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석의 사진과 매휘립

오경석의 사진과 매휘립

오경석의 사진과 매휘립
07/25/2019
/ salon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1879) :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거(元秬), 호는 역매(亦梅)·진재(鎭齋)·천죽재(天竹齋) 등을 썼고,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당상역관이며 지중추부사를 지낸 오응현(吳膺賢)이고, 아들은 3·1운동 33인의 한 사람인 오세창(吳世昌)이다.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의 비조라 할 수 있다. 이상적(李尙迪)의 문하에서 한어(漢語)와 서화를 공부했고, 가학(家學)으로 박제가(朴齊家)의 실학을 공부했다. 1846년(헌종12) 역과(譯科)에 합격해 역관으로 활동했고, 1853년(철종4) 4월 북경 행 사신의 역관으로 청나라를 방문한 이래 13차례나 역관으로 중국을 내왕하면서 신지식을 습득하고 전파해서 개화사상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1869년에는 통정대부, 1873년에는 가선대부, 1875년에는 자헌대부, 1877년에는 숭정대부를 거쳐 숭록대부의 직함을 받았다.

오경석에 관한 위 내용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개화사상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낸 역사학자 신용하 교수가 집필한 글에서 발췌했습니다.

1. William F. Mayers, 오경석초상,1872, 베이징 영국공사관

1872년 북경에서 찍은 초상사진이 있습니다. 1863년 이조판서였던 이의익(李宜翼)을 정사(正使)로 하는 삼절년공행(三節年貢行) 연행사절단이 북경에 가서 찍은 사진들이 발견되기 전까지 한국 사람이 찍힌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던 사진입니다. 사진의 주인공이 바로 위에서 소개한 조선말 역관 출신의 개화사상가 오경석입니다. 아들이 한국서화 역사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의 저자인 오세창입니다. 그래서인지 비록 복사본일지라도 부친의 사진을 잘 건사하고 발문까지 붙여 가족의 유산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덕분에 오경석의 사진은 명확한 기록에 따른 우리나라 최초의 초상사진으로 오랫동안 공인받아 왔습니다.

사진은 대지에 붙어 있고, 양쪽에는 오세창이 쓴 사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진 오른쪽에는 先附君 四十二歲, 高宗九年 壬申 寫眞, 世昌記(선부군 사십이세, 고종구년 임신 사진, 세창기)라고 적었고 밑에 낙관을 찍었으며, 사진 왼쪽에는 北京 法國 公使館 參贊官 梅輝立 撮影, 不肖 在東京 複寫本(북경 법국 공사관 참찬관 매휘립 촬영, 불초 재 동경 복사본)이라고 썼습니다. 돌아가신 부친이 42세 때인 고종 9년 임신년 즉 1872년에 찍은 사진으로 내용은 오세창 자신이 쓴 글이며, 북경의 프랑스(法國) 공사관 참찬관인 매휘립이 촬영했고 자신이 동경에 있을 때 복사한 복사본이라는 내용입니다. 오세창은 부친의 사진을 일본에 갈 때 다른 물건과 함께 가져갔으나 불행하게도 원래의 사진은 손실되었고, 다행히 일본 동경(東京)에서 복사한 복사본이 있어 남겼다고 증언했습니다.

오경석이 사진을 찍은 경위는 이렇습니다. 1872년 조선 조정에서는 이전 해인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의 전후 문제 처리와 관련하여 박규수(朴珪壽)를 정사로 한 사절단을 청나라에 파견했습니다. 오경석은 이 사절단의 수석 역관으로 사행을 했습니다. 8대에 걸쳐 20여명 이상의 역관을 배출한 명문가 출신인 오경석은 1853년 처음 역관으로 사행에 참여한 이래 1874년까지 20여 년 동안 무려 13번에 걸쳐 중국에 다녀온 베테랑 역관이었습니다. 정사인 박규수의 귀국 보고에도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이들은 북경에 체류하는 동안 프러시아와 프랑스와의 전쟁을 둘러싼 유럽의 정세, 중국내의 유럽과 미국인 동향에 대해 상세한 정보 등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당연히 수석역관인 오경석이 서양 공사관원들을 비롯한 외국인들과의 접촉을 도맡았을 것입니다. 매휘립(梅輝立)이란 주중 서양 공사관의 참찬관은 이런 과정에서 만났고, 그의 카메라 앞에서 사진도 찍게 되었습니다.

