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적인, 너무나 기계적인

기계적인, 너무나 기계적인

기계적인, 너무나 기계적인
12/09/2020
/ 박평종

 

뷔리당(Jean Buridan)의 당나귀, 양과 질이 같은 두 건초더미 사이에서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해 결국 굶어죽는다는 우화다.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면 두 건초더미는 등가의 가치를 지니므로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취할 수 없다는 역설로, 이성적 판단의 무력함을 환기시키고자 프랑스의 스콜라 철학자가 제시한 ‘엉뚱한’ 가설이다. 이성적 판단에만 의존할 때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인간은 비이성적이어서 양과 질이 같은 두 개의 밥그릇을 끌어안고 굶어죽지는 않는다. 이와 좀 다른 맥락에서 좀처럼 선택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햄릿증후군, 소위 결정 장애라 부르는 경우다. 의학적으로 검증된 합당한 용어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를 축약하면, “짜장이냐 짬뽕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쯤 되겠다. 햄릿증후군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어려운 선택이긴 하다. 하여 ‘영악한’ 인간들은 짬짜면을 내놓았다. 그러나 짬짜면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믿거나 말거나 그릇만 많이 팔렸다고 한다.

추천 알고리즘이 진화하면서 선택을 망설이는 이들의 고민을 덜어주고 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어떤 옷을 살지 고민할 때, 넷플릭스에서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주저할 때 추천 알고리즘은 대단히 ‘정확하게’ 우리의 취향을 간파하여 해당 품목을 제시한다. 추천 알고리즘의 ‘기술적’ 문제를 논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이 알고리즘은 나와 유사한 타인의 취향을 분석하거나, 이미 내가 선택했던 품목을 데이터로 활용해 그와 비슷한 목록을 작성하여 알려준다. “당신은 이런 취향이잖아”라고 말하는 셈이다. 한마디로 백발백중의 ‘취향저격자’다. 쇼핑몰의 알고리즘은 장바구니를 학습 데이터로 활용하고, 넷플릭스는 내가 ‘찜했던’ 목록에서 시작하여 한번 봤던 영화나 드라마를 근거로 나의 취향을 알려준다. 유튜브에서 동영상 한편을 클릭하면 같은 범주의 영상이 끝도 없이 밀려온다. 편리하긴 하다.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나아가 나도 몰랐던 내 취향을 기계가 알려주니 고맙기까지 하다.

실상 데이터는 대단히 정확해서 나의 판단보다 기계의 판단을 믿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데이터에 대한 신뢰는 공공기관을 비롯하여 기업이나 연구소 등 각 분야에서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이런 현상이 가속화되고 또 일반화되면 ‘데이터교’라는 신흥종교가 출현할 것이라고 풍자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데이터교’까지는 아니더라도 데이터 분석에 따라 최적의 솔루션을 찾아내어 적용하는 사례는 점차 확산되는 추세다. 이미 보편적인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럼 데이터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 인간의 불확실한 판단보다는 분명 낫다. 그러나 편향적인 데이터로 학습한 기계는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위험하다.1) 따라서 데이터 편향을 경계해야 한다.

 역으로 다른 문제가 또 있다. 추천 알고리즘이 제안하는 선택 목록들은 은연중에 우리를 기계화시키고 있다. 나의 장바구니에는 항상 비슷한 물건들만 쌓여있고, 유튜브 목록에는 늘 보아왔던 영상이 가득하다. 애써 검색하지 않아도 클릭 한번으로 내가 원했던 세계가 바로 열리므로 귀찮게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이는 이른바 확증편향과도 관계있다. 항상 접해왔던 정보를 반복해서 수용하다 보면 다른 정보는 믿지 않는 것이다. 정보를 기계적으로 수용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진정 가치 있는 정보란 내가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기계가 퍼 날라주는 정보만 수용하다보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런 질문 앞에서 뷔리당의 당나귀는 대답을 할 수 없겠지만 인간 아이는 “할머니가 좋아”라고 질문을 비틀 수 있다. 기계의 제안을 의심하고 회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아쉽게도 추천 알고리즘의 편리함에 인간은 너무 쉽게 익숙해져 버렸다. 기계적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1) 인공지능의 편향(Bias) 문제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른 칼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다룬 바 있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유쾌한 삑사리, 위험한 삑사리

