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정의 삶과 문화 3 : 미래는 항상 먼저 도착해 있다

신수정의 삶과 문화 3 : 미래는 항상 먼저 도착해 있다

신수정의 삶과 문화 3 : 미래는 항상 먼저 도착해 있다
07/09/2020
/ 신수정

카메라에 잡힌 그의 얼굴은 너무도 평범했다.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얼굴. 혼잡한 퇴근 시간 지하철이나 늦은 밤 편의점 카운트에서 마주쳤다 한들 무심코 지나쳤을 행색. 그는 강의를 마치고 나온 학생들로 붐비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큰 소리로 동료들에게 피씨방에 가자고 부추기던 남학생 가운데 하나였을 수도 있고, 인근 술집 앞에 빙 둘러선 채 담배를 물고 욕설 섞인 수다를 늘어놓으며 드나드는 여자들을 힐끔거리던 술꾼 일행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그를 어떻게 ‘악마’라고 할 수 있겠나.

소위 ‘n번방 사건’을 접하며 가장 끔찍했던 사실은 바로 그 점이었다. ‘그’가 도무지 낯설지 않다는 것. 우스꽝스러운 사진을 오려 붙여 기괴한 형상을 만들어놓고 특정 정치인을 조롱하던 짓거리부터 ‘김치녀’니 ‘된장녀’니 각종의 멸칭으로 여성을 향한 혐오를 무차별적으로 발산하는 행태에 이르기까지 지난 십여 년 간 그와 유사한 여러 남성 집단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지나치게 익숙한 풍경이 되어 버렸다.

이번 사건을 통해 다시 인구에 회자하고 있는 ‘일베’ 혹은 ‘소라넷’ 같은 온라인 사이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보수적 정치 성향과 여성 혐오로 악명 높은 그들의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의 여성 피해자를 애도하는 사람들에게 엽기적인 조롱을 삼가지 않던 그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 시간 편견으로 가득 찬 성차별 의식을 누적해온 우리 사회가 자신을 ‘악마’로 서사화하는 ‘그’에게 놀라움을 표명할 자격은 없어 보인다. 그는 결코 괴물이 아니다. 다만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일 뿐이다.

‘그’는 어디에나 있고 또 어디에서나 다시 나타날 것이다. “재혁은 자신을 찍는 여러 대의 카메라를 올려다보며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오래전부터 꿈꿔온 풍경이었다. 자살하려는 모습을 중계하는 쓰레기 같은 뉴스 카메라. 그가 사랑하는 호러 영화에나 나올 법한 디스토피아였다. TV 뉴스 채널이 쓸데없이 많아졌을 때 재혁은 그가 꿈꾸던 장면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젊은 여성 작가 박민정의 단편 「버드아이즈 뷰」는 바로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적시한다. 이 작가에 따르면 ‘카메라의 시선’에 함축되어있는 관음증적 충동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그’를 생산해내는 주요한 기제 가운데 하나다. 공부만 잘할 뿐 남성 또래 집단에선 ‘찐따’로 따돌림당하던 소설의 주인공은 ‘카메라’를 장착하고 여성들의 ‘몰카’를 남발하면서 한순간 온라인상의 유명인물로 돌변한다. 카메라가 없었더라면 그는 그저 조금 “쪼다 같은” 남자로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메라가 제공하는 ‘버드아이즈 뷰’의 마력은 그를 더이상 평범한 삶에 만족할 수 없는 인물로 만들어버린다. 환호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점점 더 왜곡된 관음증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이 남자는 자신의 죽음을 소재로 한 자살 소동을 벌임으로써 이 어처구니없는 역할극에 마침표를 찍고자 한다. “쓸데없이” 많아진 “TV 채널”이 다시 한번 그를 ‘찐따’에서 ‘영웅’으로 돌변시켜주기를 기대하며.

비단 소설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호러 영화에나 나올 법한 디스토피아”는 이제 지금 이곳의 현실이 되었다. ‘그’에 관한 선정적인 추정, 피해자의 인권에 개의치 않는 무분별한 노출, 문제의 원인에 대한 자성 대신 근엄한 도덕적 훈계로 일관하는 위선적인 질책 등 우리는 그를 괴물로 만들어놓고 그의 서사를 굶주린 자처럼 소비하고 있다. 이 ‘디스토피아’를 벗어날 방법에 대한 절박한 관심의 촉구는 이미 우리의 손을 떠난 듯도 하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우리 사회 성원 모두 관음증의 노예가 되어버렸다고 해도 좋겠다. 노예들의 몰카, 몰카의 노예들! 「버드아이즈 뷰」의 주인공은 자신의 자살을 종용하는 듯한 TV 카메라 앞에서 마지막 멘트를 남긴다. “미래는 항상 먼저 도착해 있다. 엿 같은 모습으로.” 때론 허구가 가장 현실에 근접한다.

