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1 》 :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서의 사색

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1 》 :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서의 사색

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1 》 :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서의 사색
02/24/2021
/ 김혜원

1839년 8월 19일, 사진은 그 특허권으로 자신의 생년월일을 법률상에 올린 유일한 예술이다. 사진의 발명은 이미지 제작을 인간의 손이 아니라 기계가 맡게 되었음을 알린 혁명적인 사건이었지만, 암실 벽에 반사된 상(像)을 얻기 위해 바늘구멍을 통해 빛을 집중시켜 사진 이미지를 얻는 원리는 중국의 묵자 시대나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발명된 카메라의 기원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어두운 방)이다. 이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순수한 우리식 명칭은 정약용이 명명한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이다. 칠실(漆室)은 검은 옻칠을 한 것처럼 컴컴한 방이나 공간으로, 이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해당하는 말이다. 파려안(玻瓈眼)의 파려는 파리(玻璃)로, 이는 오늘날의 유리나 수정 일종의 렌즈를 가리키는 말이다.

 

   벌레들이 정지문에 구멍을 내놓은 거다 그 구멍 속으로 빛이 들어오면
   아궁이 그을음이 낀 벽에 상이 맺혔다
   나비가 지나가면 나비 그림자가, 마당에 뿌려놓은 햇싸라기를 쪼아 먹는 새 그림자가
   살강의 흰 그릇들에 거꾸로 맺히곤 하였다
   손가락으로 밀면 까무스름 묻어나던 그을음은
   불에 탄 짚들이 들판과 하늘을 잊지 못하고 벽에 붙여놓은 필름,
   그 위로 떠가는 상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어둠을 더 편애하게 된 것이 아닐까

   <중략> 

 

   영사기 필름처럼 차르르 돌아가던 풀무질 소리 뚝, 끊어진 어디쯤일까
   그사이 암실벽 노릇을 하던 정지벽도 까무룩 사라져버렸고
   상할머니 곰방대처럼 뽀끔뽀끔 연기를 뿜어 올리던 굴뚝도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스위치를 올리면 바퀴처럼 단박에 어둠을 내쫓는 한 평 반의 부엌
   싸늘한 불빛이 거리를 떠돌다 온 胃를 쓸쓸히 맞이할 뿐이다
   문을 닫은 채 웅크려 빛을 빨아들이는 벌레 구멍을 숨구멍처럼 더듬는 밤
   하늘에 난 저 별은 누가 갉아 먹은 흔적인지,
   구멍 숭숭한 저 별이 빨아들이는 빛은 어느 가슴에 가서 맺히는지
   이런 적적한 밤 나는 아직도 옛날 정지를 잊지 못해서
   하릴없이 낡은 밥상을 끌어안고 시를 쓰곤 한다
   밥상이 책상으로 둔갑하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새근거리는 식구들,
   그들 곁에서 쓰는 시가 비록 꼬들꼬들하게 익은 밥알 같은 것이 될 수는 없겠지만
   할머니의 아궁이에서 올라온 그을음이 부엌강아지 젖은
   콧등에 까뭇이 묻어날 것 같아선
   애벌레처럼 사각사각 연필을 깎으면서
   살강의 흰 그릇처럼 정갈하게 놓여 있는 종이 위에
   어룽거리다 가는 말들을 찬찬히 베껴 써보곤 하는 것이다 

 

   – 손택수, 「바늘구멍 사진기」 부분

 

손택수의 「바늘구멍 사진기」는 서양의 카메라 옵스큐라나 정약용의 ‘칠실파려안’의 원리를 일상생활 속에서 포착해 낸 시이다. 이 시에서 손택수가 체험한 카메라 옵스큐라는 시골집 정지문이 달린 재래식 부엌이다. 정지문에 난, 벌레들이 뚫어놓은 구멍 속으로 빛이 들어와 살강의 흰 그릇들에 나비와 새의 상(像)이 맺히는 모습을 보고 쓴 이 시에서 구멍은 렌즈 즉 ‘파려안’이고 아궁이 그을음이 낀 벽은 필름이며 어둠 속의 부엌은 카메라 옵스큐라 즉 ‘칠실’이 된다. 그런데 이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서 손택수가 사로잡힌 것은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이 벽의 그을음 위로 떠가는 상들, 즉 영사기 필름처럼 돌아가던 환영이었다. 따라서 손택수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환영적 특성에 근거하여 거꾸로 맺히곤 하였던 나비 그림자나 마당에 뿌려놓은 햇싸라기를 쪼아 먹는 새 그림자의 아우라를 놓치고 싶지 않아 시를 쓰곤 한다고 고백하며, 문학이 ‘어두운 방’에서 만들어지는 내면적이고 허구적인 이미지를 추구하는 작업임을 밝히고 있다.

