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2 – 시흥 검지산(호암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한 번째
03/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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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은 1796년 여름 남한강 선유(船遊)를 마치고 우이동 계곡 <재간정>을 찾았다. 그리고 가을 포천 영평지역 창옥병 근처 <백운담> <사암서원> <금수정>을 거쳐 <화적연>에서 그해 여정을 마쳤다. (앞의 ‘답사와 스케치 여정’ 연재 참조) 《한임강명승도권》의 순서에 따르면, 정수영은 이듬해 1797년 봄 시흥현(始興縣)을 방문했다. 지금 금천구 시흥동이다. 나는 2019년~2020년에 지우재 여정을 따라 답사하면서, 작년 봄에 이곳을 둘러보았다.

시흥동 중심인 옛 관아 터에 서니, 동쪽으로 호암산(虎巖山)이 병풍처럼 두르고 서쪽으로 안양천과 주변의 들녘이 전개된다. 안양천은 북쪽으로 선유도에서 한강과 합류한다. 해발 393m의 호암산은 동편의 해발 632.2m 관악산과 480m 삼성산에 이은 줄기답게 바위산 경치를 뽐낸다. 단순한 암산의 형태가 스케치북을 펼치게 한다. 산 아래 근경에는 지금의 도시 풍광을 생략하고 옛터를 지켜온 노거수 은행나무 세 그루를 배치해 그렸다. (도 1, 2)

근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빼곡하게 들어서 산 중턱까지 시야를 가린다. 하지만 그 아래 은행나무를 포함해 동네 곳곳의 느티나무 향나무 등 노거수들이나 고려 석탑 등이 시흥의 역사를 말해준다. 8백 살 이상 나이 든 은행나무들은 건물들 틈과 길가에서 옹색한 대로 생명을 유지해 있다. 조선 시대에는 기와집 건물의 관청, 초가 마을, 그리고 노거수들이 호암산과 어울려 장관을 이루었을 법하다.

올해 3월 초 다시 찾아보니 이들 가운데 관아 터의 표시석이 놓이고 가장 큰 은행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세 그루 중 제일 키가 크기도 하려니와, 중앙의 죽은 것 같은 덩치의 고목에도 물기운이 오르는 듯 푸릇한 잔가지와 새잎이 자라 있었다. 그 봄 색이 뭉클해 스케치했다. (도 3, 4) 알림판에는 1968년 보호수 지정 당시 수령이 830년이고, 14m 높이에 나무 밑 둘레가 8.6m이란다. 주소는 시흥동 386-35번지이다.

호암산의 다른 이름은 검지산(黔之山)이다. 시흥의 이전 이름은 금천현(衿川縣)이었다. 북쪽의 한양과 양천 동작 노량, 동쪽의 과천, 남서쪽의 안양 수원 인천 등으로 열린 교통의 요지였다. 한때는 과천과 병합해 금과현, 혹은 양천과 병합해 금양현이 되기도 했다.

금천이 시흥으로 바뀐 것은 종6품 현감을 종5품 현령으로 승급하면서부터이다. 정조 19년(1795) 윤2 월 1일에 시행되었다. (『日省錄』) 이때 현감 홍경후(洪景厚)가 현령으로 승급되었다. 특히 정조는 화성으로 이장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 참배를 위해 행행(幸行)이 잦았다. 그 가운데 정조 19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의 행사가 가장 성대했다. 고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회갑을 맞은 해이고 이를 위해 대규모 연회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한양과 화성, 백 리의 중간 길목인 시흥현에는 임금의 행차를 위해 도로가 확장되고 이동하는 가운데 머무는 행궁이 조성되었다. 그만큼 시흥이 중요한 거점으로 격상되었고, 종5품 현령 배치는 정조의 능행(陵行)에 따른 배려였던 셈이다.

1795년 윤2월 을묘년 큰 행사를 담은 《화성능행도 8폭 병풍》도 제작되었다. 이 가운데 <환어행렬도>가 바로 화성행사들을 마치고 궁궐로 돌아오며 시흥 행궁(行宮)에 들르는 행렬도이다. 지금의 시흥동 금하로를 따라 행차하는, 길다란 이동장면을 ‘乙’ 자형으로 부감해 포착했다. 여기에 혜경궁홍씨의 가마, 관료들과 호위 군사 등 행사 참여자들과 길가 주막이나 엿장수 아이 등 구경꾼의 움직임을 디테일하게 살려낸, 스팩타클한 걸작 중의 걸작 궁중 기록화이다. 김득신, 장한종, 이인문 등 당대 손꼽히는 일급 화원들이 참여해 그렸다. (도 5)

 

시흥 관아에 머물며 그린 <취향정><검지산>

정수영은 《한임강명승도권》에 3점의 시흥 풍경을 담았다. <취향정>과 <검지산> 2점은 시흥현 관아에서 머물며 그린 것이다. 또 <일간정(一間亭)>은 관아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관악산 기슭의 유명한 명소 자하동(紫霞洞)에 있었다. 한 지역을 연달아 그린 탓인지 세 점은 아랫부분이 중첩되어 있다.