유쾌한 삑사리, 위험한 삑사리

유쾌한 삑사리, 위험한 삑사리
11/18/2020
/ 박평종

 네이버 국어사전은 삑사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노래를 부를 때 흔히 고음에서 음정이 어긋나거나 잡소리가 섞이는 경우를 통속적으로 이르는 말”, 혹은 “기타와 같은 현악기를 연주할 때 손가락을 잘못 짚어 틱 하고 제 소리가 나지 않는 경우를 통속적으로 이르는 말”, 또는 “당구에서 큐가 미끄러져 공을 헛치는 경우를 통속적으로 이르는 말(=픽사리)”. 말하자면 삑사리는 실수를 뜻한다. 행위가 본래 목적했던 바를 이루지 못한 경우로 과녁을 맞히지 못한 겨냥이다. 의도에 반하여 벌어지는 사태이므로 ‘현상학적으로’ 말하자면 ‘비지향적’ 행위이기도 하다. 신중하지 못해서일까? 그렇지는 않다. 제아무리 조심성 있게 신중을 기하더라도 삑사리는 발생할 수 있다. 사람이 하는 일에 실수는 늘 따라다니게 마련이므로.

기계는 어떨까? 사람과 달리 기계는 삑사리를 내는 법이 없다. 만약 기계가 삑사리를 낸다면 그 기계는 잘못 만들어졌거나 고장 났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기계가 인간을 모방하면서 기이한 사태가 발생한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그 예다. SF 소설이나 영화에서 즐겨 다루는 주제라 우리에게 익숙한 존재이기도 하다. 예컨대 아시모프의 단편 <이성(Reason)>에 등장하는 로봇 큐티는 인간이 자기보다 열등하므로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진화한 로봇이 그리 생각하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도 인간보다 우월하고 ‘정신적으로도’ 합리적인 로봇이 ‘열등한’ 인간을 무시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영화 <Her>에 등장하는 AI 사만다의 ‘고귀한’ 정신세계를 인간 남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삑사리를 남발하는 인간이 그 정교한 ‘존재’의 눈에는 얼마나 하찮게 보일 것인가.

그러나 삑사리 없는 세상은 삭막하기 그지없다. 위의 네이버 사전이 정의하듯 “당구에서 큐가 미끄러져 공을 헛치는” 행위는 얼마나 인간적인가. 게임의 목적은 승리를 쟁취하는 데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가다머는 통찰력 있는 분석을 통해 게임의 본질은 유희에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유희가 노동의 세계와의 일시적 단절을 통해 재충전의 시간을 제공하는 데 있다면 이기고 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겨야만 하는 게임이라면 그것은 또 다른 노동일 수 있다. 따라서 게임, 혹은 좀 더 넓은 의미에서의 유희는 노동의 망각, 목적지향성으로부터의 일탈을 중요한 가치로 삼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삑사리는 유희의 가치를 극대화시킨다. 일상에서 삑사리가 나면 얼마나 유쾌한가. 물론 당연히 ‘중대한’ 노동의 세계에서 삑사리는 파국으로 연결된다. 하여 삑사리는 ‘사소한’ 행위, 요컨대 유희의 세계에서만 용인된다. 그리고 드물게 발생했을 때만 가치 있다. 자주 나오는 삑사리는 삑사리라 할 수 없다. 또한 ‘일부러’ 내는 삑사리는 가짜다.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의도의 저편에서 날아오는 것이 삑사리다.

한편 산업의 차원에서 기계의 실수는 용납될 수 없다. 그런데 기계가 인간의 사고를 모방하면서 삑사리가 날 여지는 날로 커지고 있다. 기계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봇 큐티의 ‘우월주의적’ 사고도 인간의 관점에서는 삑사리의 일종이다. 그 기계를 설계한 자의 의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가하지 않아야 한다는 로봇공학 3원칙도 효력을 갖지 못한다. 초인공지능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당장의 문제는 기계가 범할 수 있는 좀 더 ‘작은’ 삑사리들이다. 컴퓨터의 ‘버그’가 전형적인 예다. 이 ‘사소한’ 삑사리는 언제라도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 인간이 삑사리를 피할 수 없다면 바로 그 인간을 모방하여 만든 AI도 당연히 삑사리를 낼 수 있다. 물론 기계는 인간보다 삑사리를 낼 확률이 적다. 그러나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기계에게 모든 것을 맡겨두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겉 다르고 속 다른 기계

겉 다르고 속 다른 기계

겉 다르고 속 다른 기계
10/28/2020
/ 박평종

드라마 <비밀의 숲>에 등장하는 검사 황시목은 어린 시절 뇌수술을 받아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로 설정됐다. 당연히 감정 표현도 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모든 상황에서 무표정이다. 감정이 없는 인물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도 넓은 의미에서는 그런 경우로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통 기계 같다고 말한다. 기계에게 감정이 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기계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감정의 배제다. 본래 없으니 굳이 배제할 필요도 없지만.

