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3 》 : 암실의 추억

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3 》 : 암실의 추억

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3 》 : 암실의 추억
04/07/2021
/ 김혜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자신이 쓴 사진론 제목을 ‘어두운 방(camera obscura)’이 아니라 ‘밝은 방(camera lucida, 원제 La Chambre claire)’으로 붙일 정도로, ‘카메라 옵스큐라’에서의 프로 사진가가 찍은 세련된 기호로서의 예술 사진보다 ‘카메라 루시다’에서처럼 아마추어 사진가가 찍은 원초적인 이미지를 더 편애하였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무수한 아마추어들의 원초적 이미지들을 양산하며 포토샵으로 대표되는 건식 명실(明室)에서 제작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아날로그 사진은 ‘촬영(shooting)-현상(developing)-인화(printing)’라는 일련의 ‘프로세스(process)’를 거치며 습식 암실(暗室)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사진 이미지가 광학 장치를 통해 상(像)을 형성하는 물리적인 작용뿐만 아니라 물체에 닿은 빛에 대한 할로겐화은(AgX)의 감응이라고 하는 화학적인 작용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사진의 영상화 과정에서 중요한 물리적 요소는 빛과 어둠이고, 암실은 이 빛과 어둠이 변증하는 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사진기 몸통 속의 세계,

   보라, 이 어둡고 한정된 공간 속으로

   새어들어오는 빛의 눈부심을

   나는 별빛의 렌즈를 통해, 움직이는 매혹

   그 존재의 신비를 희미하게 목격할 뿐이다

 

   난 넋을 미치도록 쥐어짜, 發光한다

   저 무심한 우주의 필름 속에, 살아 펄떡대는

   이 호흡하는 순간의 관능을 새겨놓기 위하여

   문득, 몸 안에 저장된 태양빛의 기억이

   투명한 강물의 인화지로 나를 이끈다

   마음을 놓아두고 강물에 안겨버린

   그림자, 욕망이 떠나버린 내 현생의 폐허

 

   나는 홀로 태어났고 홀로 죽어갈 것이다

   삶이란 외마디 발광,

   죽음 앞에서 미칠 수 없다면

   이 생명의 황홀한 빛은 나를 맛보지 못하리

   흐르는 물비늘 위의 은빛 정지,

   고독한 자들은 시를 찾아 떠돌고

   우주는 그들을 위해 영원의 오르가슴을 예비한다

 

   난 잠시 죽음을 놔두고 그림자 숲속으로 간다

 

   -유하, 「사진기 속의 우주」 전문

유하의 「사진기 속의 우주」는 우주라는 세계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방식을 ‘암실’에서의 사진 제작 과정에 비유하여, ‘사진기’로 구현되는 영상 매체의 예술 세계를 지향하는 자신의 예술관을 드러내고 있는 메타시이다. 그것은 시로 등단하기 이전 단편 영화를 제작한 영화감독으로서의 유하가 사진의 제작 공정 및 사진 이미지에 의미가 생성되는 방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둡고 한정된 ‘카메라 옵스큐라’ 안의 ‘렌즈’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통해 존재의 신비를 목격하는 ‘눈’에서 출발하여 그의 예술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사진 제작 ‘프로세스’에 따라 전개해 나간다. 즉 ‘태양빛의 기억’이 ‘현상액’과 ‘정지액’이라는 ‘투명한 강물’ 속 ‘흐르는 물비늘’의 ‘교반(agitation)’ 과정을 거쳐 ‘은염’이 발린 ‘인화지’ 위에 ‘은빛 정지’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그림자[影]’라는 환영(幻影)의 세계를 지향하면서 우주의 ‘필름’ 속에 살아 호흡하는 순간의 관능을 새겨놓고 세계와의 동일화, 그 ‘영원한 오르가슴’을 꿈꾸는 높은 예술적 이상과 쓸쓸한 작가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Richard Nicholson, darkroom series, 2013

