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9-중국 길림에서 서파西坡로 오른 백두산
01/30/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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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5일 아침 서쪽 코스로 백두산에 올랐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진한 청록의 천지 물색이 한 눈에 들어왔다. 황홀했다. 우리 민족의 표상이자 영산답게 품위졌다. 선명하게 드러난, 천지를 빙 두른 백두산 연봉의 오르내리는 능선을 스케치북에 담았다. (도 1) 나도 그동안 눈에 익은 유명 사진작가의 백두산 사진 작품처럼 찍을 수 있게 백두산이 열린 것이다. (도 2)
송강하진(松江河鎭)에서 일박하고, 다음날인 10월 5일 이른 아침 백두산 아래는 비가 온 뒷날 늦가을의 정취와 겨울 분위기가 뒤섞인 듯한 날씨였다. 서파 입구에서 통과 절차를 치르고 천지 아래까지 셔틀버스로 이동할 때, 산언덕의 흰 서리에 진눈깨비도 흩날려 열린 백두산을 보지 못하나 하는 염려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도 3) 천지 아래 주차장에 도착하니 구름이 거의 걷히는 중이었다.
버스에서 하차하자마자 흩어지는 구름을 따라 천삼백사십 계단을 단박에 올랐다. 숨을 고르고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드로잉을 시도하였다. (도 4) 스케치북 한 권을 다 채웠다. 현지사람에게 물어보니 왼쪽 벼랑은 백운봉, 오른쪽 봉우리는 천문봉이란다. 백운봉을 사생하고 나서, 천문봉 너머가 이천칠백오십 미터의 장군봉인 것 같아 스케치북 펼친 양면에 담았다. 처음에는 천지와 봉우리들을 한 화면에 담지 못했다. 세 번째 스케치에 천지와 그 둘레를 감싼 봉우리들을 담을 수 있었다. 귀국해 연희동 연구실에 와서 천지의 깊고 청명한 청록색의 어울림을 추억해 바르고, 도장을 찍어 완성했다. (도 1)
이렇게 백두산의 첫 만남을 성공적으로 가졌다. 사진을 찍고 스케치하고 나서, 조선 시대 백두산 그림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하산해 통화(通化)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옛 백두산 그림에 대해 강의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유일한 백두산 그림 능호관 이인상<장백산도>

조선 시대 백두산 그림은 영조 시절을 대표하는 문인화가 능호관 이인상(凌壺觀 李麟祥; 1710∼1760)의 1750년경 작 <장백산도(長白山圖)>(개인소장)가 전하는 정도이다. (도 5) 옛 지도나 함경도지역 명승도 병풍에 등장하는 것 외에 백두산을 단독주제로 그린 유일한 사례 아닌가 싶다.
나는 <장백산도(長白山圖)>를 15년 전 학고재 갤러리에서 가진 ‘조선 후기 회화의 기와 세’라는 기획전에 소개한 적이 있다. (이태호 엮음, 『조선 후기 회화의 氣와 勢』, 학고재, 2005)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1)의 1750년경 파워풀한 진경 작품 <박연폭도(朴淵瀑圖)>(개인소장)를 ‘세(勢)’의 대표작으로, 이와 쌍벽으로 능호관 이인상의 <장백산도>를 ‘기(氣)’의 에너지가 응축된 대표작으로 삼아 꾸민 조선 후기 회화전시였다. <박연폭도>가 짙은 농묵으로 폭포 실경을 길게 과장해 격정적 감정을 맘껏 쏟아냈다면, <장백산도>는 자기감정을 직접 드러내기보다 절제하면서 감각적으로 그려낸 명작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도록 앞머리 ‘전시를 기획하며’에 이인상의 <장백산도>를 아래처럼 기술했다.

