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6 – 도봉산 《망월암》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세 번째
09/0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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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2020년 3월부터 강연이나 답사 같은 외부 일정이 대부분 취소되면서, 오랜만에 여유가 생겼다. 수입이 크게 줄었고 장기전에 돌입해 지루하지만, 어쩌면 내 인생에서 처음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진 셈이다. 덕분에 지난번에 소개했던 것처럼 올해에는 ‘퇴계 선생 낙향 길’ 따라 경복궁에서 안동 도산서원까지 9일 동안 걷기도 했고, ‘고구려를 그리다’(무우수갤러리, 2021. 6. 16~27)와 ‘이태호 그림(서울옥션 강남센터, 8.26~9.3)’ 두 번의 개인전을 연달아 가졌다.

코로나 초기 단계였던 작년 4, 5월에는 삼각산과 우이동 계곡에 이어 도봉산을 여러 차례 올랐다. 도봉서원과 천축사, 망월사, 오봉 등의 길을 따라 등반했다. 가끔 오른 게 1960~70년대 고등학교 대학 시절이었니, 정말 오래 간 만의 일이다. 이번에는 몇 번 완주를 시도하다, 5월에야 망월사에서 주봉까지 성공했다. 바위산 봉우리의 다양한 덩어리 형상이 빼어나고 전망 또한 일품이어서, 10여 점 넘게 스케치해 너무 뿌듯했다. 포대능선에서 본 선인봉 만장봉 자운봉이 키 재기 하며 어울린 자태가 최고였고, 그 오른편으로 전개된 산 능선들이 장관을 이루었다. (도 1)

하산해 도봉역에서 본 도봉 능선으로 지는 하얀 태양이 새롭게 인상에 남았다. 흰 바위산 봉우리들이 불쑥불쑥 솟은 서남쪽과 달리, 우이산 북한산과 능선이 연계되면서 도봉산의 동북 능선은 바위산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그 일몰 장면도 심쿵해 여러 장 스케치했었다. 옛 양주, 지금 의정부시에 속한 이쪽 풍광을 별도로 ‘원도봉산’이라 부른다. 도봉산의 원조, 혹은 가장 도봉산다운 장면이어서 그리 불릴만하다.

올해는 망월사에서 달뜨는 ‘망월(望月)’ 장면을 보려 시도했다, 망월사 보름달 보기 시간을 내내 맞추지 못하다가, 지난 음력 7월 보름 전날 비구름 사이로 떠오르는 수락산 월출을 찾아 가벼이 스케치했다. (도 2) 또 수락산 기슭에서 초가을 오후 해가 지는 도봉산 준봉들의 실루엣을 다시 그려 보았다. (도 3)

 

정수영의 발자취를 따라 망월사에 올라

도봉산 망월사에 오르고 수락산 계곡을 밟은 일은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의 《한·임강명승도권》에 등장한 <망월암>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신륵사를 필두로 2019년 5월부터 시작한, 지우재 정수영의 한강과 임진강 사생 현장을 이태 동안 틈틈이 모두 확인하는 일이 가능해 무엇보다 보람이 컸다. 현재 북한 지역에 속한 삭령(朔寜)과 토산(兔山)을 제외하고, 정수영의 여정 추적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정수영은 시흥에서 1797년 봄을 보낸 뒤, 도봉산에 올라 <망월암>을 방문했다. 이때 정수영이 시흥현령 김사희(金思羲, 1753~?)의 측근인 책방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을 터인즉, 김사희는 《한임강명승도권》의 마지막 삼성대와 낙화암을 그린 십여 년 전 정조 9넌(1785)에 토산현감을 지냈으니 정수영의 최종 여정과 무관하지 않을 성싶다. 도봉산 망월암은 양주(楊州)에 속했고, 그때 양주목사는 1797년 5월에 부임한 오정원(吳鼎源)이었다. 정수영과 관계가 드러나 있지 않지만, 대사간에 오른 문인관료였다.