리처드 니콜슨(Richard Nicholson)의 <암실 시리즈(darkroom series)>는 사라져가는 습식 암실을 촬영하여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이미지 제작 방식의 변화를 상기시키고 있는 메타사진이다. 벽으로부터 반사된 빛이 필름이나 인화지에 닿지 않도록 까맣게 칠해 놓은 벽이 매우 인상적인 이 암실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사진이라는 매체의 물질성이다. 두 대의 테이블 위에는 각각의 확대기가 놓여 있다. 오른쪽 테이블 모퉁이에는 빛의 기억을 저장해 놓은 현상된 필름이 놓여 있다. 이 네거티브 필름을 확대기의 캐리어에 끼우고 초록상자 속 후지 인화지나 흰색상자 속 일포드 인화지에 노광(露光)을 한 후 현상액과 정착액의 화학적 처리 과정을 거치면 인화지 위에 상(像)이 정착되는 것이다. 리처드 니콜슨은 사진 발명 이래로부터 포토샵이 등장한 1990년까지 150여 년간 지속되어 온 기술적 복제 과정이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물질성과 프로세스에 기반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카메라가 디지털카메라로, 필름이 메모리카드나 하이드라이브로, 습식 암실과 광학 확대기가 컴퓨터의 이미지 조작 소프트웨어의 알고리즘으로 대체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유하의 시나 리처드 니콜슨의 사진은 빛과 어둠이 변증하는 시공간으로서의 ‘암실’과 ‘확대기’와 ‘프로세스’가 이진 코드 0과 1이 증폭하는 시공간으로서의 ‘모니터’와 ‘포토샵’과 ‘프로그램’으로 바뀐 오늘날 이미지 제작 환경에서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즉 이들의 시와 사진은 아날로그 사진 영상의 제작 원리에서 절대적 의미를 갖는 ‘암실’의 역할을 새삼스레 환기시킨다. 다만 유하는 ‘암실’의 작업 과정을 통해 작가의 창조적 정신성을 더 강조하였고, 리처드 니콜슨은 ‘확대기’나 ‘필름’이나 ‘인화지’와 같은 사진 매체의 물질성을 더 강조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작가의 창조적 정신성과 매체의 물질성이 바로 모더니즘을 이끌어 온 핵심 축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진론 『밝은 방』을 저술하면서 구조주의 이론가에서 후기구조주의 이론가로 전향하여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고 ‘독자’의 지위를 부상시켰던 바르트가 ‘어두운 방’이 아니라 ‘밝은 방’을 편애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열린정신 인문학연구』 제19권 제1호에 게재한 논문 일부를 인용, 재구성하여 쓴 글입니다.

 

김혜원(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연구교수, 사진가)

청출어람 청어람

청출어람 청어람

청출어람 청어람
03/31/2021
/ 박평종

이미지 생성 알고리즘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가장 주목을 끄는 모델은 생성적 적대신경망(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 이하 GAN)으로 2014년에 처음 발표된 후 놀라운 성장을 거듭해 왔다. GAN의 원리를 적용하여 이미지 생성에 활용한 알고리즘은 매우 많고 분야도 다양한데, 그 중 하나가 TPGAN(Two-Pathway GAN)이다. 이 알고리즘은 측면 사진에서 정면 사진을 정확히 합성해 내는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보여주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대부분의 인공지능이 그렇듯이 이 알고리즘도 사람의 사고 과정을 모방한다. 사람이 측면 얼굴에서 정면 얼굴을 유추해 내는 과정을 응용하는 것이다. 사람은 우선 관찰을 통해 측면 정보를 탐색한다. 당연히 별 소득은 없다. 하지만 불확실한 정보를 추론의 재료로 삼아 얼굴에 대한 사전 지식과 비교한다. 정면 얼굴에 대한 지식은 예컨대 두 눈은 평행상태로 놓여있고 코는 수직으로 얼굴의 중앙에 위치하며, 입은 코의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다는 등이다. 이를 바탕으로 정면 얼굴에 대한 전반적인 구조를 추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음에는 정면의 디테일을 추정하여 얼굴의 전반적인 형태를 산정한다. 옆에서 본 눈이 둥근 형태인지 길게 늘어진 형태인지, 코가 뾰족한지 뭉툭한지, 코와 입의 간격은 어느 정도인지 등 구체적인 세부를 추정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의 기억은 부정확하여 얼굴의 모든 형태를 정확히 상상을 통해 얻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어느 정도 근사치에 도달할 수는 있다. 목격자의 기억에 의존하여 몽타주를 그럴싸하게 그려내는 경우처럼 말이다.

