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진에서의 휴머니즘과 인간 가족전의 수용 (3) The Intersection of Humanism and the Reception of the Family of Man in 1950s Korean Photography

한국 사진에서의 휴머니즘과 인간 가족전의 수용 (3) The Intersection of Humanism and the Reception of the Family of Man in 1950s Korean Photography

한국 사진에서의 휴머니즘과 인간 가족전의 수용 (3) The Intersection of Humanism and the Reception of the Family of Man in 1950s Korean Photography
09/15/2021
/ 오혜리

한국 사진에서의 휴머니즘과 인간 가족전의 수용 (3)

The Intersection of Humanism and the Reception of the Family of Man in 1950s Korean Photography

 

지구촌 한 가족이라는 테마는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지닌 문화적 산물로서 기능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적 재현 매체라는 사진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와 휴머니즘적 주제가 정치 문화적 패권을 확장시키는데 어떻게 일조할 수 있는지 그 잠재성을 이해하는데 좋은 문화적 예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 가족전이 미국 이외에도 전 세계 수 십 개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전시의 세계적 수용해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존 워커(John Walker) 가 역설 하였듯이, 어떠한 텍스트는 각기 다른 역사적 상황하에서 전달자의 의도가 그대로 전달 되기보다는 수용자의 필요에 따라 그 초점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각주 1) 즉 전시의 의미가 각국의 합의된 담론 체계와 각기 다른 필요에서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 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에게 1950년대라는 특수한 상황하에 인간 가족전은 어떠한 의미로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일까? 한국에서도 이 전시가 성공할 수 있었던 두 문화권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필요가 있었을까?   

이미 한국에서 전시가 개막되기 이전부터  다양한 매스 미디어를 통해 기획자인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이력 뿐 아니라 전시회에 대한 정보가 소개되었다. 한국에서는 기존의 미국 전시에서의 503장이 아닌 501장의 사진이 전시 되었다.(각주 2)

 

Fig.7 재건화보, “인간가족전”, 미국공보원 제 269호, 1957년 4월 16일.

미국 공보원에서 발행하는 재건화보의 인간 가족전 개막식에 관한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지난 43일 미국대사 다우링씨 부처의 부축을 받아 대통령이 손수 테이푸를 끊음으로써 인간가족전 사진 전시회가 경복궁 미술관에서 개막되었다. 이것은 68개국에서 수집한 사진 200만점에서 선출 구성된 것이다. 사진은 동 전시를 서울 미국 공보원장 토마스 C.. 씨의 안내로 관람하는 대통령과 월터 다우링 대사 및 내외 귀빈들(각주 3)

사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이승만 대통령과, 주한 미국 대사였던 월터 세실 다우링(Walter Cecil Dowling) 등이 미국 공보원장의 안내를 받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전시에 있어 미국 공보원의 깊은 연루와 정치권에서도 관심이 대단했음을 시사하는 보도 사진이다.  

한편, 한국에서의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에 대한 당시의 관심은 이미 인간 가족전이 성공할 수 밖에 없는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휴머니즘과 리얼리즘의 연관성을 강조하면서 평론가인 윤희순은 예술이 희망, 신념, 일상의 행복을 전달해야 한다고 보았다.(각주 4) 비슷한 맥락에서 사진 평론가인 이명동은 시각 예술의 핵심은 인간적인 가치의 이해가 우선해야 하며 사진은 인간의 생활과 즐거움, 슬픔, 사랑, 미움, 가난 등의 진실된 측면을 재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매체임을 강조한다.(각주 5)

세계 1,2차 대전의 트라우마 속에서 휴머니즘과 실존주의가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에 철학적 지침으로서 서양의 각종 문화 사회적인 논의의 주제가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의 경험을 통한 아픈 경험을 치유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써 휴머니즘은 1950년대 한국에서의 주요한 문화적 담론으로서 인간 생활과 그 현실상에 관심을 보이고 표현하는 것을  예술의 주요 임무로 인식하고 있었다.(각주 6)

Fig.8 정범태, 서울 남산, 1955,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컬렉션 지평.

신선회 멤버였던 사진가 정범태는 인간에 관한 모든 사건은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언급하였다. 그 임무를 담당하는 사진은 그러한 이미지를 통해 희망과 행복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함과 더불어 사회적 합의와 동정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각주 7) 리얼리즘 사진과 휴머니즘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바탕으로 사진가들은 인간가족전 전시가 사진이 인간성 회복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믿는다. 임응식 또한 한국 사진가들의 휴머니즘에 대한 공통된 관심을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지 보여주는 분명한 모범으로서 인간가족전을 평가한다.(각주 8)

 

Fig.9 손규문, 서빙고 연작 (채빙) 1958,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컬렉션 지평.

인간 가족전 이후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인기가 더욱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각주 9) 각기 다른 문화권의 역사적 경험과 당위성을 바탕으로 한 휴머니즘에 대한 공통된 담론의 접합점이 미국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인간 가족전의 성공을 가져온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끝)

1 John A. Walker, “Context as Determinant of Photographic Meaning,” in The Camerawork Essays: Context and Meaning in Photography, ed. Jessica Evans (London: Rivers Oram Press, 1997), 56.

2 누락된 2장의 사진의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박주석 컬럼 사진살롱 38, 인간 가족전에서 사라진 사진 2”, 한국 이미지 언어 연구소 참고. http://visualanguage.org/archives/58830#

3 재건화보, 인간가족전”, 미국공보원 제 269호, 1957416일. 본문의 철자를 그대로 썼다.

4 최열, 한국현대 미술 비평사 (경기도 파주시: 청년사, 2012), 87쪽.

5 이명동 리얼리즘의 통일- 사진작가 협회 9회전을 보고, 동아일보, 1957, 1116일.