 

조현택_빈방-0번방-나주시 금계동 57_Inkjet Print_80×120cm_2015

조현택의 <빈방> 시리즈는 어두운 빈방을 거대한 카메라 옵스큐라로 만들어 방안에 비친 시적이고 서정적인 영상을 포착해 낸 사진 작업이다. 이 <빈방> 시리즈는 도시를 재생하는 과정에서 철거가 예정된 빈집의 빈방에 들어가 벽이나 지붕에 구멍을 내고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따라 그 맞은편 마당 풍경이 상하좌우가 전도된 상태로 벽에 비친 영상을 촬영한 사진 이미지들이다. 노란 유채꽃이 핀 바깥 풍경이 텅 빈 방안으로 들어와 빈집의 내력이나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금계동’의 빈방 사진처럼 조현택은 실제와 환영이 공존하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삶에서 죽음으로 이행하고 있는 빈방의 아우라와 소멸되는 시간을 필름에 누적시켰다. 그리하여 죽음의 방부제로서의 사진의 본질을 이해한 그의 사진은 파괴되고 소멸될 공간을 풍화되지 않을 기억으로 보존하면서 지상의 사라져가는 존재에 대한 애도의 정을 더욱 인상적이고 개성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코드 없는 메시지’와 ‘코드 있는 메시지’가 공존하는 사진의 특성을 사진의 역설로 파악한 바 있다.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 밝은 방)에 의해 물질과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이루어지는 ‘코드 없는 메시지’로서의 사실적 이미지와 카메라 옵스큐라의 조리개 구멍에 의해 절단된 시각에서 이루어지는 ‘코드 있는 메시지’로서의 허구적 이미지를 구별했던 것이다. 이에 손택수와 조현택은 옛 부엌이나 빈방의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서 나비나 새나 유채꽃이라는 ‘실물/실체’보다 나비 그림자나 새 그림자나 유채꽃 그림자, 그 ‘그림자[影]’들이 어룽대는 환영(幻影)적 이미지가 그들이 추구하는 이미지임을 말한다. 그들의 예술이 지상의 사라져가는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추구하는 허구적 세계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손택수와 조현택의 이미지들은 카메라 옵스큐라가 빚어내는 허상, 또는 실상과 허상이 만화경처럼 어룽대는 환영 속에서 긴 사색에 잠기고 싶은 이들에게 지금 아파트 창문에 암막커튼을 드리우고 그 커튼 사이로 낸 작은 바늘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따라 맞은편 실내에 맺히는 황홀한 바깥 풍경을 음미해 보기를 부추기고 있다.

 

* 『열린정신 인문학연구』 제19권 제1호에 게재한 논문 일부를 인용, 재구성하여 쓴 글입니다.

 

김혜원(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연구교수, 사진가)

신수정의 삶과 문화 9 : 딸들을 위한 엄마의 제사상 레시피

신수정의 삶과 문화 9 : 딸들을 위한 엄마의 제사상 레시피

신수정의 삶과 문화 9 : 딸들을 위한 엄마의 제사상 레시피
02/18/2021
/ 신수정

엄마 제사를 한 번은 지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지 오래됐다. 돌아가신 지 오 년이 지났는데도 명절이 다가오면 지금도 늘 무언가 미진하고 숙제를 마치지 못한 기분이 든다.