 

<본 글은 세계일보 2020년 4월 3일자 오피니언/외부칼럼 카테고리에 “[삶과문화]미래는 항상 먼저 도착해있다“로 연재된 글입니다>

 

신수정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신수정의 삶과 문화 2 : 혐오는 질병에 기생한다.

신수정의 삶과 문화 2 : 혐오는 질병에 기생한다.

신수정의 삶과 문화 2 : 혐오는 질병에 기생한다.
06/25/2020
/ 신수정

코로나 19가 일상의 풍경을 바꾼 지 오래다. 마스크가 필수품이 되었고 손 소독제가 없으면 불안하다. 되도록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가능한 사람들을 피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SNS를 비롯한 미디어 의존도가 높아졌고 출처를 확인하기 어려운 각종 가짜 뉴스들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처음에는 중국과 관련된 가짜 뉴스가 횡행하더니 특정 종교 단체의 집회와 관련하여 가파르게 증가한 확진자 수치가 보도된 이후에는 그 단체를 겨냥한 뉴스들이 범람한다. 아마도 이러한 추세는 사태가 진정되기까지 잠잠해지지 않고 꽤 오랫동안 이어질 듯하다.

질병에 대한 대중의 불안과 공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중 통치술 가운데 하나다. 지난 세기 나치는 여러 피가 섞인 인종적 혈통을 지닌 사람을 매독 환자 혹은 암 환자에 비유했다. 유럽의 유태인들에 대한 절멸이 대중적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비유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 돌이켜보면 어떤 질병에 특정한 의미를 덧붙이고 도덕적 타격을 가함으로써 그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정당화하는 것은 일군의 권력자들에겐 언제나 자연스러운 정치의 과정으로 이해되곤 했다. 마음속 공포를 질병과 동일시하고 이 질병의 이름으로 정치적 혐오와 배제를 재생산해내는 방식은 추악하기 짝이 없지만 늘 우리와 함께해온 또 다른 대중적 ‘공포’의 근원이라고 할 만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역시 나환자들을 공포의 이름으로 배제해왔다. 어린아이들의 간을 먹으면 나병이 낫는다는 속설을 나환자들의 사회적 격리와 박해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한 예는 부지기수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의 시 <문둥이>에 만연해 있는 어떤 서러움의 정조는 나병을 둘러싼 속설과 그 속설이 야기한 혐오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라고 처절하게 부인해야만 했던 나환자 시인 한하운을 ‘빨갱이’로 몰아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집단의 정화를 방해하는 불순분자로 치부했던 우리의 과거사는 이 혐오와 배제의 정치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치적 편견은 질병에 대한 대중들의 그릇된 공포를 숙주로 기생한다. 숙주가 죽지 않는 한 정치적 기생충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어떤 대상에 달라붙어 생경한 의미들을 낳고 그것들의 자의적 기원을 지우며 마침내 절대적 진리로 둔갑시킨 어이없는 편견을 우리 앞에 들이댄다.

코로나 19는 우리에게 어떤 편견을 남기게 될까? 사회적 격리로 인한 불안과 공포에 굴복해 혐오와 편견으로 얼룩진 배제와 차별의 이야기들, 대중적 인기에 영합한 정치적 선동과 낙인찍기의 효과들을 분풀이의 대상으로 삼고 싶은 유혹을 느낀 적은 없는가? 그 자신 암 환자였던 수잔 손탁은 질병에 대한 그릇된 은유를 해체하기 위한 자신의 작업을 시작하며 니체의 경구를 빌려온다. “질병을 생각한다는 것, 지금까지 그랬듯이, 적어도 질병 그 자체보다 자신의 질병에 대해 생각하느라 고통 받지 않도록 병자들의 상상력을 가라앉히는 것, 생각하건대 이것은 대단한 일이리라! 이것은 훌륭한 일이리라” 오늘도 질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들과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전문가들, 그리고 사회 구석구석에서 답지하는 따뜻한 성원들에 자못 숙연해지는 한편, 여전히 근거를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들, 그러나 그럼으로써 더욱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고 공분이라는 이름으로 쓸 데 없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다가 화들짝 놀라 생각해보는 것이다. 지금 내가 또 하나의 ‘한하운’을 만드는 데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본 글은 세계일보 2020년 3월 7일자 오피니언/외부칼럼 카테고리에 “[삶과문화]혐오는 질병에 기생한다“로 연재된 글입니다>