6 최열, 앞의 책, 149쪽, 154쪽.

7 임영균, 사진가와의 대화: 한국 사진을 개척한 원로 사진가 8인과의 대담 3 (서울: 눈빛 1998), 128-130쪽.

8 인간 가족전 (Family of Man)을 보고서-좌담회, 사진 문화, 19574월, 40-44쪽.

9 임영균, 앞의 책, 60쪽.

 

오혜리

Ph.D.,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Binghamton

전 Indiana University of Pennsylvania 조교수

현재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연구교수

 

한국 사진에서의 휴머니즘과 인간 가족전의 수용 (2) The Intersection of Humanism and the Reception of the Family of Man in 1950s Korean Photography

한국 사진에서의 휴머니즘과 인간 가족전의 수용 (2) The Intersection of Humanism and the Reception of the Family of Man in 1950s Korean Photography

한국 사진에서의 휴머니즘과 인간 가족전의 수용 (2) The Intersection of Humanism and the Reception of the Family of Man in 1950s Korean Photography
09/08/2021
/ 오혜리

한국 사진에서의 휴머니즘과 인간 가족전의 수용 (2)

The Intersection of Humanism and the Reception of the Family of Man in 1950s Korean Photography

 

3년의 준비 과정을 거쳐 1955년 1월에 전시는 마침내 대중에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503장의 사진은 인간 삶의 통과 의례 즉, 출생, 성장, 결혼, 죽음 등을 비롯하여 사랑, 신념, 행복, 희망 등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삶의 가치를 시각화 한다.(각주 1)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는 종교, 혁명, 선거, 어린이들의 이미지에서, 낙관적인 미래와 평화는 전시 도록과 전시장 곳곳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피리를 부는 페루인의 모습과 일상 속 인간의 화합적 모습을 통해 강조되었다. ‘휴머니티의 장엄한 해연’(grand canyon of humanity)(각주 2)을 재현하겠다는 전시의 핵심 서사는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통하여 전세계 인류의 공통된 경험을 담아내며 가시화된다.

인본주의적 해석이 가능한 사진 이미지와 함께 성경, 노자, 토마스 제퍼슨, 셰익스피어, 제임스 조이스, 안네 프랑크의 일기 등에서 발췌한 인용구들은 관객에게 삶의 통찰력을 제시하며 전시의 근본적인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장치로서 채택되었다. 이러한 기획을 통해 인간 가족전은 인종과, 국가, 역사, 사회적 배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관객의 감정과 정서에 호소력을 갖기에 충분했으며 의사소통의 가치 있는 중요한 도구로서 기능하였다.(각주 3)

 

Fig.4 인간 가족전 전시장 모습, 뉴욕, Museum of Modern Art, 1955, 롤프 피터슨 사진. MOMA 아카이브.

인간 가족전 전시 도록의 서문에서 칼 샌드버그(Carl Sandburg, 1878-1967)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There is only one man in the world

and his name is All Men

There is only one woman in the world

and her name is All Women

There is only one child in the world

and the child’s name is All Children.”(각주 4)

Fig.5 인간가족전 도록 표지, 1955.

이러한 전시 주제가 채택된 것에 대해서는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시가 기획된 1950년대는 세계 2차 대전의 여파로 황폐화된 세계를 재건하는 시기였다. 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의 예술은 인간에게 정서적, 심리적, 지적, 사회적인 성장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특히, 첨예한 이데올로기의 대치와 미래가 불확실한 냉전 시기에 예술은 인간의 상처 받은 영혼을 치유하고 휴머니즘적 가치를 지지하는 사회 문화적 효용을 갖는다. 전 세계를 하나의 가족으로 통합하는 ‘인간 가족’(family)이라는 개념은 20세기 중반에 인류가 경험한 비극적인 과거를 치유하는 동시에 미래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제시하고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Fig.6 인간 가족전 전시장 모습, 뉴욕, Museum of Modern Art, 1955, 롤프 피터슨 사진. MOMA 아카이브.

전시는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사진적으로 재현하였다는 점에서 세계의 관객은 열광했다. 그러나 대중적 상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로부터는 부정적인 평가가 이어졌다. 전시에 포함된 사진들이 본래의 의미를 갖는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맥락과 분리되어 피상적이며 감상적인 인간 가족이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재구성 되었다는 것이다.(각주 5)

이같은 맥락에서 사진 비평가인 알란 세큘라(Allan Sekula, 1951-2013)의 사진에 대한 정의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세큘라에 따르면, 사진이 과학 기술적인 특성을 바탕으로 현실을 기록하는 매체임에는 분명하지만 사진은 보편성, 객관성이 아닌 특정 시대의 전세계를 지배하는 힘의 논리에 따른 의도적 결과물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각주 6)

사진은 그 자체로는 미완성된 언설이다. 사진의 의미와 가치는 사진 이미지 자체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 안에서 결정된다. 따라서, 사진의 효용 가치와 해석 또한 사회 문화적인 담론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 인간 가족전 또한 특정한 역사적, 정치적, 국제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한 담론의 산물이었다. 세계 양차 대전으로 황폐해진 유럽 등 여타의 서방 세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타격을 적게 받은 미국이 냉전 시대의 첨예한 대립 속에 새로운 세계 질서의 패권국이 되었고 뉴욕은 문화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인간가족전의 세계 각지로의 순회 전시는 미국 정보국(USIA: The US Information Agency)의 후원으로 가능 했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USIA는 1953년에 국제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하고 국제 관계와 해외 정책을 개발하는 임무를 가진 기구로서 설립되었다.(각주 7) 결국, 지구촌 인간 한 가족이라는 휴머니즘적 개념은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적인 리더쉽 하에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에 미국의 정치, 문화적 패권을 가시화한 효과적인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3편에 계속)

1 Edward Steichen, The Family of Man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1955), 4–5; and “Photography: Witness and Recorder of Humanity,” Wisconsin Magazine of History 41, no. 3 (Spring 1958): 159–167.