어쨌든 TPGAN도 이런 프로세스를 따른다. 전체경로(Global Pathway)라 불리는 첫 단계에서는 얼굴의 전체 구조를 추정하고, 두 번째 단계인 국부경로(Local Pathway)에서는 얼굴의 부분적인 디테일이 전체 구조에 부합하도록 합성을 진행한다. 이 둘을 통합시켜 최종 결과물을 얻어내는데 여기서 GAN의 기본 구조인 생성자(Generator)와 판별자(Discriminator)의 역할이 중요하다. 생성자는 위의 두 경로에서 추출한 데이터를 통합하여 정면 얼굴의 픽셀값을 계산한다. 판별자는 생성자가 산출한 데이터가 얼마나 실재와 가까운지 비교를 통해 식별을 진행한다. 당연히 초기 단계에서 측면사진과 정면사진은 확연히 다르다. 그런데 이 과정이 ‘무수히’ 반복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예컨대 생성자가 ‘처음에’ 제시한 정면사진은 판별자의 눈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만들어 와”라고 돌려보낸다. 생성자는 종전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좀 더 그럴듯한 정면사진을 만들어온다. 이 과정이 무수히 반복되면서 생성자가 제안하는 정면사진은 실제 얼굴에 가까운 근사치로 수렴한다. TPGAN의 개발자들은 이 알고리즘이 측면사진으로부터 인물의 동일성(Identity)을 유지하는 정면사진을 생성해 냄으로써 합성을 통해 안면인식의 가능성을 입증했다고 자평했다. 그렇다면 활용범위도 넓다. CCTV는 증명사진처럼 ‘정확히’ 인물의 정면을 포착하는 경우가 드물어 인물 식별에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TPGAN은 예컨대 범죄용의자의 인물 식별에 효과적일 수 있다.

GAN의 원리를 처음 고안한 이안 굿펠로우는 2014년의 논문에서 생성자와 판별자의 관계를 위조지폐범과 경찰의 관계로 설명했는데, 2016년 신경정보처리시스템학회(NIPS)에서 발표한 GAN에 관한 튜토리얼에서는 학생과 교사의 관계에 가깝다고 언급한 바 있다. 말하자면 학생(생성자)이 제출한 답안(생성 데이터)을 교사(판별자)가 검사하는 과정을 통해 학생의 능력이 향상된다는 것이다. 실상 이 ‘검사 과정’은 지겹게 되풀이되므로 사람에게는 고역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계는 지치지도 않고 자존심 상하는 일도 없으며, 정답이 나올 때까지 같은 행위를 반복할 수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했던가. 판별자로부터 무수히 ‘fail’을 맞아가며 유급을 거듭하다 결국 ‘pass’를 따내고야 마는 생성자의 노력은 사람의 눈에 가상해 보이기도 한다. 뭐 어차피 인간이 시킨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사람의 사고를 모방했지만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이 알고리즘은 한편으로 대견한 측면이 있다. 청출어람 청어람이라고나 할까.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박주석의 사진살롱 47 – D.O.P.와 P.O.P. 인화

박주석의 사진살롱 47 – D.O.P.와 P.O.P. 인화

박주석의 사진살롱 47 – D.O.P.와 P.O.P. 인화
03/24/2021
/ 박주석

퍼시벌 로웰, 《창덕궁의 후원 풍경》, P.O.P. 방식의 알부민프린트, 12.0×19.0cm, 1884, 보스턴미술관 소장.

숲속에 원래의 지형을 그대로 활용한 조선 정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1883년 조선 고종이 정궁으로 사용했던 <창덕궁> 후원의 풍경입니다. 미국의 천문학자이자 외교관이었던 퍼시벌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 한국명 노월魯越, 1855~1916)이 1883년 12월부터 1884년 봄까지 서울에 체류하면서 촬영했습니다. 현재 이 사진은 미국의 <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본업은 화성(Mars)을 주로 연구한 천문학자였지만 아마추어사진가로도 활동했던 로웰은 조선에서 4개월 동안 체류하며 고종의 어사진을 비롯한 다양한 서울의 모습을 찍었습니다. 같은 해 고향인 보스턴으로 돌아간 로웰은 사진 전시회를 열고 조선의 모습을 찍은 사진들을 공개했으며, 당시 보스턴 사진계를 떠들썩하게 했다고 합니다. 실제 <보스턴아마추어사진가협회>는 로웰의 전시회를 1884년의 가장 우수한 전시라는 평가와 함께 최우수상을 수여했습니다. 로웰은 전시 후 <보스턴미술관> 소속 사진도서관(MFA Photograph Library)에 사진 전작을 기증했고, 비록 1970년 도서관은 폐쇄되었지만, 로웰의 사진은 2003년 미술관으로 이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진을 소장한 <보스턴미술관>의 기술(discription)에 따르면 로웰은 P.O.P.(Printing Out Paper) 프로세스의 알부민(Albumen, egg white)을 용제로 하고 질산은을 감광제로 하는 인화지를 사용해 사진을 만들었습니다. P.O.P 방식의 인화는 기본적으로 밀착인화 방식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용한 유리원판 네거티브의 크기가 곧 사진의 크기입니다. 따라서 로웰이 사용한 카메라는 유제 면이 가로 19cm, 세로 12cm 정도인 당시로는 비교적 소형의 뷰카메라(View Camera) 종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네거티브 유리원판의 현상과 인화는 사진을 찍은 서울에서 했는지 아니면 미국으로 돌아간 다음 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미술관 소장의 사진은 전시에 걸었던 것으로서, 보스턴에 돌아가 현상과 인화를 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P.O.P. 방식이란 말이 등장합니다. 로웰의 사진을 소장한 미술관 측의 설명입니다. 사진의 역사에서 P.O.P. 방식은 1860년대에 등장해서 1940년대까지 전 세계적으로 폭넓게 사용되었던 인화 방식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흑백사진 인화 방식인 D.O.P.(Developing Out Paper) 방식의 반대 개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D.O.P.방식은 확대기에 필름을 걸고 네거티브 이미지를 확대해서 인화지에 잠상(潛像, Latent Image)을 만들고, 인화지를 현상액에 담그면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을 거칩니다. 반면 P.O.P.방식은 유리원판 네거티브를 인화지 위에 밀착시키고 빛을 주면 인화지 상에 직접 이미지가 형성되는 원리입니다.

