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ghost in the shell
02/18/2020
/ 박평종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Ghost in the shell>, 1990년대에 나온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원작에서 제기하는 다소 난해하고 복잡한 질문들을 단순화시켜 정리한 이 영화의 핵심 주제는 영혼과 신체의 상관관계다. ‘고전적인’ 주제지만 첨단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걸맞게 영혼을 인위적으로 ‘조작’했을 때 어떤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는가를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주인공 쿠나사기(메이저로 불리는)는 인공신체를 지닌 사이보그로 명령에 복종하는 특수부대 요원이다. 그녀의 ‘원래’ 기억은 프로그램에 따라 삭제됐으나 특정 상황에서 망령처럼 그 기억이 되살아난다. 프로그램의 관점에서는 일종의 버그며,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부활한 혼이다.

실상 이 ‘주입된’ 기억은 ‘껍데기’의 새 삶을 위한 전제다. <블레이드 러너l>의 리플리컨트도 실제 겪지 않았던 경험을 ‘가짜 기억’으로 간직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구성하는 재료로 삼는다. 이미 광유전학(Optogenetics) 기술은 세포 일반뿐 아니라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여 인위적인 기억을 가공해낼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고 있다. 말하자면 몸이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뇌의 자극만으로 유사기억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뇌는 신체의 모든 감각적 경험이 모이는 장소로 거기에서 개인의 모든 정신 활동이 시작한다. 소위 말하는 ‘영혼’의 요람인 셈이다. 데카르트는 ‘동물기계’론을 주장하면서도 이 ‘영혼’의 존재를 포기하지 못해 송과선을 영혼이 위치한 장소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아무리 CT를 찍어 봐도 그 ‘영혼’을 찾아낼 수는 없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Ghost in the shell>은 ‘불멸의’ 영혼을 지켜내고자 한다. 영혼의 완강함 때문에 결국 쿠나사기의 ‘껍데기’는 소멸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인간적이다.

한편 프랑스의 미디어 아티스트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와 피에르 위그(Pierre Hughe)의 작품 < No Ghost, just a shell>은 다른 맥락에서 영혼과 신체의 문제를 다룬다. 두 작가는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개발한 만화 캐릭터 앤리(Annlee)를 구입하여 작품의 모델로 삼는다. 여기서 이 캐릭터는 작가의 ‘구매행위’를 통해 저작권의 보호를 받는다. 따라서 다른 누구도 이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아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없다. 허나 본래 만화 캐릭터는 스토리를 통해 성장하는 법이다. 결국 앤리는 태어났으나 어떤 삶도 살 수 없는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가 된다. 살아보지 못했기에 그녀는 감정도, 취향도, 사고도 없다. 특정 상황, 특정 환경에서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말하자면 중립적인 의미에서 영혼 없는 인간이라 할 수 있다. 두 작가는 앤리를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영혼을 저당 잡힌 채로 껍데기의 삶을 살고 있음을 암시한다.

<No Ghost, just a shell>에서 껍데기만 가진 앤리는 지상 어디에도 있을 법하지 않은 가상의 공간 속을 하염없이 걷는다. 표정도 없고 반응도 없이 무작정 걷는다. 영락없는 로봇의 걸음이다. 공각기동대의 쿠나사기는 비록 가짜라도 ‘주입된’ 기억 탓에 자신의 ‘자아’를 지녔지만 앤리에겐 그마저도 없다. 만약 앤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가짜일지라도 기억을 갖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싶다. 한순간이라도 살아보아야 살지 말지 결정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뇌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감정과 사고는 뇌에서 발생하는 특정한 신호로 정리될 수 있고 이를 알고리즘으로 환원할 수 있다면 로봇도 사고가 가능하다. 역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영혼도 결국 알고리즘에 불과할 뿐이다. 같은 의미로 유물론자의 관점에서 보면 영혼이란 본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유물론자를 ‘영혼 없는 인간’이라 부른다면 그는 필시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영혼 없는 자’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혼은 본래 없다 해도 살아있는 한은 있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