2 Carl Sandburg, prologue to The Family of Man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1955), 3.

3 Monique Berlier, “The Family of Man: Readings of an Exhibition,” in Picturing the Past: Media, History and Photography, ed. Bonnie Brennen and Hanno Hardt (Urbana: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9), 218.

4 Carl Sandburg, prologue to The Family of Man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1955), 3.

5 Berlier, “The Family of Man: Readings of an Exhibition,” 221.

6 Allan Sekula, “Traffic in Photographs,” in Photography Against the Grain: Essays and Photo Works 19731983 (Halifax: Press of the Nova Scotia College of Art and Design, 1984), 96.

7 For details of the USIA, see Robert Elder, The Information Machine: The 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 and American Foreign Policy (Syracuse, NY: Syracuse University Press, 1968).

 

오혜리

Ph.D.,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Binghamton

전 Indiana University of Pennsylvania 조교수

현재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연구교수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6 – 도봉산 《망월암》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세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6 – 도봉산 《망월암》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세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6 – 도봉산 《망월암》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세 번째
09/08/2021
/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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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2020년 3월부터 강연이나 답사 같은 외부 일정이 대부분 취소되면서, 오랜만에 여유가 생겼다. 수입이 크게 줄었고 장기전에 돌입해 지루하지만, 어쩌면 내 인생에서 처음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진 셈이다. 덕분에 지난번에 소개했던 것처럼 올해에는 ‘퇴계 선생 낙향 길’ 따라 경복궁에서 안동 도산서원까지 9일 동안 걷기도 했고, ‘고구려를 그리다’(무우수갤러리, 2021. 6. 16~27)와 ‘이태호 그림(서울옥션 강남센터, 8.26~9.3)’ 두 번의 개인전을 연달아 가졌다.

코로나 초기 단계였던 작년 4, 5월에는 삼각산과 우이동 계곡에 이어 도봉산을 여러 차례 올랐다. 도봉서원과 천축사, 망월사, 오봉 등의 길을 따라 등반했다. 가끔 오른 게 1960~70년대 고등학교 대학 시절이었니, 정말 오래 간 만의 일이다. 이번에는 몇 번 완주를 시도하다, 5월에야 망월사에서 주봉까지 성공했다. 바위산 봉우리의 다양한 덩어리 형상이 빼어나고 전망 또한 일품이어서, 10여 점 넘게 스케치해 너무 뿌듯했다. 포대능선에서 본 선인봉 만장봉 자운봉이 키 재기 하며 어울린 자태가 최고였고, 그 오른편으로 전개된 산 능선들이 장관을 이루었다. (도 1)

하산해 도봉역에서 본 도봉 능선으로 지는 하얀 태양이 새롭게 인상에 남았다. 흰 바위산 봉우리들이 불쑥불쑥 솟은 서남쪽과 달리, 우이산 북한산과 능선이 연계되면서 도봉산의 동북 능선은 바위산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그 일몰 장면도 심쿵해 여러 장 스케치했었다. 옛 양주, 지금 의정부시에 속한 이쪽 풍광을 별도로 ‘원도봉산’이라 부른다. 도봉산의 원조, 혹은 가장 도봉산다운 장면이어서 그리 불릴만하다.

올해는 망월사에서 달뜨는 ‘망월(望月)’ 장면을 보려 시도했다, 망월사 보름달 보기 시간을 내내 맞추지 못하다가, 지난 음력 7월 보름 전날 비구름 사이로 떠오르는 수락산 월출을 찾아 가벼이 스케치했다. (도 2) 또 수락산 기슭에서 초가을 오후 해가 지는 도봉산 준봉들의 실루엣을 다시 그려 보았다. (도 3)

 

정수영의 발자취를 따라 망월사에 올라

도봉산 망월사에 오르고 수락산 계곡을 밟은 일은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의 《한·임강명승도권》에 등장한 <망월암>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신륵사를 필두로 2019년 5월부터 시작한, 지우재 정수영의 한강과 임진강 사생 현장을 이태 동안 틈틈이 모두 확인하는 일이 가능해 무엇보다 보람이 컸다. 현재 북한 지역에 속한 삭령(朔寜)과 토산(兔山)을 제외하고, 정수영의 여정 추적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정수영은 시흥에서 1797년 봄을 보낸 뒤, 도봉산에 올라 <망월암>을 방문했다. 이때 정수영이 시흥현령 김사희(金思羲, 1753~?)의 측근인 책방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을 터인즉, 김사희는 《한임강명승도권》의 마지막 삼성대와 낙화암을 그린 십여 년 전 정조 9넌(1785)에 토산현감을 지냈으니 정수영의 최종 여정과 무관하지 않을 성싶다. 도봉산 망월암은 양주(楊州)에 속했고, 그때 양주목사는 1797년 5월에 부임한 오정원(吳鼎源)이었다. 정수영과 관계가 드러나 있지 않지만, 대사간에 오른 문인관료였다.

