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21 – 포천 화적연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 번째
03/0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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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적연(禾積淵)은 포천의 제일경으로,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96호로 지정된 곳이다.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의 상류, 화산지대가 이룬 국가지질공원 계곡에 있다. S자로 굽은 강변은 현무암 주상절리의 벼랑이 협곡을 이루어 물이 깊다. 강물에 놓인 크고 작은 화강암 덩어리 기암(奇巖)들은 오랜 세월 빠른 물살에 씻겨 미끈하고 아름다운 형상을 이룬다. 이런 풍광의 중심인 커다란 암반이 볏단을 쌓은 ‘화적(禾積)’ 같다는 것이고, 자갈과 모래사장에 어우러진 짙푸른 못이 ‘연(淵)’이다.

화적연은 지난번 소개한 포천시 영평면의 사암서원과 창옥병, 금수정을 들른 뒤 발길 닿는 명소이다. 사암 박순, 이경석, 이민구, 허목, 박세당, 박태보, 이서구, 이항로, 최익현 등 조선 시대에는 많은 명사와 문인들이 화적연에 유람와 자연 풍류를 즐겼고, 신비로운 경치를 노래했다. 또 그런 만큼 여러 화가가 그림을 남겼다. 더구나 화적연은 금수정에 이어서 금강산 여정의 길목이어서 금강산 그리기의 워밍업하기 좋은 경치였을 법하다. 화적연을 화폭에 담은 화가는 <금수정(金水亭)>을 그린 정수영과 김하종 외에도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겸재 정선, 문인화가 단릉 이윤영, 학산 윤제홍 등이다.

 

조선 후기 화가, 문인들이 즐겨 찾는 명승

나도 근래 화적연을 여러 번 방문했다. 작년만 해도 3월, 9월, 12월 세 번이나 들렀다. 자주 찾은 이유는 조선 화가들이 그린 시점에 서보기 위해서였다. 2000년 초까지는 군부대 주둔지여서 그 지점에 접근하기 불가능했다. 지금은 캠핑장이 들어설 정도로 개방되어 있지만, 물길이 깊고 배가 없어 자유로이 강 건너 왕래할 수 없는 형편이다. 올겨울 오래간만에 한강이 얼 정도여서 화적암까지 얼음판 위로 갈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작년 12월 29일 오후에 찾았다. 개울이 깊고 S자형 급류여서 강변 가장자리만 얼었다. 또 못가나 싶었다.

그런데 새벽 금수정을 함께 답사했던 티제이 킴 대표가 지피에스를 찍고 이동해보자는 제안을 해왔다. 내비게이션의 지시에 따라 5~6km를 빙 돌아 영북면 자일리 들판을 질러 언덕을 넘으니, 바로 눈앞에 있던 건너편이었다. 옛 화가들과 문인들이 즐겼던 공간에 오게 됐고, 얼추 그들의 시점에 서니 반가웠다. 커다란 암반 화적암에서 사진을 찍고 여러 점 사생했다. (도 1, 7) 작년 봄부터 열 점 넘게 스케치했는데, 처음으로 옛 화가의 눈을 따라 그려본 셈이다.

현장에서 사생하니, 옛 화가들의 부정확 표현이나 풍경 현장을 재구성하는 방식이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몸을 엎드린 채 고개를 쳐든 듯한 화적암을 실물 모양과 달리 ‘화적’의 낟가리를 쌓은 이미지로 우뚝하게 그렸다. (도 2) 그 좌우에는 겸재의 개성인 수직준법(垂直皴法)과 적묵법(積墨法)으로 처리한 벼랑이 배치되어 있는데, 실제 현장과 비교하면 벼랑은 화적암 앞뒤에 있다. (도 7, 9) 이러한 주상절리의 묘사방식은 겸재의 금강산 화법과도 연계된다.

학산 윤제홍(鶴山 尹濟弘, 1764~?)도 적묵법 묘사가 거칠기는 하지만, 겸재와 유사한 형태와 구성을 보여준다. (도 3) 학산은 심지어 화적암 꼭대기에 나무가 자란 모습으로 심하게 왜곡하기도 했다. 두 그림의 변형은 직접 현장에서 그렸다기보다 화실에 와서 풍경을 생각하며 그린 탓으로, 사람이 지닌 기억력의 한계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태호, 「實景에서 그리기와 記憶으로 그리기」-朝鮮後期 眞景山水畵의 視方式과 畵角을 중심으로, 『미술사연구』 257, 한국미술사학회, 2008. ; 이태호,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마로니에북스, 2015.) 

