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8 – 포천 사암서원 앞내 백운계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일곱 번째
12/0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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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생 여정을 따라, 일곱 번째이다. 지난 ‘답사와 스케치 여정 16’인 우이 9곡 ‘재간정(在澗亭)’에 이어 영평·포천 임진강 한탄강 유역의 명승 창옥병의 사암서원(옥병서원), 금수정, 화적연을 찾아가겠다. 이들은 유수정, 와룡암, 낙귀정, 백로주, 선유담 등과 함께 조선시대부터 ‘영평8경’으로 칭송되던 절경 고적으로 손꼽힌다.

정수영은 1796년 여름 남한강 코스를 마치고 북한산 동편 자락 우이동 계곡 재간정을 들렀다.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가을 단풍을 따라 영평의 사암서원과 금수정을 방문했고, 이어 한탄강 상류 화적연으로 이동했다. 포천지역 정수영 일행의 한탄강 이동 경로를 우리 옛 그림지도 방식으로 그려보았다. (도 1) 임진강 줄기인 포천을 포함하여 연천과 철원의 한탄강 유역에는 주상절리의 바위벼랑과 기암, 계곡, 폭포 등이 어우러진 중부권의 명승지이다.

 

영평천변 백운계(白雲溪) 그리다

정수영이 도착해 그린 장소는 <백운담(白雲潭)>이다. (도 2) 그림의 시작 부분에 “사암서원 전천 백운담(思庵書院前川白雲潭)”이라 밝혀 놓았다. 사암서원은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영평천변에 위치하고, 옥병동 혹은 백운계라 지칭된다. 선조 시절 영의정에 오른 사암 박순(思庵 朴淳, 1523~1589)이 은둔처로 삼았던 것을 기리기 위해 효종 9년(1658)에 창건되었다. 숙종 24년(1698)에 서인계 이의건(李義健)과 김수항(金壽恒)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숙종 39년(1713)에 ‘옥병서원(玉屛書院)’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정수영이 이곳을 들른 것은 두보(杜甫)에 비견되는 선배 문인으로 박순을 존숭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백운담> 다음에 <사암서원과 창옥병>을 그렸고, 당시 옥병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음에도 굳이 그림에 ‘사암서원’으로 썼다. 그 이유는 이 서원이 서인(西人)을 주축으로 운영되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당색(黨色)을 떠올리면 추가로 배향한 서인계 인사들은 남인계인 정수영과는 반대파인 셈이니, 서원보다 아래 물가 풍경을 먼저 들렀을 가능성도 없지 않겠다.

하여튼 정수영이 서원을 참배하기 전에 그 앞내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찾은 점은 진정 진경산수화가답다. ‘백운담(白雲潭)’ ‘토운상(吐雲床)’ 글씨의 바위 오른편으로 물가의 바위벼랑은 사선으로 흐르는 절리를 묘사했고, 그 능선 따라 자란 소나무들 사이사이 단풍 물든 나무들로 가을을 엷게 표현했다. 강변에서 본 시점대로 수평구도이고, 정수영 특유의 가벼운 담먹담채와 붓질 감각으로 《한·임강명승도권》에서 비교적 실경에 근사한 진경산수화이다. (도 3) 정수영의 그림과 지금의 현장이 거의 변하지 않고 비슷한 편이기도 하다.

작은 차이이지만 ‘구름을 토해내는 상’이라는 위아래로 써진 ‘토운상(吐雲床)’ 바위글씨는 좌우로 써넣었고, ‘백운담’은 현지에서 ‘백운계(白雲溪)’로 확인된다. (도 4, 5) 천변 이름도 흰 구름 이는 ‘백운계곡’이라 일컬어진다.

정수영의 <백운담> 장면을 나도 따라 그려보았다. (도 6) 그리고 백운담과 토운상이 새겨진 너럭바위를 별도로 사생하였다. (도 7) 가을 분위기를 맞추어 10월 이곳을 다시 찾아 사진을 찍고 그린 것이다.

