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석의 사진살롱 27 – 슬라이드쇼의 옛 이름 환등회(幻燈會)
12/05/2019
/ 박주석

동아일보 1921년 8월 6일자에 실린 백두산 사진

백두산은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발원지이자 성산(聖山)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왜정 때 민족지라는 기치를 내걸고 창간한 『동아일보』가 백두산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관련 기사를 쓰고 행사를 만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창간한 다음 해인 1921년 신문사의 전체 역량을 투입해 백두산 관련 기획을 했습니다. 사진기자를 포함하는 ‘백두산탐험대’를 구성해서 파견했고, 특히 백두산의 경치를 찍은 사진을 신문에 싣는 보도는 가장 중점을 둔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찍은 사진을 이용한 다양한 문화행사를 열기도 했습니다. 1921년 8월 27일자 3면의 사고(社告)와 기사는 백두산 기획의 전모를 짐작할 수 있는 재미있는 자료입니다. 

“(전략)….이번 본사 특파원 민태원 씨와 사진반이 친히 이 백두산의 거룩한 경치를 탐험하였음은 본사의 자랑인 동시에 우리 조선 사람의 자랑이다. 민 씨는 그의 날카로운 눈으로 이 성산의 모든 신비와 모든 자취와 모든 자랑을 역력히 탐험하였으며, 사진반은 그의 독특한 기술로써 이 성산의 장절쾌절(壯絶快絶)한 모든 경치를 촬영하여 가지고 일전에 무사히 돌아왔다. 본사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금 27일 오후 7시 반에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백두산 강연회를 열게 되었다. 조선역사연구에 조예가 깊은 권덕규 씨의 ‘조선역사와 백두산’이라는 강연을 위시하여 민태원 씨의 이번 백두산을 탐험한 모험담과 감상담이 있을 터이며 다시 본사 사진반의 촬영한 아직도 세상에서 보지 못한 신기하고 장엄한 30매에 이르는 사진을 환등으로 보일 터인데 이야말로 앉아서 백두산을 잘 구경하는 동시에 백두산에 대한 지식을 잘 얻는 때이다.(하략)….”

동아일보 1921년 8월 27일자 3면, 백두산강연회 사고 및
환등행사 관련 기사

백두산 탐험대가 촬영한 사진은 몇 회에 걸쳐 신문에 연재했고, 사진을 환등(幻燈)으로 만들어 독자들에게 직접 보여주는 백두산 강연회와 환등회를 개최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여러 차례 기사와 사고를 통해 대대적으로 알렸고, 위의 기사에서처럼 8월 27일 종로 YMCA에서 행사를 열었습니다. 행사 명칭은 ‘특사환등(特寫幻燈) 사용(使用) 백두산강연회’였습니다. 여기서는 백두산의 민족적 의미를 다룬 조선역사 전문가(권덕규)의 강연과 탐험대의 대장(민태원)의 체험담 발표가 있었고, 더불어 30여장으로 만든 사진 환등회도 같이 진행했습니다. 백두산에서 찍은 ‘신기하고 장엄한’ 사진을 환등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초청한 신문 독자들에게 공개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환등회가 열리기 시작한 때는 대개 1907년 정도 부터입니다. 사료를 보면 1907년 서울의 종로에 있던 황성기독교청년회관(皇城基督敎靑年會舘) 즉 서울YMCA에서 처음 열렸다고 합니다. 정식 이름은 <환등대회(幻燈大會)>이었는데, 기록은 ‘남녀노소 갈릴 것 없이 모여든 사람들 모두가 이 진기한 구경거리 앞에서 넋을 빼앗기다시피 했다’고 전합니다.

이후로 전국에서 다양한 주제와 형태로 환등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오락거리이기도 했고, 교육용으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환등행사가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자 당시 태황제로 있던 고종도 궁궐에서 환등회를 열어 즐겼습니다. 강제병합 직전인 1910년 4월 29일자 『대한매일신보』는 고종의 환등회 참석 기사를 다음과 전하고 있습니다.

“궁정휘보(宮庭彙報) 환등회어람(幻燈會御覽)

지난 이십칠일 밤에 덕수궁 안에 새로 건축한 석전에서 환등회를 하였는데 태황제 폐하께옵서와 황귀비 전하께옵서 친림하옵시고 승년부총관 조민희 등이 배종하였다더라.”

당시 고종은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양위하고 태황제로 있으면서 덕수궁에 머물고 있었는데, 궁내에 새로 지은 석조전(石造殿)에서 환등회를 열어 친히 참석해 구경을 했습니다. 이후로 영화가 들어오고 다양한 시청각 교육 방식이 들어오기 전까지 환등기(幻燈機)는 유성기(有聲機)와 더불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각적 즐길거리였고 최신의 지식을 손쉽게 전달하는 매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7월 3일자 잡보에는 「유성기로 권면하나」라는 제목으로 “학부에서 각 학교 학도를 권면하기 위하여 백주에 사용하는 환등기계와 유성기를 사왔는데 금일 오후 열시에 학부에서 실지 시험을 설행한다더라”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외에도 당시부터 1920년대까지의 신문에는 환등과 환등기에 대한 기사가 수도 없이 실려 있습니다. 『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4일자 잡보에는 “조산부(助産婦) 양성소에서 해산(解産) 구호하는 현상과 위생에 필요한 환등회를 명일 오후 칠 시에 종로 청년회관에서 설행한다더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임산부의 분만을 돕는 산파를 양성하는 기관에서 환등을 사용해 교육을 실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교육용으로 환등기를 많이 사용했음을 알려줍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미 근대적 의미의 시청각교육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낯선 이름이 ‘환등기’ 또는 ‘환등회’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슬라이드프로젝터’이고 ‘슬라이드 쇼’입니다. 현재는 디지털 데이터를 프로젝터로 비추는 방식인 것이고, 디지털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슬라이드 필름을 코닥과 같은 회사에서 만든 프로젝터에 끼워 비추는 방식과 같은 것입니다. ‘환등’은 유리판에 사진이나 삽화를 입혀 가스등이나 전구의 빛으로 스크린에 비추는 방식의 우리식 이름이었습니다. 사진 환등은 주로 흑백이었고, 그림이나 도식 같은 경우는 컬러도 있었습니다. 서양에서 사진 환등의 학문적 명칭은 ‘Monochrome Transparencies on Glass’이고 일반적으로는 흔히 ‘랜턴슬라이드(Lantern Slide)’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다음 회에는 ‘랜턴슬라이드’와 우리나라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 올리겠습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