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온라인 1차 세미나를 개최합니다.

2020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온라인 1차 세미나를 개최합니다.

2020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온라인 1차 세미나를 개최합니다.
04/22/2020
/ notice

저희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에서는 ‘사진이미지’의 어법과 표현 방식을 풍성하게 발전시켜온 한국 사진가들의 사진 철학과 표현 형식을 탐구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진은 한국의 고유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전개되어 왔기 때문에 서양 사진과는 다른 사진의 어법(Rhetoric)을 갖고 있고, 차이 또한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차별성 속에서 중요한 성취를 이루어 낸 한국사진의 역사를 ‘한국 이미지언어의 역사와 전개’라는 관점으로 연구하여, 한국 사회에서 제3의 언어로서의 ‘사진이미지’의 표현 능력과 소통 능력을 증대시키는 기초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연구소는 매년 글로벌한 차원에서 이미지언어로서 한국사진의 가치를 만들어온 사진가들을 초대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3회째를 맞는 2020년 세미나에서는 비교적 젊은 나이로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사진가 권순관, 김옥선 씨 두 분을 초대했습니다. 권순관은 ‘터졌다가 흩어져가는 불꽃처럼 우리 안에서 사라져가는’이라는 제목의 작품 시리즈를 발표합니다. 개인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관계 속에서 가치의 생산과 쟁투의 대상이 된 권력과 그 내적 구조를 사진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김옥선은 여성, 국제결혼 커플, 제주에 거주하는 이방인, 이주 식물 등을 통해 중심이 아닌 주변의 세계나 혼성의 세계를 드러낸 지난 작품시리즈를 ‘인간의 확장’이란 제목으로 소개합니다. 사진의 대상도 그 대상을 보여주는 사진의 형식도 다르지만, 두 분 모두 사진을 주 매체로 하여 한국 사진이미지의 어법과 표현 역량을 주도함으로써 현대미술의 중심에 서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뜻하지 않게 덮친 ‘코로나19’로 이 세미나가 온라인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분 작가께서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여 세미나를 준비하셨을 텐데 부득이하게 비대면 형식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송구한 마음을 이 자리에서 전합니다. 아래 다운로드 버튼을 클릭하신 후 파일을 여시면 두 분의 다양한 작품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 온라인 세미나가 두 분 작가께서 쌓아온 작업 여정과 그 과정에서 구사해 온 사진이미지들이 제3의 언어로서 더 많은 관람객을 만나 충분히 소통하는 장(場)으로 자리하기를 기대합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2020. 4. 23.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 박주석

누구냐, 넌

누구냐, 넌

누구냐, 넌
04/15/2020
/ 박평종

딥 페이크 논란이 뜨겁다. 지난달에는 “딥 페이크 영상의 제작, 유통행위를 처벌하는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 일명 딥 페이크 처벌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적대적 생성신경망(GAN)을 활용한 이 이미지 합성 기술의 잠재적 위험성은 오래 전부터 제기돼 왔는데*, 최근 불거진 소위 n번방사건으로 세간의 관심이 폭증한 모양새다. 사실 GAN알고리즘의 활용범위는 매우 넓고 긍정적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인공지능의 기계학습에서 GAN은 ‘대세’며, 그 원리를 응용한 다른 알고리즘도 다양해지고 있다. 기계학습을 통한 인공지능의 문제해결 능력은 여러 분야에서 검증된 바 있고, 점차 그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지는 추세다. 따라서 딥 페이크는 경계하되 GAN을 버릴 수는 없다. 본래 악한 기술은 없기에. 테크놀로지는 중립적이나 결국 그것을 도구화시키는 인간이 문제다. 딥 페이크가 GAN의 본질은 아니라는 얘기다.

