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석의 사진살롱 42 – 구왕삼 외전(外傳)
10/21/2020
/ 박주석

구왕삼, <콩나물>, 1947,
《제1회조선예술사진전람회》 준특선 당선작, 젤라틴실버프린트
/ 한국사진사연구소 인화, 1998

위 사진은 사진가로서 보다는 논쟁적 사진평론가로 더 유명했던 구왕삼(具王三, 1909~1977) 선생의 작품입니다.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선생은 해방공간에서 유일한 전국 규모의 민족주의 사진단체였던 <조선사진예술연구회>가 1947년에 주최한 《제1회조선예술사진전람회》라는 공모전에 이 사진을 출품했고, ‘준특선’으로 당선되어 전국적인 인지도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1950년대 리얼리즘사진을 옹호하고 이끈 평론가로서 이름을 알릴 기회도 만들었습니다. “사진은 무성(無聲)의 시(詩), 시(詩)는 유성(有聲)의 사진”이라는 명언도 남겼습니다. <콩나물>이라는 제목의 이 사진은 밥그릇과 콩나물 그리고 콩깍지를 배치하고 강한 빛을 주어 진한 그림자를 만들어 화면을 구성했습니다. 소재의 소박함과 강렬한 음양의 대비가 돋보이는 한국사진의 문화사적 유산입니다.

사진을 볼 때마다 구왕삼 선생은 왜 밥그릇과 콩나물 2개를 사진의 소재로 삼았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콩나물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값싸고 영양가가 풍부한 식재료입니다. 콩에 물만 주면 저절로 자라나 풍성한 식단을 꾸밀 수 있으니 어려웠던 시절 최고의 반찬이고 국거리였습니다. 밥그릇과 같이 배치한 것으로 보아 ‘음식’이란 차원에서 사진을 찍었나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헌데 선생께서 사진을 시작하시기 전 왜정시대에 이미 유명한 음악평론가로 활동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또 다른 생각이 듭니다. 과거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음악에서 쓰는 음표가 ‘콩나물대가리’라는 속어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음악에 대한 선생의 생각을 표현한 것 아닌가하는 추측도 해보게 됩니다.

왜정시대에 음악평론가로서 활동한 구왕삼 선생의 흔적은 무척 많이 남아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당시의 음악계에서 음악의 실연자(實演者)가 아니라 연구자(硏究者)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1934년 발행된 문예잡지 『삼천리』 9월호에는 「악단(樂壇) 메리-그라운드」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대개 ‘음악계 이모저모’라는 뜻입니다. 필자는 ‘한양화랑(漢陽花郞)’이라는 이름인데 필명으로 보입니다. 당시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조선인 음악가들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피아니스트, 성악가, 바이올린, 첼로, 작곡 등 양악 전 분야를 망라해 50여명을 소개했습니다. 명단의 마지막에 평단(評壇) 즉 평론 분야는 한산(閑散)하기 짝이 없다면서, 연구자 3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구왕삼 선생이었습니다. “具王三(25) 硏究 아희생활社”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시 선생이 조선의 몇 안 되는 젊은 음악연구자 중 하나이며, <아희생활사>라는 어린이 잡지 소속 기자로 활동했다는 기록입니다. 

선생의 음악 활동에 대해서 『한겨레음악대사전』에는 “작곡가(동요), 일제강점기 작품으로 동요 ‘조선의 꽃’, ‘물 긷는 처녀’, ‘별나라’ 등이 있다. 『三千里』(1935) 7권 3호에 발표한 그의 악단시감(樂壇時感)에서 음악가협회 등을 소개했고, 이전음악과(梨專音樂科)의 문제와 음악비평에 관한 그의 「음악시평」은 『三千里』(1935) 7권 5호에 발표됐다. 그의 글 「악단잡관(樂壇雜觀)」은 『三千里』(1939) 11권 7호에 발표되었다. 일제강점기 그가 창작한 <조선의 꽃> 등 여러 동요가 있다”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조사를 해보면 선생은 문예잡지 『삼천리』에 5회, 일간신문 『조선중앙일보』에 음악 평론을 10여회 이상 기고했습니다. 특히 1931년 22세의 젊은 나이로 『조선일보』에 기고한 「이전음악과간행(梨專音樂科刊行)-민요합창곡집」에 대한 평론은 오늘날도 음악사 연구자들에게 회자되는 명문으로 꼽힙니다. 그러다 1930년대 후반 대구에서 결성된 사진 동호회인 <대구아마추어사우회>에 가입하면서 처음 사진 활동을 시작했고,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결성된 <경북사진문화연맹>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사진 활동을 펼쳐갔습니다. 1956년부터는 본격적인 사진평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아악(雅樂)이 골동품으로 악사(樂師) 악곡(樂曲) 하나 배출 제작 없이 근근이 잔재(殘滓) 만으로 보존하며, 종래 사용한 가야금이 화류계의 전용물로 유한계급의 향락을 만족케 하는데 사용하고 있고, 대소(大小) 악기가 양악의 피아노, 바이올린, 색소폰으로 하여 전연 압도하여 사회의 일우(一隅)에서 쫓겨 다녀 그 존재까지도 보기 어려운 현황에 처하여 일견으로는 조선의 국악은 멸망에 발하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의 음악 중 민요곡에 대하여서는 양산도, 새타령, 방아타령, 자진방아타령, 영변가, 이팔청춘, 자진산타령 등의 무수한 민요곡이 있으나, 이 역시 유한계급의 향락물로 사용하여 일반이 이를 퇴폐적, 망국적 노래임을 생각하고 있다.”

조선 전통의 국악이 몰락하는 상황을 개탄하는 “조선의 음악 어디로 가나?”라는 부제를 단 평론문의 일부입니다. 당시 유일한 서양음악 교육기관인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서 발행한 앨범 <조선민요합창>을 평가하면서 조선민요곡의 본질과 형식에서 맞지 않은 불합리하고 무리한 연주라는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비판 정신은 사진으로도 이어졌고, 항상 적나라하게 비판적인 글을 쓰고 논쟁도 불사했습니다. 비평을 비판으로 오해하기에, 논쟁적 글쓰기를 피하려는 오늘의 한국사진 비평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