시흥의 첫 그림 <취향정(翠香亭)>은 관아의 뜰에 있던 정자 같다. 그림의 오른쪽 위에 “금천 관아의 동쪽 취향정(衿川衙東 翠香亭)”이라고 밝혀 놓았다. (도 6) 이로 미루어볼 때, 정수영의 이곳 방문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여기서 ‘금천’이라 쓴 것은 ‘시흥’으로 지명이 바뀐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은 탓이다. 한편으로는 ‘옥병서원’을 ‘사암서원’이라 표기했던 것처럼, 개명하기 이전 지명을 고수한 점은 재야 문인 정수영의 정치적 경향성일 법하다. 호암산보다 검지산이라는 지명을 쓴 것도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푸른 향기를 즐기는 정자 <취향정>은 초가지붕에 단칸으로 소박하지만, 조선 시대 관청에 조성하던 연못의 일반화된 형태이다. 두 곳 방형 못에 각각 섬을 만들고. 섬에는 소나무를 주요 수종으로 삼아 대여섯 그루씩 심었다. 화면의 오른쪽 목책 다리가 놓이고 초정(草亭)이 시설된 석축 섬에는 소나무가 6그루 보이고, 왼쪽 섬에는 소나무 5그루와 키 큰 활엽수 고목 한그루가 서 있다. 연못가에는 분홍 복사꽃들이 만발해 봄 정취 가득하다. 담 밖 언덕의 봄 나무들과 더불어 정수영의 미숙한 듯, 가벼운 담묵담채 화풍을 잘 보여준다.

관아의 동쪽 짚 이엉을 얹은 수평 담장은 다음의 <검지산(黔芝山)> 그림으로도 이어진다. 정수영은 관아 동쪽 연못 그림의 중단을 지나는 담장과 같은 형태의 담을 근경에 횡대로 깔고, 그 너머로 본 검지산 전경을 포착했다. 담 너머 언덕이 살짝 보이는 점도 동일 장소임을 알게 해준다. 기다란 담장 중간쯤에는 작은 문이 나 있다. 그리고 화면 오른쪽 위에 “책방 동쪽 담장 밖(冊房東墻外)”이라고 제목을 써넣었다. (도 7) 책방의 동쪽 담장이 관아의 동쪽 끝이니 동헌(東軒)에 연계된 공간이었을 법하다.

여기서 ‘책방(冊房)’이 주목된다. 고을 수령이 되면 근무처에 친구나 친척, 지인을 책객(冊客)으로 곁에 두고 일할 수 있었다. 책방은 이방, 형방, 호방 등 6방 향리의 명칭에 맞추어 부친 이름으로 제7방인 셈이다. 시서(詩書)를 나누는 문인 취향의 명칭이지만, 책방이 수령 통치에서 상당한 정치적 위치를 점유했던 모양이다. 책방은 고을을 다니며 여러 현황이나 정보를 파악해 수령에게 알렸고, 이 과정에서 때론 권력을 행사하며 탐관오리의 역할마저 했다. ‘현감은 빈 털털이로 파직될 가능성이 있지만, 책방을 수행해 가난을 벗어나지 않은 자가 없었다’라고 전해질 정도이다. (尹愭, 『無名子集』)

정수영이 시흥현령의 책방과 지인이던지, 혹시 그 자신이 책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임강명승도권》의 일정상 영평과 도봉산이 동일 라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평에서 시흥을 들렀다가 다시 영평 길목인 도봉산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또 검지산과 일간정 그림의 활엽수에는 봄 정취나 색감이 사라진 상태여서, 정수영이 여름까지 시흥 관아에 머물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때 시흥현령은 김사희(金思羲, 1753~?)였다. 정조 19년(1795) 윤2월 17일 발령을 받았다. 정조시절 최대규모의 화성 행행이 끝난 다음 날이었다. 현령으로 승격한 직후 첫 발령자였던, 김사희는 영조 49년(1773) 진사시험에 급제한 뒤 주로 지방관으로 관직생활을 했으며,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시흥현령 시절 임금과 잦은 대면으로, 정조 21년(1797)에는 수원판관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日省錄』) 다른 교우관계나 행적으로 알려진 게 드물고, 또 정수영과 인연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한임강명승도권》과 관련해 정수영이 마지막 토산을 찾았는데, 김사희는 그 십여 년 전 정조 9넌(1785)에 토산현감을 지냈다.