 조선후기 문인화의 으뜸이면서 조선 선비의 인간미가 오롯한 그림을 찾자면, 나는 이 <장백산도(필자는 이 글에서 ‘백두산도’라고 썼음)>를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흔히 문자향ㆍ서권기의 대표작으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거론하지만, 단연코 능호관의 <장백산도>가 세파에 물들지 않고 담백한 조선의 선비상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장백산도>의 간일하고 담담한 붓과 먹맛에 비하면, 일정한 톤의 마른 갈필로 그린 <세한도>는 세련된 기교와 맵시가 튀는 그림이다.
두 사람의 서화 전반에도 그 대조가 잘 드러나 있다. 추사의 서화는 천부적 재능을 문기(文氣)로 포장하려 의도했다는 느낌을 준다. 반면에 능호관은 어찌 보면 문기 이전,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으려는 순수한 자연미를 추구했던 듯하다. 이런 성향의 차이는 추사가 문자로 가공한 예서체를 선호한 점과 능호관이 예서 이전의 상형문자인 전서체를 즐겼던 사실과도 맞아 떨어져 흥미롭다. 어쨌든 <장백산도>는 “<세한도>의 몇 배를 더 주어도 바꾸지 않겠다”는 소장자의 자랑을 한껏 수긍케 하는 그림이다.

<장백산도>에는 오른편 잡목 숲과 초정(草亭)이 배치되고, 그 왼편으로 언덕 너머 천지연을 사이에 둔 산봉우리가 펼쳐져 있다. 얼기설기한 필치여서 백두산의 위용은 소홀하지만, 백두산 정상의 너른 천지를 옆으로 긴 화면에 담아 여백의 맛이 일품인 그림이다. 더불어 조선 시대의 유일한 백두산 실경화인 점만으로도 그림의 가치를 더한다. (이태호 엮음, 『조선 후기 회화의 氣와 勢』, 학고재, 2005) 

이 <장백산도> 그림의 왼편에는 김상숙의 요구에 응해 그렸다는 이인상의 글 제발(題跋)이 딸려 있다. 배와 김상숙(坯窩 金相肅,1717~1792)은 문신으로 바른 천성의 도인이자 서예가로 명성이 높았고, 두 사람은 당대 수준 높은 격조의 문인으로 꼽힌다. 꾸밈없이 자유로이 쓴 이인상의 행서체 서풍도 별격이다. 

가을비 내릴 때 계윤(김상숙의 字)을 찾아갔다. 종이를 내놓으니 그림을 그렸다. ‘사람으로 하여금 곽충서의 종이연 고사를 떠오르게 한다’고 계윤이 웃으며 “원령(이인상의 字)이 너무 나태해 장백산을 그렸네”라고 말했다. 붓을 놓으며 함께 웃었다. (秋雨中 訪季潤甫 出紙索畵 令人郭忠恕紙鳶想 季潤因笑曰 元靈懶甚 作長白山 爲之放筆一笑)

