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진짜에 가까운 가짜

한없이 진짜에 가까운 가짜

한없이 진짜에 가까운 가짜
12/11/2019
/ 박평종

“어떤 바보가 진짜 돈을 만들었지?” 초현실주의 삽화가 모리스 앙리(Maurice Henri)의 <사전꾼들>에서 이 모리배 집단의 우두머리가 부하들이 만든 가짜 돈을 집어 들며 하는 말이다. 이 말에 담긴 의미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이 집단의 목적은 가짜 돈을 만드는 데 있다. 따라서 진짜 돈을 만들 경우 그들의 행위는 실패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가짜 돈은 진짜와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진짜와 흡사해야 한다. 누가 보더라도 가짜 티가 나면 가짜 돈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그래서 진짜에 한없이 가까워야 한다. 단 진짜와 같아서는 안 된다. 물론 아무리 잘 만들어도 가짜 돈이 진짜가 될 수는 없다. 위의 예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바보’가 만든 돈은 우두머리의 눈에 진짜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결코 진짜가 될 수 없다. 한편 우두머리의 눈을 속인 그 자는 ‘바보’가 아니라 ‘달인’이다.

그럼 그 자는 어떻게 ‘달인’이 됐을까? 가짜 돈을 만드는 자가 있고,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하는 자가 있다. 만드는 자는 속이려 하고 판별하는 자는 속이지 못하게 제어하려 한다. 즉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최대치의 능력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 그렇다면 능력의 최대치가 발휘됐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까? 가짜를 만드는 자의 능력이 극대화될 때 판별자는 무능한 자가 된다. 반대로 판별자의 능력이 최대치가 될 경우 만드는 자가 무능해진다. 말하자면 두 축의 능력은 정확히 중간에서 만나야 한다. 그럼 능력의 절반만 발휘해야 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경우 두 바보만 남게 된다. 핵심은 각자 최대치의 능력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서로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판별자를 속일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가짜를 만들고자 할 때 판별자의 식별력은 높아지고, 그렇게 능력이 뛰어난 판별자를 다시 속이려 하는 과정에서 가짜 생산자의 능력도 발전하는 셈이다.

딥러닝을 활용한 이미지 합성 기술인 딥 페이크(Deep fake)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이 기술은 적대적 생성 신경망(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s), 소위 GAN이라 불리는 알고리즘이 기반이다. 오바마의 가짜 연설문 영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유명 배우들의 가짜 포르노 영상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있다. 이 알고리즘은 2014년 이안 굿펠로우(Ian Goodfellow)가 개발한 모델로 지도학습(Supervised Learning)에 기초한 기존의 기계학습 방식을 비지도학습으로 전환함으로써 딥러닝이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평가받는다. 여기서 핵심은 서로 적대적인 두 축이 기계학습을 주도한다는 점이다. 학습의 원리는 의외로 간단한다. 분류 모델과 생성 모델의 두 단계가 있다. 인간의 뇌를 모방한 컴퓨터 신경망은 우선 진짜 데이터를 진짜로 분류하도록 학습하고, 이미지 생성자(Generator)가 만든 가짜 데이터는 가짜로 분류하도록 학습한다. 다음은 생성 모델로 학습목표는 분류 모델을 속이는 것, 말하자면 판별자(Discriminator)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유사한 가짜 데이터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무수히 반복되면 생성자의 능력은 극대화되어(판별자와 더불어) 진짜 같은 가짜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정리하자면 GAN에서 생성자와 판별자는 서로 적대적 경쟁을 통해 발전하며, 이 과정 자체가 곧 딥러닝인 셈이다. GAN은 꾸준히 진화하여 이제 <사전꾼들>의 두목처럼 가짜를 진짜라고 믿을 만큼 정교해졌다. 삽화는 재밌지만 현실은 무섭다.