GAN은 이미지 합성기술이 아니라 원래 이미지 ‘생성’ 기술로 탄생했다. 한편 사진의 합성은 두 장 이상의 원본을 하나로 ‘붙이는’ 기술이다. 아날로그 시대의 포토몽타주나 포토샵을 활용한 디지털 콜라주가 그 예다. 그런데 GAN은 원본을 학습한 후 생성자와 판별자가 서로 경쟁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하는 구조다. 원본은 학습용일 뿐 최종 결과물은 어디에도 없는 다른 이미지, 말하자면 그 자체가 원본인 이미지다. 포르노 배우의 몸에 유명 연예인의 얼굴을 합성하는 ‘악의적’ 딥 페이크는 이 ‘고도의’ 알고리즘을 도구적 기술로만 활용하는 셈으로, 말하자면 맥북에어프로를 가짜뉴스 생산을 위한 타이핑 수단으로 쓰는 꼴이다.

이 ‘생성’ 알고리즘은 2014년에 개발된 이후 DcGAN, StyleGAN 등으로 진화하면서 한층 고도화됐다. 그 결과 GAN이 생성한 이미지는 학습용 데이터와 다를 바 없는 품질과 유사성을 지닌다. 실제 이 알고리즘은 사람의 얼굴을 ‘사진처럼’ 만들어내는데, 그 인물은 어디에도 없다. ‘없는’ 사람의 초상사진인 셈이다. 이를 활용한 온라인서비스도 늘고 있다. 비록 ‘가짜’지만 활용도는 높고 장점도 많다. 예컨대 Generative media에서는 GAN으로 만든 얼굴이미지 라이브러리를 운영하는데, 약 2백만 장의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다. 성별, 연령별, 인종별 구분에 따라 선택한 얼굴 이미지를 다운받을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 직접 원하는 이미지를 제작해주기도 한다. 당연히 이 2백만의 ‘인물’은 어디에도 없다. 실제 존재하지 않는 이 가상의 인물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사람들과 비슷하며, 나아가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을 준다. 현실의 인물을 촬영한 사진들을 원본으로 학습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핵심은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없는 사람이므로 당연히 초상권도 없다. 이름도 없고, 세월을 살지 않았기에 나이도 없고, 국적도 없다. 단지 얼굴만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가상 이미지는 완전한 익명성 덕분에 필요에 따라 교육, 예술, 상업 등 다양한 영역에서 폭넓게 활용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없는’ 사람들의 초상과 관련하여 복잡한 문제가 생겨날 여지는 있다. 딥 페이크가 야기한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을 고려하면 ‘악용’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인간의 욕망과 상상력은 어디까지 나아갈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무고한’ 가상의 인물들이 어떤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 이 문제는 향후 인간과 휴머노이드의 관계 설정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의 노예를 기계인간으로 대체하겠다는 생각을 품은 바 있는데, 이 때 인간과 기계인간의 관계는 수직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알고리즘이 만든 이 가상의 인물들을 인간이 어떻게 ‘이용’해먹을지 알 수 없다. 이런 우려가 지금으로서는 과장일 수 있다. 허나 가까운 미래에 ‘로봇학대 금지법’이 나올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미지 인간’에 대한 윤리적 관계, 나아가 법적 제도적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성찰해 볼 시점이 됐다.

 

* GAN 알고리즘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른 칼럼 <한없이 진짜에 가까운 가짜>(2019. 12.11)를 참고할 것.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박주석의 사진살롱 34 – 용어 ‘보도사진’의 유래와 의미

박주석의 사진살롱 34 – 용어 ‘보도사진’의 유래와 의미

박주석의 사진살롱 34 – 용어 ‘보도사진’의 유래와 의미
04/09/2020
/ 박주석

1968년-보도사진연감-표지,-한국기자협회

이 장면은 1968년 <한국기자협회>가 발간한 『’68 보도사진연감』의 표지로 실린 사진기자들의 열띤 취재 모습입니다. 각자 비장하고 있는 카메라를 들고 무엇인가를 찍고 있습니다. 물론 연출이겠지만 말입니다. 500mm는 족히 되어 보이는 망원렌즈를 들고 있는 기자도 보이고, 화면 가운데에 취재용으로 나온 4X5인치 필름용 ‘Graflex Speed Graphic’을 들고 있는 기자도 보입니다. 대부분은 35mm 필름용 카메라를 들고 있습니다. 이 책은 지금도 <한국사진기자협회>가 매년 발행하는 『보도사진연감』의 첫 호입니다. 1968년부터 발행을 시작한 이 연감(年鑑)은 벌써 52년 동안 매년 발행하고 있습니다. 