P.O.P.를 사용하면 사진가가 빛을 쏘이고 인화지 위에 이미지가 서서히 올라오는 과정을 계속 모니터링하면서 적당량의 빛을 받아 원하는 이미지가 나타나는 시점에 이르면 곧바로 정착 과정으로 들어가고 완성하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인화할 때는 암실이 필요하지 않았던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P.O.P.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흑백이라기보다는 대개 자줏빛 나는 갈색 즉 퍼플블랙(Purple Black)으로 토닝(Toning)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로웰의 사진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P.O.P.방식은 밀착인화만 가능했기 때문에 사진의 크기가 한정될 수밖에 없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 확대 인화가 가능한 D.O.P. 방식이 상용화되면서 사라졌습니다.

P.O.P. 방식의 인화지에는 다양한 감광유제가 사용되었습니다. 인화 종이에 이미지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은(Ag) 화합물입니다. 하지만 종이 위에 질산은(AgNO3)이나 브롬화은(AgBr)과 같은 은화합물을 도포하려면 이를 접착시켜줄 용제(溶劑)가 필요합니다. 바로 젤라틴, 알부민, 콜로디온 같은 끈적한 물질입니다. 흔히 ‘젤라틴실버프린트(Gelatin Silver Print)’ 또는 ‘젤라틴은염사진’이라는 말은 종이에 바른 감광유제가 젤라틴에 섞인 은염이었다는 말이고, 이를 통해 이미지를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P.O.P. 시대에는 달걀의 흰자를 이용하는 알부민프린트(Albumen Print), 알코올과 니트로셀룰로오스의 화합물인 콜로디온을 이용하는 콜로디온실버프린트(Collodion Silver Print) 등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물론 젤라틴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 사이에 만들어진 빈티지 사진은 이미지의 색조나 농담이 매우 다양합니다. 용제의 종류에 따라 이미지가 다르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확대가 가능한 D.O.P.방식이 유행하면서 현상액에 오래 담가도 안정적인 젤라틴 용제가 대세를 이루었고, 밀착 전용의 젤라틴 가스라이트지(Gaslight Paper)가 나오면서, 알부민과 콜로디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2 – 시흥 검지산(호암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한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2 – 시흥 검지산(호암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한 번째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2 – 시흥 검지산(호암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한 번째
03/24/2021
/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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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은 1796년 여름 남한강 선유(船遊)를 마치고 우이동 계곡 <재간정>을 찾았다. 그리고 가을 포천 영평지역 창옥병 근처 <백운담> <사암서원> <금수정>을 거쳐 <화적연>에서 그해 여정을 마쳤다. (앞의 ‘답사와 스케치 여정’ 연재 참조) 《한임강명승도권》의 순서에 따르면, 정수영은 이듬해 1797년 봄 시흥현(始興縣)을 방문했다. 지금 금천구 시흥동이다. 나는 2019년~2020년에 지우재 여정을 따라 답사하면서, 작년 봄에 이곳을 둘러보았다.

시흥동 중심인 옛 관아 터에 서니, 동쪽으로 호암산(虎巖山)이 병풍처럼 두르고 서쪽으로 안양천과 주변의 들녘이 전개된다. 안양천은 북쪽으로 선유도에서 한강과 합류한다. 해발 393m의 호암산은 동편의 해발 632.2m 관악산과 480m 삼성산에 이은 줄기답게 바위산 경치를 뽐낸다. 단순한 암산의 형태가 스케치북을 펼치게 한다. 산 아래 근경에는 지금의 도시 풍광을 생략하고 옛터를 지켜온 노거수 은행나무 세 그루를 배치해 그렸다. (도 1, 2)

근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빼곡하게 들어서 산 중턱까지 시야를 가린다. 하지만 그 아래 은행나무를 포함해 동네 곳곳의 느티나무 향나무 등 노거수들이나 고려 석탑 등이 시흥의 역사를 말해준다. 8백 살 이상 나이 든 은행나무들은 건물들 틈과 길가에서 옹색한 대로 생명을 유지해 있다. 조선 시대에는 기와집 건물의 관청, 초가 마을, 그리고 노거수들이 호암산과 어울려 장관을 이루었을 법하다.