<망월암> 그림은 중앙 근경 나무 한 그루가 봄 나무 같기도 하고 고사목 같기도 하고, 바위틈에 자란 앉은뱅이 노소의 소나무 세 그루에 계절감 표현이 또렷하지 않다. 뾰족뾰족 화면 가득 전개한 층층 바위들이 대충대충 그려 도봉산의 특정 봉우리의 개성적 이미지를 살려내지 못한 상태이다. 또 ‘망월암좌(望月庵左)’라고 그림 제목을 쓴 왼편 옆으로 긴 그림과 유사한 현장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화면의 짜임새도 얼기설기한 편이다. (도 4)

그런대로 정수영의 시점과 풍경 조합을 꾸려보자. 관음전, 천중선원, 심검당, 고불원, 영산전, 범종각, 칠성각, 문수굴 등이 들어선 지금의 망월사는 대부분 20세기 후반 이후 조성된 불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18세기 ‘망월암’의 가람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지 않고, 발굴이 시도된 적이 없어 명확히 규명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림의 두 기와지붕이 맞닿은 불전은 현재 벼랑에 세운 영산전(靈山殿)쯤으로 추정된다. 그림 가운데 사원의 뒷간인 듯한 단칸 초가가 소나무와 배치되어 있다.

벼랑 계단을 올라 바위 샘과 문수골, 현재의 영산전 칠성각 영역 정도가 19세기 옛 절터의 공간으로 여겨진다. 범종각에서 볼 때 정수영의 <망월암> 전체 풍경이 잡힌다. 그리고 그림의 암산 봉우리들은 영산전의 서북향 천중서원(天中禪院)과 심검당 마당에서 둘러보아야 칠성각 위로 병풍처럼 전개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도 5, 6) 멀리 본 경치와 가까이 본 풍광을 합성한 방식으로, 사실 묘사를 소홀히 한 점과 더불어 겸재 정선의 화법을 참작한 셈이다.

<망월암> 그림에서 근경 오른편 돌계단 위 불전 건물 아래에 비석을 유난하게 강조해 놓은 점이 눈길을 끈다. 위치와 형태로 미루어 1797년 윤6 월 수관거사 이충익이 비문을 짓고 쓴 천봉 대선사 태흘의 탑비로 여겨진다. 망월사 경내에 오래된 비석은 이게 유일하다. 경기도 문화재자료인 ‘망월사천봉선사탑비(望月寺天峰禪師塔碑)’에는 ‘朝鮮國 天峯 大禪師 碑銘 水觀居士 李忠翊 撰幷書篆 嘉慶二年 丁巳 閏 六月 日立’라고 밝혀놓았다. 현재 영산전 아래 문수굴 벼랑 길에 설치된 이 비는 석조승탑과 나란히 옛 모습 그대로인 듯하다. 탑과 비가 좁은 공간에 서 있는 데다, 벼랑 암벽에는 “嘉義 金順民, 嘉善 金順孝, 嘉善 李孝載, 通政 朴龍雲, 通政 金尙泰” 등 시주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도 7, 8)

정수영이 승탑을 그려 넣지 않은 채, 옥개석을 갖춘 비석만을 강조한 것은 비문을 짓고 쓴 이가 수관거사 이충익(1744~1816)인 까닭 아닌가 싶다. 이충익은 정파로 보면, 소론에 해당하며 강화학파의 핵심 일원이었다. 하곡 정제두의 양명학을 계승하여 ‘진가(眞假)’를 구별에 엄격하였으며, 유교 이념을 내세운 허위의식에 비판적이었으며, 노장(老莊)과 불교를 통섭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며 대립했을 때 집안이 몰락하자 특히 불교에 심취하였고, 승려 혜운(慧雲)과 동거하며 강화도(江華島) 마니산(摩尼山) 망경대(望京臺) 암자에서 폭포암주인(瀑布庵主人)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해서(楷書)와 초서(草書)를 잘 썼으며, 조선 후기 조선 서풍의 개성미를 뽐내는 원교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가 5촌 아저씨로 그를 따랐다. 이충익의 ‘망월사천봉선사탑비(望月寺天峰禪師塔碑)’ 글씨는 갸우뚱한 원교체 서풍을 따르면서 왕희지체 행서 맛을 살려 붓 흐름이 유려한 편이다. 이광사는 이충익이 불교에 너무 깊이 심취한다고 염려했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이충익이 비문에 ‘몸은 단정하고 귀와 입은 크고 눈은 샛별처럼 빛이 났고, 복덕지혜(福德智慧)를 다 갖추었다’라고 태흘에 대해 상찬한 것을 보면, 34세 연상인 노승 태흘과 친분도 도타웠던 듯하다. 84세에 입적한 천봉대선사(天峰大禪師) 태흘(泰屹, 1710~1793)은 명탁(名琢), 도원(道圓), 은월 우점(隱月雨霑), 풍계 해숙(楓溪海淑) 등 당대 고승의 법을 계승한 서산대사의 5세손이다. 환열(幻悅) 묘일(妙一) 낭규(朗奎) 등 제자가 10여 명에 이르며, 수백 명이 넘는 승려가 계율을 받았다고 전할 정도로 평판이 높았다. 입적 후에는 배천의 호국사, 문화의 월정사, 양주의 망월사에 각각 승탑을 세웠다. 망월사 태흘의 석조승탑은 전통적인 네모 기단에 팔각원당식으로 조선 후기에 유행한 형식이며, 입적 다음 해인 1794년 3월 1일에 조성했다. 탑신에는 “西山 五世孫 天峯堂 泰屹之塔 崇禎 紀元後 三 甲寅 暮春 一日 完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도 9)

