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석의 사진살롱 26 – 여성사진사 향원당(香園堂) 김진애(金眞愛)
11/20/2019
/ 박주석

1907년 9월 7일자 『大韓每日申報』 광고

옆의 광고를 요즘 말로 읽어보면 “천연당사진, 특별 염가 불변색, 부인은 내당에서 부인이 촬(撮)영하고 출입이 매우 편함(甚便)함. 포덕문 밖에서 황단으로 향하는 신작로 변, 김규진”이란 내용입니다. ‘부인은 내당에서 부인이 촬영한다’는 말을 보면 이미 <천연당사진관>은 사진을 찍는 ‘여성사진사’를 1907년 9월 이전부터 고용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천연당사진관>이 여성사진사를 두고 있고, 때문에 여성들이 사진을 찍는 일을 거리낄 필요가 없다는 요지의 기사와 광고는 그 이후에도 같은 신문에 두 번이나 더 나오는데 소개합니다.

1907년 9월15일자 『大韓每日申報』 기사 : “전 시종(侍從) 김규진씨 천연당 사진관을 개설 영업한 사(事)는 전보(前報)에 기게(己揭)어니와 비단 염가술교(廉價術巧)라 내빈외객의 촬영 처소를 각설하고 부인 촬영 시에는 부인이 환술(幻術)하여 남인은 일절부득 출입하니 내외 엄숙한 고로 근일에 부인 촬영자와 내외 병탑자(幷搭者)가 일일 답지한다더라.” 

1907년 10월25일자 『大韓每日申報』에 게재된 <천연당사진관> 광고 : “포덕문 밖 신작로 변 김규진 집에 천연당사진관을 건설하고 부인네 사진을 백히옵는데 값도 저렴하고 사진 또한 정교하며 내외 엄숙하고 부인 사진은 여인이 백히오니 사진 백히기 원하시는 부인네는 본당에 왕림 면의 하시옵. 부인 사진사 향원당 고백.” 

사실 우리나라에 사진 도입기인 1880년대 무렵만 해도 여성을 카메라 앞에 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내외법으로 인해 남성 사진사들 앞에 얼굴을 들어내지 못하는 인구의 절반이 넘는 여성은 사진을 찍을 수 없었습니다. 서울시에서 1979년 발간한 『서울육백년사』에 따르면, 1890년경 서울의 총인구는 193,136명이었고, 그 중 여성 인구는 98,767명이었습니다. 전국적으로는 총인구 6,607,604명 가운데 여성 인구는 3,271,018명으로 거의 절반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사진관으로는 엄청난 잠재 고객을 두고 있었던 셈입니다. 여성사진사의 육성과 채용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사진관에서는 이러한 관습으로 격리되어 있는 엄청난 잠재된 여성 고객을 사진관으로 끌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있습니다. 일본인 사진사가 운영하던 <生影館>은 1903년 12월 『皇城新聞』에 “부인사진을 찍을 때는 여사진사가 촬영한다”는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는 등 여성 사진촬영을 위한 여러 방법들을 마련해 선전했습니다. 

돌아가신 한국사진사 연구자 최인진 선생께서는 한국의 초기 사진의 역사를 연구하셨고, 특히 <천연당사진관>에 관한 책을 내실 정도로 구한말 사진관 문화 연구에 심혈을 쏟았습니다. 그 중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가 ‘향원당’이란 호를 쓰는 여성사진사의 존재 유무 그리고 존재한다면 실체가 누구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30~40년 추적을 했지만 그 이상의 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선생의 염원이 통했는지 사모님께서 권사로 시무하시고 있는 <새문안교회> 기록을 살필 기회가 있었고, 『새문안교회 100년사』에 실린 「새문안교회 교인의 사회 경제 분석(1907-1914)」이란 글에서 향원당의 단서를 찾았습니다. 

