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 청어람

청출어람 청어람

청출어람 청어람
03/31/2021
/ 박평종

이미지 생성 알고리즘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가장 주목을 끄는 모델은 생성적 적대신경망(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 이하 GAN)으로 2014년에 처음 발표된 후 놀라운 성장을 거듭해 왔다. GAN의 원리를 적용하여 이미지 생성에 활용한 알고리즘은 매우 많고 분야도 다양한데, 그 중 하나가 TPGAN(Two-Pathway GAN)이다. 이 알고리즘은 측면 사진에서 정면 사진을 정확히 합성해 내는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보여주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대부분의 인공지능이 그렇듯이 이 알고리즘도 사람의 사고 과정을 모방한다. 사람이 측면 얼굴에서 정면 얼굴을 유추해 내는 과정을 응용하는 것이다. 사람은 우선 관찰을 통해 측면 정보를 탐색한다. 당연히 별 소득은 없다. 하지만 불확실한 정보를 추론의 재료로 삼아 얼굴에 대한 사전 지식과 비교한다. 정면 얼굴에 대한 지식은 예컨대 두 눈은 평행상태로 놓여있고 코는 수직으로 얼굴의 중앙에 위치하며, 입은 코의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다는 등이다. 이를 바탕으로 정면 얼굴에 대한 전반적인 구조를 추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음에는 정면의 디테일을 추정하여 얼굴의 전반적인 형태를 산정한다. 옆에서 본 눈이 둥근 형태인지 길게 늘어진 형태인지, 코가 뾰족한지 뭉툭한지, 코와 입의 간격은 어느 정도인지 등 구체적인 세부를 추정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의 기억은 부정확하여 얼굴의 모든 형태를 정확히 상상을 통해 얻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어느 정도 근사치에 도달할 수는 있다. 목격자의 기억에 의존하여 몽타주를 그럴싸하게 그려내는 경우처럼 말이다.

어쨌든 TPGAN도 이런 프로세스를 따른다. 전체경로(Global Pathway)라 불리는 첫 단계에서는 얼굴의 전체 구조를 추정하고, 두 번째 단계인 국부경로(Local Pathway)에서는 얼굴의 부분적인 디테일이 전체 구조에 부합하도록 합성을 진행한다. 이 둘을 통합시켜 최종 결과물을 얻어내는데 여기서 GAN의 기본 구조인 생성자(Generator)와 판별자(Discriminator)의 역할이 중요하다. 생성자는 위의 두 경로에서 추출한 데이터를 통합하여 정면 얼굴의 픽셀값을 계산한다. 판별자는 생성자가 산출한 데이터가 얼마나 실재와 가까운지 비교를 통해 식별을 진행한다. 당연히 초기 단계에서 측면사진과 정면사진은 확연히 다르다. 그런데 이 과정이 ‘무수히’ 반복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예컨대 생성자가 ‘처음에’ 제시한 정면사진은 판별자의 눈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만들어 와”라고 돌려보낸다. 생성자는 종전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좀 더 그럴듯한 정면사진을 만들어온다. 이 과정이 무수히 반복되면서 생성자가 제안하는 정면사진은 실제 얼굴에 가까운 근사치로 수렴한다. TPGAN의 개발자들은 이 알고리즘이 측면사진으로부터 인물의 동일성(Identity)을 유지하는 정면사진을 생성해 냄으로써 합성을 통해 안면인식의 가능성을 입증했다고 자평했다. 그렇다면 활용범위도 넓다. CCTV는 증명사진처럼 ‘정확히’ 인물의 정면을 포착하는 경우가 드물어 인물 식별에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TPGAN은 예컨대 범죄용의자의 인물 식별에 효과적일 수 있다.

