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3 – 신림 자하동 《일간정(一間亭)》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두 번째
05/0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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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동이나 봉천동, 혹은 더 멀리 동호나 양화진 터에서 남쪽이나 남서(南西) 방향을 관망하면 관악산과 삼성산과 호암산 실루엣이 동서로 고만고만 나란하다. 왼쪽부터 관악산은 바위산 능선의 굴곡들이, 삼성산은 삼각형이, 호암산은 둥그런 호랑이의 머리 모양이 두드러진다. 작년 봄에 시흥 유적과 호암산 주변을 조망하기 위해 들렀던 봉천동 언덕 위 용주사 마당에 다시 섰다. 세 산이 나란히 놓인 모습을 좌우로 길게 그렸다. (도 1) 서울의 남악(南岳)인 관악산은 맨 왼쪽에 위치한다.

관악산은 신림동 서울대학교 정문으로 옮겨 더 가까이서 본 모습을 별도로 그렸다. (도 2) 갓 모습을 연상시킨다 하여 ‘갓뫼’ 혹은 ‘간뫼’로 불려온 관악산(冠岳山)은 해발 632.2m의 연주봉(戀主峯)을 중심으로 돌산 주름의 리듬이 돋보이며, 그 산세가 아름다워 소금강 혹은 서금강(西金剛)으로 불려왔다. 서울 남쪽의 진산(鎭山)으로 과천, 안양, 시흥, 신림, 봉천 일대의 주산이 지닌 카리스마를 적절히 내뿜는다.

《한·임강명승도권》의 그림 순서로 보면,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은 관아 뜰의 정자 <취향정(翠香亭)>에 담긴 봄 정취와 동쪽 책방 담장 너머 <검지산(黔芝山)> 전경을 그리고 나서, 관악산 기슭 자하동(紫霞洞)의 <일간정(一間亭)>을 찾았다. 시흥 관아에서 동쪽으로 검지산 너머에 있는 명소이다. 이들 석 점에는 모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림의 오른쪽 시작 부분에 “모정은 현의 동북 변 10리에 있다. (茅亭在縣東北邊十里地)” “이름은 일간정이라 불렸고, 북쪽 자하동의 최고 좋은 곳이다. (稱名一間亭者 北紫霞洞最好處也)”라고 행서체로 밝혀 놓았다. (도 3) 두 문장 글씨의 서체와 먹색이 살짝 다르다. 모정의 위치를 쓴 담묵의 문장은 화가 정수영이, 진한 농묵의 지명을 밝힌 문장은 친구인 강관이 쓴 서풍이다.

일간정의 모양은 한 칸 정자라는 이름처럼 네 기둥에 초가지붕을 얹은 소박한 정자이다. 시흥 관아 뜰의 <취향정>과 닮아 흥미롭다. 관민이 유사하게 조성한 초정(草亭)의 형식 같다. 관청의 정자다움은 취향정의 낮은 난간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일간정> 그림의 정자가 설치된 곳은 온통 각진 바위들로 가득하다. 화면 오른쪽은 바위 결을 따라 층층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가 보인다. 그 왼편으로 정자에 오르는 계단이 조성되어 있다. 정자 아래에는 작은 바위 못 정도 같다. 소나무 세 그루와 활엽수들은 봄꽃이 모두 지고, 신록이 제법 어울린 풍경이다. 화면의 왼쪽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두 채의 초가집과 세 덩어리의 계곡이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다. 화면 전체는 빈 여백이 거의 없다. 나무며 바위며 물길 표현은 정수영 특유의 담묵담채와 갈필 화법이 와글와글 구사되어 있다.

<일간정>은 관아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관악산 기슭 신림의 유명한 절경, 자하동에 있었다. 내가 관악산을 올려다보며 그린 서울대 정문이 곧 옛 자하동이다. 현장에 서보면 ‘자하(紫霞)’, 곧 붉은 노을이 아름다운 장소를 연상케 하는 시어와 거리가 멀다. 옴팡진 돌산 계곡이다. 일반적으로 자하동이 고개를 뜻하는 ‘잣’에서 연유하는 것처럼, 호암산 동서를 오가는 산길이나 신림에서 시흥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자하동에는 1960년대 후반 골프장이 들어서고, 그 위에 1970년대 후반 서울대학교가 들어섰다. 그 이전 지도에는 ‘자하동’이 꼭 등장했고, 대림천으로 흐르는 개울 주변에는 여러 가구의 적지 않은 마을이 있었다. (도 4) 실제로 의성 김씨 집성촌으로 60여 가구의 전통마을이 유지되었고, 1960~70년 사이에는 <꼬마 신랑>(1970)이나 <사자성>(1964) 같은 사극영화 촬영지였다. (『신림동』, 서울역사박물관, 2015 ; 이동헌 글·류백헌 사진, 『사람과 산』, 2020.10) “모정은 현의 동북 변 10리에 있다.”라고 했듯이, 시흥 호압사에서 자하동까지 3.5km로 한 시간 남짓의 거리이다. 미림고개, 산북터널을 지나는 이 길 따라 현재 6515번 버스가 왕래한다.

