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사진, 축음기

향수, 사진, 축음기

향수, 사진, 축음기
03/10/2021
/ 박평종

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는 사람의 체취를 ‘영원히’ 간직하고자 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살인을 저지르는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다룬다. 90년대 초에 출간된 이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나중에 영화로도 제작되어 널리 회자된 바 있다. 소설의 부제는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문자 그대로 이 픽션은 인간의 ‘향기’를 보존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잔혹한’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은 장 밥티스트 그루누이로, 그루누이(Grenouille)는 프랑스어로 개구리를 뜻한다. 몰골이 흉측해서 사람들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된 가련한 인물이다. 어쨌든 천부적인 후각 덕분에 이 ‘개구리’ 인간은 향수 제조의 달인이 되나 살아있는 사람의 냄새를 저장하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자신만의 비법을 찾아 나선다. 문제는 향수를 만들려면 대상의 ‘정수’를 모조리 뽑아내야 한다는 것, 예컨대 꽃의 향기를 저장하게 되면 꽃은 죽는다. 불가능한 욕망에 사로잡힌 그루누이는 결국 인간의 ‘정수’를 뽑아 향수를 만들고 목숨을 희생시키는 선택을 한다. 그렇게 살아있던 인간의 체취가 ‘천상의’ 향수로 저장된다.

감각정보를 저장하는 문제는 문명사의 오랜 숙원이었다. 시각정보는 이미지, 요컨대 그림으로 저장 가능했으나 왜곡이 발생했다. 정보가 왜곡되면 가치는 반감된다. 사진은 왜곡 없이 시각정보를 저장하는 탁월한 방법으로 1839년에 발명됐다. 청각정보는 1877년 에디슨이 발명한 포노그래프(phonographe)를 통해 저장과 재생이 가능하게 됐다. 이른바 축음기의 탄생이다. 이 두 매체는 19세기가 거두어들인 가장 놀라운 성과들이다. 시각정보와 청각정보는 문자 그대로 ‘왜곡 없이’ 저장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현실에서 발생하는 정보가 바로 그 시간 자체와 더불어 ‘통째로’ 기록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입증’의 힘이 발생한다. 나아가 이 저장된 정보는 언제라도 다시 원형 그대로 재생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후각정보는 어떨까? 물론 향수가 있다. 그러나 향수는 사진이나 축음기와 전혀 다른 차원의 정보저장 수단이다. 두 후자는 개별적인 ‘모든’ 현상들을 정보로 기록할 수 있다. 정보가 발생하는 시간이 담긴다는 뜻이다. 반면 향수의 정보는 극도로 ‘추상적’이다. 향수에 담겨있는 바닐라향, 과일향, 초컬릿향, 가죽향 등에는 모두 그 향기를 추출했던 개별자의 정보가 누락되어 있다. 게다가 이 후각정보는 영속적이지 않다. 향수 뚜껑을 열어두면 향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싱글 몰트 위스키의 기본 향은 스코틀랜드 특유의 피트 향을 깔고 있는데, 거기에도 당연히 특정 시간과 장소의 피트 향은 없다. 단지 피트 향이라는 ‘보편’만이 있을 뿐이다. 오래 두면 당연히 향도 달아난다. <향수>의 그루누이가 절망했던 까닭도 그 때문이 아닐까싶다. 물론 픽션에 불과하지만 그는 ‘특정’ 여인의 향기를 영원히 보존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자도 향수처럼 정보를 ‘추상적으로’ 보존하는 수단이다.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 것, 코로 맡은 것 모두 문자화될 수 있으며 영구적 보존이 가능하다. 나아가 그 정보를 받아들인 자가 죽어도 타인에게 전달될 수 있다. 문자는 그런 점에서 획기적인 정보 저장수단이다. 그러나 이 모든 문자 정보는 고도로 추상화된 형태라는 점이 문제다. 만화 <신의 물방울>에서 소믈리에가 미각과 후각으로 얻어낸 정보를 표현한 말들은 그저 멋진 수사일 따름이다. 실상 문자만큼 추상적인 정보도 드물다. 내가 눈으로 본 것을 문자로 제아무리 꼼꼼히 기록하더라도 원래 모습을 온전히 복원할 수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지 않던가. 그럼에도 문자는 다른 종류의 감각 정보들의 호환에 유리한 수단이다. 말하자면 문자는 시각정보를 비롯하여 청각정보, 후각정보 모두를 ‘비록’ 추상화시킴에도 저장할 수 있다. 반대로 청각정보를 카메라로 저장할 수 없고, 시각정보를 축음기로 저장할 수는 없다. 당연히 향기도 마찬가지다. 후각정보를 온전히 저장하는 기계장치는 아직 없다. 그것이 ‘본래’ 불가능한지, 아니면 아직 방법을 찾지 못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언젠가는 카메라나 축음기처럼 냄새를 ‘통째로’ 저장하는 기계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이런 여러 맥락을 고려해 보면 포토그래피와 포노그래프는 참으로 놀라운 발명품이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1 – 포천 화적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1 – 포천 화적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1 – 포천 화적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 번째
03/04/2021
/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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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적연(禾積淵)은 포천의 제일경으로,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96호로 지정된 곳이다.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의 상류, 화산지대가 이룬 국가지질공원 계곡에 있다. S자로 굽은 강변은 현무암 주상절리의 벼랑이 협곡을 이루어 물이 깊다. 강물에 놓인 크고 작은 화강암 덩어리 기암(奇巖)들은 오랜 세월 빠른 물살에 씻겨 미끈하고 아름다운 형상을 이룬다. 이런 풍광의 중심인 커다란 암반이 볏단을 쌓은 ‘화적(禾積)’ 같다는 것이고, 자갈과 모래사장에 어우러진 짙푸른 못이 ‘연(淵)’이다.

