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9 – 포천 사암서원과 창옥병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여덟 번째
12/16/2020
/ sketch

* 썸네일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보다 큰 이미지를 슬라이드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익스플로러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웹브라우저(크롬 등)를 이용하시길 권장드립니다.   (크롬 다운로드 바로가기)

지우재 정수영은 <백운담(白雲潭)> 가을 그림에 연이어 바로 그 언덕의 ‘사암서원’과 오른편의 ‘창옥병입구’를 그렸다. (《漢·臨江名勝圖卷》,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사암서원과 창옥병>은 화면 왼편에 ‘사암서원(思庵書院)’을 마을과 함께 사선 구도로 배치하고, 그 오른편에 ‘창옥병초입(蒼玉屛初入)’이라 쓰고 주변 지형보다 높게 강조한 바위벼랑을 그려 넣었다. (도 1) 오른쪽 아래 버드나무와 연결된 왼쪽 창옥병의 배열 상태와 서원 위로 펼쳐진 산세를 볼 때, 이 현장은 강 건너에서 확인된다. (도 2)

창옥병은 또 1917년 조선총독부가 측량한 포천 지도에 영평천이 기역 자로 꺾이는 북쪽으로 정수영 그림의 창옥병초입이라 쓴 위치에 표시되어 있다. (최동원, 「조선 후기 경기 북부 경승지의 현황과 인식 변화-영평 8경을 중심으로」, 『한국학논총』 48, 2017.) 정수영이 그렸을 법한 이 위치에서, 나도 서원과 창옥병 전경을 답사할 때마다 사생하곤 했다.

서원의 배경 산 능선은 종현산과 개미산, 강 건너 보장산쯤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수영이 풍경을 정확히 그리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터라 단언하기 어렵다. 지난 11월에 보장산의 남쪽 강기슭 거대하게 병풍을 친듯한 창옥병(蒼玉屛)을 정면에서 보고, 30~40미터 높이의 그 웅장한 바위벼랑의 맛을 살려 스케치해 보았다. (도 3) 1931년에 뚫었다는 옥병굴이 동서를 오가는 길이었고, 강을 건너는 옛 다리에 지금은 새 다리가 놓여 철원으로 고속화도로가 조성되었다.

그림의 사암서원은 민가 방식의 대문에 크고 작은 팔작지붕 네 채로 구성되었다. 홍살문을 전면에 세우고, 숭현각을 중심으로 꾸민 1980년의 복원 모습과 다른 편이다. (도 4) 강당인 전교당을 중심으로 기숙 공간 동재와 서재, 도서관 격인 광명실, 장판각, 사당 등 명현을 기리며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사설 교육기관으로서 갖추는 원래의 서원 구성과도 어그러지게 그려 넣은 터라, 정수영의 부정확한 묘사력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이 서원은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영평천변에 있다. 본디 옥병서원이라는 이름처럼 옛 지명은 ‘옥병리’라 부르기도 했으며, 개울이 굽이치며 여울지고 바위벼랑이 어울려 있는 아름다운 풍광 ‘백운계’에 자리를 잡은 서원이다. 지난번에 소개한 바와 같이 정수영이 옥병서원을 ‘사암서원’으로 표기한 것이 각별하다. 선조 시절 사암 박순(思庵 朴淳, 1523~1589)에 대한 존숭을 더욱 강조하고 기리기 위함일 터이다.

 

옥병서원을 사암서원으로 표기하다

사암 박순(思菴 朴淳, 1523~1589)은 조선 중기의 문인 관료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충주(忠州)이고, 자는 화숙(和叔)이다. 호는 사암(思菴) 외에도 청하자(靑霞子)라 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아버지는 한성부좌윤을 지낸 육봉 박우(六峰 朴祐, 1476~1547)이고, 기묘사화의 명현(名賢)으로 꼽히는 문장가 눌재 박상((訥齋 朴祥, 1474~1530)이 큰아버지이다. 박순의 집안은 호서지역에서 광주(光州)·나주(羅州) 등으로 처향(妻鄕)을 따라 호남에 터를 잡았다. 박순은 나주에서 태어났고,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광주에서 자랐다고 한다.

