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삑사리, 위험한 삑사리

유쾌한 삑사리, 위험한 삑사리

유쾌한 삑사리, 위험한 삑사리
11/18/2020
/ 박평종

 네이버 국어사전은 삑사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노래를 부를 때 흔히 고음에서 음정이 어긋나거나 잡소리가 섞이는 경우를 통속적으로 이르는 말”, 혹은 “기타와 같은 현악기를 연주할 때 손가락을 잘못 짚어 틱 하고 제 소리가 나지 않는 경우를 통속적으로 이르는 말”, 또는 “당구에서 큐가 미끄러져 공을 헛치는 경우를 통속적으로 이르는 말(=픽사리)”. 말하자면 삑사리는 실수를 뜻한다. 행위가 본래 목적했던 바를 이루지 못한 경우로 과녁을 맞히지 못한 겨냥이다. 의도에 반하여 벌어지는 사태이므로 ‘현상학적으로’ 말하자면 ‘비지향적’ 행위이기도 하다. 신중하지 못해서일까? 그렇지는 않다. 제아무리 조심성 있게 신중을 기하더라도 삑사리는 발생할 수 있다. 사람이 하는 일에 실수는 늘 따라다니게 마련이므로.

기계는 어떨까? 사람과 달리 기계는 삑사리를 내는 법이 없다. 만약 기계가 삑사리를 낸다면 그 기계는 잘못 만들어졌거나 고장 났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기계가 인간을 모방하면서 기이한 사태가 발생한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그 예다. SF 소설이나 영화에서 즐겨 다루는 주제라 우리에게 익숙한 존재이기도 하다. 예컨대 아시모프의 단편 <이성(Reason)>에 등장하는 로봇 큐티는 인간이 자기보다 열등하므로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진화한 로봇이 그리 생각하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도 인간보다 우월하고 ‘정신적으로도’ 합리적인 로봇이 ‘열등한’ 인간을 무시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영화 <Her>에 등장하는 AI 사만다의 ‘고귀한’ 정신세계를 인간 남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삑사리를 남발하는 인간이 그 정교한 ‘존재’의 눈에는 얼마나 하찮게 보일 것인가.

그러나 삑사리 없는 세상은 삭막하기 그지없다. 위의 네이버 사전이 정의하듯 “당구에서 큐가 미끄러져 공을 헛치는” 행위는 얼마나 인간적인가. 게임의 목적은 승리를 쟁취하는 데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가다머는 통찰력 있는 분석을 통해 게임의 본질은 유희에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유희가 노동의 세계와의 일시적 단절을 통해 재충전의 시간을 제공하는 데 있다면 이기고 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겨야만 하는 게임이라면 그것은 또 다른 노동일 수 있다. 따라서 게임, 혹은 좀 더 넓은 의미에서의 유희는 노동의 망각, 목적지향성으로부터의 일탈을 중요한 가치로 삼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삑사리는 유희의 가치를 극대화시킨다. 일상에서 삑사리가 나면 얼마나 유쾌한가. 물론 당연히 ‘중대한’ 노동의 세계에서 삑사리는 파국으로 연결된다. 하여 삑사리는 ‘사소한’ 행위, 요컨대 유희의 세계에서만 용인된다. 그리고 드물게 발생했을 때만 가치 있다. 자주 나오는 삑사리는 삑사리라 할 수 없다. 또한 ‘일부러’ 내는 삑사리는 가짜다.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의도의 저편에서 날아오는 것이 삑사리다.

한편 산업의 차원에서 기계의 실수는 용납될 수 없다. 그런데 기계가 인간의 사고를 모방하면서 삑사리가 날 여지는 날로 커지고 있다. 기계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봇 큐티의 ‘우월주의적’ 사고도 인간의 관점에서는 삑사리의 일종이다. 그 기계를 설계한 자의 의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가하지 않아야 한다는 로봇공학 3원칙도 효력을 갖지 못한다. 초인공지능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당장의 문제는 기계가 범할 수 있는 좀 더 ‘작은’ 삑사리들이다. 컴퓨터의 ‘버그’가 전형적인 예다. 이 ‘사소한’ 삑사리는 언제라도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 인간이 삑사리를 피할 수 없다면 바로 그 인간을 모방하여 만든 AI도 당연히 삑사리를 낼 수 있다. 물론 기계는 인간보다 삑사리를 낼 확률이 적다. 그러나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기계에게 모든 것을 맡겨두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박주석의 사진살롱 43 – 기생사진의 전설 《금광당사진관》