화적연은 지난번 소개한 포천시 영평면의 사암서원과 창옥병, 금수정을 들른 뒤 발길 닿는 명소이다. 사암 박순, 이경석, 이민구, 허목, 박세당, 박태보, 이서구, 이항로, 최익현 등 조선 시대에는 많은 명사와 문인들이 화적연에 유람와 자연 풍류를 즐겼고, 신비로운 경치를 노래했다. 또 그런 만큼 여러 화가가 그림을 남겼다. 더구나 화적연은 금수정에 이어서 금강산 여정의 길목이어서 금강산 그리기의 워밍업하기 좋은 경치였을 법하다. 화적연을 화폭에 담은 화가는 <금수정(金水亭)>을 그린 정수영과 김하종 외에도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겸재 정선, 문인화가 단릉 이윤영, 학산 윤제홍 등이다.

 

조선 후기 화가, 문인들이 즐겨 찾는 명승

나도 근래 화적연을 여러 번 방문했다. 작년만 해도 3월, 9월, 12월 세 번이나 들렀다. 자주 찾은 이유는 조선 화가들이 그린 시점에 서보기 위해서였다. 2000년 초까지는 군부대 주둔지여서 그 지점에 접근하기 불가능했다. 지금은 캠핑장이 들어설 정도로 개방되어 있지만, 물길이 깊고 배가 없어 자유로이 강 건너 왕래할 수 없는 형편이다. 올겨울 오래간만에 한강이 얼 정도여서 화적암까지 얼음판 위로 갈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작년 12월 29일 오후에 찾았다. 개울이 깊고 S자형 급류여서 강변 가장자리만 얼었다. 또 못가나 싶었다.

그런데 새벽 금수정을 함께 답사했던 티제이 킴 대표가 지피에스를 찍고 이동해보자는 제안을 해왔다. 내비게이션의 지시에 따라 5~6km를 빙 돌아 영북면 자일리 들판을 질러 언덕을 넘으니, 바로 눈앞에 있던 건너편이었다. 옛 화가들과 문인들이 즐겼던 공간에 오게 됐고, 얼추 그들의 시점에 서니 반가웠다. 커다란 암반 화적암에서 사진을 찍고 여러 점 사생했다. (도 1, 7) 작년 봄부터 열 점 넘게 스케치했는데, 처음으로 옛 화가의 눈을 따라 그려본 셈이다.