<망월암> 화면에 강조된 비석은 1797년 윤6 월 이후 그려진 시기를 말해준다. 이충익과 관계가 있을 거라 상정하면, 정수영의 망월사 방문이 1797년 윤6 월 태흘 탑비 건립과 무관하지 않았을 법하다. 이들의 구체적인 행적이 밝혀진 게 없지만, 당대 유불 인사들의 교류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도봉산(道峰山) 망월암, 곧 지금의 망월사는 신라 선덕여왕과 8년(639) 해호(海浩)가 창건했고, 신라 말기 경순왕의 태자가 은거했다고 전하는 천년 고찰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랜 유적은 고려 문종 시절 중창한 혜거국사(慧炬國師) 승탑이 전한다. 신라 팔각원당 형식을 토대로, 고려청자가 절정을 이룬 12세기였던 만큼, 단아한 구성과 형태를 뽐낸다. 노송과 어울려 있어 스케치해두었다. (도 10) 최근 2017년 본디 영국사 터였던 도봉서원 발굴에서 혜거국사 비편이 나와, 고려 시대 도봉산의 불교 유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조선 시대에 들어 숙종 때 동계(東溪), 정조 때 영월(暎月)과 태흘(泰屹), 고종 때 완송(玩松) 등이 중창을 거듭했으며, 근대에는 만공(滿空)·한암(漢巖)·성월(惺月) 등이 주석하여 천중선원(天中禪院)을 이루었다.

 

수락산 기슭 박세당 묘역

그림 위에는 여느 장면처럼, “내가 예전에 이곳 반남 박씨의 양대 무덤을 보았다. 더할 나위 없는 명당이었다. 지사(地師) 박상의가 점찍은 장소이다. (余曾見此潘南朴氏 兩代墳山 儘名墓 朴師尙毅所占云〭)”라는 강관의 발문이 있다. 태흘 탑비에 대한 언급은 없고, 느닷없이 반남 박씨 묘역을 거론한 대목에서 강관의 글이 막상 정수영의 그림과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수영과 그림을 함께 보며 발문을 적은 게 아닌 모양이다. 또 글을 쓴 시점이 그림보다 상당히 뒤에 별도로 이루어진 것 같다.

여기서 반남 박씨 묘역에 관한 언급은 집권 노론 계열에 대립했던 정파를 떠오르게 한다. 반남 박씨 양대 무덤은 망월사 동쪽 맞은편 일출과 월출을 굽어보는 수락산 기슭 박세당과 박태보 부자의 묘역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묘역에는 박세당 묘소를 중심으로 아들 태유와 태보의 묘가 좌우로 배치된 명당이다. 양대 묘 외에 박세당의 셋째 형 박세후, 손자나 증손자부터 11세손까지 가족묘가 산재해 있다. 또 이곳은 박세당의 은둔처이자 후학을 배출한 터전이었고, 도성 문사들이 풍류 유람을 즐기던 명소로 꼽힌다. 박세당 고택은 1950년 6.25 전쟁 때 소실되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랑채를 비롯하여 조세걸이 그렸다는 유복 차림의 <박세당 초상>이 후손들에 의해 보존 관리되어왔다.

강관이 언급한 박상의(朴尙義, 1538-1621)는 조선 시대 풍수론의 전설이다. 그가 점지한 장소이니만큼 최고의 장소이다. 현재 의정부시 장암동 소재 수락산의 서쪽 기슭에서 도봉산을 끌어 앉은 형국으로, 음택과 양택을 같은 공간에 어울려낸 절묘한 터임을 실감한다. 사랑채 앞마당 4~5백년 수령의 은행나무에서 동쪽을 올려 보면, 수락산 정상이 감싼 안온한 공간이다. (도 11) 사랑채 마루나 묘역에서 전망하면, 선인봉·만장봉·자운봉의 도봉산, 우이산, 인수봉·백운대·만경대의 삼각산 능선이 장관으로 펼쳐져 있다. (도 12)

박세당은 이들 기암절벽의 도봉산과 삼각산을 ‘망산(望山)’이라 지칭했다. 또 고택 아래 시내부터 수락폭포까지 계곡은 박세당의 자연을 벗한 은둔과 풍류 터였다. 고택 앞 오른쪽 제자들과 학문을 쌓던 너럭바위와 어울린 궤산정(簣山亭) 터에 바위글씨 ‘西溪幽居’ ‘石泉洞’ ‘取勝臺’가 전한다. 청풍정(淸風亭)이 있는 ‘水落洞天’에는 현재 노량진에서 옮겨온 박태보의 노강서원이 들어서 있고, 그 안쪽에 석림사, 중턱의 수락폭포 역시 박세당의 산보 공간이었다. 석림사(石林寺)는 박세당 집안의 원당 사찰 격이며, 박세당이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던 곳을 기리기 위해 조성했다고 전한다. 이곳 계곡을 박세당은 ‘동강(東岡)’이라 불렀다.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 1629~1703)은 숙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문인관료이자 학자로 ​주자학을 비판한 견해 탓에 송시열 일파의 노론계(老論系)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고, 윤증(尹拯)을 비롯하여 박세채(朴世采), 처남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 주로 소론계와 어울렸으며 실사구시학의 선구로 꼽기도 한다. 아들 정재 박태보(定齋 朴泰輔, 1654~1689) 또한 문인관료로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 반대를 주동하였던 탓에 혹독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진도로 유배 가다 노량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곳을 기리며 노강서원(鷺江書院)이 조성되었다. 김시습, 박세당·박태보 부자, 이충익과 승려 태흘, 강관과 정수영 등 모두 당대 현실 권력에서 떨어진 인사들인 점을 눈여겨볼 때, 여기서도 정수영이 그린 《한·임강명승도권》의 정치지형을 읽을 수 있겠다.