<한국기자협회> 하부 조직이었던 <한국신문사진기자단>의 주관으로 첫 호를 발행한 이 연감은 매년 신문사와 통신사 사진기자들이 찍어 신문에 실린 사진 중 중요한 사건을 다루었거나 영상미가 우수한 사진들을 골라 월별로 편집하고, 한 권의 사진집으로 묶어 발행합니다. 지금도 같은 방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첫 호가 185쪽 두께에 정가 1,000원짜리였다면, 가장 최근의 2019년 연감은 거의 400쪽에 달하는 두 권의 세트로 가격이 각 198,000원으로 올랐다는 정도일 것입니다. 그만큼 사진의 생산량과 매체에 실리는 사진의 양이 많아졌고, 사진기자들의 숫자도 많아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처음 『보도사진연감(報道寫眞年鑑)』의 발행을 주관한 단체는 <한국신문사진기자단>인데, 연감의 이름을 ‘신문사진연감’이라고 하지 않고 ‘보도사진연감’이라고 칭했다는 사실입니다. 68년 연감에는 사진기자단에 속한 매체와 기자 명단이 있습니다. 중앙지, 전문지, 지방지를 포함해 15개의 신문사와 5개 통신사 소속의 사진기자 101명입니다. 당시 통신사 기자들의 사진도 모두 일간지가 받아서 썼던 시절이니 사실살 신문사진연감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헌데 ‘보도사진’이라고 칭했습니다. 지금도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보도사진(報道寫眞)’이란 용어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찾아보았습니다.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34년 일본에서 열린 ‘보도사진전람회(報道寫眞展覽會)’라는 전시의 명칭에서였다고 합니다. 이 전시는 당시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젊은 사진가 나도리 요노스케(名取洋之助 1910~1962)와 당시 일본의 중견 사진가로 유명했던 기무라 이헤이(木村伊兵衛, 1901~1974)의 공동 사진전이었습니다. 주로 당시 독일의 그래픽저널리즘 잡지에서 유행하던 르포르타주(reportage)사진의 주제 의식과 스타일을 따른 사진들이었습니다. 

1977년 일본 도쿄의 출판사 다위도(ダウィッド)에서 발행한 기시데스오(岸哲男)의 책 『사진저널리스트(寫眞ジャ-ナリスム)』에서 밝힌 사실입니다. 그는 보도사진이라는 명칭이 “그때(1934년 전람회 당시) 나도리 요노스케는 자신이 항상 말해 왔던 레포트(리포트) 포토라는 용어를 어떻게 번역하면 정확한 의미를 담을 수 있을지 伊奈信男(이나 노부오, 1898~1978))에게 의논하게 됐다. 일본에서는 이 무렵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에서 르포르타주 문학을 높이 제창하고 보고문학 또는 보도문학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나 노부오는 이를 원용해 보도사진이라고 번역했던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실제 이나 노부오는 두 사람의 ‘보도사진전람회’ 팸플릿에 서문 형식으로 「보도사진에 관해서」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 내용을 소개합니다. 보도사진이란 “첫째, 報道의 報는 알린다(報知) 그리고 道는 언어로써 이끈다는 뜻으로 보도함과 동시에 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사진은 훨씬 더 대중에게 이해되기 쉽고 또 국제성이 있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사용할 때는 정치적・경제적・당파적 선전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고 대외 선전과 관광객 유치를 위한 절호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인쇄로 대량복제한 사진의 힘은 이데올로기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셋째, 단순한 뉴스사진이 아니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든 엮음사진(組寫眞)의 경우에는 명확하게 사상의 전모를 표현해서 보도를 얻을 수 있다. 넷째, 보도사진가는 예민하고 저널리스틱한 센스를 가져야 하며 또 기술적으로도 모든 표현수단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트릭과 같은 기법을 사용해야 할 때도 있다”고 합니다. 참고할 만합니다. 