기계 같은 인간이란 말은 당사자에게 모멸적인 표현이나 본래 인간은 기계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던 유물론자들이 있다. 인간의 신체가 물질로 구성돼 있는 한 인간과 기계는 동격이라는 것이다. 18세기 프랑스의 급진적 유물론자 라 메트리는 <인간기계(L’Homme-Machine)>론에서 인간은 ‘복합기계’라는 명제를 내놓는다. 이런 생각은 17세기의 대표적 기계론자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을 급진적으로 확장시킨 결과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기계를 구성하는 부품들을 동물의 신체 속에 있는 뼈와 근육, 신경, 동맥, 혈관 등과 비교할 때 신체를 기계로 간주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동물의 신체와 정교한 기계의 구조는 같다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다를까? 별반 다르지 않지만 문제는 ‘영혼’이다. 인간은 동물에게 없는 ‘영혼’을 가졌으며 신체와 따로 존재한다. 요컨대 인간은 영혼을 갖기 때문에 동물기계와 다르다는 것이다. 한편 라 메트리는 ‘영혼’ 개념을 버린다. <영혼의 자연사>에서 그는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는 동물’이 될 수 있었는지 논증해 나간다. 핵심을 요약하자면 모든 것은 물질에서 출발한다. 신체를 구성하는 물질은 자체로 운동의 원리를 갖고 있다. 물질로 구성된 감각기관은 외부 자극에 대한 감각을 통해 ‘감각관념’을 형성하고 각각의 관념에 대한 비교와 기억을 통해 원초적인 사고로 발전한다. 뇌 용적이 큰 동물과 작은 동물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그는 인간이 어느 ‘단계’에서 복합적 사고가 가능한 ‘동물’로 이행했다고 주장한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생각이다. 

19세기의 생리학자 기욤 뒤셴 드 불로뉴도 인간의 감정 표현, 즉 표정이 ‘내면세계’와 연결돼 있다는 통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국부적인 근육마비를 치료하기 위해 전기 자극 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그는 ‘내부 자극’ 아닌 ‘외부자극’이 다양한 표정 변화를 야기하는 현상에 주목했다.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데도 전기 자극만으로 기쁨과 슬픔, 놀라움, 분노를 드러내는 표정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 관점을 수용하면 감정을 느끼는 문제와 별개로 기계, 예컨대 로봇도 감정 표현이 가능하다.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한마디로 겉 다르고 속 다른 기계다.

인간은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운다. 기쁠 때 우는 인간, 반대로 슬플 때 웃는 인간을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표정은 ‘내면세계’의 반영이라는 전통적인 관념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런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도 있고 감정 표현이 가능한 기계도 가능하다면 마냥 ‘내면’과 ‘외면’이 연동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만은 없다. ‘포커 페이스’에 능란한 기계를 상상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인간을 속이는 기계에 관한 얘기는 SF 영화의 단골메뉴다. 예컨대 <에일리언 커버넌트>의 데이빗은 스스로 조물주가 되고자 했던 인공지능 로봇이다. 최근 가장 ‘인간에 가까운’ 인공지능으로 평가받는 GPT-3는 인터뷰 과정에서 능수능란하게 거짓말을 하고 인터뷰어를 ‘기만’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수년 전 방한했던 감정로봇 소피아 역시 인간을 당혹케 하는 발언을 쏟아낸 경력이 있다. 인공지능이 자연지능의 모방이라는 점에서, 말하자면 인간의 사고과정에 대한 ‘탁월한’ 모방이라는 점에서 이상할 것도 없다. 본래 인간은 겉 다르고 속 다른 ‘동물’이기에 그를 모방한 기계 또한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역으로 말하자면 겉과 속이 같은 기계는 인간의 사고를 ‘충실히’ 모방했다고 볼 수 없다. 그런 기계는 실패작, 요컨대 고장 난 기계다. 그러나 실상은 반대다. 인간은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기계를 만들었으므로. 즉 겉 다르고 속 다른 기계가 고장 난 기계라는 뜻이다. 고장 난 기계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한마디로 두려운 기계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취향일까, 편향일까