 

지우재 정수영의 발걸음은 망월사를 거쳐 도봉산 주봉 남쪽 중턱에 있는 옥천암으로 옮겼다. 현재 천축사로 이름이 바뀌어 있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한국 사진에서의 휴머니즘과 인간 가족전의 수용 (1) The Intersection of Humanism and the Reception of the Family of Man in 1950s Korean Photography

한국 사진에서의 휴머니즘과 인간 가족전의 수용 (1) The Intersection of Humanism and the Reception of the Family of Man in 1950s Korean Photography

한국 사진에서의 휴머니즘과 인간 가족전의 수용 (1) The Intersection of Humanism and the Reception of the Family of Man in 1950s Korean Photography
09/01/2021
/ 오혜리

한국 사진에서의 휴머니즘과 인간 가족전의 수용 (1)

The Intersection of Humanism and the Reception of the Family of Man in 1950s Korean Photography(각주 1)

 

신선회는 그룹의 길지 않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리얼리즘 사진이라고 알려져 있는 생활주의 사진의 개념과 비전을 이해하고 사진적 활동으로 실현시키려는 노력을 한 단체라는 점에서 1950년대 한국 사진사에서 그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각주 2)

1956년에 설립된 신선회는 이형록, 조규, 이안산, 손규문, 정범태, 이해문, 한영수, 안종칠 등을 포함한 19인의 리얼리즘 사진가들을 회원으로 조직되었다.(각주 3) 당시 전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공통된 영향력 있는 사상의 흐름 중 하나는 리얼리즘이었다. 1950년대 당시 한국에서도 리얼리즘이라는 담론은 다양한 사회 문화 공간과 예술 제도권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한국의 역사적 경험, 즉 식민 시대와 한국 전쟁, 그리고 권위주의 정치 체제를 경험한 사진가 및 예술가들이 그 역사적 상황을 통해 노정된 사회 문제 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리얼리티를 반영하려는 한국 사진가들의 사진의 지향점은 일제 강점기의 주된 사진 경향이었던 감상주의적이며 회화적인 사진의 경향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했으며, 사진계 뿐 아니라 식민지 근대성에 도전하는 사회 각 분야의 반식민이라는 정치, 사회, 문화적 합의와 역사적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신선회에 소속된 사진가들은 고양된 리얼리즘 의식을 바탕으로 사회적 현실에 관심을 보였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 속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고 인간 삶의 자취를 흑백 사진 이미지를 통해 재현하였다. 그러한 그들의 의도는 1957년 4월 동화 백화점 (현재 신세계) 화랑에서 열린 신선회 창립전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총 2부로 구성된 전시에서 1부는 자유 주제를 2부는 “시장의 생태”라는 테마로 우리의 일상과 근접한 시장을 소재로 새벽, 정오, 밤 풍경을 담은 작품들이 전시되었다.(각주 4)

 

Fig.1 이해문 (1922-1981), 순대국집, 1950년대,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 컬렉션 지평

물론 1950년대의 한국적 리얼리즘 사진을 추구해 가는 과정에 있어 그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일제 시대에 사진을 시작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자연의 서정성이나 조형적인 스타일을 강조한 회화적 사진 경향을 주도한 매스미디어, 전시, 그리고 공모전에서 제시한 규범에 직간접적으로 익숙해져 있었다. 그 이전과는 달라진 시대적 배경이나 사회적 담론, 사진가의 의식을 그러한 회화적 사진 스타일과 주제로는 충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은 사진가 스스로에게는 한계이며 극복할 문제로서 인식된 것이 사실이다.(각주 5)

그러나 1950년대에 임응식은 한국 리얼리즘 사진의 개념적 카테고리를 생활주의 사진이라는 용어를 통해 정의함에 있어 생활주의 사진이 한국 전쟁 후의 시대 상황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사진 주제에 접근하고 과장됨 없이 사회적 ‘진실’과 인간의 관심사인 일상생활을 객관적으로 재현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하였다.(각주 6) 사진가인 이해선 또한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사진은 인간의 생활을 재현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휴머니즘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인간의 본질을 담아내기 위해 사진 매체의 기술과 사진가의 예술적 창의성 뿐 아니라 인간의 삶을 공감하고 정서적으로 이해하며 포착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각주 7)

사실 이러한 휴머니즘에 대한 중요성은 한국 뿐 아니라 세계 대전 이후 전 세계의 공통적인 관심이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 하에서 1957년 4월 3일부터 28일까지 한국의 경복궁 갤러리에서 인간 가족전 전시가 성공리에 개최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하겠다.(각주 8) 사진가 임응식은 인간 가족전이 휴머니즘에 대한 한국 사진의 관심을 실현시키는 방향을 제시한 원형이 될 것이라고 평가하였다.(각주 9) 또한 사진가 이형록과 정범태 등 당시 한국의 리얼리즘 사진가들은 인간 가족전을 통해 다큐멘터리 사진이 지향하는 정신적 가치를 발견하고 사진 활동에 있어 중요한 영감의 근원이었다고 평한다.(각주 10) 그렇다면 인간 가족전이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역사적 맥락(context; historical contingencies)은 무엇이었는지, 전 세계 질서의 재편 속에 휴머니즘이 주된 담론으로 중요성을 획득한 이유는 무엇인지, 또한, 한국의 특수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한국의 리얼리즘 사진가들은 인간 가족전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수용했는지 등에 대해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Fig.2 이형록, 형제, 1958,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 컬렉션 지평

인간 가족전은 뉴욕 Museum of Modern Art (MOMA)의 사진부 디렉터였던 에드워드 스타이켄 (Edward Steichen, 1879-1973)이 기획한 전시로 1955년 1월 24일부터 5월 8일까지 MOMA에서 개최되었다. 이 전시는 미국 정보국 (USIA: The US Information Agency)이 후원을 통해 깊이 개입했으며 영국, 독일, 벨기에, 이태리, 프랑스, 일본, 이란, 버마, 인도네시아, 호주, 베네수엘라, 칠레, 한국 등 전 세계 순회 전시가 이루어졌다. 사진의 근, 현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고 지구촌 곳곳의 사진 문화에 영향력을 행사한 전시라는 것은 수치상으로도 그대로 드러난다.

