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원의 《 사진·문학·인문학의 카르텔 1 》 :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서의 사색
02/24/2021
/ 김혜원

1839년 8월 19일, 사진은 그 특허권으로 자신의 생년월일을 법률상에 올린 유일한 예술이다. 사진의 발명은 이미지 제작을 인간의 손이 아니라 기계가 맡게 되었음을 알린 혁명적인 사건이었지만, 암실 벽에 반사된 상(像)을 얻기 위해 바늘구멍을 통해 빛을 집중시켜 사진 이미지를 얻는 원리는 중국의 묵자 시대나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발명된 카메라의 기원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어두운 방)이다. 이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순수한 우리식 명칭은 정약용이 명명한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이다. 칠실(漆室)은 검은 옻칠을 한 것처럼 컴컴한 방이나 공간으로, 이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해당하는 말이다. 파려안(玻瓈眼)의 파려는 파리(玻璃)로, 이는 오늘날의 유리나 수정 일종의 렌즈를 가리키는 말이다.

 

   벌레들이 정지문에 구멍을 내놓은 거다 그 구멍 속으로 빛이 들어오면
   아궁이 그을음이 낀 벽에 상이 맺혔다
   나비가 지나가면 나비 그림자가, 마당에 뿌려놓은 햇싸라기를 쪼아 먹는 새 그림자가
   살강의 흰 그릇들에 거꾸로 맺히곤 하였다
   손가락으로 밀면 까무스름 묻어나던 그을음은
   불에 탄 짚들이 들판과 하늘을 잊지 못하고 벽에 붙여놓은 필름,
   그 위로 떠가는 상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어둠을 더 편애하게 된 것이 아닐까

   <중략> 

 

   영사기 필름처럼 차르르 돌아가던 풀무질 소리 뚝, 끊어진 어디쯤일까
   그사이 암실벽 노릇을 하던 정지벽도 까무룩 사라져버렸고
   상할머니 곰방대처럼 뽀끔뽀끔 연기를 뿜어 올리던 굴뚝도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스위치를 올리면 바퀴처럼 단박에 어둠을 내쫓는 한 평 반의 부엌
   싸늘한 불빛이 거리를 떠돌다 온 胃를 쓸쓸히 맞이할 뿐이다
   문을 닫은 채 웅크려 빛을 빨아들이는 벌레 구멍을 숨구멍처럼 더듬는 밤
   하늘에 난 저 별은 누가 갉아 먹은 흔적인지,
   구멍 숭숭한 저 별이 빨아들이는 빛은 어느 가슴에 가서 맺히는지
   이런 적적한 밤 나는 아직도 옛날 정지를 잊지 못해서
   하릴없이 낡은 밥상을 끌어안고 시를 쓰곤 한다
   밥상이 책상으로 둔갑하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새근거리는 식구들,
   그들 곁에서 쓰는 시가 비록 꼬들꼬들하게 익은 밥알 같은 것이 될 수는 없겠지만
   할머니의 아궁이에서 올라온 그을음이 부엌강아지 젖은
   콧등에 까뭇이 묻어날 것 같아선
   애벌레처럼 사각사각 연필을 깎으면서
   살강의 흰 그릇처럼 정갈하게 놓여 있는 종이 위에
   어룽거리다 가는 말들을 찬찬히 베껴 써보곤 하는 것이다 

 

   – 손택수, 「바늘구멍 사진기」 부분

 

손택수의 「바늘구멍 사진기」는 서양의 카메라 옵스큐라나 정약용의 ‘칠실파려안’의 원리를 일상생활 속에서 포착해 낸 시이다. 이 시에서 손택수가 체험한 카메라 옵스큐라는 시골집 정지문이 달린 재래식 부엌이다. 정지문에 난, 벌레들이 뚫어놓은 구멍 속으로 빛이 들어와 살강의 흰 그릇들에 나비와 새의 상(像)이 맺히는 모습을 보고 쓴 이 시에서 구멍은 렌즈 즉 ‘파려안’이고 아궁이 그을음이 낀 벽은 필름이며 어둠 속의 부엌은 카메라 옵스큐라 즉 ‘칠실’이 된다. 그런데 이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서 손택수가 사로잡힌 것은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이 벽의 그을음 위로 떠가는 상들, 즉 영사기 필름처럼 돌아가던 환영이었다. 따라서 손택수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환영적 특성에 근거하여 거꾸로 맺히곤 하였던 나비 그림자나 마당에 뿌려놓은 햇싸라기를 쪼아 먹는 새 그림자의 아우라를 놓치고 싶지 않아 시를 쓰곤 한다고 고백하며, 문학이 ‘어두운 방’에서 만들어지는 내면적이고 허구적인 이미지를 추구하는 작업임을 밝히고 있다.

 

조현택_빈방-0번방-나주시 금계동 57_Inkjet Print_80×120cm_2015

조현택의 <빈방> 시리즈는 어두운 빈방을 거대한 카메라 옵스큐라로 만들어 방안에 비친 시적이고 서정적인 영상을 포착해 낸 사진 작업이다. 이 <빈방> 시리즈는 도시를 재생하는 과정에서 철거가 예정된 빈집의 빈방에 들어가 벽이나 지붕에 구멍을 내고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따라 그 맞은편 마당 풍경이 상하좌우가 전도된 상태로 벽에 비친 영상을 촬영한 사진 이미지들이다. 노란 유채꽃이 핀 바깥 풍경이 텅 빈 방안으로 들어와 빈집의 내력이나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금계동’의 빈방 사진처럼 조현택은 실제와 환영이 공존하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삶에서 죽음으로 이행하고 있는 빈방의 아우라와 소멸되는 시간을 필름에 누적시켰다. 그리하여 죽음의 방부제로서의 사진의 본질을 이해한 그의 사진은 파괴되고 소멸될 공간을 풍화되지 않을 기억으로 보존하면서 지상의 사라져가는 존재에 대한 애도의 정을 더욱 인상적이고 개성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코드 없는 메시지’와 ‘코드 있는 메시지’가 공존하는 사진의 특성을 사진의 역설로 파악한 바 있다.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 밝은 방)에 의해 물질과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이루어지는 ‘코드 없는 메시지’로서의 사실적 이미지와 카메라 옵스큐라의 조리개 구멍에 의해 절단된 시각에서 이루어지는 ‘코드 있는 메시지’로서의 허구적 이미지를 구별했던 것이다. 이에 손택수와 조현택은 옛 부엌이나 빈방의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서 나비나 새나 유채꽃이라는 ‘실물/실체’보다 나비 그림자나 새 그림자나 유채꽃 그림자, 그 ‘그림자[影]’들이 어룽대는 환영(幻影)적 이미지가 그들이 추구하는 이미지임을 말한다. 그들의 예술이 지상의 사라져가는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추구하는 허구적 세계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손택수와 조현택의 이미지들은 카메라 옵스큐라가 빚어내는 허상, 또는 실상과 허상이 만화경처럼 어룽대는 환영 속에서 긴 사색에 잠기고 싶은 이들에게 지금 아파트 창문에 암막커튼을 드리우고 그 커튼 사이로 낸 작은 바늘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따라 맞은편 실내에 맺히는 황홀한 바깥 풍경을 음미해 보기를 부추기고 있다.

 

* 『열린정신 인문학연구』 제19권 제1호에 게재한 논문 일부를 인용, 재구성하여 쓴 글입니다.

 

김혜원(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연구교수,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