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6-남한강 흥원창, 수청탄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세번째
10/22/2019
/ sketch

 지난번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강변풍경 <신륵사(神勒寺)> <휴류암(鵂鶹巖)>에 이어, 이번에는 두 그림 사이에 배치한 <흥원창(興原倉)> <소청탄(小靑灘)>과 <수청탄(水靑灘)> 세 실경도를 소개한다. 세 장면은 순서대로 겹치면서 이어 그려져 있다. (도 1)
 <휴류암> 그림의 화제에 밝힌 대로, 정수영은 1796년 여름 동갑내기 윤일 이영갑(允一 李永甲, 1743~?)과 후배인 학이 임희하(學而 任希夏, 1745~?) 두 문인과 남한강 선유를 즐기던 중, ‘헌적별업(軒適別業)’이 있는 수청탄에서 헌적 여춘영(軒適 呂春永, 1734~1812)과 합류했다. 여춘영은 정수영과 금강산 여행도 함께했을 정도로 도탑게 교우한 선배로, 수청탄의 강변별장은 선대부터 내려온 것이다. 임희하는 풍천임씨로 여춘영의 부인이 임희하의 아저씨뻘 임박(任璞)의 딸이니, 두 사람은 먼 사돈 간이다. 임희하는 재간 임희성(在澗 任希聖)의 사촌인즉, 이들이 여주를 떠나 도착한 서울 근교가 삼각산 아래 우이구곡의 재간정(在澗亭)이었다. 여주 실경화들 다음이 바로 이 <재간정> 그림이다. 이영갑은 전의 이씨로, 진사시와 문과 급제 한성부좌윤 이장하(李長夏)의 손자이다.
그리고 이들 여정에 여주목사를 지낸 박황(朴鎤, 1737~?)이 참여했던 모양이다. 여춘영이 자기 문집에 여호 청심루 유람 기사를 밝혀 놓았다. (同鄭君芳遂榮 任學而希夏 李允一永甲 作黃驪之遊到淸心樓 朴使君鎤頗款恰 : 呂春永, 『軒適集』 卷三) 박황은 1789년 11월 3일 승지에서 여주목사로, 1791년 2월 17일 여주목사에서 승지로 전보되었던 관료이다. (『승정원일기』) 박황이 여주목사 시절에 선유했는지 아니면 목사를 퇴임한 5년 뒤 1796년에 합류했는지 불분명하지만, 정수영 일행의 강 풍류 여정에는 여주 관아의 도움을 크게 받았을 법하다.
 박황은 울산 박씨로 정조 1년(1777) 문과에 급제해, 지평, 대사간 장령을 지내다 1789년 현릉원 이전 천원도감(遷園都監)에 참여했다. 그 후 정조가 신임해 승지로 삼아 곁에 두었던 인물이다. (『승정원일기』, 『정조실록』, 『일성록』, 『홍재전서』) 천원도감에는 여춘영의 친형인 여만영(呂萬永, 1730~?)이 함께 통례로 참여했으니, 박황과 여춘영의 교분을 떠올릴 수 있겠다. 1788년 김홍도와 김응환, 강세황이 금강산 사생 여정 때, 9월 14일 박황은 정란과 함께 장안사를 찾아 이들과 합류하기도 했다. (강세황, 『표암유고』) 이를 종합해 보면, 정수영이 강세황 부자는 물론이려니와 김홍도와 교류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겠다.