가짜를 만드는 목적은 속이기 위함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속이는 주체는 늘 인간이었다. 그런데 이제 기계가 인간을 속이는 시대가 왔다. GAN의 생성자는 가짜를 생산하기 위한 알고리즘이고, 판별자의 ‘적대적’ 협력을 통해 그 목적을 탁월하게 수행한다. 딥 페이크, 한없이 깊은 속임수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인간이 기계가 파놓은 속임수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을지 전망은 어둡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똑똑한 카메라, 멍청한 카메라, 이상한 카메라

똑똑한 카메라, 멍청한 카메라, 이상한 카메라

똑똑한 카메라, 멍청한 카메라, 이상한 카메라
10/29/2019
/ 박평종

카메라가 진화를 거듭함에 따라 종류와 기능도 다양해지고 있다. 휴대폰카메라에서부터 CCTV, 블랙박스카메라, 몰래카메라, 드론카메라, 내시경카메라 등 그 범위는 매우 넓고 점차 확대되는 추세다. 매체가 인간을 확장시킨다는 매체이론의 대전제에 따르면 카메라는 사람 눈의 확장이다. 24시간 보고(CCTV), 하늘에서 보고(드론), 신체 내부를 보는(내시경) 능력은 보통 사람의 눈이 지닌 능력을 한참 뛰어넘는다. 그런데 이 다양한 기능과 용도, 놀라운 성능에도 불구하고 실상 카메라는 아주 간단한 광학장치다. 너무 간단해서 진정 이 ‘원시적인’ 장치가 인간의 삶을 이토록 큰 폭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빛을 받아들이는 작은 구멍과 그 구멍을 통해 전달된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감광판만 있으면 카메라다. 소위 ‘카메라 옵스쿠라’라 불렸던 장치가 카메라의 원형인 셈인데, 거기에 조리개와 셔터 등 이미지의 품질을 향상시키는 보조 장치가 추가된 것이 오늘날의 카메라다. 물론 디지털 카메라로 진화하면서 구조는 훨씬 복잡해졌다. 마치 요즘 자동차에 장착된 복잡한 전자장치들처럼 말이다. 백미러 자동접이가 없어도 차가 굴러가듯 노출 자동보정장치가 없어도 사진은 찍힌다. 말하자면 없어도 그만인 것이 카메라의 유형을 결정한다.

어쨌든 이 보조 장치 덕에 현재의 카메라는 구조의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사진 찍는 사람이 카메라의 원리와 구조를 몰라도 진화한 카메라는 ‘스스로’ 모든 결정을 내리고 양질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사람보다 ‘똑똑한’ 카메라다. 자동 초점과 자동 노출이 완성된 지는 이미 오래고 야간 촬영 모드나 하이키/로우키 기능, 얼굴 자동인식, 각종 편집기능 등 사람이 공들여 수행해야 할 몫을 기계가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다. 실상 사람은 특정한 촬영 조건에서 조리개를 얼마나 죄어야 최선의 노출 값을 얻어낼 수 있는지 정확히 판단하지 못한다. 반면 카메라에게 그 판단은 아주 쉽다. 사람에게 쉬운 것이 컴퓨터에게는 어렵고, 반대로 컴퓨터에게 쉬운 것이 사람에게는 어렵다는 모라백의 역설이 카메라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결국 사람은 자신에게 어려운 판단을 정확히 내리는 카메라가 ‘똑똑해’ 보일 수 있다.

한편 카메라는 ‘똑똑할수록’ 인간의 의지를 거역한다. 수동 카메라의 경우 ‘일부러’ 초점을 흐리게 찍을 수 있지만 자동 초점이 작동하면 흐리게 찍을 수 없다. 찍는 사람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멍청한’ 카메라다. 자동 노출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카메라로는 결코 노출 부족 상태의 사진을 얻어낼 수 없다.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싶은데 얼굴 인식 프로그램이 작동하면 얼굴에만 초점이 맞으니 멍청하다고 밖에는 달리 말할 도리가 없다.

아주 오래 전 내가 갖고 있었던 수동 카메라는 제멋대로 노출 값을 결정해서 같은 장면을 찍는데도 한번은 밝고 한번은 어두운 상태가 되곤 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카메라의 노출계는 고장 난 상태였는데 작동은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던 당시에 나는 참으로 이상한 카메라라고만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그 ‘망가진’ 카메라는 참으로 인간적이었던 것 같다. 성석제의 단편집 <인간적이다>에는 어리숙하고 실수도 많이 하고 판단력도 떨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인간적’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그런 종류의 ‘결함’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실수 없이 완벽한 이에게 ‘인간적’이라는 술어를 갖다 붙이는 것은 그리 인간적이지 않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기계적’이다. 기계에게 실수는 용납될 수 없고, 그래서 고장 난 기계는 폐기의 수순을 밟는다. 한편 기계의 오작동은 때로 놀라움을 가져다준다. 예기치 않았던 뜻밖의 상황에 찬탄을 보내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그런데 아쉽게도 망가진 카메라는 고물상에만 있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인증샷 시대

