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면 삼키고 써도 삼키는…
04/29/2020
/ 박평종

어린 시절 양철지붕 집에 잠시 살았던 적이 있다. 양철지붕 하면 테네시 윌리암스의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가 떠오르는데, 실제 더운 한낮에는 집안에 오래 머물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열기보다 더 괴로운 것은 비 내릴 때의 소음이었다. 빗방울이 거칠수록 소음도 커서 지붕을 걷어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소음이란 무엇일까? 소음은 소리의 크기와 상관없다. 소리가 커도 듣기 좋은 경우가 있고 속삭여도 신경을 거슬리는 소리가 있다. 18세기 생리학자 르 카(Le Cat)는 소음을 “규칙을 찾을 수 없는 음”, 따라서 “그 속성을 연구할 수 없는 음”으로 정의한다. 말하자면 불규칙하여 질서가 없는 소리,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소리라는 것이다. 안정과 평온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듣고 싶지 않은 소리다. 허나 내가 원치 않는다고 해서 귀가 그 소음을 필터링하지는 못한다. 감각기관은 의지의 권한 밖에 있다.

독일 매체이론가 키틀러는 소위 ‘기록시스템 1900’의 핵심축인 축음기가 소리정보를 ‘기록’하면서 대단히 중요한 변화가 생겨났다고 지적하는데, 그 변화의 본질은 소음의 기록에 있다. 이는 시간을 ‘통째로’ 기록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인간은 듣고 싶은 음과 듣기 싫은 음을 구분하여 후자를 ‘배제’한다. 그렇게 소음은 인류 공동체에서 축출당해 왔다. 이는 소리뿐 아니라 모든 정보의 기록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기록시스템 1900’ 이전, 키틀러의 용어로는 기록시스템 1800, 즉 문자가 모든 정보의 기록을 ‘독점’하던 시대에 정보의 누락은 필연적이었다. 말하자면 문자로 정보를 기록할 때 인간은 선택과 배제를 동시에 행한다. 원치 않는 정보, 불필요한 정보, 유용하지 않은 정보는 필터링 되어 역사 속에서 증발해버린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란 기록으로 남은 역사다.

악보의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대 화성악에서 완전5도는 가장 ‘아름다운’ 음정으로 고전주의 시대에는 소음의 판별기준이었다. 그러나 축음기가 모든 소리를 온전히 기록하기 시작한 이후 소음도 악보 안으로 들어온다. ‘듣기 싫었던’ 음을 듣게 되는 셈이다. 그렇게 축음기가 열어놓은 소음의 ‘질서’가 19세기 이후의 세계를 지배한다. 쇤베르그의 무조음악은 물론이고 존 콜트레인의 ‘고막이 터질 듯한’ 파열음도 음악의 일부가 됐다.

소리라는 청각정보가 그렇다면 이미지라는 시각정보는 어떨까? 기록시스템 1900에 키틀러는 영화를 추가했지만 소음의 기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영화보다 사진이 그 시스템에 더 적합해 보인다. 카메라는 사람의 눈과 달리 보기 싫은 것도 기록한다. 렌즈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을 ‘공정하게’ 감광판에 각인시키는 이른바 기계의 눈 덕이다. 물론 눈의 구조도 카메라 렌즈의 그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감각기관으로서의 눈은 모든 것을 본다. 그래서 끔찍한 장면 앞에서 눈을 감아버린다거나, 눈을 돌려버린다고 말하지 않던가. 눈은 의지와 상관없이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망막에 맺힌 이미지가 시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어 인식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배제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 덕에 우리는 뇌 용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갱신할 수 있다.

그림과 사진의 본질적인 차이도 여기에 있다. 그림에서는 문자처럼 선택과 배제의 원리가 작동한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그리기 때문이다. 반면 사진에서는 내가 찍고 싶지 않은 것도 찍힌다. 축음기가 소음까지 기록하듯 카메라도 불필요한 정보를 기록하는 셈이다. 축음기 덕에 ‘소음의 세계’를 알게 된 것처럼 우리는 카메라 덕에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벤야민)를 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배제의 원리 탓에 보지 못했던 세계가 사진과 더불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눈은 여전히 보려 하는 것만 본다. 그런데 기계가 이미지를 판독하기 시작하면서 변화가 생겨난다. 특히 AI 기반 이미지 판독시스템의 진화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영상의학 분야는 물론이고 자율주행자동차, 공항검색대 등 기계의 눈은 도처로 확장되고 있다. 물론 아직 이 기계의 눈은 여러모로 불완전하다. 예컨대 모든 시각적 요소를 동일하게 취급하는 탓에 기계는 불필요한 시각정보도 식별의 요소로 간주한다. 가령 강아지와 비슷한 형태의 치킨을 강아지로 판독하거나, 머핀의 건포도를 강아지의 눈으로 인식하는 경우다. 음성처리에서도 기계는 소음을 무시하지 못해 애를 먹는다. 사람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지만 기계는 써도 삼킨다는 뜻이다. 약인지 독인지도 모른 채.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