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답사 스케치5-여주 휴류암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두번째
10/09/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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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는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의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등장한 <신륵사(神勒寺)> 그림의 현장을 찾았다. 화가가 배를 타고 강 위에서 보았던 시점과 전경을 부감한 듯 아는 대로 그린 화법의 차이에 대해, 현장스케치를 통해 확인하였다. 이번에 소개하는 <휴류암(鵂鶹巖)> 그림 역시 유사하면서 또 다른 방식으로 그렸음을 점검해보겠다. <휴류암>은 《한·임강명승도권》의 여러 실경도들 가운데 가장 회화적으로 성공한 대표 그림으로 꼽을 만한 명작이다. (도 1) ‘휴류’는 ‘부엉이’이니, ‘휴류암’은 부엉이바위라는 뜻이다.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몇 년 전 포천지역 임진강 답사에서 연천 미수나루의 강변 부엉이바위와 그림 모양새가 흡사해 <휴류암>의 실경으로 잘못 단정했다. (이태호, 「새로 공개된 겸재 정선의 1742년작 <연강임술첩>」, 『조선후기 산수화전』-옛 그림에 담긴 봄 여름 가을 겨울, 동산방, 2011. ; 이태호, 「새로 공개된 겸재 정선의 1742년작 <연강임술첩>」-소동파 적벽부의 조선적 형상화, 『동양미술사학』 2, 동양미술사학회, 2013.) 이번 기회에 그 오류를 수정해, 여주의 마암(馬巖)이 곧 <휴류암>을 그린 현장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신륵사와 여주지역 답사에서 가장 기쁜 최대 성과이다.

이를 기념 삼아 국립중앙박물관의 2019년 기획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7.23~9.22) 전시장에서 겸재 정선의 <단발령망금강>, 진재 김윤겸의 <극락암> 등을 따라 그리며, 지우재의 <휴류암>을 방작(倣作)하였다. 각진 바위들의 모양새를 그리며 지우재의 필묵 리듬을 익혔고, 배에 딴 인물을 그리자니 실패할 것 같아 ‘내 마음을 담은’ 빈 배로 마무리했다. 화면 상단에 별도로 ‘휴류암 현 여주 마암(鵂鶹巖 現 驪州 馬巖)’이라 써넣었다. (도 2)
신륵사에서 강 건너 남서쪽으로 2km 남짓에 여주 관아터(현재 여주시청과 여주초등학교)가 있고, 그 중간쯤 강변에 말바위 마암(馬巖)이 위치한다. 이 바위언덕 정상에 관아의 옛 남문인 영월루(迎月樓)를 이전해 세워놓았다. 강변 제일 높은 곳이어서 누각의 이름을 따라 ‘달맞이가 아름다운’ ‘영월 근린공원’이 조성되고, 바로 옆에 붙어서 너른 여호(驪湖) 강 위로 여주대교가 지난다.
배를 타고 강에서 올려보거나 여주대교에서 굽어보면, 마암 주변의 강변 바위들 모양새가 정수영이 그린 《한·임강명승도권》의 여주 남한강 그림에서 <휴류암> 분위기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1972년 여름 대홍수 때 무너져 사라졌을 강변의 일부 벼랑과 바위들을 상상해볼 때, 더욱 그러하다. (도 3)