취향일까, 편향일까

취향일까, 편향일까
10/07/2020
/ 박평종

알파고 이후 인공지능은 바둑의 기준이 됐다. 프로기사들은 인공지능의 기보를 보고 배우며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나갈 정도다. 바둑대회에서 프로기사들이 해설을 할 때도 인공지능의 ‘훈수’를 참고로 제시한다. 나아가 다음에 둘 최선의 수를 예측할 때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수와 겹치면 뿌듯해하기도 한다. 알파고는 인간을 모델로 바둑을 배웠지만 이제 인공지능이 인간의 모델로 역전된 셈이다. 그런데 인간 ‘고수’들은 하나같이 인공지능의 바둑에는 기풍, 말하자면 ‘스타일’이 없다고 말한다. ‘대가’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기사들에게는 자기만의 기풍이 있다. 이창호의 계산과 인내, 이세돌의 치열함과 날카로움 등이 그것이다. 왜 인간 기사에게 인공지능은 스타일이 없다고 느껴질까? 나아가 ‘스타일’이란 무엇일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말투와 행동, 옷 입는 양식, 사고방식 등 스타일은 사람의 디테일 곳곳에 스며있다. 예술가의 스타일도 있다. 소위 ‘화풍’이라는 것도 스타일이며, 즐겨 다루는 소재나 주제에도 스타일이 개입한다. 말하자면 스타일은 개인을 규정한다. 그리고 그 스타일은 취향에서 나온다. 취향은 반복을 통해 형성된다. 무엇을 수용하고 배제하는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취향이 형성되고 스타일은 그 결과로 몸에 밴 것이다. 실상 사람은 취향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마르셀 뒤샹, 병건조대, 1914

취향의 문제에 대해 깊이 성찰한 이는 마르셀 뒤샹인데, 레디메이드는 이 문제와 깊이 연결돼 있다. 뒤샹은 오브제(레디메이드)의 선택이 취향의 부재 상태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사람이 어떤 대상과 관계할 때 필연적으로 취향이 개입한다. 어떤 물건을 며칠만 옆에 두더라도 이내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취향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저 무관심하다는 뜻이다. 결국 무관심한 상태에서 선택한다는 것은 ‘기계적으로’ 선택한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뒤샹은 기계주의자다.

인공지능의 선택은 ‘당연히’ 기계적이다. 기계이므로. 그런데 이 기계는 학습을 통해 선택의 룰을 배웠다. 이 때 그가 배운 룰은 ‘최선’을 찾아내는 것이다. 최선은 바둑판 위에서 하나뿐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 경우 중에서 ‘취향’에 따라 마음에 드는 하나를 선택한다.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 나아가 차선이나 차악, 심지어 최악일 경우라도 자기 취향에 부합하면 단호히 그것을 선택하기도 한다. 기계가 아니므로. 인공지능에 스타일이 없다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인간의 데이터로 배운 기계에 인간의 취향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기계학습 데이터를 제공한 사람이 무수히 많다는 점에서 그럴 수 있다. 소위 ‘빅데이터’니까 말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편향성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 편향(bias) 문제는 인공지능의 기계학습에서 주요 쟁점으로 지적되고 있으며, 그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렇다면 편향도 취향의 일종일까? 좋은 취향이 있고, 나쁜 취향도 있으며, 특이한 취향이나 이상한 취향도 있다. 사람은 자기 취향과 다르면 나쁜 취향이라 규정한다. 보편적이지 않으면 특이한 취향, 모르면 이상한 취향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편향은 좀 다른 문제다. 취향은 풍부하고 다양한, 때로는 서로 가치가 충돌하는 대상들에 대한 반복적 경험의 과정에서 형성된다. 편향은 이 다양하고 상이한 경험이 없을 때 생겨난다. 편식을 하면 영양 부족이 되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비슷한 데이터만 제공하고 기계학습을 시켰을 때 인공지능은 편향에 빠진다. 그렇다면 다양하고 풍부한 데이터로 학습한 기계는 취향을 가질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인공지능도 언젠가 자기 스타일을 갖게 될 것이다. 물론 알고리즘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눈에’는 스타일을 지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강요된’ 스타일, ‘설계된’ 스타일이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모방의 시대가 올까?

모방의 시대가 올까?