현재 자하동 마을 신목(神木)인 늙은 느티나무가 있던 곳에 서울대학교 정문이 들어서고, 마을에 모셔진 미륵불 석상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실개천 계곡이 깔끔하게 정비되어 본디 옛 모습은 완연히 잃었다.

정문 로타리에서 서쪽을 보면, 돌산의 암반을 왕창 떨어낸 벼랑언덕이 보인다. (도 5) 그 아래 관악산 입구 공원을 조성했고, 한 칸짜리 정자를 세웠다. 학교 공사에 사용했던 모양으로 암벽은 상당히 많은 양을 떼어낸 듯하다. 또 공원 입구에 인공폭포를 조성하고 ‘폭포 쉼터’라 표시판을 달았다. (도 6) 돌산의 화강암 암반과 폭포가 있던 공원의 원형을 상상하면, 정수영의 <일간정> 그림과 잘 맞아떨어져 흥미롭다. 암벽 벼랑 위에 있던 ‘일간정’만 초가지붕을 기와로 바꾸어 아래로 내려 옮긴 셈이다.

 

문인화가 신위와 인연이 있던 곳, 자하동

<일간정> 그림에서 강관이 밝힌 자하동과 그 동천(洞天)의 ‘일간정’은 19세기 시흥현 지도에 꼭 표기되어 있다. 그런 만큼 조선 후기에 여러 문인의 관악산 유람기나 시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일간정은 조선 후기 최석정, 체제공, 서영보, 강준흠, 임득명 등의 문집에 기행 시문으로 전한다. 자하동은 조선 후기 문인 관료이자 시인, 묵죽도를 잘 그린 서화가 삼절(三絶)로 꼽히는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5 )와 밀접하다.

이들 가운데 신위와 절친인 죽석관 서영보(竹石館 徐榮輔, 1759~1816)의 「유자하동기(遊紫霞洞記)」가 <일간정> 그림의 이미지와 흡사하다. (徐榮輔, 『竹石館遺集』 第三冊) 이 유기(遊記)는 1786년 신위의 초청으로 서영보가 자하동을 찾아 쓴 글이다.

 

“관악산(冠岳山)과 검지산(黔芝山) 사이에 수석(水石)의 경치가 빼어난 곳이 있으니 바로 신림(新林)이고, 신림에서 가장 그윽하면서도 더욱 경치가 좋은 곳이 자하동(紫霞洞)이다. 두 산에서부터 흘러오는 물이 모여서 신림동에서 호리병 주둥이로 나오듯이 흘러나와, 강태사(姜太師)의 서원 앞에서 굴절하여 남쪽으로 흘러든다. 물길을 따라 점차 동쪽으로 몇 리를 가면 작은 봉우리가 수풀 위로 보일락 말락 하는데, 이것이 국사봉(國士峯)이다. 그 아래로 수목이 울창하고 인가가 은은히 보인다. 아름드리 늙은 느티나무 세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에 이로당(二老堂)의 옛터가 있다. 이곳이 신씨(申氏)의 자하동 별업(別業)이다.