박순은 31세(1553년)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응교, 한산군수, 좌승지, 이조참의, 대사헌,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우의정 시절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1579년)까지 올랐으며, 서인의 영수로 지목되고 붕당정치에 휘말리자 벼슬을 버렸다. 한강 용호(龍湖)에 은거했다가, 64세(1586년) 이후 영평(永平)의 백운계(白雲溪)에 집을 짓고 술과 시로 세월을 풍류하다 67세로 죽었다.

호남의 거유 고봉 기대승과 교유했으며, 이율곡과 논쟁은 서인 계열이면서 또 다른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개성유수(開城留守)였던 아버지를 따라 그곳에서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1489~1546)에게 수학했던 점에서 그 차이를 찾는다.

또 조선의 ‘두보(杜甫)’라 일컬어질 정도로 당시(唐詩) 시풍을 선호했다. 송시(宋詩)를 따르던 성리학적 엄정한 분위기에서 감성적인 당풍을 유행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박순은 “문장은 반고·사마천·한유·유종원 등과 더불어 이백·두보를 근본으로 하고, 『소학』·『심경』·『근사록』을 학문의 근원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했다. 박순의 문집인 『사암집(思菴集)』의 70% 이상이 시로 채워졌으며, 창옥병과 백운계는 사암 박순 시문학의 원천이었을 법하다.

박순(朴淳)이 말년 여생을 포천 영평천 명승에서 지내고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묘를 썼다. 우암 송시열이 비명(碑銘)을 지은 신도비(神道碑)는 한참 후에 세웠다. (도 5) 개국 548년 기유(己酉, 1909) 5월에 세운 것으로, 전서는 박순의 10대 외후손(外後孫)인 이승회(李承會)가 쓰고 비명은 11대 외후손인 이최수(李㝡秀)가 썼다.

이 신도비명에는 ‘영평 백운산 시내와 못이 아름다워, 사암 공이 이내 거처를 마련했다. 속세에서 벗어나 세상일을 거론하지 않고 매일 시골 사람들이나 들 노인과 더불어 한가로이 세월을 보냈다. … 흥취가 일면, 소요하거나 금강산을 비롯해 여러 산을 유람하였다.’라며 박순이 이곳에서 즐긴 안빈락도(安貧樂道)의 말년 삶을 밝혀 놓았다. 여기서 표기한 ‘백운산’은 백운계와 연계해 서원의 산언덕을 지칭하는 듯한데, 현재 이곳 지명으로 쓰이지 않는다.

청렴하고도 강직하였던 박순의 덕망을 현창하고 깊은 학문을 기리며, 그 후예들이 1649년(인조 27)에 서원을 마련했다. 후에 이의건과 김수항을 추가로 배향하였고, 숙종 39년(1713)에 ‘옥병서원(玉屛書院)’으로 사액(賜額)되었다. 동은 이의건(峒隱 李義健, 1533~1621)은 세종의 다섯째인 광평대군의 5대손으로, 도연명에 비유되던 문사였다. 이에 비해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 1629~1689)은 숙종 이후 서인-노론 세력이 권력의 주축을 이루게 한 고관이었다. 정치색이 또렷해진 셈이다.

옥병서원은 조선말 철폐되었다가 1980년에 다시 세웠으며, 포천시 향토 유적 제26호이다. 복원할 때 ‘옥병서원’ 현판은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1921~2006) 선생이 예서체로 단정하게 썼다. (도 6) 일중은 우리 시대를 풍미한 서예가로, 문곡 김수항의 후손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수영은 <사암서원과 창옥병> 그림에 ‘사암서원’이라 표기해 눈길을 끈다. 옥병서원으로 사액되면서 서인 당색으로 정착된 사실이 남인계인 정수영으로서는 불편했을 거라 예상되기 때문이다.

서원에서 굽어보면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 영평천(永平川)과 주변 일대 들과 산세가 장쾌하게 한눈에 든다. 북쪽으로 보장산과 창옥병 벼랑, 동쪽으로 불무산, 관음산, 관모봉 등이 둘러 있고, 외북천과 포천천이 갈라지는 들녘 풍광이 그러하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2km 남짓 거리에 금수정(金水亭)이 자리 잡고 있다. (도 7) 창수면 오가리 강가 언덕에 세운 금수정은 조선 후기 여러 화가가 찾아 그렸고, 정수영도 들러 사생했던 영평 8경으로 꼽힌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