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4 》 : 포스트 사진과 디지털 환영
04/28/2021
/ 김혜원

디지털의 등장으로 멀티미디어와 정보의 광야를 유목하며 자신이 원하는 음성, 문자, 영상 등의 정보를 자유자재로 채집하고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아티스트(Artist)’를 넘어 ‘크리에이터(Creator)’라는 이름을 획득하는 시대가 되었다. 시청각 기술과 컴퓨터의 통합이 세상을 기록하고 해석하고 소통하는 방식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와 이른바 포스트 사진(post-photographic)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포스트 사진 시대의 이미지는 이미지를 실제 세계의 사물에서 인과적으로 생성된 진실한 기록으로 간주하던 기존의 화학적 아날로그 사진에서 벗어나고, 단순히 비가시적이고 초현실적인 장면을 구성하고 조작했던 사진들로부터도 벗어난다. 즉 사진의 역사 초창기에 시도되었던 오스카 레일랜더(Oscar Rejlander)의 합성 사진이나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의 포토몽타주, 초현실적 이미지로 외부 현실의 등가물이 없는 자율적 시각을 추구했던 모더니즘 사진이나 이미지 요소들을 자르고 붙이고 인용하고 결합하는 디지털 ‘전자브리콜라주(electrobricolage)’의 세계를 모두 뛰어넘는다. 포스트 사진 시대의 이미지는 모든 감각 매체의 광범위한 전환과 무수한 융합(convergence)을 가능케 한 유비쿼터스의 세계에서 과거와는 다른 감각으로 가상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디지털 환영을 추구한다.

   의자가 쑥쑥 자라고

   의자의 아래에

   자란 만큼의 깊은 우물이 생긴다

   우물 층층이 보관되었던 옷들이 나와

   사람과 물고기가

   한 몸이 되었던 오랜 자국을 털어낸다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털어낼 수 있는 자국만을

   의자는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털어낼 수 없는 자국은

   의자 아래로 감추어져

   의자는 쑥쑥 자라고

   사람과 물고기는 의자 위에서만 산다

   사람의 몸이던

   물고기의 몸이던

 

   -박강우, 「합성사진 혹은 더빙」 전문

소아과 의사이면서 시집 『앨리스를 찾아서』에서 뉴미디어와 관련한 시를 다수 발표한 바 있는 박강우의 「합성사진 혹은 더빙」은 가상 세계를 디지털 영상처럼 보여주고 있는 시이다. 이 시는 “합성사진 혹은 더빙”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시각 매체와 청각 매체가 융합된 한 편의 디지털 영상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시는 “자라고” “생긴다” “나와” “털어낸다” 등 현재진행형 동사를 수반하는 묘사를 통해 이 “합성사진”이 스틸 이미지가 아니라 “더빙”을 얹힌 동영상 이미지임을 암시한다. 또한 이 시는 의미의 유기적 연관성이라는 전통적인 독법을 무시한 채, 자동화된 인간의 지각 방식을 흔드는 변형되고 왜곡된 이미지 속에서 초현실 혹은 가상현실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쑥쑥 자라”는 “의자”, “의자의 아래에” 생겨나는 “우물”, “사람과 물고기가/한 몸이 되었던 오랜 자국을 털어”내는 “옷들”, “의자 위에서만” 사는 “물고기” 등의 신화적 이미지들은 실제와 허구,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에서 우리의 고정관념을 흔들고 초현실의 낯선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이는 박강우가 이들 이미지들을 연결할 고리를 가상과 현실이 혼재하고 융합되는 유비쿼터스의 세계 속에서 찾았기 때문이었다.

 

김호성, 유령 도시, 뉴욕_N1402, Pigment Print, 140×210cm, 2014

김호성, 유령 도시, 뉴욕_B1415_Pigment Print, 75×75cm, 2014

김호성의 《유령 도시, 뉴욕》은 초상권을 보장하기 위해 모호하게 이미지를 왜곡해 놓은 구글 어스의 거리뷰 이미지를 캡처하여 재구성한 사진들이다. 김호성은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로 부유하는 뉴욕 풍경을 통해 현대인의 욕망과 집합 무의식을 표상하는 환등상(幻燈像)으로서의 대도시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모호하게 뭉개진 개인이나 인물 군상들은 메트로폴리스에서 살아가는 도시인의 익명성과 소외감을 더욱 극대화한다. 그러나 김호성의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사진이 기록성이라는 사진의 본질적 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점이다. 미디어의 발달로 동시 편재(遍在)적 시공간을 체험하게 되면서 뉴욕 도심에 발을 딛지 않고서도 뉴욕 웨스트 53번가의 바람에 나부끼는 성조기와 쇼핑가를 활보하는 뉴요커들을 ‘찍을’ 수 있었던 그의 사진은 포토그램(photogram)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대상물을 매개로 존재했고 대상물을 직접 지시하는 특성으로 ‘그때 거기’에 있었음을 인증해 온 사진의 본질을 돌아보게 한다.

마틴 리스터(Martin Lister)는 「전자 영상 시대의 사진」에서 1990년대 이래 화학적 아날로그 처리법을 대체하고 암실에서 해방된 전자적 디지털 사진, 나아가 컴퓨터와 시청각 매체가 정지 사진과 융합된 디지털 영상이 주요 문화 산업으로 발전하면서 사진의 본성 자체를 뒤흔들고 사진의 존재론적 지위에 도전했다고 말한다. 박강우는 다매체의 혼성적 이미지를 시적 장치로 활용한 실험적인 시를 통해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something)’에 대한 재현의 문제, ‘실재(the real)’를 정의하고 이해할 새로운 방법으로서의 가상현실의 문제를 제기한다. 김호성은 실제 대상물이 없는 웹(web)에서 뉴욕 거리의 ‘유령’ 같은 이미지를 ‘채집’한 ‘이미지 속 이미지’를 통해 ‘그때 거기’에 있지 않고서도 ‘지금 여기’를 제시할 수 있는 포스트 사진의 현 상황을 보여준다. 포스트 사진 시대의 시각 체계의 변화, 즉 보는 방식과 이미지 제작 방식의 변화를 초래한 디지털의 세계는 새로운 상상력과 리좀적 사유로 멀티미디어와 정보의 광야를 자유롭게 유목하는 이들에게 디지털 환영을 창조하는 유비쿼터스 세계에서의 ‘크리에이터’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 『열린정신 인문학연구』 제19권 제1호에 게재한 논문 일부를 인용, 재구성하여 쓴 글입니다.

 

김혜원(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연구교수,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