한국사진의 역사를 연구하고 집필하는 과정에서 오세창과 같은 한국서화사의 거두가 친히 남긴 사진과 기록은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대부분의 권위 있다고 하는 백과사전이나 오경석 연구서 등에서도 모두 ‘북경에서 프랑스 공사관 참찬관 매휘립이 찍은 오경석의 사진’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활동에 관한 연구서를 집필한 신용하 교수 또한 『한국근대사상사연구(韓國近代社會思想史硏究)』에서 이 기록을 그대로 원용하여 한국 최초의 사진으로 기술했습니다. 촬영 시기, 장소, 촬영자, 원본 유무, 복사본의 존재 등 역사적 사실을 입증할 사진에 관한 기술 항목이 이렇게 완전히 기록되어 있는 19세기 사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만 한국사진사 연구의 과정에서 남은 문제는 사진을 찍은 사람으로 나와 있는 매휘립이 과연 누구이고, 그가 찍은 다른 조선인의 사진은 더 없는지 여부를 아는 일이었습니다.

사진을 찍은 매휘립이 당시 북경의 법국 즉 프랑스 공사관의 참찬관이었다는 오세창의 기술을 근거로 프랑스의 정부문서, 외교문서, 프랑스사진의 역사서, 외교사 등에 그런 인물이 있는지를 찾는 일은 오랫동안 연구자들의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 베이징의 <중국국가도서관>에 소장된 <중국사회과학출판사>가 간행한 『近代來華 外國人 人名辭典』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근대 시기 중국에 왔던 외국인들의 명단과 면면을 조사 연구한 사전입니다. 여기에서 의외로 매휘립이란 인물의 항목을 발견했고, 내용은 중국명 매휘립은 본명이 Mayers, William Frederick(1831~1878)로 청국 주재 영국 공사관의 참찬관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프랑스 공사관의 참참관이 아니라 영국 외교관이었던 것입니다. 오세창에게 영정으로 사진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정보가 잘못 전해졌을 것입니다.

사전에 따르면, 매휘립은 호주 즉 오스트레일리아 출생으로 아버지가 영국의 호주총독 비서였던 인연으로 12세에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귀화했고 공부했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매스컴 분야에서 일하다가 1859년 중국에 왔으며, 1860년 베이징 주재 영국공사관에 특채되어 일한 외교관이었습니다. 영국의 중국 전문가로 『Introduction of Cotton into China, 1868』, 『Chinese Reader’s Manual, 1874』, 『The Chinese Government: A Manual of Chinese Titles, Categorically Arranged and Explained, 1878』, 『Treaties between the Empire of China and Foreign Powers,1877』 등 중국 관련 연구서를 많이 집필한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아시아에 체류하던 대부분의 서양 외교관들은 사진술을 배우고 카메라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현지의 모습을 찍어 본국에 보고하던 일종의 스파이들이었습니다. 구한말 우리나라의 모습을 찍은 사진들 대부분도 이들 외교관들이 찍어 본국에 보낸 기록물 덩어리에서 나옵니다. 매휘립의 사진 활동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고, 오경석의 사진은 매휘립의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매휘립은 1878년 타계할 때까지 영국에 돌아가지 않고 중국에서 머물렀습니다. 따라서 영국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외국인으로 지냈기에 중국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다른 사진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 

사진으로 돈을 벌려면 2

사진으로 돈을 벌려면 2

사진으로 돈을 벌려면 2
07/2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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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소식에 이어 ‘사진으로 돈을 벌려면’이란 칼럼에서 소개한 1969년도 당시 기사의 내용을 이어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섯 번째로 하는 권고는 ‘수염을 길러라’는 내용입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여성 사진가가 거의 없던 남자들이 주로였던 시절의 이야기이니 웃어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핵심은 수염을 정성스럽고 보기 좋게 잘 기르면 매우 점잖아 보이고 클라이언트의 눈에 잘 띠니까 손님을 끌기에 좋다는 말입니다. 일정하게 나이가 들어 흰 수염을 잘 가꾸면 대부분 사람들이 경외심과 존경을 표하게 된다고 단언합니다. 여기에 더해 작가 스스로의 행동도 자연히 의젓해진다고 지적합니다.