문제는 이 글의 두 번째 정의 중에서 “인쇄매체에 이용된 사진은 정치적・경제적・당파적 선전의 강력한 무기로, 또 이데올로기 형성에 절대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고 대외선전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라고 말한 부분입니다. 당시 일본은 우리 민족의 숱한 희생을 강요했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향해 가면서 제국주의와 국가주의를 강화하던 시기였습니다. 독일에서 나치(Nazi)의 파시즘이 강화되던 시기 국민을 총 동원하는 ‘프로파간다 어용 르포르타주사진’을 배운 나도리 요노스케는 귀국 후 같은 정치외교의 노선을 걷던 일본군국주의에 사진이 봉사하는 길을 모색했습니다. 그런 사진으로 전시회를 열었고, 그 명칭을 보도사진이라고 했습니다. 이 용어를 제안한 사진가 ‘이나 노부오’가 당시 일제 외무성의 <문화사업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르포르타주 사진’을 ‘보도사진’으로 번역하면서 사진의 프로파간다적인 성격을 그 바탕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혹자는 ‘보도’라는 말이 Report의 번역어이니 ‘보도사진’은 ‘Photographic Report’의 번역이고, 그래서 우리가 일본의 근대 번역어인 ‘경제‘, ’문화‘ 같은 단어를 중립적으로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사용하듯이, ’보도사진‘이라는 말도 중립적이고 자연스러운 말이니 복잡하게 볼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앞서 살폈듯이 ’보도‘와 ’사진‘의 결합인 ’보도사진‘은 그 의미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검토와 논쟁이 필요한 사안입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1 – 다섯 번째 금강산 탐승, 해금강 일출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1 – 다섯 번째 금강산 탐승, 해금강 일출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1 – 다섯 번째 금강산 탐승, 해금강 일출
04/01/2020
/ sketch

* 썸네일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보다 큰 이미지를 슬라이드로 보실 수 있습니다.

금강산을 다시 찾아 해금강 일출을 그리고

나는 작년 2019년 2월 설날 연휴 끝에 금강산에 갈 기회가 생겼다. 2월 12일~13일 ‘남북선언 이행을 위한 2019년 새해맞이 연대 모임’ 금강산 행사에 참여했다. 일박이일 짧은 여정이었지만, 다섯 번째 여정이다.

흰 바위산의 아름다운 수정봉과 멀리 노을에 물든 채하봉(彩霞峰) 등 온정리 호텔 주변은 여전하였다. 도착하자마자 스케치북 양면에 펼쳐 담았다. (도 1, 2) 다음날 오전에 찾은 집선봉 설경과 솔밭 아래 복원된 신계사도 마찬가지였다. (도 3) 그런데 이전의 답사 때는 엄두도 못했던 해금강 일출을 보았다. 날씨마저 청명해 장관이었다. ‘남북선언 이행을 위한 2019년 새해맞이 연대 모임’ 금강산 행사의 절정이었다. 그동안 늘 감동해오던 동해의 일출과 다름이 없었다. 암벽에 걸쳐 떠오르는 태양을 연속 찍었다. (도 4, 5)

