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8-두멍암과 여주읍내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다섯 번째
01/0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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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다섯 번째 정수영의 여주 그림은 <두멍암과 여주읍내>, 그리고 수청탄과 대탄을 들러 다시 찾은 <여주읍치> 장면이다.

여주 입구 보통리의 고산서원을 보고, 정수영은 여주 관내로 향해 가던 중 양화촌을 지나 소양천과 여강 양갈레 물길이 만나는 여울에 도착했다. 여기서 ‘두멍암(巖)’을 배치하고, 그 왼편으로 ‘여주읍내(驪州邑內)’ ‘내아(內衙)’ ‘외아(外衙)’ ‘청심루(淸心樓)’ 지명을 밝힌 <두멍암과 여주읍내>를 화폭에 담았다. (도 1) 시작 부분인 두멍암 암벽을 따라 세로로 “양화촌을 지나 모질과 애질, 두 여울 양탄에 도착했다. 배를 올리기가 극히 어려웠다. 사람들이 두멍암이라 부른다. (過楊花村 到毛作愛作兩灘 上船極難 俗名두멍巖)”라고 써넣었다. 바위 이름을 ‘두멍’이라 한글로 쓴 점이 유별나다. ‘두멍’은 ‘물두멍’ 항아리나 방화용 철제 ‘드무’ 같은 큰 그릇을 뜻한다.

각진 짙은 먹선묘와 태점으로 묘사한 두멍암은 강변에 별도 풍경처럼 배치되어 있다. 그 왼편으로 두멍암과 여주읍 사이에는 소양천 위로 먼 산세가 파란 실루엣으로 보인다. 여주읍내 풍경에는 역시 팔작지붕 청심루가 가장 돋보인다. 그 오른쪽으로 외아인 객사가 위축되고, 내아인 동헌은 가운데 출입공간을 둔 대칭형이다. 관아의 여러 기와집 건물들이 초가 마을과 수평으로 어울린 정경이 담겨 있다. 농담 변화의 수묵 붓질로 강변 언덕과 모래사장의 흰 길을 드러낸 표현이 인상적이다. 강에는 크고 작은 배 세 척이 돗을 내린 채 물결 따라 움직이는 듯 설정했다.

양탄(兩灘)은 읍내를 끼고 남으로 흐르는 샛강 소양천이 여강과 만나는 곳이다. 이곳에 형성된 섬의 이름이 양섬이다. 현재 양섬에는 야구장을 비롯해 양섬지구공원이 조성되고, 여주북로인 세종대교가 지난다. 양섬 서쪽으로는 세종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이 위치한다. 소양천 입구 여강 강변에는 여주향토유적 제21호이고 여주8경으로 꼽히는 입암층암(笠巖層巖)이 있다. (도 2) 우리말로 갓바위이다.

층암 가운데 반듯한 바위에는 신륵사 건너편 ‘마암(馬巖)’과 마찬가지로 1870년 가을 10월에 여주목사였던 ‘이인응(李寅應)’이 쓴 ‘입암(笠巖)’이라는 해서체 글씨를 새겼다. 여기에 ‘이인응’보다 작은 크기로 영릉참봉을 지낸 ‘이복영(李福永)’과 두 형제, 지역 유지 ‘민영목(閔泳穆)’ 등의 바위글씨도 보인다. 단정한 해서체로 신분에 따라 글씨 크기를 달리하고, 글씨 새김 각자(刻字) 작업을 진행한 ‘간역(看役)’ ‘정해조(鄭海朝)’ ‘권복규(權復圭)’ 이름도 함께 등장한다. (도 3)

위치로 볼 때, 양탄의 물가 이 바위가 정수영이 그린 두멍암이다. 근 100년 사이에 두멍암이 갓바위로 바뀐 것 같다. 여기에서 북쪽으로는 추읍산과 용문산 능선이 겹쳐서 강 위로 떠 있고, 동남쪽을 향하면 정수영이 이어 그린 청심루(淸心樓)와 관아가 있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 4) 관아 자리에는 여주초등학교와 여주시청이 들어서 있다. 나도 정수영을 따라 소나무들과 어울린 입암과 강변 여주 시내 풍경을 화폭에 담아 보았다. (도 5)