GAN의 원리를 처음 고안한 이안 굿펠로우는 2014년의 논문에서 생성자와 판별자의 관계를 위조지폐범과 경찰의 관계로 설명했는데, 2016년 신경정보처리시스템학회(NIPS)에서 발표한 GAN에 관한 튜토리얼에서는 학생과 교사의 관계에 가깝다고 언급한 바 있다. 말하자면 학생(생성자)이 제출한 답안(생성 데이터)을 교사(판별자)가 검사하는 과정을 통해 학생의 능력이 향상된다는 것이다. 실상 이 ‘검사 과정’은 지겹게 되풀이되므로 사람에게는 고역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계는 지치지도 않고 자존심 상하는 일도 없으며, 정답이 나올 때까지 같은 행위를 반복할 수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했던가. 판별자로부터 무수히 ‘fail’을 맞아가며 유급을 거듭하다 결국 ‘pass’를 따내고야 마는 생성자의 노력은 사람의 눈에 가상해 보이기도 한다. 뭐 어차피 인간이 시킨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사람의 사고를 모방했지만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이 알고리즘은 한편으로 대견한 측면이 있다. 청출어람 청어람이라고나 할까.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향수, 사진, 축음기

향수, 사진, 축음기

향수, 사진, 축음기
03/10/2021
/ 박평종

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는 사람의 체취를 ‘영원히’ 간직하고자 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살인을 저지르는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다룬다. 90년대 초에 출간된 이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나중에 영화로도 제작되어 널리 회자된 바 있다. 소설의 부제는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문자 그대로 이 픽션은 인간의 ‘향기’를 보존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잔혹한’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은 장 밥티스트 그루누이로, 그루누이(Grenouille)는 프랑스어로 개구리를 뜻한다. 몰골이 흉측해서 사람들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된 가련한 인물이다. 어쨌든 천부적인 후각 덕분에 이 ‘개구리’ 인간은 향수 제조의 달인이 되나 살아있는 사람의 냄새를 저장하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자신만의 비법을 찾아 나선다. 문제는 향수를 만들려면 대상의 ‘정수’를 모조리 뽑아내야 한다는 것, 예컨대 꽃의 향기를 저장하게 되면 꽃은 죽는다. 불가능한 욕망에 사로잡힌 그루누이는 결국 인간의 ‘정수’를 뽑아 향수를 만들고 목숨을 희생시키는 선택을 한다. 그렇게 살아있던 인간의 체취가 ‘천상의’ 향수로 저장된다.