스물셋에 시집와서 일흔둘에 돌아가신 우리 엄마는 거의 오십 평생을 제사와 함께 했다. 추석과 설, 그리고 시부모 기제사를 합치면 적어도 일 년에 서너 번, 엄마는 오십 년 동안 대략 이백 번의 제사를 치러낸 셈이다. 경험해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제사를 준비하고 제사를 마무리하는 이백 번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엄마는 병상에 누워서야 이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친족들이 모여 제사 대신 간단한 추도식을 치르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제사에 관한 우리 사회의 시선이 달라진 탓이 제일 크지만, 무엇보다도 엄마의 의지가 강력하지 않았더라면 쉽지 않았을 결정인 것만은 분명하다. 엄마는 제사와 관련된 고충은 자신으로 끝나길 바랐던 것 같다. 그것만이 그녀가 자식들에게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 결과 아이로니컬하게도 평생 제사상을 차려온 엄마는 정작 자신의 제사상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나의 고뇌는 여기서 나온다.

젊은 여성 작가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가 눈길을 끈 것도 그 때문이다. ‘심시선’이라는 여성 예술가의 삶을 그녀가 남긴 다양한 자료들, 예컨대 저서나 대담, 연설, 타인의 추도문 등을 통해 재구성하면서 그녀의 후손들에게 10주기에 맞추어 오로지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추모할 수 있도록 새로운 형태의 ‘제사’를 제안하는 이 작가의 목소리는 너무 담대하고 호쾌해서 역시 젊은 세대는 다르구나 하는 탄성을 연발하며 소설을 읽었다.

이 소설 속 3녀 1남 가족들은 ‘하와이’에서 휴가를 보내며 각자 엄마와 자신들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물품을 찾아 그것으로 그녀의 제사상을 차릴 계획을 세운다. ‘하와이’라니, 제사의 배경부터 파격적이다. 심지어 그들이 제사상에 올리는 목록은 더하다. 해양쓰레기로 만든 재생 블록 탑, 말린 꽃, 화산석, 하와이를 배경으로 한 소설책, 새의 깃털, 가장 멋진 파도의 거품, 그녀의 이름을 붙인 산호 시리얼 증서, 프로젝트로 쏘아 올린 무지개 사진, 하와이에서만 맛볼 수 있는 팬케이크와 도넛, 과일, 그리고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커피까지! 그들은 이 물건들을 제사상에 올리기 위해 많은 고민과 되새김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들의 과거와 미래의 삶을 고스란히 현전할 어떤 것들의 목록을 마련한다. 이런 종류의 제사상 레시피라면 제사를 “사라져야 할 관습”이라고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

이 젊은 작가의 상상력이 언짢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제사가 장난이냐고 일갈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제사는 동화 같은 판타지가 아니라고 무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으로부터 늘 ‘마녀’로 오해되고 경멸당해온 한 여성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복원하고 그녀의 목소리를 재생하는 과정이 이 엉뚱한 제사의 레토릭과 무관하지 않다면 이 젊은 여성 작가의 ‘시선’을 간단하게 물리칠 수는 없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한 제사를, 아들이 아니라 딸들이 기획하고 또 그것이 그 딸들의 딸들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를 북돋아 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이 제사는 그동안의 의례에서 배제되어온 여성들의 노고와 넋을 기리고 그들만을 위한 애도의 시간을 가능하게 하는 여성들의 통과의례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나긴 시간 제사를 독점해온 부계 혈통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반란이 뜨겁다. 이 움직임은 앞으로 더 거세질 듯하다. 추석을 앞두고 우리 사회는 또 이 문제와 부딪칠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엄마의 제사를 고민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엄마의 제사상을 무엇으로 채울지 눈을 씻고 새로운 시선으로 찾아봐야겠다. 엄마를 추모하며.

 

<본 글은 세계일보 2020년 9월 25일자 오피니언/외부칼럼 카테고리에 “[삶과문화] 딸들을 위한 엄마의 제사상 레시피”로 연재된 글입니다>

 

신수정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르네상스형 기계가 가능할까?

르네상스형 기계가 가능할까?