올해 3월 초 다시 찾아보니 이들 가운데 관아 터의 표시석이 놓이고 가장 큰 은행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세 그루 중 제일 키가 크기도 하려니와, 중앙의 죽은 것 같은 덩치의 고목에도 물기운이 오르는 듯 푸릇한 잔가지와 새잎이 자라 있었다. 그 봄 색이 뭉클해 스케치했다. (도 3, 4) 알림판에는 1968년 보호수 지정 당시 수령이 830년이고, 14m 높이에 나무 밑 둘레가 8.6m이란다. 주소는 시흥동 386-35번지이다.

호암산의 다른 이름은 검지산(黔之山)이다. 시흥의 이전 이름은 금천현(衿川縣)이었다. 북쪽의 한양과 양천 동작 노량, 동쪽의 과천, 남서쪽의 안양 수원 인천 등으로 열린 교통의 요지였다. 한때는 과천과 병합해 금과현, 혹은 양천과 병합해 금양현이 되기도 했다.

금천이 시흥으로 바뀐 것은 종6품 현감을 종5품 현령으로 승급하면서부터이다. 정조 19년(1795) 윤2 월 1일에 시행되었다. (『日省錄』) 이때 현감 홍경후(洪景厚)가 현령으로 승급되었다. 특히 정조는 화성으로 이장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 참배를 위해 행행(幸行)이 잦았다. 그 가운데 정조 19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의 행사가 가장 성대했다. 고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회갑을 맞은 해이고 이를 위해 대규모 연회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한양과 화성, 백 리의 중간 길목인 시흥현에는 임금의 행차를 위해 도로가 확장되고 이동하는 가운데 머무는 행궁이 조성되었다. 그만큼 시흥이 중요한 거점으로 격상되었고, 종5품 현령 배치는 정조의 능행(陵行)에 따른 배려였던 셈이다.

1795년 윤2월 을묘년 큰 행사를 담은 《화성능행도 8폭 병풍》도 제작되었다. 이 가운데 <환어행렬도>가 바로 화성행사들을 마치고 궁궐로 돌아오며 시흥 행궁(行宮)에 들르는 행렬도이다. 지금의 시흥동 금하로를 따라 행차하는, 길다란 이동장면을 ‘乙’ 자형으로 부감해 포착했다. 여기에 혜경궁홍씨의 가마, 관료들과 호위 군사 등 행사 참여자들과 길가 주막이나 엿장수 아이 등 구경꾼의 움직임을 디테일하게 살려낸, 스팩타클한 걸작 중의 걸작 궁중 기록화이다. 김득신, 장한종, 이인문 등 당대 손꼽히는 일급 화원들이 참여해 그렸다. (도 5)

 

시흥 관아에 머물며 그린 <취향정><검지산>

정수영은 《한임강명승도권》에 3점의 시흥 풍경을 담았다. <취향정>과 <검지산> 2점은 시흥현 관아에서 머물며 그린 것이다. 또 <일간정(一間亭)>은 관아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관악산 기슭의 유명한 명소 자하동(紫霞洞)에 있었다. 한 지역을 연달아 그린 탓인지 세 점은 아랫부분이 중첩되어 있다.

시흥의 첫 그림 <취향정(翠香亭)>은 관아의 뜰에 있던 정자 같다. 그림의 오른쪽 위에 “금천 관아의 동쪽 취향정(衿川衙東 翠香亭)”이라고 밝혀 놓았다. (도 6) 이로 미루어볼 때, 정수영의 이곳 방문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여기서 ‘금천’이라 쓴 것은 ‘시흥’으로 지명이 바뀐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은 탓이다. 한편으로는 ‘옥병서원’을 ‘사암서원’이라 표기했던 것처럼, 개명하기 이전 지명을 고수한 점은 재야 문인 정수영의 정치적 경향성일 법하다. 호암산보다 검지산이라는 지명을 쓴 것도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푸른 향기를 즐기는 정자 <취향정>은 초가지붕에 단칸으로 소박하지만, 조선 시대 관청에 조성하던 연못의 일반화된 형태이다. 두 곳 방형 못에 각각 섬을 만들고. 섬에는 소나무를 주요 수종으로 삼아 대여섯 그루씩 심었다. 화면의 오른쪽 목책 다리가 놓이고 초정(草亭)이 시설된 석축 섬에는 소나무가 6그루 보이고, 왼쪽 섬에는 소나무 5그루와 키 큰 활엽수 고목 한그루가 서 있다. 연못가에는 분홍 복사꽃들이 만발해 봄 정취 가득하다. 담 밖 언덕의 봄 나무들과 더불어 정수영의 미숙한 듯, 가벼운 담묵담채 화풍을 잘 보여준다.

