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첩이 사라졌다

사진첩이 사라졌다

사진첩이 사라졌다
02/19/2019
/ 박평종

사진첩이 사라지고 있다. 아니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미 일상의 기념사진을 모아 앨범 속에 간직하는 행위는 찾아보기 어렵다. 졸업앨범을 만들거나 하는 ‘제도’로서의 사진첩은 남아있지만 의미는 크게 퇴색했다. 게다가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기 위해 그 사진첩을 들춰보는 이는 거의 없다. ‘기념사진’이 가족의 유대를 강화시켜 주는 수단으로 작용했다는 부르디외의 사회학적 진단은 이제 ‘낡은’ 학설이 됐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을까? 가족공동체가 약화됐기 때문일까? 하지만 가족과 상관없는 기념사진 영역, 예컨대 여행사진에서도 앨범은 사라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진을 과거의 시간과 연계시켜 주어왔던 ‘물질성’의 박탈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말하자면 과거 사진첩의 형태로 보존해 오던 과거의 이미지들은 인화지라는 종이에 달라붙어 있었으나, 이제 그 이미지는 디지털 데이터로 바뀌었다. 그 ‘데이터 이미지’를 통해 과거를 회상하려면 모니터를 켜야 한다. 키나 버튼을 누르면 과거는 복원되고 다시 누르거나 코드를 뽑으면 과거는 눈앞에서 사라진다. 그 이미지는 물질성을 갖지 못한 일종의 환영과도 같다.

실상 정보(소리, 글, 이미지 등)는 ‘어딘가에’ 저장되어야 확산과 발전이 가능하다. 문명의 발전은 바로 이 정보의 ‘저장’ 덕분에 가능했다. 이를 가능케 해 준 것이 바로 매체다. 매체의 핵심 기능은 정보의 전달(커뮤니케이션)에 앞서 저장에 있다. 캐나다 학파의 연구에 따르면 구술문화 시대에는 정보 저장 매체의 부재로 과거와의 단절이 있었고, ‘장소’에 묶여 있어 공간적 확산도 불가능했다. 문자를 최초의 매체로 규정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최초의 저장 매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건은 문자의 물질성이다. 물질을 매개로 문자 정보는 시간을 초월하여 광범위한 공간적 확산이 가능했다. 키틀러가 축음기를 가장 중요한 매체 중의 하나로 꼽는 이유도 그 정보의 저장 때문이다. 소리는 본래 발화와 동시에 사라지는 정보였지만 축음기는 그 한시적 정보를 ‘통째로’, 말하자면 과거의 시간과 더불어 저장할 수 있게 했다.

사진도 같은 맥락에서 탁월한 매체다. 축음기와 달리 비록 순간의 시간이지만 과거를 이미지 정보로 온전히 저장한 최초의 매체인 것이다. 저장 방식은 종이라는 물질을 통해서다. 물론 최초의 사진은 종이가 아니라 금속판(다게레오타입)이라는 물질을 활용했지만 곧 종이로 대체됐다. 하지만 이제 종이라는 물질은 사진 정보의 저장에서 더 이상 독점적인 지위를 지니지 못한다. 디지털 매체가 종이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으며, 범위는 상상을 넘어설 정도다. 아날로그 시대의 사진은 물질과 결합돼 있었다. 즉 종이라는 물질 자체가 사진이었다. 따라서 사진에 담긴 정보를 저장하기 위해서는 종이라는 물질을 보존해야 했다. 하지만 물질은 시간이 흐르면 훼손된다. 물질성을 지닌 정보를 보존하는 것이 힘든 이유다. 반면 물질성을 갖지 않는 디지털 데이터의 경우 사정은 전혀 다르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데이터가 변형되지 않는 까닭에 정보의 훼손과 변질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물질에 달라붙어 있지 않아 그 정보는 무한히 ‘가벼워’ 전달도 용이하다. 어떤 점에서 물질성을 떠난 디지털 사진은 ‘순수한’ 정보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사진의 정보는 종이라는 물질과 전혀 상관없는 가상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매체가 지닌 또 다른 특성은 정보의 호환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아날로그 매체의 경우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정보들은 소리나 문자, 이미지로 구분돼 상호 호환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디지털 매체에서 각기 상이한 형태의 이 정보들은 모두 0과 1의 조합을 통한 데이터로 전환된다. 모두 숫자 정보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호환이 쉽다는 것은 저장된 정보의 처리, 즉 상이한 형태의 정보를 융합하기가 용이하다는 뜻이다. 물질의 장점은 분명하나 단점 또한 명확하다. 당연히 사진이 물질성을 떠나면서 생겨난 단점이 있는 반면 반대로 과거에 찾아볼 수 없었던 장점들 또한 눈에 띈다. 그 변화를 눈여겨 볼 때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누가 창작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누가 창작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누가 창작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07/31/2018
/ 박평종

