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석의 사진살롱 33 – 수정(受整)과 포샵(Photoshop)
02/27/2020
/ 박주석

YMCA 사진과 수정 실습 장면, 1931년 제23회 <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졸업기념 앨범 중에서

이 사진은 일제 시기 1930년대 초반까지 거의 유일했던 공식적인 사진교육 기관이었던 <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즉 YMCA 사진과의 실습 장면입니다. 학생 4명이 나란히 앉아 각자의 책상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행동을 종합해서 잘 보시면 왼손으로 둥그런 판처럼 보이는 캐리어를 들고 있고, 오른손에는 연필을 쥐고 있습니다. 이들이 들고 있는 캐리어 중앙에는 네모로 홈이 파져 있는데 바로 네거티브 유리 원판을 끼워 넣었습니다. 이 원판에 연필로 섬세하게 칠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바로 흑백사진 시대에 사진관들의 비장의 영업 무기였던 ‘수정(受整)’ 실습입니다. 오늘날의 포토샵 작업과 같은 것입니다.

초창기 사진에서 수정은 유리건판의 재현력이 모자라는 한계를 극복한다거나, 자연광 채광 때문에 생기는 번득임 같은 부자연스런 현상을 보완하기 위해서, 또는 현상 과정에서 부주의로 발생하는 스크래치 등을 없애려고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표현에 있어 기술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순수한 의도로 생겨났지만, 19세기 픽토리얼리즘(Pictorialism) 시대에는 사진을 좀 더 예술적으로 만들기 위해 수정이 이루어졌고, 사진관에서는 손님들의 취향에 아부하려는 영업적 목적으로 수정을 했습니다.

 방법은 이렇습니다. 촬영한 원판을 현상(Development)해서 네거티브 즉 음화를 만들고, 다시 인화(Print)작업을 통해 포지티브 즉 양화의 사진을 만드는 과정 중에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서 음화에 가필하는 일입니다. 먼저 현상이 이루어진 음화가 있으면 여기에 우리는 흔히 니스칠이라고 말하는 투명 도료 바니시(varnish)를 바릅니다. 그런 다음 원하는 부분을 흑연연필이나 유화 물감 또는 파스텔화에 쓰이는 콩테(Conté) 즉 목탄연필로 그려가며 수정을 합니다. 그리고 수정을 마친 음화를 갖고 인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진관에 자신의 초상을 찍으러 온 손님의 얼굴 이마에 보기 싫은 검은 점이 있다고 칩시다. 사진을 찍어 원판을 현상해 놓으면 음화이기 때문에 검은 점 부분은 원판이나 필름 상에는 투명하게 나옵니다. 그럼 이 부분을 연필로 그려 검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 다음 인화를 하면 양화로 나오면서 검은 점 부분이 사라집니다. 가장 간단한 수정입니다. 사실적이지는 않지만 손님들은 엄청 좋아합니다. 일종의 성형 시술입니다. 

사진사(寫眞師)들은 손님을 더 끌어들이기 위해 점을 제거하는데서 머무르지 않고 얼굴 각 부분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눈을 손님 원하는 대로 그려주고, 코도 높여주고, 턱도 깎아 주는 등 거의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 주는 수준까지 발전했습니다. 흑백사진의 시대에는 유리원판이든 필름이든 가리지 않고 인물사진은 무조건 수정을 해야 고급이었고, 능력 있는 사진사로 인정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수정 만능의 시대였습니다. 사진관의 고객들은 ‘수정’을 맹신한 나머지 자신이 선망하거나 원하는 모습으로 사진이 나올 때까지 요구했습니다. 나중에는 얼굴뿐만이 아니라 몸매까지도 수정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살이 찐 고객들은 날씬한 모습을 요구하고, 마른 몸매는 살이 찐 것처럼 보이도록 해달라고 했고, 사진사들은 고객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수정을 여하히 잘하느냐가 사진관의 기술 수준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사진사들은 고객 본인의 모습과 닮으면서도 이상적인 얼굴을 만들기 위해 ‘골상학’을 연구하고, 수정기술도 연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제 때부터 1980년대까지 사진사들의 실력과 명성은 촬영과 인화뿐만 아니라 수정의 수준에서 판가름이 났습니다. 수정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사진사의 우열이 가려졌고, 섬세한 연필 터치가 필요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수정만을 전문으로 하는 수정기사라는 직업군도 등장했습니다. 1966년에 발간된 『’66한국사진연감』에 실린 연표 「한국사진70년사」에 따르면 1915년에 서울 인사동에서 오경상(吳景祥)과 함께 <옥영사진관>을 운영한 김시련(金時鍊, 1892~?) 선생은 ‘수정’을 전문화시킨 이 분야의 개척자였습니다. 사진사들이 어려운 까다로운 수정은 직접 하지 않고 수정 전문가에게 맡기고는 했습니다. 

중앙대 사진학과의 전신인 서라벌초급대학 사진과 초대 학과장을 지낸 박필호(朴弼浩, 1903~ 1981) 선생의 유고 『사진을 말한다』의 내용에는 ‘수정’ 항목만이 아니라 ‘관상학’ 항목도 있습니다. 참고로 선생은 일제 시기부터 종로에서 <연우사진관>을 운영했고, 일제 하 한국인을 위한 사진교육 기관인 <경성사진학강습원> 원장도 지낸 분이었습니다. 사진사 양성 과정에서 사람의 관상과 골상을 이해하고 수정하는 방법은 중요한 과목이었던 것입니다.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수정 실습 장면은 당시 사진교육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이었습니다. 

수정을 많이 하면 할수록 사진의 이미지는 실제로부터 멀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사진이라고 생각하는 고객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얼굴 사진을 볼 때 잘 나왔다는 평가는 바로 자기의 원래 얼굴보다 훨씬 더 미화되었을 때 나오는 반응입니다. 개성적인 초상사진의 대가들이 집요하게 추구했던 인물의 정신과 내면세계의 표출을 잘한 사진은 그들에게 좋은 사진이 아닙니다. 정직하게 나와야 좋은 사진이라는 다른 사람의 인물사진을 평가할 때의 기준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사진은 사실이라는 사회적 신뢰를 바탕으로, 왜곡한 이미지를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자 하는 욕망의 결과입니다. 

오늘날 결혼식 사진, 프로필 사진, 베이비 사진, 여권 사진 등에 걸친 사진관의 사진은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연필 수정이 아니라 포토샵(Photoshop) 수정으로 만들어집니다. 모델의 몸매 수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연필로 하든 포샵으로 하든 여전히 수정을 통해 미화한 자신의 사진에 중독된 고객들은, 자신의 이름처럼 정직한 수정을 가하지 않은 인물 사진을 받아들면 사진 자체가 잘못되었다든가 실력 없는 사진사가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셀카를 찍을 때도 자동으로 포샵 처리를 해주는 앱(application)을 사용하고, 그 인기 또한 대단합니다.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변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19세기 중반 자신의 실제와는 관계없는 선망의 모습으로 카메라에 비춰지기를 원했던 프랑스 대중의 그로테스크한 악취향에 심하게 아부하는 사진사들을 심하게 비난했던 사람이 바로 위대한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였습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