현장에서 사생하니, 옛 화가들의 부정확 표현이나 풍경 현장을 재구성하는 방식이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몸을 엎드린 채 고개를 쳐든 듯한 화적암을 실물 모양과 달리 ‘화적’의 낟가리를 쌓은 이미지로 우뚝하게 그렸다. (도 2) 그 좌우에는 겸재의 개성인 수직준법(垂直皴法)과 적묵법(積墨法)으로 처리한 벼랑이 배치되어 있는데, 실제 현장과 비교하면 벼랑은 화적암 앞뒤에 있다. (도 7, 9) 이러한 주상절리의 묘사방식은 겸재의 금강산 화법과도 연계된다.

학산 윤제홍(鶴山 尹濟弘, 1764~?)도 적묵법 묘사가 거칠기는 하지만, 겸재와 유사한 형태와 구성을 보여준다. (도 3) 학산은 심지어 화적암 꼭대기에 나무가 자란 모습으로 심하게 왜곡하기도 했다. 두 그림의 변형은 직접 현장에서 그렸다기보다 화실에 와서 풍경을 생각하며 그린 탓으로, 사람이 지닌 기억력의 한계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태호, 「實景에서 그리기와 記憶으로 그리기」-朝鮮後期 眞景山水畵의 視方式과 畵角을 중심으로, 『미술사연구』 257, 한국미술사학회, 2008. ; 이태호,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마로니에북스, 2015.) 

이처럼 과장이나 변형을 심하게 하는 정선이나 윤제홍은 물론이려니와, 사생화에 해당하는 문인화가인 단릉 이윤영이나 지우재 정수영, 화원인 유당 김하종의 그림도 눈에 든 대로 화적연 실경을 빼닮게 그리지 않았다. 우선 부감한 듯한 시점의 상상이 그러하다. 또 그림에 등장한 좌우의 벼랑은 실제 현장에서 보면, 앞서 살펴본 것처럼 중앙 큰 바위 화적암의 앞뒤인 남서쪽과 북동쪽에 위치한다. (도 7, 9)

화적연의 첫 사생화이자 비교적 실경을 비슷하게 해석한 작품은 단릉 이윤영(丹陵 李胤永, 1714~1759)의 부채그림 선면화(扇面畵)이다. (도 4) 부채 상단에는 ‘서울에서 화적연까지 백여리’(溪石名禾積 距京百餘里)라고 써놓았다. 이 선면화도 사생 그림임에도 실경과 상당히 차이 난다. 그림에는 화적암과 강변을 강물로 분리해 놓았는데, 실제로는 오른편 강변 너럭바위에 화적암이 붙어 있다. 또 부실부실하게 쓴, 단릉의 엷은 먹 선묘도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능호관 이인상(凌壺觀 李麟祥, 1710~1760)의 갈필(渴筆) 화풍을 따랐기에, 육중한 암반의 양감을 내지 못한 상태이다. 이 물기 적은 능호관식 선묘 피마준법(皮麻皴法)은 지우재도 배웠다.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은 배치 방식에서 단릉을 따랐다. 사선으로 화적암을 오른쪽에 치우쳐 놓은 점이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단릉이 근경 몇 그루 소나무를 화면 왼쪽에 둔 데 비해, 지우재는 오른쪽에 그렸다. 지우재가 화적암을 오른쪽 강변 바위에 연결해 그린 것은 실경에 근사한 편이다. (도 5, 7) 뒤쪽의 수직 벼랑을 아예 사선의 큰 바위와 나란히 왼편을 채워 놓은 구성법은 겸재를 배운 결과로 여겨진다. 바위의 모습은 지우재가 비교적 세세한 선묘로 그린 데 비해, 실제 대상과 닮기는 단릉의 그것이 훨씬 낫다. 이 대목에서도 지우재의 묘사 기량이 미숙한, 어눌한 표현력 수준이 여실히 확인된다.