관아의 동쪽 짚 이엉을 얹은 수평 담장은 다음의 <검지산(黔芝山)> 그림으로도 이어진다. 정수영은 관아 동쪽 연못 그림의 중단을 지나는 담장과 같은 형태의 담을 근경에 횡대로 깔고, 그 너머로 본 검지산 전경을 포착했다. 담 너머 언덕이 살짝 보이는 점도 동일 장소임을 알게 해준다. 기다란 담장 중간쯤에는 작은 문이 나 있다. 그리고 화면 오른쪽 위에 “책방 동쪽 담장 밖(冊房東墻外)”이라고 제목을 써넣었다. (도 7) 책방의 동쪽 담장이 관아의 동쪽 끝이니 동헌(東軒)에 연계된 공간이었을 법하다.

여기서 ‘책방(冊房)’이 주목된다. 고을 수령이 되면 근무처에 친구나 친척, 지인을 책객(冊客)으로 곁에 두고 일할 수 있었다. 책방은 이방, 형방, 호방 등 6방 향리의 명칭에 맞추어 부친 이름으로 제7방인 셈이다. 시서(詩書)를 나누는 문인 취향의 명칭이지만, 책방이 수령 통치에서 상당한 정치적 위치를 점유했던 모양이다. 책방은 고을을 다니며 여러 현황이나 정보를 파악해 수령에게 알렸고, 이 과정에서 때론 권력을 행사하며 탐관오리의 역할마저 했다. ‘현감은 빈 털털이로 파직될 가능성이 있지만, 책방을 수행해 가난을 벗어나지 않은 자가 없었다’라고 전해질 정도이다. (尹愭, 『無名子集』)

정수영이 시흥현령의 책방과 지인이던지, 혹시 그 자신이 책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임강명승도권》의 일정상 영평과 도봉산이 동일 라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평에서 시흥을 들렀다가 다시 영평 길목인 도봉산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또 검지산과 일간정 그림의 활엽수에는 봄 정취나 색감이 사라진 상태여서, 정수영이 여름까지 시흥 관아에 머물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때 시흥현령은 김사희(金思羲, 1753~?)였다. 정조 19년(1795) 윤2월 17일 발령을 받았다. 정조시절 최대규모의 화성 행행이 끝난 다음 날이었다. 현령으로 승격한 직후 첫 발령자였던, 김사희는 영조 49년(1773) 진사시험에 급제한 뒤 주로 지방관으로 관직생활을 했으며,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시흥현령 시절 임금과 잦은 대면으로, 정조 21년(1797)에는 수원판관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日省錄』) 다른 교우관계나 행적으로 알려진 게 드물고, 또 정수영과 인연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한임강명승도권》과 관련해 정수영이 마지막 토산을 찾았는데, 김사희는 그 십여 년 전 정조 9넌(1785)에 토산현감을 지냈다.

그림의 상단 왼쪽에는 “한양과 가깝게 질러 통하는 지름길(抵京捷路)”라고 적었다. 현재는 신림동으로 넘어가는 도로에 산북터널이 뚫려 있다. 또 《한임강명승도권》의 다른 장면에도 자주 썼듯이, 강관이 “검지산 한 줄기, 관악 명산과 닮지 않았다. 이 그림은 음식을 잔뜩 늘어놓은 듯하다. (黔芝一支終不若冠岳名山 此圖或近於飣餖)”라고 제발(題跋)을 썼다. 이를 강관의 필적으로 확인함과 함께, 그동안 관악산으로 알려져 온 이 그림을 최근 신진 연구자가 <검지산>으로 밝혔다. (한상윤, 「선유와 유산으로 본 정수영의 한임강유람도권 고찰」, 『미술자료』 96, 국립중앙박물관, 2019.)

검지산(黔芝山)은 검은 영지가 많이 자란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며, 금천(衿川)도 이 검지(黔芝) 혹은 금지(黔芝)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옛 기록이나 고지도에는 ‘검지산’도 있지만, 산 정상의 호랑이 바위로 인해 지어진 ‘호암산(虎巖山)’을 같이 썼다. 특히 호암산 호랑이가 노려보는 바람에 한양도성 건설에 지장을 받자, 호암산 꼬리 부분을 누르기 위해 호압사(虎壓寺)를 세웠다는 무학대사 설이나 태종 시절 창건설화와 관련을 볼 때 그렇다.

