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6 》 : 푼크툼의 힘

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6 》 : 푼크툼의 힘

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6 》 : 푼크툼의 힘
06/09/2021
/ 김혜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사진에 대한 단상 『밝은 방에서 그 집필 계기가 되었던 어머니의 유품, ‘온실사진’을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은 어머니가 5살 때 찍은 ‘온실사진’이 일반 독자에게는 흥미를 주지 못하고 자신의 내적 의식과 상관관계를 맺는 푼크툼으로 작용하는 사진이기 때문이었다. 그에 의하면 스투디움(studium)은 사진가가 의도한 주제나 이데올로기로서 단일한 의미를 지닌 일반적이고 폐쇄적인 기호이다. 푼크툼(punctum)은 사진가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찍힌, ‘중심’에서 벗어난 하찮은 ‘세부’로 모든 의미로 가득 찬 ‘텅 빈 의미’이다. 바르트는 사진가가 의도하고 찍은 스투디움으로 이루어진 사진은 특별히 나를 ‘찌르지’ 않지만 우연히 거저 찍힌 푼크툼이 끌어당기면 그 사진은 쏜살같이 날아와 나를 ‘찔러’ ‘상처’를 입히고 온통 의미로 채운다고 하면서 이러한 현상을 푼크툼의 역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온갖 기호, 말들이 쇠잔해지는 순간의 홀연한 깨달음을 통해 모든 사회적 코드를 위반하고 타인의 시선을 물려받기를 거부하는 푼크툼적 독법을 제안하였다.

   어머니 앉으시고 그 왼편에 아버지

   무명치마 저고리 어머니

   제국시대 품 넓은 양복의 아버지

   우리 근세사의 양친께서 서 계신다

   오늘 비록 나날의 삶이 궁핍하여도

   꿈과 희망의 가족사를 넘기기 위해

   자 좋아요 앞을 똑바로 보시고

 

   흘러간 역사처럼 빛바랜 사진 한 장, < 중략 >

 

   가족사 촬영은 재연된다. 자식들의 결혼, 손주들의 백일 돌잔치, 양친의 무릎에 어린아이들이 새롭게 등장한다. 분가해 나간 가족사와 대조해 읽지 않으면 계보 파악이 힘들다. 양친의 얼굴에는 쓸쓸한 빛이 더해간다. 태평스럽게 웃고 있음에도, 이제 가족사의 한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태평스레 웃고 있음에도.

 

   아버지 앉으시고 그 왼편에 어머니

   비단 치마 저고리 어머니

   흰 머리에 주름살만 가득하여

   덧없는 가족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며

   안고 찍을 젖먹이도 뒤에 세울 자식도 없이

   오늘 비록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아버지 앉으시고 그 왼편에 어머니

   자 좋아요 그대로 눈 감지 마시고

   기-ㅁ-치-이.

 

   -최영철, 「가족사진」 부분

가족 앨범 속 기념사진을 바라보며 가족사를 회상하고 있는 최영철의 「가족사진」은 사진의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기능을 확인하기에 좋은 시이다. 첫 연 “무명치마 저고리”와 “품 넓은 양복”을 입고 찍은 젊은 시절의 양친 사진은 이 시의 시적 자아에게 스투디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제국주의” 시대에 촬영된 이 사진이 “흘러간 역사처럼 빛바랜 사진 한 장”으로서 사회사와 조우하고 중첩되는 역사를 지니고 공동체의 공적 서사로 작용하는 기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적 자아는 이 사진에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반면에 그는 마지막 연의 노쇠한 양친의 초상사진에서 큰 감정적 무너짐을 겪는다. 초라한 “무명치마 저고리”가 아니라 물질적 풍요를 상징하는 “비단 치마저고리”를 입고 “흰 머리에 주름살만 가득”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가족사의 한 엑스트라”가 되어버린 양친의 인간사를 실감했던 것이다. 더구나 “기-ㅁ-치-이.” 소리와 함께 찍힌 “쓸쓸한 빛이 더해”가는 양친의 웃음은 긴 시간을 통과한 자만이 갖는 삶의 물리적 흔적이다. 시적 자아가 어찌할 수 없는 이 웃음이 이룬 흔적은 그에게만 고유하고 내밀한 ‘상처’와 고통의 형식으로 작용하는 푼크툼이었고, 따라서 최영철은 그 웃음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나 진술을 생략하고 말았다.