 여강과 섬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흥원창>

 《한·임강명승도권》의 그림 순서를 따라가면, 지난번에 살핀 <신륵사>에서 그 상류로 이동해 <흥원창(興原倉)>을 들렀다. 흥원창은 신륵사에서 30여 킬로미터 상류, 여강(驪江)과 섬강(蟾江)이 만나는 남한강의 두물머리에 세운 강원도 원주의 창고이다. 흥원창 주변은 벌써 신라 후기 거돈사나 흥법사 같은 대찰이 들어섰고, 후삼국시대 후고구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치열한 경합지였다.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 강둑 길 새 지명이 인근 섬강 문막의 견훤산성과 연계해 ‘견훤로’이다. 고려시대부터는 평창 영월 정선 횡성 등 강원 중부지역에서 거둔 세곡을 모아 관리했던 조창(漕倉)으로 자리를 잡았다. 조선 후기 조창의 기능이 줄면서 원주의 창고로 남았다.
 두 강물이 만나는 두물머리 모서리에는 삼각형 바위벼랑을 드러낸 해발 245.5m 높이의 자산 자락이 강변 풍경에서 인상적으로 우뚝하고, 그 왼편 여강으로 해지는 일몰 때 노을이 아름다운 명소이다. 산 이름도 저녁노을을 빗댄 보랏빛 ‘자산(紫山)’이라 불린다. 그 정취는 해거름에 맞춰 다시 찾아와 그려보리라 생각하며, 남한강 두 물이 감싼 자산의 인상적인 암산 모습을 중심 삼아 스케치했다. (도 2)
 견훤로 181길에 흥원창 표시판이 설치되어 있고, 정수영의 현지 그림 사진이 걸려 있다. 그림은 수평구도의 강변 풍경화로 싱거운 편이다. 화면 왼편으로 강변에 주름진 바위산 봉우리와 짙은 미점준의 토산이 자산이고, 섬강 입구에 ‘원주하류(原州下流)’라는 지명이 쓰여 있다. (도 1) 그 오른편으로 낮은 산 능선 아래 일정 간격으로 울타리가 설치된 가옥들이 나란하다. 상당히 부감한 시선으로 배열한 마을 스케치이다. 오른편 제일 큰 기와집이 흥원창 관아이고, 마을은 관리들과 창고지기들의 숙소일 법하다. 조창의 기능이 사라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원주의 중요 창고였음을 알려주는 풍경화 기록물이라 할 수 있겠다. 현재는 이들 원조 마을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여서 더욱 그렇다. 

 흥원창을 떠나 다시 남한강 하류로 내려간 곳이 광주 남종의 <소청탄(小靑灘)>과 <수청탄(水靑灘)>이다. <소청탄> <수청탄> 두 그림은 한 폭으로 여겨질 정도로 경계가 모호하다. 특정한 지형의 표현보다, 정수영의 개성적인 전나무나 활엽수 표현이 두드러진 여름 숲으로 구성된 점도 유사하다. (도 1)
 이런 <수청탄> 화면 왼편 위에 강관은 “크게 보면 심계남의 <풍우귀장도>의 필의가 있다(大有 沈啓南 ‘風雨歸庄圖’ 筆意)”라 쓰며, 명나라 최고의 문인화가 심주(沈周)를 빗대었다. 어눌한 솜씨의 정수영에겐 상찬인 셈이다.
 이곳은 지금의 광주시(廣州市) 남종면(南終面) 수청리로 여주읍내서 하류로 4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조금 더 내려가면 ‘소내’라고 일컫는 우천(牛川)이고,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너른 폭의 두물머리 양수리이고 팔당에 이른다. 수청탄(水靑灘)은 ‘푸르레 여울’로 ‘큰 청탄’이라 불리며, 수청1리이다. 소청탄은 그 아래 마을 ‘작은 청탄’으로 수청2리에 해당한다, 두 마을 강변 길은 ‘굽은 목’이라는 뜻의 구항동(拘項洞)이다.

 광주 남종 남한강의 <수청탄> <소청탄>

 여춘영의 별장이 있던 <수청탄>의 수청1리 강변에는 ‘수청호’라는 배가 정박해 옛 나루터의 정취가 간직되어 있다. 팔당호가 조성되면서 강건너 마을과 교통하는 나루터를 살려놓은 배려이다. 수청호 선장에게 배를 타고 수청탄과 대탄의 풍경을 촬영하고 싶다고 하니, 처음에는 광주시에서 운영하는 배로 주민들만 이용하게 되어 있다며 완강히 거절하였다. 명함을 건네고 정수영의 실경 그림을 보여주며 거듭 부탁해보니 배를 태워주었다.
 배를 타고 강 가운데 서보니 너른 수면에 너울대는 산세에 쌓여 푸근한 형국이다. 한강,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이 그렇게 전개되어 있다. (도 3) 북쪽 양평 국수리, 대심리 방향으로는 부용산, 형제봉, 매봉산이 청계산과 용문산으로 이어진다. 남쪽 수청리에는 검천리, 귀여리, 금사리에 둘러싸인 정암산이 우뚝하다. 귀여리에는 선조 시절 문장가로 꼽히던 문신 상촌 신흠(象村 申欽, 1566~1628)의 신도비와 묘역이 있고, 그 아들로 선조의 부마였던 동회 신익성도 ‘귀여(歸歟)’라는 아호를 썼다. (이태호, 「17세기 인조시절의 새로운 회화경향」-동희 신익성의 사생론과 실경도, 초상을 중심으로, 『강좌미술사』 31, 한국미술사연구소, 2008.) 남종면과 금사리가 있는 퇴촌면 일대는 남한강 하류의 풍부한 물과 강언덕의 우거진 땔감을 기반으로 조선시대 왕실백자 도요지가 집중된 지역이다.
 마침 선장은 팁으로 강변 바위벼랑에 새겨진 글씨가 있다며, 예서체로 ‘石壇’이라 새겨진 곳까지 친절히 안내해주었다. (도 4) 석단의 의미로 볼 때, 제의(祭儀)와 관련된 공간이었던 모양이다. 옛 문헌과 현재의 기록을 뒤졌으나, 전혀 알려지지 않은 처녀지인 셈이다.