Fig.3 인간 가족전 전시장 모습, 뉴욕, Museum of Modern Art, 1955, 롤프 피터슨 사진. MOMA 아카이브

1955년부터 1959년까지 미국과 캐나다 두 국가에서만도 1,200,000여 명, 그 이외 여타의 국가들에서는 7,500,000여 명의 관객이 전시를 관람하였다. USIA의 기록에 따르면 한국에서 열린 인간 가족전에는 420,000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간 가족전 전시 카탈로그는 1956년에서 1979년까지 2,777,000권이 판매 되었다.(각주 11) 전시를 위해 스타이켄이 전 세계에서 2백만 장의 사진을 제출 받았으며 당시 포토저널리즘의 대표적인 잡지였던 Life, Look 과 더불어 Magnum의 수많은 사진 아카이브를 검토하였고(각주 12) 최종적으로 68개국 273명의 사진가들의 작품 503장을 전시하는 사진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전시회였다.

(2편에 계속)

1 이 글은 필자의 “Photography, Technology and Realism in 1950s Korea,” in Future Yet To Come: Body, Life, and Sociotechnical Imaginaries in Modern Korea, edited by Sonja M. Kim and Robert Ji-song K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21)의 소부분을 이 컬럼을 위해 편집, 번역, 개정하였다. 총 3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2 이형록, 정범태, 한영수는 한국의 리얼리즘 사진의 전개에 있어 신선회의 역할을 중요한 것으로 평가한다. 임영균, 사진가와의 대화: 한국 사진을 개척한 원로 사진가 8인과의 대담3 (서울: 눈빛, 1998) 참고.

3 박주석, “해방 후 1950-1960년대 한국 사진의 전개와 성과”, 한국 현대 사진 60년, 1948-2008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20쪽.

4 조명원 (편집부), “신선회 사진평-제1회 발표전을 보고”, 사진 문화, 1957년 4월, 89쪽.

5 임영균, 사진가와의 대화, 78쪽.

6 임응식, “한국 사진계의 현황-작화 경향을 중심으로,” 서울신문, 1950년 8월; “사협전을 보고-생활직시,” 주간 희망. 1957년 12월. 임응식의 글은 임응식 회고록: 내가 걸어온 한국 사단 (서울: 눈빛, 1997), 277쪽과 287쪽에 포함되어 있다.

7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이해선 (사연) 임응식 (사협),” 사진문화, 1957년 1월, 49-50쪽.

8 서울신문, 1957년 3월 28일 “인간가족 사진전” 기사에 따르면 USIA에 의해 원래는3월 28일부터 열릴 예정인 전시가 준비 지연 문제로 4월 3일부터 개최된다고 전하고 있다.

9 “인간 가족전 (Family of Man)을 보고서-좌담회,” 사진 문화, 1957년 4월, 40-44쪽.

10 임응식, 이형록, 최민식, 이경모 등은 임영균 과의 인터뷰에서 인간 가족전이 미친 영향에 대해 언급한다. 임영균, 사진가와의 대화.

11 위의 관객 동원과 도록 판매 수치 등은 뉴욕 현대 미술관 아카이브의 자료를 참고하였다.

12 Monique Berlier, “The Family of Man: Readings of an Exhibition,” in Picturing the Past: Media, History and Photography, ed. Bonnie Brennen and Hanno Hardt (Urbana: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9), 213.

 

오혜리

Ph.D.,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Binghamton

전 Indiana University of Pennsylvania 조교수

현재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연구교수

 

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8 》 : 노에마 그 쓸쓸함에 대하여

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8 》 : 노에마 그 쓸쓸함에 대하여

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8 》 : 노에마 그 쓸쓸함에 대하여
08/25/2021
/ 김혜원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 있다. 강물이 그렇고 시간이 그렇다. 모든 죽음이 그렇고 때론 사랑마저 그렇다. 다행히 지시대상의 물리적 현존인 사진은 그 지표(指標, index)적 특성으로 그것들이 한때 존재했었음을 보여준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이를 ‘노에마(noèma)’라 부르며, ‘존재 증명과 부재 증명’으로서의 ‘노에마’를 사진의 본질로 보았다. 즉 그는 ‘존재했던 것’만을 다루는 사진에 시간의 문제를 연결하여, 사진에는 과거와 현재의 두 시제가 결합되어 있다고 말한다. 사진은 ‘그것은-존재-했었음(ça-a-été)’을 통해 대상이 현실적인 것(그것은-존재-했음)이었음을 인증하면서 동시에 지금은 그 대상이 죽어버린 것(그것은-여기에-없음)임을 증명한다. 그 결과 단지 ‘그것이 있었다’라고만 말하는 이 ‘노에마’로서의 사진은 우리의 경험을 입증하고 그 사진적 진실로 이미지에 권위를 부여하게 된다. 나아가 과거의 실재성을 현재 시점에서 보여주는 과정에서 시간의 흐름을 증언하면서 다가올 미래를 예상하게 한다.