감각정보를 저장하는 문제는 문명사의 오랜 숙원이었다. 시각정보는 이미지, 요컨대 그림으로 저장 가능했으나 왜곡이 발생했다. 정보가 왜곡되면 가치는 반감된다. 사진은 왜곡 없이 시각정보를 저장하는 탁월한 방법으로 1839년에 발명됐다. 청각정보는 1877년 에디슨이 발명한 포노그래프(phonographe)를 통해 저장과 재생이 가능하게 됐다. 이른바 축음기의 탄생이다. 이 두 매체는 19세기가 거두어들인 가장 놀라운 성과들이다. 시각정보와 청각정보는 문자 그대로 ‘왜곡 없이’ 저장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현실에서 발생하는 정보가 바로 그 시간 자체와 더불어 ‘통째로’ 기록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입증’의 힘이 발생한다. 나아가 이 저장된 정보는 언제라도 다시 원형 그대로 재생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후각정보는 어떨까? 물론 향수가 있다. 그러나 향수는 사진이나 축음기와 전혀 다른 차원의 정보저장 수단이다. 두 후자는 개별적인 ‘모든’ 현상들을 정보로 기록할 수 있다. 정보가 발생하는 시간이 담긴다는 뜻이다. 반면 향수의 정보는 극도로 ‘추상적’이다. 향수에 담겨있는 바닐라향, 과일향, 초컬릿향, 가죽향 등에는 모두 그 향기를 추출했던 개별자의 정보가 누락되어 있다. 게다가 이 후각정보는 영속적이지 않다. 향수 뚜껑을 열어두면 향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싱글 몰트 위스키의 기본 향은 스코틀랜드 특유의 피트 향을 깔고 있는데, 거기에도 당연히 특정 시간과 장소의 피트 향은 없다. 단지 피트 향이라는 ‘보편’만이 있을 뿐이다. 오래 두면 당연히 향도 달아난다. <향수>의 그루누이가 절망했던 까닭도 그 때문이 아닐까싶다. 물론 픽션에 불과하지만 그는 ‘특정’ 여인의 향기를 영원히 보존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자도 향수처럼 정보를 ‘추상적으로’ 보존하는 수단이다.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 것, 코로 맡은 것 모두 문자화될 수 있으며 영구적 보존이 가능하다. 나아가 그 정보를 받아들인 자가 죽어도 타인에게 전달될 수 있다. 문자는 그런 점에서 획기적인 정보 저장수단이다. 그러나 이 모든 문자 정보는 고도로 추상화된 형태라는 점이 문제다. 만화 <신의 물방울>에서 소믈리에가 미각과 후각으로 얻어낸 정보를 표현한 말들은 그저 멋진 수사일 따름이다. 실상 문자만큼 추상적인 정보도 드물다. 내가 눈으로 본 것을 문자로 제아무리 꼼꼼히 기록하더라도 원래 모습을 온전히 복원할 수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지 않던가. 그럼에도 문자는 다른 종류의 감각 정보들의 호환에 유리한 수단이다. 말하자면 문자는 시각정보를 비롯하여 청각정보, 후각정보 모두를 ‘비록’ 추상화시킴에도 저장할 수 있다. 반대로 청각정보를 카메라로 저장할 수 없고, 시각정보를 축음기로 저장할 수는 없다. 당연히 향기도 마찬가지다. 후각정보를 온전히 저장하는 기계장치는 아직 없다. 그것이 ‘본래’ 불가능한지, 아니면 아직 방법을 찾지 못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언젠가는 카메라나 축음기처럼 냄새를 ‘통째로’ 저장하는 기계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이런 여러 맥락을 고려해 보면 포토그래피와 포노그래프는 참으로 놀라운 발명품이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르네상스형 기계가 가능할까?

르네상스형 기계가 가능할까?

르네상스형 기계가 가능할까?
02/03/2021
/ 박평종

언밸런스,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쪽 발이 길거나 짧으면 절뚝거리고, 젓가락 한쪽이 길거나 짧으면 젓가락질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고기만 먹거나 채소만 먹으면, 요컨대 균형 잡힌 식단을 유지하지 않으면 건강을 장담할 수 없다. 이처럼 균형의 중요성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나 실상 온전한 균형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신의 균형도 중요하다. 어른에게는 예절 바른데 아이에게 예의가 없다면 그 또한 언밸런스다.

학습의 불균형도 문제다. 법전을 달달 외워 법조인이 된 사람들이 ‘비상식적’ 판단을 내리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고교동창 의사 친구가 ‘고등학생처럼’ 말을 하는 걸 보고 한참 웃었던 적이 있는데 같은 이유다. ‘고매한’ 인문주의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플라톤에서 데리다까지 섭렵한 철학자들 중에는 카카오뱅크에 어떻게 가입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지식의 분화가 극단화된 현대사회에서 균형 잡힌 학습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맞다. 그래도 정도는 필요하다. 오래 전 컬투쇼에 소개됐던 에피소드 중 남자 친구와 헤어진 여인의 일화가 기억에 남아있다.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 없는 남자친구가 서신으로 진지하게 프로포즈를 했는데 그게 문제였다. 서신의 마지막 대목은 “내 평생의 반려자가 되어주오, 당신의 반남자로부터”였고, 이 ‘반여자’는 ‘반남자’의 무지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 이별을 선언했다는 얘기다.