모방의 시대가 올까?
09/09/2020
/ 박평종

[도판1] 넥스트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

예술교육 무용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교육이 창의적인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오히려 교육은 새로운 사고를 펼쳐나가는 데 방해만 될 뿐이라고 강조한다. 이를 한마디로 축약하면 ‘아는 것이 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럴 듯한 말이다. 이런 주장은 예술작품의 가치를 ‘독창성’에서 찾는 소위 모더니즘 예술 패러다임의 틀 속에서 나온 것이다.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사고, 새로운 감성을 제안하고자 할 때 지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발상이다. 이 ‘독창성’ 패러다임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으며 우리 시대 예술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견고한 틀이다. 이런 사고의 틀 속에서는 남과 달라야만, 나아가 ‘특이해야만’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도판2] 딥드림이 생산한 이미지

인공지능이 예술작품 생산에 개입하면서 이 ‘독창성’ 패러다임이 언제까지 유효할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시기다. 이미 인공지능이 생산한 예술이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실상 인공지능은 무수한 데이터, 말하자면 과거의 예술작품을 학습하여 결과물을 산출한다. 예컨대 넥스트 렘브란트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딥러닝으로 ‘학습’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즉 이 기계 예술가의 그림은 렘브란트의 화법, 요컨대 렘브란트 스타일을 모방한 것이다. 구글의 딥드림 역시 유명 화가들의 화법을 학습하여 주문자의 요구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제공한다. 고흐 스타일이나 모네 스타일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미술사가나 평론가들은 이렇게 생산된 ‘작품’은 결코 예술이 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유명 화가들의 스타일을 모방했기 때문이다. ‘독창성’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시대니 당연한 얘기다.

 그런데 실상 이 ‘독창성의 제국’은 19세기에 와서야 시작됐다. 이전에는 ‘모방’ 패러다임이 예술작품의 가치를 결정했다. 미의 이상형이 있고 그것은 이미 고전주의 시대에 완성돼 있었다. 더 정확히는 그에 대한 ‘규범’이 있었다. 따라서 이후의 예술은 이 ‘결정된’ 이상형을 충실히 모방함으로써 충분했다. 제대로 모방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이 패러다임에서는 교육과 학습이 중요했다. 그리고 충실한 모방을 위해서는 반복적인 훈련을 요구했다. 미술 아카데미의 규범이 있고, 그 규범을 따라야만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거장’들의 아뜰리에에서 그 규범을 학습하는 것이 예술가들에게 요구됐던 주요 덕목이었다. 이 패러다임은 19세기에 와서야 해체됐다. 말하자면 ‘독창성’이 ‘모방’을 대체했다. 모방은 예술의 가치를 저해하는 요소로 금기시됐다. 그런데 이제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이 ‘독창성의 제국’에 균열을 낼 조짐이다. 물론 아직 ‘독창성’ 규범을 고수하는 이들은 학습을 통해 모방을 일삼는 이 ‘모방기계’의 생산물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이 차이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할까? 실상 예술가들은 과거 예술가들이 구축해 왔던 무수한 규칙과 질서를 학습한 후 그것을 새롭게 이해하고 또 재구성함으로써 자기만의 규칙을 세워나간다. 그것이 예를 들면 렘브란트의 스타일이나 고흐의 스타일이다. 그런 점에서 모방과 학습은 창의성의 전제 조건일 수 있다. 말하자면 모든 문화적 생산물은 기원이 있고 따라서 파생적이다. 그렇다면 학습량이 많은 기계가 창의적인 작품을 생산할 수 있는 개연성도 커진다.

우리 시대의 독창성 패러다임이 인공지능 예술의 등장으로 무너지고 다시 모방 패러다임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전자가 영속적으로 지속될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또한 현재의 ‘모방기계’가 진화를 거듭하여 언젠가는 ‘인간예술가’보다 창의적인 작품을 생산하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알파고 이후 프로바둑 기사들은 인공지능이 찾아내는 ‘최선의’ 수에 담긴 창의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는 형편이니 말이다. 기계가 바둑을 더 잘 둔다고 바둑게임이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기계가 예술작품을 생산한다 해서 크게 달라질 일은 없을 것 같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자연의 경이

