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7-고산서원, 여주관아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네번째
12/18/2019
/ sketch

 

 지난번에 언급했듯이 대탄에서 본 용문산 능선은 뾰족한 삼각형 주봉으로 유난하다. 용문산(1157.1m)은 어디서 보아도 눈에 띄는 남한강의 으뜸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이 경관은 남한강을 따라 여주까지 이어진다. 지금 여주보에서 그 실루엣의 위용이 가장 기세 넘친다. 그 아래로 펼쳐진 추읍산(583m) 산세도 원경 용문산 능선과 평행을 이룬 게 장관이다. (도 1, 2) 석양이 열린 풍광을 최고로 연출한다.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 이번에 소개하는 강변 풍경화는 여주 여행의 첫 장면인 <고산서원(孤山書院)>이다. (도 3) 맨 처음 소개한 <신륵사(神勒寺)>, 두 번째 <휴류암(鵂鶹巖)>, 세 번째 <흥원창(興原倉)>과 <소청탄(小靑灘)> <수청탄(水靑灘)>에 이어 네 번째이다.
정수영이 ‘이릉(二陵)’ ‘우미천(牛尾川)’ ‘양주구계(楊州龜溪)’ ‘용당우(龍堂偶)’ 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능선이 길게 이어진 풍경의 ‘미호(渼湖)’ 등을 거쳐 남한강을 거슬러 여주에 왔다. 우미천 강가의 배는 돗을 올리지 않은 채 출발하는 듯한데 정수영 한 사람만 보인다. 미호에서여주 고산서원으로 연계되는 사이의 배에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이동하며 친구들을 태워가며 선유를 즐긴 모양이다. 다시 보니 지난번 <휴류암도>에 다섯 명이 탄 배는 돗이 없어 먼 거리 이동용이 아닌 목선으로, 여주 관아에서 별도로 빌린 듯하다. 

정수영 일행이 여주에 처음 도착해서 찾은 곳은 대신면 보통리에 있던 고산서원이다. 명승보다 존경할만한 인물을 찾는 여정이었음을 보여주는 행적이다.
고산서원은 금사면에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1478~1543)을 봉안한 기천서원(沂川書院)과 함께 여주의 양대 서원이다. 김안국은 중종 때 신진사림파 문인이면서, 조광조의 급진적 주장에 동조하지 않아 부침이 크지 않아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금사면 이포리에 범사정(泛槎亭)을 마련하고 여주의 아름다운 경치 곳곳을 유람하며 많은 시문을 남겼다. (여주박물관 학술총서 03, 『驪州牧古蹟幷錄成冊』, 여주시·여주박물관, 2019.) 또 여주에는 세종의 영릉(영릉)과 효종의 영릉이 조성되었고, 1785년(정조 9) 9월 5일에 세운 서쪽 효종의 녕릉(寧陵)을 향해 설립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의 사당 대로사(大老祠)가 설립되었다. 정수영 일행이 이 ‘대로사’에는 무관심했는데, 역시 서인-노론계와 반대파 인사들의 정파적인 행위로 여겨진다.
고산서원은 숙종 12년(1686) 고려 말 석탄 이존오(石灘 李存吾, 1341~1371)와 조선 중기의 문신 조한영(曺漢英)의 덕행을 추모하며 세워졌으며, 1708년(숙종 34) 고산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여주 고산(孤山)을 아호로 쓰던 이존오는 공민왕 시절의 젊은 관료로 신돈 세력에 분개하며 저항한 문인으로 꼽힌다. 장사에 유배되기도 했고, 이른 나이 정계를 떠나 공주 석탄(石灘), 여주 고산에 은둔하다가 31세에 세상을 하직했다. (『석탄집(石灘集)』;『여주목읍지』 인물편, 영조 36년 1760) 대원군의 서원철폐령(1871)으로 철폐되었다. 