이 글은 1907년 11월부터 1914년까지 <새문안교회> 교인 657명을 대상으로 직업과 성별, 교육정도, 연령, 신력 등을 조사한 기록물에 관한 논문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전체 교인 중 근대적 상공업 및 전문업을 가진 신도는 총 184명이고, 업종별로 보면 “매약업 : 남6명 여4명, 공업 : 남6명 여3명, 전당포 : 여1명, 인쇄업 : 남4명 여2명, 재봉업 : 남2명, 고용근로자 : 남27명 여12명 등이 등록하고 있었고, 그 외 의사 : 남2명 여1명, 교사 : 남16명 여6명, 언론인 : 남2명 여1명, 회사원 남3명 여1명, 서기 : 남3명 여1명, 외국인사무원 : 남2명 여1명, 주사 : 여1명, 양복점 남2명 여1명, 변호사 남2명 여1명, 사진사 : 여1명, 매서 여1명, 사업 여1명, 학교사무원 남2명, 시장조합 : 남1명, 출장소 : 남1명, 토지조사국 : 남2명 여1명, 병정 : 여1명, 학도 남141명 여75명 등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 사진사(寫眞師)는 여자 1명으로 명기되어 있습니다. 사진사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고, 더불어 구한말과 일제 초기 서울 시내에 살던 사람들의 직업군을 파악하기에도 매우 좋은 기록입니다. 

선생께서는 1907년부터 1914년간에 새문안교회 교인 중에 사진업을 직업으로 한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의외였으며, 남성사진사도 희귀하던 시대에 여성사진사의 존재는 더더욱 깜짝 놀랄 사실이었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기록을 더 찾기 시작했고, 교회에 보관 중인 『새문안교우 문답책(1907년 -1914년)』에서 해강 김규진의 부인 김진애(金眞愛, 1868~1949)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부인사진사 ‘향원당’의 정체가 밝혀진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사진사입니다. 『새문안교우 문답책』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생의 역사적 사실 고증을 위한 집념과 열정이 성과를 거둔 순간이었습니다.

『새문안교우 문답책 (1907년~1914)』 중 맨 위에 있는 김진애 항목

문답책의 김진애 항목 기록의 지면입니다. 위 내용 중 김진애 부분을 정리해서 소개하면 “성명 : 김규진의 부인 진애, 연세 : 40, 몇 달 믿음 : 2년, 전 문답 한 때 : 그 전은 두 번 문답, 영업 : 사진 박는 거시오, 식구의 믿음 어떠함 : 6인 모두 믿음, 글의 유무식 : 언문, 별도로 기록할 것 : 잘 믿고 행하고 있소. 세례 여부 : 진애 세례” 로 되어 있습니다. 김진애는 김규진의 부인으로 마흔 살이고 사진 박는 것을 직업이라고 했으며, 새문안교회에 2년 동안 다닌 세례교인이라는 것과 가족은 전체 여섯 명으로 대부분 하나님을 믿고 신심이 깊으며, 한편으로 한글을 읽는 능력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후 향원당 김진애와 남편 해강 김규진의 행적을 추적해서 다음과 같이 두 분의 행적을 요약 정리했습니다. 최인진 선생의 정리 내용입니다.

“김진애(金眞愛); 김규진의 처로 1868년 2월 2일 출생, 본관은 경주, 부 김계옥 모 박서여 사이의 장녀로 출생했다. 원래는 김성녀(金姓女)였으나 진애로 개명해 진애가 본이름이 되었다. 1949년 12월 3일 13시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177번지에서 사망.

배우자 김규진(金圭鎭); 1868년 4월 14일 김기범(金起範)과 이성녀(李姓女) 사이에 2남으로 평남 중화군 상원(祥原)면 흑우(黑隅)리 4통 4호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김진애와 혼인, 천연당사진관, 고금서화관을 개설, 서화가로 활동하다가 청량리 72번지에서 1934년 4월 17일 사망.”

위 사실을 종합하면 김진애는 천연당사진관 김규진의 부인으로, 호를 향원당이라 했으며, 1907년 <천연당사진관> 개관 무렵부터 부인사진사로 일했고, 새문안교회 교인 신상 조사를 실시했을 때는 “사진 박는 것이오”라는 직업을 내세울 수 있을 정도의 자부심과 실력을 갖춘 한국 최초의 여성사진사였습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