박주석의 사진살롱 43 – 기생사진의 전설 《금광당사진관》

박주석의 사진살롱 43 – 기생사진의 전설 《금광당사진관》
11/11/2020
/ 박주석

금광당사진관(김광배), <무용가 최승희>,
젤라틴실버프린트, 12.5 x 9.6cm, 1929~30년,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모던한 단발머리와 양장이 눈에 띠는 전설적인 무용수 최승희(崔承喜, 1911~미상)의 사진입니다. 일제식민지 시기 경성(京城), 지금의 서울 종로 서린동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유명했던 <금광당(金光堂)사진관>을 운영했던 김광배 선생이 찍었습니다. 최승희가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경성에 돌아와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리고 활동을 시작한 때가 1929년이고, 결혼과 출산을 연이어 한 것이 1931년부터이니, 1929년에서 30년 사이에 찍은 사진임이 분명합니다. 막 20살 정도였을 것입니다. 경성에 돌아와 홍보가 필요한 최승희가 당시 기생사진의 성지로 가장 유명했던 <금광당사진관>에 들러 인물사진을 찍은 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금광당사진관>을 운영했던 사진사 김광배(金光培, 1898~1978) 선생은 1919년 종로 공평동에 있던 <옥영사진관>에서 사진사 김시련(金時鍊)에게 사진술을 배우면서 사진계에 투신했습니다. 참고로 김시련은 <천연당사진관>에서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에게 사진을 사사했던 인물이었으니, 김광배 선생은 김규진의 직전 제자인 셈입니다. 사진을 더 배우기 위해 1923년 일본에 건너간 선생은 도쿄의 <노노미야(野野宮)사진관>에서 조수생활을 하며 사진을 공부했습니다. 선생의 사진에 대한 열의를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일본 생활을 마친 선생은 1925년 귀국해서 종로의 서린동에 <금광당사진관>을 개업해 운영했으며, 1926년 창립한 한국인 사진사 단체 <경성사진사협회>의 회장을 한차례 역임했고, 1936년에는 연구단체인 <경성인상사진연구회>를 발기하고 초대 회장을 지냈습니다. 1935년에는 같은 자리에 사진관을 양식(洋式)으로 신축했고, 일본인들과 경쟁하면서 사진 활동을 했던 왜정시대 사진사들 중 한분이었습니다.

김광배 선생이 1977년 한국사진사 연구자이신 최인진 선생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증언들은 당시 한국사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왜정시대 <금광당사진관>에서는 보통 사진을 촬영하고 인화해서 손님에게 전달하기까지 보통 보름 정도가 걸렸고, 결혼사진의 경우는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에 한 달 정도의 기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또 사진관에서는 촬영에 임할 때는 항상 모닝코트(낮 시간의 정장예복)를 입었다고 합니다. 사진은 대지를 붙여 상품의 가치를 높이는 일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했고, 대지에는 사진관 이름을 영어로 ‘Kim Ko Do Photo Studio’로 넣었는데 나중에는 경찰에서 트집을 잡고 말썽이 생겨 빼버렸다고 전합니다. 돈을 떠나서 일을 했지만 사진에 관심을 두었으므로 자연적으로 돈도 따라왔다고 자랑도 합니다. 꽤 돈을 버셨던 모양입니다.

금광당사진관(김광배), <9인의 초상>,
젤라틴실버프린트, 각각 4.5×6.6cm, 1930년대,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선생의 회고 중에는 기생사진에 얽힌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위에 보는 사진들이 아마도 당시 기생들의 모습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당시의 시대상과 사진관의 사회, 문화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여서 몇 부분 따서 여기에 소개합니다. 김광배 선생의 육성입니다. 

“내가 운영한 <금광당>은 이름이 있는 사진관이고 요릿집과 거래도 많았다. 요릿집은 기생이 많이 있고 또 기생들이 사진을 많이 찍었다. 나도 요릿집도 다녔으며, 회원들과 어울려 다니기도 하였다. 경성사진사협회 망년회도 요릿집에서 했다. 그런 인연도 있고 또 사진하면 어느 어느 아무개라고 요 사이와 같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손님들이 많이 찾았다. 고객으로는 기생이 제일 많았다. 사진을 마음에 들게 찍어주었다.(마음에 들게 찍어 준다는 것은 아름답게 나오도록 찍어준다는 것이다.)” 