정수영의 여주 <고산서원(孤山書院)> 그림은 “고산 이존오 서원이네(孤山 李公存吾 書院 云)”라는 제목을 시작한다. (도 3) 그림에 인적이 없으나, 그 오른쪽 <미호(渼湖)> 그림 끝자락에 왼쪽으로 이동하는 돗배가 두 화면을 연계시켜 주는 듯하다. 화면 오른편에 강변 가까이 홍살문과 서원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당찬 기와집 본원과 좌우 동, 서재를 중심으로 사당이 배치된 전형적인 서원구조이다. 이런 모습 아래에 강관은 “이존오는 장사에 유배되었다. 지금은 무장이다. 이처럼 좋은 서원 건물은 비슷한 것도 없을 게다. (李謫長沙 今之茂長 似無如此好院宇)”라고 화면 아래에 써넣었다.

서원 주변에는 듬성듬성 여름 수목들이 자라고, 홍살문 오른쪽 강변에 초가집들이 정겨운 마을에 어울려 있다. 서원 왼편으로도 작은 마을이 들어서 있다. 마을의 낮은 산 능선 위로 주변보다 진한 먹색으로 표현된 ‘추읍산(趨揖山)’이 크게 과장돼 우뚝하고, 그 왼편으로 용문산이 상당한 근거리에 등장해 있다. 이런 산세에 대해 정수영은 “갈산(현재 양평군 양근리에 있다.)을 지나치며 역주해 남하하면, 아름다운 경치 가까이 즐기기엔 감당되지 않는다. 보통리에 이르면, 장중한 형세가 시작된다. (自葛山看過 則歷走南下 不堪愛翫 至甫通 始有典重之勢)”에 이어 “용문산의 아름다운 경치 손에 잡힐 법하다. (龍門秀色 亦可攬結)”라는 행서 제발을 써넣었다.

<고산서원> 그림과 현재 풍경은 크게 다르다. 먼저 강관이 자랑삼았던 고산서원은 조선말 철폐된 이후 터만 뎅그러니 보통리 마을의 서북쪽 구릉에 방치되어 전한다. (도 4) 낡은 대로 설치된 표지판으로 보아 발굴한 뒤 복원할 예정이었던 모양인데, 표시판은 글자를 읽기 어려울 정도로 변색해 마을 쓰레기더미에 있다. 서원의 하마비(下馬碑)는 같은 마을의 김영구 가옥(중요민속문화재 제 126호)에 옮겨져 있다. (도 5)
고산은 그리 높지 않은 구릉이고, 서원 터 아래는 소규모의 마을 논이 이어진다. (도 6, 7) 지금의 실경은 정수영의 그림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여강 북쪽 강변에 둑을 쌓았기에 물길과 지세가 약간 달라졌겠는데, 그래도 현재의 지형상 그림처럼 서원이 강가에 붙어 있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마을 논 아래 둑 도로 사이 샛강이 잘 말해준다. 정수영이 서원을 강에 붙어 있던 것으로 착각한 게 아닌가 싶다. 이는 신륵사 동대 풍경을 여러 차례 반복해 그리면서 도리어 삼층석탑을 오층으로, 한 비석을 여러 기로 그렸던 오류와 유사하다.
또 서원 아래에서 추읍산이나 용문산경이 눈에 들지 않는다. 마을 논 건너 멀리 떨어져야 산 정상이 살짝 보일락말락 할 정도이다. 추읍산과 용문산 풍경을 그림처럼 볼 위치는 열린 공간이어야 가능한즉, 정수영은 고산서원에 진입하기 전에 여강 입구인 이포에서 뒤돌아본 이미지를 합성한 셈이다. 이런 점은 정수영이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의 실경화를 그림에 현장 스케치와 더불어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법처럼 현장을 다녀온 이후 기억을 되살려 그렸음을 알려준다.

(이태호, 「實景에서 그리기와 記憶으로 그리기」-朝鮮後期 眞景山水畵의 視方式과 畵角을 중심으로, 『미술사연구』 257, 한국미술사학회, 2008.3.)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