르네상스형 기계가 가능할까?
02/03/2021
/ 박평종

언밸런스,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쪽 발이 길거나 짧으면 절뚝거리고, 젓가락 한쪽이 길거나 짧으면 젓가락질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고기만 먹거나 채소만 먹으면, 요컨대 균형 잡힌 식단을 유지하지 않으면 건강을 장담할 수 없다. 이처럼 균형의 중요성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나 실상 온전한 균형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신의 균형도 중요하다. 어른에게는 예절 바른데 아이에게 예의가 없다면 그 또한 언밸런스다.

학습의 불균형도 문제다. 법전을 달달 외워 법조인이 된 사람들이 ‘비상식적’ 판단을 내리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고교동창 의사 친구가 ‘고등학생처럼’ 말을 하는 걸 보고 한참 웃었던 적이 있는데 같은 이유다. ‘고매한’ 인문주의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플라톤에서 데리다까지 섭렵한 철학자들 중에는 카카오뱅크에 어떻게 가입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지식의 분화가 극단화된 현대사회에서 균형 잡힌 학습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맞다. 그래도 정도는 필요하다. 오래 전 컬투쇼에 소개됐던 에피소드 중 남자 친구와 헤어진 여인의 일화가 기억에 남아있다.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 없는 남자친구가 서신으로 진지하게 프로포즈를 했는데 그게 문제였다. 서신의 마지막 대목은 “내 평생의 반려자가 되어주오, 당신의 반남자로부터”였고, 이 ‘반여자’는 ‘반남자’의 무지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 이별을 선언했다는 얘기다.

AI의 탁월함은 특정 분야를 집중적으로 학습하여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었다는 데 있다. 알파고보다 바둑을 더 잘 두는 인간은 없고, 다른 분야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탁월함’은 ‘무능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알파고는 바둑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가까운 미래에 등장하게 될 수많은 AI, 요컨대 현재도 존재하지만 향후 더욱 ‘인간에 가까워질’ 지능형 비서나 자율주행차, AI 판사나 의사 등은 해당 분야에서 인간보다 뛰어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AI 판사는 고열 환자에게 해열제를 처방해야 한다는 상식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점이 큰 문제는 아니나 ‘종합적 판단’이 요구될 때 문제가 될 수 있다. 판사가 법전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말 속에 그 이유가 담겨있다.

그럼에도 이 ‘탁월한’ AI에게 모든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일단 자율주행차는 운전만 잘 하면 되고 AI 의사는 검진만 잘 하면 된다. 손흥민에게 야구까지 잘 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실상 AI에 비해 ‘비교적’ 균형을 유지하는 인간도 모든 면에서 언밸러스다. 난해한 하이데거는 이해하나 미적분은커녕 일차방정식도 풀지 못하는 철학자가 부지기수다. 드라마 스타트업에 나오는 프로그래머 ‘남도산’은 알고리즘 개발의 귀재지만 수익모델에 대한 아이디어를 전혀 내놓지 못한다. 물론 드라마 속 얘기지만 현실도 비슷하다.

지식의 분화가 진행되기 이전 이상적인 인간상은 이른바 르네상스형 인간, 말하자면 다양한 분야의 여러 지식을 고루 갖춘 ‘균형 있는’ 인간이었다. 원근법의 고안자로 알려진 알베르티는 회화와 건축은 물론이고 법학, 수학, 시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과 운동에도 뛰어났다. 한마디로 다재다능했다. 르네상스형 인간의 전형으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박식이 미친 분야는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어렵다. 이 ‘통합적’ 지식은 19세기까지도 유효해서 유럽 귀족층의 필수교육 과목은 그 종류도 많았다. 그런데 이후 지식의 분화가 시작되고 전문 분야의 지식이 고도화되면서 사정은 바뀌었다. 박식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아는 바보가 됐다. 한 우물만 파라는 말은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추기란 불가능하므로.