 

신수정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신수정의 삶과 문화 1 : 두레밥상과 4인용 식탁

신수정의 삶과 문화 1 : 두레밥상과 4인용 식탁

신수정의 삶과 문화 1 : 두레밥상과 4인용 식탁
06/03/2020
/ 신수정

우리가 ‘식탁’에서 밥을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 아닐까? 지금 오육십 대에 접어든 세대만 하더라도 유년기 식사 풍경의 대부분은 ‘밥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의 모습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둥근 밥상이 그립다”고 노래한 모 시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음식과 관련된 이 세대의 상상력은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둥근 두레밥상”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최근 개봉한 윤가은 감독의 <우리 집>과 김보라 감독의 <벌새>를 보면서 이 ‘두레밥상’이 사라진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어린 여자 아이들의 시선으로 가족의 일상을 되돌아보는 이 영화들의 또 다른 주인공은 ‘식탁’이었다! 무엇보다도, 4인용 식탁! 이 영화들은 그야말로 ‘식탁’에서 시작해 ‘식탁’으로 끝난다. <우리 집>의 주인공 12살 하나는 사이가 좋지 않은 부모의 관계를 개선하고 ‘우리 집’을 재건하고자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매번 요리를 하고 밥을 차리며 식구들을 식탁 주변으로 불러 모은다. 14살 은희의 시선으로 성수대교가 붕괴되던 1994년의 내밀한 시대적 공기를 재현하고 있는 <벌새> 역시 마찬가지다. 정글 같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맨몸으로 달려온 은희 아버지는 집안의 규율과 관련된 일련의 행위를 전부 식탁에서 행한다. 4인 가족이 둘러앉은 아침 식탁은 그가 아들의 입시 경쟁을 독려하고 딸들의 규율을 감시하며 아내의 욕망을 제지하는 가장 중요한 자리다. 그는 식탁의 군주다.

재미있는 것은 두레밥상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전형적인 남성의 것이라면 4인용 식탁에서의 고독과 답답함을 토로하는 영화감독들의 시선은 지극히 여성적이라는 점이다. 이로부터 세대와 젠더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계보를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어머니가 펼쳐놓은 두레밥상에 둘러앉아 제비 새끼처럼 짹짹거리며 어머니의 음식을 탐하던 날의 기억을 소환하는 ‘남성-시인’은 식탁에 둘러앉을 때면 늘 엄습해오던 외로움과 감시의 시선에 짓눌린 ‘여성-영화감독’들의 ‘아버지-가부장’일 수도 있겠다.

세상에나! 대가족이 둘러앉은 두레밥상에서 4인용 식탁으로 진화해간 우리의 현대사는 아버지의 상실감과 분노, 그리고 제왕적 고독의 승화과정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제공하는 정서적 유대의 세계를 영원히 잊지 못하는 아버지는 4인용 식탁의 세계에서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를 키운 팔 할은 어머니의 나눔에서 온 것임을 그도 모르지 않는다. 그 역시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아이들에게 더 많은 밥, 더 맛있는 밥을 제공하고자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식탁은 어머니의 둥근 밥상의 세계로부터 멀어진다. 그는 이 역설을 이해할 수 없다. 그가 4인용 식탁의 세계에서 폭력적인 군주로 돌변하는 것은 바로 이 역설 때문인 듯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영화감독’들의 이야기에서 식탁 장면이 영화의 핵심 모티르로 등장하는 사실은 문화사적으로 흥미로워 보인다. 어쩌면 그녀들은 아버지의 ‘두레밥상’에 대한 향수, 그 돌이킬 수 없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어떤 새로운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 첫 세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들에게는 ‘4인용 식탁’이야말로 공포와 굴욕의 상징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4인용 식탁’의 세계에서는 어느 식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김밥을 말던 12살 하나가 친구 자매와 밥을 지어 먹으며 비로소 외로운 허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거나, 14살 은희가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일깨워준 영지 선생님을 영원히 잊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식탁 너머의 세계를 꿈꾼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녀들은 꿈꾼다. 모두 모여 맛있는 밥을 먹으며 서로를 위안하는 맛있는 음식 공동체를. 그것은 ‘두레밥상’의 세계도 아니고 ‘4인용 식탁’의 공간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어떤 규격도 없는 곳, 방바닥이든 길거리든 음식을 둘러싸고 서로의 온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곳은 딸들의 새로운 식사 자리가 될 것도 같다. 독박 육아와 군주의 감시와 잔소리를 피할 수 있다면 말이다.