유당 김하종(蕤堂 金夏鐘, 1793~?)의 <화적연도>는 <금수정도>와 마찬가지로 지우재의 구성을 따랐다. 대신에 짧게 반복한 선묘로 물살을 표현한 단원식 수파묘(水波描) 화풍이 화원 솜씨답게 생동감 난다. (도 6)

 

기우제를 지내던 큰 바위 화적암의 성혈 자국

한탄강의 최고 절경으로 꼽히는, 화적연의 중심 ‘화적’ 바위는 포천시 영북면 자일리에 위치한다. 그 건너 군부대가 철거된 뒤, 지금 관광지로 개발한 쪽의 모래사장 강변은 포천시 관인면 사정리이다. 지난 호에 살펴본 금수정, 창옥병 등과 더불어 포천시의 영평8경(영북면 자일리 禾積淵, 창수면 주원리 蒼玉屛, 창수면 오가리 金水亭, 영중면 양문리 樂歸亭, 영중면 금주리 白鷺洲, 영중면 거사리 靑鶴洞, 일동면 수입리 臥龍巖, 이동면 도평리 仙遊潭)에 해당하며, 제1경이다.

13m의 높이에 20여m 길이의 화적암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볏가리’ 바위라고 일컬어져 오기도 했다. 그런데 덩어리 형태로 보아 볏단 쌓은 낟가리로 보기에는 좀 그렇다. 첫인상은 바위의 미끈한 질감과 함께 물개를 떠올렸다. (도 7, 9) 옛 지리지나 사람들도 이 화적암을 다르게 부르기도 해왔던 것 같다. 거북이 형상의 구암(龜巖), 머리에 두 뿔을 달고 강물에서 솟으려는 자태의 신룡(神龍) 바위, 이들을 조합한 구룡(龜龍) 바위 등이다. 또 바위 질감이 젖색이어서 유석향(乳石鄕)이라 불렸던 모양이고, 석영이 출토되었던 장소여서 지어진 이름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최동원, 「조선 후기 경기 북부 경승지의 현황과 인식 변화」, 『한국학 논총』 48, 2017.)

인근 마을 농부가 화적연에서 심각한 3년 가뭄이 들자 하늘을 원망하는 탄식을 쏟아내자 강물에서 용이 하늘로 치솟았고, 비가 쏟아졌다는 전설도 전한다. 이를 계기로 풍년이 들었고, 그 이후 기우제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실제 숙종 때 이곳에서 국가행사로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 확인되기도 한다. (『숙종실록』 39권, 30년 6월 26일 갑오)

이번 기회에 강 건너편으로 화적암 큰 바위에 오르니 젖색 화강암 질감이 멀리서 본 느낌대로 미끈하고 부드러웠다. 고개를 쳐든 듯한 바위 정상에는 3~5cm가량의 둥근 성혈(性穴) 자국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거북이 형상으로 치자면, 목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3개의 성혈이 또렷했다. (도 8) 바위에 내는 성혈은 우리 민속신앙에서 유감주술(類感呪術) 행위의 주요 형식이다. 구멍 내기를 성행위와 유사하게 인식해, 다산과 풍년을 기원했던 전통적인 신앙형태의 하나이다. 성혈은 지역이나 마을에서 신성(神性)이 부여된 자연 바위는 물론이려니와 고인돌, 심지어 불탑이나 석불에도 등장한다. 화적연 큰 바위가 몸에 지닌 성혈 자국만큼 오랫동안 신령스러운 공간이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박주석의 사진살롱 46 – 스미소니언박물관의 고종 어사진

박주석의 사진살롱 46 – 스미소니언박물관의 고종 어사진

박주석의 사진살롱 46 – 스미소니언박물관의 고종 어사진
03/04/2021
/ 박주석

김규진, <고종 황제 어사진>과 <순종 황태자 어사진>, 대지 위에 채색한 콜로디온실버프린트,
이미지 21.0×27.0cm, 대지 34.0×42.0cm, 1905, 프리어-새클러미술관 아카이브 소장.

전회에 <뉴어크미술관>의 고종 황제 어사진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스미소니언재단(Smithsonian Institution) 산하의 <프리어-새클러 갤러리 아카이브(Freer Gallery of Art and Arthur M. Sackler Gallery Archives)> 역시도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어사진 1점과 황태자의 어사진 1점에 원본 상태로 소장하고 있습니다. 고종과 순종의 어사진은 일본 메이지(明治)왕 부부의 사진과 청나라 서태후의 사진 그리고 다양한 여행 사진기록 앨범 등과 더불어서 <The Alice Roosevelt Longworth Collection of Photographs from the 1905 Taft Mission to Asia>라는 명칭의 컬렉션에 속해 있습니다. 

