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석의 사진살롱 52 – 오리엔탈사진학교
07/07/2021
/ 박주석

《오리엔탈사진학교》 1940년 졸업 기념사진, 서 있는 졸업생 중 앞줄 맨 오른쪽 인물이 한국인 사진사 임정식(林正植) 선생.

일제 식민지 시기에 활동한 한국인 사진사(寫眞師)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사진 전문 교육기관은 서울의 YMCA 사진과와 일본 도쿄(東京)의 <오리엔탈사진학교(オリエンタル写真学校)>였습니다. 1910년 설립된 YMCA 사진과는 1910~20년대 사이에 많은 사진가를 배출했지만,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33년 폐과하고 말았습니다. 식민지 조선에는 사진을 배울 마땅한 교육기관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때 대안으로 등장한 학교가 동경의 <오리엔탈사진학교>였고, 조선의 사진학도들은 사진을 배우기 위해 동경 유학을 결행했습니다. 이 학교의 수업 연한이 짧게는 3개월 정도로 경제적 부담이 적었고, 최신의 표현 기법도 배울 수 있었으며, 동경 유학생이라는 타이틀도 덤으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습니다.

<오리엔탈사진학교>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진 산업체였던 ‘오리엔탈사진공업소’가 일본 사진계의 전반적인 수준 향상과 자기 회사의 제품 홍보를 목적으로 1929년 설립한 사진 전문 교육기관이었습니다. 1919년 설립된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은 카메라 같은 장비가 아니라 유리원판이나 인화지 같은 감광유제였고, 주 소비층은 사진관 주인과 사진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사(寫眞師)들에게 자사 제품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교육 기회를 제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실습 교육은 주로 본사에서 개발한 새 제품을 갖고 진행했습니다. 강사도 일부 전임 교원들을 제외하면 주로 본사의 제품개발 담당자들이나 홍보 직원들이 맡았다고 합니다. 도쿄 신주쿠(新宿) 근처에 자리했던 이 학교는 1944년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의 공습을 받아 전소되어 폐교했습니다.

학교는 매년 4~7월, 9~12월까지 3개월 과정으로 2회 학생을 모집했으며, 50명 정도의 규모로 운영했습니다. 입학 자격은 사진관 주인이거나 3년 이상 사진관 근무 경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실무 경력이 없으면, 입학 전 학교 부설 ‘실기연구강습회’ 과정을 수료하면 입학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예외적으로 학교가 인정할 만한 사진기술을 가졌거나 보통학교(지금의 고등학교) 졸업생으로 사진 경력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가능했습니다. 조선인 졸업생 중 현일영(玄一榮, 1903~1975) 선생과 같은 분은 사진관 운영 경력을 갖고 입학했으며, 추상화가로 유명한 유영국(劉永國, 1916~2002) 선생 같은 경우는 실무 경험이 없어서 예비학교인 ‘실기연구강습회’를 수료하고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유영국 선생의 두 가지 졸업장이 이런 상황을 보여줍니다.

유영국의 ‘오리엔탈사진실기연구강습회’ 졸업증서(좌, 1940년 3월)와 ‘오리엔탈사진학교’ 졸업증서(우, 1940년 7월)

<오리엔탈사진학교>의 한국인 졸업생으로는 앞서 말한 현일영 선생이나 유영국 선생 외에도 1940~60년대 사이 굵직한 사진관을 운영한 사진사들과 명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회복지법인 방주원’ 설립자인 윤상준 선생, 부산의 사진관 ‘명광사’를 운영한 조상범 선생, 강경에서 ‘전원(田園)사진관’을 운영한 유석영 선생, 철원 ‘영화(英和)사진관’의 조배현 선생, 서울 시내의 ‘반도사진관’을 이끈 이종석 선생 등입니다. 1940년 <오리엔탈사진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의 명동에 진출해 ‘하야시(林)사진관’을 운영하며 일본인 사진관들과 경쟁을 벌였던 임정식 선생도 있었습니다. 이분은 제 대학 시절 ‘암실실기’ 강의를 하셨던 은사였습니다. 천안에서 당신의 성을 딴 ‘두나무(林)사진관’을 하시다 은퇴하셨습니다.

해방공간에서 좌익계열 사진가들의 연합체가 1947년 창립한 남조선노동당 산하의 <조선사진동맹>이란 정치조직이 있었습니다. 당시 을지로 2가에 있던 <허바허바사장>을 본부 사무실로 사용했습니다. 동맹을 실질적으로 만들고 핵심 역할을 했던 평양에서 내려온 조선노동당 당원 김진수(金珍洙) 그리고 훗날 전향해서 전쟁 후 사진관을 운영한 김주성(金周聖)이 합작으로 설립하고 운영한 사진관이었기 때문에 당연했을 것입니다. 당시 김진수가 동맹의 서기장을 맡았고 김주성은 동맹의 재정부장이었습니다. 그러니 <허바허바사장>이 <조선사진동맹>의 핵심 기지였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이 바로 <오리엔탈사진학교>였습니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1939년 같이 사진공부를 했고, 해방 직후 평양에서 내려온 김진수의 제안으로 사진관을 개설해 공동 운영했습니다.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사진관 ‘허바허바’의 시작 역시도 <오리엔탈사진학교>의 인연에서 비롯했습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