 

주명덕, 한국의 가족_논산,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71

주명덕의 《한국의 가족 시리즈 중 하나인 이 사진은 푼크툼의 사례로 거론하기에 적합한 작품이다. 물론 이 사진에서 스투디움은 대가족제도와 공동체살이가 지닌 온정적 가치이다. 사회학자 이효재가 글을 쓰고 주명덕이 사진을 찍어 『월간중앙에 발표한 이 포토 에세이는 변화해 가는 한국 사회의 가족 제도에 대한 비평적 사진 보고서였다. 그러나 이 사진이 우리 가슴을 건드려 요동치게 하고 정서적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진가가 의도하지 않았거나 그 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세부’들이다. 이를테면 바르트가 루이스 하인(Lewis Hine)의 사진에서 ‘모든 지식, 모든 교양을 추방’하고 소년의 ‘당통식 칼라’나 소녀의 손가락에 감긴 ‘붕대’만을 바라보았듯, 바닥에 바짝 엎드린 똥개의 뭉뚝한 꼬리 혹은 벌거벗은 배불뚝이 아이의 배꼽이거나 학생 교모에 달린 배지 또는 치맛자락 밑의 버선코 고무신일 수 있다. 초가지붕 이엉을 엮은 새끼줄일 수도 있고 초가 마당에 거칠게 난 바퀴자국일 수도 있다. 이 ‘세부’들은 모두 사진가가 의도한 주제 너머에서 보는 이의 경험을 환기하고 다양한 감정을 추체험하게 하는 푼크툼으로 작용할 수 있다. 주명덕의 사진은 객관적인 카메라의 뷰파인더 시선이 디테일하게 포착한 ‘세부’로 충만한 사진일수록 극적 긴장감과 미적 감동이 더 고조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바르트가 이원화한 이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논리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진론으로 국한하지 않고 후기구조주의가 지향한 해체성이라는 세계 인식으로 확장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저자 중심의 생산 미학에서 벗어나 의미 생성을 독자에게 이양하는 푼크툼적 독법은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고 ‘독자의 탄생’을 불러왔다. 저자가 의도한 주제나 사회적 코드를 거부한다는 것은 제도화된 미학적 획일성에서 벗어나 독자의 경험에 의해 촉발된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고 다양한 문맥 짜기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또한 푼크툼의 미학은 주체중심주의와 이성중심주의의 시선을 해체하고 타자 중심의 시각을 낳았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대상이 나를 ‘찌름’으로써 내가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인식 주체인 ‘나’를 인정하지 않고 이성에 기초하는 모든 판단과 해석을 유보한 채 대상 스스로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바르트는 스투디움보다 더 큰 푼크툼의 힘을 빌려 모든 주체 중심의 이데올로기와 도그마를 해체하고 타자성과 다원성을 옹호하였다. 물론 ‘중심’이 아닌 하찮은 ‘세부’에 의미를 부여한 이 푼크툼의 힘이야말로 인간 의식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고 세계를 ‘전적’으로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프레임 안에 들어온 모든 대상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을 뛰어넘는 카메라의 힘, 곧 사진의 힘이었다.

 

* 『열린정신 인문학연구 제19권 제1호에 게재한 논문 일부를 인용, 재구성하여 쓴 글입니다.