 글에 언급된 곽충서(郭忠恕)는 중국 북송 때 문인화가이다. 곽충서가 대갓집의 초청으로 그림 부탁을 받자 ‘화면 좌우 끝에 종이연과 연 날리는 아이를 그려놓고 연실 한 줄을 길게 잇자 텅 빈 화면에 주문자가 실망했다’라는 고사를 인용한 글이다. 그만큼 심심한 그림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이인상이 구상한 휑한 공간의 산수 그림을 보며, 김상숙은 ‘장백산이 됐군’이라고 했던 모양이다. “붓을 놓으며 함께 웃었다”라는 발문의 말미대로, 이인상의 담박한 품성이 그대로 밴 그림이다.
이인상은 영조 시절 문인의 예술적 격조를 실어낸 문인화가이다. 이인상은 이 <장백산도>처럼 소략한 구성미, 가볍고 부드러운 먹 선묘에 듬성하게 강조한 먹 점을 즐겨 구사했고, 때론 맑고 연한 담채나 수묵의 번짐을 펼쳤다. 이를 이인상은 마음 그림 ‘심회(心繪)’라 했다. <장백산도>는 얼핏 먼 산 경치와 아래 빈 수면을 보면, 김상숙의 한마디 했던 것처럼 백두산을 연상시킨다. 근경 중앙의 솟은 봉우리도 2,750미터의 백두산 제일 봉일 듯싶다. 그런데 그 오른쪽으로 소나무, 언덕의 정자와 잡목숲은 백두산경과 거리가 멀다. 문인화가 이인상이 속세를 벗고 은둔을 그리워하던 마음자리에 따라 추가해 넣은 소재들인 셈이다. (도 5)
2005년에 ‘조선 후기 회화의 기와 세’ 전시를 기획할 때, 나는 <장백산도>를 언급하며 혹여 이인상이 백두산을 다녀오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했을 정도였다. 이들 관련 문헌을 뒤지기도 해보았으나, 하여튼 이인상도 김상숙도 백두산을 다녀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김상숙이 이 그림을 ‘장백산’이라며, ‘길게(長) 여백(白)’이라는 의미와 오버랩하여 백두산을 연상한 점이 흥미롭다. ‘장백산’을 거론한 것은 그만큼 당대 조선 사회에 백두산이 지닌 위상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백두산에 대한 문인들의 관심 증대는 홍세태(洪世泰)의 <백두산기(白頭山記)>를 비롯해 박종(朴琮)의 <백두산유록(白頭山遊錄)>, 서명응(徐命膺)의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 등에 잘 드러난다. 한편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 발달에서 현지 사생보다 추억해서 그리거나, 다녀온 이의 경치 설명을 듣고 그린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18세기 백두산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더불어 이인상의 <장백산도>를 조선의 백두산 그림 명작으로 손꼽을 만하겠다.

 

윤두서가 조선전도에 백두산답게 그려 

조선 후기 백두산에 관한 인식의 확산은 숙종38년(1712)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한 백두산 국경선 설정도 한몫하였을 터이다. 이는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 직후 가장 빠른 시기인 1712~1715년경에 제작된 조선전도로,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의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해남 녹우당)에 여실하게 드러난다. 이전 지도들보다 설산의 ‘白頭山’을 강조하고, 가장 백두산답게 표현한 점이 그러하다. 그만큼 윤두서가 백두산에 관심이 컷음을 시사하며, 백두산 형세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수집한 결과라 하겠다. 나는 이 지도에 대해 아래처럼 평가한 적이 있다. 

윤두서의 <동국여지지도>는 15~17세기 화원들의 조선지도를 정리해 를 완성했고, 18~19세기 지도 그림의 형식에 영향을 미쳤다. 또 중국과 일본에서 당시 최신의 지도를 복제해 새로운 정보를 제공했다. 정척과 양성지의 ‘동국지도’ 유형으로 손꼽히는 1557년경의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와 외곽선이나 표현형식이 유사하다. <조선방역지도> 형식의 조선전도를 기본으로 삼은 윤두서의 <동국여지지도>는 화가의 지도답게 해변을 따라 넓게 붓질한 바다의 푸른색 담채, 연녹색 산맥표현과 붉은색 도로, 도별로 구분한 지명의 설채 방식 등 섬세한 수묵 선묘와 은은히 어울린 파스텔톤 담채가 아름다운 지도이다. 윤두서가 실학자적 태도로 섬지방까지 세세하게 고증해 적은 지명이 눈에 띈다. 윤두서의 지도에서 돋보이는 것은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산맥의 표현방식이다. 16세기 중엽의 <조선방역지도>보다 한층 성숙된 묘사기량을 보여준다.

<조선방역지도>에서는 백두대간으로 흐르는 산맥의 표현이 가는 선묘에 먹점을 가한 일정한 형태를 갖춘 데 비해, 윤두서의 산맥은 먹선 위에 굵기와 농담의 변화를 준 청녹색으로 표현한 점이 다르다. 산맥의 흐름은 태백산맥과 높은 산의 부분을 굵고 진하게 채색하여 백두대간의 입체감을 살려내었다. 특히 백두산을 회화적으로 묘사한 점이 이 지도의 백미이다. 천지와 주변 봉우리에 흰 눈이 쌓인 설경이 사실감 난다. 화가가 그린 지도답다.