물론 요즘도 비즈니스를 하는 과정에서 사진가의 외모나 복장 등은 중요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자유로운 영혼이고 창의적이어야 한다는 대중적 인식하에서 보면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예술적 분위기를 풍기는 일은 여전히 장점으로 작용합니다. 여기에 더해 일정한 단정함과 세련됨을 갖춘다면 상대에게 신뢰를 줄 수 있으니까요. 수염이 그 요소라는 사실이 지금과는 다른 점입니다. 헌데 이 권고 말미의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아무나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수염이라도 염소수염처럼 생기면 웃음 꺼리가 되니까”라며 주의할 것을 당부합니다.

여섯 번째로는 ‘자기를 높여라’라는 권고입니다. 윗지(Weegee, 1899~1968)라는 포토저널리스트가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열네 살에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독학으로 사진을 공부한 다음 여러 신문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한 포토저널리즘의 전성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작가 중 한명입니다. 사진가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다른 사람들이 부르고 기억하기 쉽게 Weegee로 개명해서 사용한 사람입니다. 기사에서는 ‘위기’라고 불렀습니다. 이 작가의 사례를 들어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태도를 권합니다.

‘윗지’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진가 윗지”라고 새긴 고무도장을 만들어 갖고 다니며 자기 이름을 써야하는 곳에 꼭 찍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품이나 실력이 세계 최고가 되는 것은 아니고 자칫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수도 있지만, ‘윗지’는 당당히 말끝마다 자기는 세계 최고의 사진가라고 스스로를 높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유명세를 만들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세계적인 시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 또한 입국심사 때 세관직원이 갖고 오는 것 있냐고 물으면 “나는 내 천재적인 재능밖에 가진 것이 없다”고 스스로를 높이는 행동을 했던 것과 매우 유사한 사례라고 덧붙입니다.

일곱 번째는 요즘 작가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말인데 ‘전시회를 열자’라는 권고입니다. 하지만 1969년 당시 우리나라 사진가들은 출판이나 잡지 게재를 더 선호했고, 그것이 가장 사진다운 발표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온 권고라고 보입니다. 폴 카포니그로(Paul Caponigro, 1932~ )를 예로 들었는데, 그를 비즈니스를 하는 작가가 아닌 순수한 예술가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오직 작품을 만드는 일에만 열중하지만 워낙 전시를 자주 열고 또 같은 전시를 미국 내 여러 곳에서 동시에 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각종 매체에 자주 소개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유명해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당시 사진에 대한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재밌는 말은 전시를 “가장 순수하고 직접적인 출판” 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출판을 하면 복제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원래의 작품이 손상되지만, 전시를 하면 사람들이 작품을 직접 볼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작품을 만드는데 더 열성을 기울이게 된다고 합니다. 실력이 더 늘어난다는 것이지요. 거의 모든 사진의 발표가 신문이나 잡지 같은 인쇄매체를 통해 이루어지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상업 사진가들도 유명해지고 성공하려면 전시회를 자주 열라고 권고합니다. “전시란 반드시 화랑이나 특별한 전시장소를 택할 필요가 없고, 광고 대리인점이나 광고관계자들이 출입하는 다방의 벽에 걸어놓아도 된다”며 방법까지 제시합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클라이언트를 발굴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마지막 여덟 번째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라”는 항목입니다. 이 또한 스스로를 전설적인 인물의 반열에 들게 하도록 하는 자가발전 전략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1955년 뉴욕 MOMA에서 열린 ‘인간가족전(The Family of Man)’을 기획한 나름 사진계의 전설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 1879~1973)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직접 인용합니다. “재주와 소탈한 성품 및 사회단체를 이용하는 것 등으로 유명해진 사람이다. 그는 한 동안 포츄레이트를 500달러씩에 찍었더니 너무 손님이 많아서 쉴 사이가 없기 때문에 손님이 줄기를 바라면서 사진 값을 1000달러로 올렸더니 손님이 더 많아져서 골치를 앓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 자신이 만들어서 퍼트린 이야기 같다고 한다”는 내용입니다. 스스로를 부풀리고 적절하게 소문을 내면 사람들이 알아준다는 것이지요. 요즘같이 정보가 오픈되어 있는 시대에는 당연히 가당치 않은 방법이긴 합니다.