<망월암> 그림은 중앙 근경 나무 한 그루가 봄 나무 같기도 하고 고사목 같기도 하고, 바위틈에 자란 앉은뱅이 노소의 소나무 세 그루에 계절감 표현이 또렷하지 않다. 뾰족뾰족 화면 가득 전개한 층층 바위들이 대충대충 그려 도봉산의 특정 봉우리의 개성적 이미지를 살려내지 못한 상태이다. 또 ‘망월암좌(望月庵左)’라고 그림 제목을 쓴 왼편 옆으로 긴 그림과 유사한 현장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화면의 짜임새도 얼기설기한 편이다. (도 4)

그런대로 정수영의 시점과 풍경 조합을 꾸려보자. 관음전, 천중선원, 심검당, 고불원, 영산전, 범종각, 칠성각, 문수굴 등이 들어선 지금의 망월사는 대부분 20세기 후반 이후 조성된 불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18세기 ‘망월암’의 가람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지 않고, 발굴이 시도된 적이 없어 명확히 규명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림의 두 기와지붕이 맞닿은 불전은 현재 벼랑에 세운 영산전(靈山殿)쯤으로 추정된다. 그림 가운데 사원의 뒷간인 듯한 단칸 초가가 소나무와 배치되어 있다.

벼랑 계단을 올라 바위 샘과 문수골, 현재의 영산전 칠성각 영역 정도가 19세기 옛 절터의 공간으로 여겨진다. 범종각에서 볼 때 정수영의 <망월암> 전체 풍경이 잡힌다. 그리고 그림의 암산 봉우리들은 영산전의 서북향 천중서원(天中禪院)과 심검당 마당에서 둘러보아야 칠성각 위로 병풍처럼 전개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도 5, 6) 멀리 본 경치와 가까이 본 풍광을 합성한 방식으로, 사실 묘사를 소홀히 한 점과 더불어 겸재 정선의 화법을 참작한 셈이다.

<망월암> 그림에서 근경 오른편 돌계단 위 불전 건물 아래에 비석을 유난하게 강조해 놓은 점이 눈길을 끈다. 위치와 형태로 미루어 1797년 윤6 월 수관거사 이충익이 비문을 짓고 쓴 천봉 대선사 태흘의 탑비로 여겨진다. 망월사 경내에 오래된 비석은 이게 유일하다. 경기도 문화재자료인 ‘망월사천봉선사탑비(望月寺天峰禪師塔碑)’에는 ‘朝鮮國 天峯 大禪師 碑銘 水觀居士 李忠翊 撰幷書篆 嘉慶二年 丁巳 閏 六月 日立’라고 밝혀놓았다. 현재 영산전 아래 문수굴 벼랑 길에 설치된 이 비는 석조승탑과 나란히 옛 모습 그대로인 듯하다. 탑과 비가 좁은 공간에 서 있는 데다, 벼랑 암벽에는 “嘉義 金順民, 嘉善 金順孝, 嘉善 李孝載, 通政 朴龍雲, 通政 金尙泰” 등 시주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도 7, 8)