이 행사를 다녀오며, 금강산을 다시 와 그릴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다. 일 년을 기다렸으나, 지난해 2월 말 베트남 북미회담이 깨진 이후 금강산 가기가 짙은 안개에 가려 있는 듯하다. 그래서 해금강문(海金剛門) 일출을 사생했던 스케치북을 다시 꺼냈다. 남으로 고성 쪽을 향해 설경 산세와 더불어 담은 아침 바다 그림도 있었다. 이들 일출 그림은 채색하지 않은 채 두었다. 스케치를 펼쳐 놓고 한해 전의 붉은 태양과 물빛을 넣자니, 그때 감흥이 일지 않기에 더 손대지 않고 그대로 선보인다. (도 6, 7)

 

화원 김하종의 <옹천> 일출 그림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큰 줄기를 이루는 금강산과 관동8경을 담은 작품에 동해의 일출이 곧잘 그려졌다. 겸재나 단원의 양양 낙산사, 망양정, 문암 등에서 본 일출 장면 그림이 떠오른다. 동해의 일출 분위기를 적절히 담은 작가와 작품으로는, 유당 김하종(蕤堂 金夏鍾;1793-?)의 <옹천> 일출 그림이 떠오른다.

푸르스름한 바탕색에다 붉은 담채를 살짝 가미해 맑게 열리는 여명의 분위기를 깔고, 수평선 위 떠오른 붉은 태양을 강조한 점이 돋보이는 가작이다. (도 8) 통천 옹천의 어두운 바위 언덕에 자란 소나무들과 벼랑 아래 파도치는 모습의 붓 맛과 담채가 가볍다. 암벽 길목에서 두 문인이 떠오르는 해를 감상하는 모습도 실감 난다. 왼편에 치우쳐 옹천을 배치한 구성은 겸재나 단원 등 선배 화가를 고스란히 답습한 화면을 보여준다. 금강산화첩 《풍악권(楓岳卷)》(개인 소장)에 포함된 한점이다.

이 화첩은 1991년 소더비 경매에 등장했다가 국내로 반입되어, 1999년 내가 객원 큐레이터로 참여했던 일민미술관 ‘몽유금강’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되었다. 《풍악권(楓岳卷)》은 조선 말기 개화파 외교관으로 이름난 귤산 이유원(橘山 李裕元;1814-1888)이 1865년에 금강산을 유람한 후 기행문 「풍악유기(楓岳遊記)」와 묶은 서화첩이다.

이유원은 고종 즉위년(1864) 좌의정에 재직하다가, 흥선대원군과 대립하는 바람에 수원유수로 좌천된 직후 1865년에 금강산 여행을 떠났다. 만년에 정치적으로 울적하면서도, 한편 홀가분한 마음으로 8월 18일(음력) 집을 나서 9월 6일 서울로 돌아왔다. 이유원 자신이 기행문에서 밝혔듯이 ‘산은 깨끗함을 생각케 하며, 물은 움직임을 생각케 하며, 돌은 곧음을 생각케 한다’는 선비의 풍류정신을 펼친 것이다. 이유원의 여정에 김하종이 동행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하종이 자신을 위해 금강산 명승도를 제작해 주었다’고 서문에서 밝혀 놓았다.

다섯 권의《풍악권》은 「풍악유기」를 비롯한 이유원의 기행시문이 한 권이고, <헐성루도(歇惺樓圖)> <명연도(鳴淵圖)> <묘길상도(妙吉祥圖)> <만물초도(萬物草圖)> 등 58점의 명승도와 그 명승을 설명하는 기행시문이 나머지 4권으로 꾸며져 있다. 이같이 금강산 소재의 문학과 서화가 조화롭게 만나는 이유원과 김하종의 《풍악권(楓岳卷)》 서화첩을 통해 19세기 진경산수화의 격조가 유지되었다.

 

네 번의 금강산 여정을 다시 들춰 보며

다섯 번째 금강산 답사인 해금강 일출을 다녀와 뒤돌아보니, 금강산을 처음 밟은 지 벌써 이십 년이 훌쩍 흘렀다. 나는 전남대학교 재직 시절 뱃길이 열리기 두 달 전, 1998년 8월 말~9월 초 학고재 화랑의 후원으로 제주의 강요배 화백과 북경과 평양을 거쳐 처음 금강산을 다녀왔다. 내 인생의 첫 해외여행이었고, 북한지역을 밟았으니 10일간 일정이 온통 흥분으로 채워졌다.

