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디지털 코드

사진과 디지털 코드

사진과 디지털 코드
11/28/2018
/ 박평종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사진에 생겨난 가장 큰 변화는 두말 할 나위 없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지배다. 모든 정보를 0과 1의 조합으로 변환시켜 저장하는 디지털 기술은 사진의 생산과 유통, 소비 방식을 크게 바꿔놓았다. 그 변화는 때로는 더디게, 때로는 급격히 진행됐으며, 일상에서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 삶의 다양한 영역을 파고들었다. 디지털 기술은 단지 물리적인 변화만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감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특히 디지털 기술에 익숙한 세대에게 변화의 속도와 범위는 매우 빠르고 넓다.

눈에 띄는 변화는 우선 디지털 기술의 수혜자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은 광범위한 아마추어 사진가들을 양산했고, 이제 누구나 우수한 품질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카메라의 성능이 향상됐을 뿐만 아니라 쉽고 간편한 인화 방식 덕분에 사진작가와 대중 사이의 경계는 매우 희미해졌다. 급기야 사진가는 대중의 사진과 자기 사진과의 차별성을 분명히 해야만 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무엇이 예술사진과 아마추어 사진의 차이인지, 예술 사진가와 아마추어 사진가는 왜 다른지를 스스로에게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작가’로서의 사진가는 존재의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처지가 됐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이미 일상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삶의 깊숙한 곳에서 작동하고 있지만 실상 사진 문화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이 남아있다. 고품질의 인화를 원하는 사진가들은 여전히 아날로그 카메라를 사용해서 사진을 찍고 그것을 다시 디지털로 변환시키는 복잡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전시나 출판과 같은 형태의 유통 방식은 비록 디지털 프린트를 활용할지라도 아날로그적이다. 결과물은 인쇄의 형태로 독자와 만나기 때문이다. 디지털 코드에 근간을 둔 모니터를 통한 사진 유통은 오히려 컴퓨터나 휴대폰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디지털 코드는 아직 사진의 유통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 상태다. 이는 정보의 저장이 디지털 방식일지라도 사람은 결국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정보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날로그-디지털 패러다임은 아직 이동 중이다.

한편 사진의 수정과 변형, 합성은 아날로그 시대에 비해 훨씬 쉽고 간편해졌다. 한 장의 사진에 담긴 정보는 생산자의 의도에 따라 간단하게 조작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 결과 사진은 현실을 충실히 기록한 진실의 담지자라는 생각이 뿌리째 흔들리게 됐다. 물론 아날로그 시대에도 사진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 사진과 현실을 동일시하는 태도는 고루한 사고로 치부된다. 사진의 수정, 변형 여부를 시각적으로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포토샵 기술은 꾸준히 발전하여 이제 사진 자체만으로는 정보를 신뢰할 수 없게 됐다. 반면 허구와 환영, 가상에 대한 작가들의 탐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아날로그 시대의 사진가들이 ‘현실’과 씨름했다면, 이제 디지털 시대의 작가들은 ‘가상’과 대결하고 있다.

사진이 기술(Technic) 모델에 의거한 이미지 생산 수단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발명 초기부터 줄곧 지속되어 왔던 사진의 예술논쟁은 사진은 기술이지 예술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벤야민은 이미 1930년대에 사진의 예술논쟁이 철저하게 ‘반(反)기술적인’ 예술 개념에 근거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기술과 예술의 상호 영향관계는 매우 밀접하여 둘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른 현재 이 지적은 다시금 성찰을 필요로 한다. 기계의 자동화는 19세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향상됐고, 로봇과 인공지능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술 패러다임은 미래를 향해서도 열려있다.