정수영이 승탑을 그려 넣지 않은 채, 옥개석을 갖춘 비석만을 강조한 것은 비문을 짓고 쓴 이가 수관거사 이충익(1744~1816)인 까닭 아닌가 싶다. 이충익은 정파로 보면, 소론에 해당하며 강화학파의 핵심 일원이었다. 하곡 정제두의 양명학을 계승하여 ‘진가(眞假)’를 구별에 엄격하였으며, 유교 이념을 내세운 허위의식에 비판적이었으며, 노장(老莊)과 불교를 통섭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며 대립했을 때 집안이 몰락하자 특히 불교에 심취하였고, 승려 혜운(慧雲)과 동거하며 강화도(江華島) 마니산(摩尼山) 망경대(望京臺) 암자에서 폭포암주인(瀑布庵主人)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해서(楷書)와 초서(草書)를 잘 썼으며, 조선 후기 조선 서풍의 개성미를 뽐내는 원교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가 5촌 아저씨로 그를 따랐다. 이충익의 ‘망월사천봉선사탑비(望月寺天峰禪師塔碑)’ 글씨는 갸우뚱한 원교체 서풍을 따르면서 왕희지체 행서 맛을 살려 붓 흐름이 유려한 편이다. 이광사는 이충익이 불교에 너무 깊이 심취한다고 염려했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이충익이 비문에 ‘몸은 단정하고 귀와 입은 크고 눈은 샛별처럼 빛이 났고, 복덕지혜(福德智慧)를 다 갖추었다’라고 태흘에 대해 상찬한 것을 보면, 34세 연상인 노승 태흘과 친분도 도타웠던 듯하다. 84세에 입적한 천봉대선사(天峰大禪師) 태흘(泰屹, 1710~1793)은 명탁(名琢), 도원(道圓), 은월 우점(隱月雨霑), 풍계 해숙(楓溪海淑) 등 당대 고승의 법을 계승한 서산대사의 5세손이다. 환열(幻悅) 묘일(妙一) 낭규(朗奎) 등 제자가 10여 명에 이르며, 수백 명이 넘는 승려가 계율을 받았다고 전할 정도로 평판이 높았다. 입적 후에는 배천의 호국사, 문화의 월정사, 양주의 망월사에 각각 승탑을 세웠다. 망월사 태흘의 석조승탑은 전통적인 네모 기단에 팔각원당식으로 조선 후기에 유행한 형식이며, 입적 다음 해인 1794년 3월 1일에 조성했다. 탑신에는 “西山 五世孫 天峯堂 泰屹之塔 崇禎 紀元後 三 甲寅 暮春 一日 完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도 9)

<망월암> 화면에 강조된 비석은 1797년 윤6 월 이후 그려진 시기를 말해준다. 이충익과 관계가 있을 거라 상정하면, 정수영의 망월사 방문이 1797년 윤6 월 태흘 탑비 건립과 무관하지 않았을 법하다. 이들의 구체적인 행적이 밝혀진 게 없지만, 당대 유불 인사들의 교류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도봉산(道峰山) 망월암, 곧 지금의 망월사는 신라 선덕여왕과 8년(639) 해호(海浩)가 창건했고, 신라 말기 경순왕의 태자가 은거했다고 전하는 천년 고찰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랜 유적은 고려 문종 시절 중창한 혜거국사(慧炬國師) 승탑이 전한다. 신라 팔각원당 형식을 토대로, 고려청자가 절정을 이룬 12세기였던 만큼, 단아한 구성과 형태를 뽐낸다. 노송과 어울려 있어 스케치해두었다. (도 10) 최근 2017년 본디 영국사 터였던 도봉서원 발굴에서 혜거국사 비편이 나와, 고려 시대 도봉산의 불교 유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조선 시대에 들어 숙종 때 동계(東溪), 정조 때 영월(暎月)과 태흘(泰屹), 고종 때 완송(玩松) 등이 중창을 거듭했으며, 근대에는 만공(滿空)·한암(漢巖)·성월(惺月) 등이 주석하여 천중선원(天中禪院)을 이루었다.

 

수락산 기슭 박세당 묘역

그림 위에는 여느 장면처럼, “내가 예전에 이곳 반남 박씨의 양대 무덤을 보았다. 더할 나위 없는 명당이었다. 지사(地師) 박상의가 점찍은 장소이다. (余曾見此潘南朴氏 兩代墳山 儘名墓 朴師尙毅所占云〭)”라는 강관의 발문이 있다. 태흘 탑비에 대한 언급은 없고, 느닷없이 반남 박씨 묘역을 거론한 대목에서 강관의 글이 막상 정수영의 그림과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수영과 그림을 함께 보며 발문을 적은 게 아닌 모양이다. 또 글을 쓴 시점이 그림보다 상당히 뒤에 별도로 이루어진 것 같다.

