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는 형이상학이다
08/18/2021
/ 박평종

메타버스가 초미의 관심사다.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에서부터 대학 입학식에 이르기까지, 가수들의 콘서트와 팬 사인회도 메타버스 플랫폼을 통해 진행되니 이제 메타버스는 더 이상 ‘가상세계’가 아니라 일상, 말하자면 ‘현실세계’와 교집합을 만들어내고 있다. 메타버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초월적 세계’를 뜻한다.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라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메타버스가 어디까지 갈지 쉽사리 예측할 수 없다. 메타버스가 주목받게 된 직접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미증유의 팬데믹이 야기한 비대면의 필요성 때문이지만 ‘초월적 세계’를 꿈꾸어 왔던 욕망이 바탕에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실상 메타버스는 디지털 기술의 등장과 더불어 화두로 급부상했던 소위 ‘가상현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디지털 기술의 초기 단계에서 이 ‘가상현실’은 실험적 의미밖에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디지털 기술이 고도화되고 각종 융합기술이 발전하면서 메타버스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다양한 인터넷 플랫폼이 생겨났고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송할 수 있는 전송, 통신기술이 이를 떠받치고 있다. 빅데이터 처리와 AI 기술도 이 ‘가상세계’를 정교하게 구축하는 데 필수적이다. 말하자면 메타버스는 ‘신기술’은 아니지만 최근에 와서 비로소 상용화가 가능해진 셈이다.

왜 메타버스에 의지하려 할까? 현실세계의 물리적 제약에 구속받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몸소’ 콘서트장에 가지 않아도 나의 대리인(아바타)이 출석하여 춤도 추고 환호를 보낼 수 있다. ‘현실효과’가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가상현실에 관한 실험미술 작업에서도 관건은 이 ‘현실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데 있었다. 게임과 영화는 그런 점에서 메타버스의 선구다. 가상현실을 다룬 수많은 SF 고전영화들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꽤나 ‘과학적으로’ 다룬 바 있다. 예컨대 <토탈리콜>에서 ‘실재’는 뇌가 경험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셉션>에서도 ‘주입된’ 기억이 사람의 사고를 결정한다. 광유전학(Optogenetics) 분야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광섬유로 동물의 뇌를 자극하여 인위적으로 기억을 조작하는 데 성공한 바 있다. 대 전제는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은 ‘물리적 세계’와 상관없이 뇌가 수용하는 정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물론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사람이 인지하지 않더라도 ‘물리적 세계’는 인간의 의식 바깥에 있다고. 그러나 적어도 인지하지 못한 세계는 ‘인간의 세계’라 할 수 없다. 안드로메다 은하계에 다른 존재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나.

어쨌든 메타버스가 현실세계, 요컨대 물리적 세계를 초월한다면 메타 피지카(Meta-physica)의 영역에 속한다. 피지카,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이치를 다룬다. 그렇다면 피지카를 초월하는 메타 피지카는 존재를 넘어서는 것을 다룬다는 뜻이다. 그것이 이른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다. 그리 보면 메타버스는 벌써 형이상학에 속한다. 비물질성이 핵심이다. 본래 피지카의 탐구대상은 ‘있는 것’, 말하자면 물질과 형상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그런데 물질이 아니어도 존재하는 것이 있다. 판타스마타나 시물라크룸이 그 예다. 이미지도 그렇다. 메타버스 플랫폼은 주로 이미지와 소리 등 물질성이 없는 정보들로 구성된 ‘비물질적 세계’다. 이 ‘비물질의 세계’에는 한계가 없어 어디까지 확장될지 가늠할 수 없다. 아날로그의 세계에서 정보는 물질과 한 몸이었으나 디지털의 세계에서 사정은 다르다. 가상화폐도 같은 맥락에 속한다. 금속이나 종이와 같은 물질이 아니어도 화폐가치를 ‘정보’로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질의 시대가 몰락중이라는 뜻일까. 메타버스가 어디까지 진화할지 지켜봐야겠지만 당장의 관건은 이 ‘비물질의 세계’를 구축하는 기술력과 자본에 있다. 그러나 결국은 그 세계가 제공하는 ‘정보’가 중요하다. 메타버스는 피지카가 아니라 메타피지카의 영역이므로.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