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5 – 홍성 용봉산과 월산, 이응노의 집 연못,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에서
08/0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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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김종학의 회화세계”로 대중강연을 한 데 이어, 7월에는 충남 홍성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에서 올해 들어 첫 답사강의를 했다. 기념관이 마련한 ‘미술사가 이태호 교수와 함께하는 고암인문예술기행’이었다. 고암 이응노(顧庵 李應魯, 1904~1989)는 1958년 말 프랑스에 건너가 ‘르 프레 생 제르베’에 자리잡고, 1960~70년대 ‘문자추상’, 1980년대 통일무(統一舞)나 대규모 인물 ‘군상(群像)’ 연작으로 명성을 얻은 작가이다. 고암의 생가인 ‘이응노의 집’은 2011년 복원했으며,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이응노로61-7) 월산 기슭 용봉산을 바라보는 홍천마을에 위치한다.

홍성군민을 대상으로 30명씩 제한해 7월 4일과 7월 18일 두 차례에 걸쳐 기념관에서 고암 이응노의 회화세계를 강의한 뒤에, 예산 수덕사를 거쳐 추사고택까지 고암 이응노의 행적을 찾는 답사였다. 이 코스는 3년 전 한 신문사의 창간 70주년 행사로 진행을 맡은 적이 있었다. (정유미 기자, 「명사 70인과의 동행 63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와 홍성 이응노 생가」, 경향신문, 2017.10.28.) 아침 9시부터 진행되기에, 전날 홍성에 와서 기념관이 운영하는 한옥에서 묵었다. 다음날 새벽 5시부터 행사가 시작되는 9시까지 스케치북 한 권씩을 다 채웠다.

생가가 자리 잡은 월산(月山)과 생가 마루에서 북향으로 자리 잡은 용봉산(龍鳳山)을 그렸다. 홍성 읍내를 감싼 월산은 흰 달 뜨는 ‘백월산’이라 일컬으며, 나지막한 토산이다. (도 1) 북쪽의 용봉산은 월산과 대조를 이룬 바위산으로 홍성과 덕산 일대에서 우뚝한 소금강이고, 신라말 마애불이 조성되는 등 이 일대 사람들의 종교적 중심 역할을 해왔다. (도 2, 3) 기념관 아래 연못에는 마침 연꽃이 피는 계절이어서 연꽃과 잎 향내가 가득했다. 두 번째 답사 날은 너른 백련밭과 작은 홍련 못에 연꽃들이 만발해 장관을 이루었다. 이들에 취해 연꽃이 피고 지고 연밥이 영그는 모습들을 잔뜩 양껏 그렸다. (도 4, 5, 6)

코로나 사태로 금년 상반기에는 대중강연은 물론 단체답사가 거의 취소되었는데,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이 기획한 답사가 유일했다. 아침 9시부터 신나라 학예연구사가 생가와 기획전 “고암 이응노의 문자추상 : 말과 글, 뜻과 몸짓”(2020.6.16~10.4) 전시실을 안내했다. 이응노의 집 명예관장 김학량 교수의 총괄과 황찬연 학예연구사의 기획으로 이루어진, 이응노의 작품들과 이응노를 오마쥬한 백선기, 오윤석, 연기백, 이성민, 이완 등의 문자 구성을 보여주었다. 이어 10시부터 나는 “이응노의 삶과 회화세계”를 강의했다. (도 7)

그런데 아뿔사! 7월 4일 1차 행사 때 강의를 시작하려니, 가족과 함께 온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세 명이나 앉아 있었다. 다행히 화가, 작가, 제빵사 등의 꿈을 가졌다 해서 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강의하고 답사를 마쳤다. (도 8) 진땀을 빼면서도 10살 아래 아이들과 교감하며 설명하는 게 나쁘지 않았다. 2차 행사에는 중학생 한 명만 참여했고, 역사교사가 되고 싶다는 학생이어서 1차 때보다 한결 수월했다.

예산 수덕사 아래 계곡에 자리 잡은 수덕여관은 이응노가 해방 직후 살던 곳이다. 이른바 ‘동백림사건’으로 대전교도소에서 출소한 1969년 3월 7일부터 5월 23일 빠리로 떠나기 직전까지 두 달여 이곳에 머물며 한글 <수덕여관> 간판을 썼고, 여관 바깥마당 두 곳 너럭바위 측면에 암각 문자 추상화를 새겨 남겼다. (도 9, 10) 암각 새김은 한자의 전서체 같기도 하고 상형의 띠를 두른 형식으로, 이응노의 쉼 없는 작업 열망을 보여주는 유적인 셈이다.