창작자의 개념이 모호해지고 있다. 수많은 저작권 분쟁 사례들이 그 점을 입증한다. 그에 따라 창작자를 ‘법적으로’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저작권을 어디까지 보호할 것인지도 골칫거리다. 특히 인공지능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는 시대가 오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이른바 ‘생각하는 기계(Thingking machine)’가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면 그를 창작자로 인정해야 할 것인가?

현행 저작권법은 저작권자를 독창성의 원천으로서의 창작자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 범위를 ‘인간 저자’만으로 한정한다. 예컨대 2011년 사진작가 데이비드 슬레이터가 인도네시아에서 멸종 위기종 원숭이 사진을 찍다가 카메라를 빼앗겨 발생한 사건을 보자. 사진작가의 카메라를 빼앗아 달아난 원숭이는 여러 장의 셀카를 찍었는데, 사진작가는 자신이 찍은 사진과 원숭이가 찍은 사진을 섞어 작품집으로 출간했다. 슬레이터는 2014년 원숭이가 찍은 사진을 무단으로 게재한 위키피디아에 사진 삭제를 요구했고, 이에 저작권 소송이 진행됐다. 법정은 비록 원숭이는 저작자가 될 수 없지만 사진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25%를 멸종 위기종 원숭이 보호에 사용하라고 판결했다. 여기서 관건은 인간만이 저자일 수 있으며 동물이나 로봇은 저작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는 것이다.
본래 저자(author), 창작자(originator) 개념은 저자가 저작물의 소유자임을 법적으로 보호하려는 소유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저자가 자신이 생산한 저작물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가지려면 타인의 그것과 명확히 구분되는 독창성(originality)이 있어야 했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저작권 분쟁에서 결정적 기준이 되는 요소가 그것이다. 그런데 법적으로 보호받는 창작자들의 작품이 그 ‘독창성’이라는 것을 진정 갖고 있는가?
알고리듬과 머신러닝을 활용하여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인공지능 ‘창작기계’는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 인간 예술가들보다 훨씬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독창성의 차원에서 기계는 인간을 능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무엇이 ‘없었던 작품’인지 쉽게 가려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의 ‘창작기계’, 예컨대 넥스트 렘브란트와 같은 인공지능은 화가의 화법을 머신러닝 학습으로 분석하여 그와 유사한 그림을 그리는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관건은 이 기계들을 ‘어떻게’ 프로그램 할 것인가에 있다. 만약 프로그래머가 전혀 새로운 알고리듬을 적용하여 규칙에서 벗어난 작품을 산출하도록 프로그램 한다면 사태는 달라질 수 있다. 그렇게 생산된 ‘작품’의 저자는 누가 될 것인가? 이미 예술가와 프로그래머의 적극적인 협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들은 그에 따른 작품의 공동저자다. 컴퓨터가 저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힘입어 카메라의 성능은 나날이 고도화되고 있어 이제 ‘누구라도’ 물리적 품질이 뛰어난 사진을 생산할 수 있다. 심지어 원숭이도 셀카를 찍고, 카메라를 도둑맞은 사진작가는 원숭이가 ‘대충’ 찍은 그 사진을 모아 작품집으로 출간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보다 고도의 복합적인 사고가 가능한 기계가 카메라를 잡는다면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인간 사진가의 작품보다 훨씬 ‘창의적인’ 사진을 그가 생산해 낼 날이 멀지 않았다. 이미 인공위성이나 드론, CCTV 카메라는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인간을 따돌린 지 오래다. 창의성의 척도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재고할 때가 됐다. 그리고 인간만이 저자일 수 있다는 뿌리 깊은 통념에 대해서도 반성해 보아야 한다. 하나의 저작물이 진정 가치 있다면 누가 생산하느냐는 부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저널리즘 사진

