ‘상징의 숲’ 앞에서 처음부터 ‘서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 흐느끼는 주체. 부네는 바로 이 ‘서러운 성장’으로 가는 문이다. 이것은 투항이나 좌절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실재의 세계로 인도하는 출구에 가깝다. 따라서 부네의 죽음, 그 ‘자살’은 단순한 광기의 폭발이나 실패의 기록으로 폄하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나는 오히려 그것을 ‘장엄한 죽음’이라고 부르고 싶다. 개인적으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스에프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의 인조인간 로이의 죽음에 비견할 명장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다. 가을날의 짧은 해가 사위어가듯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지 않은가. 온 우주가 그녀의 죽음에 빛을 잃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부네가 단순히 가부장적 폭력에 무너진 희생양일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신수정 : 서울대 국문과에서 현대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소설과 비평을 가르치고 있다. 평론집 <푸줏간에 걸린 고기>를 상자하고 <1990년대 문학이란 무엇인가>, <한국현대소설이 걸어온 길> 등의 공동작업에 참여하였다.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10/31/2018
/ 신수정

문학비평가 김화영 선생에 따르면,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고 불리는 시간대가 존재한다. 해가 설핏 기울기 시작하고 땅거미가 내리면 저만큼 보이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 미묘한 순간이 발생하는데 바로 그 순간이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이 시간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다. 낮이라고 하기엔 밝음의 강도가 약하고 밤이라고 하기엔 어렴풋하게나마 사물의 형체가 구별된다. 밝음에서 어둠으로 옮아가는 전이의 시간이라고 할까. 개와 늑대, 빛과 어둠, 이편과 저편, 현실과 꿈,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시간이 바로 이 시간대다.

이 불분명한 경계는 때로 익숙한 세계를 갑자기 낯설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언캐니(uncanny)’의 섬뜩함이 바로 그것이다. 개라고 생각했던 것이 개가 아니라 늑대일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 순간 존재를 강타하는 어떤 전율, 그것은 때로 존재의 안전을 위협하는 불안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결코 맛볼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의 기제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은 문학과도 무관하지 않다. 문학은 개와 늑대를 구별하거나 개와 늑대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심연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개와 늑대를 구별할 수 없는 모호한 시간, 불분명한 경계, 그로부터 파생하는 낯선 감각의 편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어두워진다는 것      –    나희덕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그루가 쓰러지고
나무 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나희덕 시인은 5시 44분에서 5시 45분으로 이어지는 시간에 대해 노래한다. 슬픈 집 한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온기를 거두어가는 시간, 이 시간은 반복되는 일상의 시간에서 보자면 아무 것도 아닌 보잘 것 없는 순간에 불과하지만 ‘비로소’ 자신의 아픔을 감지하기 시작한 시인의 시간에서 보자면 결코 무의미한 순간이 아니다. 이 순간의 시간 속에서 시인은 ‘기억이 멈추고 어둠이 더 깊어지지 않는’ 어떤 절대의 순간을 지각한다. 어두워짐과 더불어 우리는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쓰다듬는 시간으로 회귀한다. 존재의 내면에서 일렁이는 미묘한 변화의 조짐, 순간적인 섬광, 시선, 숨결, 냄새, 소리, 촉감 등은 이 순간 우리에게 다가온다. 따라서 그 ‘저녁’은 아플 수도 있다. 혼자서, 오래. 그러나 그 어둠, 그 시간에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존재에게 ‘비로소’ 자신이 되는 시간은 없을 수도 있다. 문학이 아직 이 지상에서 여전히 의미 있는 무엇일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오후 ‘5시 44분에서 5시 45분 사이’의 시간, 그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은 문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 신수정 : 서울대 국문과에서 현대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소설과 비평을 가르치고 있다. 평론집 <푸줏간에 걸린 고기>를 상자하고 <1990년대 문학이란 무엇인가>, <한국현대소설이 걸어온 길> 등의 공동작업에 참여하였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08/14/2018
/ 신수정

남자 아이를 키운다는 일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현저히 떨어지는 주의력 탓에, 좀 자라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남자 아이 특유의 성격 탓에 잠시 아득해지기 일쑤다. 친구 관계만 해도 그렇다.