 

<본 글은 세계일보 2020년 1월 31일자 오피니언/외부칼럼 카테고리에 “[삶과문화]두레밥상과 4인용 식탁“으로 연재된 글입니다>

 

신수정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신수정의 문학사의 한 컷 5 : ‘찰나’의 마술, 그 순간의 기억

신수정의 문학사의 한 컷 5 : ‘찰나’의 마술, 그 순간의 기억

신수정의 문학사의 한 컷 5 : ‘찰나’의 마술, 그 순간의 기억
11/27/2019
/ 신수정

눈을 감았다 떴다. 똑딱.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 돌았을 것이다. 또 눈을 감았다 떴다. 똑딱. 그건 딸이 어렸을 때 내게 알려준 거였다. 엄마,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에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나 돈대. 딸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눈을 감았다 뜨곤 했다. 눈 깜빡할 시간. 그 시간에 빛이 지구를 몇 바퀴나 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고민은 하찮게 느껴진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불이 켜진 집이 하나 보였다. 불이 켜진 저 집에 누가 살까 상상해보았다.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한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이사를 왔을 거야. 너무 좋아 차마 불을 끄지 못하는 거겠지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했을 때 나는 딸과 함께 거실에서 이불을 깔고 잠을 잤다. 엄마, 너무 넓어 잠이 안 와. 딸이 말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거든 더 크고 더 넓은 곳에 가서 살렴. 내 말대로 딸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그곳에 정착을 했다. (… 중략 …) 어린 시절만 생각하면 어머니가 등목을 해주던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세 들어 살던 집의 뒤뜰에는 우물이 있었고 한 여름이면 나는 거기서 등목을 하곤 했다. 주인집 여자가 오일장에 갔다가 머리핀을 사다준 적이 있었는데, 주인집 아들이 그걸 빼앗아 우물에 버렸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등목을 하지 않았다. 만복이 나쁜 놈. 머리핀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우물에다 얼굴을 박고 소리를 질렀다. (… 하략 …)

 -윤성희, 「어느 밤」

윤성희에게 시간은 느닷없다. 그것은 언제나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다. 이때, 출현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간이 출현한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의 일직선적 흐름, 예컨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의 이동을 설명하는 언어라고 하기 어렵다. 차라리 그것은 우리가 그러하다고 믿고 있는 시간의 방향성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 미래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갑작스럽게 침범하는 시간을 가리킨다고 할 만하다. 수학여행을 가던 십대 소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교통사고(「어쩌면」, 『웃는 동안』, 문학과지성사, 2011)나 길을 걷다 담벼락이 무너져 그 아래 깔리는 바람에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사고(「가볍게 하는 말」, 『베개를 베다』, 문학동네, 2016) 등 돌발적인 사고가 그녀의 소설을 추동하는 주요 모티프로 자주 활용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윤성희의 소설에서 시간은 항상 우연한 사건의 도래와 더불어 비로소 우리에게 임재한다, 불쑥, 다시 한 번 느닷없이.