 

사암 박순을 기리는 바위글씨들

 ‘백운계(白雲溪)’와 ‘토운상(吐雲床)’ 외에 주변 바위에는 여러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산금대(散襟臺)’ ‘수경대(水鏡臺)’ ‘장천(障閳)’ ‘청학대(靑鶴臺)’ ‘백학대(白鶴臺)’ ‘청령담(淸泠潭)’ 등이 벼랑에 보인다. 행서체의 바위글씨들은 격조 있는 서체를 보여준다. 개울 가운데 너럭바위 사이에는 술통 공간과 더불어 ‘와준(窪尊)’을 새겨놓은 바위도 있다. (도 8, 9) 그야말로 조선 문인들의 술과 시서(詩書)가 자연과 어울린 풍류 터로 최고 낭만 공간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여기에 김수증, 김창협 등 유명 문인들이 방문하고 명시들을 남겼다. 

이들 모두 선조 20년(1586) 가을에 찾아든 “사암 박순이 지은 11곳을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가 썼고, 선조 22년(1588) 신이(辛夷)라는 각수(刻手)가 새겼다”라고 확인된다. (朴淳, 『思菴集』, ‘二養亭記’) 특히 박순이 “기세는 백운 선인을 제압할 만하다”라고 칭찬한, 당시 명필로 꼽히던 한석봉의 활달한 행서체는 산금대 벼랑의 ‘송균절조 수월정신(松筠節操 水月精神)’에서 빛난다. “소나무와 대나무처럼 절조 있고, 물과 달처럼 맑은 정신”이라는 뜻으로, 선조임금이 직접 박순을 지칭한 글귀이다. (朴淳, 『思菴集』) 이들 외에도 ‘옥병동(玉屛洞)’, ‘이양정(二養亭)’ 등의 글씨가 있다고 하나 모두 확인하지 못했다. (홍순석, 「포천군 옥병동의 암각문에 대하여」, 『향토사연구』 6, 1994.) ‘옥병동(玉屛洞)’과 더불어 여기 지명으로 불리는 ‘백운계(白雲溪)’는 기존 연구에 보이지 않고, 이번에 처음 찾은 바위글씨인 셈이다. 

수경대(水鏡臺)에는 ‘우 사암선생 시 김수증 서(右 思菴先生詩 金壽增書)’라고 밝힌 예서체 7언시 “곡조시시문일개(谷鳥時時聞一箇) 광상적적산군서(匡床寂寂散群書) 매련백학대전수(每憐白鶴臺前水) 재출산문변대어(纔出山門便帶淤)”가 새겨져 있다.

이 예서체로 쓴 바위글씨 7언시는 “시시때때로 골짜기의 새소리 듣고, 비뚤어진 책상 적적한데 책들만 흩어 있네. 백학대 앞내 늘 가련하구나, 겨우 산문을 나서면 흙탕물 되리니.”라는 박순의 ‘제이양정벽(題二養亭壁)’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朴淳, 『思菴集』) 세속을 경험한 은둔자의 영혼을 담은 이 7언시를 후학인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 1624~1701)쓴 것이다.

이양(二養)은 ‘덕과 몸을 기른다’는 뜻으로 송나라 정이천(程伊川, 1033~1107)을 따른 것으로, 박순이 그 터에 지은 정자 이름이라 한다. 김수증은 김상헌의 손자이자 옥병서원에 추가로 모신 김수항의 친형으로, 당쟁이 심화했던 시기 화천 북한강 상류에 곡운9곡을 경영하며 은둔자의 삶을 살았던 숙종 시절 서인 계열 문사이다.

포천지역 명승인 이곳을 ‘옥병서원’의 연원 따라 ‘창옥병(蒼玉屛)’으로 보는 견해가 최근 새로이 나오기도 했다. (노재현·박주성·최종회, 「창옥병의 위치비정 및 사암 박순의 정원유적 연구」,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4-4, 2016.) 그런데 다음에 살펴볼 정수영의 <사암서원과 창옥병> 그림을 보면, 현재의 이름대로 백운계 북쪽 개울 건너에 보장산 기슭 따라 형성된 높다란 벼랑을 지칭한다고 생각된다. (도 8)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