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6 》 : 푼크툼의 힘
06/09/2021
/ 김혜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사진에 대한 단상 『밝은 방에서 그 집필 계기가 되었던 어머니의 유품, ‘온실사진’을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은 어머니가 5살 때 찍은 ‘온실사진’이 일반 독자에게는 흥미를 주지 못하고 자신의 내적 의식과 상관관계를 맺는 푼크툼으로 작용하는 사진이기 때문이었다. 그에 의하면 스투디움(studium)은 사진가가 의도한 주제나 이데올로기로서 단일한 의미를 지닌 일반적이고 폐쇄적인 기호이다. 푼크툼(punctum)은 사진가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찍힌, ‘중심’에서 벗어난 하찮은 ‘세부’로 모든 의미로 가득 찬 ‘텅 빈 의미’이다. 바르트는 사진가가 의도하고 찍은 스투디움으로 이루어진 사진은 특별히 나를 ‘찌르지’ 않지만 우연히 거저 찍힌 푼크툼이 끌어당기면 그 사진은 쏜살같이 날아와 나를 ‘찔러’ ‘상처’를 입히고 온통 의미로 채운다고 하면서 이러한 현상을 푼크툼의 역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온갖 기호, 말들이 쇠잔해지는 순간의 홀연한 깨달음을 통해 모든 사회적 코드를 위반하고 타인의 시선을 물려받기를 거부하는 푼크툼적 독법을 제안하였다.

   어머니 앉으시고 그 왼편에 아버지

   무명치마 저고리 어머니

   제국시대 품 넓은 양복의 아버지

   우리 근세사의 양친께서 서 계신다

   오늘 비록 나날의 삶이 궁핍하여도

   꿈과 희망의 가족사를 넘기기 위해

   자 좋아요 앞을 똑바로 보시고

 

   흘러간 역사처럼 빛바랜 사진 한 장, < 중략 >

 

   가족사 촬영은 재연된다. 자식들의 결혼, 손주들의 백일 돌잔치, 양친의 무릎에 어린아이들이 새롭게 등장한다. 분가해 나간 가족사와 대조해 읽지 않으면 계보 파악이 힘들다. 양친의 얼굴에는 쓸쓸한 빛이 더해간다. 태평스럽게 웃고 있음에도, 이제 가족사의 한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태평스레 웃고 있음에도.

 

   아버지 앉으시고 그 왼편에 어머니

   비단 치마 저고리 어머니

   흰 머리에 주름살만 가득하여

   덧없는 가족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며

   안고 찍을 젖먹이도 뒤에 세울 자식도 없이

   오늘 비록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아버지 앉으시고 그 왼편에 어머니

   자 좋아요 그대로 눈 감지 마시고

   기-ㅁ-치-이.

 

   -최영철, 「가족사진」 부분

가족 앨범 속 기념사진을 바라보며 가족사를 회상하고 있는 최영철의 「가족사진」은 사진의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기능을 확인하기에 좋은 시이다. 첫 연 “무명치마 저고리”와 “품 넓은 양복”을 입고 찍은 젊은 시절의 양친 사진은 이 시의 시적 자아에게 스투디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제국주의” 시대에 촬영된 이 사진이 “흘러간 역사처럼 빛바랜 사진 한 장”으로서 사회사와 조우하고 중첩되는 역사를 지니고 공동체의 공적 서사로 작용하는 기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적 자아는 이 사진에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반면에 그는 마지막 연의 노쇠한 양친의 초상사진에서 큰 감정적 무너짐을 겪는다. 초라한 “무명치마 저고리”가 아니라 물질적 풍요를 상징하는 “비단 치마저고리”를 입고 “흰 머리에 주름살만 가득”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가족사의 한 엑스트라”가 되어버린 양친의 인간사를 실감했던 것이다. 더구나 “기-ㅁ-치-이.” 소리와 함께 찍힌 “쓸쓸한 빛이 더해”가는 양친의 웃음은 긴 시간을 통과한 자만이 갖는 삶의 물리적 흔적이다. 시적 자아가 어찌할 수 없는 이 웃음이 이룬 흔적은 그에게만 고유하고 내밀한 ‘상처’와 고통의 형식으로 작용하는 푼크툼이었고, 따라서 최영철은 그 웃음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나 진술을 생략하고 말았다.

 

주명덕, 한국의 가족_논산,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71

주명덕의 《한국의 가족 시리즈 중 하나인 이 사진은 푼크툼의 사례로 거론하기에 적합한 작품이다. 물론 이 사진에서 스투디움은 대가족제도와 공동체살이가 지닌 온정적 가치이다. 사회학자 이효재가 글을 쓰고 주명덕이 사진을 찍어 『월간중앙에 발표한 이 포토 에세이는 변화해 가는 한국 사회의 가족 제도에 대한 비평적 사진 보고서였다. 그러나 이 사진이 우리 가슴을 건드려 요동치게 하고 정서적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진가가 의도하지 않았거나 그 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세부’들이다. 이를테면 바르트가 루이스 하인(Lewis Hine)의 사진에서 ‘모든 지식, 모든 교양을 추방’하고 소년의 ‘당통식 칼라’나 소녀의 손가락에 감긴 ‘붕대’만을 바라보았듯, 바닥에 바짝 엎드린 똥개의 뭉뚝한 꼬리 혹은 벌거벗은 배불뚝이 아이의 배꼽이거나 학생 교모에 달린 배지 또는 치맛자락 밑의 버선코 고무신일 수 있다. 초가지붕 이엉을 엮은 새끼줄일 수도 있고 초가 마당에 거칠게 난 바퀴자국일 수도 있다. 이 ‘세부’들은 모두 사진가가 의도한 주제 너머에서 보는 이의 경험을 환기하고 다양한 감정을 추체험하게 하는 푼크툼으로 작용할 수 있다. 주명덕의 사진은 객관적인 카메라의 뷰파인더 시선이 디테일하게 포착한 ‘세부’로 충만한 사진일수록 극적 긴장감과 미적 감동이 더 고조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바르트가 이원화한 이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논리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진론으로 국한하지 않고 후기구조주의가 지향한 해체성이라는 세계 인식으로 확장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저자 중심의 생산 미학에서 벗어나 의미 생성을 독자에게 이양하는 푼크툼적 독법은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고 ‘독자의 탄생’을 불러왔다. 저자가 의도한 주제나 사회적 코드를 거부한다는 것은 제도화된 미학적 획일성에서 벗어나 독자의 경험에 의해 촉발된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고 다양한 문맥 짜기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또한 푼크툼의 미학은 주체중심주의와 이성중심주의의 시선을 해체하고 타자 중심의 시각을 낳았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대상이 나를 ‘찌름’으로써 내가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인식 주체인 ‘나’를 인정하지 않고 이성에 기초하는 모든 판단과 해석을 유보한 채 대상 스스로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바르트는 스투디움보다 더 큰 푼크툼의 힘을 빌려 모든 주체 중심의 이데올로기와 도그마를 해체하고 타자성과 다원성을 옹호하였다. 물론 ‘중심’이 아닌 하찮은 ‘세부’에 의미를 부여한 이 푼크툼의 힘이야말로 인간 의식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고 세계를 ‘전적’으로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프레임 안에 들어온 모든 대상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을 뛰어넘는 카메라의 힘, 곧 사진의 힘이었다.

 

* 『열린정신 인문학연구 제19권 제1호에 게재한 논문 일부를 인용, 재구성하여 쓴 글입니다.

 

김혜원(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연구교수,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