또 한 예는 얼마 전 타계한 6.25전쟁 사진으로 유명했던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David Douglas Duncan, 1916~2018)입니다. 인상이 고약하기로 유명했지만, 누구보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터를 많이 돌아다녔고,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수많은 일화를 남긴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 경력이 큰 권위가 되어 어떤 출판사나 매스컴도 그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던컨의 경우는 언제 어디서나 카메라와 장사에 능한 양쪽의 재주를 그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얻게 된 명성인 것이다”라고 설명하면서, 그는 저작권료나 사진 사용료 등으로 사회의 각계각층으로 부터 엄청난 돈을 긁어 들인 능력을 발휘했다고 전합니다.

지금과는 사진에 관한 정의와 개념이 달랐고, 시대적 환경도 전혀 달랐던 시대의 기사입니다. 하지만 어쩐지 사람 사는 일의 본질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남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과거의 사진을 이해하고자 하면 그 시대 사진했던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아는 일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 

사진으로 돈을 벌려면 2

​사진으로 돈을 벌려면 1

​사진으로 돈을 벌려면 1
07/2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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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진사를 공부하면서 항상 가장 좋은 사료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진 전문 잡지라는 사실을 느낍니다. 1948년 창간했다가 6.25 전쟁으로 중단된 <사진문화>부터 1976년 창간한 <영상>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진 분야에는 월간의 잡지 한 권 정도는 항상 나오고 있었습니다. 자료를 찾느라 과거 사진잡지를 읽다보면 재미난 글들이 눈에 띱니다. 당시는 무척 진지한 내용이었겠지만 지금 보면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이 칼럼을 통해 과거 잡지에 실린 어른들의 사진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일명 <사진잡학>입니다. 

1969년 4월호 월간 <포토그라피>에는 ‘사진으로 돈을 벌려면’이란 기사가 있습니다. 사진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많아지고, 사진 산업 또한 커지는 상황에서 사진으로 먹고 살고자하는 독자들의 수요를 감안한 글로 보입니다. 핵심은 “돈을 잘 벌려면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유명해지면 그만큼 얻는 것도 많아진다. 외국 사진작가들이 유명해진 경위와 일화를 소개할테니 참고하시라” 뭐 이런 내용입니다. 총 8가지 방법으로 정리를 해놓았습니다. 

첫째로 ‘세뇌공작’을 하라는 내용입니다. 직접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대단치 않은 일이라도 큰 소리로 자기 자랑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억눌려 자기를 대단한 사람으로 알게 된다. 별로 내용이 없는 일이라도 적당한 기술용어와 예술용어를 섞어가면서 자기를 선전하고 사람들에게 자기가 대단한 작가라는 인식을 주는 것은 자기를 유명하게 만드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이다.”라는 것입니다. 일부 비난은 있을 수 있으나 사실 여부를 꼬치꼬치 따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니 해보라고 권합니다.

둘째로 ‘책을 만들어라’는 권고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저술한 책을 자기 비용으로 출판하는 일에 매우 인색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비용으로 하되 돈이 아까워 볼품없는 책을 만든다.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자기의 돈을 얼마든지 쓰면서 책을 내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 타계한 유명한 6.25전쟁 사진가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이 1961년 출간한 <Picasso’s Picasso>와 1968년 출간한 <I Protest!>를 예로 들면서, 둘 다 자비로 좋은 책을 냈고 그 때문에 유명해지고 성공한 사진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견본을 보내라’입니다. 자기 사진을 작게라도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주 보내주면 그 자체로 굉장히 훌륭한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엽서만한 크기의 사진에는 주소만 쓰고 우표만 부치면 그림엽서가 되므로 이런 것을 이용해도 되고 실패작이라도(인화가 잘못된 것, 또는 쓰고 남은 것) 뒤에 주소와 전화번호를 고무도장으로 찍어 여러 장 보내면 받는 사람은 그것으로 사진첩이 된다.”고 상세한 방법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프레드 볼드윈(Fred Baldwin)은 자기를 바다의 괴물을 찍는 사람으로 그려놓고, 댄 크레머(Dan kremer)는 자기의 명함을 상호가 새겨진 필름 모퉁이로 만들어 써서 성공했다는 예를 듭니다. 