「어느 밤」 역시 이 시간의 플롯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밤중에 집을 나와 킥보드를 타던 ‘할머니’가 사고를 당해 쓰러지게 되는 ‘사건’은 이 소설을 구성하는 핵심축이다. 이 할머니는 어쩌다 ‘킥보드’ 따위를 타게 되었는가. 일주일 전 그녀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파란색 스티커에 ‘장민지’라고 적혀 있는 킥보드를 발견하고 그것을 훔쳐 놀이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125동 자전거 보관대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밤마다 남편 몰래 나와 조심조심 킥보드를 탄다. 생각해보라, 할머니가 킥보드를 훔치는 장면을. 어쩌면 이 소설은 이 장면과 더불어 탄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할머니’와 ‘킥보드’라는, 그것도 ‘훔친’ 킥보드라는 설정은 이 소설의 ‘사건’을 가볍게 들어올리는 지렛대 역할을 한다. 윤성희의 다른 많은 소설처럼, 이 소설의 ‘사건’이 그 느닷없는 참변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어두운 구석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한밤중에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어두운 거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다리를 다쳐 누워있는 화자의 상황이 놀랍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위기’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안타까운 상황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그런 상황에서의 비극성을 알지 못한다. 그 대신 이 소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어떤 동화적 명랑성이다. ‘킥보드를 타던 할머니’가 자신의 사고를 ‘얼음땡 놀이’로 비유하고 있는 대목을 보라. ‘얼음’하고 외치는 순간 움직이지 않다가 ‘땡’이라고 하는 순간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는 아이들 놀이는 윤성희의 소설에 와서 삶의 비극성을 대체하는 ‘마술’로 자리 잡는다. 세 달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동네 동사무소 마술교실의 선생님이 이야기해준 대로 “마술에서 기술보다 더 중요한 건 유머”이기 때문일까. 윤성희는 우연한 사고로 점철되는 삶의 비참으로부터 ‘유머’를 길어 올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비참의 강도나 밀도가 약해서가 아니다. 상황은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이 더 높다. 생은 도처에 ‘얼음’ 투성이다. ‘땡’ 하고 외쳐줄 친구들은 모두 저녁밥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가고 ‘나’만 홀로 남아 있는 절망적인 상황은 어쩌면 우리 삶의 상수일 수도 있다. 「어느 밤」의 그녀가 한밤중에 킥보드를 타러 나오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와 무관하지 않다. 그녀는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더 잔소리와 욕이 느는 남편을 견디기 어렵다. 남편과 아침밥을 함께 먹는 게 힘들고 언제부터인가는 남편이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남편이 “군고구마를 품에 안고 오던 어느 겨울밤. 그런 날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도” 그런 감정들을 추스르기 쉽지 않다. 그녀는 “정갈하게 늙고 싶”기 때문이다. 이 ‘정갈한 삶’에 대한 염원은 그녀가 오랜 시간 추구해온 욕망이라고 할 만하다. 그녀는 댐 공사 현장에서 인부로 일하다가 다리를 다친 뒤 술주정뱅이가 된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그가 잠든 사이 약을 탄 술을 가져다두어 아버지의 죽음을 유도한 이력이 있다. “아버지가 고등학교를 보내주지 않아서 앙심을 품은 게 아니”라 오로지 “엄마가 찬장 안쪽에 숨겨둔 약을 버리지 않아서,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달고 살아서, 그래서 그랬”을 뿐인데 엄마는 종교에 미쳐 그녀를 다시 보지 않으려 한다. 가족과의 인연이 끊긴 채 라디오 조립공장에 다니며 고아와 다름없는 삶을 영위하던 그녀에게 다시 ‘가족’을 선사한 것은 남편이다. ‘왼쪽 엄지손가락이 구부러진’ 남편은 공장에도 다니고 도배 일도 하고, 말년엔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며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불쑥불쑥 치미는 남편에 대한 혐오를 어쩌지 못한다. 그가 점점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날’이면 그녀는 신경 써서 밥상을 차리거나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라는 시조를 중얼거린다. 그조차 더 이상 해법이 되지 못할 때, 마침내 ‘킥보드’가 눈에 띈다. ‘킥보드를 타는 할머니’는 그렇게 우리에게 왔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모티프는 그 신선하고 발랄한 동화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기나긴 시간의 축적에서 비롯된 여성들의 아픔과 절망, 그 고통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의 역사. 고등학교를 보내주지 않는 아버지, 술만 마시면 가족을 두드려패는 아버지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엄마, 그 엄마의 눈물을 무력하게 지켜보다 그녀를 위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의 술에 약을 타 넣는 딸 등 여성적 삶에 장기지속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이 모티프들은 이 소설의 육체를 형성하는 살이라고 할 만하다. 이들이 흥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들의 역사는 아직도 제대로 재현되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티프들은 지나치게 너무 자주 수많은 서사에서 익숙하게 반복되어온 나머지 애초의 놀라운 경이감을 상실하고 낡아버린 측면도 없지 않다. 윤성희는 이 무겁디무거운 여성적 장기지속의 시간을 ‘갑작스럽게’ 정지시키고 ‘사건’의 도래와 더불어 도약하는 ‘찰나’의 순간을 잡아챔으로써 이 장기지속적 모티프에 함축된 태초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세상 밖으로 길어올린다. 「어느 밤」에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여러 겹의 시간대들, 이를테면 ‘킥보드를 훔친 다음 날’, ‘동사무소에서 마술을 배우고 난 그 다음 날’, ‘남편과 산악회 총무의 장례식장에 간 그 다음 날’, 그리고 마침내 ‘킥보드를 타다 넘어지게 되는 그날 밤’ 등 이 소설에 기입된 나날들을 단 한 순간의 ‘어느 밤’을 예비하기 위한 수없이 ‘많은 밤’들 가운데 한 순간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밤’에는 우리 인생의 수천수만의 국면들, 그 겹겹의 서사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순간이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도는 시간과 맞먹는다는 진술이 성립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윤성희는 말한다. “똑딱” 하는 그 찰나는 무수히 많은 ‘어느 날’들의 축적, 혼재, 그것들 사이의 뒤엉킴이 폭발하는 어떤 시간, 어떤 순간이라고.