자연의 경이

자연의 경이
08/19/2020
/ 박평종

갈라파고스

갈라파고스

알고리즘 기반의 이미지 생산 방식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스스로’ 이미지 정보를 생산한다는 뜻인데, 이는 거창하게 말하자면 ‘문명사적’ 변화다. 본래 이미지는 자연 속에서 저절로 생성된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땅에 떨어져 남긴 흔적이나 동물 발자국 등이 그 예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기호라 불렀다. 선사시대 동굴 벽화처럼 사람이 ‘의도’를 갖고 생산한 이미지도 있다. 소위 ‘그림’이라 부르는 기호다. 인류가 생산, 축적해 온 이미지의 대부분이 그것이다. 19세기에 사진이 발명되면서 이미지 생산의 ‘혁명’이 시작됐다. 속도와 양의 측면에서 사진은 그림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했으나 정작 이미지 생산 과정에 사람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대폭 줄어들었다. 기계가 찍기 때문이다. 그런데 컴퓨터 프로그램이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다른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프로그램은 사전에 정해놓은 규칙을 뜻한다. TV프로그램이 앞으로 방영될 방송목록들을 미리 알려주듯이 말이다. 프로그램에 없는 내용이 방영되면 규칙 위반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의 제약은 훨씬 까다롭다. 프로그램은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명령어들의 집합인 까닭에 규칙을 위반하면 오작동 한다. 버그가 그 예고, 바이러스는 오작동을 일으키기 위해 프로그램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수단이다. 말하자면 프로그램은 시키는 대로만 하며, 역으로 시키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다. 이것이 프로그램 이론의 기본 뼈대다. 컴퓨터의 창의성에 관한 논의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즉 프로그램에 따라 정보를 처리하는 컴퓨터가 시키지 않은 새로운 정보를 생산할 수 있을까?

당연히 양 진영으로 나뉜다. 가능성을 믿는 자들의 실험적인 시도가 있다. 예컨대 MIT 미디어랩의 컴퓨터 공학자 칼 심스(Karl Sims)는 1990년대 초반부터 진화 알고리즘(Evolutionary algorithm)을 활용한 예술 창작에 몰두해 왔다. <팬스퍼미아(Panspermia)>(1990), <진화한 가상생명(Evolved virtual creature)>(1994), <갈라파고스(Galapagos)>(1997) 등이 대표적이다. 주제와 논리는 유사하므로 <갈라파고스>를 통해 작품의 요지를 살펴보자.

갈라파고스

팬스퍼미아

다윈의 진화론을 암시하는 제목의 이 작품은 12개의 컴퓨터 모니터로 구성된다. 각 모니터 화면은 유전 알고리즘(Genetic algorithm)에 따라 무작위로 산출된 인공생명체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관람자는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선택할 수 있고 선택받은 개체(인공생명)는 살아남아 가상공간에서 진화해 나간다. 진화는 교배와 번식을 통해 자신의 유전자 정보를 후손에게 물려주면서 진행된다. 반대로 선택받지 못한 개체는 도태된다. 즉 소멸한다. 이 과정에서 관람자와 컴퓨터 프로그램의 역할이 나뉜다. 관람자는 아름다운 개체를 선택함으로써 미적인 정보의 공급자가 된다. 한편 컴퓨터는 그렇게 제공된 정보를 바탕으로 인공유기체의 유전자를 결정하고 성장과 번식 등 진화 과정 전체를 조율한다. 이 때 알고리즘은 이전에 산출됐던 개체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다. 말하자면 <갈라파고스>를 주도하는 유전 알고리즘은 항상 새로운 개체를 산출한다. 칼 심스가 유전 알고리즘의 창의적 가능성을 주장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요컨대 자연의 생물학적 진화가 ‘본질적으로’ 새롭다면 이를 시뮬레이션 하는 인공 진화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움이 늘 예술의 창의성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새로워도 창의적이지 않을 수 있고, 반대로 낡은 것이 창의적일 때가 있다. 문제는 새로움(혹은 낡음)이 그 공간의 규범 속에서 어떻게 수용되느냐에 달려있다. 또 다른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실상 <갈라파고스>는 끊임없이 새로운 이미지를 산출하고 선택을 통해 ‘진화’하지만 무수한 그 이미지들 사이에는 어떤 시각적 유사성도 없다. 요컨대 스타일이 없다. 예술가의 스타일을 중시하는 현재의 패러다임 속에서 이 새로운 이미지들은 단지 ‘우연’의 산물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험적 작업의 미래는 열려있다. 엄밀한 규칙들의 집합인 알고리즘이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을 산출할 수 있다는 사실은 프로그램 기반 예술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