갤러리아카이브는 사진의 출처를 “1905년 가을 서울에서 열린 황제의 초청 연회에서 앨리스 루스벨트가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았으며, 황태자 순종의 사진도 같이 받았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앨리스 루스벨트는 1905년 아시아를 순방한 윌리엄 태프트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했다”라고 역사적 사실관계를 덧붙였습니다. 또 사진을 찍은 사진가는 ‘Kim Kyujin, 1868~1993’이며, 한자 이름은 金圭鎭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 사진들 역시도 해강(海岡) 김규진(金奎鎭, 1868~1933)이 찍고 만든 것이었습니다. 

1905년 미국 국토방위부 장관이었던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1930, 미국 27대 대통령)를 대표로 하는 미국의 대규모 아시아 외교사절단이 서울을 방문했습니다. 이 사절단은 1905년 7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해서 일본과 필리핀 그리고 중국을 거쳐 9월 19일 서울에 도착했고, 이들 일행 중에는 당시 미국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 대통령의 첫째 딸인 앨리스 루스벨트(Alice Roosevelt Longworth, 1884~1980)가 있었습니다. 이들을 맞이한 고종 황제는 대규모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앨리스의 회고에 따르면 한국을 떠나기 직전인 9월 20일 고종은 미국의 공주로 생각한 자신을 별도의 만찬에 초대했고, 이 자리에서 자신과 황태자의 어사진을 선물했다고 전했습니다. 

‘프리어-새클러갤러리’가 소장한 고종 황제 어사진을 붙인 대지에는 사진을 둘러싼 장식 문양과 함께 아랫부분에 ‘대한황제희진(大韓皇帝㷩眞), 광무9년(光武九年), 재경운궁(在慶運宮)’이라는 글이 선명하게 쓰여있습니다. 일본 왕실에서 선물한 자수병풍을 배경으로 익선관(翼善冠)에 황룡포(黃龍袍)를 입고 앉은 모습입니다. 순종 어사진의 대지에도 마찬가지로 ‘대한황태자척진(大韓皇太子坧眞), 광무9년(光武九年), 재경운궁(在慶運宮)’라는 글이 새겨있습니다. 조선 왕의 전통적인 상징인 오봉병(五峯屛)을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입니다. 

고종의 본명은 이희(李㷩)이고, 순종의 본명은 이척(李坧)입니다. 따라서 대지의 내용은 ‘대한제국 황제 이희의 본모습’ 그리고 ‘대한제국 황태자 이척의 본모습’이라는 것이고, 대한제국 연호인 광무9년 즉 1905년에 찍었고, 촬영 장소는 경운궁(慶運宮) 즉 덕수궁(德壽宮)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사진(寫眞)이라는 말은 본모습인 명사 진(眞)을 복제한다는 동사 사(寫)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희(㷩)의 사진이라는 뜻의 희진(㷩眞), 척(坧)의 사진이라는 뜻의 척진(坧眞)이란 용어를 사용해서 이미지의 주인공을 밝혔고, 사진 제작의 시간정보, 위치정보를 정확하게 표기했습니다. 

아카이브 측의 기술(description) 정보에 따르면 두 장 어사진의 크기는 사진이미지가 21.0×27.0cm이고, 대지의 크기는 34.0×42.0cm로 같습니다. 재질은 ‘Tinted Silver Collodion, Mounted on Board’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P.O.P.(Printing Out Process) 방식의 콜로디온 용제를 사용한 은염(collodio-chloride) 사진이고, 그 위에 채색한 사진이라는 말입니다. 당시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의 곤룡포(衮龍袍)를 강조해 권위를 높이고자 흑백의 옷 부분에 누른 채색 물감을 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대지(board)를 대고 그 위에 사진을 접착하는 ‘카드마운트-캐비넷(Card Mount Cabinet)’ 방식을 사용해서 보존성과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이러한 정보는 김규진이 어사진을 만들면서 P.O.P. 방식의 인화 기법을 사용했고, 당시의 다양한 재료 중에 가장 보존성과 안정성이 높고 가격이 비싸지만 다루기에는 까다로운 콜로디온은염 감광유제를 사용했음을 알게 해줍니다. 당시 콜로디온은염은 젤라틴은염이나 알부민은염에 비해 은 입자의 크기가 세밀해서 고급의 사진을 만들 때 주로 사용된 재료였다고 합니다. 또 김규진이 사용한 카메라는 뒤 유제 면이 최소한 21.0×27.0cm 이상 크기를 가진 대형의 뷰카메라였음도 알 수 있습니다. P.O.P. 방식은 밀착인화(Contact Print)만 가능한 방식이고, 따라서 사진의 크기가 곧 카메라 뒷면의 크기입니다. 카메라와 감광유제의 측면에서 김규진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