  정수영의 <수청탄> 그림에서 오른편 바위언덕에 기와집이 유난히 도드라지게 보인다. 이 독립가옥 한 채가 ‘헌적별업(軒適別業)’이라 밝혔듯이 정수영의 절친인 헌적 여춘영(軒適 呂春永, 1734~1812)의 별장인 셈이다. 여기서 정수영은 평상복 차림의 여춘영 손을 끌어당겨 배에 태웠고, 다시 청심루(淸心樓)가 있는 여주로 돌아왔다.
 현재 수청1리에는 여춘영의 고조할아버지 ‘여성제(呂聖齊, 1625~1691) 묘역과 신도비’(수청리 산101-10, 광주시 문화재 기념물 제8호)가 전한다. (도 5) 여성제의 자는 희천(希天), 호는 운포(雲浦)이고, 본관은 함양이다. 당쟁이 심했던 숙종 시절 서인 소론계 문신으로 영의정에 올랐으며, 초서를 잘 쓴 서예가로도 유명했다. 마을 안길에 문화재 안내표시판이 있고, 신도비의 제명 전서는 여성제의 글씨이다. 비문은 영의정을 지내던 남구만이 지었고, 유상운(柳尙運)이 단정하게 썼다.
 수청1리 254-2에 여성제의 생가터가 있었으며, 이곳이 양자로 들어온 여춘영의 별장이었을 것이다. 수청리는 여성제의 후손들 여씨 집성촌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앞서 발견한 ‘석단’ 바위글씨는 벼랑 아래가 물에 잠겨 단정할 수 없지만, 여씨 집안과 관련이 있을 거라 짐작된다. 그런데 가옥과 밭 사이에 방치된 신도비나 묘소가 잘 말해주듯이, 현재 마을에 여씨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한다. 여운영이 이 집안의 후손이다. 

 배를 타고 수청탄과 주변 산세를 확인하며 강변 풍경을 스케치하였다. (도 6) 수청1리와 2리를 한 화면에 연결했고, 수청1리에 현재 광주시 문화재로 지정된 여성제의 묘역과 신도비를 화면에 넣었다. 또 포구의 정자나무와 여춘영의 별장을 표시했고, 선장이 알려준 석단 바위글씨까지 덧붙여 그렸다. 그려보니 정수영은 배에서 본 이들 완만한 산세의 흐름과 강변 풍경 그리기는 평범해서인지, 별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한·임강명승도권》의 실경도 글과 그림의 순서에 따르면, 정수영 일행은 여주 청심루에서 여흥을 즐기며 <여주관아>를 그렸고, 대탄(大灘) 이상사(李上舍) 집을 거쳐 삼각산 아래 재간정에 이르렀다. ‘상사’는 생원시나 진사시에 급제한 성균관 유생을 일컫는다. ‘이상사’는 문과나 관직을 포기하고 대탄에 은둔한 문인이었을 것으로, 혹여 이영갑과 인척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수청리 맞은편 양평 대심리 강변이 ‘한여울탄’ 대탄이다. 이상사의 집이 있던 대심리 대탄 강변에는 지금도 별장 마을이 여전하다. 두 개로 나뉜 대하섬이 강 가운데 떠서 주변 산세를 끌어 앉는, 아주 너른 호수 같은 풍광이 전개된다.
 정수영은 이곳 풍경을 그리지 않았으나, 수청리 동쪽 인근 마을 운심리 언덕에서 굽어보니 대탄 대하섬과 너른 수면 위로 솟은 용문산과 그 능선이 한 폭의 산수화답다. 9월 비구름이 오락가락하니 더욱 절경의 운치를 더해준다. 5월 답사 때와 마찬가지로 옆으로 긴 화면에 여러 점 사생해 두었다. (도 7) 멀리 용문산의 뾰족한 주봉이 유난하다. 용문산은 어디서 보아도 눈에 띄는 남한강의 으뜸 형상이라 할 수 있다.

 다음에는 그 용문산을 여주호 주변에서 보겠다. 정수영은 일행과 함께 남한강을 거슬러 여주에서 처음 만난 <고산서원>과 <여주관아와 청심루>를 그렸고, 수청탄과 대탄(大灘)에 내려왔다가 다시 찾은 <여주읍치> 장면을 사생했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