AI의 탁월함은 특정 분야를 집중적으로 학습하여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었다는 데 있다. 알파고보다 바둑을 더 잘 두는 인간은 없고, 다른 분야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탁월함’은 ‘무능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알파고는 바둑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가까운 미래에 등장하게 될 수많은 AI, 요컨대 현재도 존재하지만 향후 더욱 ‘인간에 가까워질’ 지능형 비서나 자율주행차, AI 판사나 의사 등은 해당 분야에서 인간보다 뛰어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AI 판사는 고열 환자에게 해열제를 처방해야 한다는 상식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점이 큰 문제는 아니나 ‘종합적 판단’이 요구될 때 문제가 될 수 있다. 판사가 법전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말 속에 그 이유가 담겨있다.

그럼에도 이 ‘탁월한’ AI에게 모든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일단 자율주행차는 운전만 잘 하면 되고 AI 의사는 검진만 잘 하면 된다. 손흥민에게 야구까지 잘 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실상 AI에 비해 ‘비교적’ 균형을 유지하는 인간도 모든 면에서 언밸러스다. 난해한 하이데거는 이해하나 미적분은커녕 일차방정식도 풀지 못하는 철학자가 부지기수다. 드라마 스타트업에 나오는 프로그래머 ‘남도산’은 알고리즘 개발의 귀재지만 수익모델에 대한 아이디어를 전혀 내놓지 못한다. 물론 드라마 속 얘기지만 현실도 비슷하다.

지식의 분화가 진행되기 이전 이상적인 인간상은 이른바 르네상스형 인간, 말하자면 다양한 분야의 여러 지식을 고루 갖춘 ‘균형 있는’ 인간이었다. 원근법의 고안자로 알려진 알베르티는 회화와 건축은 물론이고 법학, 수학, 시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과 운동에도 뛰어났다. 한마디로 다재다능했다. 르네상스형 인간의 전형으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박식이 미친 분야는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어렵다. 이 ‘통합적’ 지식은 19세기까지도 유효해서 유럽 귀족층의 필수교육 과목은 그 종류도 많았다. 그런데 이후 지식의 분화가 시작되고 전문 분야의 지식이 고도화되면서 사정은 바뀌었다. 박식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아는 바보가 됐다. 한 우물만 파라는 말은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추기란 불가능하므로.

AI를 한마디로 인간의 사고과정을 모방한 기계로 정의한다면 어떤 사고를 모방할 것이냐가 문제다. 현재의 모델은 한 우물만 집중해서 파는 기계다. 그런데 르네상스형 인간의 사고를 모델로 삼는다면 어떨까. 물론 기술적으로는 어려울 게다. 허나 기술은 항상 한계를 극복해 왔다. 그렇다면 르네상스형 AI가 언젠가는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기계적인, 너무나 기계적인

기계적인, 너무나 기계적인

기계적인, 너무나 기계적인
12/09/2020
/ 박평종

 

뷔리당(Jean Buridan)의 당나귀, 양과 질이 같은 두 건초더미 사이에서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해 결국 굶어죽는다는 우화다.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면 두 건초더미는 등가의 가치를 지니므로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취할 수 없다는 역설로, 이성적 판단의 무력함을 환기시키고자 프랑스의 스콜라 철학자가 제시한 ‘엉뚱한’ 가설이다. 이성적 판단에만 의존할 때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인간은 비이성적이어서 양과 질이 같은 두 개의 밥그릇을 끌어안고 굶어죽지는 않는다. 이와 좀 다른 맥락에서 좀처럼 선택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햄릿증후군, 소위 결정 장애라 부르는 경우다. 의학적으로 검증된 합당한 용어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를 축약하면, “짜장이냐 짬뽕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쯤 되겠다. 햄릿증후군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어려운 선택이긴 하다. 하여 ‘영악한’ 인간들은 짬짜면을 내놓았다. 그러나 짬짜면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믿거나 말거나 그릇만 많이 팔렸다고 한다.

