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6 – 우이9곡 재간정(在澗亭)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여섯 번째
09/1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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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동쪽의 우이동계곡은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오른쪽부터 차례로)의 삼각산 형상을 뚜렷하게 관망할 최고의 장소로 꼽을 만하다. 화산(華山)이라는 별칭을 수긍케 한다. 예전에도 자주 이를 스케치해왔지만, 올 초부터 틈나는 대로 꾸준히 우이동(牛耳洞)을 찾았다. 그만큼 인수봉과 삼각산, 우이봉과 도봉산을 계속 그렸다. 여기에는 최근 장마에 젖은 흰 바위 인수봉을 강조한, <여름 장마에 우뚝한 삼각산> 그림을 소개한다. (도 1)

그리고 삼각산 만경대 중턱 도선사 아래 계곡으로는 조선 후기 이계 홍량호(耳溪 洪良浩, 1724~1802)가 은둔처로 삼으며 유명해진 우이9곡이 전개된다. 아호인 ‘이계(耳溪)’도 소귀 모양의 ‘우이(牛耳)’ 바위가 있는 ‘우이봉’에서 따온 것이다. 9곡의 시작이자 계곡 상류인 제1곡은 도선사 밑 만경폭(萬景瀑)이다.

만경대 중턱이어서 만경폭 위에 올라서면 수락산과 불암산 주변의 경치 구경이 좋다. ‘만개의 풍경’을 보는 듯하다. 폭포 암벽에는 “미륵폭동유(彌勒瀑同游)/조현명(趙顯命) 이주진(李周鎭)/병인중하(丙寅仲夏)”와 “추제(追題)/이은(李溵)/정유맹동(丁酉孟冬)”이라는 동일 서풍의 예서체 글씨가 두 곳에 나뉘어 새겨져 있다. 1746년 5월 이주진(1692~1749)이 소론의 좌장격인 좌의정 조현명(1690∼1752)과 여름을 즐겼던 모양이다.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1777년 10월 이주진의 아들 이은(李溵, 1722~1781)이 찾아와 병인년 일을 기념해 동일 서체로 새겨 놓았다. 이곳은 본래 덕수 이씨인 이주진-이은 부자의 소유였던 모양이다.

제1곡 만경폭(萬景瀑)부터 9곡 재간정(在澗亭)까지 우이계곡을 따라 내려오며 확인되는 명승지로 5곡 세묵지(洗墨池)과 8곡 명옥탄(鳴玉灘), 손상이 덜한 세 경치를 우선 스케치해 두었다. (도 2, 3, 4) 만경폭은 정비공사로 물길과 벼랑 아래 바위들이 원형을 잃은 편이지만, 세 문사의 이름이 새겨진 폭포 벼랑은 당차다. 현재 음식점에 가려 있으나, 세묵지는 먹을 씻는 장소로 시서화를 즐긴 풍류 터이다. 안쪽 너럭바위 계류에 들어서면 ‘옥경대(玉鏡臺)’라 일컬어질 정도로 물살과 풍치가 빼어나 여름 탁족 피서지로 꼽을 만하다. 명옥탄은 계곡의 크고 작은 바위들과 어울려 이름대로 물소리가 아름다운 곳이며, 좌우 노송과 어울린 풍치도 일품이다. 

강북구는 최근 우이9곡 복원을 시작했으며, 더불어 도선사 입구에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도 5) 덕수 이씨 집안의 터가 풍산(豊山) 홍씨 홍양호 집안에 양도된 경위를 포함하여, 조선 후기 문인 관료이자 실학자인 이계 홍량호의 별업(別業)이라는 장소였던 덕택에, 인물사와 문학사는 물론이려니와 조경구성 관점의 학술연구가 진행되었다. (이종묵, 「홍양호와 홍경모의 글로 남은 우이구곡의 기억」, 『인문과학연구』 16, 2011. : 정우진·노재현·이희영, 「북한산 이계구곡의 위치비정과 집경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5-3, 2017.) 이를 바탕으로 복원이 시도된 것 같고, 워낙 유흥지로 자리를 잡은 터라 쉽지 않은 듯하나 지금도 계곡 일부는 정비 중이다.

