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일까, 편향일까
10/07/2020
/ 박평종

알파고 이후 인공지능은 바둑의 기준이 됐다. 프로기사들은 인공지능의 기보를 보고 배우며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나갈 정도다. 바둑대회에서 프로기사들이 해설을 할 때도 인공지능의 ‘훈수’를 참고로 제시한다. 나아가 다음에 둘 최선의 수를 예측할 때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수와 겹치면 뿌듯해하기도 한다. 알파고는 인간을 모델로 바둑을 배웠지만 이제 인공지능이 인간의 모델로 역전된 셈이다. 그런데 인간 ‘고수’들은 하나같이 인공지능의 바둑에는 기풍, 말하자면 ‘스타일’이 없다고 말한다. ‘대가’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기사들에게는 자기만의 기풍이 있다. 이창호의 계산과 인내, 이세돌의 치열함과 날카로움 등이 그것이다. 왜 인간 기사에게 인공지능은 스타일이 없다고 느껴질까? 나아가 ‘스타일’이란 무엇일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말투와 행동, 옷 입는 양식, 사고방식 등 스타일은 사람의 디테일 곳곳에 스며있다. 예술가의 스타일도 있다. 소위 ‘화풍’이라는 것도 스타일이며, 즐겨 다루는 소재나 주제에도 스타일이 개입한다. 말하자면 스타일은 개인을 규정한다. 그리고 그 스타일은 취향에서 나온다. 취향은 반복을 통해 형성된다. 무엇을 수용하고 배제하는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취향이 형성되고 스타일은 그 결과로 몸에 밴 것이다. 실상 사람은 취향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마르셀 뒤샹, 병건조대, 1914

취향의 문제에 대해 깊이 성찰한 이는 마르셀 뒤샹인데, 레디메이드는 이 문제와 깊이 연결돼 있다. 뒤샹은 오브제(레디메이드)의 선택이 취향의 부재 상태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사람이 어떤 대상과 관계할 때 필연적으로 취향이 개입한다. 어떤 물건을 며칠만 옆에 두더라도 이내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취향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저 무관심하다는 뜻이다. 결국 무관심한 상태에서 선택한다는 것은 ‘기계적으로’ 선택한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뒤샹은 기계주의자다.

인공지능의 선택은 ‘당연히’ 기계적이다. 기계이므로. 그런데 이 기계는 학습을 통해 선택의 룰을 배웠다. 이 때 그가 배운 룰은 ‘최선’을 찾아내는 것이다. 최선은 바둑판 위에서 하나뿐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 경우 중에서 ‘취향’에 따라 마음에 드는 하나를 선택한다.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 나아가 차선이나 차악, 심지어 최악일 경우라도 자기 취향에 부합하면 단호히 그것을 선택하기도 한다. 기계가 아니므로. 인공지능에 스타일이 없다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인간의 데이터로 배운 기계에 인간의 취향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기계학습 데이터를 제공한 사람이 무수히 많다는 점에서 그럴 수 있다. 소위 ‘빅데이터’니까 말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편향성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 편향(bias) 문제는 인공지능의 기계학습에서 주요 쟁점으로 지적되고 있으며, 그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렇다면 편향도 취향의 일종일까? 좋은 취향이 있고, 나쁜 취향도 있으며, 특이한 취향이나 이상한 취향도 있다. 사람은 자기 취향과 다르면 나쁜 취향이라 규정한다. 보편적이지 않으면 특이한 취향, 모르면 이상한 취향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편향은 좀 다른 문제다. 취향은 풍부하고 다양한, 때로는 서로 가치가 충돌하는 대상들에 대한 반복적 경험의 과정에서 형성된다. 편향은 이 다양하고 상이한 경험이 없을 때 생겨난다. 편식을 하면 영양 부족이 되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비슷한 데이터만 제공하고 기계학습을 시켰을 때 인공지능은 편향에 빠진다. 그렇다면 다양하고 풍부한 데이터로 학습한 기계는 취향을 가질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인공지능도 언젠가 자기 스타일을 갖게 될 것이다. 물론 알고리즘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눈에’는 스타일을 지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강요된’ 스타일, ‘설계된’ 스타일이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