우리는 이 시간을 『햄릿』을 읽는 데리다를 흉내 내 ‘시간의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는 시간’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뒤틀린 시간’과 더불어 비로소 우리의 실존은 제도화된 달력의 순서에 따라 하루 또 하루 이어지는 현재의 연쇄로부터 벗어나 하나의 ‘사건’으로 뚜렷하게 각인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밤」이 선사하는 감동은 여기에서 나온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결정적인 ‘그날 밤’으로 만드는 바로 그 ‘어느 밤’에 대한 재현. 윤성희는 어머니에서 딸로, 다시 그 딸에서 딸로 이어지는 여성의 시간을 단 하나의 순간, ‘어느 밤’의 결정적 찰나로 제시함으로써 지리멸렬한 일상 속에 반짝이고 있는 사금파리 같은 삶의 비의를 건져 올리는 데 성공한다. ‘어느 밤’이 그렇고 그런 ‘어느 순간’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찰나’의 비약적 도래를 모르지 않는 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느닷없는 참변도, 남편에 대한 혐오도, 폭력적인 아버지를 향한 살부 충동도 모두 ‘얼음땡 놀이’ 같은 것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땡’하는 소리와 더불어 ‘얼음’은 사라지고 다시 ‘물’로 흐를 수 있다는 것, ‘어느 밤’은 우리가 잊고 있던 이 기억을 소환하는 ‘마술’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는 그 마법과 더불어 ‘얼음’으로 가득 찬 삶이 어느 순간 ‘땡’ 소리와 더불어 환희로 뒤바뀌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킥보드를 타는 할머니’가 ‘독서실에서 독서를 하지 않는 청년’의 ‘얼음’을 ‘땡’하고 풀어준 것처럼! 「어느 밤」은 바로 그 찰나에 새겨진 기억을 망각으로부터 구제해 보여주었다. 킥보드의 속도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신수정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신수정의 문학사의 한 컷 4-2 : 박경리

신수정의 문학사의 한 컷 4-2 : 박경리

신수정의 문학사의 한 컷 4-2 : 박경리
09/05/2019
/ 신수정

이와 더불어 이 소설의 주인공 김성수의 직업이 ‘약국’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성수의 큰아버지 김봉제는 ‘관약국’의 ‘의원’으로서 중인 신분의 하급 관리에 불과하지만 “그의 조상은 이 지방의 호족이었고 가산도 유족하여 하급 국록을 먹지 않아도 좋”(p. 17)을 정도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는 계급에 속한다. 이 ‘자산’은 큰아버지의 관직을 승계한 김성수의 대에 이르면 ‘중인 신분의 하급 관리’로부터 자본주의의 산물인‘어장아비’로의 변신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배경이 된다. 소설 3 장에서 ‘김약국’은 정국주에게 논문서를 잡히고 오천 원을 차용하여 ‘모구리(잠수업) 어장’을 시도하게 된다. 이미 ‘지도(종이섬)’에 대모망을 지니고 있고 ‘한산도’에 소대망을 지니고 멸치잡이를 해온 김성수가 그의 일을 도맡아 관리하는 서기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구리 어장’을 위해 소위 사채를 사용하게 되는 연유는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일확천금을 위한 투기적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김성수의 행위에 내재해 있는 계층 이동의 욕망을 무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는 중인이라는 봉건적 계급의 족쇄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체제 하의 신흥 부르주아지로의 계층 상승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의 계층 이동이 필연적으로 실패로 끝나고 만다는 점이다. 새로운 사업을 위해 마련한 선박들은 출항과 동시에 태풍으로 좌초하고 김성수의 사업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김약국이 거듭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에 반해 그에게 사채를 빌려준 정국주는 승승장구하며 통영의 새로운 경제적 지배자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말하자면, 이제 통영을 장악하고 있는 실질적인 소유주는 김성수에서 정국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국주의 이력을 새겨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정국주는 옹기장이로 시작, 돈을 모아 어장을 연 뒤 양조장을 경영하는 한편 고리대금업을 겸하는 통영의 갑부로서 열렬한 친일파이자 지역에서 가장 발언권이 센 조선인 가운데 하나다. 애초에 김성수의 딸 용빈과 정국주의 아들 정홍섭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으나 김성수가 몰락하자 정국주는 아들을 안목사의 조카 안마리아와 맺어준 뒤 미국 유학을 보낼 계획을 세운다. 김성수의 몰락과 정국주의 성공으로 그 운명이 결정되는 용빈의 사랑의 서사는 이 소설의 여러 이야기 가운데 가장 현실적인 디테일을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의 개입. 그녀의 서사는 운명적 비극에 가까운 다른 딸들의 서사와 달리 지극히 속물적이고 자본주의적이다. 그녀에게는 용숙이나 용란과 같은 불륜의 열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를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측면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까지 『김약국의 딸들』에 대한 연구는 그의 ‘딸들’에 초점을 맞추어 ‘딸들의 서사’로 이해되어온 측면이 없지 않다. 소설의 대부분이 그녀들의 사랑과 결혼에 관한 서사로 채워지고 있는 만큼 그러한 관점은 쉽게 부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은 페미니즘적 독해와 연관되어 ‘로맨스’ 장르와 여성 서사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연구로 이어지고 있는 형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김약국’이라는 하나의 계급의 흥망성쇠에 관심을 집중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박경리의 여타의 로맨스 소설과 궤를 같이 하는 한편 이후 『토지』로 이어지는 리얼리즘적 재현의 대장정 가운데 하나로 이해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박경리는 이 소설을 통해 ‘통영’이라는 지역성을 소설적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중요한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이 소설은 ‘딸들의 서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김약국의 서사’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박경리가 구축하고 있는 로맨스적 구조가 결국 ‘통영’이라는 구체성을 통과함으로써 비로소 로맨스(romance)이기를 그치고 소설(novel)의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통영’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하동’으로 넘어가 『토지』에 이르게 되었다. 『김약국의 딸들』을 ‘김약국의 몰락의 서사’로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신수정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신수정의 문학사의 한 컷 4-1 : 박경리