AI를 한마디로 인간의 사고과정을 모방한 기계로 정의한다면 어떤 사고를 모방할 것이냐가 문제다. 현재의 모델은 한 우물만 집중해서 파는 기계다. 그런데 르네상스형 인간의 사고를 모델로 삼는다면 어떨까. 물론 기술적으로는 어려울 게다. 허나 기술은 항상 한계를 극복해 왔다. 그렇다면 르네상스형 AI가 언젠가는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0 – 포천 금수정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아홉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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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7/2021
/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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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21년 새해 첫날에 포천 영평천의 명승인 <금수정 일출>을 그렸다. (도 1) 금수정(金水亭)이 안동김씨 고택지에 세워져 ‘김씨 집안의 물가 정자’쯤으로 여겼는데, 멀리 관음산 능선으로 솟는 아침 해돋이가 장관이다. 영평천이 물안개와 더불어 누런 금색으로 물드니, ‘金水亭’이라 이를 만하다. 벌써 조선 후기 문인으로 안산의 15학사로 꼽히던 저암 신택권(樗庵 申宅權, 18세기 후반)이 일출 광경을 보았는지, 금수정을 읊은 7언시에 ‘금파(金派)’, 곧 금물결이라고 표현하였다. 

꽃 둑에 비 지나가니 푸른 풀 무성한데 芳堤過雨綠蕪平

난간 아래 금물결이 아주 맑다네. 攔下金派徹底明

다소의 긴 여정 왕래하는 나그네 多少長程來去客

내달리다 느린 행보 누구 위한 행차인가! 橫馳緩踏爲誰行

(申宅權, 「金水亭 次揚蓬萊尊巖韻」, 『국역 저암만고(樗庵漫稿)』上, 양평문화사, 2016)

 

금수정에서 새해 첫날 영평천 금색 물결을 그리고 

코로나로 전국의 새해 해돋이 명소 탐방이 막혀있던 터에, 동쪽을 향한 금수정이 떠올라 불쑥 다시 찾았다. 다섯 번째쯤 되는가보다. 이곳까지 차를 몰아준 티메카코리아의 김태진 대표 덕분에, 인적이 없는 새벽 영평천 금물과 밝아오는 강변 평야의 여명을 오롯이 즐겼다. 실제 김대표와 이 풍광을 본 날은 작년 말 12월 30일~31일 일박이일로 포천을 답사한, 31일이다. 마침 30일이 음력 11월 16일이었다. 보름 다음날인 기망(旣望) 월출(月出)을 영평천에서 만났다. 본디 보름보다 기망 달이 더 가득 찬다. 31일 아침 둥근 달이 금수정 서편 창옥병과 보장산 능선 너머로 지고 있어 냉큼 사생해보았다. (도 2) 노랬던 새벽달이 산 능선 가까이 내려오자, 해 뜨며 흰 달로 변해 겨울 추위만큼 상큼하게 졌다.

금수정은 평야 지대를 흐르는 강물 굽이의 벼랑에 세워져 있다. 본래 이곳 지명인 ‘우두연(牛頭淵)’에 따라 소머리 정자, ‘우두정’이었다고 전한다. 지난번 살펴본 창옥병에서 동으로 2km가량에 위치한다. 옛사람들은 ‘3리 떨어져 있다’라고 했다. 현 지명은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이다. (이원호 외, 「포천 금수정 일원의 입지와 공간구성에 관한 연구」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24-3, 한국전통조경학회, 2006. ; 최동원, 「조선 후기 경기 북부 경승지의 현황과 인식 변화」, 『한국학 논총』 48, 2017.) 

금수정 입구에는 안동김씨 고택의 연원이 되는 고려 후기 문온공 김구용(文溫公 金九容, 1338~1384)의 묘단(墓壇)이 가까이 있고, 금수정 마당에는 커다란 시비가 세워져 있다. 여기에는 김구용의 아버지 상락군 김묘(上洛君 金昴), 할아버지 영창군 김승택(永昌君 金承澤)의 묘단도 함께한다. 모두 근래 새로 복원해 현창한 설치들이다. 이들 위에는 ‘산신제단(山神祭壇)’이 모셔지고, 제단 언덕에서 창옥병으로 지는 기망 달을 보았다. 또 이 집안의 사위였던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 1517-1584)과 관련된 유적지여서, 김구용 시비 옆에는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는… ” 유명한 시조의 시비도 자리한다.