나를 보고 있다, 카메라를 쳐다보는 순간 정지되어 있는 나를, 스물두살에서 정지된 내 나이를, 48킬로그램에서 정지된 내 몸무게를, 아직도 30년 전의 짜장면을 소화시키고 있는 내 배를, 무엇이 즐거운지 이빨이 다 보이도록 벌어져 있는 내 웃음을, 웃음 때문에 증오가 조금 지워지고 있는 내 표정을, 웃음 속의 내 치석을

 

<중략>

 

나를 보고 있다, 찬물에 빨랫비누로 머리 감은 나를, 빵구난 양말을 구두로 가리고 있는 나를, 누런 냄새 나는 속옷을 양복으로 가리고 있는 나를, 겁 많은 눈을 어색한 웃음으로 가리고 있는 나를, 자폐적인 수줍음을 겸손처럼 보이는 침묵으로 간신히 가리고 있는 나를, 빛에 낱낱이 드러났는데도 여전히 사진 속에서 숨을 곳을 찾는 나를
 
내가 보고 있다, 소닭돼지를 열심히 씹어 비듬과 무좀으로 만들고 있는 내가, 옆머리를 빗어올려 가까스로 가린 대머리로 무언가를 생각하려고 애쓰는 내가, 건조되고 있는 안구로 자꾸 무얼 보려는 내가, 뒤꿈치에서 각질이 벗겨지는 발로 어딘가를 부지런히 가고 있는 내가, 아직도 수염에서 슬픔과 두려움이 자라고 있는 내가

 

-김기택, 옛날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부분

관찰 대상의 세부를 마이크로렌즈로 접사하듯 사실적이고 즉물적으로 묘사하는 기법으로 시와 사진의 상호텍스트성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 시인 김기택의 「옛날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은 두 장의 ‘Before-After’ 사진을 통해 자신이 한때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었는지’를 증언하고 있는 시이다. “나를 보고 있다”로 시작하는 1연과 3연에 제시된 두 장의 사진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된 시적 자아의 모습이 세밀히 묘사되어 있다. “스물두살”에 찍은 ‘Before’ 사진에서 시적 자아는 “카메라를 쳐다보”며 “이빨이 다 보이도록”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다. “증오가 조금 지워”질 정도의 밝은 웃음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 찍은 ‘After’ 사진에서 그는 “겁 많은 눈을 어색한 웃음으로 가리”고 “자폐적인 수줍음을 겸손처럼 보이는 침묵으로 간신히 가리”며 “사진 속에서 숨을 곳을 찾”고 있다. “스물두살에서 정지된” “나”보다 불안한 모습이자 위선과 가식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이렇듯 두 장의 “옛날 사진”은 인물의 인상을 왜곡 없이 즉각적으로 전달하면서, 과거에 ‘존재했었던’ 그러나 현재는 찾아볼 수 없는 지난 모습을 증언하는 물리적 현존으로서의 ‘노에마’로 작용하고 있다.

 

니콜라스 닉슨, 브라운 자매, 1975

니콜라스 닉슨, 브라운 자매, 2000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시퀀스 방식으로 가족이나 주변 인물의 삶을 지속적으로 기록해 온 니콜라스 닉슨(Nicholas Nixon)의 《브라운 자매(The Brown Sisters)는 그의 아내 베베의 네 자매를 43년 동안 매년 한차례씩 촬영하여 8×10인치 대형 포맷의 섬세한 밀착인화로 보여준 43장의 연도별 연작 사진이다. 현재 MoMA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이 시리즈는 1975년 첫 사진 이후로 2017년 마지막 사진까지 인물의 순서(왼쪽부터 둘째 헤더, 막내 미미, 첫째 베베, 셋째 로리)를 바꾸지 않고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모습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게 하여 시간 앞에서 인간의 모습이 어떻게 변모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1975년 첫 사진에서 껄렁한 포즈의 앳된 자매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삶을 마주하며 당당하게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죽었다. 2000년도 사진에서 노년을 바라보는 자매들은 세월의 흐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앞으로 더 늙을 것이고, 죽음에 한 걸음씩 더 가까워질 것이다. 이렇듯 오랜 시간이 퇴적된 초상 사진은 삶의 무상함을 불러일으키고 자매의 죽음까지 예견케 하며 삶과 죽음과 한 세대의 냉혹한 소멸을 생각하게 하는 ‘노에마’로 기능하고 있다.

바르트의 ‘노에마’ 역시 ‘존재 증명 부재 증명’의 인증 기능을 넘어 육체와 죽음과 사랑을 말한다는 데 핵심이 있다. 바르트에게 ‘노에마’는 지시대상이 육체의 죽음처럼 치명적일 때, 자신과 사랑의 관계로 이어져 있을 때 더 강력한 푼크툼(punctum)으로 다가온다. 김기택과 니콜라스 닉슨 또한 육체에 스며든 시간과 미래에 닥칠 죽음을 극복하는 힘을 자기애나 가족애로 보여준다. 김기택은 “옆머리를 빗어올려 가까스로 가린 대머리”나 “건조되고 있는 안구” 등 시적 자아의 육체를 미세현미경으로 클로즈업하여 해부학자의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무력하게 늙어가는 왜소한 자신을 부정하는 이 냉소적이고 자기 환멸적 묘사는 자기애를 찾고자 하는 자아 성찰의 과정이었다. 닉슨은 시간에 의해 변화되는 육체의 개별적 형태뿐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이어져 변하지 않는 혈연의 관계성까지 보여준다. 각각 떨어져 도도하게 서 있던 네 자매는 세월이 흐를수록 서로를 향해 다가서고 끌어안고 기대면서 점점 끈끈해진 가족애를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한 장의 사진에는 죽음을 가리키는 절박한 기호가 각인되어 있고, 우리는 미래에 닥칠 우리의 죽음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누구에게나 속절없이 봄날은 지나갈 것이고, 예고 없이 죽음은 도착할 것이다. 사진의 ‘노에마’는 강물 같은 시간의 흐름 앞에서 누군가 부재의 흔적을 소환하여 그의 실존을 되찾고자 할 때, 그 쓸쓸함을 견뎌낼 수 있는 유력한 조건이 탯줄처럼 단단하게 결속된 ‘사랑’임을 일깨우고 있다.

 

* 『열린정신 인문학연구 제19권 제1호에 게재한 논문 일부를 인용, 재구성하여 쓴 글입니다.

 

김혜원(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연구교수,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