계곡 맨 아래 9곡 재간정 정자가 있던 곳에는 산악박물관을 짓다 중단한 콘크리트 건물이 방치돼 있으며, 현재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우이동 재간정, 정수영이 남한강 여정을 마치고 들른 첫 명소

지난 5회부터 8회까지 살펴보았던, 지우재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 남한강 유람 스케치를 마치고 들른 첫 여름명소가 바로 재간정이다. 이번 글과 그림은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여섯 번째에 해당한다.

2019년 8월부터 12월까지 조선 후기 문인화가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의 《한·임강명승도권》에서 남한강 여주지역 여정을 따라 실경그림의 현장을 5회에 걸쳐 찾아보았다. 첫 번째 여주 신륵사와 동대, 두 번째 휴류암(馬巖), 세 번째 흥원창과 수청탄 소청탄, 네 번째 고산서원, 다섯 번째 두멍암(笠巖)과 여주읍내 등이다. 1796년 여름에 그린 이들 실경화에 이어 정수영은 임진강을 따라 영평 포천 삭령 토산의 절경을 찾았고, 북한산과 도봉산 관악산 등지의 명찰과 명승을 담으며 《한·임강명승도권》를 완성했다. 그 여정 순서는 1796년 여름 우이계곡 재간정, 가을 영평 백운담과 사암서원, 금수정, 포천 화적연, 이듬해 1797년 봄 금천, 도봉산 망월암, 여름 도봉산 옥천암, 삭령 우화정, 토산 삼성대 낙화담 등이다.

금년에는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 가운데 남한강 이후 사생한 여정 찾기를 모두 마무리하려 계획했었다. 연초부터 우이계곡과 재간정이 있었을 법한 터에서 올해의 답사를 시작했는데, 마침 3월 이후 코로나 사태로 생각하지 않게 많은 시간을 얻었다. 시작 부분인 한강 변을 걸었고, 우이동 북한산, 포천, 도봉산, 관악산 자락 호암산 등 뒷부분의 행적을 두루 찾았다. 두루마리의 마지막인 삭령과 토산 북한지역의 유적을 제외하고는 《한·임강명승도권》의 전체 경치를 다 확인한 셈이다.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의 전반부인 한강 사생에 이어 후반부는 재간정(在澗亭)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 <재간정> 그림이 여름 경치이고, 다음 임진강 영평천 명승 그림들이 가을 풍치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지우재 정수영은 남한강 여정을 <여주읍치> 다음에 그린 <재간정>에서 마친 셈이다. 광나루에서 하선해 북한산 우이동 계곡으로 들어섰을 법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정수영이 현장 사생 능력이 부족한 탓에 그림으로 실경 위치를 확정하기 힘들지만, <재간정> 그림에서 원경 먹 선묘의 간소한 산 모양이 우이동에서 보이는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의 삼각산을 닮은 듯하다. 실경을 담은 포인트에서 파노라마 사진으로 잡아보니 그 위치도 얼추 맞아떨어진다. (도 6, 7)

중층의 재간정 뒤켠 주변의 바위들은 정수영 특유의 과장된 표현이다. 여름 소나무와 벽오동, 그리고 잡목들이 어울려 있다. 화면 오른쪽 위에 친구인 강관이 쓴 글이 보인다. “재간 임공은 우리 무리 가운데 최고 존앙을 받는다. 예전에는 이 같은 정자가 없었으니 편치 않고 개탄스럽다. 강관이 쓰다.(在澗 任公 吾儕中最尊仰 而曾無此亭 寧不慨歎 亻寬書)”라고 적었다.

‘재간 임공’이란 임희성(在澗 任希聖, 1712-1783)을 이른다. 임희성은 제발을 쓴 강관의 아버지 표암 강세황과 사돈 간이자 절친한 소북계 문사였다. 이에 강관은 서씨가나 홍씨가의 별서이자 재간정 풍경을 그림으로 대하니, 같은 아호를 쓰면서도 정자 없이 지내던 스승격인 임희성을 떠올리며 발문을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싶다. 정수영이 재간정을 들른 것은 ‘최고 존앙을 받는’ 스승의 흔적을 만나기 위함으로 여겨진다. 임희성이 세상을 떠난 10여 년 만에 그의 옛터를 찾은 셈이다. 

