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정의 삶과 문화 2 : 혐오는 질병에 기생한다.
06/25/2020
/ 신수정

코로나 19가 일상의 풍경을 바꾼 지 오래다. 마스크가 필수품이 되었고 손 소독제가 없으면 불안하다. 되도록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가능한 사람들을 피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SNS를 비롯한 미디어 의존도가 높아졌고 출처를 확인하기 어려운 각종 가짜 뉴스들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처음에는 중국과 관련된 가짜 뉴스가 횡행하더니 특정 종교 단체의 집회와 관련하여 가파르게 증가한 확진자 수치가 보도된 이후에는 그 단체를 겨냥한 뉴스들이 범람한다. 아마도 이러한 추세는 사태가 진정되기까지 잠잠해지지 않고 꽤 오랫동안 이어질 듯하다.

질병에 대한 대중의 불안과 공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중 통치술 가운데 하나다. 지난 세기 나치는 여러 피가 섞인 인종적 혈통을 지닌 사람을 매독 환자 혹은 암 환자에 비유했다. 유럽의 유태인들에 대한 절멸이 대중적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비유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 돌이켜보면 어떤 질병에 특정한 의미를 덧붙이고 도덕적 타격을 가함으로써 그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정당화하는 것은 일군의 권력자들에겐 언제나 자연스러운 정치의 과정으로 이해되곤 했다. 마음속 공포를 질병과 동일시하고 이 질병의 이름으로 정치적 혐오와 배제를 재생산해내는 방식은 추악하기 짝이 없지만 늘 우리와 함께해온 또 다른 대중적 ‘공포’의 근원이라고 할 만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역시 나환자들을 공포의 이름으로 배제해왔다. 어린아이들의 간을 먹으면 나병이 낫는다는 속설을 나환자들의 사회적 격리와 박해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한 예는 부지기수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의 시 <문둥이>에 만연해 있는 어떤 서러움의 정조는 나병을 둘러싼 속설과 그 속설이 야기한 혐오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라고 처절하게 부인해야만 했던 나환자 시인 한하운을 ‘빨갱이’로 몰아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집단의 정화를 방해하는 불순분자로 치부했던 우리의 과거사는 이 혐오와 배제의 정치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치적 편견은 질병에 대한 대중들의 그릇된 공포를 숙주로 기생한다. 숙주가 죽지 않는 한 정치적 기생충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어떤 대상에 달라붙어 생경한 의미들을 낳고 그것들의 자의적 기원을 지우며 마침내 절대적 진리로 둔갑시킨 어이없는 편견을 우리 앞에 들이댄다.

코로나 19는 우리에게 어떤 편견을 남기게 될까? 사회적 격리로 인한 불안과 공포에 굴복해 혐오와 편견으로 얼룩진 배제와 차별의 이야기들, 대중적 인기에 영합한 정치적 선동과 낙인찍기의 효과들을 분풀이의 대상으로 삼고 싶은 유혹을 느낀 적은 없는가? 그 자신 암 환자였던 수잔 손탁은 질병에 대한 그릇된 은유를 해체하기 위한 자신의 작업을 시작하며 니체의 경구를 빌려온다. “질병을 생각한다는 것, 지금까지 그랬듯이, 적어도 질병 그 자체보다 자신의 질병에 대해 생각하느라 고통 받지 않도록 병자들의 상상력을 가라앉히는 것, 생각하건대 이것은 대단한 일이리라! 이것은 훌륭한 일이리라” 오늘도 질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들과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전문가들, 그리고 사회 구석구석에서 답지하는 따뜻한 성원들에 자못 숙연해지는 한편, 여전히 근거를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들, 그러나 그럼으로써 더욱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고 공분이라는 이름으로 쓸 데 없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다가 화들짝 놀라 생각해보는 것이다. 지금 내가 또 하나의 ‘한하운’을 만드는 데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본 글은 세계일보 2020년 3월 7일자 오피니언/외부칼럼 카테고리에 “[삶과문화]혐오는 질병에 기생한다“로 연재된 글입니다>

 

신수정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