평양에서 고구려 벽화고분, 고구려와 조선의 유적지, 박물관과 미술관 등을 살핀 뒤, 금강산 답사 첫날은 평양에서 새벽에 출발해 원산을 찍고 오후에 구룡폭을 다녀왔다. 다음 날은 온정령 고개를 넘어 내금강 장안사 울소 삼불암 백화암 표훈사 만폭동 금강대 대소향로봉 보덕암 진주담 분설담 사자암 묘길상 코스와 정양사 오르기, 만물상을 탐승하는 강행군이었고, 삼일째는 해금강과 삼일포를 돌아보았다. 정양사에 팍팍하게 오른 답사는 남쪽 미술인으로는 처음이었다.

여행한 직후 정리한 조선 시대 금강산 그림에 대한 글은 답사 때 찍은 사진과 더불어 학고재출판사가 발간한 금강산 책에 실었다. 별도의 답사기는 게재할 곳을 찾지 못하다가 반년이 지난 뒤 미술잡지에 다섯 번에 걸쳐 연재하였다.

 

두 번째는 1999년 1월 동해에서 배를 타고 금강산 설경을 2박 3일 살폈다. 외금강 만물상과 옥류동 구룡폭 코스의 설경을 감상했다. 이때 옥류동 다리 앞에서 넘어져 발목을 접지르는 바람에 3일째 해금강의 겨울 풍경을 보지 못했다. 배에 머물며 장전항에서 보이는 설경을 스케치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아마도 그때 스케치가 지금 나에게 그림 그리는 일을 자극했는지도 모르겠다.

1999년 상반기에는 일민미술관과 동아일보가 마련한 ‘몽유금강-그림으로 보는 금강산 300년 전’(1999.7.7.~8.29)에 객원 큐레이터로 참여해 조선 시대와 근대미술사의 금강산 그림과 관련한 기획을 맡았다. 또 15명의 전시 참여 현대 작가들에게 금강산을 강의하고 안내하면서 4월의 봄 금강산을 만끽했다. 이 세 번째 탐방 역시 유람선을 탄 여정이었고, 만물상과 구룡폭 코스로 제한되었다. 새로운 금강산 그림과 자료들을 상당히 많은 양을 발굴하였고, 전시 도록에 ‘금강산의 문화와 예술 300년’을 정리해 실었다. 전시 기간에는 주요 출품작을 선정해 동아일보에 10회에 걸쳐 연재했다. 또 전시작품에서 소정 변관식의 명작 <옥류천도>에 대해 문제 제기가 있었고, 지상 논쟁이 벌어졌다.

 

세 번의 여행을 기반 삼아 ‘금강산·천년의 문화유산을 찾아서’라는 부제로 금강산에 관한 책을 냈다. 답사기 「금강산 미술기행-옛 화가들의 발자취를 따라」와 「금강산 불교유적, 그 천년의 역사 1, 2, 3」 세 꼭지에, 논문 「한국산수화의 모태, 금강산과 금강산 그림」을 합해 묶은 것이다.

이후 금강산 여행에 동행했던 강요배와 송필용 같은 작가의 금강산 그림 개인전 도록에 평론 글을 쓰기도 했다. 1999년과 2000년에 각각 마련한 두 작가를 통해 금강산 개방이 가져온 새 회화형식의 창출을 실감하게 했다. 강요배는 서구 인상주의 수용 이후 금강산 풍경을 통해 한국적 화풍을 창출했다고 여겨지며, 송필용은 조선 분청자의 박지문 기법을 활용해 설경을 중심으로 금강산을 재해석해냈다.