백두산에는 위쪽으로 하늘을 우러르는 사자 ‘仰天獅’의 바위형상을 그려 넣었다. 지명과 더불어 백두산 그림으로 표현한 첫 사례가 아닌가 싶다. 지금 장군봉으로 불리는 암봉일 법하다. 이와 유사한 형상은 1682년경 ≪동여비고≫(개인소장, 보물 제1595호) 지도첩의 함경도 백두산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장한 장수의 뒷모습을 닮은 큰 바위 봉우리가 설산 사이에 뚜렷하다. 이후에도 백두산은 천지를 둘러싼 설산 봉우리들로 표현될 뿐, ‘앙천사’나 인물형상의 봉우리 표현은 많지 않다. (이태호, 「조선 후기 문인화가 공재 윤두서의 지도-<東國輿地之圖>와 <日本與圖>, 그리고 중국지도 <天下大摠一覽之圖>」, 『한국고지도연구』10-2(통권20호), 한국고지도연구학회, 2018. 12.)

 현재 해남윤씨 종가인 녹우당에는 윤두서가 그린 이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와 <일본여도(日本與圖)>(이상 보물 제481호)가 전한다. 또 윤두서는 ‘중국여도(中國輿圖)’도 그렸다고 행장에 밝혀져 있다. 나는 근래 중국과 조선을 담은 <천하대총일람지도(天下大摠一覽之圖)>(국립중앙도서관 소장)가 <동국여지지도>보다 먼저 제작한 윤두서의 ‘중국여도’로 추정해본 적이 있다. (이태호, 「천하지도는 윤두서가 그렸다」, 『계간 고지도』 3, TMECCA KOREA, 2015. 봄.)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윤두서는 실재감 넘치는 정면 두상 <자화상>을 남긴 문인화가로 유명하고, 풍속화와 더불어 조선 후기 사실적 묘사의 회화방식을 이끈 거장이다. 자화상을 그리듯 치밀하게 묘사한, 윤두서의 지도들은 후배인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조선 후기 문인들의 국토 인식을 적절히 대변한다. 당시 집권층에 해당하는 서인 노론계열 정선이 조선 땅을 회화예술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재야 남인계열 윤두서가 지도에 관심을 쏟아 대조를 이루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회화사에서 신사조의 문을 열었던 것처럼, 윤두서의 <동국여지지도>는 조선 후기 지도의 신표현 형식을 이끈 조선전도라 생각된다. 신경준, 정상기, 김정호 등 조선 후기 지도제작의 영향을 미쳤다. 

이번 백두산 여정은 무우수아카데미(원장 이연숙)에서 진행한 ‘고구려 고분벽화’ 강좌에 포함된 것이었다. 10월 한 달 동안, 고구려와 고분벽화 개요/인물풍속도/사신도/산수화/남쪽의 고분벽화 등 주제별 5강으로 진행했다. 과정 중 연휴를 끼고 2019년 10월 3일부터 6일까지 3박 4일, 길림 집안 지역 고구려유적을 답사한 뒤 백두산에 올랐다. 24명이 함께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 장군총, 국내성, 산성하 고분군, 무용총과 각저총, 집안박물관 등을 둘러 보았다. 나는 2007년 여름에 이어 두 번째 여정인데, 유적지가 예전보다 정비되어 새로이 현장 사진을 찍었다. (도 7, 10) 옛 고구려 땅과 고구려 사람들을 기리며, <길림 대우산 아래 고구려 무용총과 각저총>(도 8) <호태왕릉에서 굽어본 압록강과 북녘 산세>(도 9) 등 40여 점을 스케치했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