 

김혜원(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연구교수, 사진가)

미술사가 이태호교수 세 번째 개인전 《고구려를 그리다》

미술사가 이태호교수 세 번째 개인전 《고구려를 그리다》

미술사가 이태호교수 세 번째 개인전 《고구려를 그리다》
06/02/2021
/ notice

본 연구소의 이태호 교수님의 세 번째 개인전 《고구려를 그리다》가 무우수 갤러리에서 2021년 6월 16일부터 27까지 진행됩니다. 전시는 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따라 그린 그림들이고 2부는 고구려의 정서를 계승한 도상과 고구려 땅의 스케치입니다. 이번 전시는 작년 9월에 출간한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 : 평양 지역 고구려 고분벽화의 디테일』 재판을 계기로 기획되었습니다.

전시명: 미술사가 이태호 교수의 세 번째 개인전 <고구려를 그리다> 

참여작가: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전시일정: 2021. 06. 16(수) ~ 2021. 06. 27(일)

전시장소: 무우수 갤러리(서울 종로구 인사동길19-2, 3-4F

 

>무우수 갤러리 홈페이지

 무우수 갤러리 운영시간: AM 10:00 ~ PM 6:00 (월요일 휴무) 

사진 찍힌 적이 없는 자들의 사진

사진 찍힌 적이 없는 자들의 사진

사진 찍힌 적이 없는 자들의 사진
06/02/2021
/ 박평종

아우구스투스 황제, 다니엘 보샤트

예수, 바스 우테르비크

인공지능 기반 이미지 제작 플랫폼들이 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아트브리더(Artbreeder)로, 사용자가 사진을 업로드하고 원하는 조건을 선택하면 그에 부합하는 ‘맞춤형’ 이미지를 무작위로 제공한다. 여기에 사용된 핵심 기술은 StyleGAN과 BigGAN이다. StyleGAN은 이미지 합성을 통제하기 위해 학습 과정에서 각 레이어마다 해당 이미지의 스타일을 조정할 수 있도록 설계된 생성모델이다. 예컨대 거친 해상도 단계에서는 성별이나 포즈 등을, 중간 해상도 단계에서는 얼굴의 부분적인 특징이나 헤어스타일을, 미세 해상도 단계에서는 눈동자 색깔이나 머리카락 색깔, 그 밖의 미시적 특징을 조절한다. 이미지는 스타일의 조합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셈이다. StyleGAN 기반 이미지 생성 알고리즘을 활용한 대표적인 플랫폼은 앤비디아가 개발한 “Generated Photos”로 2021년 현재 260만 장 이상의 인물사진을 보유하고 있으며,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BigGAN은 생성 이미지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2019년에 개발된 모델인데, GAN의 성능을 측정하기 위해 고안된 지표 IS(Inception Score)와 FID(Fréchet Inception Distance)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바 있다.

아트브리더는 접근성도 좋고 이미지의 품질과 다양성 측면에서도 뛰어나 활용 가능성이 높다. 이 플랫폼을 예술 창작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작가들도 늘고 있다. 캐나다의 다니엘 보샤트(Daniel Voschart)는 <로마 황제 프로젝트(Roman Emperors Project)>에 이 플랫폼을 적극 활용했다. 보샤트는 우선 54명의 로마 황제들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고 그들이 살아생전에 제작됐던 흉상 조각들을 기계학습 데이터(사진)로 변환시켰다. 대략 800점 정도의 이미지가 사용됐다. 살아생전의 흉상이 없는 경우 동전에 묘사된 이미지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 이미지를 아트브리더에 업로드하여 생성된 이미지는 ‘거의’ 사진처럼 보인다. 사진이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고대 로마 황제들의 ‘사진’이 나온 셈인데, 보샤트는 이 파일을 프린트로 제작하여 에디션을 부여한 후 작품으로 내놓았다.