신수정의 문학사의 한 컷 4-1 : 박경리

신수정의 문학사의 한 컷 4-1 : 박경리
08/27/2019
/ 신수정

용빈은 강극의 눈을 응시하였다.

“아버지예요. 오래 사셔야 다섯 달? 아니 한 달 전에 진단을 받았을 때의 얘기죠. 위암이에요. 다른 가족도, 아버지 자신도 모르세요.”

“………”

“저의 아버지는 고아로 자라셨어요. 할머니는 자살을 하고 할아버지는 살인을 하고, 그리고 어디서 돌아갔는지 아무도 몰라요. 아버지는 딸을 다섯 두셨어요. 큰딸은 과부, 그리고 영아 살해 혐의로 경찰서까지 다녀왔어요. 저는 노처녀구요, 다음 동생이 발광했어요. 집에서 키운 머슴을 사랑했죠. 그것은 허용되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부터가 반대했으니까요. 그는 처녀가 아니라는 험 때문에 아편장이 부자 아들에게 시집을 갔어요. 결국 그 아편장이 남편은 어머니와 그 머슴을 도끼로 찍었습니다. 그 가엾은 동생은 미치광이가 됐죠. 다음 동생이 이번에 죽은 거예요. 오늘 아침에 그 편지를 받았습니다.”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나남, 1993)

박경리의 소설은 서울과 지방 가운데 어느 곳을 배경으로 하느냐에 따라 당대 현실과의 긴장 관계의 양상이 달라지는 편이다. 예컨대, 서울 도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마돈나 다방’을 주요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는 첫 장편『표류도』(『현대문학』, 1959.2-11)는 많은 논자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전후 전쟁미망인의 삶을 통해 1950년대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그 이후 전작장편으로 출간된 『김약국의 딸들』(을유문화사, 1962)에서는 당대 현실과의 유의미한 연관성을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 이 소설은 작가의 고향인 통영을 배경으로 고종의 등극에서부터 1930년대 일제 식민지 치하를 살아가는 한 중인 계급의 삼대에 걸친 서사를 다룸으로써 당대 현실과의 긴장 대신 이야기의 극적 전개에 좀 더 치우친 양상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박경리의 소설은 서울을 공간적 배경으로 선택할 경우 노블(novel)에 근접하는 반면, 지방이 선택될 경우 로맨스(romance)가 현저하게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로맨스는 위 인용문에서 간략하게 정리되고 있는 것처럼 다섯 딸의 서사를 통해 그 극적인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우선, 이 소설의 중심인물인 김약국, 즉 김성수의 선대부터 로맨스의 서사구조를 확보하고 있다. 김성수의 아버지 김봉룡은 성격이 괄괄해서 그의 첫 아내를 때려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사내다. 그는숙정과 재혼하여 아들 김성수를 낳게 된다. 그런데 숙정에게는 그와 혼담이 오간 욱이라는 남자가 있다. 김봉룡이 집을 비운 날 숙정을 잊지 못한 욱이 그녀를 찾아오고 하필 일찍 집에 돌아온 김봉룡은 욱을 때려죽이게 된다. 이를 본 숙정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비상을 먹고 자살한다. ‘김봉룡-숙정-욱’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삼각관계는 로맨스가 그러하듯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의 구조에 충실하다. 후일 큰아버지의 ‘약국’이라는 관직을 물려받아 ‘김약국’으로 불리게 되는 김성수의 유년기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사랑의 삼각구조는 이 소설의 장르적 성격을 결정한다.

