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정의 문학사의 한 컷 5 : ‘찰나’의 마술, 그 순간의 기억
11/27/2019
/ 신수정

눈을 감았다 떴다. 똑딱.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 돌았을 것이다. 또 눈을 감았다 떴다. 똑딱. 그건 딸이 어렸을 때 내게 알려준 거였다. 엄마,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에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나 돈대. 딸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눈을 감았다 뜨곤 했다. 눈 깜빡할 시간. 그 시간에 빛이 지구를 몇 바퀴나 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고민은 하찮게 느껴진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불이 켜진 집이 하나 보였다. 불이 켜진 저 집에 누가 살까 상상해보았다.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한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이사를 왔을 거야. 너무 좋아 차마 불을 끄지 못하는 거겠지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했을 때 나는 딸과 함께 거실에서 이불을 깔고 잠을 잤다. 엄마, 너무 넓어 잠이 안 와. 딸이 말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거든 더 크고 더 넓은 곳에 가서 살렴. 내 말대로 딸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그곳에 정착을 했다. (… 중략 …) 어린 시절만 생각하면 어머니가 등목을 해주던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세 들어 살던 집의 뒤뜰에는 우물이 있었고 한 여름이면 나는 거기서 등목을 하곤 했다. 주인집 여자가 오일장에 갔다가 머리핀을 사다준 적이 있었는데, 주인집 아들이 그걸 빼앗아 우물에 버렸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등목을 하지 않았다. 만복이 나쁜 놈. 머리핀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우물에다 얼굴을 박고 소리를 질렀다. (… 하략 …)

 -윤성희, 「어느 밤」

윤성희에게 시간은 느닷없다. 그것은 언제나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다. 이때, 출현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간이 출현한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의 일직선적 흐름, 예컨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의 이동을 설명하는 언어라고 하기 어렵다. 차라리 그것은 우리가 그러하다고 믿고 있는 시간의 방향성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 미래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갑작스럽게 침범하는 시간을 가리킨다고 할 만하다. 수학여행을 가던 십대 소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교통사고(「어쩌면」, 『웃는 동안』, 문학과지성사, 2011)나 길을 걷다 담벼락이 무너져 그 아래 깔리는 바람에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사고(「가볍게 하는 말」, 『베개를 베다』, 문학동네, 2016) 등 돌발적인 사고가 그녀의 소설을 추동하는 주요 모티프로 자주 활용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윤성희의 소설에서 시간은 항상 우연한 사건의 도래와 더불어 비로소 우리에게 임재한다, 불쑥, 다시 한 번 느닷없이.