람세스 2세와 네페르타리

자유의 여신상

네델란드의 사진작가 바스 우테르비크(Bas Uterwijk)도 아트브리더를 적극 활용한다. <AI Generated Portraits> 시리즈가 그 예로 이 작업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친숙한 얼굴(Familiar Faces)>연작으로 반 고흐, 예수, 나폴레옹, 엘리자베스 여왕(1세) 등의 ‘사진’이다. 둘째는 <대체 불가능한 토큰(None Fungible Tokens)>, 제목이 암시하듯 암호 화폐 방식으로 자동 생성된 ‘가상’의 인물사진이다. 두 작업 모두 아트브리더의 GAN 알고리즘이 활용됐다. 예수의 ‘사진’은 유럽 각 성당에 있는 이콘화가 바탕이고, 16세기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생전에 제작됐던 다수의 초상화가 학습 데이터로 활용됐다. 심지어는 자유의 여신상 조각을 학습시켜 제작한 ‘여신’의 사진도 작품 목록에 들어있다. 고대 이집트 람세스 2세의 왕비였던 네페르타리의 사진, 카이사르의 사진, 킹 알렉산더의 사진도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사진이 허구와 가상의 영역을 넘나들던 때도 사진에 대한 ‘보편적 통념’은 여전히 확고했다. 요컨대 사진은 카메라 앞에 실제 존재했던 대상만을 찍는다는 것이다. 사진이 지닌 ‘인증’의 힘은 거기서 나온다. 그런데 이제 사진 발명 이전의 인물, 말하자면 한 번도 사진 찍힌 적이 없었던 인물의 사진이 생산되고 있다. ‘고전적인’ 사진 패러다임에 비추어 보면 이 이미지는 사진이라 할 수 없다. 그냥 사진처럼 보이는 이미지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이 ‘생성 이미지’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사진 같은 이미지’이기는 하다. 예컨대 보샤트의 <로마 황제 프로젝트>의 공식명칭에는 앞에 ‘Photoreal’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있다. 게다가 수많은 GAN의 변형 알고리즘들은 대체로 이 ‘포토리얼리스틱’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기술을 적용한다. 사진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은 어쩌면 19-20세기의 유산일지도 모르겠다. 실재를 시간과 더불어 통째로 기록할 수 있는 기술이 그 시대에는 ‘경이’로운 일이었겠지만 이제 그 정도는 별로 놀랍지 않다. 어쨌든 중요한 문제는 알고리즘이 생산한 이미지가 사진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얼마나 사진처럼 보이느냐에 있다. 물론 사진이냐 아니냐는 중요하다. 지금도 여전히 그에 따라 진실이 판가름 나니까. 그런데 그 차원을 벗어나면 그런 규정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사진의 개념이 생각보다 빨리 바뀔지도 모르겠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박주석의 사진살롱 50 –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와 고종 어사진

박주석의 사진살롱 50 –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와 고종 어사진

박주석의 사진살롱 50 –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와 고종 어사진
05/27/2021
/ 박주석

1890년대 배재학당 본관과 삼문출판사 건물(사진 왼쪽)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는 1890년 미국 감리교회 선교부가 기독교 포교와 근대 지식을 조선에 알리려는 목적으로 서울에 설립한 출판사 겸 인쇄소였습니다. 한글, 한문(漢文), 영어 등 세 가지 언어의 텍스트를 인쇄하고 출판할 수 있었기에 삼문(三文)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근대 교육기관인 배재학당(培材學堂) 부설로 학당 내에 공장이 있었기 때문에 흔히 ‘배재학당인쇄소’로 불렸다고 합니다. 조선의 정부 기구로 인쇄를 담당했고 『漢城旬報를 발행했던 ‘박문국(博文局)’이 있었지만 1888년에 문을 닫았습니다. 그래서 삼문출판사는 당시 국내 유일의 민간 출판사이자 근대식 인쇄공장이었습니다.