<휴류암>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비스듬하게 내려 구성한 사선 구도이다. 오른쪽 바위 군락을 유난스레 과장해서 표현했다. 뾰족뾰족한 수정 덩어리가 부채살처럼 뻗은 모습이 인상적이고, 그 왼쪽 언덕 능선으로는 여백을 살린 편이다. 그 아래 벼랑 부분에 행서체 글을 써넣었고, 좌우 바위벼랑 사이 옴팍한 강변 공간에 선유 장면을 담았다. 좌우의 바위들에서 사람 같은 이미지들이 간간이 눈에 띄고, 그림 제목과 닮은 부엉이 형태는 없다. <휴류암> 그림의 왼쪽 하늘 부분에는 다른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월루 강관이 “땅은 명승이다. 부엉이는 불길한 새에 해당하는데 지우재는 어찌 이 이름을 썼는가.” 월루가 묻는다. (地以名勝 鵂鶹 禽鳥之惡者 之又齋奚取於斯 月樓問)라고 토를 달았다.
중간 먹의 점선묘에 담묵담채를 가해 입체감을 살린 <휴류암>의 바위형상들 표현에는 어눌하면서도 그림을 즐긴 정수영 화풍의 개성이 물씬하다. 정수영은 마암에 대한 정보는 없었던 듯하고, 그 시절 함께 불리던 ‘휴류암’ 이름은 강관의 지적대로 부엉이가 혐오의 새이어서 후대에 사용하지 않았을까.
이곳 마암 바위벼랑 아래 구멍에는 여흥 민씨 시조의 탄생 설화가 전한다. 말바위 ‘馬巖’이라는 이름은 누런색 황마(黃馬)와 검은색 여마(驪馬)가 출현했다는 전설에 따라 지어졌다. 여주의 옛 지명인 황려(黃驪)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절벽에는 1870년인 ‘경오시월(庚午十月)’ 여주목사 ‘이인응(李寅應)’의 ‘마암(馬巖)’이란 행서체 바위글씨가 남아 있다. (도 4) <휴류암> 그림에 이런 내용을 전혀 밝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정수영은 마암에 대한 정보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 아닌가 싶다.

산수에 사는 인간을 표현하는 합성방식

나는 정수영의 <휴류암>을 따라 모사했고, 배에서 <마암 전경>을 옆으로 긴 화면에 보이는 대로 고정 시점으로 사생해 보았다. (도 2, 5) 정수영의 묘사력이 떨어지는 편이어서 실경과 그림의 비교가 좀 그렇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정수영은 자의적으로 대상을 재해석하고 변형해 표현했다. 강에서 본 수평 시점의 구도이면서, 배가 그려진 옴팍한 강변 모래톱은 상당히 부감시(俯瞰視)로 처리한 듯하다. 또 바위들 구성은 배에서 살짝 올려본 앙시(仰視)로 포착한 방식이어서 눈길을 끈다.
이 같은 다시점(多視點) 합성법은 정수영다운 과장의 필묵법과 더불어 개성적 실경 해석을 드러낸다. 동시에 조선 후기 문인들이 즐긴 소요와 유람의 자연 친화의식과 그 관점을 담은, 당시 화가들의 보편적인 시선이라 할 수 있겠다. 화면에 화가의 위치나 자신의 행위를 그려 넣으며 다시점을 구성하는 일은 산수와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을 그리는 주요 방식이다.

한편 <휴류암> 그림 시점에서, 근래 이전해 복원한 영월루가 보이지 않아, 자리를 옮겨 <마암과 영월루>를 다시 사생했다. (도 6) 여주 관아의 정문으로 강변에 있었던 것임에도, 현재 언덕에 복원한 일도 좋아 보인다. 본래 있던 자리 못지않게 그야말로 최고의 ‘영월(迎月)’, 곧 ‘달맞이’ 공간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한·임강명승도권》의 <휴류암> 그림에는 정수영의 서풍으로 화면의 시작인 오른쪽 위에 ‘휴류암(鵂鶹巖)’ 제목을 쓰고, 선유장면 위로 그림에 대한 발문(跋文)을 적었다. 목선의 오른쪽과 위로 나누어 쓴 글은 여행 시기, 뱃놀이, 동행자 등 《한·임강명승도권》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사방관을 쓴 사람이 여헌적(呂軒適)이다. 관만 쓰고 나를 강 머리에서 환송하기에 손을 잡아채 배를 태웠다. 사공을 불러 출발을 재촉하였다.
이 바위를 지날 때 문득 줄 소리와 피리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곳으로 배를 대니 한 늙은 어부가 강가에 좌정해 낚시를 드리운 채, 손으로 해금을 타며 입으로 풀잎피리를 불고 있었다. 말을 뜨고 술을 보내니 배에 동승하게 되었다. 대탄(大灘) 이상사(李上舍)의 집으로 향했다.
이 여행은 (丙辰, 1796년) 여름이었다. 동갑내기 벗 이윤일(李允一)과 임학이(任學而)가 참여했다. 거슬러 가다 청심루(淸心樓)에서 노닐던 때이다.
冠者卽呂軒適也 只着冠送余江頭 携手上船 喚篙師催發.
過此岩時 忽聞有絃管聲 尋聲來泊 一漁翁坐磯垂釣 手彈嵇琴 口吹葉笛 接語饋酒 遂與之同舟 向大灘李上舍家.
此行 丙辰夏. 與同庚友李允一任學而 溯流於往遊淸心樓時也.