여기서 반남 박씨 묘역에 관한 언급은 집권 노론 계열에 대립했던 정파를 떠오르게 한다. 반남 박씨 양대 무덤은 망월사 동쪽 맞은편 일출과 월출을 굽어보는 수락산 기슭 박세당과 박태보 부자의 묘역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묘역에는 박세당 묘소를 중심으로 아들 태유와 태보의 묘가 좌우로 배치된 명당이다. 양대 묘 외에 박세당의 셋째 형 박세후, 손자나 증손자부터 11세손까지 가족묘가 산재해 있다. 또 이곳은 박세당의 은둔처이자 후학을 배출한 터전이었고, 도성 문사들이 풍류 유람을 즐기던 명소로 꼽힌다. 박세당 고택은 1950년 6.25 전쟁 때 소실되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랑채를 비롯하여 조세걸이 그렸다는 유복 차림의 <박세당 초상>이 후손들에 의해 보존 관리되어왔다.

강관이 언급한 박상의(朴尙義, 1538-1621)는 조선 시대 풍수론의 전설이다. 그가 점지한 장소이니만큼 최고의 장소이다. 현재 의정부시 장암동 소재 수락산의 서쪽 기슭에서 도봉산을 끌어 앉은 형국으로, 음택과 양택을 같은 공간에 어울려낸 절묘한 터임을 실감한다. 사랑채 앞마당 4~5백년 수령의 은행나무에서 동쪽을 올려 보면, 수락산 정상이 감싼 안온한 공간이다. (도 11) 사랑채 마루나 묘역에서 전망하면, 선인봉·만장봉·자운봉의 도봉산, 우이산, 인수봉·백운대·만경대의 삼각산 능선이 장관으로 펼쳐져 있다. (도 12)

박세당은 이들 기암절벽의 도봉산과 삼각산을 ‘망산(望山)’이라 지칭했다. 또 고택 아래 시내부터 수락폭포까지 계곡은 박세당의 자연을 벗한 은둔과 풍류 터였다. 고택 앞 오른쪽 제자들과 학문을 쌓던 너럭바위와 어울린 궤산정(簣山亭) 터에 바위글씨 ‘西溪幽居’ ‘石泉洞’ ‘取勝臺’가 전한다. 청풍정(淸風亭)이 있는 ‘水落洞天’에는 현재 노량진에서 옮겨온 박태보의 노강서원이 들어서 있고, 그 안쪽에 석림사, 중턱의 수락폭포 역시 박세당의 산보 공간이었다. 석림사(石林寺)는 박세당 집안의 원당 사찰 격이며, 박세당이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던 곳을 기리기 위해 조성했다고 전한다. 이곳 계곡을 박세당은 ‘동강(東岡)’이라 불렀다.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 1629~1703)은 숙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문인관료이자 학자로 ​주자학을 비판한 견해 탓에 송시열 일파의 노론계(老論系)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고, 윤증(尹拯)을 비롯하여 박세채(朴世采), 처남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 주로 소론계와 어울렸으며 실사구시학의 선구로 꼽기도 한다. 아들 정재 박태보(定齋 朴泰輔, 1654~1689) 또한 문인관료로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 반대를 주동하였던 탓에 혹독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진도로 유배 가다 노량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곳을 기리며 노강서원(鷺江書院)이 조성되었다. 김시습, 박세당·박태보 부자, 이충익과 승려 태흘, 강관과 정수영 등 모두 당대 현실 권력에서 떨어진 인사들인 점을 눈여겨볼 때, 여기서도 정수영이 그린 《한·임강명승도권》의 정치지형을 읽을 수 있겠다.

 

지우재 정수영의 발걸음은 망월사를 거쳐 도봉산 주봉 남쪽 중턱에 있는 옥천암으로 옮겼다. 현재 천축사로 이름이 바뀌어 있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