이 <두멍암과 여주읍내> 그림 상단에 강세황의 아들 월루 강관은 “실제 경치 진경(眞境)이 아름다운 곳은 그림과 같다 하고 그림의 경치 화경(畵境)이 아름다운 것을 핍진하다고 말한다. 나는 여주 읍내를 보지 않았으나 그림으로 진경 헤아리는 법을 삼는다. 월루가 적는다. (眞境之善者曰如畵 畵境之善者曰逼眞 吾未見驪邑 常以畵而揣眞 月樓讚)”라며 정수영 그림을 상찬하는 듯한 화평을 써넣었다. 그러나 그림과 실경을 비교하면, 지나친 찬사에 불과하다. 정수영의 <두멍암과 여주읍내(驪州邑內)> 그림은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의 다른 실경화와 마찬가지로 두멍암의 형태도 닮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주읍내 묘사도 실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수영은 두멍암을 빼고 근거리서 본 <여주읍치(驪州邑治)>를 더 그렸다. (도 6) 이 화면은 <두멍암과 여주읍내> 뒤에 신륵사, 동대, 흥원창, 수청탄, 소청탄, 휴류암, 동대 적석, 신륵사 동대 그림에 이어 첨가한 것으로, 여주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림의 시작 부분에 ‘여주읍치(驪州邑治)’라 쓰고, 강변 언덕 위에 여주의 명소 청심루를 중심으로 읍치의 관아 건물들을 배열해 놓았다. 마을 초가들과 고목들이 어울린 관아 경치를 부감시로 풍경을 포착하며 정수영답게 수평구도로 펼쳤다. 정수영 특유의 미숙한 필치가 두드러진, 인적없는 여름 풍광이다. 음영진 갈필 터치로 모래톱으로 가는 길을 드러낸 언덕 아래, 강에는 돗을 내린 배 세척이 보인다.

정수영이 쓴 제목에 이어 강관은 “옛사람이 경강 마포에 살며 쓴 시에 ‘무수한 장사 배들이 앞뒤로 출발하니, 내일 아침이면 모두 여주에 도착하네.’라고 했다. 정박한 세척의 배도 분명 어제저녁 마포에서 출발해왔을 게다. (古人居京江麻浦 有詩曰 無數商舡前後發 明朝俱是到驪州 停泊三船 昨夕必自麻浦發來)”라며 포구의 정황을 부가해 놓았다.

그림의 중심 건물은 담장을 두른 객사의 팔작지붕 누각 청심루(淸心樓)이다. 이 오른쪽으로 옥색하게 그린 객사와 동헌이 보인다. 여주 관아가 사라지기 이전 옛 사진을 보면, 청심루는 그리 높지 않은 중층 누각이다. (도 7) 지금 청심루 표시석 앞에 서면, 여호를 굽어보며 강 건너 오른편 신륵사에서 왼편 용문산까지 북산 경치가 장쾌하다. (도 8) 여호와 산세의 장관은 입암이나 이포보에서 펼쳐진다. (도 9)

청심루는 이같이 강산이 어울려 일출과 일몰, 월출, 사계를 모두 즐길 공간이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을 비롯해 조선의 많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명소이다. 중국 악양루나 황학루가 부럽지 않은, 남한강 최고의 정자로 손꼽힌다.

이색은 이런 여호 풍광을 “천지는 끝이 없고 인생은 유한하네, 광대한 뜻 있으나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여강(驪江)의 한 구비를 이룬 산은 그림 같고, 반은 단청 반은 시이네. (天地無涯生有涯 浩然歸志欲何之. 驪江一曲山如畵 半似丹靑半似詩.)”라며 ‘반은 시이고 반은 그림’ 같다고 표현했다. (李穡, 『牧隱集』, 驪江迷懷) 또 이포(梨浦)에 살았던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1478~1543), 이 여주를 즐기며 청심루 풍경을 “겹겹이 안개 물살이 가까이 푸르게 넘실대고, 두 강 사이 우뚝 솟은 봉우리가 멀리 파랗게 보이네(拍砌煙波臨綠漲 際川嵐岫望靑堆)”라고 읊었다. (金安國, 『慕齋集』)

 

* 지금까지 5회에 걸쳐 고산서원, 두멍암(입암)과 여주읍내, 신륵사, 흥원창, 수청탄과 소청탄, 휴류암(마암), 신륵사 동대, 여주읍치 등 정수영이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남한강 물길 따라 그린 여주지역 여정을 살펴보았다. 여기에 이어진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 후반부, 곧 북한산 임진강 금천 관악 삭령 등지의 명소 그림에 대하여는 시차를 두고 소개하겠다. 6년 전인 2013~4년에 그 후반부 장소인 임진강과 연천지역을 답사한 적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사진만 찍었기에 다시 찾아 스케치를 병행하기 위함이다. 또 한강의 시작 부분도 재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기도 하다. 정수영이 이곳을 찾았던, 봄꽃 피는 4~5월쯤을 되지 않을까 싶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