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석의 사진살롱 43 – 기생사진의 전설 《금광당사진관》
11/11/2020
/ 박주석

금광당사진관(김광배), <무용가 최승희>,
젤라틴실버프린트, 12.5 x 9.6cm, 1929~30년,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모던한 단발머리와 양장이 눈에 띠는 전설적인 무용수 최승희(崔承喜, 1911~미상)의 사진입니다. 일제식민지 시기 경성(京城), 지금의 서울 종로 서린동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유명했던 <금광당(金光堂)사진관>을 운영했던 김광배 선생이 찍었습니다. 최승희가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경성에 돌아와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리고 활동을 시작한 때가 1929년이고, 결혼과 출산을 연이어 한 것이 1931년부터이니, 1929년에서 30년 사이에 찍은 사진임이 분명합니다. 막 20살 정도였을 것입니다. 경성에 돌아와 홍보가 필요한 최승희가 당시 기생사진의 성지로 가장 유명했던 <금광당사진관>에 들러 인물사진을 찍은 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금광당사진관>을 운영했던 사진사 김광배(金光培, 1898~1978) 선생은 1919년 종로 공평동에 있던 <옥영사진관>에서 사진사 김시련(金時鍊)에게 사진술을 배우면서 사진계에 투신했습니다. 참고로 김시련은 <천연당사진관>에서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에게 사진을 사사했던 인물이었으니, 김광배 선생은 김규진의 직전 제자인 셈입니다. 사진을 더 배우기 위해 1923년 일본에 건너간 선생은 도쿄의 <노노미야(野野宮)사진관>에서 조수생활을 하며 사진을 공부했습니다. 선생의 사진에 대한 열의를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일본 생활을 마친 선생은 1925년 귀국해서 종로의 서린동에 <금광당사진관>을 개업해 운영했으며, 1926년 창립한 한국인 사진사 단체 <경성사진사협회>의 회장을 한차례 역임했고, 1936년에는 연구단체인 <경성인상사진연구회>를 발기하고 초대 회장을 지냈습니다. 1935년에는 같은 자리에 사진관을 양식(洋式)으로 신축했고, 일본인들과 경쟁하면서 사진 활동을 했던 왜정시대 사진사들 중 한분이었습니다.

김광배 선생이 1977년 한국사진사 연구자이신 최인진 선생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증언들은 당시 한국사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왜정시대 <금광당사진관>에서는 보통 사진을 촬영하고 인화해서 손님에게 전달하기까지 보통 보름 정도가 걸렸고, 결혼사진의 경우는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에 한 달 정도의 기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또 사진관에서는 촬영에 임할 때는 항상 모닝코트(낮 시간의 정장예복)를 입었다고 합니다. 사진은 대지를 붙여 상품의 가치를 높이는 일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했고, 대지에는 사진관 이름을 영어로 ‘Kim Ko Do Photo Studio’로 넣었는데 나중에는 경찰에서 트집을 잡고 말썽이 생겨 빼버렸다고 전합니다. 돈을 떠나서 일을 했지만 사진에 관심을 두었으므로 자연적으로 돈도 따라왔다고 자랑도 합니다. 꽤 돈을 버셨던 모양입니다.

금광당사진관(김광배), <9인의 초상>,
젤라틴실버프린트, 각각 4.5×6.6cm, 1930년대,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선생의 회고 중에는 기생사진에 얽힌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위에 보는 사진들이 아마도 당시 기생들의 모습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당시의 시대상과 사진관의 사회, 문화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여서 몇 부분 따서 여기에 소개합니다. 김광배 선생의 육성입니다. 

“내가 운영한 <금광당>은 이름이 있는 사진관이고 요릿집과 거래도 많았다. 요릿집은 기생이 많이 있고 또 기생들이 사진을 많이 찍었다. 나도 요릿집도 다녔으며, 회원들과 어울려 다니기도 하였다. 경성사진사협회 망년회도 요릿집에서 했다. 그런 인연도 있고 또 사진하면 어느 어느 아무개라고 요 사이와 같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손님들이 많이 찾았다. 고객으로는 기생이 제일 많았다. 사진을 마음에 들게 찍어주었다.(마음에 들게 찍어 준다는 것은 아름답게 나오도록 찍어준다는 것이다.)” 

“기생들이 와서 사진을 찍으면 영수증을 미납으로 해준다. 중판 촬영을 하나 맡으면 전지까지 확대를 부탁한다(여기서 전지란 사진의 한 면이 20 inch에 달하는 당시로는 비교적 큰 크기로 요즘 사진관에서 20R로 불리는 크기이다). 그래서 중판 대금과 전지 확대 대금까지 합하여 영수증을 해주면 그것을 가져가고 남자가 찾으러 온다. 남자가 찾으러 온 것은 사진을 찍은 기생에 반한 사람에게 이것을 찾아 주어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하니까 찾아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생들은 자기가 돈 하나 내지 않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사진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기생사진과 다른 사진과의 차이는 없었다. 사진술이 차차 발달되면서 이것을 기념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워낙 화류계 속에서 많이 들랑날랑 하니까 <금광당>은 기생사진관이란 말도 들었다. 서울 시내 기생 권번(券番) 네 곳이 있는데, 여기 기생 전부를 점령하니까 시비를 거는 사진사들도 있었다. <부인사진관>의 채상묵이 어느 날 술 한 병을 가지고 찾아왔다. 복수를 한다고. 기생을 전부 독차지 하니까 감정이 상해 못살겠다, 술병을 깨뜨리며 렌즈를 먹고 죽겠다면서 폭행을 했다. 그래서 나도 이것은 실력으로 하는 것인데, 와서 이럴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다툰 적도 있었다.” 

당시 서울을 비롯한 큰 도시에는 기생들의 활동을 중개하고 수수료를 받았던 일종의 상업 조직이 있었는데, 1915년 이전에는 ‘기생조합(妓生組合)’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권번(券番)’이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무교동 일대의 ‘조선권번’, 광교 일대의 ‘한성권번’, 낙원동의 ‘종로권번’ 등이 유명했습니다. 이런 기생들의 사진 수요를 <금광당사진관>이 거의 독점했었습니다. ‘기생사진의 전설’이었습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