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1 》 :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서의 사색

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1 》 :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서의 사색

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1 》 :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서의 사색
02/24/2021
/ 김혜원

1839년 8월 19일, 사진은 그 특허권으로 자신의 생년월일을 법률상에 올린 유일한 예술이다. 사진의 발명은 이미지 제작을 인간의 손이 아니라 기계가 맡게 되었음을 알린 혁명적인 사건이었지만, 암실 벽에 반사된 상(像)을 얻기 위해 바늘구멍을 통해 빛을 집중시켜 사진 이미지를 얻는 원리는 중국의 묵자 시대나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발명된 카메라의 기원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어두운 방)이다. 이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순수한 우리식 명칭은 정약용이 명명한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이다. 칠실(漆室)은 검은 옻칠을 한 것처럼 컴컴한 방이나 공간으로, 이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해당하는 말이다. 파려안(玻瓈眼)의 파려는 파리(玻璃)로, 이는 오늘날의 유리나 수정 일종의 렌즈를 가리키는 말이다.

 

   벌레들이 정지문에 구멍을 내놓은 거다 그 구멍 속으로 빛이 들어오면
   아궁이 그을음이 낀 벽에 상이 맺혔다
   나비가 지나가면 나비 그림자가, 마당에 뿌려놓은 햇싸라기를 쪼아 먹는 새 그림자가
   살강의 흰 그릇들에 거꾸로 맺히곤 하였다
   손가락으로 밀면 까무스름 묻어나던 그을음은
   불에 탄 짚들이 들판과 하늘을 잊지 못하고 벽에 붙여놓은 필름,
   그 위로 떠가는 상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어둠을 더 편애하게 된 것이 아닐까

   <중략> 

 

   영사기 필름처럼 차르르 돌아가던 풀무질 소리 뚝, 끊어진 어디쯤일까
   그사이 암실벽 노릇을 하던 정지벽도 까무룩 사라져버렸고
   상할머니 곰방대처럼 뽀끔뽀끔 연기를 뿜어 올리던 굴뚝도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스위치를 올리면 바퀴처럼 단박에 어둠을 내쫓는 한 평 반의 부엌
   싸늘한 불빛이 거리를 떠돌다 온 胃를 쓸쓸히 맞이할 뿐이다
   문을 닫은 채 웅크려 빛을 빨아들이는 벌레 구멍을 숨구멍처럼 더듬는 밤
   하늘에 난 저 별은 누가 갉아 먹은 흔적인지,
   구멍 숭숭한 저 별이 빨아들이는 빛은 어느 가슴에 가서 맺히는지
   이런 적적한 밤 나는 아직도 옛날 정지를 잊지 못해서
   하릴없이 낡은 밥상을 끌어안고 시를 쓰곤 한다
   밥상이 책상으로 둔갑하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새근거리는 식구들,
   그들 곁에서 쓰는 시가 비록 꼬들꼬들하게 익은 밥알 같은 것이 될 수는 없겠지만
   할머니의 아궁이에서 올라온 그을음이 부엌강아지 젖은
   콧등에 까뭇이 묻어날 것 같아선
   애벌레처럼 사각사각 연필을 깎으면서
   살강의 흰 그릇처럼 정갈하게 놓여 있는 종이 위에
   어룽거리다 가는 말들을 찬찬히 베껴 써보곤 하는 것이다 

 

   – 손택수, 「바늘구멍 사진기」 부분

 