재간정(在澗亭)은 만경대 도선사에서 흘러내린 우이계곡 물과 우이령 고개 따라 인수봉에서 흘러내린 인수천 물길이 만나는 사이 공간, ‘재간(在澗)’에 세운 정자이다. 인수천은 연미천이라 부르기도 한 것 같다. 우이9곡의 맨 아래 남쪽 공간으로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 삼각산 세 봉우리, 그 오른편 우이령고개를 넘는 영봉, 소귀 형태 바위 우이암이 정상에 또렷힌 우이봉, 그 뒤로 오봉과 선인봉 능선의 도봉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다. (도 7, 8) 이 재간정이 들어섰던 장소를 정수영 그림을 토대로 추정해 고지도 방식으로 부감해 그려 보았다. (도 9) 

정자가 있던 이곳 주변은 두 물길이 만나며 너른 백사장이 어울려 있어 도성 문인 권세가의 사랑을 받았던 듯하다. 덕수 이씨가나 풍산 홍씨가, 임희성 외에 달성 서씨 세도 집안도 별장을 마련하였다.

홍양호나 홍경모의 우이9곡에 대한 글에는 본디 재간 서명균(在澗 徐命均, 1680~1745)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풍류터로 삼았다고 한다. (洪良浩 ,『耳溪集』卷13,「牛耳洞九曲記」; 洪敬謨, 『冠巖全書』 16冊 「耳溪九曲記」, ‘在澗亭’) 서명균은 영조 초기에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던 문사이고, 이 집안은 3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한 당대의 명문 세도가로 손꼽혔다. 서명균의 아버지 서종태(徐宗泰, 1652~1719)는 숙종 시절에, 아들인 서지수(徐志修, 1714~1768)는 영조 시절에 영의정을 역임했다. 홍양호의 손자 관암 홍경모(冠巖 洪敬謨, 1774~1851)는 「우이구곡기(耳溪九曲記)」에서 재간정을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여기서 수십 마장을 가면 양 기슭이 훤히 열리고, 물이 맑고 모래가 희다. 정자가 바위에 걸쳐 물을 누르고 있어, 재간정이라 이른다. 곧 3대에 걸쳐 재상을 지낸 서공(재간 서명균)의 옛 별서이다. 꽃과 나무가 늘어서니 소쇄한 게 깊고 그윽하다. 물이 여기서 꺾여 동쪽 드넓은 벌판으로 흘러간다. 이곳이 구곡의 마지막이다. 만경동에서 재간정까지 5리에 지나지 않지만, 기암과 층층 폭포가 걸음마다 출현하며 크게 오른다. 모두 함께 이름짓기를 구곡이라 하였다,

自此行數十弓 兩岸明豁 水淸沙白 有亭跨石壓流 名曰 在澗亭 卽三世相國徐公舊墅 花木分列 蕭灑幽靚 水於是折而東 浩浩然放于大野 是爲九曲之終也 盖自萬景之洞 至于在澗 廑爲五里 而奇巖層瀑 間步錯出 擧其大者 合而名之爲九曲 (洪敬謨, 『冠巖全書』 16冊 「耳溪九曲記」, ‘在澗亭’) 

이처럼 아름다운 풍광에 네모지붕의 한 정자가 20세기 전반경까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재간정으로 추정되는 사진으로 소개된 적이 있다. (도 10) (정우진·노재현·이희영, 「북한산 이계구곡의 위치 비정과 집경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5-3, 2017.) 옛 모습과 지금을 비교하면, 격세지감도 들고 난개발이 한심하기도 하다. 현재 이 공간에는 버스와 지하철 종점이 들어섰고, 도시화된 마을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앞에 언급했던 것처럼 상당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정도이다. 조선 후기 임씨나 서씨 집안, 이씨나 홍씨 집안과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 큰 세도가들이 이곳에 살러 올까?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