정자 아래 벼랑에 양사언이 썼다는 해서체 바위글씨 ‘금수정(金水亭)’(도 3)이 전한다. 양사언의 ‘경도(瓊島)’(도 4)와 <증금옹시(贈琴翁詩)>(도 5) 초서체 바위글씨도 강물 바위에 있다. 한국서예사에서 가장 초서(草書)를 잘 쓴 솜씨답게 그 흘림이 유려하다. 금수정 아래 강변 암벽에는 누구의 서체인지 개성이 뚜렷하지 않은 ‘무릉(武陵)’이라는 행서체 바위글씨도 확인된다. 무릉 바위에서 영평천과 들, 그리고 북쪽으로 금수정의 병풍 격인 불무산이 어울린 무릉도원 풍경을 옛 산수화의 편파구도(偏頗構圖) 방식으로 그려보았다. (도 6) 

금수정은 지난 호에 살펴보았던 <사암서원>의 사암 박순(思庵 朴淳, 1523~1589)이 강변로를 따라 즐겨 찾던 곳이기도 하다. 영평 8경 중 으뜸으로 꼽히며, 조선 시대 경기 북부지역 최고 풍류 공간으로 사랑을 받았다. 특히 금강산을 여행할 때, 철원·금화로 진입하는 길목이자 쉬어가는 장소로 유명했다. 양사언, 박순, 이덕형, 이민구, 신흠, 박세당, 김창협, 정약용 등 유명 문인 묵객들이 찾아 금수정 시문을 남겼다. 당시 한양에서 이틀 정도의 걸리는 가까운 명승지로, 지금은 서울 북부지역에서 차로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근거리이다.

 

정수영의 <금수정> 그림

지우재 정수영은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 1797년 가을 <백운담(白雲潭)>과 <사암서원(思庵書院)>(지난 호에 소개)에 이어 남쪽 영평천 굽이, 바위 언덕의 <금수정>을 그렸다. 어리숙하고 가벼운, 갈필 수묵 선묘와 연한 담채의 정수영다운 개성적 남종산수화풍 그림이다. 화면 왼편 강 건너 벼랑언덕에 ‘창옥병(蒼玉屛)’이라 썼고, 아래 바위에 술그릇이라는 뜻의 ‘준암(罇巖)’이라 써넣었다. (도 7) ‘금수정’ 제목 왼편에는 강관이 아래의 제발을 남겼다. 

“금수정은 예전에 듣기로 평평하게 흐르는 곳에 점지했다는데, 지금 보니 암벽 위에 있다. 그린 자의 오류가 아니라면, 필시 이 모습이 명백할 게다. (金水亭曾聞占地平衍 今却在巖壁上 若非畵者之誤 必是此說之爽)”

현장을 가보지 못한 강관이 말로만 들었던 얘기도 맞다. 금수정에서 관망하는 영평천 주변의 평야가 상당히 넓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수영은 금수정 동쪽 강 건너에서 그렸기에 벼랑 위의 금수정이 되었다. 정수영이 금수정을 바라본 위치에 서니, 벼랑언덕이 좌우로 상당히 퍼져 길다. (도 8) 정수영은 이 바위 언덕을 좁혀 표현한 것이다. 금수정이 선 벼랑을 전통 산수화 방식으로 변화시켰으며, 높은 느낌이 들도록 과장했다.

강 왼편 언덕에 ‘창옥병’이라 지명을 써넣은 것은 큰 오류이다. 앞서 산신제단에서 내가 그린 <창옥병으로 기망 달 지고>(도 2)처럼, 창옥병은 금수정 북서쪽에 위치하니 정수영이 금수정을 그린 장소에서는 그림처럼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도 정수영의 부정확한 묘사력이 확인된다. 경쾌한 미점(米點)의 후경 산세는 종현산(해발 584m) 줄기인 셈이다.