이 글로 보면 1796년 여름 정수영은 동갑내기 윤일 이영갑(允一 李永甲, 1743~?)과 학이 임희하(學而 任希夏, 1745~?) 두 문인 친구들과 함께 남한강을 선유했다. 《한·임강명승도권》의 그림 순서를 따라가면, 지난번에 살핀 <신륵사> 이후 상류인 <흥원창(興原倉)>을 들렀다가 다시 남한강 하류로 내려갔다. <소청탄(小靑灘)>과 <수청탄(水靑灘)>을 거쳐 다시 청심루(淸心樓)가 있는 여주로 돌아왔다. 수청탄 ‘헌적별업(軒適別業)’에서 만난 일상복차림의 헌적 여춘영(軒適 呂春永, 1734~1812)을 끌어당겨 배에 태웠고, 여주 마암에서 해금을 연주하며 풀잎피리를 부는 어부를 발견하고 선유에 합류시켰다. 계획 없이 뱃놀이를 그렇게 즐긴 모양이다.

여기 발문에 거론된 인물들이 모두 배에 등장한다. 미숙한 대로 찬찬히 그리며, 인물의 성격을 실감이 나게 살려내었다.
한가운데 뱃전에 걸터앉아 입에 풀잎피리를 불며 두 손으로 해금을 연주하는, 맨상투의 어부 모습이 선계(仙界)의 귀인다운 풍모이다. 그 왼편으로 유일하게 사랑채 복장으로 사방관(四方冠)을 쓴 여춘영이 연주자를 향해 좌정해 있고, 오른편으로 갓을 쓰고 대좌한 이가 정수영일 법하다. 세 사람보다 10년 전후 연상인 여춘영을 약간 강조한 점이 눈에 띄며, 그 앞에 주병과 술잔이 놓여 있어 좌장의 위상을 보인다. 정수영 자신도 다른 인물들에 비해 약간 진한 먹 선으로 크게 그린 편이다. 이들 좌우에 각각 갓을 쓴 두 사람은 임희하와 이영갑인 듯, 위계적으로 조금 작고 흐릿하게 그려져 있다. 긴 장대를 밀며 배에 앉은 사람들을 등지고 강 물결만을 물끄러미 굽어보는, 뱃머리의 옥색 바지저고리 차림 뱃사공의 표정도 또한 선인답다. (도 7)
이들은 그림 상태로 모두 대탄(大灘) 이상사(李上舍)의 집으로 향했다. 양근(楊根) 대탄(大灘)에서 다시 여주 청심루로 돌아온 모양이다. 《한·임강명승도권》에는 <휴류암> 그림 뒤로, 지난 호에 살펴본 <신륵사 동대 동적석>와 <신륵사 동대>, 또 <여주읍치> 장면을 연달아 다시 그려 놓았다.

다음 호에는 <휴류암>을 그리기 전에, <흥원창>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광주 <수청탄>과 <소청탄>에 들르는 장면을 소개하기로 한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