한국사진의 역사에서 삼문출판사는 무척 큰 가치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최초로 사진인쇄를 가능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이미 사진이 도입되었고 일본인 사진관들이나 한국인 사진사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만 개개인의 초상사진을 찍어주는 정도였습니다. 당연히 사진을 볼 수 있는 사람들도 한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쇄술은 사진의 대량복제와 배포를 가능하도록 합니다. 사진이미지의 확산과 시각정보의 대규모 유통은 사실성을 중시하는 근대적 세계관을 끌어내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전회에 소개한 『그리스도신문』은 사진이미지를 지면에 실어 불특정 다수에게 유포한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신문』이 지면에 사진을 실을 수 있었던 것은 ‘삼문출판사’의 인쇄 기술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1890년대에 들어 삼문출판사는 근대식 활판인쇄로 찍어낸 종교소설 『천로역정(天路歷程)』을 출판하는 등 다양한 기독교 서적을 선보였습니다. 한편 여러 신문사나 기관들이 만든 신문이나 도서의 인쇄공장 역할도 했습니다. 초기에는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납 활자로 한글과 영문, 한자 등을 주조하여 문자를 인쇄했고, 주로 성경 등 종교 서적을 만들었습니다. 1896년부터는 신문까지 인쇄할 수 있을 정도의 대형 인쇄소로 면모를 일신했습니다. 1892년 창간한 월간 선교잡지 『The Korean Repository』도 이곳에서 찍었고, 『조선그리스도회보』,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와 같은 신문사들의 인쇄도 한동안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최초로 사진을 지면에 실은 『그리스도신문』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곳 인쇄소가 목판, 활판, 석판 등의 다양한 인쇄 기술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897년 7월 15일자 『그리스도신문』에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등극한 고종황제의 ‘어사진’을 석판으로 인쇄해서 경품으로 증정한다는 광고가 실렸습니다.

“그리스도 신문이 각처에 퍼져 많은 사람이 보아 유익하게 하는데 월 전에 신문 사장 원두우 씨가 대군주 폐하께 대군주의 사진 뫼 실 일로 윤허하심을 물어 월 전에도 말했거니와 한 달 후에 이 사진을 뫼실 터인데 일 년을 이어 보는 사람에게 한 장씩 주기로 하였으나 지금부터 일 년을 보려 하는 사람에게도 주겠노라. 그러나 우리 조선이 몇 백 년 이래로 어사진 뫼시는 일은 처음일뿐더러 경향 간 인민들이 대군주의 천안(天顔)을 뵈온 사람이 만분의 일이 못 될 터이니 신문을 보아 문견을 넓히는 것도 유익하거니와 각각 대군주 폐하의 사진을 뫼시는 것이 신문된 자에게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어찌 다 측량하리오. 경향 간 어떠한 사람이든지 이 사진을 모시려거든 일 년을 이어 보시오.”

『그리스도신문』의 창간 발행인인 언더우드(Underwood, H. G. 한국명 元杜尤)가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의 허락을 받아 어사진(御寫眞)을 특별판각으로 인쇄해서 일 년 정기 구독자에게 배포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선 사람이 임금의 초상을 집에 직접 걸어두는 일은 처음 있는 일로서, 대군주 폐하의 사진을 모시는 일은 일생의 영광이라는 설명이 있었고, 신문의 독자라면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임금을 가까이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광고였습니다. 특별판각은 신문의 호외 형태로 발행했으며, 삼문출판사의 석판인쇄술(lithography)로 복제한 일종의 포스터였던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이렇게 배포된 고종의 어사진이 어떤 것이고, 누가 찍은 사진인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연구과제 중 하나입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4 – 퇴계 선생의 귀향길 따라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4 – 퇴계 선생의 귀향길 따라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4 – 퇴계 선생의 귀향길 따라
05/26/2021
/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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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안동 도산서원까지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꼬박 아흐레를 걸었다.

지난 4월 15일 오후 경복궁을 출발해, 4월 24일 저녁 안동 도산서원에 도착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마지막 귀향길 700리를 따라 걸었다.