박평종(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책, 벽, 모니터

책, 벽, 모니터

책, 벽, 모니터
10/17/2018
/ 박평종

사진의 수용과 유통방식이 바뀌고 있다. 전통적으로 사진은 책과 같은 인쇄물의 형태로 유통되다가 현대미술과 맞물리면서 벽에 걸리기 시작했으며,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모니터를 주 매체로 채택했다. 책과 벽, 모니터는 현재 사진의 수용과 유통을 지배하는 대표적인 매체다. 이 세 가지 방식이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지만 상황이 달라질 것임을 예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머지않아 모니터가 사진의 유통을 지배하게 될 것임이 틀림없다. 물론 책과 벽은 여전히 사진의 유통에 중요한 매체로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범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사진은 발명 직후부터 책과 친화력이 강했다. 복제가 불가능한 다게레오타입을 제외하면 ‘본래’ 사진술은 이미지 복제를 위해 탄생했다. 니에프스의 엘리오그라피가 그 기원이고 탈보트의 칼로타입도 본래 복제 기술로 출발했다. 초상화를 대체하면서 명맥을 유지했던 다게레오타입은 오래 존속할 수 없었다. 복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후 대부분의 사진은 복제 이미지로 유통됐다. 사진인쇄가 중요했다. 관건은 잉크다. 말하자면 은염 감광물질을 입힌 인화지를 대량으로 복제하려면 경제성이 낮았기 때문에 잉크 인쇄를 사진 복제에 적용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 개발한 방법이 제판법이다. 금속판에 은염 유제를 발라 원판의 사진 이미지를 복제한 후 산으로 부식시켜 홈에 잉크를 묻혀 여러 장을 인쇄하는 방법이다. 제판법이 등장하면서 사진은 대량으로 인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판법의 문제는 활자와 사진을 동일 지면에 인쇄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사진제판은 오목판, 활판은 볼록판이었기 때문이다. 활자와 사진을 동일지면에 인쇄할 수 없었던 탓에 활자를 인쇄한 지면에 제판법으로 인쇄된 사진을 오려 붙이는 방법을 활용하기도 했다. 활자와 사진을 함께 인쇄하는 방식은 망판법이 상용화되면서 일반화됐다. 신문, 잡지에 사진이 대량의 복제 이미지로 유통되는 것이다. 당연히 책에도 망판인쇄를 통한 사진이 등장한다. 이른바 인쇄매체의 시대다.
현대미술이 사진을 수용하면서 ‘예술사진’의 시대가 열린다. 미술 제도가 사진을 수용하기 전까지는 지면이 ‘거의’ 배타적인 사진의 유통 매체였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예술작품으로서의 사진은 지면 대신 미술관 벽면에 걸리는 것이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인 인쇄매체가 위축되는 현상과도 관계가 있다. 인터넷 환경의 정착과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으로 인쇄매체에 사진을 공급했던 이미지 생산자들은 난관에 봉착했다. 지면이 급속히 줄어드는 상황에서 그들은 벽면을 찾아다녀야 하는 지경에 처하게 됐다. 그렇다면 모니터는 어떤가?
신문, 잡지와 같은 ‘전통적인’ 지면은 디지털 매체에 점차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우리는 이미 PC 모니터나 휴대폰 액정화면을 통해 대부분의 시각 정보를 수용하고 있는 형편이다. 장단점은 있다. 우선 모니터는 시각 정보를 ‘물질적으로’ 보존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면이나 벽면에 비해 다른 많은 풍부한 장점을 갖고 있다. 우선 디지털 데이터는 아날로그 데이터에 비하면 복제에 소요되는 시간과 자본의 양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원본 이미지와 복제 이미지의 품질에도 차이가 없다. 물론 고품질 데이터 경우는 사정이 다르지만 말이다. 디지털 이미지를 유통시키는 매체에 대한 접근성도 훨씬 좋다. 인쇄매체와 달리 인터넷 매체에 이미지를 유통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한히 열려있다. 물론 모니터는 종이에 비해 훨씬 고가지만 누구나 크고 작은 모니터 한 두개씩은 갖고 있는 시대다. 그렇게 모니터의 시대가 왔지만 여전히 지면과 벽면도 우리 곁에 있다. 책과 벽, 모니터가 지닌 장단점을 면밀히 따져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할 때다.