“기생들이 와서 사진을 찍으면 영수증을 미납으로 해준다. 중판 촬영을 하나 맡으면 전지까지 확대를 부탁한다(여기서 전지란 사진의 한 면이 20 inch에 달하는 당시로는 비교적 큰 크기로 요즘 사진관에서 20R로 불리는 크기이다). 그래서 중판 대금과 전지 확대 대금까지 합하여 영수증을 해주면 그것을 가져가고 남자가 찾으러 온다. 남자가 찾으러 온 것은 사진을 찍은 기생에 반한 사람에게 이것을 찾아 주어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하니까 찾아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생들은 자기가 돈 하나 내지 않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사진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기생사진과 다른 사진과의 차이는 없었다. 사진술이 차차 발달되면서 이것을 기념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워낙 화류계 속에서 많이 들랑날랑 하니까 <금광당>은 기생사진관이란 말도 들었다. 서울 시내 기생 권번(券番) 네 곳이 있는데, 여기 기생 전부를 점령하니까 시비를 거는 사진사들도 있었다. <부인사진관>의 채상묵이 어느 날 술 한 병을 가지고 찾아왔다. 복수를 한다고. 기생을 전부 독차지 하니까 감정이 상해 못살겠다, 술병을 깨뜨리며 렌즈를 먹고 죽겠다면서 폭행을 했다. 그래서 나도 이것은 실력으로 하는 것인데, 와서 이럴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다툰 적도 있었다.” 

당시 서울을 비롯한 큰 도시에는 기생들의 활동을 중개하고 수수료를 받았던 일종의 상업 조직이 있었는데, 1915년 이전에는 ‘기생조합(妓生組合)’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권번(券番)’이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무교동 일대의 ‘조선권번’, 광교 일대의 ‘한성권번’, 낙원동의 ‘종로권번’ 등이 유명했습니다. 이런 기생들의 사진 수요를 <금광당사진관>이 거의 독점했었습니다. ‘기생사진의 전설’이었습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

보여주기식 행정의 지양을 바라며…

보여주기식 행정의 지양을 바라며…

보여주기식 행정의 지양을 바라며…
11/05/2020
/ 이해영

 

기록관리 일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기록관리기관의 사례를 상세히 살펴볼 기회들이 많이 생긴다. 해외 사례도 보게 되고, 국내 사례도 살펴보게 되는데, 많은 기록관리기관들이 다양한 ICT 기술을 활용해서 이용자들이 편리하게 기록을 활용하도록 노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기록관리가 공공기관 중심이다 보니, 사례를 살펴보다 보면 의도는 좋지만, 결과로 제시된 것을 보면 보여주기식 행정의 결과물로 보이는 일들이 꽤 많다.

내가 겪은 일도 그랬다. 대부분의 공공기관은 기록을 기관의 기능과 업무에 기반하여 분류하고 정리하는 기능분류를 활용하는데, 결과적으로 기관 기록의 분류는 기관에서 가지고 있는 기록을 대상으로 이뤄지게 된다. 즉, 보건복지부의 기록과 병무청의 기록이 분류체계가 같을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이용자들이 기관의 기능을 잘 파악하기 어렵다 보니, 다양한 주제나 영역별로 기록을 분류해서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유럽 표준의 제안도 있고 해서, 몇몇 기록관리기관들은 주제 등 다양한 분류체계를 도입하기도 한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기록으로 그런 분류를 한게 아니라, 보여주기 좋게 주제 분야를 다 미리 설정한 다음에 가지고 있는 기록을 할당하는 식으로 일을 한 것을 보았다. 그러다보니 어떤 주제 분야는 그 주제에 속한 실제 기록이 없이 설명만 있는 상황이 생겼다. 다른 어떤 기관에서 비슷한 일을 맡아할 때에도 웹사이트에 보기 좋게 걸리도록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고 좀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또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기록을 찾을 때에 기관이나 인물에 대해 다양한 연혁 정보나 배경 정보가 파악이 되면 기록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전거레코드라는 것을 만들기도 한다. 이는 예를 들면 어떤 인물이 언제 국회의원을 했고, 언제 어떤 기관의 기관장을 했다는 정보를 알면 기록을 찾기 훨씬 쉬워지도록 하는 것인데, 그걸 어떤 기관은 주요한 인물의 정보를 미리 만들고 기록을 찾아 맞추려니 준비한 인물에 대한 기록이 하나도 없는 사례가 많이 나왔더라는 얘기도 들은 일이 있다. 마찬가지로 기록에 기반하지 않고, 보기 좋게만 만들다보니 생긴 상황인 것이다. 기록이나 자원의 분류, 정리나 관련 도구 개발은 무조건 가지고 있는 기록에 기반하여 만들어야 하는 것인데, 기본이 안 된 것이다. 