인증샷 시대

인증샷 시대
10/02/2019
/ 박평종

유명 관광지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구글에서 에펠탑 이미지를 검색하면 수백만 장의 사진이 나오는데 뭐 하러 또 찍는단 말인가! 게다가 촬영 포인트도 좋고 근사한 배경의 ‘수려한’ 이미지가 많아 그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되니 구태여 민폐 끼쳐가며 여행 시간을 낭비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그들을 이해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찍어 놓은 ‘멋진’ 사진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초점이 잘 맞지 않아도 상관없고, 에펠탑이 작게 나오더라도 무방하다.  그 사진을 통해 내가 에펠탑 앞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모든 사진은 그 점을 보증한다. 소위 인증샷이다.

수많은 종류의 인증샷이 있다. 투표 인증샷이나 불매운동 참여 인증샷이 있고, 체중감량 성공 인증샷도 있으며, 심지어 일부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자해 인증샷도 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결혼사진이나 졸업사진도 일종의 인증샷이다. 인증, 어떤 행위를 공적으로 입증한다는 뜻이다. 일종의 증명서라 하겠다. 따라서 인증샷은 증명서 역할을 한다. 이유와 목적을 떠나 사진은 이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리고 사진의 인증력은 롤랑 바르트의 표현을 빌자면 재현력을 능가한다. 사진의 인증력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허구로 간주될 만큼 기이한 장면을 찍은 사진에서조차도 그 확실성을 의심할 수 없다. 바르트는 자신을 촬영한 사진에 대해 언제, 어디서 촬영됐는지 기억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진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고 토로한다. 모두가 경험하는 일이다.

디지털 기술의 등장으로 사진의 시대는 저물고 후기 사진, 이른바 포스트 포토그래피의 시대에 진입했다는 주장이 있다. 아날로그 사진이 도큐먼트, 기록, 실재와 같은 개념들에 의지하고 있었다면 디지털 사진은 간단한 조작과 합성 등을 통해 시물라크룸, 가상, 허구와 같은 개념들에 의존하게 됐다는 것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인공지능과 접목한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원본 없는 가상 이미지의 생산을 더욱 탁월하게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날로그 사진의 ‘탁월함’으로 평가받아 왔던 인증 기능은 디지털 사진에서도 동일하게 발휘되고 있으며, 나아가 그 영역도 넓어지고 있다. 사진의 인증력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물론 사진 못지않게, 사진보다 뛰어나게 인증 기능이 탁월한 수단도 있다. 공항 입국장에서 활용되는 지문 인식이 그 예다. 실상 지문은 여권에 붙어 있는 사진보다 인증력이 뛰어나다. 홍체인식이나 음성인식도 그렇다. 그런데 모든 인증 수단은 완벽하지 않다. 위변조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비슷한’ 개별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인증의 어려움은 바로 이 ‘유사성’에서 온다. 여러 가지 인증 수단을 함께 사용하는 까닭은 이 유사성으로부터 오차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사실 사진은 개별자의 식별을 목적으로 한 인증, 말하자면 내가 나임을 확인하기 위한 인증 수단으로는 부적합하다. 나와 닮은 사람이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진은 내가 그 곳에 있었음을 인증하는 수단으로는 탁월하다. 사진 속의 인물이 나 자신임이 명백할 경우에만 그렇다. 그런 점에서 SNS에 범람하는 인증샷은 신원 확인이 전제로 깔려있다. 유명 맛집에 갔다 왔다는 인증샷을 보고 사진 속 인물이 바로 그 사람임을 ‘이미’ 알지 못한다면 그 사진은 인증샷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증과 식별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제 사진은 더 이상 식별의 수단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인증의 수단으로만 활용된다. 그리고 사진의 인증력은 법적 실효성도 갖지 못한다. 다만 네트워크상에서 정보의 공유나 ‘놀이’의 차원으로 ‘진화’하고 있다. 인증샷은 이제 그 정도의 의미밖에는 갖지 못한다. 하지만 그 가치는 확장성이 크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사진관이 살아있다