그림의 상단 왼쪽에는 “한양과 가깝게 질러 통하는 지름길(抵京捷路)”라고 적었다. 현재는 신림동으로 넘어가는 도로에 산북터널이 뚫려 있다. 또 《한임강명승도권》의 다른 장면에도 자주 썼듯이, 강관이 “검지산 한 줄기, 관악 명산과 닮지 않았다. 이 그림은 음식을 잔뜩 늘어놓은 듯하다. (黔芝一支終不若冠岳名山 此圖或近於飣餖)”라고 제발(題跋)을 썼다. 이를 강관의 필적으로 확인함과 함께, 그동안 관악산으로 알려져 온 이 그림을 최근 신진 연구자가 <검지산>으로 밝혔다. (한상윤, 「선유와 유산으로 본 정수영의 한임강유람도권 고찰」, 『미술자료』 96, 국립중앙박물관, 2019.)

검지산(黔芝山)은 검은 영지가 많이 자란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며, 금천(衿川)도 이 검지(黔芝) 혹은 금지(黔芝)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옛 기록이나 고지도에는 ‘검지산’도 있지만, 산 정상의 호랑이 바위로 인해 지어진 ‘호암산(虎巖山)’을 같이 썼다. 특히 호암산 호랑이가 노려보는 바람에 한양도성 건설에 지장을 받자, 호암산 꼬리 부분을 누르기 위해 호압사(虎壓寺)를 세웠다는 무학대사 설이나 태종 시절 창건설화와 관련을 볼 때 그렇다.

<검지산(黔芝山)>은 지우재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귄》 실경화 가운데 여주 <휴류암> 그림과 함께 회화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진경산수화로 꼽을 만하다. 실경과 닮게 그리는 데는 다른 그림들이나 마찬가지로 부족하지만, 나무나 담장 묘사에서 미숙함이 도드라지지 않으니 그런 것 같다. 강관이 ‘다 먹지 못할 음식물을 잔뜩 늘어놓은 듯한(此圖或近於飣餖)’ 산세 표현이라고 꼬집었으나, 근경 수평 담장 위로 네모 형태를 동어반복으로 3~7층씩 횡렬로 쌓은 검지산 암산 경치의 단순한 구성이 파격이면서 돋보인다. 토산에 비스듬히 사선으로 석치(石齒)가 박힌 암산을 정수영답게 변형 리듬으로 재해석한 개성미라 하겠다. (도 2, 8, 9)

옆으로 긴 산 풍경 설정을 보면, 토산 주름 위로 드러난 바위들도 나름대로 그 주름을 따라 강약의 리듬감이 유연한 편이다. 한양을 넘어가는 북쪽 지름길에는 바위들과 봄 색의 나무들이 어우러지게 변화를 주었다. 그림에서 호암산 왼쪽에는 호랑이 바위와 호압사, 흔들바위가 위치한다. 산 능선의 오른쪽으로 구분한 뾰족한 봉우리들은 불영암이 있는 호암산성인 셈이다. 신라 후기 성곽으로 추정되며, 한우물 석구지(石狗池)와 석구로 여겨지는 동물상이 남아 있다. 호압사에서 불영암(佛影庵)에 이르는 능선은 안양천 구름산으로 지는 저녁놀을 최고로 감상할 수 있는 명소이다.

<검지산(黔芝山)> 화면 중앙의 산기슭에 보이는 관청 건물은 행궁이겠고, 홍살문과 노거수가 있는 오른쪽 단독건물은 성황단 정도로 여겨진다. 이렇게 관아 최고의 산 풍경이 전개되는 요지에 거처가 있었으니, 고을 정치경제의 알짜배기인 책관(冊官)의 권한과 위상을 새롭게 그려보게 한다.

정수영은 시흥의 두 곳을 그린 뒤, 현(縣) 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십 리가량 떨어진 자하동(紫霞洞)의 <일간정(一間亭)>을 찾았다. 관악산 아래 지금 서울대학교가 들어선 곳에 있었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