<검지산(黔芝山)>은 지우재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귄》 실경화 가운데 여주 <휴류암> 그림과 함께 회화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진경산수화로 꼽을 만하다. 실경과 닮게 그리는 데는 다른 그림들이나 마찬가지로 부족하지만, 나무나 담장 묘사에서 미숙함이 도드라지지 않으니 그런 것 같다. 강관이 ‘다 먹지 못할 음식물을 잔뜩 늘어놓은 듯한(此圖或近於飣餖)’ 산세 표현이라고 꼬집었으나, 근경 수평 담장 위로 네모 형태를 동어반복으로 3~7층씩 횡렬로 쌓은 검지산 암산 경치의 단순한 구성이 파격이면서 돋보인다. 토산에 비스듬히 사선으로 석치(石齒)가 박힌 암산을 정수영답게 변형 리듬으로 재해석한 개성미라 하겠다. (도 2, 8, 9)

옆으로 긴 산 풍경 설정을 보면, 토산 주름 위로 드러난 바위들도 나름대로 그 주름을 따라 강약의 리듬감이 유연한 편이다. 한양을 넘어가는 북쪽 지름길에는 바위들과 봄 색의 나무들이 어우러지게 변화를 주었다. 그림에서 호암산 왼쪽에는 호랑이 바위와 호압사, 흔들바위가 위치한다. 산 능선의 오른쪽으로 구분한 뾰족한 봉우리들은 불영암이 있는 호암산성인 셈이다. 신라 후기 성곽으로 추정되며, 한우물 석구지(石狗池)와 석구로 여겨지는 동물상이 남아 있다. 호압사에서 불영암(佛影庵)에 이르는 능선은 안양천 구름산으로 지는 저녁놀을 최고로 감상할 수 있는 명소이다.

<검지산(黔芝山)> 화면 중앙의 산기슭에 보이는 관청 건물은 행궁이겠고, 홍살문과 노거수가 있는 오른쪽 단독건물은 성황단 정도로 여겨진다. 이렇게 관아 최고의 산 풍경이 전개되는 요지에 거처가 있었으니, 고을 정치경제의 알짜배기인 책관(冊官)의 권한과 위상을 새롭게 그려보게 한다.

정수영은 시흥의 두 곳을 그린 뒤, 현(縣) 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십 리가량 떨어진 자하동(紫霞洞)의 <일간정(一間亭)>을 찾았다. 관악산 아래 지금 서울대학교가 들어선 곳에 있었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2 》 : 사진에 관한 각서

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2 》 : 사진에 관한 각서

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2 》 : 사진에 관한 각서
03/16/2021
/ 김혜원

카메라(사진)는 발명 당시부터 대중의 열광을 받은 히트 상품이었고, 1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새로운 모델이 출시될 때마다 지속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핫한 상품이다. 1939년 사진술이 공표되었을 때 다게레오타입을 보러 운집한 군중의 열광이나 사진 발명과 함께 회자되는 서구 예술가들의 열띤 사진 담론처럼, 외래품으로서의 카메라를 수입한 식민지 조선의 예술가들에게서도 사진 담론은 다양하게 펼쳐졌다. 동아일보 사진부장으로 일장기말소사건을 주도한 신낙균(申樂均)은 사진을 신문, 서적, 잡지, 의학계, 경찰계, 과학 등 응용 범위가 광대하여 인간 생활에 필수적인 ‘학술’로 보았고, 특히 사진이 ‘국가의 안위’를 지배하는 기술임을 강조하였다. 일제 강제 해산 직전의 카프(KAPF) 영화부 책임자였던 전평(全平)은 사진을 정치나 경제나 사회학에 대한 ‘이론체계’와 ‘교육’이 필요한 기계적 예술로 보았다. 친일로 전향한 주지주의 문학이론가 최재서(崔載瑞)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카메라-아이’로 대상을 관찰하는 방식의 리얼리즘 소설론을 펼친 반면, ‘일제 감시 대상 인물 카드’에 2점의 범죄자 신상기록용 사진을 남긴 임화(林和) 등 마르크스주의 문학인들은 사진술을 단순한 모방 행위로 간주하여 사진기적 재현은 리얼리즘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정세와 전황에 따라 근대 과학 기술이자 문화 예술인 사진을 십분 활용한 일제의 지배 전략에 굴종해야 하면서 그에 저항해야 했던 이들에게는 사진에 대한 매혹과 우려의 양가감정이 더 미묘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1 + 3

3 + 1

3 + 1  1 + 3

1 + 3  3 + 1

1 + 3  3 + 1

3 + 1  1 + 3

3 + 1

1 + 3

 