추천 알고리즘이 진화하면서 선택을 망설이는 이들의 고민을 덜어주고 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어떤 옷을 살지 고민할 때, 넷플릭스에서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주저할 때 추천 알고리즘은 대단히 ‘정확하게’ 우리의 취향을 간파하여 해당 품목을 제시한다. 추천 알고리즘의 ‘기술적’ 문제를 논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이 알고리즘은 나와 유사한 타인의 취향을 분석하거나, 이미 내가 선택했던 품목을 데이터로 활용해 그와 비슷한 목록을 작성하여 알려준다. “당신은 이런 취향이잖아”라고 말하는 셈이다. 한마디로 백발백중의 ‘취향저격자’다. 쇼핑몰의 알고리즘은 장바구니를 학습 데이터로 활용하고, 넷플릭스는 내가 ‘찜했던’ 목록에서 시작하여 한번 봤던 영화나 드라마를 근거로 나의 취향을 알려준다. 유튜브에서 동영상 한편을 클릭하면 같은 범주의 영상이 끝도 없이 밀려온다. 편리하긴 하다.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나아가 나도 몰랐던 내 취향을 기계가 알려주니 고맙기까지 하다.

실상 데이터는 대단히 정확해서 나의 판단보다 기계의 판단을 믿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데이터에 대한 신뢰는 공공기관을 비롯하여 기업이나 연구소 등 각 분야에서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이런 현상이 가속화되고 또 일반화되면 ‘데이터교’라는 신흥종교가 출현할 것이라고 풍자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데이터교’까지는 아니더라도 데이터 분석에 따라 최적의 솔루션을 찾아내어 적용하는 사례는 점차 확산되는 추세다. 이미 보편적인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럼 데이터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 인간의 불확실한 판단보다는 분명 낫다. 그러나 편향적인 데이터로 학습한 기계는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위험하다.1) 따라서 데이터 편향을 경계해야 한다.

 역으로 다른 문제가 또 있다. 추천 알고리즘이 제안하는 선택 목록들은 은연중에 우리를 기계화시키고 있다. 나의 장바구니에는 항상 비슷한 물건들만 쌓여있고, 유튜브 목록에는 늘 보아왔던 영상이 가득하다. 애써 검색하지 않아도 클릭 한번으로 내가 원했던 세계가 바로 열리므로 귀찮게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이는 이른바 확증편향과도 관계있다. 항상 접해왔던 정보를 반복해서 수용하다 보면 다른 정보는 믿지 않는 것이다. 정보를 기계적으로 수용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진정 가치 있는 정보란 내가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기계가 퍼 날라주는 정보만 수용하다보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런 질문 앞에서 뷔리당의 당나귀는 대답을 할 수 없겠지만 인간 아이는 “할머니가 좋아”라고 질문을 비틀 수 있다. 기계의 제안을 의심하고 회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아쉽게도 추천 알고리즘의 편리함에 인간은 너무 쉽게 익숙해져 버렸다. 기계적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1) 인공지능의 편향(Bias) 문제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른 칼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다룬 바 있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유쾌한 삑사리, 위험한 삑사리

유쾌한 삑사리, 위험한 삑사리

유쾌한 삑사리, 위험한 삑사리
11/18/2020
/ 박평종

 네이버 국어사전은 삑사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노래를 부를 때 흔히 고음에서 음정이 어긋나거나 잡소리가 섞이는 경우를 통속적으로 이르는 말”, 혹은 “기타와 같은 현악기를 연주할 때 손가락을 잘못 짚어 틱 하고 제 소리가 나지 않는 경우를 통속적으로 이르는 말”, 또는 “당구에서 큐가 미끄러져 공을 헛치는 경우를 통속적으로 이르는 말(=픽사리)”. 말하자면 삑사리는 실수를 뜻한다. 행위가 본래 목적했던 바를 이루지 못한 경우로 과녁을 맞히지 못한 겨냥이다. 의도에 반하여 벌어지는 사태이므로 ‘현상학적으로’ 말하자면 ‘비지향적’ 행위이기도 하다. 신중하지 못해서일까? 그렇지는 않다. 제아무리 조심성 있게 신중을 기하더라도 삑사리는 발생할 수 있다. 사람이 하는 일에 실수는 늘 따라다니게 마련이므로.