이 암각화는 특히 이응노가 문자추상에 대한 소견을 밝힐 때면, “우리나라의 오래된 비석처럼 그 낡은 돌의 마띠에르, 돌에 새긴 문자 등 오랜 세월에 걸쳐 풍우를 견디어온 문자는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나는 그런 세계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문자에 관한 테크닉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이응노·박인경·富山妙子, 이원혜 역, 『이응노-서울·파리·도쿄:이응노·박인경·도미야마 다에코 3인 대담집』, 삼성미술문화재단, 1994.)라고 언급해온 것과 잘 부합하는 작품이다. 자신이 직접 오래된 비석처럼 새긴 것이어서 그렇다. 이응노가 1958년 말 프랑스로 건너간 뒤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문자추상 초기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 이응노의 문자추상은 추상적 ‘구성’으로 화면을 정돈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 이응노의 문자추상화는 어렵다. 한글과 한자, 주역의 64 궤 문자 등이 뒤섞여 그 내용이나 의미가 언뜻 해득되지 않는다. 언젠가 눈 밝은 이가 번역해낼까.

고려 건축 가운데 명품으로 꼽히는 맞배지붕의 수덕사 대웅전(1308년, 국보 제49호) 옆모습은 기하학적 추상화 닮은 공간미를 뽐낸다. 사원 경내 돌아보기를 마치고,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 ~ 1856)의 예산 신암면 용궁리 생가터를 방문했다. 고암 이응노가 사모하고 그 예술세계를 존숭하던 문인이자 예술가이다. 앞서 이응노가 언급했듯이, 이응노의 오랜 비석에 대한 취향은 김정희의 금석학(金石學) 고증학과 상통하며, 문자추상 역시 개성적인 추사체와도 맞닿아 있다. 이곳 묘소 아래 기념관에서는 마침 ‘추사고택에서 만나는 김정희’전이 마련되었고, 이한철이 1856년에 그린 <김정희 초상> 원본이 전시되었다. 고택 앞에 천연두를 앓은 추사를 닮은 점백이 주황색 참나리꽃들이 화사하게 펴있길래 몇 점 그려보았다. (도 11)

나는 고암 이응노의 화화에 대해 연구나 글을 각별하게 써본 적은 없다. 원고청탁에 의존해 글을 써오던 인생이다 보니, 주문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고암의 작품 가운데 프랑스로 나가기 전인 1950년대 인물화나 산수화에 각별한 관심을 피력하곤 했다. 동시기 선배인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의 전통계승에 비해, 고암 이응노의 인물화나 산수 풍경화는 풍속화적 소재 선택과 담대한 필묵 구사로 수묵화의 모던 스타일을 선명하게 구현했기 때문이다. (이태호, 『한국미술사의 라이벌, 감성과 오성 사이』, 세창출판사, 2014. ; 이태호, 『이야기 한국미술사』, 마로니에 북스, 2019.)
고암 이응노와 첫 인연은 1988년 말 당시 서소문동의 호암미술관 전시에서 갖게 되었던 듯하다. 인간 군상 연작을 중심으로 꾸며진 전시 관련 기사에서 “한 폭엔 평화, 마음엔 평화”라는 이응노의 전화 인터뷰가 기억에 남는다. (한겨레신문, 1988.12.21) 이 회고전을 다녀온 후, 1989년 1월 초 귀국 예정을 앞두고, 영면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때 나도 광주지역 신문에 갑작스런 타계를 애도하며 추모의 짧은 글을 썼다. (이태호, 「이응노의 예술세계와 민족현실」, 전남일보, 1989.1.3.)

2011년 이응노 생가 복원과 함께 조성룡 건축가의 설계로 기념관이 지어졌다. (도 12) 그때 홍성군수를 지낸 김석환 군수의 요청으로, 유홍준 교수 등과 기념관의 전시와 운영에 대해 자문하게 되었다. 나는 첫 명예관장을 맡았고, 기념관 개관 도록에 글을 썼다. 또 고암의 1950년대 수묵화 <한강 풍경>을 기증한 일도 있다.