박평종(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누가 창작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누가 창작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누가 창작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07/31/2018
/ 박평종

창작자의 개념이 모호해지고 있다. 수많은 저작권 분쟁 사례들이 그 점을 입증한다. 그에 따라 창작자를 ‘법적으로’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저작권을 어디까지 보호할 것인지도 골칫거리다. 특히 인공지능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는 시대가 오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이른바 ‘생각하는 기계(Thingking machine)’가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면 그를 창작자로 인정해야 할 것인가?

현행 저작권법은 저작권자를 독창성의 원천으로서의 창작자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 범위를 ‘인간 저자’만으로 한정한다. 예컨대 2011년 사진작가 데이비드 슬레이터가 인도네시아에서 멸종 위기종 원숭이 사진을 찍다가 카메라를 빼앗겨 발생한 사건을 보자. 사진작가의 카메라를 빼앗아 달아난 원숭이는 여러 장의 셀카를 찍었는데, 사진작가는 자신이 찍은 사진과 원숭이가 찍은 사진을 섞어 작품집으로 출간했다. 슬레이터는 2014년 원숭이가 찍은 사진을 무단으로 게재한 위키피디아에 사진 삭제를 요구했고, 이에 저작권 소송이 진행됐다. 법정은 비록 원숭이는 저작자가 될 수 없지만 사진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25%를 멸종 위기종 원숭이 보호에 사용하라고 판결했다. 여기서 관건은 인간만이 저자일 수 있으며 동물이나 로봇은 저작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는 것이다.
본래 저자(author), 창작자(originator) 개념은 저자가 저작물의 소유자임을 법적으로 보호하려는 소유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저자가 자신이 생산한 저작물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가지려면 타인의 그것과 명확히 구분되는 독창성(originality)이 있어야 했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저작권 분쟁에서 결정적 기준이 되는 요소가 그것이다. 그런데 법적으로 보호받는 창작자들의 작품이 그 ‘독창성’이라는 것을 진정 갖고 있는가?
알고리듬과 머신러닝을 활용하여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인공지능 ‘창작기계’는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 인간 예술가들보다 훨씬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독창성의 차원에서 기계는 인간을 능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무엇이 ‘없었던 작품’인지 쉽게 가려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의 ‘창작기계’, 예컨대 넥스트 렘브란트와 같은 인공지능은 화가의 화법을 머신러닝 학습으로 분석하여 그와 유사한 그림을 그리는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관건은 이 기계들을 ‘어떻게’ 프로그램 할 것인가에 있다. 만약 프로그래머가 전혀 새로운 알고리듬을 적용하여 규칙에서 벗어난 작품을 산출하도록 프로그램 한다면 사태는 달라질 수 있다. 그렇게 생산된 ‘작품’의 저자는 누가 될 것인가? 이미 예술가와 프로그래머의 적극적인 협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들은 그에 따른 작품의 공동저자다. 컴퓨터가 저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힘입어 카메라의 성능은 나날이 고도화되고 있어 이제 ‘누구라도’ 물리적 품질이 뛰어난 사진을 생산할 수 있다. 심지어 원숭이도 셀카를 찍고, 카메라를 도둑맞은 사진작가는 원숭이가 ‘대충’ 찍은 그 사진을 모아 작품집으로 출간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보다 고도의 복합적인 사고가 가능한 기계가 카메라를 잡는다면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인간 사진가의 작품보다 훨씬 ‘창의적인’ 사진을 그가 생산해 낼 날이 멀지 않았다. 이미 인공위성이나 드론, CCTV 카메라는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인간을 따돌린 지 오래다. 창의성의 척도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재고할 때가 됐다. 그리고 인간만이 저자일 수 있다는 뿌리 깊은 통념에 대해서도 반성해 보아야 한다. 하나의 저작물이 진정 가치 있다면 누가 생산하느냐는 부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저널리즘 사진