사진관이 살아있다

사진관이 살아있다
05/09/2019
/ 박평종

어린 시절, 그러니까 1970년대 초반 무렵 목포역 오거리 인근에 허바허바사장이 있었다. 근처를 지날 때마다 나는 ‘사장님이 외국인인가?’, 이렇게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사장이 직위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사진관을 뜻하는 사장(寫場)임을 알게 됐지만 당시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 때도 사진관이라는 명칭이 훨씬 보편적이긴 했다. 요즘도 그렇다. 전통적인 이름의 사진관이 다수지만 포토 스튜디오도 있고, 특정 분야를 전문화시킨 베이비 스튜디오나 웨딩 스튜디오 등 다양한 이름이 혼재하고 있다. 이들의 이름은 달라도 목적은 같다. 모두 사장, 그러니까 사진 찍는 장소다. 그런데 거기서는 사람 얼굴만 찍는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자면 초상사진관이다.

잘 알려져 있듯 사진술은 발명 초기부터 초상 제작에 활용됐다. 심지어 지젤 프로인트는 사진이 값비싼 초상화를 대체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명됐다는 ‘과장된’ 견해를 펴기도 했으나, 초상이 사진술을 활용하여 생산하는 이미지 중 가장 보편적인 대상임에는 틀림이 없다. 초상사진의 전성기였던 ‘명함판 사진’ 시대에 디스데리가 운영하던 사진관의 고객은 일일 평균 200여명이었고, 1861년 파리의 경우 사진관에 종사하던 사람이 33,000여명이었다는 통계가 있으니 그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어쨌든 사진관은 사람의 얼굴을 찍는 특별한 곳으로 존속해오고 있다. 과거의 사진관이 특별했던 데는 까닭이 있다. 아무나 사진을 찍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고가였고, 조작도 어려웠으며, 특히 현상과 인화에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됐다. 소형 카메라가 대중화되고 현상소가 출현하면서 상황은 달라졌지만 그래도 사진관은 여전히 특별했다. 사진의 대중화는 곧 초상사진의 질적 저하를 수반했기 때문이다. 그럼 현재는 어떨까?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 특히 휴대폰 카메라의 성능 향상으로 사진의 물리적 품질은 저절로 보장된다. 현상, 인화를 하지 않더라도 고품질 데이터를 모니터로 볼 수 있고 저장과 전송도 용이하니 굳이 사진관에 가서 초상사진을 찍을 필요가 없다. 사진사의 요구에 따라 억지로 웃거나 포즈를 취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거울 보듯 표정 바꿔가며 셀카를 찍을 수 있으니 사진관에 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관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진관에서 찍으면 다른가?

앙드레 바쟁은 미라 콤플렉스가 조형예술의 기원이며, 그것이 이후 초상화에 대한 욕망으로 승화됐다고 주장한다. 이 욕망은 다시 둘로 갈린다. 하나는 인물의 외관을 보존함으로써 시간을 유예시키고자 하는 주술적 욕망,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미라 콤플렉스의 변형, 결국 외관의 유사성에 만족하는 그런 욕망이다. 다른 하나는 외형적 유사성을 넘어 이상적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 두 번째 욕망이 전자의 ‘외형적 리얼리즘’과 구분되는 ‘심리적 리얼리즘’이다. 바쟁의 주장을 초상사진에 적용하자면 자신의 초상에 대한 인간의 또 다른 욕망은 바로 ‘이상적 모습’으로 향하는 셈이다. 실제 모습과 다소 거리가 있더라도 자신이 욕망하는 이상적 모습을 초상사진에서 보고 싶어 한다고 할 수 있겠다. 19세기의 명함판 사진이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디스데리는 가장 광범위한 고객층이었던 부르주아 시민 계급이 정확히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허바허바사장 홈페이지에는 가족사진, 웨딩사진, 베이비 포토를 비롯하여 분위기 있는 인물사진 등이 카테고리로 구분돼 있다. 거기에는 화목한 가족, 로맨틱한 커플, 귀여운 아이의 모습 등이 상징으로 등장한다. 현실의 삶과 다를지라도 사진을 통해 보고 싶은 모습을 영속적인 이미지로 구현해 놓았다 하겠다. 사진관의 특별함은 그런 것이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사진첩이 사라졌다