그런 식으로 보기만 좋게 만들어지고 내실이 없이 이뤄지는 일들이 곳곳에 많다. 실질적으로 이용자들이 활용하기 쉽고 편리하게 결과물이 나오도록 일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윗사람이나 잘 모르는 외부 사람들이 보기 좋게 겉모습만 갖추는 일들이 여기저기에 보이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예산을 투입했지만 내실이 부족해서 이용자들의 불만만 사기 쉽고 신뢰를 잃기 쉬울 것이다. 기록관리기관이나 문화자원 관련 기관들은 그런 식의 일은 정말 지양하면 좋겠다. 보기 좋은 개살구가 아니라, 가능하면 보기도 좋지만 실질은 더 좋은 식으로 일들이 이뤄지도록 되면 좋겠다. 보기만 좋게 하는 일들은 결국은 나중에 외려 실제 일에 방해가 되는 일도 많다. 보기 좋은 걸 원하는 사람들 뜻을 따라줄 게 아니라 실질이 중요함을 설득하고 조금은 싸우기도 하고 해서라도 진짜 결과가 좋은 일들을 만들어내면 좋겠다. 그런 일들을 전문가가 할 수 있는게 아닐까 싶다. 좀 더 치열하게 부딪히고 그래서 좋은 결과로, 내부건 외부건 실질적인 이용자들에게 만족을 주는 일을 하면 좋겠다.

이해영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장)

겉 다르고 속 다른 기계

겉 다르고 속 다른 기계

겉 다르고 속 다른 기계
10/28/2020
/ 박평종

드라마 <비밀의 숲>에 등장하는 검사 황시목은 어린 시절 뇌수술을 받아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로 설정됐다. 당연히 감정 표현도 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모든 상황에서 무표정이다. 감정이 없는 인물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도 넓은 의미에서는 그런 경우로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통 기계 같다고 말한다. 기계에게 감정이 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기계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감정의 배제다. 본래 없으니 굳이 배제할 필요도 없지만.

기계 같은 인간이란 말은 당사자에게 모멸적인 표현이나 본래 인간은 기계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던 유물론자들이 있다. 인간의 신체가 물질로 구성돼 있는 한 인간과 기계는 동격이라는 것이다. 18세기 프랑스의 급진적 유물론자 라 메트리는 <인간기계(L’Homme-Machine)>론에서 인간은 ‘복합기계’라는 명제를 내놓는다. 이런 생각은 17세기의 대표적 기계론자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을 급진적으로 확장시킨 결과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기계를 구성하는 부품들을 동물의 신체 속에 있는 뼈와 근육, 신경, 동맥, 혈관 등과 비교할 때 신체를 기계로 간주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동물의 신체와 정교한 기계의 구조는 같다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다를까? 별반 다르지 않지만 문제는 ‘영혼’이다. 인간은 동물에게 없는 ‘영혼’을 가졌으며 신체와 따로 존재한다. 요컨대 인간은 영혼을 갖기 때문에 동물기계와 다르다는 것이다. 한편 라 메트리는 ‘영혼’ 개념을 버린다. <영혼의 자연사>에서 그는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는 동물’이 될 수 있었는지 논증해 나간다. 핵심을 요약하자면 모든 것은 물질에서 출발한다. 신체를 구성하는 물질은 자체로 운동의 원리를 갖고 있다. 물질로 구성된 감각기관은 외부 자극에 대한 감각을 통해 ‘감각관념’을 형성하고 각각의 관념에 대한 비교와 기억을 통해 원초적인 사고로 발전한다. 뇌 용적이 큰 동물과 작은 동물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그는 인간이 어느 ‘단계’에서 복합적 사고가 가능한 ‘동물’로 이행했다고 주장한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생각이다. 