이후 명지대학교 대학원에서 ‘고암 이응노 예술세계’로 박사학위를 받은 동덕여자대학교 김학량 교수에게 명예관장을 물려주고, 운영위원장으로 기념관 전시나 교육, 유물 구입과 관리 등을 자문해왔다. 2017년에는 윤후영 학예연구사 요청으로, 내 도서 일부를 기증해 작은 건물 ‘효은서실(曉垠書室)’이 기념관 경내에 들어서기도 했다. 기념관 개관 도록(『이응노의 집, 이야기』, 수류산방, 2011.)에 쓴 내 글을 아래에 소개해 본다.

 

 

미래로(美來路)의 아름다운 공간

 – 홍성 ‘이응노의 집’을 개관하며

 

‘이응노의 집’은 충남 홍성의 새 명소입니다.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 소재의 생가를 복원하고,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을 개관합니다. 용봉산을 당차게 마주한 월산 기슭, 솔밭이 멋들어진 언덕 아래 소담하고 호젓한 곳입니다. 생가의 주변 산 능선을 넘는 언덕길 따라 봄 진달래가 화사하고, 기념관 앞 연못에는 연꽃과 마름이 가득 여름을 맞이합니다. 주변의 황금색 들녘과 숲길에는 가을이 만화하고, 겨울에는 눈 소복이 내리는 곳입니다. 기암이 아름다워 제 2의 금강산이라 일컬어지는 눈 덮인 용봉산은 절경입니다. 이들 모두 고암의 예술에 녹아있는 풍광입니다.

이런 경치에 걸맞은, 정말 딱 맞춤인 기념관이 들어섰다고 생각합니다. 모던하여 참신한 건물입니다. 사면체 박스형을 잇거나 독립한 건물들이 낮은 구릉 지형과 그렇게 정겹고 편안하게 어울려 있습니다. 노출 콘크리트와 목재판을 붙인 각진 외모는 다소곳하며, 내부는 바깥풍경을 적극 끌어안는 구조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축가 조성룡 선생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입니다. 최근 한강의 선유도공원, 광주의 의재미술관 등을 설계한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입니다. 자연과 현대를 조화시킨, 고암이 추구했던 이미지를 떠올리며 디자인했다고 합니다. 지자체가 마련한 최고의 기념관 건축으로 인구에 회자될 거라 확신합니다.

고암 이응노는 홍성이 낳은 세계적인 화가입니다. 지난 20세기 중후반 벌써 한국인으로 파리에 머물며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니, 한국예술의 긍지입니다. 요즈음 얘기하는 한류(韓流) 문화의 원조 격입니다. 미술인으론 처음이자 아직도 그만큼 현지에서 명성을 얻은 작가를 찾기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또 쉬지 않고 작업해온 다작(多作)은 풍류쯤으로 인식해온 전통서화에 대한 개념을 크게 바꾼 새로운 작가정신이라고 생각됩니다. 평생의 작업량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아마 한국근현대미술사에 가장 우뚝할 것입니다.

고암의 예술세계는 다채롭습니다. 유럽으로 건너가기 전, 벌써 개성적인 구성과 필치로 현대적 기운의 묵죽도(墨竹圖)를 비롯하여 산수화, 인물풍속화, 동물화, 화조화 등 모든 회화영역을 넘나들었습니다. 아마도 고암이 유럽에 가지 않았다면, 한국현대미술사가 그에 의해 구태를 벗는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리라 가정해 볼 정도입니다.

프랑스에 정착한 이후, 고암은 유럽을 무대로 30여 년간 활동했습니다. 화실을 개방하여 유럽인들에게 수묵화를 가르쳤고, 한국의 전통적인 예술정신과 형식을 고수했습니다. 특히 한국인이 왜 불어를 배우냐며 작업에만 매진했다는 일화로 유명합니다. 이 같은 의식 아래, ‘율동과 기백의 한국 민족성’을 토대로 당대 서구의 회화사조를 소화하고 자기화했습니다. 1960~70년대에는 유럽의 추상주의와 만나 수묵추상화를 전개하거나 한자나 한글 꼴을 구성한 문자추상은 독자적 경지를 이룬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리고 군무(群舞)를 이은 1980년대의 인간 군상시리즈 작업은 조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감화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고암은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강점기, 전쟁, 분단, 독재정권으로 점철된 한국근현대사의 아픔과 갈등을 겪으며 고스란히 예술에 전념한 작가입니다. 1960년대 군사정권 시절에는 독일에서 활동한 음악가 윤이상 선생과 함께 동백림사건을 겪었고, 1970년대 백건우 · 윤정희 부부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습니다.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의 희생입니다.