사진첩이 사라졌다

사진첩이 사라졌다
02/19/2019
/ 박평종

사진첩이 사라지고 있다. 아니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미 일상의 기념사진을 모아 앨범 속에 간직하는 행위는 찾아보기 어렵다. 졸업앨범을 만들거나 하는 ‘제도’로서의 사진첩은 남아있지만 의미는 크게 퇴색했다. 게다가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기 위해 그 사진첩을 들춰보는 이는 거의 없다. ‘기념사진’이 가족의 유대를 강화시켜 주는 수단으로 작용했다는 부르디외의 사회학적 진단은 이제 ‘낡은’ 학설이 됐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을까? 가족공동체가 약화됐기 때문일까? 하지만 가족과 상관없는 기념사진 영역, 예컨대 여행사진에서도 앨범은 사라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진을 과거의 시간과 연계시켜 주어왔던 ‘물질성’의 박탈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말하자면 과거 사진첩의 형태로 보존해 오던 과거의 이미지들은 인화지라는 종이에 달라붙어 있었으나, 이제 그 이미지는 디지털 데이터로 바뀌었다. 그 ‘데이터 이미지’를 통해 과거를 회상하려면 모니터를 켜야 한다. 키나 버튼을 누르면 과거는 복원되고 다시 누르거나 코드를 뽑으면 과거는 눈앞에서 사라진다. 그 이미지는 물질성을 갖지 못한 일종의 환영과도 같다.

실상 정보(소리, 글, 이미지 등)는 ‘어딘가에’ 저장되어야 확산과 발전이 가능하다. 문명의 발전은 바로 이 정보의 ‘저장’ 덕분에 가능했다. 이를 가능케 해 준 것이 바로 매체다. 매체의 핵심 기능은 정보의 전달(커뮤니케이션)에 앞서 저장에 있다. 캐나다 학파의 연구에 따르면 구술문화 시대에는 정보 저장 매체의 부재로 과거와의 단절이 있었고, ‘장소’에 묶여 있어 공간적 확산도 불가능했다. 문자를 최초의 매체로 규정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최초의 저장 매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건은 문자의 물질성이다. 물질을 매개로 문자 정보는 시간을 초월하여 광범위한 공간적 확산이 가능했다. 키틀러가 축음기를 가장 중요한 매체 중의 하나로 꼽는 이유도 그 정보의 저장 때문이다. 소리는 본래 발화와 동시에 사라지는 정보였지만 축음기는 그 한시적 정보를 ‘통째로’, 말하자면 과거의 시간과 더불어 저장할 수 있게 했다.

사진도 같은 맥락에서 탁월한 매체다. 축음기와 달리 비록 순간의 시간이지만 과거를 이미지 정보로 온전히 저장한 최초의 매체인 것이다. 저장 방식은 종이라는 물질을 통해서다. 물론 최초의 사진은 종이가 아니라 금속판(다게레오타입)이라는 물질을 활용했지만 곧 종이로 대체됐다. 하지만 이제 종이라는 물질은 사진 정보의 저장에서 더 이상 독점적인 지위를 지니지 못한다. 디지털 매체가 종이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으며, 범위는 상상을 넘어설 정도다. 아날로그 시대의 사진은 물질과 결합돼 있었다. 즉 종이라는 물질 자체가 사진이었다. 따라서 사진에 담긴 정보를 저장하기 위해서는 종이라는 물질을 보존해야 했다. 하지만 물질은 시간이 흐르면 훼손된다. 물질성을 지닌 정보를 보존하는 것이 힘든 이유다. 반면 물질성을 갖지 않는 디지털 데이터의 경우 사정은 전혀 다르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데이터가 변형되지 않는 까닭에 정보의 훼손과 변질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물질에 달라붙어 있지 않아 그 정보는 무한히 ‘가벼워’ 전달도 용이하다. 어떤 점에서 물질성을 떠난 디지털 사진은 ‘순수한’ 정보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사진의 정보는 종이라는 물질과 전혀 상관없는 가상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매체가 지닌 또 다른 특성은 정보의 호환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아날로그 매체의 경우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정보들은 소리나 문자, 이미지로 구분돼 상호 호환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디지털 매체에서 각기 상이한 형태의 이 정보들은 모두 0과 1의 조합을 통한 데이터로 전환된다. 모두 숫자 정보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호환이 쉽다는 것은 저장된 정보의 처리, 즉 상이한 형태의 정보를 융합하기가 용이하다는 뜻이다. 물질의 장점은 분명하나 단점 또한 명확하다. 당연히 사진이 물질성을 떠나면서 생겨난 단점이 있는 반면 반대로 과거에 찾아볼 수 없었던 장점들 또한 눈에 띈다. 그 변화를 눈여겨 볼 때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사진과 디지털 코드

