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석의 사진살롱 44 – 《경성사진사협회》의 망년회
12/02/2020
/ 박주석

<경성사진사협회 망년회 기념> 사진, 젤라틴실버프린트, 10.4×14.7cm, 1927, 사진컬렉션 지평.

벌써 12월입니다. 온통 코로나라는 말과 함께 살았던 2020년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다른 해 이맘때쯤이면 송년회 스케줄 잡고 소화하느라 바빴을 텐데, 올해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망년회(忘年會)’라고 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송년회(送年會)’로 부르고 있습니다. 어려웠던 시절 한 해 한 해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 빨리 지난해를 잊고 싶어 ‘망년회’라고 했는데, 일본식 용어라고 규탄받고 사라진 용어입니다. 왜정시대에는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심지어 ‘소해(燒害)’ 행사로도 불렸습니다. ‘소해(燒害)’라는 말은 원래 고뇌의 한 종류를 일컫는 불교 용어입니다. 하지만 한자 뜻 그대로 ‘불태우고 해친다’는 의미로, 지난해를 잊고자 하는 ‘망년회’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이제 풍족한 시대가 되니 ‘송년회’가 자연스럽습니다. 

위의 이미지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주로 경성 북촌에서 활동했던 사진관 사진사(寫眞師)들의 결사체였던 <경성사진사협회> 회원들이 1927년을 보내며 ‘망년회’를 열고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당시 공평동에 있던 유명한 조선요릿집 <태서관(太西館)>에서 열렸습니다. 신낙균 선생의 앨범에서 나온 사진입니다. 사진 뒷면에 있는 선생의 메모에는 ‘경성사진사협회 망년회, 소해’라고 적혀 있습니다. 협회 회원 27명이 모여 거나하게 상을 차려놓고 망년회를 즐기고 있습니다. 1927년이 정묘(丁卯)년 ‘토끼해’인지라 참석자 모두가 토끼 머리 모양을 형상화한 캐릭터 종이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1920년대 초반을 전후해 많은 한국인 사진사들이 다양한 경로로 사진술을 습득하고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1909년 설립된 <YMCA 사진과>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고, 일본인들의 사진관에서 조수로 기술을 습득한 사례도 있었고, 일본에 건너가 사진을 배워온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많은 한국인 사진사들이 탄생했고, 그들의 사진관이 지금의 종로통인 북촌에 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1920~30년대 사이 서쪽으로는 지금의 종로 1가인 서린동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종로 3가에 이르기까지 청계천 북쪽에는 40~50여 명의 한국인 사진사들이 사진관을 운영했습니다. 

북촌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사진사들은 1926년 여러 뜻을 품고 <경성사진사협회>를 조직했습니다. 당시 서린동에는 <경성사진사협회>의 발기인이면서 회장을 지낸 김광배의 <금광당사진관> 그리고 김진환의 <애영(愛影)사진관> 등이 있었고, 낙원동에는 신칠현의 <녹성사진관>, 민충식의 <태평양사진관>, 박만달의 <조선사진관> 등이 자리 잡았습니다. <조선사진관>은 1920년대 후반 <독립사진관>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또 관철동에는 이완근의 <조선사진관>과 박명원의 <동양사진관> 그리고 박필호의 <모던사진관>이 있었는데 나중에 <연우사진관>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경성사진사협회>의 결성과 활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한국인 사진관들이었습니다. 

1926년 12월 10일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경성사진사협회 : 시내 낙원동에 있는 녹성사진관과 조선사진관의 발기로 금 10일 오후 8시에 열빈루에서 <경성사진사협회>의 발회식을 거행하리라 하는데 시내에 있는 여러 사진사들은 많이 참석하기를 바란다더라.”

 

북촌의 사진관 주역들 30여 명이 모여 드디어 조선인의 사진을 걱정하고 어떻게 하면 일본인 사진사들보다 훌륭한 사진술을 습득해 동포들을 위해 봉사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경성사진사협회>를 결성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였으며, 이러한 좌절의 아픔 속에서 국력을 기르는 것만이 독립할 수 있다는 정신에서 계몽운동이 전개되던 때였습니다. <경성사진사협회>는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 나타난 민족정신의 발화이자, 1920~30년대 사이에 면면히 이어진 북촌 사진문화 발전의 상징이었습니다. ‘동아일보일장기말소사건’의 주역 신낙균 선생도 이 협회의 회장직을 두 번이나 맡았습니다. 협회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짐작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례입니다. 

<경성사진사협회>는 작게는 그들 스스로 사진 발전과 권익 옹호를 위해, 크게는 일본인 사진 단체에 대항하는 민족적 사진 단체로서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이 협회는 회원들 간의 친목 도모도 중요했지만, 사진의 진지한 학술적 연구와 우리 민중들에 대한 사회봉사를 기치로 삼았습니다. 매우 근대적인 성격의 민족 결사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1941년에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일제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나서서 모든 일본인 사회단체와 한국인 사회단체를 강제로 합병시켰고, 자연히 <경성사진사협회>도 통합의 대상이었습니다. 같은 해 일제의 강요로 전국의 일본인 사진관과 한국인 사진관 관계자들 70~80명이 모여 <조선사진협회>를 결성했습니다. 명동에 있던 <호리우치(堀內)사진관>의 주인 호리우치 깅게쓰(堀內琴月)가 회장을 맡았고, 부회장은 한국인을 대표해서 <연우사진관>의 박필호(朴弼浩)가 맡았습니다. 전쟁의 분위기에서 통합을 거절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경성사진사협회>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