2003년 전남대학교에서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로 상경한 뒤, 2004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그리운 금강산전’ 기획에 참여해 ‘근대 금강산 그림’과 관련한 논문을 전시 도록에 실으며 1999년 일민미술관 기획전 때의 글을 보완할 수 있었다. 또 고려시대 금강산의 불교를 발표할 기회가 주어져 불교와 관련한 금강산을 다시 정리하게 되었다. 역시 금강산의 불교는 고려문화의 터전이라 할만하며, 첫 답사기의 불교 유적에 대한 대목은 이 논문으로 대체했다.

 

2008년 6월에는 명지대학교박물관 답사 프로그램으로 여름 내금강과 외금강, 해금강을 다시 찾았다.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박사과정 학생을 중심으로 30여 명이 참여했다. 네 번째 금강산 답사였다. 배로 다니던 여행에서 버스로 이동하는 관광이어서 경비도 시간도 크게 줄었고, 탐승 시간을 비교적 충분히 가질 수 있어 좋았다. 앞서 3번의 여정에서 가지 못했던 구룡폭 능선 넘어 구정봉에 오른 게 새 보람이었다. 정상에서 상팔담과 주변의 외금강 바위산 속살이 큰 감명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슬라이드 필름으로 찍어 왔던 데서 벗어나, 처음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했다는 점도 내 답사 인생의 큰 변화였다. 덕분에 금강산 코스 따라 만나는 정경과 부분들을 일천 커트 남짓에 샅샅이 담아 왔다.

우리가 금강산 답사를 다녀온 2주 뒤 금강산이 닫혔다. 개방 10년이 채 못되어 다시 막힌 것이다. 간간이 글을 쓰거나 강연하는 일을 제외하곤 금강산을 잊고 지내다 10년이 또 지난 2017년 8월 명지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겸재와 단원의 발자취 따라’ 찾아 강원지역을 찾았다. 답사지 표지에 총석정을 그려 넣고, 표제로 ‘총석정을 못가는 관동8경 답사’라고 썼다.

 

같은 해 2017년 11월 강원일보,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강원대학교 통일강원연구원 공동주최로 강원대학교 글로벌경영관에서 가진 『금강산 관광사업과 남북교류의 새로운 모색』이라는 ‘2017 평화 통일 국제학술 심포지엄’ 때, 나는 “그림으로 본 금강산”을 주제로 발표하였다. 금강산 예술에 대해 예전에 썼던 글을 다듬으면서, 조선시대 유람문화에서 20세기 이후 근대관광으로 변한 양상을 재검토할 기회였다.

종합토론 시간에는 지난 금강산 관광사업을 뒤돌아보며 과연 금강산이 열릴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워낙 핵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때인지라, 심포지엄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도 없지 않았다. 심지어 가까운 시일에 금강산이 열리면 손가락을 뜨거운 장에 지지겠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을 정도였다.

 

2018년 들어서 급격하게 남북관계가 열리고, 정년 퇴임을 한 2년째여선지 한가해진 터에, 11월부터 다시 금강산 자료들을 들춰 보았다. 1998년부터 2008년까지 네 번에 걸쳐 찍은 슬라이드 필름과 디지털 사진을 정리하며 내금강 계곡 바위에 새긴 이름이나 시 글씨를 재검토했더니, 미술사나 문화사에서 익숙한 여러 문인이나 화가들이 여럿 확인되어 반가웠다. 그리고 사진들을 뒤지면서 자연히 지난 답사 여정의 감흥이 돋아 스케치에 몰두하기도 했다. 2017년 7월 ‘서울산수’ 책 출간과 서울 스케치 개인전에 이어 ‘금강산수’가 가능할 만큼, 2018년 11월과 12월 두어 달 동안 100여 점이나 그렸다. 이 스케치들은 당시 찍은 사진과 더불어 금강산의 유적과 명승 소개에 적절한 참고 도판으로 삼아도 될 성싶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04/01/2020
/ 박평종

