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석의 사진살롱 40 – [인간가족전]에 비친 6.25전쟁과 한국
08/27/2020
/ 박주석

앞선 살롱에서 언급했지만, 원래 <Family of Man(인간가족전)> 전시에는 총 503장의 사진이 걸렸습니다. 그 중 한국에서 찍힌 사진은 한국전시에서 삭제당한 마가렛 버크-화이트의 사진 두 장을 포함해서 총 여섯 장이 있었습니다. 국내에서 전시될 수 있었던 나머지 네 장의 사진을 소개합니다. 사진은 어찌 보면 한국현대사를 증언하는 장면들일 것입니다.

David Douglas Duncan, 보고를 받는 아이크 펜튼(Ike Fenton) 대위, 1950.

위 장면은 6.25전쟁 관련 이미지의 전형을 만든,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David Douglas Duncan, 1916~2018)의 사진입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직전 미군과 국군이 방어선으로 정한 낙동강 전선에서 찍은 것입니다. 낙동강 주변 어느 이름 없는 능선을 확보하기 위해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던 미군 제1해병여단 제5연대 소속 베이커중대의 중대장 아이크 펜튼(Ike Fenton) 대위의 모습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중대장이 부하로부터 후방으로부터 보급품이 줄어들어 심각한 상황이라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보급품 문제로 고민하는 지휘관의 고뇌를 느낄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전쟁 초기 미군의 경우도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곤란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한국군은 오죽했을까 싶습니다. 현재도 미국에서는 한국전쟁 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사진이라고 합니다. 『LIFE』지에 실렸습니다.

 

Al Chang, 학동리 전투의 부상병, 1950.

위 장면은 6.25 전쟁 당시 미군 군속 사진가로 한국에 왔던 앨 창(Al Chang, 1922~2007)의 사진입니다. 전쟁이 시작되고 한국군과 미군이 사력을 다해 방어했지만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고 있던 상황에서, 지금 경기도 광주의 무갑산 근처 학동리라는 마을의 전투 중 부상을 당해 죽어가는 미군 병사를 의무관이 안고서 위로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입니다. 전쟁의 비인간적 참상을 보여주는, 잊히지 않는 이미지로 미국에서는 무척 유명한 사진입니다. 전쟁 초기 미군의 어려움을 보여줍니다. 앨 창은 6.25전쟁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에도 미군의 공식 기록사진가로 종군했던 전쟁 전문 사진가였습니다. 이 사진은 AP통신을 통해 배포되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Joseph Breitenbach, 엄마와 잠든 아이 사진, 부산, 1952.

Joseph Breitenbach, 엄마와 잠든 아이 사진, 부산, 1952.

UN, 즉 국제연합 소속으로 유엔의 6.25전쟁 공식 사진기록을 위해 종군했던 독일 출신의 사진가 요셉 브라이튼바흐(Joseph Breitenbach, 1896~1984)의 사진 두 장입니다. 첫 번째 사진은 <인간가족전>에 걸렸고, 두 번째 사진은 브라이튼바흐가 찍은 또 다른 사진입니다. 두 장 모두 전쟁이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있던 1952년,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아이를 안거나 업고 일을 하고 있는 엄마’를 찍은 것입니다. 브라이튼바흐는 6.25전쟁에 종군했지만 전투장면이나 군인들의 모습을 찍기보다는 전쟁 때문에 생긴 병사들의 스트레스와 고뇌 그리고 일반 민중의 삶을 주로 찍었던 사진가로 유명합니다. 아마 전쟁 전체를 총괄하면서도 인간 삶의 문제를 다루는 UN 소속이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전쟁의 와중에서 자식을 보살피면서도 생업에 매진해야 했던 한국 어머니들의 숭고한 희생을 보여주고 있는 사진기록입니다.

Michael Rougier, 휴전반대 시위, 1953년 4월.

6.25전쟁 당시 『LIFE』지 소속 사진가로 한국에 왔던 마이클 루지에(Michael Rougier, 1925~2012)의 사진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서울 서대문 서울경찰청 자리에 있었던 ‘내자호텔’ 앞에서 미국과 북한 그리고 중국 사이에 진행되고 있던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한국 중, 고등학교 여학생들의 시위 장면을 찍은 사진입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있던 1952년 6월 한국의 제외한 전쟁 당사국들 사이에서 휴전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수많은 군중들은 ‘휴전반대시위’를 전개했고,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특히 협정이 가시화된 1953년 4월부터는 극심한 반대시위가 있었습니다. 루지에는 이 장면을 찍었고, 당시 『LIFE』지에 실렸습니다.

서울에서 시위는 주로 ‘내자호텔’ 앞에서 많이 열렸다고 합니다. 당시 ‘내자호텔’은 미군 소유로 직접 운영했던 곳이고, 이 곳이 한국에 취재를 온 외신기자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휴전을 반대하는 한국인의 의사가 세계에 전달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외신기자들에게 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진을 보면 절규하고 있는 왼쪽 여학생의 머리에 구호를 적은 머리띠를 둘렀는데, 잘 보이지는 않지만 “Give us Unification or Death”라는 구호였을 것입니다.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눈물로 호소하는 비장한 요구였습니다. 사진에는 ‘..ion or..’정도만 보이는데, 당시 가장 대표적인 시위 군중들의 휴전반대 구호를 쓰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한반도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던 시대의 상징입니다.

참고로 내자호텔은 일제 시기에 지은 대지 1천1백90평에 4층 건물(객실 80개)의 호텔로, 해방과 함께 45년 미군이 진주하면서 미군 장교 및 여군숙소로 바뀌었고, 한때 경제원조단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6·25전쟁 기간 중에는 종군기자를 위한 외신기자 클럽으로, 55년부터 3년간은 <유엔한국재건위원회> 건물로, 61년 2월까지는 미국 대외원조기관 <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의 건물로 사용되는 등 한국 현대사를 증언하는 중요한 건물이었습니다. 지금은 서울경찰청이 들어섰고, 호텔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 또한 비극입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