개울을 따라 점차 올라가면 갑자기 두 바위가 개울을 끼고 마치 문처럼 마주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여기서부터 바위가 더 커지는데 개울은 양쪽 벼랑에 이르기까지 바닥이 모두 바위로 되어 있다. 물가에 늘어선 바위가 어떤 것은 용마루처럼 비스듬히 서 있고 어떤 것은 평상처럼 펑퍼짐한데, 색깔은 모두 갈아 놓은 듯 반들반들하여, 바둑을 둘 수 있고 시를 쓰기에도 좋다. 조금 평평하고 널찍한 꼭대기에 작은 정자가 있는데, 개울 동북쪽 굽이진 곳에 있어서 서남쪽으로 막 흘러나오는 개울물을 굽어보게 되어 있다. 연주대(戀主臺)에서 정자 동쪽에 이르기까지 물길이 넓게 퍼지고 모여서 감돌다가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져 작은 폭포가 된다. 그 곁에 ‘제일계산(第一溪山)’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개울물이 정자 발치를 돌아 굽이굽이 흐르면서 층층으로 소리 내며 부딪쳐 떨어진다. …중략… 내가 처음에 자하동 주인과 약속하여 관악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려고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기록이 여기에 그친다.” (정동화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7)

 

여기서 신림은 지금의 신림동이다. 강태사는 고려 강감찬(姜邯贊)을 말하며, 서원은 서견, 이원익 등의 위패를 함께 모셨던 충현서원(忠賢書院)이다.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고, 그 터는 지금 광명시 소하동에 있다. 신씨(申氏)의 자하동 별업(別業) 이로당(二老堂)은 신위의 고조할아버지인 신여석(申汝晳)과 신여철(申汝哲) 형제가 세웠던 것으로 전한다. 이는 숙종 시절의 문신 존와 최석정(存窩 崔錫鼎, 1646~1715)이 쓴 「이로당기」에 자세하다. 이로당(二老堂)은 서너 칸이었고, 화재로 사라진 이후 신여석의 차남 만오당 신확(晩梧堂 申瓁, 1652~1698)이 이곳에 작은 모정(茅亭)을 지었다. 또 바위에 큰 글씨 ‘제일계산(第一溪山)’을 새겼다고 한다. (崔錫鼎, 『明谷集』) 이 모정이 ‘일간정’ 아닐까 싶은즉, 돌산이 파괴되며 사라진 듯하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전사한 신립(申砬)의 후손이다. 신위가 어린 시절부터 이곳 종가와 인연을 맺고 지냈기에 ‘자하(紫霞)’라는 아호를 쓰게 되었다.

평산 신씨로 자가 한수(漢叟)인 신위는 자하(紫霞) 외에 경수당(警修堂)이라는 아호도 썼다. 정조 23년(1799) 춘당대 문과에 급제하고, 곡산부사 춘천부사 강화유수 이조참판 병조참판 도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순조 12년(1812) 진주 겸 주청사(陳奏兼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을 다녀왔으며, 옹방강(翁方綱) 학파와 교유하며 청나라의 문물과 학예를 접했다.

신위는 서영보, 신대우 등과 어울린 소론계열이었으면서도 노론계의 김조순이나 김정희, 남인계의 정약용과 정학연 부자 등과 만났고, 초의선사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추사 김정희와 어울리며 정치적 부침도 있었고, 지방관을 통해 현실을 통감하며 관직에 대한 환멸로 은둔을 반복하기도 했다. 이를 토대로 하면서 적서차별이나 여성에 대한 인습을 벗어나려는 노력과 더불어, 조선 시나 무악 등에 관해 취미를 보인 신위의 시문학은 조선 말기에 큰 영향을 미쳐 문학사의 위상도 높다.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자하시집(紫霞詩集)』)

신위의 서화는 두 아들 신명준과 신명연, 그리고 추사일파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특히 가벼운 수묵 필치의 대나무 그림은 이정(李霆), 유덕장(柳德章)과 더불어 신위를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등극케 했고, 남종문인화풍의 산수도를 즐겨 그렸다.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동기창체(董其昌體)를 기반으로 유려하고 탄력 있는 행서체를 즐겨 썼다. (『자하 신위 탄생 250주년 기념 서화전, 자주빛 노을에 물들다』, 국립중앙박물관, 2019) 신위가 70세에 쓴 고법 공부에 대한 서론(書論)을 소개한다. (도 7)

 

“옛것을 임모하는 법도는 다만 그 정신을 얻고 닮음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크게 발전한다. 나도 일찍이 그리 노력해왔는데, 재주가 미치지 못했기에 부끄럽다. 자하 일흔 노인이 써서 알린다.” (臨古之法 但得其意 不求其似 斯爲上乘 余嘗從事於斯 而才有不逮 是可媿耳 紫霞七十叟 書因識)

 

현재 신림동 계곡 자하동과 함께 신위와 관련한 유적은 사라졌다. 그 대신에 자하 신위의 기념 공간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근처로 옮겨지고, 작은 연못가에 아담한 기림비와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도 8)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