지난 2015년 구글 포토에 한 남성이 올린 흑인 여성의 얼굴사진이 고릴라로 분류된 ‘황망한’ 사건이 있었다. 인종차별 논란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구글 측은 서둘러 진화에 나섰고 더불어 인공지능의 바이어스(bias), 즉 편향성 문제가 급속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후에도 유사한 사례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또 보고돼 왔다. 안면 인식 기술이 고도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인종에 대한 인식 오류는 종종 발생한다. 또한 여성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편향된 정보도 인공지능 기술 기반의 시스템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인공지능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신뢰했던 초기 컴퓨터 공학자들과 프로그래머들은 기계가 인간의 편견을 극복하고 정확한 솔루션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았다. 하지만 진화를 거듭할수록 이 ‘똑똑한’ 기계는 인간 못지않게 편향성을 갖기 시작했다. 실제 AI 기반 시스템에서 중립적인 IT회사(예컨대 구글)는 통상 남성대명사로 자동 처리되고, 위키피디아의 인물 정보에서 여성의 비율은 20%도 되지 않는다. 과거 구글 번역기는 의사는 남성, 간호사는 여성 대명사로 처리했다. 나아가 상업용 안면인식 기술에서 백인남성 대 흑인여성의 인식 오류율은 35:0,8%라는 통계도 있다. 이런 편향성을 기계가 ‘의도적으로’ 갖게 됐을 리는 당연히 없다. 원인은 기계 학습에 제공되는 데이터다. 말하자면 데이터 편향이 문제다.

본래 기계는 편향적이지 않다. ‘기계적’이라는 말에 담겨있는 의미가 그렇다. 컴퓨터라는 기계에게 모든 정보는 그냥 숫자일 뿐이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 문제는 좀 복잡하다. 소위 ‘생각하는 기계’ 모델을 구상했던 튜링은 기계가 인간의 사고를 ‘기계적으로’ 모방하면 ‘생각’이 가능하다고 봤다. 사고의 ‘기계적’ 메카니즘을 알고리즘으로 구현하는 것이 그래서 실현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인간의 사고에는 대단히 복잡한 맥락과 정황이 얽히고설켜있다. 기계는 그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기계는 ‘객관적’이라고들 말한다. 흑인여성의 얼굴사진을 고릴라로 분류한 위의 기계는 자신이 학습한 데이터를 토대로 그 판단을 내놓았을 뿐이다. 그 판단에 담겨있는 문명사적 함의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오직 분류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그 기계의 판단은 정확했을 수 있다. 그렇게 배웠으므로. 의사는 남성, 간호사는 여성으로 처리한 기계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학습했던 대부분의 데이터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말하자면 기계는 인간의 사고과정만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데이터’로부터 배운다. 그런 점에서 기계의 편향성은 너무도 인간적이다.

결국 기계의 편향성을 줄이려면 데이터의 편향성을 치유해야 한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우선 기계에게 ‘제공하는’ 학습 데이터가 이미 ‘심각한’ 편향성을 갖고 있다. 예컨대 구글 데이터의 상당 부분은 서양, 특히 미국 중심으로 구축돼 있고, 이를 기반으로 한 알고리즘은 백인 남성 주도로 생산된다. 문제는 인간은 자신의 사고가 편향성을 갖고 있음을 좀처럼 인지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알아도 바꾸기 어려운데 모르고 있다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데이터 구축과 관리에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실상 기계는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제작됐다. 목적 지향적이라는 뜻이다. 편향이 한 방향에 치우쳐 있음을 뜻한다면 기계는 당초 기획 단계부터 편향적일 수 있다.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 목적 달성에 필요한 요소들만 고려하는 탓이다. 그리고 실제 그 덕분에 기계는 인간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노동한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기계학습용 데이터를 ‘공정하게’ 제공한다고 해서 인공지능의 바이어스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섣불리 낙관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기계를 만들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 기계는 너무나 인간적이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