김약국의 경우에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고아가 된 김성수는 큰아버지 김봉제에 의해 거두어지는데, 김봉제에게는 연순이라는 외동딸이 있다. 김성수는 이 사촌누이를 연모한다. 그러나 그녀는 주막집 옥화와 관계하여 아들 한돌을 두고 있는 파락호 강택진과 맺어진다. 그녀에게는 폐병쟁이라는 험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연순은 요절하게 되고 김성수는 부농의 딸 분시와 결혼하여 다섯 딸을 두게 된다. 김성수의 로맨스에는 근친상간과 요절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운명적인 비극의 조건을 한 몸에 구현하는 그의 사랑은 다섯 딸들에게로 전해진다. 인용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첫째 딸 용숙은 아들 하나를 둔 채 일찍 과부가 되었으나 아들의 주치의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그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우물에 유기했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구금된다. 인용문의 대사를 내뱉고 있는 둘째 딸 용빈은 서울에서 전문학교를 다니는 인텔리 여성으로 정홍섭이라는 동향의 대학생과 연인관계로 지내지만, 그가 김목사의 조카 마리아와 결혼하여 미국 유학을 가려고 하자 관계를 청산한다. 『김약국의 딸들』의 가장 문제적 인물은 셋째인 용란이다. 그녀는 인용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한돌과의 육체적 사랑에 사로잡혀 있으나 신분상의 차이로 부잣집 마약쟁이와 결혼한다. 그러나 결혼 이후 용란을 찾아온 한돌과의 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채 애욕을 채우려하다 남편의 손에 연인과 자신의 엄마를 잃고 발광하게 된다. 넷째 용옥은 어떤가. 그녀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들어 자신의 집안일을 도맡아하는 서기두와 결혼하는데, 서기두는 그녀의 언니인 용란을 사랑하는 남자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는 부부간의 정이 없다. 이 와중에 서기두의 아버지인 홀아비 시아버지가 용옥을 노리고 추행을 감행하려하자 집을 뛰쳐나와 남편을 찾으러가던 중 풍랑에 배가 뒤집혀 죽게 된다. 막내 용혜를 빼면 어느 하나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 없다. 불륜과 영아살해, 신분상승을 위한 변절, 살인으로 치닫게 되는 애욕, 근친상간의 시도 등 이들에게는 로맨스 소설의 극적 사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삼대에 걸친 ‘로맨스’는 『김약국의 딸들』을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축이라고 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는 여타의 박경리 소설에서 종종 발견되는 로맨스적 경향과 구분되는 지점이 없지 않다. ‘통영’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이 환기하는 현실성이 바로 그것이다. 박경리는 이 소설의 시작을 통영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한다. “통영(지금은 忠武市)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나남』, 1993, p. 13)로 시작하는 이 소설의 첫머리는 통영의 지세와 산세, 어업의 현황, 특산물, 기후 등에 대한 소상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박경리에 따르면 통영은 “다른 지방보다 봉건 제도가 일찍 무너지고 활동의 자유, 배금사상이 보급된 것만은 사실”이다. 타관의 영락한 양반들이 통영을 찾을 때 통영 어귀의 죽림고개에 갓을 벗어 나무에다 걸어두고 온다는 일화가 이를 말해준다. “조상 전래의 문벌과 토지를 가진 지주층(대개는 하동, 서천 등지에 땅을 갖고 있었다.)보다 어장을 경영하여 수천금을 잡은 어장아비들의 진출이 활발하였고 어느 정도 원시적이기는 하나 자본주의가 일찍부터 형성”된 결과 “투기적인 일확천금의 꿈이 횡행하여 경제적인 지배계급이 부단한 변동”을 보이는 통영에서 양반 자랑을 해봐야 통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은 이 소설의 로맨스를 구체적인 현실로 끌어당기는 결정적인 부분이라고 할 만하다. ‘양반 지주층’ 대신 ‘어장을 경영하는 어장아비’들이 장악하고 있는 통영은 ‘경제적인 지배 계급의 부단한 변동’으로 특징되는 자본주의적 투기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이곳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사랑의 서사는 그 로맨스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구속력을 지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수정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