저널리즘 사진

저널리즘 사진
04/03/2018
/ 박평종

저널리즘 사진에 대한 몇 가지 편견과 오해, 가치절상과 가치절하, 이런 문제들을 요즘 느낀 대로 정리해 본다. 이상하게도 요즘 사진가들은 저널리즘 사진을 폄하하는 것 같다. 저널리즘 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진이 저널리즘으로 구분되는 것을 싫어하고 다큐멘터리 사진을 한다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가 저널리즘보다 더 멋져 보이는 모양이다. 요즘 전시장의 벽에 걸리는 사진 중의 상당수는 저널리즘 사진에 가까운데도 다큐멘터리라고 부른다. 이 또한 저널리즘 사진에 대한 가치절하에서 나오는 발상인 것 같다. 요컨대 다큐멘터리는 예술이며 저널리즘은 그냥 신문, 잡지사진이라는 이분법이 크게 한몫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다큐멘터리와 저널리즘의 차이는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부수적 요소들을 고려할 때나 어렴풋이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미세한 차이밖에는 없다. 서로 다른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며, 더 정확히는 둘 다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역사적 발생 과정이 다를 뿐이며, 유통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다른 중요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학문적 합의는 없고 개인들 간의 견해 차이만 있다. 내 생각에 중요한 차이는 역시 소통에 있다. 다큐멘터리는 대중들과의 소통에 그리 적극적인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사진가의 문제의식을 담아내는 형식, 그러니까 자기 시각을 배타적으로 중요시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대부분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아방가르드였으며 시각적 혁신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다른 사진가들의 시각과 확연히 다른 개성적인 시각을 확보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반면 저널리즘은 대중과의 소통을 중요시한다. 아방가르드의 문법, 이것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쉽게 이해받기 어렵다. 하물며 대중들이 그런 사진의 문법을 이해할 리가 만무하다. 워커 에반스의 문법, 로버트 프랭크의 문법이 당대에는 전혀 이해받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저널리즘 사진이 그런 문법을 구사한다면 대중들과 소통할 수 없다. 그래서 문제는 사실 매우 간단하다. 저널리즘의 가치는 옹호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저널리즘 사진을 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자기부정을 한다. 내 사진은 저널리즘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라는 것이다. 대중들과 소통을 잘 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소통을 못하고 있어’라고 외치는 셈이다. 우습기도 하고 유치하기도 하다. 적극적인 소통을 위해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소통하기 싫다고 외치는 꼴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매우 소통을 잘하고 있다. 그러니까 더욱 아이러니컬한 것이다.

아마도 저널리즘 사진을 하면서도 자신이 다큐멘터리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후자가 예술적이며 전자는 비예술적이라고 생각하는 유치한 이분법 때문인 것 같은데, 이 또한 우습다. 사실 시각적 혁신을 중요시 했던 다큐멘터리 사진의 전통은 서양의 경우 아방가르드 예술, 그러니까 모더니즘 예술의 한 축에 속할 뿐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원칙이 아니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매우 고립적인 예술의 한 경향일 뿐이었으며, 공리주의 예술의 원칙에는 위배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의 저널리즘 사진은 인쇄매체의 상대적 위축 때문에 점차 움츠러드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과 확산도 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현장 사진가들이 민감하게 느낄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이 저널리즘 사진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는다. 다만 유통의 방식이 달라질 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그랬다. 유통 방식의 변화에 대한 요구가 위기로 느껴질 수 있다. 시간이 좀 필요하다. 어쨌든 저널리즘 사진의 중요한 가치를 사진가들이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아 답답하다. 저널, 이것은 저널리즘 사진가들에게 아마 밥벌이 수단일 것이다. 그래서 정말 소중하다. 그런데 저널리즘 사진, 이것도 밥벌이 수단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 때는 정말 밥벌레가 된다.

박평종 (운영위원, 중앙대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