손택수의 「바늘구멍 사진기」는 서양의 카메라 옵스큐라나 정약용의 ‘칠실파려안’의 원리를 일상생활 속에서 포착해 낸 시이다. 이 시에서 손택수가 체험한 카메라 옵스큐라는 시골집 정지문이 달린 재래식 부엌이다. 정지문에 난, 벌레들이 뚫어놓은 구멍 속으로 빛이 들어와 살강의 흰 그릇들에 나비와 새의 상(像)이 맺히는 모습을 보고 쓴 이 시에서 구멍은 렌즈 즉 ‘파려안’이고 아궁이 그을음이 낀 벽은 필름이며 어둠 속의 부엌은 카메라 옵스큐라 즉 ‘칠실’이 된다. 그런데 이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서 손택수가 사로잡힌 것은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이 벽의 그을음 위로 떠가는 상들, 즉 영사기 필름처럼 돌아가던 환영이었다. 따라서 손택수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환영적 특성에 근거하여 거꾸로 맺히곤 하였던 나비 그림자나 마당에 뿌려놓은 햇싸라기를 쪼아 먹는 새 그림자의 아우라를 놓치고 싶지 않아 시를 쓰곤 한다고 고백하며, 문학이 ‘어두운 방’에서 만들어지는 내면적이고 허구적인 이미지를 추구하는 작업임을 밝히고 있다.

 

조현택_빈방-0번방-나주시 금계동 57_Inkjet Print_80×120cm_2015

조현택의 <빈방> 시리즈는 어두운 빈방을 거대한 카메라 옵스큐라로 만들어 방안에 비친 시적이고 서정적인 영상을 포착해 낸 사진 작업이다. 이 <빈방> 시리즈는 도시를 재생하는 과정에서 철거가 예정된 빈집의 빈방에 들어가 벽이나 지붕에 구멍을 내고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따라 그 맞은편 마당 풍경이 상하좌우가 전도된 상태로 벽에 비친 영상을 촬영한 사진 이미지들이다. 노란 유채꽃이 핀 바깥 풍경이 텅 빈 방안으로 들어와 빈집의 내력이나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금계동’의 빈방 사진처럼 조현택은 실제와 환영이 공존하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삶에서 죽음으로 이행하고 있는 빈방의 아우라와 소멸되는 시간을 필름에 누적시켰다. 그리하여 죽음의 방부제로서의 사진의 본질을 이해한 그의 사진은 파괴되고 소멸될 공간을 풍화되지 않을 기억으로 보존하면서 지상의 사라져가는 존재에 대한 애도의 정을 더욱 인상적이고 개성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코드 없는 메시지’와 ‘코드 있는 메시지’가 공존하는 사진의 특성을 사진의 역설로 파악한 바 있다.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 밝은 방)에 의해 물질과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이루어지는 ‘코드 없는 메시지’로서의 사실적 이미지와 카메라 옵스큐라의 조리개 구멍에 의해 절단된 시각에서 이루어지는 ‘코드 있는 메시지’로서의 허구적 이미지를 구별했던 것이다. 이에 손택수와 조현택은 옛 부엌이나 빈방의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서 나비나 새나 유채꽃이라는 ‘실물/실체’보다 나비 그림자나 새 그림자나 유채꽃 그림자, 그 ‘그림자[影]’들이 어룽대는 환영(幻影)적 이미지가 그들이 추구하는 이미지임을 말한다. 그들의 예술이 지상의 사라져가는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추구하는 허구적 세계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손택수와 조현택의 이미지들은 카메라 옵스큐라가 빚어내는 허상, 또는 실상과 허상이 만화경처럼 어룽대는 환영 속에서 긴 사색에 잠기고 싶은 이들에게 지금 아파트 창문에 암막커튼을 드리우고 그 커튼 사이로 낸 작은 바늘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따라 맞은편 실내에 맺히는 황홀한 바깥 풍경을 음미해 보기를 부추기고 있다.

 

* 『열린정신 인문학연구』 제19권 제1호에 게재한 논문 일부를 인용, 재구성하여 쓴 글입니다.

 

김혜원(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연구교수, 사진가)

신수정의 삶과 문화 9 : 딸들을 위한 엄마의 제사상 레시피

신수정의 삶과 문화 9 : 딸들을 위한 엄마의 제사상 레시피

신수정의 삶과 문화 9 : 딸들을 위한 엄마의 제사상 레시피
02/18/2021
/ 신수정

엄마 제사를 한 번은 지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지 오래됐다. 돌아가신 지 오 년이 지났는데도 명절이 다가오면 지금도 늘 무언가 미진하고 숙제를 마치지 못한 기분이 든다.