19세기의 생리학자 기욤 뒤셴 드 불로뉴도 인간의 감정 표현, 즉 표정이 ‘내면세계’와 연결돼 있다는 통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국부적인 근육마비를 치료하기 위해 전기 자극 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그는 ‘내부 자극’ 아닌 ‘외부자극’이 다양한 표정 변화를 야기하는 현상에 주목했다.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데도 전기 자극만으로 기쁨과 슬픔, 놀라움, 분노를 드러내는 표정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 관점을 수용하면 감정을 느끼는 문제와 별개로 기계, 예컨대 로봇도 감정 표현이 가능하다.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한마디로 겉 다르고 속 다른 기계다.

인간은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운다. 기쁠 때 우는 인간, 반대로 슬플 때 웃는 인간을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표정은 ‘내면세계’의 반영이라는 전통적인 관념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런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도 있고 감정 표현이 가능한 기계도 가능하다면 마냥 ‘내면’과 ‘외면’이 연동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만은 없다. ‘포커 페이스’에 능란한 기계를 상상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인간을 속이는 기계에 관한 얘기는 SF 영화의 단골메뉴다. 예컨대 <에일리언 커버넌트>의 데이빗은 스스로 조물주가 되고자 했던 인공지능 로봇이다. 최근 가장 ‘인간에 가까운’ 인공지능으로 평가받는 GPT-3는 인터뷰 과정에서 능수능란하게 거짓말을 하고 인터뷰어를 ‘기만’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수년 전 방한했던 감정로봇 소피아 역시 인간을 당혹케 하는 발언을 쏟아낸 경력이 있다. 인공지능이 자연지능의 모방이라는 점에서, 말하자면 인간의 사고과정에 대한 ‘탁월한’ 모방이라는 점에서 이상할 것도 없다. 본래 인간은 겉 다르고 속 다른 ‘동물’이기에 그를 모방한 기계 또한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역으로 말하자면 겉과 속이 같은 기계는 인간의 사고를 ‘충실히’ 모방했다고 볼 수 없다. 그런 기계는 실패작, 요컨대 고장 난 기계다. 그러나 실상은 반대다. 인간은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기계를 만들었으므로. 즉 겉 다르고 속 다른 기계가 고장 난 기계라는 뜻이다. 고장 난 기계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한마디로 두려운 기계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박주석의 사진살롱 42 – 구왕삼 외전(外傳)

박주석의 사진살롱 42 – 구왕삼 외전(外傳)

박주석의 사진살롱 42 – 구왕삼 외전(外傳)
10/21/2020
/ 박주석

구왕삼, <콩나물>, 1947,
《제1회조선예술사진전람회》 준특선 당선작, 젤라틴실버프린트
/ 한국사진사연구소 인화, 1998

위 사진은 사진가로서 보다는 논쟁적 사진평론가로 더 유명했던 구왕삼(具王三, 1909~1977) 선생의 작품입니다.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선생은 해방공간에서 유일한 전국 규모의 민족주의 사진단체였던 <조선사진예술연구회>가 1947년에 주최한 《제1회조선예술사진전람회》라는 공모전에 이 사진을 출품했고, ‘준특선’으로 당선되어 전국적인 인지도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1950년대 리얼리즘사진을 옹호하고 이끈 평론가로서 이름을 알릴 기회도 만들었습니다. “사진은 무성(無聲)의 시(詩), 시(詩)는 유성(有聲)의 사진”이라는 명언도 남겼습니다. <콩나물>이라는 제목의 이 사진은 밥그릇과 콩나물 그리고 콩깍지를 배치하고 강한 빛을 주어 진한 그림자를 만들어 화면을 구성했습니다. 소재의 소박함과 강렬한 음양의 대비가 돋보이는 한국사진의 문화사적 유산입니다.

사진을 볼 때마다 구왕삼 선생은 왜 밥그릇과 콩나물 2개를 사진의 소재로 삼았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콩나물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값싸고 영양가가 풍부한 식재료입니다. 콩에 물만 주면 저절로 자라나 풍성한 식단을 꾸밀 수 있으니 어려웠던 시절 최고의 반찬이고 국거리였습니다. 밥그릇과 같이 배치한 것으로 보아 ‘음식’이란 차원에서 사진을 찍었나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헌데 선생께서 사진을 시작하시기 전 왜정시대에 이미 유명한 음악평론가로 활동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또 다른 생각이 듭니다. 과거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음악에서 쓰는 음표가 ‘콩나물대가리’라는 속어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음악에 대한 선생의 생각을 표현한 것 아닌가하는 추측도 해보게 됩니다.

