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튜링론
01/22/2020
/ 박평종

 엥겔스는 <반듀링론>에서 유물론의 관점에 따라 생명의 기원을 단백질로 정의한다. 이 규정을 확장하여 통속적으로 표현하면 ‘생각하는 인간’의 근원인 뇌란 단지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영화 <한니발>에는 약물 처리하여 살아있는 사람의 뇌 일부를 칼로 도려내 프라이팬에 구워 먹게 하는 끔찍한 장면이 나오는데, 이 발상도 실상 뇌가 ‘고상한’ 사고의 원천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는 단백질일 뿐이라는 사실과 연결돼 있다.

우리는 ‘사고(thinking)’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그 근원은 무엇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뇌과학의 첨단 연구도 아직 만족스런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실상 오랫동안 신비주의가 사고의 메카니즘을 설명해 왔다. 예컨대 유기체와 기계의 구조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동물기계’론을 주장한 데카르트조차도 인간의 사고에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여 영혼의 존재를 포기하지 않았다. 데카르트를 비판하며 ‘인간기계’론을 개진한 라 메트리(La Mettrie)도 결국 영혼의 개념을 버리지 못했다. 즉 뇌는 물질이지만 ‘특별한’ 물질이어서 동물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영혼’의 존재에 의지하고 있다. 줏대도 없고 지조도 없는 사람을 ‘영혼’ 없는 자라고 부르지 않던가. 그러나 실상 ‘영혼’ 있는 자는 어디에도 없다. 영화 <사랑과 영혼>의 주인공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코지토’가 뇌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나 한편에서는 여전히 ‘영혼’이 주인이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이 단백질 내부에서 작용하는 알고리즘의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후자의 입장에 따르면 그런 알고리즘은 수식으로 표현 가능하니 컴퓨터도 뇌처럼 사고할 수 있다는 논리적인 결론에 이른다. 그럼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 튜링(Alan Turing)은 그럴 수 있다고 답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컴퓨터 프로그램 이론의 선구자 에이다 러브리스(Ada Lovelace)에 따르면 기계는 인간이 명령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다. 말하자면 기계는 인간의 명령에 복종한다. 그것이 프로그램의 정의이자 기계의 한계다. 뭐 인간이 기계를 만들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그런데 튜링은 다음과 같이 러브리스의 이론을 확장시킨다. 즉 컴퓨터에게 “스스로 사고하라”는 명령을 주었을 때 기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인공지능의 가능성이 여기서 시작된다.

<블레이드 러너>의 첫 장면에서 리플리컨트는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해 탈출하다 붙잡힌다. 반면 <엑스 마키나>의 에이바는 이 테스트에서 오히려 인간을 속이고 탈출에 성공한다. 전자의 경우 리플리컨트는 실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 된 정보에 입각하여 ‘계산된’ 답을 내놓을 뿐이다. 후자는 ‘임계점’을 넘어선 경우, 말하자면 이른바 ‘초인공지능’의 단계에 진입한 ‘가상의’ 설정이므로 논할 바가 아니나 영화는 기계가 ‘언젠가는’ ‘사고’를 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어쨌든 관건은 기계가 사고 할 수 있는지 여부다. <반듀링론>에 따라 단백질이 생명의 기원이라면 사고하는 생명, 즉 인간의 기원도 단백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튜링의 가설을 받아들여 기계가 사고할 수 있다면 금속도 사고한다고 해야 하는가? 물론 18세기의 급진적 유물론자이자 ‘인간기계’의 저자인 라 메트리는 물질이 사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유기체 외의 어떤 다른 물질이 사고할 수 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겸허히 물러난다. 솔직히 잘 모른다는 뜻이다.

금속으로 안드로이드를 만들었던 18세기의 보캉송(Jacques Vaucanson)은 기계의 한계를 깨닫고 ‘피가 흐르는’ 기계인간을 구상한 바 있다. 한편 보캉송에게 영향을 미쳤던 동시대의 생리학자 르 카(Claude-Nicolas Le Cat)는 뇌를 포함하여 인간의 신체가 그리 간단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피가 흐른다고 저절로 사고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스스로 사고하라”고 기계에게 백날 말한들, 빅테이터를 주고 스스로 학습하라고 프로그램 한다 해서 ‘사고’가 가능할지 잘 모르겠다. 연산과 사고는 다르니까 말이다. 불확실하다면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