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석의 사진살롱 23 – 같지만 다른 사진역사책
10/10/2019
/ 박주석

최인진이 번역한 Beaumont Newhall의 책 『세계의 사진사』 1999년 개정판 표지

1980년대 초반 한참 사진 공부에 매달릴 때의 일입니다. 당시 한 대학의 사진학과에 다니면서 사진에 관한 이론과 작가들의 작업세계에 관심을 갖고 이런 저런 책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진학 교과서와 참고 서적들은 카메라와 렌즈의 구조와 조작법, 현상과 인화의 방법과 기술, 기타 액세서리 그리고 촬영 기법 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역사와 미학 등에 관한 책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대부분의 기술서 앞부분에 간략한 사진의 역사와 작가에 대한 소개가 전부였습니다. 몇 권 있었지만 내용 파악이 어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사진의 가치 평가가 기술적 완성도의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당시 사진의 역사나 미적 가치 그리고 세계 사진의 트렌드를 알려면 외국의 서적을 봐야했습니다. 당시 연세가 있었던 임응식 선생이나 이해선 선생 같은 원로들은 왜정 때 교육을 받았던 분들이라 일본어가 익숙했기 때문에 『아사히카메라』나 『마이니치카메라』 같은 일본 잡지를 통해 정보를 습득했습니다. 그보다 조금 아래 광복 이후에 교육을 받은 세대는 영어 교육을 받았고 미군을 통해 영어로 된 미국 잡지들이 들어와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American Photography』 혹은 『Popular Photography』 같은 잡지를 통해 사진을 공부했습니다. 영문과 출신인 육명심 선생이나 강운구, 주명덕 선생 등이 대표적인 분이었습니다.

한국말로 쓰인 이론 책이 몇 권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나온 책은 Beaumont Newhall이 쓴 『The History of Photography』 3판을 번역한 최인진 선생의 『세계의 사진사』란 책이었습니다. 1972년에 <서문당>이란 출판사의 문고판 ‘서문문고’ 시리즈 263호로 나왔습니다. 1978년에는 포토저널리스트로 유명한 Andreas Feininger의 책 『The Creative Photographer』를 번역한 안준천 선생의 책 『사진예술개론』이 <신진각>이란 출판사에서 나왔고, 같은 해에 『눈으로 보는 사진의 역사』 (사진과평론사, 1978)가 ‘사진과평론사 사진선서’ 시리즈 1로 나왔습니다. 이 책은 최병덕 저서로 나왔는데, 사실은 유명한 스위스 출신 사진사 연구자인 Helmut Gernsheim이 쓴 『A Concise History of Photography』를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저술과 번역이 혼재하던 시절의 해프닝입니다. 

 문제는 세 권의 모두 영어의 직접 번역이 아니라 일본어 번역본의 중역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차라리 원전이 일본어인 책을 번역했다면 좀 나았을 텐데,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 일본책 번역출판은 금기였습니다. 일본 문화에 대한 개방은 1991년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번역서를 재번역하면서 서양의 원전 번역서로 내놓은 것이었습니다. 모두 중역이어서인지 인명의 표기도 그렇고 문장의 구성도 일본식이어서 원 저자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또 당시 번역자들의 사진에 대한 지식도 한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사진 동네에만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정치, 경제, 사회, 청학, 문학 등 다른 분야에서도 일본어에 익숙한 원로 학자들이 펴낸 서양서 번역본은 일본어 번역의 중역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표절에 가깝지만 그 시대에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상황에서 우리말로 된 제대로 된 사진 역사서가 1974년에 출판된 일은 당시로는 획기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나마 한국말로 쓰인 사진 역사책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했던 기억이 납니다. 바로 최인진 선생과 육명심 선생이 공동으로 쓴 『한국현대미술사(사진)』 이었습니다. 이 책은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해서 출판한 ‘한국현대미술사’ 연구 시리즈 중 한권이었습니다. 1974년 첫 번째 시리즈로 1. 조각 2. 공예 3. 사진 4. 건축 5. 동양화 6. 서양화 등 총 6권이 나왔고, 다음에 ‘서예’ 편이 나왔습니다. 나중에 이 책들은 <동화출판공사>를 출판사를 통해 대중 판매용으로 재 발간되었습니다. ‘사진’ 편은 도입부터 해방 때까지는 최인진 선생이,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는 육명심 선생이 썼습니다.

정진국이 번역한 Beaumont Newhall의 책 『사진의 역사』 1986년 초판 표지

영어 서적의 직접 번역본이 나와서 원 저자의 뜻을 대체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1986년 정진국 선생이 Beaumont Newhall이 쓴 『The History of Photography』 5판을 번역해서 <열화당>에서 『사진의 역사 : 1839에서 현재까지』란 이름으로 출판한 이후부터입니다. 물론 이 책 또한 저작권 계약 없이 임의로 번역해 출판했습니다. 국내에서 외국 서적의 저작권 보호가 시행되기 이전의 일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중역본들은 1987년부터 국내에 저작권법이 시행되면서 정식 출판 계약을 맺고 다른 이름으로 번역서들이 모두 나왔습니다. 정진국의 번역서는 후에 정식 저작권 계약을 맺고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사족이기는 합니다만 같은 저자인 Beaumont Newhall을 한글로 표기할 때 최인진 선생은 ‘버몬트 뉴홀’로 썼고, 정진국 선생은 ‘뷰몬트 뉴홀’로 표기했습니다. 어차피 서양 사람들에게 말할 때 ‘버몬트’로 하던 ‘뷰몬트’로 하던 한국식 발음으로 하면 못 알아듣는 것은 매 한가지입니다. 괜히 나중에 데이터베이스 검색 시 다른 저자로 나타나는 혼선만 주게 됩니다. 인명이건 지명이건 외국어표기가 일정하지 않으면 같지만 다른 저자이고 다른 책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인력과 돈이 많이 필요한 데이터 보정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사진의 개념이나 작가들의 이름표기도 마찬가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냥 가장 먼저 사용한 분의 표기를 따랐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분야도 같은 상황입니다. 우리 사회가 같이 고민해 보고 합의해야 할 과제입니다.

 

박주석 (명지대학교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