그림의 왼편 아래 바위에 써넣은 ‘준암(罇巖)’이 눈에 띈다.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아닐까 싶어 이곳을 답사할 때마다 유심히 살피곤 했었다. 이번에 강이 꽁꽁 얼어 강 가운데의 바위들을 모두 조사할 수 있었는데, 결국 ‘준암(罇巖)’이라는 글씨는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옥 같은 섬이라는 뜻의 ‘경도(瓊島)’ 바위를 지칭한 것으로, 정수영이 붙인 듯하다. (도 9)

양사언의 초서 ‘경도(瓊島)’ 바위 위에 오르니, 글씨 왼편으로 술그릇 같은 오목 공간이 존재한다. (도 4) 술 담을 공간에는 얼음이 꽉 얼어 있었다. ‘준암(罇巖)’임을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경도는 지난 호에 소개한 <사암서원> 아래 백운계 개울 가운데 ‘와준(窪尊)’의 술통 바위와 마찬가지로 조선 문인들이 자연에서 술을 어떻게 즐겼는지, 그 풍류 문화를 상상하게 해준다. 

정수영의 <금수정>과 유사한 19세기 화원 김하종(金夏鍾, 1793~?)의 <금수정> 작품도 흥미롭다. (도 10) 김하종은 김홍도의 선배로 교분이 도타웠던 김응환의 셋째 아들이고, 김홍도 화풍을 따른 사실적인 금강산 사생화로 유명하다. 그런데 김하종은 금수정을 정수영식으로 포착했다. 김하종의 <금수정>은 정수영 그림보다 회화적인 짜임새나 묘사 기량이 낫지만, 정수영의 구도를 참작한 점이 눈길을 끈다. 두 화가 사이에 60년 넘게 시대가 흘렀으면서도, 조선 사회가 크게 변하지 않은 양상을 읽게 해주기에 그렇다.

이 <금수정>은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1865년 가을 금강산을 여행하고 쓴 ‘풍악유기(楓嶽遊記)’와 기행 시문에 김하종이 58점의 금강산 명승도를 첨가해 4권으로 꾸민, 《풍악권》의 도입부에 포함된 그림이다. 이유원은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고, 조선 말 제물포조약에 참여해 외교관으로 활약한 문신이자 개화파 인사이다. 《풍악권》은 19세기에 유행한 금강산 시화첩으로 손꼽히며, 내가 1999년 일민미술관의 금강산도 기획전에 객원 큐레이터로 참여해 발굴한 것이다. (이태호, 「일만이천봉에 서린 꿈 – 금강산의 문화와 예술 300년」, 『몽유금강 – 그림으로 보는 금강산 300년』, 일민미술관, 1999.) 

정수영은 <금수정>에서 북쪽으로 발길을 옮겨 포천 명승 <화적연(禾積淵)>을 그렸다. 물론 김하종도 따라 그렸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박주석의 사진살롱 45 – 김규진 조상(照相) : 고종황제 어사진(御寫眞)

박주석의 사진살롱 45 – 김규진 조상(照相) : 고종황제 어사진(御寫眞)

박주석의 사진살롱 45 – 김규진 조상(照相) : 고종황제 어사진(御寫眞)
01/27/2021
/ 박주석

김규진, <고종황제 어사진>, 대지에 부착한 채색 알부민프린트,
35.0×42.8cm, 나무상자(37.2×46.0× 3.5cm), 1905, 뉴어크미술관 소장.

지난 2015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뉴어크미술관(The Newark Museum of Art)이 소장한 구한말 고종황제의 초상 사진을 발굴해서 발표했습니다. 1905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미국인 사업가 에드워드 해리먼(Edward Harriman)이 10월 2일 고종 황제를 알현했을 때 하사받은 사진입니다. 해리먼은 당시 철도와 선박 관련 사업을 했던 재벌이었는데, 사업 확장을 위해 동아시아를 방문하면서 한국에도 왔습니다. 이 사진은 해리먼 사후인 1934년 유족이 미술관에 기증했고,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고종의 어사진 중에는 가장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빨강 비단으로 덧댄 윗 뚜껑을 있는 나무 상자에 담겨 있습니다. 하사받은 상태 그대로입니다. 사진은 흑백 알부민프린트(Albumin Print)이고, 옷과 옷깃 부분은 채색을 했습니다. 황제의 상징인 황룡포(黃龍布)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종이 대지 위에 채색한 사진을 붙였고, 오른쪽 윗부분에는 ‘대한황제 진 광무9년 재경운궁(大韓皇帝 眞 光武九年 在慶運宮)’이라고 적혀 있고, 아래쪽에는 ‘김규진 조상(金圭鎭 照相)’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1905년 지금의 덕수궁에서 해강(海岡) 김규진(金奎鎭, 1868~1933)이 찍은 고종황제의 어사진이라는 뜻입니다. 