이처럼 과장이나 변형을 심하게 하는 정선이나 윤제홍은 물론이려니와, 사생화에 해당하는 문인화가인 단릉 이윤영이나 지우재 정수영, 화원인 유당 김하종의 그림도 눈에 든 대로 화적연 실경을 빼닮게 그리지 않았다. 우선 부감한 듯한 시점의 상상이 그러하다. 또 그림에 등장한 좌우의 벼랑은 실제 현장에서 보면, 앞서 살펴본 것처럼 중앙 큰 바위 화적암의 앞뒤인 남서쪽과 북동쪽에 위치한다. (도 7, 9)

화적연의 첫 사생화이자 비교적 실경을 비슷하게 해석한 작품은 단릉 이윤영(丹陵 李胤永, 1714~1759)의 부채그림 선면화(扇面畵)이다. (도 4) 부채 상단에는 ‘서울에서 화적연까지 백여리’(溪石名禾積 距京百餘里)라고 써놓았다. 이 선면화도 사생 그림임에도 실경과 상당히 차이 난다. 그림에는 화적암과 강변을 강물로 분리해 놓았는데, 실제로는 오른편 강변 너럭바위에 화적암이 붙어 있다. 또 부실부실하게 쓴, 단릉의 엷은 먹 선묘도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능호관 이인상(凌壺觀 李麟祥, 1710~1760)의 갈필(渴筆) 화풍을 따랐기에, 육중한 암반의 양감을 내지 못한 상태이다. 이 물기 적은 능호관식 선묘 피마준법(皮麻皴法)은 지우재도 배웠다.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은 배치 방식에서 단릉을 따랐다. 사선으로 화적암을 오른쪽에 치우쳐 놓은 점이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단릉이 근경 몇 그루 소나무를 화면 왼쪽에 둔 데 비해, 지우재는 오른쪽에 그렸다. 지우재가 화적암을 오른쪽 강변 바위에 연결해 그린 것은 실경에 근사한 편이다. (도 5, 7) 뒤쪽의 수직 벼랑을 아예 사선의 큰 바위와 나란히 왼편을 채워 놓은 구성법은 겸재를 배운 결과로 여겨진다. 바위의 모습은 지우재가 비교적 세세한 선묘로 그린 데 비해, 실제 대상과 닮기는 단릉의 그것이 훨씬 낫다. 이 대목에서도 지우재의 묘사 기량이 미숙한, 어눌한 표현력 수준이 여실히 확인된다.

유당 김하종(蕤堂 金夏鐘, 1793~?)의 <화적연도>는 <금수정도>와 마찬가지로 지우재의 구성을 따랐다. 대신에 짧게 반복한 선묘로 물살을 표현한 단원식 수파묘(水波描) 화풍이 화원 솜씨답게 생동감 난다. (도 6)

 

기우제를 지내던 큰 바위 화적암의 성혈 자국

한탄강의 최고 절경으로 꼽히는, 화적연의 중심 ‘화적’ 바위는 포천시 영북면 자일리에 위치한다. 그 건너 군부대가 철거된 뒤, 지금 관광지로 개발한 쪽의 모래사장 강변은 포천시 관인면 사정리이다. 지난 호에 살펴본 금수정, 창옥병 등과 더불어 포천시의 영평8경(영북면 자일리 禾積淵, 창수면 주원리 蒼玉屛, 창수면 오가리 金水亭, 영중면 양문리 樂歸亭, 영중면 금주리 白鷺洲, 영중면 거사리 靑鶴洞, 일동면 수입리 臥龍巖, 이동면 도평리 仙遊潭)에 해당하며, 제1경이다.

13m의 높이에 20여m 길이의 화적암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볏가리’ 바위라고 일컬어져 오기도 했다. 그런데 덩어리 형태로 보아 볏단 쌓은 낟가리로 보기에는 좀 그렇다. 첫인상은 바위의 미끈한 질감과 함께 물개를 떠올렸다. (도 7, 9) 옛 지리지나 사람들도 이 화적암을 다르게 부르기도 해왔던 것 같다. 거북이 형상의 구암(龜巖), 머리에 두 뿔을 달고 강물에서 솟으려는 자태의 신룡(神龍) 바위, 이들을 조합한 구룡(龜龍) 바위 등이다. 또 바위 질감이 젖색이어서 유석향(乳石鄕)이라 불렸던 모양이고, 석영이 출토되었던 장소여서 지어진 이름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최동원, 「조선 후기 경기 북부 경승지의 현황과 인식 변화」, 『한국학 논총』 48, 2017.)

인근 마을 농부가 화적연에서 심각한 3년 가뭄이 들자 하늘을 원망하는 탄식을 쏟아내자 강물에서 용이 하늘로 치솟았고, 비가 쏟아졌다는 전설도 전한다. 이를 계기로 풍년이 들었고, 그 이후 기우제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실제 숙종 때 이곳에서 국가행사로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 확인되기도 한다. (『숙종실록』 39권, 30년 6월 26일 갑오)

이번 기회에 강 건너편으로 화적암 큰 바위에 오르니 젖색 화강암 질감이 멀리서 본 느낌대로 미끈하고 부드러웠다. 고개를 쳐든 듯한 바위 정상에는 3~5cm가량의 둥근 성혈(性穴) 자국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거북이 형상으로 치자면, 목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3개의 성혈이 또렷했다. (도 8) 바위에 내는 성혈은 우리 민속신앙에서 유감주술(類感呪術) 행위의 주요 형식이다. 구멍 내기를 성행위와 유사하게 인식해, 다산과 풍년을 기원했던 전통적인 신앙형태의 하나이다. 성혈은 지역이나 마을에서 신성(神性)이 부여된 자연 바위는 물론이려니와 고인돌, 심지어 불탑이나 석불에도 등장한다. 화적연 큰 바위가 몸에 지닌 성혈 자국만큼 오랫동안 신령스러운 공간이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