고향 홍성이 고암을 이렇게 맞이합니다. 조국을 떠난 유목민적 예술가이고, 한 때 이른바 좌익사범으로 몰렸던 고암을 바르게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2007년에 건립된 대전의 이응노미술관에 이어 정말 반가운 일입니다. 최영, 성삼문, 홍가신, 김좌진, 한용운 등 홍성이 낳은 충의(忠義)의 선현들에 이어 홍성의 예술가를 새로이 현창하게 되어 더욱 그러합니다.

이응노의 집에 마련된 기념관은 미망인 박인경 여사, 고암의 손자 이종진 선생과 손녀 이경인 여사의 소장 유품과 작품들의 기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또 고암을 사랑하는 분들의 기증작품이 이어져 전시실을 알차게 만들게 되었습니다. 청관재의 박경임 여사, 가나아트센터 이호재 대표, 공화랑 공상구 대표, 노화랑 노승진 대표, 동산방화랑 박우홍 대표, 학고재 우찬규 대표, 현대화랑 도형태 대표 등이 기증에 적극 참여하셨습니다. 홍성에 소재한 청운대학교 이상열 총장, 홍성 출신 기업인 대륭건설 이환근 회장,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 개관준비 자문위원장 유홍준 교수 등이 좋은 작품을 건네주셨습니다. 우리 사회 기증문화의 진정한 모범을 보여주는 기념관 건립이라고 자부합니다.

홍성군도 기념관 건립 건축공사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기념관에 필요한 고암의 작품을 구입하여 보완하고, 윤후영 학예연구사를 채용하였습니다. 김석환 현 홍성군수의 열린 가슴과 담당 공무원들의 열정 덕택에 명실공히 공공미술관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공감하여 기념관의 운영방안과 전시 자문에 적극 참여한 홍익대학교 안상수 교수, 서울대학교 김민수 교수, 동덕여자대학교 김학량 교수, 김호석 화백 등의 노고가 곁들여져 있습니다. 이러저러한 미덕이 쌓여 이응노의 집이 완성된 것입니다.

기념관에 선보이는 유품들은 이응노의 삶과 예술의 체취를 진하게 전해줍니다. 젊은 시절 준수한 용모부터 노경의 해맑은 표정까지 고암의 인생이 묻어나는 옛 사진들이 특히 그러합니다. 도인의 품위를 전해주는 노인의 얼굴에는 고암 그림이 곧 고암 그 사람이고, 고암이 곧 고암 그림임을 잔잔하게 드러냅니다.

작품전시공간은 고암 이응노의 예술세계와 그 흐름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먼저 고암의 스승인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의 묵죽도를 포함하여 고암의 초기 대나무와 사군자 등 수학 시절 작품들이 선보입니다. 이어 분방한 필치로 변형시킨 묵죽도(墨竹圖)를 비롯하여 산수화, 동물화, 화조화, 풍속인물화 등 개성적인 수묵화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유럽에서 뿌리내린 신경향의 수묵추상화나 문자추상, 그리고 군상시리즈 등 고암의 걸작들이 함께합니다.

이응노의 집은 기념전시관으로서 역할과 더불어 고암을 기리며 고암을 쫒아 전통수묵화의 현대화를 시도하는 의미 있는 교육공간으로 거듭나도록 노력하렵니다. 교양강좌나 대중예술교육은 물론이려니와, 어린이 청소년 미술교육과 청년작가의 발굴에 앞장설 것입니다. 나아가 고암과 홍성을 전 국민에게 알리고 세계화할 기획전도 꾸며볼 예정입니다. 최근 우리 미술계의 중심이 서양화, 현대미술, 외국작가에 기우는 성향에 따라 전통수묵화가 너무도 소외되어 안타까운 게 현실입니다. 우리 전통회화의 부흥이 이응노의 집을 거점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너른 홍성 평야에 용봉산이 듬직하게 놓은 풍경 아래, 이응노의 집은 평이하면서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기념관 건축물이 격조 있게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고암이 태어난 정기를 호흡하며, 삶과 예술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터입니다. 여기에 고암의 집안사람들과 고암을 사랑하는 이들의 품위가 함께 녹아있어 더욱 빛이 납니다.

이응노의 집은 홍성이 크게 자랑할 만한 기념관입니다. 또 홍성군이 추구하는 ‘미래로(美來路)’ 에 정말 안성맞춤인 터전입니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미래를 여는 길’이라는 의미의 미래로(美來路)는 고암이 평생 추구한 예술이념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2011.11. 이태호李泰浩(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 명예관장,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