해강이 일본에 가서 사진을 배운 때가 1901년이고, <천연당사진관>을 개업한 것이 1907년입니다. 그 사이에는 황실의 궁내부(宮內府) 관리로 일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청와대 비서관쯤 되는, 황제를 측근에서 보필하는 자리였습니다. 대한제국 황실이 필요로 하는 사진을 찍고 만드는 일도 김규진의 업무 중 하나였습니다. 현재 알려진 고종의 사진 중 김규진이 찍은 사진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가 영친왕의 서화 스승이었고 동시에 황실 사진가였다는 사실도 그저 구전으로 전해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뉴어크미술관의 사진이 발견됨으로써 황실 사진가 김규진의 정체가 분명해졌습니다. 따라서 이 사진 외에도 1902년부터 1906년 사이 만들어진 고종과 순종의 사진들은, 비록 사진가의 이름은 없지만, 김규진이 찍은 것일 개연성이 높습니다. 

사진 용어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유물에 따로 있습니다. 대지 아래에 적힌 ‘金圭鎭 照相’이라는 문장입니다. ‘김규진 사진’이라고 적지 않고 중국식 용어인 조상(照相)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당시 조선의 선비들도 사진(寫眞) 또는 어진(御眞)이란 말을 사용했고, 한국에서 활동했던 일본인 사진사들도 사진이란 단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했던 때였습니다. 일본에서 사진을 배운 김규진이 이런 단어를 몰랐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사진 또는 촬영이란 말 대신에 ‘조상(照相)’이란 말을 썼을까요? 

일단 중국에서는 사진(寫眞)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사진을 뜻하는 중국 말은 경우에 따라 여러 단어가 사용됩니다. 먼저 조상(照相, 자오시앙, zhào xiàng)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사진 찍는 사람이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가 카메라의 유제에 스스로 담긴다는 뜻입니다. 조편(照片, 자오피엔, zhào piàn)으로 쓰기도 합니다. 박조(拍照, 파이자오, pāi zhào)라는 말도 있습니다. 손으로 셔터를 눌러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를 뜻하는 말이고, 다른 사람이 카메라를 잠시 주고 찍어 달라고 했을 때 주로 쓰입니다. 중국의 사진 전문가들은 섭영(攝影, 세잉, shèyĭng)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사진가가 어떤 의도를 갖고 대상에 접근해서 사진을 생산하는 주체적인 행위를 말할 때 쓰입니다. 사진가, 사진작가, 예술가 등이 작품을 만드는 행위와 그 결과물을 말합니다. 그래서 중국사진의 역사는 ‘中國攝影史’로 표기합니다. 

이쯤이면 김규진이 조상(照相)이란 단어를 사용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고 만드는 행위의 주체가 사진가인 자신이 아니라 피사체인 고종 황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힌 것입니다. 군주제 국가에서 감히 황제의 모습을 자신이 주도적으로 박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설치한 카메라 앞에 선 고종 황제가 스스로 렌즈를 통해 유제에 담겼다는 뜻을 담았기에, 감히 자신의 이름을 써넣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통적인 어진에서는 어느 도화서의 화원도 누릴 수 없었던 영광입니다. 대한제국에 와서 근대가 상당히 진전되고 있었다는 사실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실 사진이란 단어는 사진가의 주체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말입니다. 사람의 외관과 본질 즉 진(眞)을 또 한번 있도록 사(寫)하는 행위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섭영(攝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자를 당긴다는 뜻입니다. 학문적 차원에서는 영어에서도 사진 자체는 Photographs로 표기하지만, 사진 행위의 주체가 사진가이면 피사체를 모델(Model)이라 칭하고, 반대로 피사체가 우월하게 주도하면 씨터(Sitter)라고 분명하게 구별해서 사용합니다. 김규진의 용어 사용에 관한 해박함과 주도면밀함을 느껴봅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