경복궁 사정전, 동호 두모포, 봉은사, 아차산 광나루, 남양주 미음 나루, 덕소, 팔당, 운길산, 두물머리, 양평 한여울, 여주 이포보, 여주보, 관아와 청심루, 강천섬, 원주 흥원창, 충주 가흥창, 중앙탑, 관아, 단양, 죽령, 소백산, 풍기 관아, 영주 관아, 안동 도산서원.

걷는 일의 육체적인 힘듦은 스틱을 집고 진통제로 견디며, 4월의 국토 풍광을 만끽했다. 퇴계 선생님께 진정으로 감사드린다. 우리나라 땅, 국토의 봄날 자연변화가 이토록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열흘 내내 걸으며, 셔터를 눌러댔다. 하루에 500여 점씩 디카에 이미지를 담았다. 여느 답사 때보다, 몇 배를 더 찍은 것 같다.

열흘 동안 새벽과 저녁 자투리 시간도 덤으로 주어졌다. 최근 몇 년 새 일과로 정착된, 스케치에도 열중했다. 저녁 식사 후에는 그날 본 풍경을 되새겨 그렸다. 또 새벽마다 머물렀던 현장을 사생해 가니, 드로잉이 50여 점 넘게 쌓였다. 첫 그림은 출발지 광화문 앞에서 본 저녁 인왕산에 초승달이 지는 모습을 담았다. 출발 전야가 마침 음력 삼월 삼짇날인 터라, 어스름한 하늘에 노란 조각달이 처연한 풍경화를 만들어 주었다. (도 1)

내가 걸었던 길은 2019년 길 이름을 지은 도산서원이 처음 열었고, 올해에 책으로 발간되었다. (이광호 외,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푸른역사, 2021) 퇴계 이황은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을 겸직하며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다, 1569년 음력 3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발령받았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69세 때였다. 그리고 다음 해 세상을 떠났으니 마지막 귀향길인 셈이다. 물론 퇴계는 배를 타고, 말을 타고 내려갔다.

이를 기리는 올해 두 번째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는 4월 15일 퇴계가 마지막 관직을 지낸 경복궁 사정전 마당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광화문부터 두모포까지 그 일행과 첫날을 같이했다.

나는 이 퇴계 길을 연결하는 데 크게 일조한 지리학자 이기봉 박사를 따라나섰다. 이 박사는 국립중앙도서관 고문헌실에서 학예연구사로 근무하는 중이다. 평소 만남이나 답사길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여정에도 그에게 많은 걸 배우고 익혔다.

이 박사의 도시와 마을, 그 변화의 역사, 풍수, 지도학, 문명론 등은 우리시대 지리학자로 최고라는 확신을 지니게 한다. 특히 익숙한 것에 대해 새롭게 해주기에, 이기봉 박사와 만남은 늘 즐겁다. 그리고 내가 ‘대탄(大灘)’이라 하면 ‘한여울’이라고 부르라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역설할 때면 정말 존경스럽다. 물푸레여울, 배개나루, 흔바우나루, 똥뫼 등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불렀거나 지금도 부르는 땅이름을 발품 팔아 확인해온 점 탓에 더욱 그러하다.

남한강을 따라가는 충주까지 길은 나에게도 익숙한 편이다. 최근 여기 연재물에서 지우재 정수영의 사생화와 그림의 현장을 소개한 바도 있기 때문이다. (이태호, 답사스케치 3~8회, 2019) 나는 잘 아는 경치를 소개하며, 이기봉 박사에게 뒤돌아봄을 권했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공유하곤 했다.

덕소에서 팔당 강물 위로 전개되는 도성의 북산경, 양평 용문산과 추읍산의 세모꼴 형태미, 이포보의 해지는 낙조, 신륵사의 일출, 소백산의 녹음이 물드는 산 변화 등을 온몸으로 즐겼다. (도 2) 주자가 무이산에 은거하며 남긴 ‘무이산수쾌락(武夷山水快樂)’이 떠올랐다.