선상의점 A

선상의점 B

선상의점 C

 

A + B + C = A

A + B + C = B

A + B + C = C

 

<중략>

 

(태양광선은, 凸렌즈때문에수렴광선이되어일점에있어서혁혁히빛나고혁혁히불탔다, 태초의요행은무엇보다도대기의층과층이이루는층으로하여금凸렌즈되게하지아니하였던것에있다는것을생각하니낙이된다, 기하학은凸렌즈와같은불장난은아닐른지, 유우크리트는사망해버린오늘유우크리트의초점은도처에있어서인문의뇌수를마른풀과같이소각하는수렴작용을나열하는것에의하여최대의수렴작용을재촉하는위험을재촉한다,사람은절망하라, 사람은탄생하라, 사람은절망하라)

 

-이상, 선에 관한 각서 2」 부분

이상(李箱, 1910~1937)의 「선에 관한 각서 2(1931)는 카메라에 관한 우려와 각성의 목소리가 드러난 시이다. 7편의 연작시 「삼차각 설계도 중 하나인 이 시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카메라 렌즈의 형상과 기능이다. 1연의 ‘1+3’ 혹은 ‘3+1’의 조합은 오른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카메라 렌즈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 ‘凸렌즈(볼록렌즈)’의 기능은 ‘태양광선’을 한곳에 모으는 ‘수렴작용’에 있다. 그런데 선을 의미하는 1과 공간을 의미하는 3의 차원에서, 선상의 점 A와 B와 C가 동일한 한 점을 향해 직선으로 ‘수렴’되는 현상은 바로 카메라 옵스큐라가 완성한 데카르트적 원근법의 세계이다. 따라서 이상은 한 점으로 ‘수렴’하는 이 볼록렌즈의 기능을 지속적인 동일성의 원리로 ‘수렴’을 ‘재촉’하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동일시한다. 즉 이상은 이 기하학을 선원근법을 낳은 과학기술의 정수로서의 볼록렌즈와 같은 ‘불장난’으로 여기고 인류가 근대 서구 문명을 상징하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위험’에서 벗어나 ‘인문의 뇌수’, 인문 정신의 정수를 추구하며 ‘절망’의 끝에서 다시 ‘탄생’해야 함을 촉구하고 있다.

 

신칠현_자화상_1926

일제 강점기에 서울 종로에서 사진관을 운영한 영업사진사이자 경성사진사협회 창설 멤버로 활동한 신칠현(申七鉉, 1900∼1992)의 <자화상>은 직업사진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사진이다. 삼각대에 받친, 어깨 높이의 카메라를 다루며 촬영에 열중해 있는 모습에는 카메라라는 근대 문물의 메커니즘을 체득한 선각적 사진가로서의 자부심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자화상>이 더 의미 있는 것은 이 사진이 카메라 옵스큐라가 완성한 데카르트적 원근법의 질서를 해체하고 당당히 시각 주체를 선언하고 있는 사진이기 때문이다. 이성과 합리성에 기초하여 세계를 카메라 렌즈로 수렴되는 기하학적 공간으로 인식하는 데카르트적 원근법에는 시선의 주체와 시선의 대상이라는 이분법적 위계질서가 내재해 있다. 따라서 신칠현은 자신을 피사체로서의 원근법적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이미지를 능동적으로 재현하는 원근법적 주체로 전면화한다. 특히 대형카메라를 다루는 힘찬 주먹과 카메라를 주시하는 시선은 카메라라는 기계를 사진적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인식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핫한 박래품으로서의 카메라 수용 시기의 사진 담론에서 확인해야 할 것은 식민 제국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에서 식민화의 도구로 작동하는 카메라 기능에 대한 식민지적 무의식 혹은 의식적 공포나 경계가 조선인들에게 내재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경성고등공업학교(현 서울대 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건축 기사로 근무했던 이상의 경력은 카메라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개발 정책을 위한 테크놀로지로 기능했던 당시의 상황을 연상시킨다. 『조선시론』의 의뢰로 일반 사진가로 참여하여 순종(純宗)의 국장을 기록한 신칠현은 순종 인산 시 공포된 ‘국장 촬영규정’이 암시하듯, 시각적 주체와 시각적 재현의 메커니즘을 둘러싼 관(官)과 민(民)의 헤게모니 싸움을 추측케 한다. 결국 이상의 시나 신칠현의 자화상은 식민 지배 시각 체제로서의 제국의 렌즈에 대응하기 위한 사진에 관한 각서였고, 이는 곧 식민지 조선인들의 엄숙한 실존적 메시지가 투영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김혜원(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연구교수,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