기계는 어떨까? 사람과 달리 기계는 삑사리를 내는 법이 없다. 만약 기계가 삑사리를 낸다면 그 기계는 잘못 만들어졌거나 고장 났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기계가 인간을 모방하면서 기이한 사태가 발생한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그 예다. SF 소설이나 영화에서 즐겨 다루는 주제라 우리에게 익숙한 존재이기도 하다. 예컨대 아시모프의 단편 <이성(Reason)>에 등장하는 로봇 큐티는 인간이 자기보다 열등하므로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진화한 로봇이 그리 생각하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도 인간보다 우월하고 ‘정신적으로도’ 합리적인 로봇이 ‘열등한’ 인간을 무시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영화 <Her>에 등장하는 AI 사만다의 ‘고귀한’ 정신세계를 인간 남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삑사리를 남발하는 인간이 그 정교한 ‘존재’의 눈에는 얼마나 하찮게 보일 것인가.

그러나 삑사리 없는 세상은 삭막하기 그지없다. 위의 네이버 사전이 정의하듯 “당구에서 큐가 미끄러져 공을 헛치는” 행위는 얼마나 인간적인가. 게임의 목적은 승리를 쟁취하는 데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가다머는 통찰력 있는 분석을 통해 게임의 본질은 유희에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유희가 노동의 세계와의 일시적 단절을 통해 재충전의 시간을 제공하는 데 있다면 이기고 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겨야만 하는 게임이라면 그것은 또 다른 노동일 수 있다. 따라서 게임, 혹은 좀 더 넓은 의미에서의 유희는 노동의 망각, 목적지향성으로부터의 일탈을 중요한 가치로 삼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삑사리는 유희의 가치를 극대화시킨다. 일상에서 삑사리가 나면 얼마나 유쾌한가. 물론 당연히 ‘중대한’ 노동의 세계에서 삑사리는 파국으로 연결된다. 하여 삑사리는 ‘사소한’ 행위, 요컨대 유희의 세계에서만 용인된다. 그리고 드물게 발생했을 때만 가치 있다. 자주 나오는 삑사리는 삑사리라 할 수 없다. 또한 ‘일부러’ 내는 삑사리는 가짜다.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의도의 저편에서 날아오는 것이 삑사리다.

한편 산업의 차원에서 기계의 실수는 용납될 수 없다. 그런데 기계가 인간의 사고를 모방하면서 삑사리가 날 여지는 날로 커지고 있다. 기계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봇 큐티의 ‘우월주의적’ 사고도 인간의 관점에서는 삑사리의 일종이다. 그 기계를 설계한 자의 의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가하지 않아야 한다는 로봇공학 3원칙도 효력을 갖지 못한다. 초인공지능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당장의 문제는 기계가 범할 수 있는 좀 더 ‘작은’ 삑사리들이다. 컴퓨터의 ‘버그’가 전형적인 예다. 이 ‘사소한’ 삑사리는 언제라도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 인간이 삑사리를 피할 수 없다면 바로 그 인간을 모방하여 만든 AI도 당연히 삑사리를 낼 수 있다. 물론 기계는 인간보다 삑사리를 낼 확률이 적다. 그러나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기계에게 모든 것을 맡겨두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겉 다르고 속 다른 기계

겉 다르고 속 다른 기계

겉 다르고 속 다른 기계
10/28/2020
/ 박평종

드라마 <비밀의 숲>에 등장하는 검사 황시목은 어린 시절 뇌수술을 받아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로 설정됐다. 당연히 감정 표현도 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모든 상황에서 무표정이다. 감정이 없는 인물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도 넓은 의미에서는 그런 경우로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통 기계 같다고 말한다. 기계에게 감정이 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기계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감정의 배제다. 본래 없으니 굳이 배제할 필요도 없지만.