스물셋에 시집와서 일흔둘에 돌아가신 우리 엄마는 거의 오십 평생을 제사와 함께 했다. 추석과 설, 그리고 시부모 기제사를 합치면 적어도 일 년에 서너 번, 엄마는 오십 년 동안 대략 이백 번의 제사를 치러낸 셈이다. 경험해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제사를 준비하고 제사를 마무리하는 이백 번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엄마는 병상에 누워서야 이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친족들이 모여 제사 대신 간단한 추도식을 치르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제사에 관한 우리 사회의 시선이 달라진 탓이 제일 크지만, 무엇보다도 엄마의 의지가 강력하지 않았더라면 쉽지 않았을 결정인 것만은 분명하다. 엄마는 제사와 관련된 고충은 자신으로 끝나길 바랐던 것 같다. 그것만이 그녀가 자식들에게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 결과 아이로니컬하게도 평생 제사상을 차려온 엄마는 정작 자신의 제사상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나의 고뇌는 여기서 나온다.

젊은 여성 작가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가 눈길을 끈 것도 그 때문이다. ‘심시선’이라는 여성 예술가의 삶을 그녀가 남긴 다양한 자료들, 예컨대 저서나 대담, 연설, 타인의 추도문 등을 통해 재구성하면서 그녀의 후손들에게 10주기에 맞추어 오로지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추모할 수 있도록 새로운 형태의 ‘제사’를 제안하는 이 작가의 목소리는 너무 담대하고 호쾌해서 역시 젊은 세대는 다르구나 하는 탄성을 연발하며 소설을 읽었다.

이 소설 속 3녀 1남 가족들은 ‘하와이’에서 휴가를 보내며 각자 엄마와 자신들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물품을 찾아 그것으로 그녀의 제사상을 차릴 계획을 세운다. ‘하와이’라니, 제사의 배경부터 파격적이다. 심지어 그들이 제사상에 올리는 목록은 더하다. 해양쓰레기로 만든 재생 블록 탑, 말린 꽃, 화산석, 하와이를 배경으로 한 소설책, 새의 깃털, 가장 멋진 파도의 거품, 그녀의 이름을 붙인 산호 시리얼 증서, 프로젝트로 쏘아 올린 무지개 사진, 하와이에서만 맛볼 수 있는 팬케이크와 도넛, 과일, 그리고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커피까지! 그들은 이 물건들을 제사상에 올리기 위해 많은 고민과 되새김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들의 과거와 미래의 삶을 고스란히 현전할 어떤 것들의 목록을 마련한다. 이런 종류의 제사상 레시피라면 제사를 “사라져야 할 관습”이라고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

이 젊은 작가의 상상력이 언짢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제사가 장난이냐고 일갈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제사는 동화 같은 판타지가 아니라고 무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으로부터 늘 ‘마녀’로 오해되고 경멸당해온 한 여성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복원하고 그녀의 목소리를 재생하는 과정이 이 엉뚱한 제사의 레토릭과 무관하지 않다면 이 젊은 여성 작가의 ‘시선’을 간단하게 물리칠 수는 없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한 제사를, 아들이 아니라 딸들이 기획하고 또 그것이 그 딸들의 딸들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를 북돋아 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이 제사는 그동안의 의례에서 배제되어온 여성들의 노고와 넋을 기리고 그들만을 위한 애도의 시간을 가능하게 하는 여성들의 통과의례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나긴 시간 제사를 독점해온 부계 혈통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반란이 뜨겁다. 이 움직임은 앞으로 더 거세질 듯하다. 추석을 앞두고 우리 사회는 또 이 문제와 부딪칠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엄마의 제사를 고민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엄마의 제사상을 무엇으로 채울지 눈을 씻고 새로운 시선으로 찾아봐야겠다. 엄마를 추모하며.

 

<본 글은 세계일보 2020년 9월 25일자 오피니언/외부칼럼 카테고리에 “[삶과문화] 딸들을 위한 엄마의 제사상 레시피”로 연재된 글입니다>

 

신수정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