「어느 밤」 역시 이 시간의 플롯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밤중에 집을 나와 킥보드를 타던 ‘할머니’가 사고를 당해 쓰러지게 되는 ‘사건’은 이 소설을 구성하는 핵심축이다. 이 할머니는 어쩌다 ‘킥보드’ 따위를 타게 되었는가. 일주일 전 그녀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파란색 스티커에 ‘장민지’라고 적혀 있는 킥보드를 발견하고 그것을 훔쳐 놀이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125동 자전거 보관대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밤마다 남편 몰래 나와 조심조심 킥보드를 탄다. 생각해보라, 할머니가 킥보드를 훔치는 장면을. 어쩌면 이 소설은 이 장면과 더불어 탄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할머니’와 ‘킥보드’라는, 그것도 ‘훔친’ 킥보드라는 설정은 이 소설의 ‘사건’을 가볍게 들어올리는 지렛대 역할을 한다. 윤성희의 다른 많은 소설처럼, 이 소설의 ‘사건’이 그 느닷없는 참변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어두운 구석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한밤중에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어두운 거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다리를 다쳐 누워있는 화자의 상황이 놀랍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위기’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안타까운 상황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그런 상황에서의 비극성을 알지 못한다. 그 대신 이 소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어떤 동화적 명랑성이다. ‘킥보드를 타던 할머니’가 자신의 사고를 ‘얼음땡 놀이’로 비유하고 있는 대목을 보라. ‘얼음’하고 외치는 순간 움직이지 않다가 ‘땡’이라고 하는 순간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는 아이들 놀이는 윤성희의 소설에 와서 삶의 비극성을 대체하는 ‘마술’로 자리 잡는다. 세 달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동네 동사무소 마술교실의 선생님이 이야기해준 대로 “마술에서 기술보다 더 중요한 건 유머”이기 때문일까. 윤성희는 우연한 사고로 점철되는 삶의 비참으로부터 ‘유머’를 길어 올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비참의 강도나 밀도가 약해서가 아니다. 상황은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이 더 높다. 생은 도처에 ‘얼음’ 투성이다. ‘땡’ 하고 외쳐줄 친구들은 모두 저녁밥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가고 ‘나’만 홀로 남아 있는 절망적인 상황은 어쩌면 우리 삶의 상수일 수도 있다. 「어느 밤」의 그녀가 한밤중에 킥보드를 타러 나오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와 무관하지 않다. 그녀는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더 잔소리와 욕이 느는 남편을 견디기 어렵다. 남편과 아침밥을 함께 먹는 게 힘들고 언제부터인가는 남편이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남편이 “군고구마를 품에 안고 오던 어느 겨울밤. 그런 날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도” 그런 감정들을 추스르기 쉽지 않다. 그녀는 “정갈하게 늙고 싶”기 때문이다. 이 ‘정갈한 삶’에 대한 염원은 그녀가 오랜 시간 추구해온 욕망이라고 할 만하다. 그녀는 댐 공사 현장에서 인부로 일하다가 다리를 다친 뒤 술주정뱅이가 된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그가 잠든 사이 약을 탄 술을 가져다두어 아버지의 죽음을 유도한 이력이 있다. “아버지가 고등학교를 보내주지 않아서 앙심을 품은 게 아니”라 오로지 “엄마가 찬장 안쪽에 숨겨둔 약을 버리지 않아서,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달고 살아서, 그래서 그랬”을 뿐인데 엄마는 종교에 미쳐 그녀를 다시 보지 않으려 한다. 가족과의 인연이 끊긴 채 라디오 조립공장에 다니며 고아와 다름없는 삶을 영위하던 그녀에게 다시 ‘가족’을 선사한 것은 남편이다. ‘왼쪽 엄지손가락이 구부러진’ 남편은 공장에도 다니고 도배 일도 하고, 말년엔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며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불쑥불쑥 치미는 남편에 대한 혐오를 어쩌지 못한다. 그가 점점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날’이면 그녀는 신경 써서 밥상을 차리거나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라는 시조를 중얼거린다. 그조차 더 이상 해법이 되지 못할 때, 마침내 ‘킥보드’가 눈에 띈다. ‘킥보드를 타는 할머니’는 그렇게 우리에게 왔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모티프는 그 신선하고 발랄한 동화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기나긴 시간의 축적에서 비롯된 여성들의 아픔과 절망, 그 고통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의 역사. 고등학교를 보내주지 않는 아버지, 술만 마시면 가족을 두드려패는 아버지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엄마, 그 엄마의 눈물을 무력하게 지켜보다 그녀를 위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의 술에 약을 타 넣는 딸 등 여성적 삶에 장기지속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이 모티프들은 이 소설의 육체를 형성하는 살이라고 할 만하다. 이들이 흥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들의 역사는 아직도 제대로 재현되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티프들은 지나치게 너무 자주 수많은 서사에서 익숙하게 반복되어온 나머지 애초의 놀라운 경이감을 상실하고 낡아버린 측면도 없지 않다. 윤성희는 이 무겁디무거운 여성적 장기지속의 시간을 ‘갑작스럽게’ 정지시키고 ‘사건’의 도래와 더불어 도약하는 ‘찰나’의 순간을 잡아챔으로써 이 장기지속적 모티프에 함축된 태초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세상 밖으로 길어올린다. 「어느 밤」에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여러 겹의 시간대들, 이를테면 ‘킥보드를 훔친 다음 날’, ‘동사무소에서 마술을 배우고 난 그 다음 날’, ‘남편과 산악회 총무의 장례식장에 간 그 다음 날’, 그리고 마침내 ‘킥보드를 타다 넘어지게 되는 그날 밤’ 등 이 소설에 기입된 나날들을 단 한 순간의 ‘어느 밤’을 예비하기 위한 수없이 ‘많은 밤’들 가운데 한 순간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밤’에는 우리 인생의 수천수만의 국면들, 그 겹겹의 서사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순간이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도는 시간과 맞먹는다는 진술이 성립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윤성희는 말한다. “똑딱” 하는 그 찰나는 무수히 많은 ‘어느 날’들의 축적, 혼재, 그것들 사이의 뒤엉킴이 폭발하는 어떤 시간, 어떤 순간이라고.

우리는 이 시간을 『햄릿』을 읽는 데리다를 흉내 내 ‘시간의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는 시간’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뒤틀린 시간’과 더불어 비로소 우리의 실존은 제도화된 달력의 순서에 따라 하루 또 하루 이어지는 현재의 연쇄로부터 벗어나 하나의 ‘사건’으로 뚜렷하게 각인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밤」이 선사하는 감동은 여기에서 나온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결정적인 ‘그날 밤’으로 만드는 바로 그 ‘어느 밤’에 대한 재현. 윤성희는 어머니에서 딸로, 다시 그 딸에서 딸로 이어지는 여성의 시간을 단 하나의 순간, ‘어느 밤’의 결정적 찰나로 제시함으로써 지리멸렬한 일상 속에 반짝이고 있는 사금파리 같은 삶의 비의를 건져 올리는 데 성공한다. ‘어느 밤’이 그렇고 그런 ‘어느 순간’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찰나’의 비약적 도래를 모르지 않는 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느닷없는 참변도, 남편에 대한 혐오도, 폭력적인 아버지를 향한 살부 충동도 모두 ‘얼음땡 놀이’ 같은 것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땡’하는 소리와 더불어 ‘얼음’은 사라지고 다시 ‘물’로 흐를 수 있다는 것, ‘어느 밤’은 우리가 잊고 있던 이 기억을 소환하는 ‘마술’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는 그 마법과 더불어 ‘얼음’으로 가득 찬 삶이 어느 순간 ‘땡’ 소리와 더불어 환희로 뒤바뀌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킥보드를 타는 할머니’가 ‘독서실에서 독서를 하지 않는 청년’의 ‘얼음’을 ‘땡’하고 풀어준 것처럼! 「어느 밤」은 바로 그 찰나에 새겨진 기억을 망각으로부터 구제해 보여주었다. 킥보드의 속도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신수정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