사진과 디지털 코드

사진과 디지털 코드
11/28/2018
/ 박평종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사진에 생겨난 가장 큰 변화는 두말 할 나위 없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지배다. 모든 정보를 0과 1의 조합으로 변환시켜 저장하는 디지털 기술은 사진의 생산과 유통, 소비 방식을 크게 바꿔놓았다. 그 변화는 때로는 더디게, 때로는 급격히 진행됐으며, 일상에서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 삶의 다양한 영역을 파고들었다. 디지털 기술은 단지 물리적인 변화만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감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특히 디지털 기술에 익숙한 세대에게 변화의 속도와 범위는 매우 빠르고 넓다.

눈에 띄는 변화는 우선 디지털 기술의 수혜자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은 광범위한 아마추어 사진가들을 양산했고, 이제 누구나 우수한 품질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카메라의 성능이 향상됐을 뿐만 아니라 쉽고 간편한 인화 방식 덕분에 사진작가와 대중 사이의 경계는 매우 희미해졌다. 급기야 사진가는 대중의 사진과 자기 사진과의 차별성을 분명히 해야만 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무엇이 예술사진과 아마추어 사진의 차이인지, 예술 사진가와 아마추어 사진가는 왜 다른지를 스스로에게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작가’로서의 사진가는 존재의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처지가 됐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이미 일상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삶의 깊숙한 곳에서 작동하고 있지만 실상 사진 문화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이 남아있다. 고품질의 인화를 원하는 사진가들은 여전히 아날로그 카메라를 사용해서 사진을 찍고 그것을 다시 디지털로 변환시키는 복잡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전시나 출판과 같은 형태의 유통 방식은 비록 디지털 프린트를 활용할지라도 아날로그적이다. 결과물은 인쇄의 형태로 독자와 만나기 때문이다. 디지털 코드에 근간을 둔 모니터를 통한 사진 유통은 오히려 컴퓨터나 휴대폰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디지털 코드는 아직 사진의 유통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 상태다. 이는 정보의 저장이 디지털 방식일지라도 사람은 결국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정보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날로그-디지털 패러다임은 아직 이동 중이다.

한편 사진의 수정과 변형, 합성은 아날로그 시대에 비해 훨씬 쉽고 간편해졌다. 한 장의 사진에 담긴 정보는 생산자의 의도에 따라 간단하게 조작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 결과 사진은 현실을 충실히 기록한 진실의 담지자라는 생각이 뿌리째 흔들리게 됐다. 물론 아날로그 시대에도 사진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 사진과 현실을 동일시하는 태도는 고루한 사고로 치부된다. 사진의 수정, 변형 여부를 시각적으로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포토샵 기술은 꾸준히 발전하여 이제 사진 자체만으로는 정보를 신뢰할 수 없게 됐다. 반면 허구와 환영, 가상에 대한 작가들의 탐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아날로그 시대의 사진가들이 ‘현실’과 씨름했다면, 이제 디지털 시대의 작가들은 ‘가상’과 대결하고 있다.

사진이 기술(Technic) 모델에 의거한 이미지 생산 수단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발명 초기부터 줄곧 지속되어 왔던 사진의 예술논쟁은 사진은 기술이지 예술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벤야민은 이미 1930년대에 사진의 예술논쟁이 철저하게 ‘반(反)기술적인’ 예술 개념에 근거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기술과 예술의 상호 영향관계는 매우 밀접하여 둘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른 현재 이 지적은 다시금 성찰을 필요로 한다. 기계의 자동화는 19세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향상됐고, 로봇과 인공지능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술 패러다임은 미래를 향해서도 열려있다.

박평종(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