왜정시대에 음악평론가로서 활동한 구왕삼 선생의 흔적은 무척 많이 남아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당시의 음악계에서 음악의 실연자(實演者)가 아니라 연구자(硏究者)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1934년 발행된 문예잡지 『삼천리』 9월호에는 「악단(樂壇) 메리-그라운드」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대개 ‘음악계 이모저모’라는 뜻입니다. 필자는 ‘한양화랑(漢陽花郞)’이라는 이름인데 필명으로 보입니다. 당시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조선인 음악가들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피아니스트, 성악가, 바이올린, 첼로, 작곡 등 양악 전 분야를 망라해 50여명을 소개했습니다. 명단의 마지막에 평단(評壇) 즉 평론 분야는 한산(閑散)하기 짝이 없다면서, 연구자 3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구왕삼 선생이었습니다. “具王三(25) 硏究 아희생활社”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시 선생이 조선의 몇 안 되는 젊은 음악연구자 중 하나이며, <아희생활사>라는 어린이 잡지 소속 기자로 활동했다는 기록입니다. 

선생의 음악 활동에 대해서 『한겨레음악대사전』에는 “작곡가(동요), 일제강점기 작품으로 동요 ‘조선의 꽃’, ‘물 긷는 처녀’, ‘별나라’ 등이 있다. 『三千里』(1935) 7권 3호에 발표한 그의 악단시감(樂壇時感)에서 음악가협회 등을 소개했고, 이전음악과(梨專音樂科)의 문제와 음악비평에 관한 그의 「음악시평」은 『三千里』(1935) 7권 5호에 발표됐다. 그의 글 「악단잡관(樂壇雜觀)」은 『三千里』(1939) 11권 7호에 발표되었다. 일제강점기 그가 창작한 <조선의 꽃> 등 여러 동요가 있다”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조사를 해보면 선생은 문예잡지 『삼천리』에 5회, 일간신문 『조선중앙일보』에 음악 평론을 10여회 이상 기고했습니다. 특히 1931년 22세의 젊은 나이로 『조선일보』에 기고한 「이전음악과간행(梨專音樂科刊行)-민요합창곡집」에 대한 평론은 오늘날도 음악사 연구자들에게 회자되는 명문으로 꼽힙니다. 그러다 1930년대 후반 대구에서 결성된 사진 동호회인 <대구아마추어사우회>에 가입하면서 처음 사진 활동을 시작했고,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결성된 <경북사진문화연맹>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사진 활동을 펼쳐갔습니다. 1956년부터는 본격적인 사진평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아악(雅樂)이 골동품으로 악사(樂師) 악곡(樂曲) 하나 배출 제작 없이 근근이 잔재(殘滓) 만으로 보존하며, 종래 사용한 가야금이 화류계의 전용물로 유한계급의 향락을 만족케 하는데 사용하고 있고, 대소(大小) 악기가 양악의 피아노, 바이올린, 색소폰으로 하여 전연 압도하여 사회의 일우(一隅)에서 쫓겨 다녀 그 존재까지도 보기 어려운 현황에 처하여 일견으로는 조선의 국악은 멸망에 발하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의 음악 중 민요곡에 대하여서는 양산도, 새타령, 방아타령, 자진방아타령, 영변가, 이팔청춘, 자진산타령 등의 무수한 민요곡이 있으나, 이 역시 유한계급의 향락물로 사용하여 일반이 이를 퇴폐적, 망국적 노래임을 생각하고 있다.”

조선 전통의 국악이 몰락하는 상황을 개탄하는 “조선의 음악 어디로 가나?”라는 부제를 단 평론문의 일부입니다. 당시 유일한 서양음악 교육기관인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서 발행한 앨범 <조선민요합창>을 평가하면서 조선민요곡의 본질과 형식에서 맞지 않은 불합리하고 무리한 연주라는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비판 정신은 사진으로도 이어졌고, 항상 적나라하게 비판적인 글을 쓰고 논쟁도 불사했습니다. 비평을 비판으로 오해하기에, 논쟁적 글쓰기를 피하려는 오늘의 한국사진 비평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