걸으며 다가오고 지나치는 한강-남한강도 해가 뜨고 지는 짧은 시간 못지않게 변화했다. 여울지는 봄 강의 아침, 물안개 지는 풍광은 걸음마다 바뀌는 게 신비롭기까지 했다. 남한강대교에서 강원도 원주와 충청북도 충주 사이, 그 강 풍경을 사생했다. (도 3) 이기봉 박사는 이 부론 지역의 여울을 남한강에서 눈과 귀로 살필 수 있는 가장 으뜸이라 한다.

단양에서 풍기로, 충청도서 경상도로 죽령을 넘으며, 아름다운 마을로 꼽히는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3리에서 여근곡을 발견하였다. 유명한 경주 여근곡보다 소규모지만, 형태는 더 선명했다. 마을 위 매바위골에는 남근석이 음양의 조화를 짝맞추었기에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미술로 본 한국의 에로티시즘(여성신문사, 1998) 저자로서 신발견이었다. (도 4, 5)

죽령을 넘어 경북 풍기 땅 사과밭 위로 솟은 소백산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한두 시간, 일이십 분 간격으로 뒤를 돌아보며 셔터를 눌렀다. 산 아래에서 연녹색이 황갈색조의 정상으로 번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뒤돌아볼 때마다 녹음이 스물스물 산정상으로 기어오르는 게 보이는 듯하였다. (도 6, 7)

4월 24일 해 질 무렵 안동 도산서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퇴계길을 나도 완주했다는 포만감보다, ‘괜히 걸었나’라는 생각이 먼저 스쳤다. 내내 산하의 풍경미를 최고로 즐기고 무릎과 허리의 통증을 감내하면서, 틈틈이 떠올랐던 화두이기도 했다. 걷는 열흘이 전체 인생의 노정이려니 했으니, 그 끝에 가면 ‘괜시리 살았나’ 하지 않을까 싶다.

어둑해진 도산서원 마당을 둘러보니, 죽어가는 듯하다 새잎을 늦게 내는 삼사백 살이 넘었다는 왕버들 두 그루가 눈에 들어 한그루를 그렸다. (도 8)

5월 5일부터 7일까지, 4월에 걸으면서 촬영이 미흡한 주요 장소를 차로 이동하며 보완했다. 해가 진 뒤에 도착해 사진을 못 찍은 양평 옛 관아 터로 솟은 용문산, 용문산과 추읍산이 떠오른 여주보, 섬강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원주 흥원창을 다시 들렀다. 직행하다 빠트린 곳인 원주 법흥사 터, 청풍호, 청풍 의림지, 중원 고구려비, 창동 마애불 등을 찾았다.

여주보에서 볼 때, 강물 위로 솟은 삼각형 추읍산과 병풍을 친 듯한 용문산은 오후 실루엣의 겹겹이 여전하였다. (이태호, 답사스케치 7회, 2019) 양평대교에서 연출된 남한강 일몰, 강하에서 새벽에 본 용문산 일출도 큰 울림을 주었다. 청평 나루에서 케이블카로 비봉산 정상에 올라가 전망대에서 굽어본 청풍호는 정말 장관이었다. 물에 떠서 굽이굽이 너울대는 수변 산세와 남쪽으로 뾰족뾰족 봉우리의 유난한 월악산 경관 등은 우리 ‘내륙의 산하가 이러하지!’ 하는 감탄이 절로 토해졌다. (도 9)

 

4월 ‘퇴계 선생 귀향길 걷기’에는, 응원을 와서 한나절 같이 걸었던 무우수아카데미 이연숙 원장의 후원이 있었다. 또 이 도보여행에는 나와 자주 답사해오던 티제이 김과 홍석근 평사리출판사 대표, 최민욱 씨가 일부 구간을 빼고 동행했다. 5월 차량 이동 답사에는 이 원장과 홍 대표, 그리고 양효주 씨가 함께했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