몇 년 전 어느 주말, 우리 모자는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막 중학교에 들어간 아들은 중학생이 된다는 것과 엄마와 대화하지 않는 것이 동의어라도 된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밥알만 씹어대고 있었다. 갑자기 벨소리가 나고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우찬이였다. 우찬은 외국에서 막 돌아와 상암동의 초등학교에서 6학년을 보내게 된 아들에게 유일하게 말을 걸어오고 새로운 친구들을 소개시켜준 아이였다. 아들은 우찬이 있어 비로소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온 동네를 쏘다니는 맛을 익히게 되었다. 우찬이 아니었다면, 아들의 유년은 황폐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둘은 헤어지게 되었다. 우찬이가 송도 신도시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아들은 몹시 실망했다. 우찬도 그랬던 모양이다. 주말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모처럼 신촌 할아버지 댁을 방문한 우찬은 혼자 조용히 빠져나와 시내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상암동으로 왔다. 상암동행 버스를 보자마자 그냥 타버린 것이다. 부모에게 이야기하면 가지 못하게 할까봐 몰래 빠져나오는 방법을 선택한 우찬은 심지어 할아버지 슬리퍼를 신고 있기 까지 했다. 신발을 갈아 신을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인천공항 옆 송도에서 신촌 할아버지댁을 지나 상암 디지털 단지로 건너온 그날의 우찬의 행로는 13세 소년의 세계의 끝으로 가는 여행이라고 할 만하다. 소년은 글로벌 국제도시를 표방하고 있는 송도에서 자신의 근원인 올드타운을 지나 첨단 디지털 도시로 왔다. 이 여정에는 한 세기 이상의 풍경들이 뒤섞여 있는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상기시키는 무언가가 포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이란 감독 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가운데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작품이 있다. 이란 북부 도시에 살고 있는 한 소년이 우연히 자신의 가방에 넣어온 짝꿍의 공책을 되돌려주기 위해 친구의 집을 찾아가기 위해 애쓰는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다. 고개를 넘고 물을 건너 멀리 떨어진 친구의 집을 찾아 헤매던 소년은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진다. 아무런 사건도 어떤 해석도 없건만, 우리는 이 소년의 뒤로 깔리던 이란의 하늘과 땅, 그리고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세계의 변방 이란에서의 삶에 대해 어떤 암시를 받을 수 있었다.

우찬의 여로도 그와 같지 않을까. 오로지 친구가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낯선 땅을 건너온 우찬의 여행은 이란 소년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물론 우찬의 여행은 급속한 현대화의 여파로 기형화된 서울을 밑그림으로 한다는 점에서 오랜 전통과 과거의 공간을 대면하는 이란 소년의 그것과 구별되기는 하지만 이들의 여행이 기본적으로 소년들의 현재 시간 속에 그들이 속한 공간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도 없지 않아 보인다.

어른들이 오랜 삶의 터전을 부수고 파헤치며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동안에도 소년들은 태어나고 자란다. 소년들의 사랑과 싸움과 더불어 도시도 성장한다. 국제도시니 디지털도시니 그 이름이 무엇이 되었든 소년들의 도시가 그들의 집, 그들의 친구들이 살고 있는 집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집, 소년들의 집이 우리들의 도시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기가 그리 어려운 일일까. 과거의 흔적을 싹 지워버리고 재건축, 재개발의 꿈에 부풀어있는 서울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도대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문득 아득해진다.

* 신수정 : 서울대 국문과에서 현대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소설과 비평을 가르치고 있다. 평론집 <푸줏간에 걸린 고기>를 상자하고 <1990년대 문학이란 무엇인가>, <한국현대소설이 걸어온 길> 등의 공동작업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