저널리즘 사진

저널리즘 사진
04/03/2018
/ 박평종

저널리즘 사진에 대한 몇 가지 편견과 오해, 가치절상과 가치절하, 이런 문제들을 요즘 느낀 대로 정리해 본다. 이상하게도 요즘 사진가들은 저널리즘 사진을 폄하하는 것 같다. 저널리즘 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진이 저널리즘으로 구분되는 것을 싫어하고 다큐멘터리 사진을 한다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가 저널리즘보다 더 멋져 보이는 모양이다. 요즘 전시장의 벽에 걸리는 사진 중의 상당수는 저널리즘 사진에 가까운데도 다큐멘터리라고 부른다. 이 또한 저널리즘 사진에 대한 가치절하에서 나오는 발상인 것 같다. 요컨대 다큐멘터리는 예술이며 저널리즘은 그냥 신문, 잡지사진이라는 이분법이 크게 한몫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다큐멘터리와 저널리즘의 차이는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부수적 요소들을 고려할 때나 어렴풋이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미세한 차이밖에는 없다. 서로 다른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며, 더 정확히는 둘 다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역사적 발생 과정이 다를 뿐이며, 유통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다른 중요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학문적 합의는 없고 개인들 간의 견해 차이만 있다. 내 생각에 중요한 차이는 역시 소통에 있다. 다큐멘터리는 대중들과의 소통에 그리 적극적인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사진가의 문제의식을 담아내는 형식, 그러니까 자기 시각을 배타적으로 중요시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대부분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아방가르드였으며 시각적 혁신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다른 사진가들의 시각과 확연히 다른 개성적인 시각을 확보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반면 저널리즘은 대중과의 소통을 중요시한다. 아방가르드의 문법, 이것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쉽게 이해받기 어렵다. 하물며 대중들이 그런 사진의 문법을 이해할 리가 만무하다. 워커 에반스의 문법, 로버트 프랭크의 문법이 당대에는 전혀 이해받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저널리즘 사진이 그런 문법을 구사한다면 대중들과 소통할 수 없다. 그래서 문제는 사실 매우 간단하다. 저널리즘의 가치는 옹호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저널리즘 사진을 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자기부정을 한다. 내 사진은 저널리즘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라는 것이다. 대중들과 소통을 잘 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소통을 못하고 있어’라고 외치는 셈이다. 우습기도 하고 유치하기도 하다. 적극적인 소통을 위해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소통하기 싫다고 외치는 꼴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매우 소통을 잘하고 있다. 그러니까 더욱 아이러니컬한 것이다.

아마도 저널리즘 사진을 하면서도 자신이 다큐멘터리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후자가 예술적이며 전자는 비예술적이라고 생각하는 유치한 이분법 때문인 것 같은데, 이 또한 우습다. 사실 시각적 혁신을 중요시 했던 다큐멘터리 사진의 전통은 서양의 경우 아방가르드 예술, 그러니까 모더니즘 예술의 한 축에 속할 뿐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원칙이 아니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매우 고립적인 예술의 한 경향일 뿐이었으며, 공리주의 예술의 원칙에는 위배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의 저널리즘 사진은 인쇄매체의 상대적 위축 때문에 점차 움츠러드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과 확산도 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현장 사진가들이 민감하게 느낄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이 저널리즘 사진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는다. 다만 유통의 방식이 달라질 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그랬다. 유통 방식의 변화에 대한 요구가 위기로 느껴질 수 있다. 시간이 좀 필요하다. 어쨌든 저널리즘 사진의 중요한 가치를 사진가들이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아 답답하다. 저널, 이것은 저널리즘 사진가들에게 아마 밥벌이 수단일 것이다. 그래서 정말 소중하다. 그런데 저널리즘 사진, 이것도 밥벌이 수단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 때는 정말 밥벌레가 된다.

박평종 (운영위원, 중앙대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