기계 같은 인간이란 말은 당사자에게 모멸적인 표현이나 본래 인간은 기계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던 유물론자들이 있다. 인간의 신체가 물질로 구성돼 있는 한 인간과 기계는 동격이라는 것이다. 18세기 프랑스의 급진적 유물론자 라 메트리는 <인간기계(L’Homme-Machine)>론에서 인간은 ‘복합기계’라는 명제를 내놓는다. 이런 생각은 17세기의 대표적 기계론자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을 급진적으로 확장시킨 결과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기계를 구성하는 부품들을 동물의 신체 속에 있는 뼈와 근육, 신경, 동맥, 혈관 등과 비교할 때 신체를 기계로 간주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동물의 신체와 정교한 기계의 구조는 같다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다를까? 별반 다르지 않지만 문제는 ‘영혼’이다. 인간은 동물에게 없는 ‘영혼’을 가졌으며 신체와 따로 존재한다. 요컨대 인간은 영혼을 갖기 때문에 동물기계와 다르다는 것이다. 한편 라 메트리는 ‘영혼’ 개념을 버린다. <영혼의 자연사>에서 그는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는 동물’이 될 수 있었는지 논증해 나간다. 핵심을 요약하자면 모든 것은 물질에서 출발한다. 신체를 구성하는 물질은 자체로 운동의 원리를 갖고 있다. 물질로 구성된 감각기관은 외부 자극에 대한 감각을 통해 ‘감각관념’을 형성하고 각각의 관념에 대한 비교와 기억을 통해 원초적인 사고로 발전한다. 뇌 용적이 큰 동물과 작은 동물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그는 인간이 어느 ‘단계’에서 복합적 사고가 가능한 ‘동물’로 이행했다고 주장한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생각이다. 

19세기의 생리학자 기욤 뒤셴 드 불로뉴도 인간의 감정 표현, 즉 표정이 ‘내면세계’와 연결돼 있다는 통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국부적인 근육마비를 치료하기 위해 전기 자극 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그는 ‘내부 자극’ 아닌 ‘외부자극’이 다양한 표정 변화를 야기하는 현상에 주목했다.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데도 전기 자극만으로 기쁨과 슬픔, 놀라움, 분노를 드러내는 표정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 관점을 수용하면 감정을 느끼는 문제와 별개로 기계, 예컨대 로봇도 감정 표현이 가능하다.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한마디로 겉 다르고 속 다른 기계다.

인간은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운다. 기쁠 때 우는 인간, 반대로 슬플 때 웃는 인간을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표정은 ‘내면세계’의 반영이라는 전통적인 관념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런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도 있고 감정 표현이 가능한 기계도 가능하다면 마냥 ‘내면’과 ‘외면’이 연동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만은 없다. ‘포커 페이스’에 능란한 기계를 상상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인간을 속이는 기계에 관한 얘기는 SF 영화의 단골메뉴다. 예컨대 <에일리언 커버넌트>의 데이빗은 스스로 조물주가 되고자 했던 인공지능 로봇이다. 최근 가장 ‘인간에 가까운’ 인공지능으로 평가받는 GPT-3는 인터뷰 과정에서 능수능란하게 거짓말을 하고 인터뷰어를 ‘기만’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수년 전 방한했던 감정로봇 소피아 역시 인간을 당혹케 하는 발언을 쏟아낸 경력이 있다. 인공지능이 자연지능의 모방이라는 점에서, 말하자면 인간의 사고과정에 대한 ‘탁월한’ 모방이라는 점에서 이상할 것도 없다. 본래 인간은 겉 다르고 속 다른 ‘동물’이기에 그를 모방한 기계 또한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역으로 말하자면 겉과 속이 같은 기계는 인간의 사고를 ‘충실히’ 모방했다고 볼 수 없다. 그런 기계는 실패작, 요컨대 고장 난 기계다. 그러나 실상은 반대다. 인간은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기계를 만들었으므로. 즉 겉 다르고 속 다른 기계가 고장 난 기계라는 뜻이다. 고장 난 기계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한마디로 두려운 기계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