넷째로는 ‘대리인을 구하라’는 권고입니다. 사진작가들은 대개 작품을 판매하는데 소질이 없으니 장사에 소질이 있는 작품을 팔아 줄 수 있는 대리인을 고용하라고 합니다. 오늘날은 이런 직업을 ‘에이전시’ 또는 ‘딜러’라고 부르지만 이 잡지에는 ‘세일즈맨’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하지만 부담도 좀 있다고 경고하며 주의사항을 적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말로는 매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세일즈맨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진을 작가가 만들기를 바라며, 그 결과 작가는 그의 말대로 하기 싫어서 두 사람은 결렬이 되고 돈 벌이도 안되며 평도 나빠진다. 좋은 세일즈맨이란 작가를 이해하고 신뢰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흔치 않고 구하기도 힘든데 이런 사람은 작가가 좋아하는 종류의 일을 맡아오고 일도 잘 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유명한 작가는 너무 바빠서 작품 팔 시간이 없으니 좋은 대리인을 만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합니다. 좋은 대리인이 일을 열심히 하면 작가도 열심히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금상천화라고 전합니다. 

나머지 네 가지 방법은 다음 소식에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 

정기세미나의 의미

정기세미나의 의미

정기세미나의 의미
04/16/2019
/ 박주석

강용석, 선전촌 사진, 2000-2006

이명호, Tree…#4, 2013

“2019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정기세미나”를 맞아 행사의 목적과 의미 등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세미나는 ‘2019년 4월 24일 오후 3시 서대문구 남가좌동에 위치한 명지대학교 행정동 3층 대회의실’에서 개최합니다. 사진작가 두 분을 초대해서 발표를 듣습니다. 헌데 세미나에 ‘왜’ 작가일까요? 

오늘날 사진은 ‘단지’ 일개 매체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현대미술은 사진을 이미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예술 매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도 사진은 문자가 지닌 소통의 우월성에 균열을 내고 있습니다. 각종 인터넷 매체나 SNS, 인스타그램, 유투브 등 사진과 영상이 소통의 영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폭발적으로 높아가는 추세입니다. 체코 출신의 독일의 철학자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 1920~1991)는 문명사적 관점에서 사진영상을 ‘기술 이미지(Technical image)’로 정의하면서 그림과 문자 이후에 등장한 제 3의 언어로 규정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현재 본 연구소는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한국사진학 관련 자료 및 작품이미지 DB 구축 및 대사전 편찬”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본 연구는 조선의 선각자들이 서양의 신물물인 사진술을 중국과 일본을 통해 능동적으로 수용한 이후, 이 땅에서 발전시킨 사진문화의 성과를 총체적으로 집대성하는 일입니다. 여기에 더해 <한국사진학 대사전>을 편찬해서 연구의 성과를 사회와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제3의 언어로서 ‘사진이미지’의 문법과 표현 능력을 증대시키는 연구와 사진작업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사진언어의 문법과 표현 방식을 세련되게 발전시킨 한국 사진작가들의 작업 방식과 표현 방법은 본 연구의 핵심 대상입니다. 한국 사진은 서양 사진과 분명한 차별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유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전개돼 왔기 때문입니다. 한국사진의 역사에는 그 과정에서 중요한 성취를 이뤄낸 작가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작업을 한국사진사 또는 한국문화사 등과는 좀 다른 시각 즉 ‘한국 이미지언어의 전개와 역사’라는 관점으로 연구하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본 연구소의 이번 2019 정기세미나에는 글로벌한 차원에서 한국 예술의 위상을 높이고, 한국사진의 문법과 표현 역량을 리드해온 작가 두 분을 초청했습니다. 다큐멘터리 스타일을 통해 한국 사회에 내재한 분단의 모순을 고발해온 강용석 선생 그리고 대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사물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이명호 선생입니다. 강용석 선생은 “나는 사진사(寫眞師), 나의 사진관(寫眞館)과 사진관(寫眞觀)”을 주제로, 이명호 선생은 “(사진) 작가(?)로서 나는 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사진 작업의 전모를 밝힙니다. 

두 분 다 사진을 주 매체로 삼아 현대미술의 중심에 선 분들입니다. 특히 미국을 비롯한 유럽 등지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분들입니다. 작가로서 길었던 작업의 여정과 이 과정에서 구사한 사진의 문법과 방법론을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연구진들 스스로가 작가와 작품을 잘 읽어낼 수 있을 때 본 연구가 잘 이루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